(73)강릉의 명소-<참소리축음기ㆍ에디슨ㆍ영화박물관>
축음기,백열전구,토스터,영사기,전화기,등사기,선풍기,전기난로,오븐,재봉틀,커피메이커,헤어컬링기,와플기,전기후라이팬,발전기,강화시멘트,베니어판,고속도로시멘트,축전지,고무절연체,전압테스트기,자동복사기,녹음기,유아용변기의자,벽시계,뮤직박스,청소기,믹서기,말하는인형,세탁기,다리미,손전등,전기를 이용한 배터리 자동차
. . .우리 생활에 익숙한 이 물건들은 모두 에디슨의 발명품이다.
최고의 발명가 에디슨은 평생동안 1,093건의 발명품을 만들었다. 그의 발명품은 인류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1847년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호기심이 많았다.초등학교 1학년 때 입학한 지 얼마되지 않아 1+1=2라고 가르치는 선생님께 되물었다.
"점토 덩어리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한 덩어리인데 왜 둘이죠?"
이밖에도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물고기는 왜 물에 빠져도 안 죽나요?"
"나팔꽃의 씨는 왜 꽃이 되나요?"
선생님은 에디슨의 특별한 질문에 답을 해 주기보다
"네 머리는 썩어 빠졌어!"
라고 면박을 줬다.
결국 3개월만에 학교를 그만둔
에디슨은 어머니의 지도로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고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눈길을 돌리며 백과사전을 읽으며 호기심을 해결했다.
열차 타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12살 에디슨은 그랜드트렁크 철도 회사에 판매원으로 채용된다.열차 내에서 과자나 신문ㆍ잡지를 파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날,판매할 물건을 싣느라 열차를 놓친 그가 허겁지겁 승차용 난간에 메달려야 했다.발판을 짚지 못하고 미끄러지자 차장이 손을 뻗어 머리를 잡았지만 미끄러졌다.차장이 날렵하게 귀를 잡아 당겨 목숨은 건졌으나 고막이 찢어져 청력을 상실한다.
보통사람 같으면 13살에 당한 불행에 좌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디슨은 잡음이 들리지 않아 집중 할 수 있었기에 많은 발명품을 만들수 있었다고 했다.
15살에 에디슨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을 경험한다.
신문을 팔던 그가 선로교체 작업을 위해 잠시 정차한 마운트클레멘스역에서 선로쪽으로 기어가는 2살된 역장의 아들을 발견한다. 기관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은 상황,그때 에디슨이 반대쪽으로 몸을 날려
아기를 구해낸다.
그때 역장은 당시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인 전신기술을 가진 기사였다.
"생명의 은인인 네게 내가 가진 기술을 전부 가르쳐 주마."
에디슨은 그 기술을 바탕으로
21살에 최초의 발명품인 '자동투표기'를 발명했다.
이 기기를 쓰면 누가 안건에 반대하는지 찬성하는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점을 싫어하는 의원들 때문에 의회는 채택하지 않는다.
에디슨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기술이 바로 뛰어난 발명이다"
23살에 그는 최신 전신기술과 타자기를 조합해 숫자와 문자를 함께 표시하는 만능인쇄기를 발명했다.미국 금융 회사들이 너도나도 성능이 뛰어난 주식시세 표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다.이 특허기술은 당시 최대 통신사 웨스트유니언의 제네럴 레퍼트사장이 4만 달러(현 시세 40억원)에 샀다.
이때 일화가 있다.난생 처음 서명한 계약서를 들고 후줄근한 낡은 셔츠에 굳은 얼굴로 은행을 찾은 그를 우습게 보고 직원이 지급 거부를 한 것이다.그가 레퍼트 사장에게 항의하자 은행직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현금 4만 달러를 내줬다. 1달러부터~20달러 짜리 소액 지폐로 바꾼 돈다발은
자그마치 1미터가 넘었다. 이 돈으로 연구소 겸 공장을 지었다.GE(제네럴 일렉트릭)의 시작이다.
24살,그는 여름날 오후 연구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16살 소녀 메리에게 마음이 끌려 결혼했다. 이듬해 첫 딸이 태어나고 연이어 아들 둘을 얻었다.
하지만 평범한 메리는 지식이나 교양에는 관심없고 남편과 춤추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에디슨은 어머니처럼 메리와 자신의 연구나 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그렇지만 메리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연구에만 전념하는 남편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깊은 우울에 빠졌다.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알콜에 의존하며 지냈다.어떤 날은 초코릿 한 상자를 통째로 먹기도 했다.
두 아들 역시 자신의 뒤를 잇기를 기대했으나
아들들은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농업에 종사하며 아버지와 거리를 두었다.이는 에디슨이 공교육에 대한 반감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에 한몫을 했다고 본다.
결국 메리는 29살 짧은 생을 살고 죽었다. 사인은 장티푸스였다. 젊은 날의 토머스 에디슨은 발명가로서는 명성을 얻었으나 자상한 아버지나 남편은 못 되었던 것 같다.
첫번째 아내 메리가 죽고 2년 후인 39살에 에디슨은 발명가 친구 길랜드 부부의 소개로 재혼한다. 상대는 19살 마이너 밀러였다.오하이오주의 농공기구 제조회사를 경영하는 유복한 집의 딸로 유럽에서 1년간 유학하고 돌아왔고,예술ㆍ음악ㆍ역사ㆍ문학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에 잘 통했다. 딸 1명 아들 2명을 더 얻었다. 아들은 후에 해군성 부장관을 하고 뉴저지 주지사로 당선된다.막내 아들은 MIT공대를 졸업하고 정밀기계 사업을 했다.
에디슨은 1931년 10월 18일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강릉 참소리축음기ㆍ에디슨ㆍ영화박물관에 가면 에디슨의 수많은 발명품을 볼 수 있다. 발명을 위한,발명에 의한,발명의 삶을 살았던 에디슨.그가 얻은 1,093종의 특허는 거의 15일마다 한번 꼴로 특허를 받았다는 계산이 된다.
에디슨의 발명품을 찾아 55년간 60개국을 찾아 다니며 수집한 손성목 관장 역시 대단하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고 축음기로 음악을 들려주었던 어머니를 5살에 잃었다.어머니에 대한 흔적을 찾고그리움을 달래주었던 수단은 피아노와 전축이었다. 3대 독자 아들이 집에서 틀어박혀 침울하게 있자
아버지는 어머니가 쓰던 피아노와 전축을 팔아 버렸다.
집안 어디에도 없는 어머니의 흔적 때문에 매일 슬픔과 우울함에 빠져 서럽게 우는
6살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포터블 축음기<콜롬비아G241>를 선물했다.
14살 손성목은 삼촌이 준 고장난 축음기를 밤새 씨름한 끝에 되살려 놓았다. 그날 이후 다시 한번 매료된 축음기 소리에
감동받아 평생 축음기 소리와 음악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삶을 꿈꾼 것이 오늘날 박물관장이 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박물관에는 '시간'을 저장하는 축음기를 비롯해 귀한 수집품이 셀 수도 없이 많다.헨리 포드가 만들어 에디슨에게 선물한 T자동차, 세계에서 가장 긴 댄스 오르간,1890년 독일에서 만든 배럴 오르간은 아직도 음악을 들려주고,1899년 미국에서 만든 레지나스타일 뮤직박스의 청아한 소리도 들을 수 있다.1850년 독일에서 만든 폴리폰은 호두나무 몸체와 시계가 부착된 음악상자에서 나오는 레코드의 맑은 음색의 소리도 들을수 있다. 정말 놀랍다.
영화박물관에 가면 영화의 역사가 담긴 수집품과 찰스채플린이 주연한 영화도 볼 수 있다. 정말 하루종일 봐도 다 못 본다. 나는 4번이나 갔는데도
갈 때마다 새롭다.
경포호수 옆에 있는 강릉의 귀한 보물 <참소리축음기ㆍ에디슨ㆍ영화박물관>에 가면 에디슨의 열정과 손성목 관장의 꿈을 함께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