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한글속기가 처음 시작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9년 박여일 선생이 조선어속기법을 창안하여 발표한 것이다.
내가 중 고등학교를 다녔던 1960년대만 해도 속기로 취직할 곳은
국회 밖에 없었지만 '1인1기'하면 항상 속기가 포함되어 인기였다.
그래서 한글기음식 속기법의 창안자이신 정아량 선생이 전주에서
내가 다녔던 경북 군위 의흥 시골중학교에 까지 오셔서 1시간동안
공개강의를 하시고 10쪽 짜리 프린트물을 팔고 가셨다.
대학 4학년때 대구 현대종합학원에서 웅변과 속기를 강의 하였고,
졸업후 한국웅변속기연구소를 설립해서 본격적으로 웅변과 속기를 강
의 했다. 그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 군위군과 경북도청에서 근무하게돼
5년간 쉬게 되었다. 1980년 대구매일신문 사회부 기자가 되고 언론
인은 겸직이 허용되어 본격적으로 속기학원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
르고 있다.
한글속기가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국가시험을 시행 한 것이 1984년이고,
컴퓨터속기 시험을 시행한 것은 1998년이다.
과거에는 속기가 공식적으로 취직 할 곳은 국회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상
하게도 속기를 배우는 사람이 요즘 보다 더 많았으니 이상 하지 않는가.
그러다가 1991년 지방의회가 출범하자 속기대란이 일어났다.
스포츠신문 마다 1면 톱으로 '속기사 귀하신 몸 됐다'라고 보도 될 정도로
속기사가 부족해서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다.
그래서 도회지의 시 ·군·구의회에는 속기사를 채용 할 수 있었으나
지방에는 갈 사람이 없어, 아직도 속기사 대신에 일반인이 속기사를 대행해서
녹음을 한 것을 여러 번 듣고 회의록을 작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10년전 부터 컴퓨터속기사가 배출됨에 따라 법원 검찰청 자막방송 녹취사무소
등에서 많이 활동 하고있다.
속기의 현재는 여기서 길게 이야기 하지 않겠다.
다만 나의 딸 둘도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지만 취업이 어려워서 컴퓨터속기를
공부해서 법원과 시의회에 취업하여 적은 봉급이지만 공무원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즐겁게 열심히 다니고 있다.
며칠전 TV뉴스에 대학원을 나온 사람도 여러명이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이
되겠다고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들고 달리다가 엎어지기도 하는 것을 보고 취직
의 심각성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11월9일 7급 국가직 공무원공채시험에 2만8,957명이 응시해서 합격자
592명(행정직 461명, 기술직 110명, 외무직 20명)이 발표되었는데, 2만8,365명은
떨어진 것이다. 지난해부터 연령제한이 없어져 위의 합격자중 36세 이상이 74명,
최고령자는 49세라고 한다. 정말 공무원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
2011년이면 의회가 출범한지 20년, 그 당시 25세에 들어간 속기사는 45세,
30세에 들어간 사람은 50세가 된다. 지방의 자막방송 실시 등 앞으로 5년,
10년 안에 틀림없이 속기사가 또 한번 귀하신 몸이 될 것이라 확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