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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미녀(美女)
초선(貂蟬) / 서시(西施) / 왕소군(王昭君) / 양귀비(楊貴妃)
춘추전국시대의 초선(貂嬋/BC500), 월(越/BC10)나라 출신의 서시(西施), 한나라 원제(元帝/BC1)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 당(AD750) 현종의 비(妃) 양귀비(楊貴妃)를 중국 고대 4대(四大) 미녀로 꼽는다.
♣초선(貂蟬): 초선이 하늘을 쳐다보자 달이 부끄러워 구름 사이로 숨었다. <폐월(閉月)>
♣서시(西施): 서시가 호수를 들여다보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물에 가라앉았다. <침어(沈魚)>
♣왕소군(王昭君): 왕소군이 쳐다보자 기러기가 미모에 놀라 날갯짓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 <낙안(落雁)>
♣양귀비(楊貴妃): 양귀비가 꽃을 들여다보자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수화(羞花)>
1. 폐월(閉月) 초선(貂蟬)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가공인물로 등장하는 초선(貂蟬)은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로 강동이교(江東二喬)와 더불어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미인으로,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여주인공이기도 하다.
강남이교(江南二喬)는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 교국로(喬國老)의 두 딸인 대교(大喬)와 소교(小喬)인데 천하절색으로 강남이교(江南二喬)라 불리며 미색(美色)을 자랑했고, 언니인 대교(大喬)는 오(吳)의 장사환왕(長沙桓王) 손책(孫策), 동생인 소교(小喬)는 대장군 주유(周瑜)와 결혼을 한다.
초선(貂蟬)은 역사서(歷史書)에는 기록이 없는 가상 인물이지만 소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한나라 대신인 왕윤(王允)의 수양딸로 당시 그녀 나이는 16세였는데 동탁(董卓)과 여포(呂布) 사이를 이간질하여 결국 여포가 동탁(董卓)을 죽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녀의 총명함과 매력으로, 초선(貂蟬)은 군벌들을 조종하여 그들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그들 모두를 마법에 걸리게 한다. 하루는 초선이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자 이를 본 왕윤이
‘달도 내 딸 초선의 미모(美貌)에 부끄러워 구름 사이로 숨어버렸네’에서 폐월(閉月)이 유래되었다 한다.
2. 경국지색(傾國之色) 서시(西施)
월(越)나라의 절세미녀인 서시(西施)는 평소 가슴앓이 병이 있어 언제나 미간을 찌푸리고 다녔는데 워낙 아름다운지라 그 찡그린 표정마저 절색이었다. 이웃 마을에 살던 추녀(醜女) 동시(東施)가 그것을 보자 자기도 가슴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찡그리며 마을을 돌아다녔더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겁하고 부유한 사람은 집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은 가족들을 이끌고 다른 마을로 이사(移徙)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쯤 되면 저 추녀(醜女)의 못생김도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다.
서시(西施)의 별명(別名)은 침어(沈魚), 또는 경국(傾國)이라고도 했는데 침어(沈魚)는 서시(西施)가 길을 가다가 더워 얼굴을 씻기 위해 강에 얼굴을 비치니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원문은 반대의 뜻이라고 한다.
毛嬙麗姬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모장려희 인지소미야 어견지심입 조견지고비 미녹견지결취)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는 고운 여인이니 사람들이 보고는 아름답다 하지마는, 물고기가 보고는 물속에 깊이 잠기고, 새가 보고는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鹿)가 보고는 마구 도망가며 보기 싫어 숨어 버린다는 뜻이다.
월(越)나라에서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이 오(吳)나라에 바쳐졌을 때 둘이 도착하자 그 아름다움을 구경하려고 군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성문이 부서졌고, 둘을 본 오자서(伍子胥)가 정단은 ‘성을 자빠뜨릴(傾城) 미인’이라 받아들여도 괜찮으나 서시는 ‘나라를 기울어뜨릴(傾國) 미인’이라 하여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3. 비련(悲戀)의 여인 왕소군(王昭君)
전한(前漢, BC206~AD5) 원제(元帝)의 후궁이었던 왕소군(王昭君)은 중국 역사상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여인으로 훗날 흉노(匈奴)의 왕 호한야(呼韓耶)에게 화친을 목적으로 시집을 가게 되는데 왕소군의 원래 이름은 장(嬙)이고, 아명(兒名)은 호월(皓月)이며 자(字)는 훗날 소군(昭君)으로 불린다.
BC 36년, 전한의 11대 황제 원제는 전국에 궁녀를 뽑아 올리라는 조서를 내렸다. 왕소군은 열여덟 살에 이미 가무(歌舞)와 비파(琵琶) 연주에 능했고 자색(姿色)이 뛰어나 궁녀로 선발되었는데 당시에는 뇌물을 주면 왕의 시중을 드는 궁녀로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숫자가 수천 명에 달하니 황제가 일일이 선발된 궁녀를 확인하는 일은 불가능했기에 화공(畵工)이 초상화를 그려 올린 것을 보고 간택했다고 한다. 당시 궁녀들은 황제를 하룻밤이라도 모시기 위해 화공들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소군(昭君)은 집안이 가난하고 궁(宮)에 연줄도 없었던 데다 원제(元帝)를 속일 마음도 없어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고, 그 결과 평범한 얼굴에 큰 점이 찍힌 추녀(醜女)로 그려졌다.
그리하여 소군(昭君)은 5년간, 원제(元帝)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궁녀 신분에 머물며 외롭고 쓸쓸한 궁 생활을 비파를 연주하며 이겨냈다고 한다.
당시 북방의 흉노(匈奴)는 정권다툼이 심했는데 친형인 질지선우(郅支單于)와 정권을 다투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형에게 밀려 한(漢)의 장안(長安)으로 와서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BC 51년, 한나라와 동맹 관계를 구축한 호한야(呼韓邪)는 이번 기회에 스스로 한나라의 사위가 되길 청하며 화친을 강화하고자 했다. 한나라는 건국 후 계속되는 흉노와의 갈등 속에서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를 종실(宗室)의 공주와 정략 결혼시켜 평화를 유지하기로 한다.
원제(元帝)는 크게 기뻐하며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고 자신의 부름을 받지 못한 궁녀들에게 연회 자리에서 술을 따르도록 했다. 그중에는 왕소군(王昭君)도 끼어 있었는데 소군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긴 호한야는 종실의 공주가 아닌 궁녀 중에서 한 명을 택해도 좋다며 왕소군을 선택한다. 원제는 공주를 선택함으로써 생길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는 기회로 보고 호한야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했다. 원제는 ‘흉노에 시집가는 궁녀는 공주와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로써 뒷일을 보장해주기까지 했다.
원제는 호한야선우와 왕소군을 장안에서 결혼시키고 그녀에게 ‘한나라 황실과 황제를 빛내라’는 의미가 담긴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흉노족 차림의 붉은 옷을 입은 신부 왕소군을 태운 말이 떠날 때 원제는 처음으로 절세미인이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제야 왕소군의 미모를 알아차린 원제는 자신의 결정을 크게 후회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왕소군의 출가를 번복할 경우 호한야선우와의 신뢰가 깨지고 흉노와의 관계가 나빠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궁으로 돌아와 궁녀들의 초상화를 대조해 본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화가 실물과는 전혀 다르게 그려진 데다 커다란 점까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분노한 원제는 초상화 제작 과정에서 뇌물이 왕래했음을 간파하고 자신을 기만한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를 참수(斬首)했다고 한다.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과 이별하고 오랑캐로 부르던 흉노 훈족(Hun族)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먼 북쪽 오랑캐의 땅으로 떠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왕소군이 훈족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마침 기러기 떼가 그녀의 머리 위를 날았다. 그러자 그녀는 비파(琵琶)를 꺼내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 포함된 노래 출새곡(出塞曲)이 바로 그 노래인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노래와 미모에 취해 날갯짓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 왕소군은 ‘기러기가 떨어졌다’라는 의미의 ‘낙안(落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출새곡(出塞曲)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오랑캐(훈)의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겠구나.
BC 31년, 호한야선우가 세상을 떠나자 20대 초반이던 왕소군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흉노의 풍습에 따라 호한야의 장자(長子) 복주루(復株累)와 혼인해야만 했다.
왕소군은 이러한 풍습에 거부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한나라의 제12대 황제 성제(成帝)의 만류로 그 뜻을 접어야만 했다. 다행히도 젊었던 복주루가 왕소군을 사랑하여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 복주루와 다시 결혼한 왕소군은 11년간 그와 살면서 두 명의 딸을 낳았고, 그 사이 한나라에 있던 왕소군의 오빠들은 제후(諸侯)에 봉해졌으며, 그녀의 두 딸인 수복거차(須卜居次)와 당우거차(當于居次)도 한(漢)의 장안(長安)에 머물며 원제(元帝)의 황후를 모시는 등 두 나라 간에 평화가 지속(持續)되었다.
BC 20년, 복주루가 사망했고 이후 왕소군은 홀로 생활하다 흉노 땅에서 사망했는데 그녀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소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은 가을에 북방의 풀들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그 무덤의 풀만은 늘 푸르름을 유지한다고 하여 ‘청총(靑塚)’이라 불린다고 한다.
훗날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당(唐)나라의 시인 이태백(李太白)이 쓴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시이다.
왕소군(王昭君)
昭君拂玉鞍 上馬啼紅頰(소군불옥안 상마제홍협)
소군이 옥으로 만든 말안장을 잡고 말 위에서 울어 뺨이 붉어졌구나.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금일한궁인 명조호지첩)
오늘은 한나라 궁궐의 사람인데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의 첩이 되는구나.
4. 천하절색 양귀비(楊貴妃)
당(唐)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AD 685~762)은 52세에 총애하던 황후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하필이면 자신의 18번째 아들(왕자)의 부인이던 며느리 양옥환(楊玉環)의 미모에 빠져버린다.
현종(玄宗)은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시켜 며느리였던 양옥환을 도교(道敎) 사원에 넣어 5년간 신분세탁을 시킨 후 AD 745년, 61세 때 자신의 귀비(貴妃)로 책봉하니 곧 중국 고대(古代) 4대 미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양귀비(楊貴妃)로 당시 26세였다고 한다.
<1> 당 현종과 양귀비
당(唐) 현종(玄宗) / 시안(西安)의 화청지(華淸池) / 양귀비 동상 / 장한가(毛澤東 친필)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현종은 뛰어난 시인이며 서예가(현종의 친필로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이자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하고, 양귀비는 당시의 미인 기준이었다지만 풍만한 체구(키 165cm, 몸무게 70kg 정도)에 체취(體臭/암내)가 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춤과 노래에 능해 현종이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면 기막히게 춤으로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다고 하니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던 듯싶다.
훗날 중국 사람들은 양귀비의 미모를 두고 수화(羞花)라는 말을 만들어 냈는데, 양귀비가 모란꽃을 어루만지자 꽃이 양귀비의 미모에 부끄러워 꽃송이를 오므리고 고개를 숙였다는 뜻이다. 또 연수환비(燕瘦環肥)라는 말도 있는데, 조비연(趙飛燕)은 말랐으나(瘦) 미인이고, 양귀비는 뚱뚱했으나(肥) 미인이라는 뜻이다.
양귀비는 옥(玉)을 좋아해서 항상 온몸에 수많은 옥을 달고 다녔다고 하는데 양귀비가 걸으면 발소리는 들리지 않고 잘랑거리는 옥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그리고 밤에 잘잘 때에도 커다란 옥을 입에 물고 잤다고 한다. 양귀비는 자신의 몸에서 심한 체취(암내)가 있어 이를 감추려고 사향(麝香-사향노루 수컷의 배꼽과 생식기 부분에서 나오는 향즙<香汁>) 주머니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사향은 고급 향료일 뿐만 아니라 귀중한 한약재이다.
그 약리작용은 ①개규(開窺-정신을 맑게 함), ②활혈(活血-혈액순환이 잘 되게 함), ③최생(催生-아기 분만을 쉽게 함) 등에 특효가 있지만, 여성이 소지하면 지속적인 자궁경련이 일어나 임신을 어렵게 한다고 한다. 그런 연유인지 현종과 양귀비 사이에는 소생(所生/子息)이 없었다.
대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의 천재 시인인 백거이(白居易/樂天)가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쓴 칠언고시(七言古詩)로 120구(句) 840자(字)에 이르는 서사시인데 특히 마지막 부분인 ‘비익조(比翼鳥), 연리지(連理枝)’ 부분은 특히 중국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지금까지도 부부의 금실이나 사랑을 이야기할 때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구절이고, 특히 공연 끝부분에서 현종이 양귀비를 안고 이 부분을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는 많은 중국 관객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것을 나는 직접 보고 왔다.
장한가(長恨歌)<일부분>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련리지)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기를.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으련만 / 이 슬픈 사랑의 한은 끊일 때가 없으리.
♧ 비익조(比翼鳥)-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각 각 하나씩이어서 둘이 합치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
♧ 연리지(連理枝)-각기 다른 뿌리에서 장성한 나무가 가지가 만나 하나로 연결된 나무
이 장한가는 백거이(AD 772~846)가 35세 때 시안(西安/長安) 주지현(周至縣)의 현위(縣尉)로 재직할 때 고을의 장로(長老)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서사시 형식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첫째 부분은 양귀비가 총애를 받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장면까지, 둘째 부분은 양귀비를 잃고 난 후의 현종이 양귀비를 못 잊어 몸부림치는 쓸쓸한 생활, 셋째 부분은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가 하늘에서 내려와 현종과 만나는 장면으로 되어 있는데 공연도 그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간다.
<2> 양귀비 일가의 득세와 안녹산(安祿山)의 등장
양귀비는 자신이 귀비의 자리에 오르자 사촌오빠 양검(陽劍)을 불러들이는데 현종의 총애를 받은 양검은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승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40여 개의 관직을 독점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혈안이 된다. 양국충에게 모든 정사를 맡긴 현종은 오직 양귀비만을 데리고 시안(西安)의 여산(驪山) 아래 온천지(溫泉池)에 화청궁(華淸宮)이라는 궁궐을 짓는데 온천목욕시설과 연못을 조성하여 화청지(華淸池)라 하고 여기에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이곳 온천은 진시황 때부터 유명한 곳이었는데 현종은 이곳을 보수ㆍ확장하여 새 건물을 짓고 모든 국사(國事)를 팽개치고 이곳에서 양귀비와 사랑을 속삭였던 모양이다. 황제의 욕탕인 구룡전(九龍殿) 연화탕과 양귀비의 욕탕인 해당탕(海棠湯), 또 양귀비가 올라 머리를 말렸다는 누각 등이 남아있는데 뒤에 있는 여산(驪山)과 어울려 풍광이 너무나 수려하다.
한편, 변방의 절도사였던 안녹산(安祿山)은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인 이민족으로 6개 국어에 능통하였다고 하는데 장안으로 들어오자 젊고 우람한 체격의 안녹산에게 마음을 뺏긴 양귀비는 양자로 맞아들이고 총애하는데(나이는 안녹산이 16세 연상) 두 사람 사이가 연인(戀人) 사이였다고 한다.
양귀비의 총애를 받은 안녹산의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양귀비의 사촌오빠로 권력을 잡고 있던 양국충과 부딪치게 되는데 양국충이 현종에게 안녹산을 모함하면 양귀비가 나서서 옹호하여 세 사람의 관계가 차츰 미묘하게 흘러간 듯하다.
<3> 안사(安史)의 난(亂)과 양귀비의 죽음
안녹산(安祿山)과 그의 휘하였던 사사명(史思明)이 양국충 등의 외척과 환관 고력사의 전횡과 부패에 대항하여 그들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AD 756년 낙양에서 국호를 연(燕)이라 하고 안녹산은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장안으로 군사를 몰아 쳐들어온다. 9년간 지속된 이 난은 안녹산의 안(安)과 사사명의 사(史)를 따서 ‘안사(安史)의 난’, 혹은 ‘안녹산(安祿山)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 불린다.
안녹산이 장안의 동관(潼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양국충은 현종을 쓰촨성(四川省) 지난(濟南)으로 피난할 것을 상소하여 도피하던 중 산시성(陝西省) 싱핑(興平)에 이르렀을 때 부하 진현례 등이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잡아 처형하는데 양귀비의 복수가 두려워진 이들은 다시 현종을 협박하여 양귀비가 살아 있는 한 안녹산이 추격하는 빌미가 될 것이고, 양국충을 살해한 장병들이 불안해하여 현종의 신변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며 양귀비를 처단할 것을 종용한다.
진퇴양난에 빠진 현종은 결국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비단 끈을 내려 양귀비가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하고, 양귀비는 기꺼이 그 비단 끈으로 마외역(馬嵬驛) 앞 배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는데 이때가 AD 756년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이 양귀비의 죽음을 마외병변(馬嵬兵變)이라 일컫게 되는데 이곳의 지명이 싱핑(興平)의 서쪽 마외역(馬嵬驛)이기 때문이다. 이 양귀비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루머가 나돌았는데 양귀비가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묘를 파보니 유골이 없었다, 죽을 때 대신 용모가 비슷한 궁녀로 바꿔치기했다, 살아서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었다, 도교사원에 들어가 다시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숨어버렸다... 등이다.
안사의 난은 양귀비가 죽고 한 달 후 장안을 점령하여 성공을 거두지만 이듬해(AD 757) 안녹산은 자신의 맏아들 안경서(安慶緖)에 의해 살해당하고, 2년 후(AD 759)에는 사사명에 의해 안경서마저 살해당한다. 이어 AD 761년에는 사사명(史思明)마저 자신의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살해당하고, AD 763년 사조의가 자살함으로써 안사의 난은 9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안녹산의 본처는 고구려 유민으로 한국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편 현종은 난(亂) 중에 아들 이형(李亨)에게 강제로 황제자리를 양위(讓位)하고 태상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장안의 감로전(甘露殿)에 갇힌 채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지난날 영화에 대한 허무함 속에 쓸쓸히 칩거하다가 AD 762년, 생을 마감하고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 백거이(白居易)는 杜甫(두보), 李白(이백)과 함께 당대(唐代)를 대표하는 3대 시인으로,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향산거사(香山居士), 자는 낙천(樂天), 시호는 문(文)이다. 허난성(河南省) 낙양 부근 신정현(新鄭縣)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인 낙양 용문석굴(龍門石窟)의 왼쪽 건너편 향산(香山) 기슭에 잠들었는데 그 묘원(廟院)은 백원(白園)이라 불린다. 나는 이 모든 곳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으니 복 많은 사람이다.
중국의 4대 악녀(惡女)
1. 달기(妲己)
◇ 상(商/殷)왕조 말기/ BC 11세기경/ 주왕(紂王)의 비(妃)
요녀 달기(妲己)
달기(妲己)는 중국 상(商/殷)나라 유소(有蘇) 출신의 여인으로, 훗날 중국 역사상 폭군으로 악명 높은 주왕(紂王)의 애첩이 되는데 중국 역사상 절색(絶色)의 여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미인이며, 아울러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로도 손꼽히는 여인이다. 상(商)나라 말기, 주왕은 달기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달기는 정실 황후인 강황후의 질투를 받았고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자객 강환이 주왕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달기는 이를 강황후에게 덮어씌워 자백하라고 눈을 파내는 등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강황후는 사망하게 된다.
은주달기조(殷紂妲己條)에 보면 달기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기름을 바른 구리(銅)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수가 벌겋게 달구어진 기둥 위로 맨발로 건너게 하여 미끄러져 떨어져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한다. 또 돈분(躉盆)이란 형벌도 만들었는데 구덩이에 죄수들과 독사와 전갈을 함께 집어넣고 그들이 물려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고도 한다.
주왕은 달기에 빠져 달기가 하자는 대로 하여 악행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멀쩡한 신하(진상위)의 눈알빼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보기, 한여름에 뼈가 시려 강을 못 건넌다는 노인의 다리뼈를 잘라 골수(骨髓) 보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또, 술을 채운 연못 주변에 고기를 걸어둔 숲(酒池肉林)을 만들어서 술에 취한 나체 남녀가 서로 뒤쫓아 혼음(混淫)하는 것을 보고 즐기는 등 날마다 음탕한 밤을 보냈다.
충신 구후(九候)는 달기의 악행을 보다 못해 천하절색인 딸을 주왕에게 바쳤는데 달기는 그 딸을 모함으로 죽이고 아버지인 충신 구후도 참살(慘殺)한다. 또, 주왕의 숙부이기도 한 재상 비간(比干)이 “선왕(先王)의 전법(典法)을 따르지 않고 아녀자의 말만 따르시니 재앙이 가까울 날이 머지않았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달기는 주왕에게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칠규:七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고 하면서 주왕을 부추겨 비간을 죽여 심장을 도려내서 드려다 보았다고도 한다. 충신이었던 숙부 비간의 죽음으로 백성들은 상(商/殷)나라에 손톱만큼의 애정도 없어졌고, 주(周)를 중심으로 팔백 제후가 일어나 중국의 두 번째 나라였던 상(商/殷)나라는 31대 주왕(紂王)을 끝으로 왕조의 문을 닫고 마는데 결국 달기(妲己)라는 여인으로 인해 망했다고 할 것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군사를 몰아 쳐들어와 패색이 짙어지자 주왕은 보물을 저장하였던 녹대(鹿台)로 올라가 불을 지르고 불에 뛰어내려 자결하는데 주왕(紂王)이 죽은 뒤, 달기도 무왕(武王)에 의해 참수된다. 무왕(武王)은 타버린 주왕의 시체를 가져다 관례대로 목을 치고 주왕의 몸에 화살을 세 대 쏘았다고 한다.
첫 화살은 하늘의 명을 거역한 죄로 금 화살, 두 번째는 나라를 망하게 한 죄로 은 화살, 세 번째는 백성을 힘들게 한 죄로 동화살, 이렇게 세대를 타버린 주왕의 몸에 꽂았다. 주왕의 애첩 달기도 잡혀 끌려 나왔는데 달기 또한 목이 잘려 역시 화살 세 대를 맞고, 주왕의 목과 함께 백기(白旗)에 걸렸다고 한다.
달기의 처형 때 달기의 미모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묶여 끌려 나오는 그 모습, 눈물까지 흘리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목을 쳐야 할 망나니들이 넋이 빠졌다고 한다. 망나니는 달기의 촉촉한 눈망울을 보면 칼을 든 팔을 부들부들 떨며 끝내 칼을 못 올렸다고 하고, 다른 망나니로 교체해도 마찬가지였다. 90세 할아버지 망나니를 내 세웠으나 그마저 차마 못 쳐서 할 수 없이 달기 머리 위에 비단을 덮어씌워 못 보게 한 후 간신히 목을 쳤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주나라 군대가 조정(朝庭)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주 무왕)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나와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사실인가?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달기를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九尾狐/여우)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포락지형을 받고 죽은 시체를 공동묘지에 내다 묻으면 밤에 달기가 몰래 궁궐 담을 넘어 나와 하늘에 한 번 공중제비를 돌면 여우로 둔갑하여 무덤을 파헤치고 불에 그슬린 시체를 파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꺼내 먹는다는....
◆ 말희(末喜) <하(夏)나라 말기/ BC 17세기경/ 걸(桀)왕의 비(妃). 일명 매희(妹嬉)>
중국 신화에서 최초의 제국인 하(夏)나라는 마지막(17대) 황제 걸왕(桀王)이 요녀 말희에 의하여 망한다.
말희는 걸왕(桀王)이 정복한 오랑캐 나라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녀(貢女)로 바쳐진 여인이었는데 걸왕(桀王)은 첫눈에 빠지고 말았다.
포악하고 사치스러움의 대명사로 불리던 걸왕(桀王)은 미녀 말희에 빠져서 요대(瑤臺)라는 호화스런 궁전을 짓고 그 안에 술로 채워진 연못을 만들었으며 그 주변은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고 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아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최초로 만든 장본인이다.
전국에서 미소녀 3천 명을 뽑아다 알몸으로 숲에서 춤추며 놀다가 북소리에 맞춰 일제히 연못의 술을 마시고 숲의 고기(脯肉)를 탐식하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고 한다. 결국 하(夏)나라는 제후들의 반란으로 나라가 망하고 걸왕도 죽는데 다음으로 이어지는 왕조(王朝)가 곧 은(殷/商)나라의 탕왕(湯王)이다.
◆ 포사(褒姒) <주(周) 왕조 말기/ BC 8세기 경/ 유왕(幽王)의 비(妃)>
상(商)을 멸망시킨 주(周)나라 역시 포사(褒姒)라는 여인에 의해 결정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포사는 주(周)의 마지막 임금 유(幽)의 왕후였는데 포사는 궁에 들어온 후 한 번도 웃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실수로 적군이 쳐들어오지도 않는데 봉화(烽火)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제후들이 사방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포사가 깔깔 웃었다고 한다.
유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고자 이따금 거짓으로 봉화를 올렸고 포사는 그때마다 깔깔 웃고....
남자들이 여자가 웃는 모습을 한 번 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쓴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중국 고대사에서 신화시대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뒤를 이어 하(夏)-은(殷)-주(周)로 이어지는데 은(殷)나라는 사실 상(商)나라로 그 수도가 은(殷墟)이었기 ‘은(殷)나라’라고도 불렸다.
2. 여태후(呂太后)
◇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비(妃)/BC 240년 전후/ 아명 여치(呂雉)
여태후(呂太后) 1,2 / 유비(漢高祖) 초상화 1,2
여태후의 아버지 여문(呂文)은 산동(山東) 출신의 유지로, 가족들을 데리고 유방(劉邦)의 고향인 패현(沛縣)으로 이사를 하여 딸(아명 呂雉)을 낳는데 이 딸이 장성하여 유방과 결혼하게 되고 훗날 유방이 한(漢)나라의 왕이 되자 태후(太后)가 된다. 여태후는 두 아이를 낳는데 첫째가 후일 노원공주(盧元公主)로 불리던 딸이고, 둘째가 황제를 계승하게 될 유영(劉盈)이었다. 유방과 여치는 결혼 초기에는 평범한 농민의 삶을 살았는데 젊은 날 유방은 가정에 헌신적인 남자가 아니라 바람기가 많고 주색잡기에 능한 한량(閑良) 풍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진(秦)나라 말기,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항우(項羽)와 손을 잡은 유방(劉邦)은 진나라를 멸하고 다시 항우와 치열한 패권(霸權) 다툼을 벌이게 되는데(楚漢戰) 전쟁 초기에 항우의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여치(呂雉)는 이 기간 내내 초나라의 군영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온갖 굴욕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이때 받은 심리적인 타격이 훗날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한다.
결국 유방(劉邦/漢)이 항우(項羽/楚)를 물리치고 한왕(漢王)이 되자 황후가 된 여치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유방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제2부인 척희(戚姬)라는 여인이었다. 척희는 대단한 미인이었으며 혁명과 전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8년간이나 유방과 함께 전선을 누빈 혁명동지이기도 했다.
척희(戚姬)에게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인 여치 소생의 유영(劉盈)이 선량하지만 나약한 성품인데 반해 척희 소생의 여의(如意)는 제왕으로서 필요한 품성을 모두 타고난 왕자였다고 한다.
유방은 나약한 태자 영(盈)을 폐하고 여의를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다가 중신들의 반발로 일단 보류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여태후(呂太后)에게 척희 모자는 목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여태후는 이미 정계를 은퇴한 장량(長良)을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태자의 폐위를 막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한나라(劉邦)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는 세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방(劉邦/漢高祖)의 고향 친구인 소하(簫何)는 재상을 맡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재사(才士) 장량(張良)은 최종적인 승리의 설계자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명장(名將) 한신(韓信)이 있었다. 천하가 평정되자 장량(張良)은 스스로 은퇴했고 소하(簫何)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한신(韓信)은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 그를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일등공신이었지만 후일 한왕(韓王)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등, 권력욕이 강했다. 한신은 물러날 때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항상 불평불만이 많았으나 유방은 차마 탓하지 못했다. 유방을 위해 껄끄러운 한신을 제거한 사람은 여황후였다.
그녀는 유방이 출타한 동안 한신에게 모반죄를 씌워 그의 일가친척, 친구들과 함께 그를 처형한다.
유방과 한신은 혁명 중에 서로에게 맹세하기를 “하늘과 땅을 보며 죽게 하지 않고 쇠붙이 무기를 보며 죽게 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했었다.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맹세였지만, 여황후는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다. 한신을 죽일 때 자루를 씌우고 대나무 창으로 찔러 ‘하늘과 땅을 보지 않게, 쇠붙이 무기를 보지 않게’ 죽인 것이다.
다음은 전쟁영웅인 양왕(梁王) 팽월(彭越)의 차례였다. 여후(呂后)는 팽월의 측근들을 협박해서 그를 반역죄로 모함하도록 한 다음 그를 처형했다. 그녀는 팽월을 하나의 시범케이스로 삼았다.
그의 뼈와 살로 육젓을 만들어 각 제후들에게 보내어 엄중하게 경고한 것이다.
유방이 죽고 난 후, 열여섯 살의 아들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여치(呂雉)는 태후의 신분으로 정사(政事)에 깊숙이 관여했다. 연적(戀敵)인 척부인에게 오랫동안 칼날을 갈아왔던 그녀는 유방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그녀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여태후는 척부인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팔다리에 수갑(手匣)을 채운다음 죄수복을 입혀 감옥에 가두고 곡식을 찧는 고된 노동을 시켰다. 당시 여의(如意/척부인의 아들) 왕자는 조왕(趙王)으로 봉해져 임지(臨地)인 하북(河北) 지방에 나가 있었다. 여태후는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해 여의(如意)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심성이 착했던 황제(劉盈/여태후의 아들)는 자신이 아예 성 밖으로 나가 어린 이복동생을 맞이하고 항상 그를 곁에 두면서 어머니의 음모로부터 보호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여태후가 아니었다. 여러 달이 지난 어느 겨울날 새벽, 황제가 잠시 사냥을 나간 틈을 이용해 태후는 여의(呂意)를 독살하는데 이때 여의(呂意)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을 듣고 척부인이 원망하자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파냈으며 독한 증기를 쐬게 해서 귀머거리,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척부인을 “인간돼지”라고 부르도록 했다.
척부인의 비참한 모습을 본 어린 황제(惠帝) 영(盈)은 큰 충격을 받았다. 황제 영은 자신의 친누나인 노원공주가 낳은 딸 장씨(張氏)를 왕후로 맞이해야 했다. 즉 자신의 조카와 결혼한 셈이었다.
또, 여태후는 황제의 후궁들이 낳은 아들들을 황후가 데려와 키우게 하고 생모(후궁)들은 모두 죽였다. 혜제(惠帝)의 뒤를 이어 그가 후궁으로부터 얻은 두 아들(척부인의 손자)이 차례로 허수아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첫째가 유공(劉恭)이었는데, 4년째 재위하던 어느 날 자신의 친어머니가 태후 장씨가 아니라 할머니인 여태후에게 죽임을 당한 어느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한을 품었다. 이 사실이 여태후의 귀에 들어가자 그녀는 소년 황제를 가두어 놓고 굶겨 죽였다. 기원전 180년 어느 날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갔던 여태후에게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덤벼들어 그녀의 겨드랑이를 물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녀는 병에 걸렸으며, 여태후는 그녀가 독살했던 유여의(劉呂意/척부인의 아들)의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지르며 두려움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하는데 향년 62세였다.
3. 측천무후(測天武后) <당(唐)/ 고종(高宗)의 비(妃)/ 훗날 여황제(女皇帝)/ AD 624~705/ 아명 무조(武照)>
당태종 이세민 / 노년의 측천무후 / 용문석굴 봉선사 대불 / 무자비(無字碑)
측천무후는 당나라 개국공신 무사확(武士彠)의 둘째 딸로 어릴 때 이름은 조(照)였다.
무사확(武士彠)은 사천(四川) 지역의 절도사로 있을 때 둘째 딸 조(照)를 낳는데, 그녀에게는 언니 이외에도 원상(元爽)과 원경(元慶)이라는 전처소생의 두 이복 오빠가 있었다. 무사확은 14인의 개국공신에 이름을 올렸으나 출신이 미천해서 다른 공신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당고조 이연(唐 高祖 李淵)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무사확이 상처(喪妻)하자 수나라의 재상을 지냈던 양달(楊達)의 딸을 그의 후처(後妻)로 중매한다.
무사확(武士彠)의 딸 조(照)는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출중한 미모와 총명함으로 소문이 났다.
아버지 무사확은 그녀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공부를 시켜 말타기와 활쏘기, 춤과 노래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특히 시(詩)를 짓고 글(書)을 쓰는 데 대단히 능했다고 한다.
당시는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통치하던 정관의 치(貞觀之治) 말엽으로 황제는 사랑하던 황후 장손씨(長孫氏)를 잃고 그 후유증으로 어린 소녀들을 탐닉하던 때였다. 아름답고 총명하다는 조(照)의 소문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의 나이로 황궁에 들어갔는데, 황궁에서 미랑(媚娘)이라 불리게 된 조는 다른 소녀들과는 달리, 책 읽기를 좋아하고 시(詩)와 서(書)에 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제 이세민은 그녀를 황실의 서가(書架)를 관리하는 직책에 임명한다. 그것도 비빈(妃嬪)이 아니라 아주 품계가 낮은 단순한 재인(才人)의 지위였다.
그것은 아버지가 공신(功臣)임에도 불구하고 명문귀족(名門貴族)에 끼지 못하는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미랑은 독서와 학문을 즐길 수는 있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12년 동안이나 황제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도 성은(聖恩)을 입지 못했으며, 품계도 궁에 들어올 때의 재인(才人) 그대로였다. 그러나 기회가 된 것은 태자 이치(李治)였다. 당시 이세민은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한 후 깊은 병이 들었다.
무미랑(武媚嫏)은 병석에 누운 황제(皇帝) 이세민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병문안을 온 태자 이치(李治)가 무미랑에게 반하게 된다. 이세민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서 쉰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황제의 여인으로 분류되었던 무미랑은 법(法)에 따라 비구니(比丘尼)가 되어 감업사(感業寺)로 출가(出家)한다. 태종(太宗)으로 추서(追敍)된 이세민의 첫 번째 기일(忌日)이 돌아오자 황제위에 오른 이치는 예불(禮佛)을 올리기 위해 감업사(感業寺)를 찾았고, 그곳에서 비구니 노릇을 하던 무미랑과 일 년 만에 재회한다. 그녀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필사적인 노력으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 이치를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두 사람은 감업사에서 은밀한 관계를 지속했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 태자 이치는 그녀보다 세 살 아래였다.
황제위에 오른 이치(高宗)는 연인과의 밀회를 위해 감업사 행차가 잦아지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실에서는 무미랑의 환속(環俗)과 재입궁을 추진했는데 당시 고종의 황후였던 왕(王)씨는 개국공신 왕인우(王仁佑)의 딸로 이치의 네 부인 중 하나인 숙비 소(蘇)씨로 인해서 골치를 썩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무미랑은 황제와의 밀회 일 년 만에 다시 입궁했는데 이번에는 소의(昭儀)라는 지위였고, 황제의 공식적인 여인 121명 중 6번째 서열이었다고 한다. 고종은 이미 무소의(武昭儀)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는데 입궁 바로 다음 해에 아들 이홍(李弘)이 태어나자 숙비 소(蘇)씨는 황제의 총애를 잃고 서민으로 강등된다. 황후 왕씨의 입장에서는 늑대를 쫓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형상이었지만, 무소의가 워낙 노련하게 처신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소의가 얻고자 한 것은 황제의 은총이 아니라 무한한 권력이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황후의 자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황제(高宗)와 황후 왕(王)씨는 태자시절 일찌감치 결혼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
무소의가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희생이 필요했다. 무소의가 낳은 두 번째 아이는 딸이었는데 공주는 매우 예쁘고 귀여워서 황후를 비롯한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왕(王) 황후가 이 아이를 보고 간 다음 갑자기 아이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황후가 다녀간 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황제의 분노가 폭발했으며, 황후 폐위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일설(一說)로는 무소의가 황후를 모함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이불로 덮어 질식해 죽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진위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후일 그녀가 보여준 잔인함이나 포악함으로 판단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
일례로 고종이 자신을 두고 다른 후궁 처소로 드나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노하여 그 후궁의 손발을 자른 다음 술 항아리 안에 가둬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른네 살에 비로소 황후의 자리에 오른 무소의는 황제 이치가 정신적으로 나약했고 몸까지 허약했기 때문에 많은 권한을 황후에게 위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무후는 아이들을 연이어 낳아, 어려서 죽은 딸을 제외하고도 슬하에 모두 4남 1녀를 두었는데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현(李顯), 이단(李旦)이며, 딸 하나는 태평공주(太平公主)였다. 무 태후는 태자인 왕 황후의 아들 이충(李忠)을 폐하고 자신의 큰아들 이홍(李弘)을 새로운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태자 이홍은 장성하면서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어머니(武侯)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권력에 눈이 먼 무후는 자신의 아들 태자 이홍에게 독주(毒酒)를 마시게 하여 살해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뒤이어 둘째인 이현(李賢)이 태자로 임명하지만, 또다시 대립하게 되자 모함(반역죄)하여 파주로 귀양을 보냈다가 살해한다. 뿐만아니라 이현의 세 아들(자신의 손자)도 유폐시킨다.
그녀의 권력욕은 끝이 없어 아들이고, 손자고 가차없이 죽이고, 자신이 권력을 움켜쥐는데 혈안이 된다.
마침내 고종(李治)이 죽자 측천무후는 어머니에게 순종적이었던 셋째 아들 이현(李顯)에게 황위를 계승(中宗)하지만 즉위 55일 만에 이현이 장인을 재상에 임명하려 하다가 어머니에게 미움받아 유폐되고,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황제(睿宗)로 삼아 측전무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측천무후는 65세가 되던 해(AD 690), 아들 예종 이단(李旦)마저 황제위에서 폐하고 자신을 측천금륜대성신황제(則天金輪大聖神皇帝)라 칭하며 황제위(皇帝位)에 올라 국호(國號)를 당(唐)에서 주(周)로 바꾸니 중국 역사상 유일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황제가 된다. 훗날 역사가들은 중국 고대 주(周)나라와 측천무후의 주(周)나라를 구별하기 위해 무씨(武氏) 집안의 주나라라 하여 ‘무주(武周)’라고 불렀다. 측천무후는 말년에 황궁 내에 공학부(控鶴府)라는 기관을 두고 스무 살 안팎의 미소년 일흔두 명을 모아 자신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공학부는 무후가 색(色)을 밝혔다기보다 그들의 기운(氣運)을 빌어 젊음을 유지하고자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역대 남자 황제들은 채음보양(採陰補陽)을 위하여 어린 여인들을 안고 잤는데 그 상대개념인 채양보음(採陽補陰)의 비법이었다. 이러한 비법이 실제로 효험이 있었는지 무후(武后)는 일흔이 넘었는데도 그녀의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싱싱한 외모가 시들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피부가 일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십 대 소녀와 같은 탱탱함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녀는 노쇠하여 임종이 가까워지자 AD 705년 11월, 셋째 아들 이현(李顯)에게 황제 위를 물려주는데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李旦),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武氏)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側天大聖皇后)로 부를 것과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에 합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임종하니 향년 82세로, 황후의 자리에 오른 지 50년, 황제로 즉위한 지 16년 만이었다. 임종을 앞두고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은 폐(閉) 황후 왕씨의 일가, 소숙비(蘇淑妃)의 일족들, 자신이 처단했던 고종조(高宗朝)의 신하들인 저수량(褚遂良), 한원(韓瑗), 유상(劉尙) 등의 일족들을 모두 사면(赦免)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또, 그녀는 자신의 묘비(墓碑)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현재까지 우뚝 서 있는 아무것도 적어 넣지 않은 거대한 비석을 무자비(無字碑)라고 하는데 중국의 사학자들을 당혹케 한다고 한다.
자신의 업적과 과실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에게 맡긴다는 의미였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측천무후의 정권 후기, 불교에 심취한 그녀는 많은 사찰 건립과 불사에 힘썼는데 낙양 인근의 용문석굴 (龍門石窟) 봉선사(奉先寺)에 바위벽을 깎아 거대한 불상을 봉안하였는데 석불의 모습을 부처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합쳐서 조각하도록 했다고 한다.
4. 서태후(西太后) <청(淸)나라/ 함풍제(咸豊帝)의 비(妃)/ 아명 난아(蘭兒)/ 자희(慈喜)>
서태후(西太后 慈喜) / 동태후(東太后 慈安) / 동치제(同治帝 載淳) / 선통제(宣統帝 溥儀)
만약 인생의 목표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맛보고,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곳에 살면서 모든 사치(奢侈)를 다 하고, 사람들의 아첨(阿諂)을 받는 것이라면 청나라 서태후(西太后)는 최고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권력을 잡고 있던 기간은 48년간이었는데, 권력을 독점했던 기간도 무려 28년이나 되었다. 1835년생인 서태후는 만족(滿族) 출신인데 그녀의 성은 에호하라(葉赫那拉)로, 어릴 적에는 난아(蘭兒)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열여섯 살 때 하위계급의 궁녀인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가 이때부터는 자희(慈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 함풍제(咸豊帝)는 황후 자안(慈安)이 있었는데 자희(慈喜)는 우연한 기회에 황제의 눈에 들어 입궁한 후 4년 만에 마침내 황제의 성은(聖恩)을 입는 행운을 잡는다.
그녀는 스물한 살에 왕자 재순(載淳)을 낳는데 재순은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다.
함풍제는 밀려드는 서구열강의 압박(아편전쟁)에 이복동생인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에게 수도(首都) 방위를 위임하고 황후인 자안(慈安), 그리고 자희(慈喜)와 재순(載淳) 모자만을 데리고 열하(熱河)로 도피한다. 북경에서 황후 자안(慈安)의 처소가 자금성(紫金城)의 동쪽에 위치하고 자희(慈喜)의 처소는 서쪽에 위치하여 사람들은 황후 자안을 동태후(東太后/慈安皇太后), 자희를 서태후(西太后)로 불렀는데 동태후 자안(慈安)은 영리하고 단호한 성격인데 서태후 자희는 권력욕과 탐욕이 강한 성격이었다. 심약한 함풍제는 도피처인 열하(熱河)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죽으니 청의 권력구도는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 황후인 자안(慈安), 제2 황후인 자희(慈喜)와 조정의 대소사를 처리하던 팔대신(八大臣)의 4대 세력으로 압축되는데 공친왕을 필두로 동태후와 서태후는 팔대신(八大臣)을 숙청(肅淸)하고 향후 20년간 삼두체제(三頭體制)를 지속하게 된다.
공친왕이 죽자 서태후는 아들 재순(6세)을 황제(同治帝)로 앉히나 18세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다시 3세인 조카를 황제(光緖帝)로 앉히고 국가의 실권은 두 태후가 거머쥐는데 광서(光緖) 7년에 동태후마저 급사하자 서태후가 청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게 된다. 동태후의 죽음은 소문에 의하면, 서태후가 남몰래 남자를 황궁에 불러들여 즐기다 임신을 하는 바람에 동태후가 예부(禮部)와 서태후의 폐후(廢后)를 논의했고, 이를 눈치챈 서태후가 독이 든 떡을 보내 독살했다고 한다.
광서(光緖) 24년인 1898년, 광서제는 대대적인 개혁운동(變法自疆運動)을 벌이나 100일 만에 실패하자 서태후는 야심가인 원세개(遠世凱)를 움직여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를 모두 숙청하고, 광서제를 조그마한 섬 영대(瀛臺)에 감금하는데 광서제(光緖帝)는 4년 후에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서태후는 곧바로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의 세 살 먹은 아들 푸이(溥儀)를 선통제(宣統帝)로 세우니 청의 12대, 대청제국의 마지막 황제(皇帝)이다. 서태후는 세 번째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도하는데 선통제가 즉위한 이튿날 급작스럽게 사망했는데 향년 74세였다. 황제의 후궁(後宮)으로 들어와 40여 년 동안 정권을 휘둘렀던 철의 여인 서태후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은 ‘이질(痢疾)’이라는 병에 속절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광서제가 죽고 푸이가 정권을 이어받던 다음날이 서태후가 숨을 거둔 날이었는데 광서제(光緖帝)도 결국 서태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서태후(西太后)는 끼니마다 100가지의 요리를 차리도록 했는데 그녀의 한 끼 식비로만 은화 200냥이 지출되었다고 하는데 이 금액은 당시 서민들 100명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또, 프랑스와의 전쟁이 클라이맥스에 왔을 때, 서태후는 거금을 들여 자신의 거처인 저수궁(儲秀宮)을 신축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환갑잔치를 위해서 2년 전부터 거국적으로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해에 청일 전쟁이 발발한다. 이홍장(李鴻章)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일본군이 대련(大連) 항에 상륙해서 대대적인 민간인 살육과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는 동안 서태후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3일 동안이나 계속된 연회였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서구열강 침략자들에 의지하고자 광서 26년인 1900년, 서구열강이 12개 조의 요구사항을 제출하자 그녀는 별다른 협상도 없이 모두 수용했다. 그 결과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보장하기 위해서 주요 재정 수입원인 관세와 염세(鹽稅)는 모두 차압(差押) 당했으며, 외국군이 주요 도시에 진주(進駐)하게 되었다. 또, 청나라 국민들의 서구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중 운동을 탄압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중국사의 가장 큰 굴욕인 신축조약(辛丑條約)이다.
이 와중에도 서안(西安/長安)에 머물던 서태후는 북경에서와 같은 호화판 생활을 계속했다고 하며 하루에 200냥씩 지출되는 식사도 그대로 유지했다고 한다. 웃지 못할 이야기로 내시(內侍)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이 한 올만 떨어져도 죽였다고 한다. 머리를 빗기는 내시(內侍)는 빠진 황후 머리카락을 몰래 옷소매에 감추기 위하여 머리를 빗길 때 옷소매가 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한 내시(內侍)의 일기(日記)에 따르면, 한번은 늙은 내시가 실수하자 그에게 강제로 사람의 똥을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오손공주(烏孫公主) 비수가(悲愁歌)
4대 미녀와 악녀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 세군(細君)의 가슴아픈 이야기를 덧붙인다.
오손국(烏孫國)은 서역 지방에 할거하던 투르크계의 유목 민족으로, 한때 그 세력이 천산(天山)산맥 북쪽의 이르츠크 호수로부터 일리강(伊犁河) 유역의 분지까지 이르렀을 만큼 강대했다.
전한(前漢) 시대, 중국의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匈奴)는 오손(烏孫)보다 강했는데, 자주 한(漢)나라를 침범했다.
한(前漢)은 고조 유방(劉邦) 이래 6대 황제 경제(景帝)에 이르기까지 줄곧 펼쳐 왔던 흉노에 대한 화친(和親) 정책을 펴왔으나 무제(武帝)에 이르러 강공책으로 바꾸고 오손(烏孫)과 함께 흉노를 협공할 계획을 세우고 장건(張騫)을 사신으로 보내 오손(烏孫)과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10년 후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한무제(漢武帝)는 자신의 형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인 세군(細君)을 공주라 속여 늙은 오손의 왕에게 시집보낸다. 그 이후 흉노는 한나라와 오손의 협공을 견디다 못해 한층 더 북방으로 밀려났으며, 서역(西域) 50여 나라가 한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되었고 한나라는 이민족의 이반을 막기 위해 쿠자(龜玆)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두었다. 세군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 땅에서 사는 슬픔을 노래한 것이 오손공주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이다.
♣ 오손공주 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
吾家嫁我兮天一方(오가가아혜천일방) 우리 집에서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쪽 끝이어라
遠托異國兮烏孫王(원탁이국혜오손왕) 머나먼 타국에 몸을 맡기니 오손왕이로다
窮廬爲室兮旃爲墻(궁려위실혜전위장) 천막이 집이 되고 모전은 담장이 되었으며
以肉爲食兮酪爲漿(이육위식혜락위장) 고기가 밥이 되고 양젖이 국이 되었네.
居常土思兮心內傷(거상토사혜심내상) 살면서 항상 고향 그리워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願爲黃鵠兮歸故鄕(원위황곡혜귀고향) 황곡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황곡(黃鵠)-누런 고니<세군(細君)을 일명 황곡(黃鵠)이라 부르기도 한다.> ♣旃(전)-모전<장막>
이 노래를 전해 들은 한무제(漢武帝)도 세군(細君)을 가엾게 여겨 해마다 세군(細君)에게 선물을 보냈다.
수년이 지나 노령(老齡)이 된 오손왕은 오손국(烏孫國)의 풍습에 따라 세군을 자기 손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풍습이었지만 세군에게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군은 한나라에 사자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귀국하게 해 달라고 무제에게 부탁했으나 무제는 끝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세군은 오손왕의 손자인 손잠(孫岑)의 아내가 되어 딸을 낳았다. 이처럼 한나라를 흉노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 공신 세군(細君)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 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며 슬픔 속에 살다가 늙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