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장현종론 제33권
7. 변현성품⑤
7.6. 무학위(無學位)[4]
6) 연근(練根)의 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근기를 단련[練根]하여 [뛰어난 무학과 유학의 종성을] 획득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성자의 연근에는 몇 가지의 무간도와 몇 가지의 해탈도가 있는 것인가?
유루도로써 [닦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무루도로써 [닦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소의신에 의지하고, 어떠한 지(地)에 근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학위에서의 근기의 단련은
아홉 가지의 무간도와 해탈도이니
오래 익힌 것이기 때문이며, 유학은 한 가지인데
무루이며, 인취의 세 주(洲)에 의지한다.
무학은 9지(地)에 근거하고
유학은 다만 6지에 근거하니
과도(果道)와 승과도를 버리고서
오로지 과도만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뛰어난 종성을 추구하여 연근(練根)을 닦는 자가 무학위 중에서 각각의 종성을 바꾸는 데에는 각기 아홉 가지의 무간도와 아홉 가지의 해탈도가 있으니, 이는 응과를 획득할 때와 같다.45)
그러한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한 [무학의] 둔근의 성질은 오랫동안 익힌 것이므로 적은 공력으로 능히 근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유학도와 무학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기 때문이다.
유학위 중에서 각각의 종성을 바꾸는 데에는 각기 한 가지의 무간도와 한 가지의 해탈도가 있으니, 이는 마치 초과(初果)를 획득할 때와 같은 것으로, 오랫동안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연근)의 가행도는 온갖 계위(유ㆍ무학위)에 각기 한 가지가 있다.
유학위와 무학위가 연근을 닦을 때에는 다 같이 점차로 뒤의 종성으로 닦아 나아가며,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면 바야흐로 앞의 저열한 종성을 버리게 된다.
따라서 온갖 무학이 연근을 닦을 때 가행도와 무간도와 앞의 여덟 가지 해탈도는 상응하는 바대로 모두 퇴법 등에 포섭되며, 아홉 번째 해탈도는 바로 사법 등에 포섭된다.
또한 온갖 유학의 성자가 연근을 닦을 때 가행도와 무간도는 바로 퇴법 등에 포섭되며, 해탈도를 닦을 때는 사법 등으로 일컬어진다.
우리가 계승한 여러 위대한 논사(論師)들은 모두 말하기를,
“연근은 다 견소단과 수소단의 번뇌[惑]의 힘에 의해 인기되어 낳아진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무지(無知)가 현행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유학위 중에서 연근을 닦는 것은 바로 견혹(見惑)에 의해 낳아진 [무부무기의 무지를] 막기 위해서이고,
무학위 중에서 연근을 닦는 것은 바로 수혹(修惑)에 의해 낳아진 [무부무기의 무지를] 막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이 능히 일으킨 [견ㆍ수]혹을 여여(如如)하게 끊을 때 일어난 무간도와 해탈도의 많고 적음이 이러 이러하였으니, 그것에 의해 낳아진 [무부무기의] 무지가 현행하는 것을 끊는 도의 수(數)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학이 연근을 닦을 때에는 아홉 가지의 무간도와 아홉 가지의 해탈도로써 닦고, 유학위가 연근을 닦을 때의 두 도(무간도와 해탈도)는 각기 한 가지라고 하였던 것이다.46)
즉 견혹과 수혹에 의해 낳아진 [무부무기의] 무지는 장애하는 정도에 따라 다수의 품류가 있기 때문에 퇴법 등을 사법 등으로 바꾸어 성취할 때에도 온갖 도가 현전하여야 각각의 [무지를] 막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어떠한 경우에도 뛰어난 종성을 초월하여 획득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말하기를,
“일체의 연근에는 모두 한 가지의 가행도와 무간도와 해탈도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설한 것이 선설(善說)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이치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무간도와 해탈도는 모두 오로지 무루의 성질에 포섭된다.
즉 성자는 필시 유루도로써 근기를 바꾸는 일이 없으니, 세속법(世俗法)의 체성은 증상(增上)이 아니어서 [연근을] 감당할 만한 공능이 없기 때문이다.47)
그리고 일체의 가행도는 다 두 종류(유루와 무루)와 모두 통한다.
이상과 같은 논설은 단지 현행하는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며, 이와 아울러 미래에 닦을 것에 의거해 설할 경우, 여기에는 다시 차별이 있다.
즉 무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 가행도는 미래에도 역시 두 가지(유루와 무루) 모두를 닦으며, 아홉 가지 무간도와 여덟 가지 해탈도의 경우도 미래에 닦아야 하는 것은 역시 오로지 무루이지만,
아홉 번째 해탈도의 경우는 미래에 두 가지를 닦으며, 아울러 3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공덕도 함께 닦으니, 진지(盡智)의 첫 찰나에서 닦아야 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유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라면, 가행도의 경우는 미래에도 역시 두 가지 모두를 닦으며, 무간도와 해탈도의 경우도 미래에 닦아야 하는 것은 역시 오로지 무루로서, 이는 초과(初果)를 획득할 때와 같다.
[결론적으로] 무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의 도의 수(數)와 닦아야 하는 것[所修, 즉 유ㆍ무루]은 유정지(有頂地)의 [수혹을] 끊을 때와 같다.
그러나 만약 유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라면 도의 수와 닦아야 하는 것은 상계의 견도소단(見道所斷)을 끊을 때와 같은데, 그것들은 다만 인근(隣近)의 것과 더불어 과위를 획득할 때의 도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유학위와 무학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의 가행도는 모두 일찍이 획득한 것과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는 것 모두와 통하지만, 무간도와 해탈도는 오로지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연근의] 도(가행ㆍ무간ㆍ해탈도)는 법지(法智)와 유지(類智) 모두와 통한다.
연근은 오로지 인취의 세 주(洲)에서만 닦는 것으로, 오로지 이러한 세 주의 몸에 의지할 때에만 물러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48)
어떠한 까닭에서 연근(練根)이라 이름하게 된 것인가?
온갖 근기를 조련(調練)하여 증장(增長)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도(道)의 힘에 의해 근기를 상속시키려는 것으로, 하품의 근기를 버리고 중품의 근기를 획득하며, 중품의 근기를 버리고 상품의 근기를 획득하여 점차 더욱 뛰어나게 되는 것을 ‘연근’이라 이름하였다.
따라서 연근이라고 하는 명칭은 ‘근기를 바꾼다’는 전근(轉根)의 뜻에 근거한 것이다.
비록 여덟 가지 해탈도가 점차로 뛰어난 근기를 획득하는 것일지라도 본심은 뛰어난 종성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전의 저열한 종성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마치 다음의 과위[後果]를 획득하여야 비로소 이전의 향(向)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자위(聖者位)의 종성에 여섯 가지가 있어 능히 연근을 닦는 것과 마찬가지로 견도에 들기 전의 난법(煖法) 등의 가행위(加行位)에서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성자위 중에서는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면 반드시 이전의 저열한 종성을 버리지만, 난법 등의 가행위 중에서 연근을 닦을 경우 다만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면 저열한 종성은 [현]행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이를 ‘전근(轉根)’이라고 이름할지라도 저열한 [종성의] ‘득(得)’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무학의 연근은 모두 아홉 지(地)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려와 아래 세 무색정의 지가 바로 그것으로, 오로지 이러한 아홉 지에만 무루도가 존재하며, 그 밖의 지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학의 연근은 오로지 여섯 지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앞의 아홉 지 중에서 세 무색정의 지를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제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근기를 바꿀[轉根] 경우 [지금까지의] 과도(果道)와 승과도(勝果道, 즉 向道)를 버리게 되는데, 획득된 것은 오로지 과도일 뿐 승과도가 아니며―음은 과도를 흔락(欣樂)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과도는 무색지(無色地)에 포섭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학의 연근은 다만 여섯 지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49) 설혹 유학위가 무색정에 근거하여 근기를 단련[練根]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결정코 이러한 이는 바로 승과도의 단계에 머무는 불환과이니, 불환과로서 무색지에 포섭되는 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무색정에 근거하여 연근을 닦으면 과도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으로(다시 말해 승과도를 획득할 뿐으로), 처음의 두 과위(예류과와 일래과)는 오로지 미지정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불환과는 오로지 여섯 지 모두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오로지 과위(果位)에 머물 때에만 근기를 단련하니, 많은 것을 버리고 적은 것을 획득하는 과실을 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즉 [과위에서 단련할 경우] 이와 같은 과실이 없으니, 근기를 단련하는 자는 마음으로 승과도를 기약하여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학위로서 연근을 닦는 자가 만약 과도에 머무는 경우라면 가행도 등의 세 가지 도는 모두 과도에 포섭되지만, 만약 승과도에 머무는 경우라면 가행도와 무간도는 승과도에 포섭되고, 해탈도는 과도에 포섭된다.
또한 무학위에 머물면서 연근을 닦는 자라면 가행도 등의 세 가지 도는 오로지 과도에만 포섭된다.
즉 과도의 단계에 머물며 연근을 닦을 때에는 [지금까지의] 과도를 버리고 [증상의] 과도를 획득하게 되지만,
승과도의 단계에 머물며 연근을 닦을 때에는 두 가지(과도와 승과도)를 버리고 과도만을 획득하는 것이다.”50)
또한 온갖 성자위에서 연근을 닦을 때의 [소의]지(地)는 본래의 [사문]과를 획득할 때의 [소의]지와 동일한 것인가, 혹은 다른 것인가?
이를테면 처음의 두 [사문]과는 소의지(所依地)가 반드시 동일하니, 그것(예류과와 일래과의 소의지)과 이것(두 과위에서의 연근)은 다 같이 미지정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환과와 응과의 소의지는 일정하지 않은데, 혹 어떤 경우 본래의 [사문과를 획득할 때의 소의]지에 근거하여 [연근을 닦기도 하고], 혹은 상지에, 혹은 하지에 [근거하여 연근을 닦기도 한다].
다만 차별이 있다면, 하지에 근거하여 근기를 단련한 모든 불환과는 상지의 [불환]과를 획득하지 않지만, 아라한은 그렇지가 않으니, 본래 획득한 [응]과와 같기 때문이다.51)
그리고 유정지의 결(結)을 나누어 끊고[分斷] 근기를 단련하여 [사문]과를 획득하였을 때, 비록 그러한 [결의] ‘끊어짐[斷]’을 버렸을지라도 그러한 결을 성취하지 않는다.
이는 이생이 위의 7지(地)에 태어나 상응하는 바에 따라 하지의 ‘끊어짐’을 버렸을지라도 하지의 결을 성취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으로, 다 같이 [그때는] 바로 승진하는 때이지 물러나는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7) 무학위의 총결: 9무학(無學)
온갖 무학위의 보특가라에는 모두 몇 종류가 있으며, 어떠한 차별에 의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곱 가지 성문과 두 가지 부처가 있으니
이러한 차별은 9품의 근기에 의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학위에 머무는 성자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일곱 가지의 성문과 두 가지의 각자(覺者)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일곱 가지의 성문이란 퇴법 등의 다섯 종성과 부동법을 후(後)와 선(先)의 둘로 나누어 차별한 것을 말하며,52)
두 가지 각자란 독각(獨覺)과 대각(大覺)을 말하는 것으로,
[근기에] 하하품 등의 9품의 차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학의 성자에 아홉 가지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