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나무·역사
글·사진 / 김무진(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대사회의 나무와 사람
원시사회를 거쳐 맞이하는 다음의 사회는 흔히 고대사회라 부른다. 원시사회와의 큰 차이는 계급이 생기고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고조선, 부여, 예, 삼한에 이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등장하였다. 이들 사회의 규칙이나 국가의 조직이 처음부터 짜임새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관심인 자연의 이용에 대한 사회의 규칙이 생기는데 그러한 것들 가운데 일부가 다듬어져서 국가의 법으로 정해진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는 자연의 이용에 대해 관습적인 규칙을 가지든지 아니면 법에 그러한 것들을 규정한다. 자연인 산림은 사람들 삶의 한가운데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앞서 말한 바대로 역사가 진행되면서 자연의 이용이 더욱 확대되고 있으며 산림 자체의 이용뿐만 아니라 목재의 이용도 더욱 다양해진다. 나아가서는 산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생활 속에 자리 잡고 다른 한편으로는 숭배의 대상으로 되기도 하였다. 이제 고대사회의 산림의 이용과 산림관 혹은 국가정책 등에 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삶의 터전인 자연, 그 가운데 산림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다음과 같은 옛 기록을 인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환웅이 그의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여기를 신시(神市)라 일렀다.” (『삼국유사』권1 기이편 고조선) 환웅이 내려온 곳은 나무 아래이고 거처를 정한 곳은 산이다. 산은 세상을 다스리는 환인이 아들을 내려 보낸 신성한 곳이며 현실의 삶이 펼쳐지는 곳이다.
신라의 시조도 숲속에서 나왔으며 나라 이름까지 숲의 이름으로 고쳤다. 탈해왕 재위기 김알지를 얻을 때에 닭이 숲속에서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鷄林)이라 하였다는 것이다.(『삼국유사』권1 기이편 신라시조 혁거세왕) 신라의 숲도 왕을 보내주는 상서로운 장소이었다.
고구려 초기의 왕은 죽은 후 숲의 이름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묻혔다. 소수림왕 14(384)년 11월, 왕이 별세하자 소수림(小獸林)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소수림왕이라 하였다.(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14년) 많은 왕들이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그 언덕의 이름을 따르고 있다. 이 언덕은 사냥을 하든가 혹은 땔나무를 얻는 숲이었다. 앞서 산상왕은 산꼭대기 산상릉에 장례하였고, 봉상왕은 봉산 언덕에, 동천왕은 시원(柴原) 곧 땔나무를 얻던 언덕에 장례하였지만 이름은 동천왕이라 하였다. 중천왕은 중천 언덕, 서천왕은 서천 언덕, 미천왕은 미천 언덕, 고국원왕은 고국 언덕에 장례하였다. 고구려의 왕명이 지명과 관련없이 시작되는 것이 광개토대왕이다.
그러하였기에 중국인은 그들의 역사서인 『위서』 동이전에서 ‘고구려에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어 산골짜기에 의지해 살면서 산골의 물을 식수로 쓴다.’고 기록하였다. 고구려 옆에 있던 예(濊)는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산과 내는 각각의 삶의 터전이기에 일정한 생활공간을 정하고 그것을 서로 지키는 것이다. 산림을 사용하는 사회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글자가 쓰인 나무 목간(木簡)
신라 헌강왕(憲康王) 12(886)년 봄 북쪽 진에서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판자쪽을 나무에 걸어놓고 돌아갔다.’고 상주하였다. 그것을 가져다 바쳤는데 그 판자쪽에는 15자가 적혀 있었다.(『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헌강왕 12년(886))
나무는 이와 같이 종이 대신 사용되었다. 편목(片木)을 사용하여 기록한 것들을 목간, 목독(木牘), 목첩(木牒), 죽간(竹簡)이라 하였다. 이러한 목간은 신라와 백제뿐만 아니라 가야의 것까지 상당히 많은 분량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 주변에서 발굴된 목간은 인력관리에 관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같이 목간은 고대사회의 여러 모습을 알 수 있는 좋은 기록자료이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목간은 백제의 관직을 기록하고 있으며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목간은 화물의 표시를 한 물표로 추정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목간은 율령이나 제사의례 등에 관해서도 기록하여 역사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전령인 셈이다.(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주류성)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백제(후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에서 가로막는다는 소문을 듣고 궁사(弓士) 50명을 따르게 하였다. 배가 곡도에 이르렀을 때에 풍랑이 크게 일어나 십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머물게 하면 순풍을 얻을 수 있다하여 나뭇조각 50쪽에 이름을 각각 쓰게 하여 물에 잠기는 거타지를 남겨두었다.(『삼국유사』 권2 기이2 진성여대왕 거타지)
목기로 변한 나무들
눌지 마립간(訥祗痲立干) 22(438)년, 백성들에게 우차(牛車)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하여 이때에 비로소 우차가 처음 보급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 마립간 22년) 짐작컨대 국가 차원의 우차 보급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우차 제작에는 나무가 소용된다는 것이다. 이 시기쯤이면 각종 기기 제작에 나무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집을 짓는 것은 물론이고, 농기구, 무기 그리고 각종 생활 용구에 나무가 쓰였다.
옥수수나 혹은 콩 따위를 파종하기 위해 골을 파는 데 쓰는 고써레는 밤나무나 느릅나무로 만들었으며 얼레는 소나무로 만들었다. 가야문화재연구소에 의하면 함안 성산산성 일대는 활엽수와 침엽수의 혼합림이며 목재의 굳기에 따라 목기를 만들었다 한다. 농기구는 단단하고 질긴 상수리나무, 밤나무 등을 사용하였고 생활용구들은 연하고 부드러운 소나무, 버드나무, 오리나무속 등을 사용하였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08. 한국의 고대목기) 이제 사람들은 어떠한 나무를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하여 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 나무의 성질을 잘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각종 도구는 다양하게 개발되어 갔다.
공주·부여 등 백제수도 외곽 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백제시대 목간
고려청자 운반선인 태안선에서 발굴된 12~13세기 목간
종자를 파종하기 위해 골을 파는데 쓰는 고써레
소나무로 난든 얼레
첫댓글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