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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전제田制」, 「군제軍制」
안승택(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고민정(강원대학교 사학과 강사)
1. 체제와 구성
제2권은 「전제(田制)」와 「군제(軍制)」에 관한 논의로, 제5권에서 과거제도의 운영상에
나타난 폐단을 바로잡고자 집필했던 「과제(科制)」와 함께 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부분이
이다.
「전제」는 역대 토지제도의 변화 중에서 참작할 만한 내용을 선별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중요한 부분은 별도의 항목으로 내세워 논의하였다. 그와 더불어 당시 토지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운영에 대한 개선책도 제시하였다. 제8권 「농가총람(農家總攬)」은
저자 우하영이 농법에 관한 운영 방식에 대해 논의한 것인데, 「전제」와 더불어 살펴본다
면 우하영의 농업 사상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군제」는 목록에서 ‘병제(兵制)’라 하였으나, 권수제(卷首題)에서 「군제」라 하였기 때문
에 이를 따라 「군제」로 부른다. 「군제」에서도 역대 군사제도의 변화 중에서 참작할 만한
내용을 선별적으로 기술하고,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항목으로 내세워 논의하였다. 그
와 더불어 당시 군사제도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전제」와
「군제」는 그 구성과 전개 방식에서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우하영은
18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실학자이다. 그는 퇴계 이황 아래 수학했던 우성전(禹性傳,
1542~1593)의 직계손이었고 대대로 수원 지역에 세거했기 때문에 기호남인계열에 속한
다. 일찍이 조부에게 학문을 배워 과거 준비에 매진하였으나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평생
국가 경영에 필요한 개혁론에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구상했던 개혁
의 구체적인 내용이 천일록으로남겨지게되었던것이다.
천일록에서「전제」와「군제」는제도의개혁에관한사안을다루고있다는점에서공통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동일한 서술 형식에 따라 병렬식으로 구
성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중국 및 일본의 제도와 우리나라의 각 시대별 제도의 변
천을 함께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분량 또한 매우 방대하다. 따라서 이를 분리하여 각각
을 독립된 장으로 구성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별도로 구분하지 않
고 하나의 권수로 구성하여 그 상관 관계를 강조하였다.
이에 대한 저자 우하영의 견해는 「군제」의 첫머리에서 확인된다. 우하영은 군사 제도를
논하는 첫머리에서, 대표적인 병법서로 불리는 무경(武經)의내용중 태공(太公)이무
왕(武王)의 물음에 답한 부분을 인용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전쟁에서 필요한 공격과 방
어를 위한 무기는 모두 농기구에 갖추어져 있고, 계절마다 해야 하는 각기 다른 농사일은
군대를 훈련시키는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우하영은 병법이 농업에 감추어져 있
고 농업에 병법이 깃들어 있다고 보아, 군사 제도와 토지 제도가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토지제도의 주요 내용과 개혁 방안을 제시
한 뒤, 이어서 군사제도에 대한 내용을 서술한 것이다. 이처럼 토지제도와 군사제도의 유
기적 상관성을 강조한 우하영의 견해는 실학자의 태두로 칭해지는 반계(磻溪) 유형원(柳
馨遠, 1622~1673)이 주장했던 농병일치설(農兵一致說)과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전제」와 「군제」의 기술상에서 보이는 특징은 ‘부록[附]’의 활용에 있다. 사전적 정
의에 따르면, 부록은 서적의 본문에 처리하기 부적당하거나, 따로 모아 두는 것이 독자에
게 편리한 것들을 서적의 끝부분에 수록하거나 별도의 책자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런
데 우하영은 이와 달리 특별히 강조할 내용이나 자신의 견해를 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될 때 ‘부록’을 이용하고 있다. 이는 19세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 백과사
전식으로 편찬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변증설(辨證說)’이라는
다소 낯선 서술 항목을 설정했던 것처럼, ‘부록’의 이용은 우하영만이 가졌던 독특한 기술
방식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겠다.
2. 전제(田制)의 주요 내용과 서술상의 특징
「전제」는 중국 한나라의 조조(鼂錯)가 지은 <조를 귀히 여김을 논하는 소(論貴粟疏)>를
발췌하여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상소문은 조선 시기 학자들의 저술에서도 간혹
인용되어 왔는데, 『천일록』에서의 인용이 그 중 긴 편에 해당한다. 취석실은 이 중 농업의
영락과 상업적 이익 추구의 폐단을 대비시키는 내용을 중심으로 추린 뒤, 그에 대한 자신
의 입장을 서술함으로써, 「전제」의 서론으로 삼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천일록』을 저
술하는 취석실의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론에서 조조의 상소를 길게 인용한 것은, 물론 그의 논의에 합리성이 있다고 취석실이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조의 논설이 군사ㆍ식량 대책을 다루는
꾀는 있지만, 어진 정치를 펼치기 위해 세금과 토지 문제를 풀어가는 정책 원리의 근본에
대한 이해에는 미치지 못하였음을 비판하였다. ‘나라가 있으면 땅이 있고, 땅이 있으면 농
사가 있으며, 농사가 있으면 세금이 있는 법’이라며, 세금을 많이도 적게도 걷지 않고, 그
경계를 바로 하여 공정하게 걷는 일에 다스림의 근본이 있다는 취석실의 주장은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도 큰 울림이 있다. 역대의 토지제도에 대한 「전제」의 긴 서술이 이 비판으
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이 서론에서
취석실은 중국의 제도를 짧게 다루고 조선의 제도를 길게 서술한 까닭도 밝혀놓았다. 중
국과 조선 사이에 존재하는 산천과 풍속의 차이, 그리고 조선에서 이미 훌륭한 제도들이
마련되어 왔음이 그 이유로 거론된다.
본문은 ① 고대 중국의 토지제도, ② 조선의 토지제도, ③ 주제별 세부 고찰, ④ 취석실 자
신의 농업정책론 등의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③은 당대 제도와 논의의 변
화 과정을 나열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취석실의 의견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다.
따라서 그 편집의 방향으로부터 취석실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
다. ④는 취석실 자신의 의견을 논술한 것으로, 이로부터 그의 관심과 문제의식, 해결 방
안 등을 직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제도와 논의를 객관적으로 소개한 내용(①~③)과 취석실 자신의 의견
을 논술한 내용(서론 및 ④)이 절반 정도씩을 차지하여 균형을 이루고 있음이 확인된다.
같은 권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군제」 편이 조선의 제도를 소개한 데에 이어 중국 및 일본
의 제도를 서술하는 것과 달리, 「전제」 편이 중국의 것을 먼저 설명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
다. 한편 ①~③에 나타난 사실(史實)의 열거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취석실 자신의 논
지를 전개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라는 점은 ④를 읽음으로써 확인된
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① 중국의 토지제도’에 대한 서술은 ‘주제정전(周制井田)’과 ‘역대제치(歷代制置)’ 등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서술 내용은 소략하며 그 자체가 새로운 내용도 아니지만, 오히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취석실의 입장은 분명히 드러나는 편이다. ‘주제정전’은 주나라의 정
전제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이상적인 토지제도로서 정전제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운영을 어떻게 하는지가 설명되어 있다. 특히 후자의 운영 방안에 대한 서술에서, 마을
직임[里胥]들이 들에 일하러 나가는 농민들을 감독하고 독려할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취석실이 자신의 농업 정책을 제기하면서 주요하게 거론하는 농관의 역할에 대한 하나의
원형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대제치’에서는 정전제에서 구축된 이상적인 농촌 질서가 변화ㆍ타락하게 되었던 계기
와 과정을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진(秦) 나라 들어 온 천하가 한 명의 천자(天子)를 섬기
게 되면서 정전제가 폐지되고 토지 사유가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빈부의 격차와 세금
의 무겁고 가벼움에 대한 논의가 나타나게 되었고, 군자는 이를 부끄러운 일로 여겼으나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는 것이 취석실의 관점이다. 특히 세금 제도는 결국 토지를 기
준으로 매기는가, 사람을 기준으로 매기는가의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다는 취석실의 논리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② 조선의 토지제도’에 대한 서술은 ‘해동전제(海東田制)’, ‘여제(麗制)’, ‘국조전제(國朝
田制)’ 등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해동전제’는 고려왕조 성립 이전의 토지제도
를 다루었는데, 상고할 내용을 찾지 못한 듯, 백제 다루왕이 벼농사를 처음 가르쳤다는 한
줄의 서술에 그쳤다. ‘여제’는 고려 시기의 토지제도에 대한 설명이다. 태조의 십일세법
(十一稅法) 제정, 경종대 이래 전시과(田柴科) 제도의 창설과 그 폐단 발생으로 인한 사
전화(私田化) 현상, 고려 말기 화재로 토지대장[田籍]이 불타버림으로써 더 이상 토지제
도의 근간을 유지하기가 곤란해진 상황 등을 설명하고 있다. 취석실이 줄곧 양전(量田)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마지막 서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결
국 고려왕조의 마지막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취석실은 전시과 제도 아래 경기 지역
의 특수성에 대한 조준의 상소를 길게 인용하였다. 전체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취석실이
고려의 토지제도에서 주목하고 또 강조하려는 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국조전제’에서는 조선왕조에 들어서 토지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각 임금 별로 구
분한 후, 연도를 기록해가며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의 한 축은 국가에 의한 토지측량 사
업인 양전 사업의 역사이며, 다른 한 축은 조세와 공물을 걷는 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에 대한 역사이다. 대개 전자의 양전 사업에 대한 서술은 언제 어느 지역에 양전을 실시하
였다는 기술적인 기록에 머무는 반면, 후자와 관련해서는 어떤 사건과 논의, 실질적인 대
책과 제도 변경이 있었는지를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크게 구분해서 보자면, 조선 전기의 상황에 대한 서술은 조세제도의 변화 과정을 크게 ‘전
시과 제도’, ‘지역별 토지 등급의 설정’, ‘추성손실(秋成損失) 제도의 변천’ 등을 중심으로,
결부법의 시행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 후 조선 후기의 상황에 대한 설명은
‘대동법 도입 논의’와 ‘그 시행 과정에 대한 서술’이 대종을 이루며, 공시인(貢市人)의 폐
단에 대한 서술로 끝을 맺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③ 주제별 세부 고찰’은 ‘부공제(附貢制)’와 ‘부명석제의(附名碩諸議)’의 두 부분으로 이
루어졌다. ‘부공제’는 앞의 ‘국조전제’ 뒷부분에서 대동법의 시행 과정에 대해 서술한 후
공시인의 폐단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되었던 내용으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이다. ‘국조전
제’의 대동법 시행 과정 설명이 주로 부과와 부담의 내역을 정하는 논의와 그 변화 과정을
서술한 데에 비해, ‘부공제’에서는 이 일을 담당하는 인적ㆍ조직적 기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구분은 모호한 면이 있고, 이에 따라 실제 서술 내용 역시 논리 구성은 약
간 완성도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의식은 곡진함이 확연히 드
러나므로 이 점을 중심으로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부명석제의’는 정암 조광조의 공물 감축 및 방납 폐단 논의로부터 시작하여, 조식, 류성
룡, 이이, 성혼, 이수광, 송시열, 신완, 남구만 등 저명 석학들의 공물제도 개혁 및 대동법
시행에 관한 논의를 열거하고, 필요에 따라 관련 사실(史實)과 취석실 자신의 논평을 일
부 덧붙이는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취석실이 서애 류성룡의 “공물을 폐지하고 각 도
별로 경지 면적에 따라 일괄적으로 곡물로 납부토록 하며, 국가에서 필요한 물자는 직접
구매토록 하자.”는 논의에 대해, ‘그때 그와 같이 했다면 쌀도 마련되고 백성도 소생하며
이견도 마침내 잠잠해졌을 것’이라는 논평을 달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결국 상업의
진흥책이 되기도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④ 취석실 자신의 농업정책론’을 다룬 내용은 ‘부록(附錄): 부농정(附農政)’이라는 제목
아래 저술되었다. 이 ‘부농정’ 편은 「전제」에 관한 서술에서 내용이 가장 많을 뿐 아니라,
취석실 자신의 견해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이면서, 앞에서 열거된 사실(史實)들을 근거
로 삼아 「전제」의 내용 전체를 논리적으로 정리한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내용 전체를 요
약하는 일은 이 해제에서 할 일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간략히 몇 가지 특징적인 면모를 정
리해서 서술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삼고자 한다.
첫째, ‘부농정’ 편에서는 국가적 토지제도ㆍ조세제도의 기틀을 어떻게 갖출 것인가에 대
한 거시적인 논의로부터 시작하여, 진전(陳田)과 기전(起田)의 처리를 포함하는 엄격하
고 공정한 양전 사업 및 과세의 필요성, 고을 단위 수령(守令)의 직무와 역할, 마을 단위
농관(農官)과 인장(隣長)의 직무와 역할, 고을과 마을 사이의 적절한 상호작용 체계 구축
방안, 일없이 놀고먹거나 떠도는 자 및 이들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필요
성, 적절한 농사 기술의 개발ㆍ도입과 현장 지식을 담은 새로운 농서(農書) 편찬의 필요
성 등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 농촌 사회를 소농 중심의 사회로 재편하는 방안을 다양한
고사와 사실을 동원하여 제시하고 있다.
둘째, ‘부농정’ 편에서는 양전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단지 임기응변적인 방책이
아니라,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틀어쥐는 방안으로부터 사회 개혁을 추진하려는 취석실의
사고 체계가 잘 드러난다.
셋째, 마을 단위 직임, 특히 농관의 임명과 직무 등에 관한 서술을 통해, 19세기 농촌 사회
를 새롭게 재창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향촌 사회의 실정에 해박한 향촌 유생에게 부여
하려는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넷째, 조선 사회 내에서의 지역적 차이(특히, 경기 지역 농촌의 어려운 실정에 대한 강조
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에 주목하는 설명을 통해, 지방마다의 구체적인 현실 조건의
차이를 지역 사회 자체 역량 강화를 통해 타개해 나가려는 취석실의 관점이 확인된다.
취석실 우하영에 대한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그를 지주 중심의 농업 개혁론을 전개한 18
ㆍ19세기 향촌 지식인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전제」, 특히 ‘부농정’ 편의 서술을 통
해 우리는, 그의 사상적 준칙이 소농 중심의 전면적인 사회 개혁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철두철미한 문제의식이 전일적인 농업ㆍ농촌 개혁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취석실은 그저 농촌 사정에 밝은 ‘향촌 지식인’이 아
니라, 농촌 현장이라는 견지에서 조선 후기 사회 현실을 꿰뚫어 보고 있던, 누구보다 우뚝
선 ‘개혁 사상가’였다고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3. 군제(軍制)의 주요 내용과 서술상의 특징
「군제」에서는 조선의 군사 전반에 관한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시대별 군사 제도의 변화
와 핵심 주제를 12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항목을 ‘역대제
치(歷代制置)’, ‘신라병제(新羅兵制)’, ‘고려병제(高麗兵制)’, ‘국조병제(國朝兵制)’, ‘부강
무(附講武)’, ‘부군기(附軍器)’, ‘부명석제의(附名碩諸議)’, ‘부록(附錄)’, ‘부군국경비설
(附軍國經費說)’, ‘부청국군제(附淸國軍制)’, ‘부일본병제(附日本兵制)’, ‘부록(附錄)’ 순
서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역대 군사 제도의 주요 내용을 기술한 부분과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부분
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역대 군사 제도에 대한 기술방식은 역사적 사실을 시간 순서에 따라
나열한 것과 주제별로 그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또다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역사적 사
실에 대한 기술’은 조선 시대는 물론 그 이전의 신라 · 고려 때의 내용도 포괄하였고, 조선
의 인접 국가였던 중국과 일본의 것도 함께 정리하였다.
저자가 역대 군사 제도의 변화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이를 참작하여 당대의 군사 제
도를 보완하고자 했던 목적에서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의 제도보다는 우리나
라의 역대 제도를 본받는 것이 더 알맞은 방법이라고 여겼다는 점이다. 중국의 군사제도
는 주나라 정전제(井田制)의 폐지부터 무너졌고, 전국시대 이후 한나라 · 당나라 · 진나
라 · 수나라 등에서 여러 갈래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논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게다
가 중국은 우리와 풍토가 달라서 제도를 그대로 본받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
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역대 국가의 합당한 제도 중에서, 전대가 남긴 제도를
참작하고 손익을 따지며 석학들의 논의를 절충하여야 할 필요를 역설하였던 것이다.
‘역대제치’, ‘부청국군제’, ‘부일본병제’는 중국과 일본의 군사제도를 간략하게 기술한 것
이다. ‘역대제치’를 글의 앞부분에 배치하고 한족 국가를 중심으로 그 제도의 변천을 서술
하였다. ‘부청국군제’도 역시 중국의 제도를 다루고 있으나 그 범위를 청나라로 한정하였
고, ‘부일본병제’와 더불어 가장 뒷부분에 위치하였다.
‘신라병제’, ‘고려병제’, ‘국조병제’는 우리나라의 군사제도를 통시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신라병제’는 신라 때의 군사 제도에 대한 내용이고, ‘고려병제’는 고려 때의 군사제도에
대한 내용이며, ‘국조병제’는 조선 때의 군사 제도에 대한 내용이다. 신라의 병제는 중앙
군의 명칭을 나열한 것이 전부인데, 이는 시대적 연원이 오래되어 고증할 자료가 없었던
탓에 기인한다. 고려의 병제는 태조가 당나라 부위제(府衛制)를 모방하여 육위(六衛)를
설치한 것과 숙종 때 여진족과의 외교 문제로 인해 별무반을 설치했던 일을 상세하게 서
술하였다. 조선의 병제는 신라와 고려에 비해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내용
은 조선 초기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여 병권(兵權)의
지휘 통솔 체계를 갖춘 것, 은닉한 호(戶)와 누락된 정(丁)을 추쇄하여 군액을 보충하고
속오군(束伍軍)을 정비한 것, 임진왜란 이후 군제 개편을 단행한 것, 병사를 양성하는 방
법에 대한 여러 논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강무’, ‘부군기’, ‘부명석제의’, ‘부군국경비설’은 저자가 조선 시대 군사 제도 중에서 핵
심 사항이라고 인식했던 것을 선별하여 주제별로 정리한 것이다‘부. 강무’와 ‘부군기’는 각
각 강무(講武)와 군기(軍器)에 관한 내용이다. 강무는 국왕이 친림하여 시행한 군사훈련
을 가리킨다. 그 내용을 보면 태종에서 세조 연간의 내용이 자세하고, 그 이후의 시기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소개하였다. 이는 강무가 조선 초기에 주로 실시되었던 사실과 무
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군기는 갑옷을 비롯한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무기를 가리킨다.
그 내용은 주로 화약과 화포의 개발에 관련된 것이 많은데, 고려 말 최무선이 원나라의 화
약 제조 기술을 전수받아 화포를 제작하게 된 전말, 임진왜란 때 화거(火車)를 제작하여
행주대첩에 사용했던 것, 조총에 필요한 화약을 제조한 방식, 염초청을 신설했던 전말 등
이 기록되었다. 이외에도 호령 체계의 정비, 철갑(鐵甲) 조달 및 군복 개량과 관련된 것,
깍지를 활용한 활 쏘는 방법의 변화, 변방 및 지방에서 군사를 충원하여 개편하는 방법 등
도 함께 정리되었다.
‘부명석제의’는 군사 제도에 관한 선현들의 논의이다. 정남(丁男)의 연령을 20세로 올리
고자 했던 지봉 이수광의 주장, 임진왜란에서 왜구에게 패했던 이유를 조총 유무에 있다
고 본 서애 류성룡의 견해, 병법서를 간행하고 실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고 했던 중봉 조헌의 주장, 둔전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했던 미수 허목
의 주장 등을 인용하였다.
‘부군국경비설’은 군액(軍額)을 충당하는 방식에 대한 개혁 논의로, 호포제의 문제를 주
로 기술하였다. 효종과 현종 때 판서 김익희와 시남 유계가 호포제의 실시를 건의했으나
조정의 논의가 통일되지 못하여 무산된 내용, 숙종 때 양역을 변통하는 계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호포제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 청성 김석주가 공신을 비롯한 양반에게 호포를
납부하게 해야 한다고 상소한 내용 등이 있다. 그 뒤에 영조가 양역을 1필로 줄이되 급대
할 계책을 세우라는 명을 내렸던 것을 기술하였고,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
다. 저자는 호포가 편리한데도 이를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는 이유를 대경장(大更張)하지
않은 데서 찾고 있다. 그리고 양정(良丁)과 군총(軍摠)의 숫자를 파악한 뒤 이를 분담하
고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두 차례 나타나는 ‘부록(附錄)’에는 군사제도 개혁에 관한 저자의 주장이 들어있다. 첫 번
째 ‘부록’에서는 군사 제도의 폐단을 개혁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였다. 저자는 무경에서
말한 세 가지 즉, 첫째 전쟁은 국가의 대사(大事)이고 생사와 존망의 갈림길이니 반드시
살펴야 한다는 것, 둘째 습속을 따르면서 가르친다고 한 것, 셋째 국가를 안정시키는 방법
은 먼저 경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논의의 요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자세히 풀어 이해를 도왔다. 두 번째 ‘부록’에서는 오랑캐의 위협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
할 것을 주장하였다. 본래 군물(軍物)과 기계(器械)만 비교하면 청국과 일본에 비해 우리
가 뛰어나지만, 평소의 기율이 저들보다 못했기 때문에 전후의 약탈을 당했다고 보았고
이를 설욕할 수 없음을 통탄하였다.
이처럼 「군제」는 당시 군사제도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역대 군사제도와 선현의 논의
를 고찰하여 그 단서를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합리적인 운영 방안을 모색
하여 당대에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인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