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이 ‘2013년 사망원인 통계’를 발표했다. 작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하루 평균 약 40명, 37분에 한 명꼴이다.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무엇보다 청소년 자살률이 심각한 시점에 잠을 제대
로 자지 못하는 청소년의 자살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를 접했다. 수면부족 문제는 과도한 학업과 연결된다. 결국 학업에 대한 압박이 생명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는 거다. “시끄러워! 너는 공부나 해!” 우리나라 부모들이 습관처럼 뱉는 말이다. 아이가 하는 학업 이외의 모든 말은 ‘쓸데없는 말’로 싸잡아 버린 부모 아래 자녀는 외롭다. 외로움은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우울증은 불면을 부른다. 이쯤 되니 수면시간과 자살의 상관관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춘기 아들 때문에 속 터진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상담을 왔다. 그 무섭다는 ‘중2’ 남학생을 대면한 순간, 어머니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훤히 보였다. 반항아 이미지 그 자체다. “아들! 참 잘생겼네? 이름이 뭐에요?” 분위기를 띄워 볼 요량으로 한마디 건넸다가 된통 당하고 말았다. “형식적인 말 같은 거 하지 마세요!” 턱을 치켜든 채 도전적으로 쏘아붙이는데 하마터면 죄송하다고 사과할 뻔 했다. “감사합니다, 해야지!” 어머니가 나서면서 잠시 모자간의 말싸움이 오갔고 그 사이 사춘기 아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 또한 강적이다. “너! 사춘기와 갱년기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알지?” 갱년기 어머니의 한마디가 사춘기 아들을 KO패 시키고 상황이 종료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갱년기 증세가 심각한 어머니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매번 응급실로 향했던 전례가 있었단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져 준 셈이다. 기어이 아들을 이기고 나서야 어머니는 내게 아들을 내주었다. 나와 단 둘이 마주한 사춘기 아들은 의외로 고분고분 말문을 열었다. 아이의 불만은 단순했다. 이래라, 저래라 간섭 좀 그만했으면 좋겠단다.
사람은 생각하는 만큼 성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이 ‘생각하고’ 있기보다는 ‘행동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물론 생각만 있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문제지만 생각은 없고 행동만 있는 자녀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인재로서는 부적격일 수 있다. 생각이 기초가 되어야만 우리의 삶이 바뀌어갈 수 있다. 자녀와의 대화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독일 사람들은 아이들의 생각과 상상력을 기존의 틀에 묶어 두질 않는다. 그들은 “어떤 질문도 버릴 것이 없다”라는 의식이 불문율로 통한다.
독일 유학생이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주인 집 독일 엄마가 아이를 곁에 두고 감자를 깎고 있었다. 옆에서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던 철없는 아이가 그 생감자를 덥석 집더니 입으로 가져가더란다. 당연히 이 모습을 보던 한국 유학생이 화들짝 놀라면서 “지지! 이건 먹는 거 아냐!”라며 감자를 뺐었다. 그랬더니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왜 가로막느냐며 화를 냈다. 먹어보고 맛이 없으면 뱉어낼 것이 당연한데 아이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뺏어버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리부터 해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정해줘 버리면 아이의 자립심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들의 교육방식이다. 결국 스스로 경험하면서 배워가야 한다는 얘기다.
“너 왜 피아노 학원에 다녀? 피아니스트가 꿈이야?” 아이들에게 물으면 “아뇨, 엄마가 다니래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심지어 대학 진학 학과를 선택할 때도 부모가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믿기지도 않지만 입사 면접시험장에서도 지원동기를 물으면 “엄마가 시켜서”라는 대답이 나왔다는 말도 나돈다. 도무지 자녀의 생각이란 없는 거다. 21세기에는 이런 ‘종속형 인간’이 리더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지식, 능력, 경험을 동원해서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리더가 필요한 시대이다. 성급한 참견이 아이의 자립심을 헤칠 수 있다.
현명한 부모는 한 발짝 물러나 아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법륜 스님은 어려서는 정성껏 돌봐주고 사춘기가 되면 지켜봐 주고, 성인이 되면 놔주는 것이 부모 사랑이라고 했다. 이런 관계라면 부모 자식 간에 사춘기와 갱년기의 전쟁 따윈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