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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삶의 기초
책 저자: 김형국
성경공부 교재로 재 편집: 제석침례교회 제자훈련 교재연구부
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나
첫 번째 만남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복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
2.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이들의 고백
3.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Ⅰ
4.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Ⅱ
1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생각해볼 질문
당신은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당신에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생명을 내놓을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는데, 십자가란 당시에는 다름 아니 사형 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너무도 쉬워 보이는 오늘날,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또 그리스도인다운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출발점을 분명히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제 그 출발점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출발점으로 오해하기 쉬운 것들을 잠시 점검하고자 합니다.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출발점에 대한 오해
1. 모태신앙
2. 영접기도
3. 침례
4. 구원의 확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첫 번째,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과 나를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나의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두 번째,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고 나 또한 그러한 사람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죄’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창3장;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나 자신’이 중심인 상태 ‘나 자신’이 주인인 상태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전부 “내 거야”라고 주장하는 그 자세가 죄입니다.
세 번째, 이러한 창조주에 대한 반역의 대가는 죽음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 우리 각자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지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에 기초한 사랑을 만납니다.
이것이 세 번째 중요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네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 각자를 위해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것을 요약한다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묵상질문
1.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믿는 4가지 내용을 당신의 말로 다시 정리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 네 가지를 진심으로 믿습니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감사. 고백, 간구 등).
2. 로마서 5:8을 일고 묵상해보십시오.
*합심기도
1. 그리스도인은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
2. 죄인을 부르셔서 그리스도인으로 삼아주심에 대한 감사
3. 주여 도우셔서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도록 힘과 능력 주소서.
2과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이들의 고백
생각해볼 질문
스스로 자신있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사도 바울의 고백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1. 자기 중심성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2. 이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3. 이제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주님께 속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그분의 뜻이라면 그것이 최상의 뜻이고 최선의 길이니 그 길을 좇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참된 고백인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의 삶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시라면 그때부터는 그 예수님이 주인으로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가치관과 뜻에 순종하는 지를 보면 진정으로 예수님이 주인인지 아닌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완벽과 진실
사탄이 하는 일중 하나가 참소, 곧 고소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인으로 고백했음에도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 덜 성숙한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분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그와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제 우리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다 못따라간다 할지라도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그분과 더불어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고백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했다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성경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메시지에 정직하게 반응할 때 가능합니다.
3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 1
생각할 질문,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당신이 누리게 된 좋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하니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세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해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즉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15절은 그것을 ‘입양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양할 때 하나님은 모진 대가를 지불하셔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는 우리를 완벽하게 용납하셔서 그의 것, 그의 소유를 삼으시기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알려줍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들이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대가를 다 지불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에는 이런 놀라운 축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이 구절은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죄사함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받았다’입니다. 즉 이것은 완료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더러운 모습이어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어 이제 하나님의 온전한 용납을 경험하고, 그 분의 선하신 다스림 아래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두 번째 축복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 두 번째 축복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별볼일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은 예수님과의 특별한 괸계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포도나무가지처럼 별볼일 없는 존재지만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 접붙여졌기에 연약해보이는 가지에서 포도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서 특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특별한 존재로 만드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너는 나와 특별한 관계이고, 내가 특별히 만든 나의 작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교회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이 작품인 것을 기억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완성시켜 가십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상처 때문에 더욱 특별한 존재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속에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시기 시작하실 때, 인간이 절대 빚을 수 없는 특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과거에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의 손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죽는데 내어주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기독교 역사상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바꾸셨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었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핍박자요 훼방자였지만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일꾼으로 삼아주셨다
☞여러분에게 어떤 과거가 있는지, 어떤 슬픔과 실패가 있는지, 좌절해서 다시 일어설 수 없는 현재 어떤 어러움을 가지고 있는 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그런 어려움과 아픔들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만드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
묵상질문
1.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얻게 되는 세 가지 축복 중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 있다면 기도로 고백하십시오.
2. 이 두 가지 축복을 알려주는 성경구절에서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읽고 깊이 묵상해보세요.
4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Ⅱ
생각할 질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혼자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까? 언제 왜 그런 생각이 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3
◆ 세 번째 축복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가족 공동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 3가지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가족공동체.
(갈 4:6, 개정)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서로 보살피고 사랑하는 특권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명공동체.
(엡 1:23, 개정)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우리가 함께 속해서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움직여 나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어떤 사명과 목적을 향해서 함께 걸어가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가진 영적 독립군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홀로 싸우며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몸의 소중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죽어 있는 고깃덩어리를 뜻하지 않고 살아서 서로 연결되고 말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유기체를 뜻합니다.
3.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 예배공동체.
(고전 3:16, 개정)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교회를 성령의 전이라고 할 때 이는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고, 어떤 사명을 가지고 함께 일하며 궁극적으로 이것을 가증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예배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감격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우리가 그의 만드신 바(포이에마)라고 했는데 이 포이에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로 그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만남. 성경적 믿음의 원리
1.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축복을 누리는 열쇠
2. 은혜와 믿음
3.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
4. 믿음으로 사는 삶의 원리
1과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축복을 누리는 열쇠
*생각해볼 질문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난 번 첫 만남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놀라운 사실을 자기 것으로 누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은 결국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기쁨이 풍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탈색하고 퇴색하고 생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안은 날이 갈수록 퇴색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앙이 깊어지고, 더 맛이 나고, 더 멋있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지 못합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여 이 놀라운 축복을 받았는데도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옹졸하게 뒤틀리고 궁상맞게 살아갑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에서 그에 대한 고전적인 답변을 찾아봅시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예수님은 누가복음 8장 5-15절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놀라운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게 자라지 못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십니다.
(눅 8:5, 개정)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눅 8:6, 개정)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눅 8:7, 개정)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눅 8:8, 개정)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 8:9, 개정)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눅 8:10, 개정)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눅 8:11, 개정)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눅 8:12, 개정)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눅 8:13, 개정)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눅 8:14, 개정)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눅 8:15, 개정)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먼저 여기 나오는 씨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11절에서 정확하게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여기서 던질 질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일반적인 많은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나오는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씨가 떨어져서 궁극적으로 맺고자 하는 열매는 바로 ‘구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 구원의 메시지를 말씀과 사역,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또다시 그 ‘씨앗’을 사람들에게 뿌렸고, 이 일은 지난 2천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네 가지 밭
첫 번째 씨, 길가에 떨어집니다(12절).
길가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12절), 악마가 그것을 공중의 세계로 가져가 버립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씀이 아예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씨, 돌짝밭에 떨어집니다(13절).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은 초기에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잠시 후 시련이 왔을 때 이 씨앗이 뿌리는 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입니다(14).
가시덤불이 그 위를 감싸고 있어서 자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살아가는 동안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이 그 자라는 기운을 막아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째 씨, 좋은 땅에 떨어진 씨입니다(15절).
15절은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첫째,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듣고”라고 말합니다.
둘째, “굳게 간직하며”라고 말합니다.
셋째, 인생이 계속해서 우리를 가시덤불과 같은 것으로 시험하고, 우리로 딴마음을 품거나 좌절하게 만들 때 어떻게 해야합니까? “견뎌야” 합니다.
묵상질문
1. 누가복음 8: 5-8, 11-15을 다시 읽고 묵상해봅시다.
2. 우리 마음 상태는 네 가지 밭 중에서 어떤 밭일 때가 많습니까?
특별히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신 씨앗이 우리 삶과 인격에서 결실을 맺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합심기도
1. 주여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좋은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으로 인도하소서.
2. 주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3. 주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게 하소서.
2과 은혜와 믿음
생각해볼 질문
믿음이 좋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것을 굳게 간직하며 견디는 것
그런데 어떻게 하면 마음을 듣고 굳게 지키어서 견디어 낼 수 있을까요?
믿음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
(엡 2:8, 개정)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개정)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본문은 우리가 두 가지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고 설명하는데 곧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또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은혜란?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감동을 받고, 찬양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은혜이긴 합니다만 은혜 중에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고 하나님께 적대적이며, 하나님을 무시했던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그냥 주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빌라도의 재판에서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고 바라바를 살려준 것처럼, 바라바같은 우리가 살고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은혜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이란?
(믿음에 대한 예)
제가 지갑을 통째로 친구에게 건냈을 때 친구가 그것을 감사하며 받는 것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감사합니다”하고 받는 것입니다.
믿음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할 수 있는 말씀
(엡 1:7, 개정)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구속, 곧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이 은혜 때문이고, 믿음은 그 은혜가 우리 것이 되게 할 뿐입니다. 구원받는 데서 믿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절대로 은혜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엡 2:5, 개정)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범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사신 것이 은혜이고, 믿음이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실 일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네”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고, 그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도 매우 중요하나 은혜가 없다면 믿음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저자예화)
뉴질랜드에서 빙하가 흐르는 급류에서의ㅡ 레프팅 도중 ‘보트 안으로’라는말을 잘못 알아듣고 보트에 앉아있다가 폭포를 지나면서 급류에 떨어져 낭떠러지로 휩쓸려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밧줄을 던져서 잡고 나왔는데, 밧줄을 잘 잡아서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던 위치로 밧줄을 정확히 던져준 것이 중요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내민 생명줄이 은혜라면 그것을 덥석 잡은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의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믿음을 시작한 것이고, 은혜를 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시작했다면 우리가 받은 진리의 말씀,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굳세게 간직하고 또한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는 것은 단지 한순간에 이루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지속적이며 인격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묵상질문
1. 에베소서 2:8-9절을 묵상하십시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이 좋다’는 말과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2. 당시는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보여주셔서 믿음으로 반응했습니까? 당신이 구운받은 과정에서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과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
생각해볼 질문
미신이나 이단의 믿음과 기독교의 믿음은 어떻게 다를까요?
성경은 믿음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칠까요?
◆ 우리가 믿어야 할 두 가지
히브리서 11장 6절은 우리가 가져야 할 두 가지 믿음에 대하여 완벽하게 정의해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본문은 두 가지를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신이 계시다는 지적인 동의를 넘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서 ‘상’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주고 싶어 하시는 구원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복중의 복이며, 상 중의 상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상으로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치시고 성경이 증거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인격적으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며, 우리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네 그렇습니다”하고 답하는 것입니다.
◇ 불신이 전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면, 또한 잘못된 믿음도 있습니다.
1. 미신: 없는 것을 믿는 것
2. 맹신: 무조건 믿는 것
3. 광신: 자기 멋대로 믿는 것
이와 반대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 있는 데 그것을 확신이라고 합니다. 확신이란 사실에 근거하여 믿는 것, 진리에 근거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1. 강하게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생각: 이런 믿음은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것이다.
2. 자기 세뇌나 자기 확신, 자기 의지로 믿는 것
◆ 바른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실 일을 듣고, 이해하고, 믿음으로써 내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정화되고 성숙해지는 것이며, 또한 전인격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묵상질문
1.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과 당신의 믿음을 비교해보십시오. 어떤 부분을 교정해야겠습니까?
2. 히브리서 11:6절을 묵상하며, 묵상하는 지금 이 순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당신에게 주기 원하는 상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4과 믿음으로 사는 삶의 원리
생각해볼 질문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믿음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이라면,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구절이 고린도후서 5장 7절입니다.
(고후 5:7, 개정)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살아가는 원리가 있는데 하나는 잘못된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원리입니다.
잘못된 원리는 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바른 원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 행하고 계신 일들, 행하실 일들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느낌은 인정은 하되, 그 느낌에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성경의 약속을 내 자신에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각, 경험의 시각,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믿음의 시각을 택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믿음의 시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주장하기 시작할 때 우리 가운데 온 은혜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얻습니다.
믿음과 느낌의 문제
국제대학생 선교회 창립자 빌 브라이트 3F 그림
기차에서 중요한 것은 기관차입니다. 그런데 기관차는 석탄차에 연료가 있는 동안만 달리게 됩니다. 기관차가 계속해서 달리려면 석탄차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관차는 객차가 있어야 완성됩니다.
3F라는 기차의 맨 앞에 있는 기관차는 ‘사실’입니다. 가운데 있는 화물차는 ‘믿음’이고, 맨 마지막의 객차는 ‘느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이 없으면 기독교는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로 존재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드릴 때 실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움에 찾아오는 것이 체험입니다. 체험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런 체험을 좇아가면 기독교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사실, 곧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믿으면 체험은 그냥 따라옵니다. 체험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의 의미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하나님 앞에서 주장하고 자신에게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을 꺼내 쓰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여 하신 일중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장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Ⅱ.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세 번째 만남 하나님 알아가기
1. 그리스도 안에 속하기 전의 우리
2.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3.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하는 보고: 성경
4. 말씀으로 자녀의 특권 누리기
1. 그리스도 안에 속하기 전의 우리
* 생각해볼 질문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을 생각할 때 당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좋은 부모 밑에서 성장하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정말 많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교육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또 건강한 자아상과 안정감도 가질 수 있습니다. 부모가 건강한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특권 가운데 가장 큰 특권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부모와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부모 자식 간의 최고의 관계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큰 울타리처럼 정말 좋은 친구같은 그런 부모가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원래 이렇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관계보다 친밀하고, 안전하고,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해주는 그런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번 만남에서 우리가 그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 하나님을 몰랐던 예전의 우리 모습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누구보다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존재로 설계되었음에도,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관계가 그렇게 풍성하고, 그렇게 대단하고, 그들의 인생을 뒤집어 놓을 만큼 강력하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에베소서 2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구절의 마지막에서 우리가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를 개역성경에서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번역했습니다. 진노는 하나님이 사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우주의 정의가 부인되었을 때 일어나는 의로운 분노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
요한복음에서 그 이유를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통찰력 있게 설명합니다. 에베소서는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우리가 아들을 따르지 않고 세상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고, 또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정욕을 따라 우리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니 모든 생명과 사랑과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진노 밑에 있습니다.
*현재적 심판의 성격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은 미래에만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현재 심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깨져 있을 때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느끼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이사야 59장 2절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 본문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갈라졌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죄란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독과 소와와 막막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는 인간의 영혼이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린 이유는, 과거에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면서 얼마ᄂᆞ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우리가 정말 어떤 존재였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것이 얼나나 끔찍한 일인지,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소외인지를 직면하고 절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장신구가 아니라 우리의 본질입니다.
*묵상질문
1. 에베소서 2:1-3절을 깊이 묵상해봅시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고, 하나님이 진노가 미칠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간 한 번 이해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시점부터 평생, 자신의 죄성과 죄악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갑니다.
3. 다음문장을 함께 읽고 그 의미를 묵상해봅시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깊어집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생각해볼 질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는 사실로 인해 당신에게 가장 기쁨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화해
로마서 5장 10-11절을 읽어보면 하나님과의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진노의 자식’, ‘하나님이 원수’였는데,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쪽에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시키셔서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여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며, 이제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때는 심판을 두려워하고 인생의 공허감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담대하게 지성소로
히브리서 10장 18-19절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졌는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이것들을 사하셨은 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구약에서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였으므로 그 죄를 사하기 위해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백성을 대신해서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로 들어갔다가 죽을 수도 있었는데 이렇듯 하나님의 거룩함과 존귀함, 그 영광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성소로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이 영광을 우러러 볼 수 있는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요한일서 4장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고, 아직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용서받은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그분의 피로 용서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용서의 효력은 우리의 회개기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쓸모없는 행동입니까?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을 바꾸며 다시는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젖뗀 아이처럼
시편 131편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여기서 ‘젖뗀 아이’란, 젖을 다 먹고 난 다음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갓난 아이가 아니라, 젓을 떼고 이유식을 먹는 아이, 이제 더 이상 젖을 먹지 않는 아이를 말합니다. 젖을 떼면 엄마를 의지할 줄 알고 엄마와 심리적으로 애착관계가 형성되는 데 그런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평안함을 누린다고 합니다. 젖을 뗀 아이가 엄마와 애착관계가 생겨서 엄마 품에 안겨 편안하고 따뜻하게 쉼을 얻는 상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상태입니다. 젖뗀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그냥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뿐입니다. 무엇을 해야,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무한정 사랑하듯, 우리를 품에 안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묵상질문
1. 로마서 5:10-11. 히브리서 10:18-19, 요한일서 4:18, 시편 131:2 주에서 당신의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성경구절을 마음속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2. 예수님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하는 보고: 성경
생각해볼 질문: 성경 읽기의 가장 큰 유익은 무엇입니까?
1. 성경: 하나님에 대한 최고급 지식
성경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완전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인간 역사의 3,500년 정도를 다루고 있으며, 3개국어로 기록되었습니다. 1,600여년에 걸쳐 수십명의 저자가 동원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이 실제 인간 역사 속에 오셔서 인간과 함께 어떻게 움직이셨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 지 읽어보십시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옛날에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그분에 대하여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면, 구약을 통해서는 역사 속에서 여러 나라들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을 통해서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회복하려는 구원의 계획과 이를 이뤄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이 깨지고 번역한 세상을 회복하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신구약 성경을 열심히 읽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2. 성경: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
성경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히브리서 4장 12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성경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전해줄 뿐 아니라, 우리를 쪼개고 우리 속의 문제를 분석하고 우리 동기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로 “하나님,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하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이 살아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골수와 관절과 혼을 다 쪼개고 들어오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는 자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소통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 각자에게 가지고 계신 마음과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령을 통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핵심 질문
1. 히브리서 4장 12절을 묵상해봅시다. 최근에 이렇게 예리한 말씀을 경험한 적은 언제였습니까?
2. 성경에 담겨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 성경을 대할 때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 지 생각해보고, 바른 태도로 성경을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4. 말씀으로 자녀의 특권 누리기
생각해볼 질문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네 가지 기능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을 읽어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우리를 교훈하고, 잘못 갈 때는 책망하고, 바르게 교정하고, 다시 의로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에 앞서 먼저 우리 존재를 바꾸어 줍니다.
성경은 우리의 성품을 바꾸고 우리 인생을 바꿉니다.
이렇게 먼저 존재를 바꾸고, 그 다음에 행위와 삶을 바꾸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성취하는 지에 관심이 많지만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그 분을 닮았는지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성경을 누릴 수 있는 방법
먼저 듣기부터 시작을 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 제일 먼저 해야할 중요한 일이 듣기입니다. 별로 씹을 필요도 없이 아주 먹기 좋게, 그냥 듣기만 하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 각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염두해 두고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읽기입니다.
성경 읽기는 성경과 관련된 기번 체력과 같습니다.
성경은 많이 읽을수록 묵상하는 깊이가 달라집니다.
암송은 그 말씀을 우리 심령과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연구는 맨 마지막 단계입니다.
묵상은 읽거나 들은 내용을 마음 속에 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상황으로 들어가서 묻고 질문하고 느끼면서 그 말씀을 우리 영혼과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손가락 중에 유일하게 엄지만이 다른 네 손가락과 맞닿을 수 있습니다. 묵상이 엄지인 이유는 말씀을 읽을 때도 말씀을 임송할 때도 말씀을 연구할 때도 묵상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무가 아닌 특권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가가는 방법은,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 의무가 아닌 영적 특권으로 생각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없이는 그 분을 알아가는 특권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묵상 질문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는 일을 특권으로 대합니까? 의무로 대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의무가 아닌 특권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네 번째 만남 하나님 사랑하기
1. 사랑으로 드리는 예배
2. 세 가지 형태의 예배
3.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
4. 사랑으로 드리는 순종
1. 사랑으로 드리는 예배
*생각해 볼 질문
당신은 ‘예배’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쓴 홍세화 씨는 “한국 사람들은 파리에 와서 관광을 할 때 뒤통수로 한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훌륭한 유적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감상하기보다는, 적당히 구경하고 금세 돌아서서 문화 유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바쁩니다.
이유가 뭘까요? 아마도 그 문화 예술품들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박물관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작품으로 표현하려는 내용을 보면서 그것을 즐기고 누리는 것이 소중합니다. 이렇듯 무엇이든지 알면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집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그분에 대한 감탄과 감사와 감격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끼게 되면 그때 가서 믿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또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가면서 그분에 대해서 감탄하는 것, 그분에게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감탄과 감사와 감격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초대교회 교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8-9절을 보면 초대 교인들이 하나님께 보이는 인격적인 반응들이 나오는데, 베드로조차 그런 모습을 참 신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8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9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는 예배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예배의 본질, 즉 예배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개념이 아니기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초월적인 존재,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고, 그분을 생각하면 너무나 영광스러운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 차는 그런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하면 인격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인격적인 하나님, 그분의 사랑, 그분의 존재, 그분이 하신 일, 그분의 능력, 그분의 지혜에 감격하고 놀라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분의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시24:6; 호5:15), 그분의 영광을 구한다는 표현(요5:44; 7:18)을 많이 씁니다.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구하는 예배는 한도 끝도 없이 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감상하고 즐기는 것은 그의 특권입니다.
*예배가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 아닌가요?
하나님 편에서 보면 또 어떤가요?
그분 눈에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로 보이겠습니까?
순수하지도 않고,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부족한 자들이지 않습니까?
베드로전서가 예배의 본질을 이야기해 주었다면, 요한일서는 이 예배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해줍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을 보십시오.
보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개역개정)
여기에도 예배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이 본문은 예배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해줍니다.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서 앉아 있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에 대한 감격의 표현입니다. 예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안 든다고 합니다. 예배가 지겹고 재미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각자를 사랑해주신 그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자를 부르셔서 그분의
자녀로 일컬어주신 그분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그냥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싫으십니까?
*예배의 중요한 두 기둥
예배를 드릴 때 우리로 진정한 예배, 정말 살아 있는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두 기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24절이 그 두 기둥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과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두 가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을 알아가는 주관적인 체험을 말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런 예배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그 다음은 진리입니다. 진리란 말씀,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진실들입니다.
성경은 예배드릴 때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배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객관적 진리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내용을 실제로 체험하고 경험하는 영적인 분분도 있어야 합니다. 진리와 영, 이 두 가지는 늘 같이 가야 합니다.
*예배의 축복
그렇다면 예배가 주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그 축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본문은 예배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이 예배라고 합니다.
우리는 감히 그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감히 그 앞에 담대하게 용기를 가지고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주십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서 얻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새번역은 이를 “제때 주시는 도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예배할 때 그분은 제때, 그때그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정말로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예배입니다.
예배가 살아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자들에게 주어지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특권입니다.
*묵상질문
1.최근에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어서 감탄하며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해 본 적이 있습니까?
2.베드로전서 1:8-9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는 예수님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2. 세 가지 형태의 예배
생각해볼 질문
당신은 언제 어디서 예배하고 있습니까?
1)개인의 찬미
히브리서 13장 15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로 말미암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의 이름’이란 그분이 행하신 일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리키는데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우리 입술의 열매가 찬미의 제사입니다. 예배할 기분도, 상황도 아니지만 에수님을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을 드려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개인적인 차원의 예배가 풍성해야 합니다. 사실 예배는 하루 종일 계속 드려야 마땅하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닐지라도 매일매이 순간순간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공동체적인 예배
골로새서 3장 16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공동체적인 예배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는데 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오고, 우리끼리 서로 권고하고 가르치며, 우리에게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노래와 찬양이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으로는 제의적인 예배, 은사주의적인 예배,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예배가 있는데 장단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3)삶으로 드리는 예배
로마서 12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드릴 정말로 합당한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며, 우리 인생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어떤 행위와 일을 행하며,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일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며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고 그렇게 예배하는 우리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사랑과 평화와 지혜를 얻어 누립니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며, 이렇게 예배가 우리 삶 가운데 살아있을 때,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풍성한 삶은 바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관계, 곧 살아있는 예배에서 주어집니다.
묵상 질문
1. 당신은 ‘개인의 찬미’를 어떻게 드리십니까? 자주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지금 조용히 악보 없이 외울 수 있는 찬양으로 하나님께 노래해보십시오. 하나님만 들으시려고 노래할 때,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습니까?
2. 골로새서 3:16을 묵상하고 공동체 예배의 세 가지 차원 중 특별히 당신에게 더 깊어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
생각해볼 질문
당신은 기도를 몇 분 정도 하십니까?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금세 지나갑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까?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지식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녀로써 이야기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점점 알아가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토해 놓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자세와 축복
기도할 때 우리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또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 빌립보서 4장 6-7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가도의 자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ㄴ비다. 급해서 아날이 나서 기도하는 것은 사실 기도의 대상자와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기도가 주는 축복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대로 응답된다는 의미보다는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생각과 마음을 다스릴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기도에 대한 오해들
1. 우리는 보통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아내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보험성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를 미리미리 해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교육하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기도하면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4. 기도에 대한 오해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경우는 비인격적인 기도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쌍방향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퍼부어버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인격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 기도들이 단편적으로 보면 잘못된 기도라고 할 수는 없으나 영적으로 성숙을 막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런 방식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상호 교제하는 기도의 형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한 만큼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는 지, 기다리며 들어야 합니다.
기도 누리기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에 의지해서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이런 건강한 기도는 우리의 상황을 바꾸기 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바꿉니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 친교기도와 사역 기도, 이렇게 둘을 나누어서 합니다.
친교기도는 말 그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격하는 기도입니다.
사역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한 가지만 더 제안한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늘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이 기도라면, 기도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다가 본문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발견하면 그것을 아주 짧은 문구로 요약하십시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렇게 발견된 하나님의 성품을 하루 종일 품고 지내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이런 영적인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런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리다보면, 우리는 점점 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에 더욱 감역하고, 우리 삶에 오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하는 기도는 점점 우리를 성숙한 기도로 이끌고, 그리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로(요 6:33)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성장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기도가 깊어져서, 자녀의 특권을 맘껏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핵심 질문
1. 빌립보서 4:6-7을 묵상하고 우리가 어떤 염려를 내려놓고,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할지 생각해봅시다.
2. ‘기도에 대한 오해들’에 나오는 기도 중에서 다인의 기도와 닮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제 어떻게 기도해야겠습니까?
4. 사랑으로 드리는 순종
생각해 볼 질문: 당신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따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징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없어서는 안 될 특징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고 예배하는 사람은 그분이 원하시는 계명, 즉 예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것을 누리고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표현입니다.
순종의 방해물
재물과 하나님은 같이 섬길수 없다고 그들은 우리 마음 속에 함께 있을 수 없는 라이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가짜 신입니다. 재물은 유사하나님입니다. 헌금은 돈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의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상징적인 선언입니다.
돈은 우리의 가장 큰 적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우리 발목을 잡는 하나님의 강력한 라이벌입니다.
10-10-10의 습관
돈이면 뭐든지 되는 것 같은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루에 10분씩 세 번 하나님님을 만나는 습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10분 하루 일과 중에 10분 집에 돌아와서 10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습관을 형성하십시오.
성경과 관련된 다섯 가지 활동과 예배 기도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얻어낼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희생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을 누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주셨는데 그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말씀을 통해 듣고 배우고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입니다.
묵상질문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배웠습니다. 이번 만남을 통해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부분을 깨닭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행동으로 옮겨야 할 부분은 무엇이 있을까요?
다섯 번째 만남 참된 자기 사랑
1. 자기 사랑의 기초: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
2. 믿음: 자신에게 이루어진 축복 받아들이기
3.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삶으로 이끄시는 성령님
4. 우리 속에 경험하는 두 가지 욕망
1.자기 사랑의 기초 :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
*생각해 볼 질문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또는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놀라운 변화를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믿고 그것에 기초하여 세워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이번 만남의 내용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난 이후에 우리 각자에게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날마다 주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특별한 작품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오해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가장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자신에 대한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조금 더 심하면 자기혐오나 자기 학대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자기 비하, 자기 멸시, 심하게는 자기 학대에 빠져 있습니다. 자존감이 매우 낮고, 죄의식에 빠져 있으며, 자신은 늘 죄를 짓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아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은 절대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리라는 아주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
그러나 ‘자기 부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의 제대로 된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관계가 없었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2장 1-10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의 상태 먼저 1-3절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보십시오.
1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그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에서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1절은 우리가 이미 죽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2-3절에서는 그렇게 죽었던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따라 살다’입니다. 2절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와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 3절은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의 신분을 ‘진노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의 상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4절은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4절에서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 사랑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살펴봅시다.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6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살리셨고, 일으키셨고,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누구와 ‘함께’라고 말합니까?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이 일들이 이미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함으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런 놀라운 일(4-5절)을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의 모습(1-3절)과 비교해보면 더더욱 놀랍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되어 그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 “그분이 나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찬양을 감격하며 부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이전에는 우리가 진노의 자식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될 것이 아니라 이미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
(1-3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5-6절)
영적 상태
허물과 죄로 죽었던(1절)
⇒
그와 함께 살리셨고(5절)
삶의 주도권
세상 풍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삶(2-3절)
⇒
그와 함께 일으키셨고(6절)
우리의 신분
진노의 자식(3절)
⇒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힘(6절)
하나님에 대해서 살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이미 역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이며,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놀라운 영적 축복이 자기 사랑의 기초입니다.
*묵상질문
1.에베소서 2:1-3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생각해봅시다.
2.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았을 때, 그 선물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천당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글, 특별히 에베소서 2:5-6을 통해 우리가 받은 구원이라는 선물이 지닌 의미 중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특별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축복과 관련하여 생각해봅시다.
2. 믿음: 자신에게 이루어진 축복 받아들이기
생각해볼 질문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자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예시) 가난한 학생이 장학증서를 받았는데 장학증서에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과 생활비 일체를 주겠다는 약속이 적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학생이 그 증서를 주머니에 놓고 다니면서도 ‘등록은 어떻게 하나? 용돈 없아서 배고파 죽겠네“하면서 살고 있다면 어떨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침례(세례)받은 한 형제의 간증
하나님에 대해 피상적으로 듣고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복음의 메시지를 자세히 듣고 나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자기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난 다음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지식과 편견, 느낌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마음에 받아들인 것을 말합니다.
한 자매의 간증
자신이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고 살았는데, 설교와 성경을 통해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어느 날 그 말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믿기로 했습니다. 그날 이후 자신의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부정적인 소리 대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하신 일을 주장하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자신ㅇ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주장함으로써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한 자매의 간증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딸로 받아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은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영적 아버지가 생기자, 영적 형제자매, 즉 영적 가족들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을 얻음
에베소서 2장 8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형제 자매들에 대한 간증을 통해 중요한 것은, 이런 놀라운 일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경험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앞의 구절에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 즉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이 놀라운 일을 경험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내용을 주장하기만 하면 됩니다.
부인해야 할 것과 사랑해야 할 것
우리가 부인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 그리스도와 관계없을 때의 우리 모습입니다. 자신을 전부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기전의 모습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모습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나, 하나님이 특별한 존재로 만드신 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받아들여진 나입니다.
묵상 질문
1. 에베소서 2:8을 읽고 묵상해보십시오. 무엇이 은혜이고, 무엇이 믿음입니까?
2.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사람으로서, 부인해야 할 것과 사랑해야 할 것들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3.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삶으로 이끄시는 성령님
생각해볼 질문
우리는 “아직도 제가 덜 죽어서요”라는 말을 자주 하고 듣습니다. 이런 말이 어떤 면에서 잘못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제가 덜 죽어서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 말은 일부 맞는 면도 있지만, 틀린 면이 더 많습니다. 이 말은 “아직도 제가 덜 죽어서 죄를 짓네요. 제가 더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렇게 펄펄 살아있으니, 어쩌겠어요”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더 죽이면 더 성숙한 사람이 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영어를 열심히 하면 미국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면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일반 종교와 다릅니다. 일반 종교는 수양을 통해서, 착한 마음으로 선행을 많이 하여서 결국 구원 또는 깨달음에 이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격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러서,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다 보니, 변화된 신분에 걸맞은 모습으로 점점 변해간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우리는 이미 죽었고,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격없는 우리를 부르셔서 이렇게 놀라운 신분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 사실을 아주 놀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구절에는 ‘나’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맨 처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에서의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전의 ‘나’를 말합니다. 이 ‘나’가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바울은 이제 자신 안에 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바울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바울을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신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분이 이루신 일을 정말 믿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은 것이 아니라 못 박혔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바뀐 존재입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우리는 새로운 신분을 획득했습니다. 아직 온전히 그리스도인답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을 바꾸셨네
고아에서 아들로, 거절에서 용납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주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을 바꾸셨네
저주에서 축복으로 원수에서 연인으로
창기에서 신부로 바꾸어주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을 바꾸셨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축복: 보혜사 성령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임했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 구절을 보면 우리가 새로운 존재나 새로운 신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 속에서 새롭게 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가 오시기 때문에 자신이 떠나는 것이 더 좋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이 바로 이 성령님이십니다.
*자기 부인
이제 이 성령님이 우리 속에 와서 사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 내용이 갈라디아서 5장 16-26절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2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제 예수를 따라가는, 그분께 속한, 그분의 소유된, 그분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이제 우리가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우리를 지배했던 정욕과 욕망과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죄된 성품‘, 즉 하나님 없이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맘대로 하고 있는 그 성품을 말합니다. 왜 죄된 성품을 못 박습니까? 우리의 죄된 성품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아직 덜 죽었어요”라는 말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런 것이 살아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육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면,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묵상 질문
1. 갈라디아서 2:20과 5:24을 비교해보십시오. 이 두 구절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묵상해보십시오.
2. 진정한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 자신의 말로 다시 정의해보십시오.
4. 우리 속에서 경험하는 두 가지 욕망
생각해볼 질문: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 때 가장 큰 방해물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다시 살리심을 입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여전히 두 가지 욕망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 욕망
[갈]5:16~18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욕망을 육체가 바라는 것과 성령이 바라시는 것, 육체의 원함과 성령의 원함이라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전 수십 년 동안 육체의 욕망과 함께 살아왔고 그것이 하자는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지만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그러니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그렇게 많이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옛날에는 내 속에 계시지 않던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일하시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평안이 깨집니다. 육체의 소욕이 완전히 주저앉고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시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 속에서 계속 갈등이 생깁니다.
육체의 욕망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육체의 욕망이 늘 우리를 움직였습니다. 이 육체의 욕망은 성령과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갈]5:19~21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과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첫 번째 욕망은, 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건강한 성의 테두리를 넘어선 것들을 음행이라고 합니다.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같은 것들은 다 도덕적인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 욕망은, 원수 맺음과 질투같은 것들로써 모두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욕망은, 술취함, 흥청망청 먹고 마시것, 놀음 등과 같은 생활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의 욕망
[갈]5:22~23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착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성령이 가져오는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성령에게서 왔는지 육체적인 욕망에게서 왔는지 확인하려면 이런 열매를 내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 잡을 때, 자신이 분을 내고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 잡을 때 절제하면서 온유하고 친절한 가운데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다면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분노, 질투, 사람들 앞에서 허장성세 하는 것, 돈을 좇아가는 것, 음란한 생각, 열등의식, 불평, 불만 등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욕망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여러분 모두 속에 성령께서 계십니다. 만약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 민감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 우리 가운데서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살펴보십시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작은 수첩이나 핸드폰에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중에서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과 관련된 것을 구별하여 적어보십시오.
진정한 자기 사랑이란
우리 속에 일어나는 두 가지 욕망 중에서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욕망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해볼 질문
영적으로 하늘에 있지만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욕망의 갈등은 어떤 것들일까요?
여섯 번째 만남 성령을 따라 사는 삶
1. 부인해야할 것들과 긍정해야 하는 것들
2.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
3. 성령님과 성경
4.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새 생활
1.부인해야 할 것과 긍정해야 할 것들
*생각해 볼 질문
건전한 육체적 욕구와 죄 된 육체적 욕망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자기사랑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모습들을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존재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욕망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태로 유혹하고, 성령의 욕망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존재답게 살도록 인도합니다. 이번 만남에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자세히 살펴볼 텐데, 먼저 우리가 부인해야 할 육체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인해야 할 것 : 육체의 욕망
우리가 부인해야 할 육체의 욕망 중에는 우선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은 좋은 예입니다. 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이 늘 울타리를 벗어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으로 전락해버립니다. 또 다른 예로, 식욕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이런 육체의 욕망과 관련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어떤 것은 나쁘고 어떤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선을 넘지 않으면 정당한 우리의 욕망이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면 그것이 육체의 욕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돈, 명예, 권력 등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습니다. 돈을 추구하고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 본능입니다. 권력과 힘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범위를 넘어서서 잘못 사용되기 시작할 때, 또는 목적이 될 때, 돈도 권세도 명예도 육체적 욕망이 됩니다.
긍정해야 할 것 : 성령님
이제 반대로 적극적으로 긍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긍정해야 할 것은 갈라디아서5장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성령을 좇아 행하라”라고 번역했고, 원어의 뜻은 ‘성령과 함께 걷는다’, ‘성령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사는 것, 성령에 의해서 사는 것, 성령을 따라가는 것,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긍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갈라디아서5장25절은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여기서 “성령이 인도해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라는 구절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성령이 지도해주심에 따라’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따르다’, ‘동의해서 따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NIV는 이 구절을 ‘성령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자’, ‘성령님과 같이 발을 맞추어 걷는 것처럼 걷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 안에는 이제 성령님이 계십니다. 앞에서 살펴본 우리의 육체적 욕망들,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 우리의 습관들, 과거의 정신적인 상처 등에 대해서, 옛날에 우리를 지배하던 것들이 아니라 이제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지도하십니다. 우리는 이 지도를 따라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한,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육체의 욕망은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우리를 유혹하고 정죄하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럴 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져버린 그림자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령과 동행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일을 부인하면서 성령님과 동행할 도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일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성령과 동행하게 됩니다.
*묵상질문
1.갈라디아서5:25을 묵상하며 성령님과 우리가 어떤 모습을 취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2.성경은 우리를 붙잡아 매는 ‘과거에 나를 지배한’ ‘육체의 욕망’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가르칩니다.
지금도 당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런 ‘육체의 욕망’들은 무엇입니까?
또 당신은 지금까지 그것들을 어떻게 대해왔습니까?
그런 대처 방법이 옳았습니까?
2.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
◾생각해볼 질문-성령님과 함께 걷는 것은 구체적으로 당신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일/성령을 따를 때 나타나는 결과
1. 성령의 내주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내주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2. 성령의 인도 (요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6장 13절에서는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 표현하는데 주님은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개인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주로 하시는 일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 하는 것들도 그리스도께 속한 진리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더욱더 깊이 인도하십니다.
3. 성령의 열매 (갈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이루시는 아홉 가지 인격의 요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인격을 성숙시키셨을 때 우리에게는 이런 아홉 가지 요소가 다 나타납니다. 신앙이 좋으면 성격도 당연히 좋아져야 하는데, 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인격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4. 성령의 비전 (행 2:17)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성령께서는 지금 하나님이 행하고 계시는 놀라운 일들과 앞으로 역사를 이끌어나가시면서 하실 일을 보여주시면서, 우리도 그 가운데서 감당할 수 있는 몫이 있다고 알려주십니다.
5. 성령의 능력 (빌 2:13)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비전에 따라 어떤 일을 시작했지만, 일을 하다 보면 자기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때가 옵니다. 우리 힘으로 그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옵니다. 그때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그 일을 하게 하시는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렬을 따라 수고하고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6. 성령의 은사 (고전 12:4, 7) 4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은사는 공동체를 위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 공동체를 세워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초자연적인 은사가 다른 은사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을 특별한 사역자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초자연적인 은사든, 일반적인 은사든 모두 한 성령께서 주신 동등한 은사입니다.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7. 성령의 충만 (엡 5:18) 술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이란 성령으로 가득 찬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을 기운이나 능력, 에너지로 오해하고 성령 충만을 어떤 에너지나 힘이 채워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성령은 물질이 아니라 인격이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님과 우리의 인격적 관계가 아주 긴밀함을 뜻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을 때 나타나는 좋지 않은 결과
1. 성령의 근심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계속 따르고 성령님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성령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슬퍼하십니다. 성령께서 슬퍼하시면 우리 영혼 자체가 가라앉고 슬퍼지며, 평안이 사라집니다.
2. 성령의 소멸 (살전 5:19)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소멸된다는 말은 성령의 불이 꺼진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한 욕망을 계속 무시하고 세상 것을 계속 좇아가면 성령께서 슬퍼하시고 그것이 반복되다가 냉담해지시고 그 다음에 침묵해 버리십니다. 마치 불이 꺼진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성령의 열매
갈 5:22
성령의 비전
행 2:17
성령의 능력
빌 2:13
성령의 인도
요 14:26
성령의 내주
요 14:16
성령의 근심
엡 4:30
성령의 소멸
살전 5:19
성령의 은사
고전 12:4, 7
성령의 충만
엡 5:18
◾묵상 질문
1. 성령님에 대한 여러 성경 구절 중에서, 성령께서 당신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구절은 어떤 구절 같습니까? 그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생각하며 묵상합시다.
2. 당신은 당신 속에 계신 성령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앞의 도표를 참고할 때, 당신이 성령님에 대해서 새롭게 배운 부분은 무엇이고 요즈음 성령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3. 성령님과 성경
*생각해볼 질문
당신이 예수를 알기 전에 익숙한 생각과 내면의 소리에 대해서 성령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령님을 마음에 모셨지만, 성령께서 정말 우리 사람을 다루고 계신지를 잘 몰라 성령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속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여러 생각과 내면의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과 관련이 없다면,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진리로 이끌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20세기에 새롭게 부각된 성령님
성령님은 지난 2천 년 동안 역사하셨지만, 사람들은 성령님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고 성령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강조가 나타났습니다. 그동안 이론으로 이야기하던 성령님을 구체적으로 또한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누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드러나고 열광적인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은사에 집중하여, 인격이신 성령님을 어떤 에너지나 기와 같은 비인격적 실재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령님을 성자 예수님과 관계가 없이 능력 면에서만 성령님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면, 성령님은 매우 슬퍼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인격적으로 일하시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로 이끌기 위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깨닫게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게 하십니다.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 어려운 상황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무릎 꿇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책망하십니다(딤후 3:16).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 가지 축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속하기 전의 자신을 부인하고,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신을 깨닫고 자신 속에서 새롭게 일하기 시작하신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받쳐주는 두 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잘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객관적인 진리를 알았다면, 이제 우리를 주관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을 따라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성령님을 알아가는 새 생활
우리는 이 성경과 성령님의 관계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충만’과 ‘말씀이 흥왕하다’는 것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합니다(행 12:24: 비교 4:31; 10:44). 성령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가 있고 성령께서 행하시는 여러 가지 현상이 있지만, 성경에 나오지 않는 현상들은 따라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따라가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기준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성경과 같이 가시는 분이시지 성경과 따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체험하려면, 성경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드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훈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송을 하는데 기계적인 암송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를 깊이 받으며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려오는 묵상으로 들어가보십시오. 건전한 설교를 듣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설교를 잘 선택해서 들으십시오.
묵상 질문
1. 에베소서 5:18-20과 골로새서 3:16-17절을 비교하며 묵상하십시오.
에베소서 5:18-20
골로새서 3:16-17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2. 성경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고, 자기 사랑과는 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4. 내주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새 생활
생각해 볼 질문: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산다고 할 때 당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가지 축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면 다른 한가지 축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1) 기도와 묵상 가운데: 기도 중에 침묵과 묵상이 필요합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문 꽝 닫고 나가는 그런 무례한 기도는 이제 그만하십시오.. 이제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십시오. 평상시에 하나님, 오늘 저는 어떻게 살까요? 하고 여쭈십시오. 오늘 살 말씀을 달라고 구하고 그렇게 사십시오. 그래야 평생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2) 일상 가운데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방법: 일상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네비게이션으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은 이쪽으로 가면 함정이 있으니 피하고 저쪽으로 가면 금 은 보화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고 안내하는 길잡이가 아니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마구 드러내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성령의 체험은 가능한 혼자 간직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내와 사랑을 나누며 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이런 이야기들을 마구 떠들고 다니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님과의 관계도 아주 내밀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발견한 객관적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함께 계시다는 것을 실생활에서 체험하지 못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 닮아가기: 성령께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이렇게 하십시오.. 새로운 습관을 만드십시오.. 새로운 습관이 인격을 바꿉니다. 인격이 바뀌면 인생도 바뀝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었건 아니건 관계없이 단 1년만이라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연습을 하면 1년 후에는 자신이 균형있게 성장해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성령님을 따라 살지 않기때문입니다. 반면 예수 믿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인생이 바뀌는 사람들은 그 속에 계신 성령님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4) 성령의 전이신 교회를 사랑하게 하심: 성령은 우리가 성령의 전에 속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함께 지어져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공동체의 삶을 누리지 않고, 개인주의로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께서 늘 생각하시는 공동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고 또 그 유익을 위해 자신을 드리지 못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5) 성령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성령님은 특별한 영역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여 깨진 세상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 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아직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 깨지고 상처받은 이웃이 회복되기를 원하시기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 때 성령님은 끊임없이 깨진 세상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 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아직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 깨지고 상처받은 이웃이 회복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묵상질문
성령을 따라 행하는 새로운 삶에 대한 다섯 가지 내용을 돌아볼때 자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부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Ⅵ.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일곱 번째 만남: 형제 사랑을 살아내는 공동체
1.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공동체
2.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3.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4. 형제 사랑의 성경적 원리
1.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공동체
*생각해 볼 질문
“기독교인이 되면 꼭 교회를 다녀야 해?”라거나 “교회를 다니더라도 혼자 좀 조용히 다니면 안 돼?”라는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 각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다소 개인적인 측면을 이야기 했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다른 차원을 살펴보겠습니다. 나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이지만, 그런 존재가 나 혼자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하며, 동일한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된 나
성경은 이렇게 변화된 나 자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앞에서 공부한 에베소서 2장으로 다시 돌아가, 이번에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2방 1-10절중에서 핵심 부분인 4-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4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5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6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를’이라는 단어를 주목해보십시오. 바울은 갈라디아서2장20절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라며 ‘나’를 주어로 썼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5장17절에서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라고 단수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라는 한 개인에게 어떤 놀라운 일이 있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구절들입니다.
하지만 여기 에베소서 2장의 주어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리심을 받고, 함께 일으킴을 받아서, 지금 함께 하늘에 앉았다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로서,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2장10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에는 이 구절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자기 자신에게만 성경을 적용하여 읽기 때문에, 이 구절을 ‘내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의미
에베소서 2장11-22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의미를 자세히 이야기해줍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기는 했지만, 여기서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어구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서, 서로 관계가 없던 우리가 형제자매가 되어 가족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이미지는 보육원입니다. 우리는 전부 고아였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장 선생님이 우리를 다 입양해서 하나님이 가족이 되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이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다”(8:15)라고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두 번째로 살펴볼, 작품의 의미는 2장16절에 나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본문 앞서 2장14절에서는 ‘막힌 담’을 허셨다고 선언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어졌다면, 세상에는 그 어떤 차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몸이 된 이유를 에베소서 1장23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곧 교회는, 머리의 다스림을 받아 움직이는 유기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그리스도의 몸도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엡4:15). 하지만 아직 몸이 작다 할지라도, 어리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령의 전 하나님의 작품의 세 번째 의미는 에베소서 2장 21-22절에 나옵니다.
21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22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 또는 성령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의 또 하나의 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을 상징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향한 제사, 곧 예배를 늘 드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전’이라고 했을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함께 모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우리가 이 성령의 성전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새번역에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라고 한 부분을 개역개정은 ‘지어져가느니라’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마지막 날에는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오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시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시고 완성해가고 계신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전이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온전히 드러나는 예배를 드리기에는 아직 미성숙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실 날을 기다리며 예배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고, 이미 성령의 전이고,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묵상질문
1.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자신의 말로 정리해보십시오.
세 가지 중에서 당신이 좀 더 깊이 새겨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에베소서 2:16, 19, 21-22 중에서 한 구절을 택하여 깊이 묵상하십시오.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생각해볼 질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가족이요 성령의 전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데, 많은 교회나 공동체의 모습이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 내의 분쟁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 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을 파괴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성령의 전을 훼파하는 것은 실로 무서운 죄인데,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어서 더욱 사랑하는 하나님의 가족, 더욱 장성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몸, 더욱 깊은 예배를 드리는 성령의 전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실제 공동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이며,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고 이 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맏음’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7절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그분이 만들어 놓으신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정말 믿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가 되었고, 한 가족이 되었으며, 함께 지어져 가고 있고, 한 몸이 되었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대로나 느끼는 대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임입니다. 이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지역 교회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교회들은 어느 지역에 뿌리를 둔 실제적인 지역교회였습니다.
교회는 그저 예배만 드리는 집단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함께 꿈꾸며 자라가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예배하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일반 공동체들은 보통 자기 이익에 따라서 혈연관계나 학연을 토대로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교회는 인간적인 계산과 개인의 취향, 자신의 방식으로 엮이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공통분모, 하나님 아버지, 그분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이며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do’의 종교로 생각하나 기독교는 ‘done’의 종교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을 기초로 새로운 삶을 삽니다.
*힘써 지키라
(엡 4: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이미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동체가 주님을 잘 바라보면, 주님이 이루신 것에 잘 집중하면 주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면, 공동체에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공동체 가운데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가장 큰 공통분모부터 봅니다. “저 사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 우리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의 다스림 아래에 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공통분모입니다.
다른 면을 보면 볼수록 공동체는 깨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일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준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서, 그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에만, 공동체의 삶은 가능합니다.
◾묵상 질문
1. 에베소서 4:3을 묵상해봅시다.
2.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 중에서도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 곧 교회에 속하게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려 할 때 어떤 점이 어렵습니까?
3.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생각해볼 질문
우리에게는 특별히 사랑하기가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아래에서, 즉 그의 다스림 아래에서 사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다름 아닌 형제 사랑입니다.
정말로 형제를 사랑하는 공동체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놀라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 공동체를 보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인 됨의 증거다
여기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입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기록한 요한일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일서 3장 14-16절은 그리스도인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옮겨갈 것이 아니라 ‘옮겨 갔다’입니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았다고 말했습니다(참고 고후 5:17, 엡 2:2, 19) 그런데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을 옮겨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형제자매 사랑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 본문은 형제자매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사랑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면, 형제 사랑과 이 하나님의 사랑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신경 쓰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껄끄러워도,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미워하고 싫어하면서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요한 사도는 그것을 살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살인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이야기합니다. 16절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우리가 사랑을 알았고, 그래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너희를 생명 바쳐 사랑했으니 너희도 서로 생명바쳐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나눌 수 없는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사도 요한은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이 불가분의 관계라고 여러 번 설명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21절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절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동체로 만드셨다는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개념도 모호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구체적으로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기만 한다면 다른 형제자매들도 나와 함께 속해 있음을 알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형제와 자매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받은 증표는 형제 사랑입니다
*묵상 질문
1.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알고 나서,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을 어떤 자세로 대했습니까? 만약 특별한 변화가 없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요한일서 4:19-21을 묵상하며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여 봅시다.
4. 형제 사랑의 성경적 원리
교회는 사랑 클리닉이나 사랑 전문 연구소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서로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희생하는 사랑
첫째로, 요한일서 3장 16절이 말하는 사랑은 목숨을 버리는 사랑, 즉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자기 것을 허비합니다. 사랑의 마지막 단계는 자기 것을 완전히 희생하는 것, 즉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희생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상대방의 진정한 유익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상대방이 더 악해지지 않고 성장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꽃 피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희생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
두 번째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3장 18절은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투명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투명성이란 겉과 속이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다른 숨은 목적을 가지고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진실한 사랑, 투명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구체적 사랑
세 번째로 구체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17-18절을 보면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되겠니? 라고 말합니다. 말로 때우지 말고 구체적으로 사랑하십시오.
중심이 있는 사랑
네 번째의 사랑의 특징은 중심이 있는 사랑이라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서로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중심이된 형제간의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다간 아무도 사랑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 속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오기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차올라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더욱이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나면 감정이 따라오기도 합니다.
사랑을 훈련하고 배우라
사랑은 느낌을 좇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결단으로 시작하고 인내로 유지되며 지혜로 성숙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교회는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환경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비슷한 취향의 사람의 사람끼리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사람들, 절대로 예수 아니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이 모여있기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만 아니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묶여있습니다. 삐죽 삐죽한 가지들이 모두 성령의 띠로 묶여서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다가 지치거나 사랑하다가 실망하거나 사랑하다가 상처 받거나 사랑하다가 시험 들었다고 공동체를 떠나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그 과정을 통과해야 진정한 사랑을 배웁니다.
묵상질문
앞의 네 가지 원리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부분과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하면 성경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여덟 번째 만남 섬김의 도를 실현하는 공동체
1. 공동체적 삶의 원리: 섬김의 도
2. 서로 복종하는 삶
3. 용서와 용납
4. 은사로 공동체 세우기
1. 공동체적 삶의 원리: 섬김의 도
*생각해 볼 질문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가장 중요한 특징을 들라면 무엇을 들고 싶습니까?
지난 만남에서는 사랑의 네 가지 원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네 가지 중에서 자신에게 특별히 어렵고 또 더 배워야 할 원리는 어떤 것입니까? 사랑하라는 말은 쉽지만, 그 사랑을 실생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은 결단과 학습과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해 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는 사랑의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삶의 원리는 ‘3장16절’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그중 하나는 요한복음 3장16절이고 나머지 하나는 요한일서 3장16절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이야기하는 요한복음3장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일서 3장 16절은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슴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도 요한복음 3장 16절만큼 중요합니다. 어쩌면 이 두 말씀은 동전의 양면처럼 보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이야기한다면, 요한일서 3장 16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랑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알았으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섬김의 도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감히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할까요?
마태복음 20장25-28절에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가르치십니까?
25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주려고 왔다.”
이 본문 바로 앞에는,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곁에 불러놓고 “너희는 참 특별한 공동체”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조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리더십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건강한 권위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기 유익을 따라,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마구, 임의로 리더십을 사용하고, 자기가 가진 권세를 마구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26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오히려 거꾸로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맨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낮아져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28절에서는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바로 밑에 있는 최고의 리더들은 죽기 직전까지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상기하지만, 우리 공동체의 최고 리더는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줄 만큼 희생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그분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것 아닙니까?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쳤습니다. 신념이나 의지력이 강하지도 않고, 의식화되지도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섬기는 주님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리더가 되려면 더욱더 낮아지고,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재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성경적 문화가 생겨난다면, 우리 공동체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세상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은 축복을 누리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성경적인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바로 이 ‘섬김의 도’입니다.
*묵상질문
1.우리 교회든 다른 교회든 교회에서 권위만 앞세우는 지도자들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모습이 성경적 가르침과 얼마나 대조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2.마태복음 20:25-28을 묵상하며 자신은 어떤 종류의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지 깊이 묵상해봅시다.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5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두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사람의 통치자들은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 그 고관들은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26그러나 너희는 저희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27만일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서 첫째가 되려면,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주려고 왔다.”
2. 서로 복종하는 삶
◾생각해볼 질문-지도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겸손의 순종
(벧전 5:5) 젊은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에서 나이가 많은 이들, 곧 교회의 장로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에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리더들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서 희생하며 그들을 섬겨야 하고, 리더를 따르는 자들은 그 리더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리더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그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스스로 겸손의 옷을 입고 리더들에게 순종해야 하는데, 이것은 리더들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리더들도 불완전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그 리더를 우리에게 붙여주셨다ᅟᅧᆫ 리더의 지도와 인도대로 따라가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겸손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서로 복종하라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피차 복종하는 것, 서로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서로가 한 권위에 집중할 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권위에 순종하고 집중할 때, 우리는 서로 복종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종과 주인도 피차 복종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각자의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하나님께 최종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다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많은 차이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셔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셨는데 그 새로운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방법과는 다릅니다. 곧, ‘섬김의 도’ 이며 ‘서로 복종하는 길’입니다. 오늘날 교회공동체에서는 세상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직분이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많이 가진 사람이 교회를 뒤흔듭니다. 그러나 교회는 섬기는 사람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더 많이 희생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묵상 질문
1. 베드로전서 5:5을 묵상해보십시오. 당신에게 영적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영적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2. 서로 복종하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해보십시오.
3. 용서와 용납
*생각해볼 질문
어떤 사람을 섬기고 사랑했지만 오히려 오해를 받고 거절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여기 ‘서로’사랑하라는 말씀을 자세히 보면 열 두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명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열 두 제자 공동체에서 행해지면, 곧 ‘너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확대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수의 사람들을 집중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서로 사랑하는 줄을 알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원래 버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사랑하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 책임감을 느끼는 열명 정도로 그 범위를 제한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첫 번째 기둥, 용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고 가까이 가면서 오해가 생기게 될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하여 마태복음 18장 20-35절에서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근거로 모였다면 “두세 사람이 모인 그들 중에 나도 있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21-35절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두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곳, 그들 중에 예수님이 계신데, 그렇다면 그들 가운데서 서로 잘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지를 정확하게 말씀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베드로는 “내가 도대체 몇 번이나 참아야 합니까? 내가 여섯 번 정도 참았는데, 예수님, 일곱 번 참을까요?” 그랬더니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참아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무한대로, 무조건 참으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
이 이야기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는 한 달란트가 15년 품삯이므로 15만 년의 품삯입니다. 주인은 이 돈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이어서 그 종을 가엽게 여기고, 또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줍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나가면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나 돈을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조금만 참아달라는 그의 말을 거절하고 옥에 집어넣었습니다. 100데나리온은 100일 품삭으로 석달치 월급보다 조금 더 되는 돈입니다. 적은 돈이 아니지만 일만 달란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갚기에 불가능한 금액을 탕감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용서받았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지금 잘못한 사람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용서
하지만 사실 용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백데나리온 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늘 만달란트를 용서해주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만 달란트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묵상할 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누군가는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들을 마음에 품고 그 사람과 동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날 때마다 화가 불끈불끈 솟아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같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늘 에너지를 빼앗기기 때문에, 좋은 일에 써야 할 에너지는 분노를 터뜨리는데 소모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용서에 대하여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하는 것뿐 아니라 용서를 받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과 그로 인해서 상대방에게 끼친 고통과 손해에 대해서 정직하게 사과하고, 그 대가를 자신이 지는 것이 용서받는 일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니 사람에게는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또는 상대방에게 미친 손해에 대해서 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가 막힌 억지 논리를 들이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께도 용서를 받아야 하지만 자신이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잘못을 탕감해주고 싶어하는 마음보다는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용서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으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두 번째 기둥, 용납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용납이 필요한데, 골로새서 3장 13절에서 용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구절에는 용서라는 말 이전에 또 다른 한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용납’입니다. 용납과 용서는 어떻게 다릅니까? 용서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탕감해주는 것, 우리에게 저지른 죄를 없애주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납은 우리와 다른 면, 상대방이 가진 부족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다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그릇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품기 시작합니다. 공동체가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용서와 함께 용납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짓고도 잘 모르는 사람이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가 용납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무지해서이고, 후자는 완악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용납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용납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여 주신 사실에 기초하여 가능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잘못한 일에 대해서 무지하건 완악하여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고 기다려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용서와 용납이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용납해주십니다. 우리 속에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 용서와 용납의 근원이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묵상질문
1. 마태복음 18:20-35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당신은 정말 당신이 만 달란트 빚진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2. 당신이 용서하고 용납하지 힘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특별히 교회 공동체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가 아닌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을까요?
4. 은사로 세우기
생각해 볼 질문:
정말 좋은 공동체를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 공동체는 어떤 특성이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분이 주신 은사로 공동체를 세우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공동체의 은사
공동체의 대전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게 된 것,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 것이 공동체의 대전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양성을 지니면서도 서로 일치합니다. 우리에는 각각 다른 은사가 있지만 그렇게 다양한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그 은사를 주신 분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개인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것이지 각 개인이 자기 사역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은사를 발견하고 싶으면 공동체 안에서 섬기는 일들을 여러 가지 해 보면 됩니다.
자꾸 섬기다보면 자기 은사가 드러나게 됩니다.
꿈을 이루어가는 공동체
공동체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가 변화된 자들 곧 택하심을 받은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새로운 정체감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자기 은사로 섬기고 그래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누리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큰 기쁨입니다.
이 땅에 있는 어떤 공동체든지 모든 공동체를 향하여 하나님이 품으신 뜻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갖는 일반적인 꿈은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시대에도 일하고 계시고, 그분만이 이 시대의 소망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가장 큰 부르심입니다. 어느 교회 공동체가 살아있는 성숙한 공동체인지를 보려면 그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되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흥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 칭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 부흥입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저마다 특별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각 공동체마다 자신의 특별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동체가 위치한 자리와 그 구성원에 따라서 하나님이 다른 부르심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공동체 가운데서 꿈꾸지 않는다면 그 개인에게도 문제가 있고, 공동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꿈을 꾸는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계시는데 우리 젊은이들이 교회와 연관하여 꿈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건강하게 세워져서 그 교회의 젊은이들을 꿈꾸게 만드는 그런 교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크신 일에 내가 인생을 걸고 나에게 맞는 모습으로 참여하겠습니다 하고 나아가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묵상질문
자신의 공동체가 어떻게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선포하고 있는지
또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묵상해 보십시오
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살이
아홉 번째 만남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는 복음전도
1. 하나님 나라의 시민
2. 새로운 시민권과 사명
3. 하나님의 다스림을 누리며 알라기
4. 대답을 준비하는 삶
Ⅴ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세상살이
아홉 번째 만남,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복음 전도
1.하나님나라의 시민
*생각해 볼 질문
“신앙생활은 교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루24시간 중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우리가 활동하는 시간은 약16-18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대부분 세상에서 보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보내는 시간은 일주일 168시간 중에서 10시간 남짓입니다. 반면, 나머지 시간은 세상에서 보냅니다. 40-50시간이 아니라, 때로는 80-90시간 가까이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직장, 학교, 가정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분 : 하나님나라의 시민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바울은 에베소서2장 19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 동시에 또한 어떠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의 가족 앞에 나오는 표현에 집중해봅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시민’이라고 말하는데, 이 본문이 이야기하는 시민은 당연히 하나님나라 시민입니다. 우리는 원래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됨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이 이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므로 우리를 책임지시고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하나님나라 시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됨으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민권이 생겼습니다. 바로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진정한 소속은 하나님나라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종의 체류자처럼 살아갑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외국 비자를 가지고 외국에 가서 잠깐 지내거나 사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세상에 잠시 체류하는 것이 하나님나라 시민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그런데 빌립보서 3장20-21절은, 하나님나라는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1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에게는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속했지만, 그 나라가 지금 완전하게 임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지금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 임한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하게 드러나는 일은 예수님이 오실 때 가능해집니다.
한 유명한 신학자는 이것을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not yet’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나라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망가지고 부조리한 이 세상을 완전히 평정하시고 회복하실 때까지 우리는 ‘중간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했지만 완전하게 임할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그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이 만물을 그분에게 다 복종시키시고, 또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신다고 합니다. 이는 참 특별한 표현입니다.
참고 견딘 것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와 앞으로 임할 하나님나라 사이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좀 편하게 소풍 온 것처럼 지내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참고 견디면 또한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요, 우리가 그를 부인하면 그도 또한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이 구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영적으로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고, 이 땅은 우리에게 이 땅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세계관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 하나님나라에서 세상을 보는 시각, 삶의 방식과는 판이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타협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 사는 우리는 어떤 면에서 이중국적자로 살아갑니다. 영원히 거할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가 이 땅에서 잠깐 체류하는 삶을 특징지을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셨으므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너무너무 힘들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라고 푸념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성경은 힘든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참고 견디는 것이 우리 삶의 특징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참고 견디면 마지막 날에 그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게 된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깨져 있고,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식대로 움직여가고 있는지를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성격을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사람이라고 하여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았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세상에서 예수님이 가려서 뽑아 자신의 소유로 만드셨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선행을 해도 세상에서 오해와 무시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속하였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벗어나 그리스도인들끼리만 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남으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참고 견디고 애써야 합니다. 이 일에 손쉬운 답변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악한 세상과 더불어 살면서 그 악에 무릎 꿇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대가를 지불하고 살았을 때 나중에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고난이 있을 때 영광이 옵니다. 견디고 이겨낼 때 훗날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가운데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게 될 우리의 소망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묵상질문
1.당신은 스스로 세상에 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소속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얼마나 깊이 하고 살아갑니까?
2.디모데후서 2:12을 묵상하며 우리가 참고 견뎌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하나님나라 시민으로 살아갈 때 당신이 세상에서 겪는 부대낌, 어려움, 불편, 불이익 등은 무엇입니까?
2. 새로운 시민권과 그 사명
◾생각해볼 질문-‘하나님 나라의 시민’에게는 놀라운 특권과 함께 사명도 있을 텐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갔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인데, 베드로전서 2장 9-10절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우리의 상태와 그 이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들어감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에 대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벧전 2:9-10) 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10.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개역개정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상태
9절에서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의 상태를 ‘어둠’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어둠이었는데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 밑으로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모든 것을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분의 통치로부터 떠난 상태이기에 어둡습니다. 10절에서는 그 상태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다 (개역개정-긍휼을 얻지 못했다)’ 고 표현합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긍휼히 여기심을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불러주셨습니다.
*변화된 지위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잠깐 어둠에서 꺼낸 정도가 아니라, 그분이 다스림 가운데서 새로운 지위를 주셨습니다.
9절-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 되었고, 왕과 같은 제사장이 되었고, 거룩한 민족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보물과 같은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불러내셔서 이런 놀라운 지위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귀국한 선교사의 예화)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소속감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이런 성경 구절을 암송하면서 스스로를 계속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변화의 목적
이런 놀라운 변화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개역개정에서는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 신분이 바뀐 우리는 우리가 누리게 된 아름다운 덕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면서 변화된 것을 선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는 목적입니다. 에베소서 2장 6-7절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엡 2:6-7)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셔서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신분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베드로전서에서 ‘왕 같은 제사장, 택하신 족속’이란 표현과 내용이 같은 것입니다.
7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말하는데, 이는 베드로전서에서 말한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입니다. 이것을 선포하게 하는 것, 이것을 장차 올 모든 세대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가장 큰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변화된 삶, 그 놀라운 삶, 자비와 은혜를 입은 삶,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삶,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이런 멋진 삶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오는 세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믿으면 저렇게 좋겠구나’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를 불러주신 목적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우리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그 다스림 아래 들어가게 될 때 인생이 바뀌고 최선의 인생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대단한 변화이며 축복인데 이러한 축복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이러한 축복을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묵상 질문
1. 베드로전서 2:9을 묵상하면서 특히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난 이후 당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3. 하나님의 다스림을 누리며 알리기
*생각해볼 질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로 살 때 경험한 어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세상은 성경적 가치관을 편협하고 융통성없고 부자연스럽다고 말하고,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말에 넘어가기고 합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가는 것이요, 적어도 이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보다 세상을 따라 살면, 대부분의 경우 심각한 상처만 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만 빼면 참 매력있는 그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가게 되고, 많은 경우 마음속 깊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성에 대한 것이나 돈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와의 사귐 가운데 요구되는 성적인 것을 거부한다거나, 돈을 사용하거나 모으는 문제에 있어서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미묘한 부대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축복
주님의 길을 따르느라 세상적인 성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생을 진정으로 위탁할 때 그분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런 평안을 누렸습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부분(돈, 결혼, 자녀문제, 장래에 대한 문제)이든 평안이 없다면, 하나님의 다스림 밑에 온전히 내려놓으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축복을 알리는 일: 먼저 거룩해지기
이런 평안을 누렸다면, 이제 이런 놀라운 축복, 하나님의 다스림 밑에 있는 축복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의무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16절에서 그 의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의 주가 되셔서 우리가 거룩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우리가 거룩해진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련한 예
다음 날 시험이 있어도 주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공동체의 교제를 위해 교회에 갈 때, 시험 당일 아침에도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경건의 시간’에 변함없이 충실할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그렇게 그럴 수 있는지 물어옵니다. 또 일요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기 때문에 주말여행을 자제하거나, 아이들이 태권도 등급심사에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소한 일 같지만, 우리는 이런 행동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소중함으로 드러냅니다.
*자신과의 관계에 관련된 예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거룩해지면 약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불행한 일들을 억지로 숨기려 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도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삶에 여유가 있고 전전긍긍하지 않으며, 감정의 기복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타인의 평가에 따라 자신의 기분이 좌지우지 되지도 않습니다.
*공동체와의 관계에서의 예
공동체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희생하는 사랑, 진실한 사랑, 구체적인 사랑, 중심있는 사랑을 연습하며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공동체 가운데서 우리가 변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런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서 거룩해진다는 것은 이런 변화를 뜻합니다.
*희망을 흘리는 삶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타내려 할 때 가장 먼저 담당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렇게 삶이 변화되면,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와서 그렇게 사는 이유를 물을 것입니다.
전도가 잘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인격이 세상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고, 신비로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우리 인생과 인격에 신비한 요소가 하나도 없는데, 멋있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은데, 누가 우리의 증거를 믿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든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모습을 자꾸 흘려야 합니다. 통합된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축복을 누리며 사는 지 사람들에게 보여주십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누리게 되는 축복을 어떻게 나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며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세상 사람들에게 흘리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1. 당신은 전도나 간증이 즐겁고 자연스럽습니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고, 그렇지 않다면 또 무엇 때문입니까?
2. 베드로전서 3:15을 묵상하고 특별히,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한다(“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우리 삶에서 어떻게 이런 모습이 드러나는 지 묵상해봅시다.
4. 대답을 준비하는 삶
생각해 볼 질문: 전도를 하려 할 때 가장 마음에 걸리고 힘든 부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준비한 것들
베드로전서 3장 16절은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과 선한 양심으로 대답하라고 권합니다. 온유함은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상대방의 관점으로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주는 마음 자세입니다. 두려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자신을 향한 자세입니다. 자신도 잘 모르는 진리를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고 솔직하게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자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 할 때 마치 모든 해답을 다 가진 듯한 자세를 취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나도 잘 모르겠어라는 말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답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인생에는 우리가 대답 할 수 없는 질문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태도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실제적인 내용은 간증과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증이란 예수님을 만나서 어떻게 변했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신의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간증은 특별히 훈련이 필요하지않지만 자신의 간증 내용을 간단하게 준비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을 믿은 다음,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좋습니다. 전도는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복음에는 중요한 내용이 네가지 들어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세상과 당신을 만드셨고,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두 번째,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데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세 번재는 죄의 댓가로 죽어가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받아드리면 구원을 선물로 받을수 있습니다.
전도는 영혼의 심폐소생술입니다. 짧은 시간에 복음을 설명할수 있다면 점점 긴 시간을 할애하여 많은 토론을 하면서 복음을 설명할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짧게라도 복음을 설명할수 있도록 준비하고 연습해놓으십시오.
개인의 증거를 더 강력하게 만드는 교회
우리가 공동체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을 믿게됩니다. 가장 좋은 복음 전도는 예수님을 정말 믿고 있는 공동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가 잘되지 않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타내지 못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창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기때문입니다. 교회가 사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지 않으니 교회 내에서도 세상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니 창문이 더러워져 벽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삶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드리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품고 이런저런 사랑을 보여주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였기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비밀이 알려 질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복음이 전해 질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야 할 이들의 목록을 가지고 계십니까?
묵상질문
당신에게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은 누가 있습니까? 각각 세 사람의 이름을 써 보십시오..
-가족중에서:
-친구, 친지중에서:
-직장 동료중에서:
열 번째 만남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세상 경영
1. 세상 경영의 원리: 정의와 사랑
2. 정의와 사랑으로 살아가기
3. 새상 경영의 방법: 노동
4. 노동하며 살아가기
열 번째 만남,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세상 경영
1.세상 경영의 원리 : 정의와 사랑
*생각해 볼 질문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 당신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을 믿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원리와 방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원래 계획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로 들어가 산다는 것은 그분의 원래 계획을 다시 회복해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던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그분의 원래 계획대로 살아갑니다. 창세기 1장27-28절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무엇이었는지 먼저 살펴봅시다.
27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 하셨다.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이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다음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다음 그 세상을 직접 다스리고 통치하시지 않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권한과 능력을 주셔서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합니다. 마음과 뜻을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능력과 권한을 주셨는데 인간은 그 능력과 권한으로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립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능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런 창의력을 비롯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능력은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조건이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을 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의 기본 원리는, 사람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위임받아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일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고 선포하고 보여줌으로써 그날이 가까이 다가옴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리 : 정의와 사랑
다스림이란 단어는 대개 부정적인 인상을 줍니다. 대부분의 조직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좋은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다스린다는 단어를 들으면 대개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다스림’은 그런 부정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할 때, 그 다스림의 의미를 시편89편14절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공정이 주의 보좌를 받들고, 사랑과 신실이 주님을 시중들며 앞장서 갑니다(새번역).
의과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개역개정).
시편89편14절을 비롯하여 몇몇 구절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묘사하는데,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왕좌와 그분이 앉아 계신 보좌 주변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의와 공의’(또는 ‘저의와 공정’)는 하나님의 보좌 아래 있는 기둥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보좌 옆에서 시중을 드는 것이 ‘사랑과 신실함’, ‘인자함과 진실함’ 등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정의로 세워져 있고, 그 앞에서 사랑이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다스림의 기본 개념입니다. 인간에게서 이 두 가지를 함께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랑과 정의를 조화롭게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여러 행위를 보면, 어떤 때에는 사랑이 강조되고 어떤 때에는 정의가 강조되지만, 이 두 가지는 늘 같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에 도 사랑으로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랑과 정의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화로움이 가장 완벽하게 나타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최고의 정의와 최고의 사랑이 만난 곳,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렇듯, 정의와 사랑이 늘 같이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세상을 다스리라”고 할 때는 인간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세상을 착취하고 마음대로 훼손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잠재력이 최선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사랑과 정의로 세상을 경영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품으셨던 놀라운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분의 정의에 기초하여 그분의 사랑을 닮은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고 이끄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다스릴 때,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다스리시는 것과 같이 그 대상을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주는 사랑으로 다스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 즉 세상을 경영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기초하여 그 대상이 최선의 가치를 발현해낼 수 있도록 섬기고 이끄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사랑과 공의에 기초하고, 우리 하나님나라 백성은 그의 다스림 아래서 그와 함께 세상을 다스릴 자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앞으로 함께 영원히 세상을 다스릴 자답게 사랑과 공의에 기초하여 세상을 경영하며 살아갑시다.
*묵상질문
1.시편89:14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보좌를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그분이 어떻게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지 묵상해봅시다.
2.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사랑과 정의가 조화를 이룬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2과. 정의와 사랑으로 살아가기
◾생각해볼 질문-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의 원리로 살아가기 힘든 영역은 어떤 영역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선과 악이 늘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가 악이고 어디까지가 선인지 구별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가기가 매우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복잡할뿐더러, 사람들이 이 세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또 앞으로 세상을 다스릴 자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원리가 앞서 이야기한 사랑과 정의입니다. 여기서 그 원리를 배우기 위해 성경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 특별히 하나님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억울한 자들의 피할 요새
(시편 9:8,9,12절) 8그는 정의로 세계를 다스리시며, 공정하게 만백성을 판결하신다.
9주님은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이시며, 고난을 받을 때에 피신할 수 있는 견고한 성이십니다.
12살인자에게 보복하시는 분께서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시며, 고난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데, 우리 개인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나라도 심판하십니다.
아무것도 그분의 정의로운 심판을 피해갈 수 없는데,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기업·다양한 사회 집단·교회·종교 권력·국가·다국적 기업·국제기구 등 모두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아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란 무엇입니까? 9절은 하나님이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이시라고 합니다. 억울한 자들이란, 힘에 의해서 자기가 마땅히 누려야 할 정의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피할 요새가 되십니다. 또한 “고난을 받을 때에 피신할 수 있는 견고한 성”이시라고 합니다. 12절에서는 “살인자에게 보복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시며 “고난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보복하고 기억하시고, 모른 체하지 않으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암 5:24)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세상에 온전히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에서 공의가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정의의 문제는 단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정의가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예시) 회사에서 옳지 않고 양심에 거슬리는 일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묵인하는 상황일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지혜롭고 융통성 있게 문제 제기해야 합니다./ 카센터를 운영하는 한 형제가 예수님을 믿은 후 부품을 속이고 교체하던 것을 하지 않고 정품을 제대로 된 가격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는데 적자가 나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함. 꾸준히 정직하게 일하다 보니 매출이 다시 오르기 시작해, 속이면서 영업할 때보다 조금 더 많이 번다고 합니다./땅콩박사라 불리는 조지 워싱턴 카버는 흑인 과학자로 흑인의 인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미국에서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흑인들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날 수 있도록, 온갖 차별과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과학이라는 자신의 은사를 사용했습니다./영국에서 노예해방을 주도한 윌리엄 윌버포스/ 나치에 항거한 본회퍼 =>이들은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의 정의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꾼들의 아우성 소리
(약 4:17) 그러므로 사람이 선한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그에게 죄가 됩니다.
(약 5:1,4) 1부자들은 들으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십시오
4보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군들의 아우성 소리가 전능하신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본문은 사람이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권력이든 재력이든 힘을 가진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어 아우성치게 하였다면, 그들도 머지않아 울며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 우리가 받은 힘을 정의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살이를 해나갈 때,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세상경영원리는 공의와 사랑입니다. 이 원리를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꾸준히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살이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모습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1)일이나 직업과 관련된 부분-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진전시키는 일인지, 아니면 그것을 퇴보시키거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스르는 일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2)우리가 속한 직장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인격을 모역하거나 함부로 대하면 그들의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3)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관련된 부분-동성애자들에 대해 정죄와 차별보다 동성애 성향을 치유하고 회복, 극복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어야 합니다.
4)사회의 불의한 구조와 시스템과 관련된 부분-정치적 성향에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5)자연, 생태계와 관련된 부분-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끼고 돌보는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6)우리나라의 통일 문제와 관련된 부분-통일 이후 북쪽에 교회를 세울 생각보다 남쪽에 있는 새터민들과 탈북자들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믿는 한국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7)세계적인 불의와 잔인함과 관련된 부분-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고 있는 학대와 착취에 대해서 기도하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냅니다.
◾묵상 질문
1. 시편 9:8,9,12과 야고보서 4:17,5:1,4을 읽고 비교하여 묵상하여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2. 하나님의 원리인 공의와 사랑을 우리 삶과 세상에 적용하려 할 때, 그 원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나 주제(직장,윤리,인권 등)가 특별히 떠오른다면 어떤 것입니까? 그러한 부분에 품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3. 세상 경영의 방법: 노동
*생각해볼 질문
당신은 어떤 목표와 마음가짐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일-공부든, 직장일이든, 집안일이든-을 하고 있습니까?
*일하는 인간을 만드신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세상 경영에 참여하려면 일을 통해 참여하는 데 시편 기자는 이렇게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세상을 창조하신 섭리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시편 104편 19-23절입니다.
19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20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21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22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23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해와 달을 만드셔서 낮과 밤을 만드신 하나님, 밤에 동물들이 움직이면서 일하도록 만드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낮 동안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일하셨고,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만큼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와 사상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노동이 신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가사노동, 농사, 경찰이 하는 일, 의사, 교사, 청소부, 모든 일이 다 중요하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별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게 부르셔서 다른 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목사 일도 100퍼센트 중요하고, 농부의 일도 100퍼센트 중요합니다. 사람마다 부르심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뜻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은 신성합니다. 그 일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지 고민해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기 시작하고, 공동체적 삶이 원리들을 알아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며 살려고 애쓰다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점점 더 선명하게 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성장하여서 그분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런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의 노동
노동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데 창세기 3장 17-19절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영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인간이 타락한 다음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마에 땀이 날 정도로 일을 해야 소산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해야 할 것이다.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수고하여도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그분의 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첫째 우리는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노동에는 고통과 수고가 따릅니다. 셋째, 수고가 있지만 늘 좋은 결과가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도 노동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 놓고 잔치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그림입니다. 천국에 가도 우리는 노동을 하는데, 그때에는 노동에서 고통스럽고 눈물 나고 힘든 부분이 사라집니다. 노동이 성화되어서 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 모두가 창조적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신성하고 창조적인 노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온전히 참여하여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며, 그분의 특성이 드러나는 문화를 창조해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하게 노동하며 그 결과와 소득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묵상 질문
1. 시편 104편 19-23절을 묵상해봅시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원리 가운데 인간의 노동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2. 당신은 하루 대부분이 시간을 들이는 ‘내 일’을 하나님이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아야 할까요?
4. 노동하며 살아가기
생각해 볼 질문: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을 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우리가 하는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2절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을 드리라는 말은 우리 일상, 즉 매일의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 일상이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일상이 무조건 예배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생각하며 어떤 일을 할때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두신 소원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대할 때의 자세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성실입니다. 우리가 성실하게 사는 이유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 일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때문입니다. 성실성과 함께 한가지 더 추구해야 하는 것은 탁월성입니다. 탁월성은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솜씨,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그게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이 개입하셨기때문이군요. 당신이 그렇게 사는 게 그래서 그렇군요. 당신이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는게 하나님때문이군요 라고 알게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삶과 착한 행실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심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참 좋다고 느낄때 그럴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사람들이 저 사람이 저렇게 사는 걸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계실지도 모르겠다라고 이야기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거룩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삶,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교회 밖에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배우고 익힌 다음 실제로 그 내용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구실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묵상질문
1. 빌립보서 2:13을 묵상하고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어떤 소원을 주고 계신지 싶이 생각해 보십시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Ⅵ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기
열 한 번째 만남,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1. 인생의 목적을 어디서 찾을까?
2. 평생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3. 가장 중요한 성장 원리: 믿음
4. 믿음으로 훈련하기
1.인생의 목적을 어디서 찾을까
*생각해 볼 질문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의 목적을 찾았고,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사람, 책, 사건 등)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을 믿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원리와 지금 까지 열 번에 걸쳐 예수님 제자로 사는 것에 대해 배웠는데,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훈련을 마무리하는 두 번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는 것의 중요성과 의미 그리고 그 방법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인생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누구를 만나는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디서 살 것인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인생의 목적을 어디서 찾느냐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 쾌락, 재미, 성공, 가족, 건강, 세상의 정의 등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생의 목적을 찾는 데 가장 존귀하고 믿을 만하고 중요한 원천은 단연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고,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의 으뜸이시고 우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우리 인생 목적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목적
우리가 하는 이 훈련의 목적은, 하나님이 주시는 놀랍고 풍성한 삶에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훈련의 궁극적 지향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5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해지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뿐 아니라 사도바울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에베소서5장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 전제를 달아서, 우리가 사랑을 받은 자녀라면, 그 자녀의 모습에 걸맞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자세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10절에서 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과장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 옆에 앉히셨습니다. 한 번만 앉아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 옆에 두십니다. 우리 신분이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신분만 바꾸신 것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로 우리를 그 신분에 걸맞은 자질을 가진 자로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이끄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지속적으로 변화시켜나가십니다. 이런 변화 과정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진정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성경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모범 되신 예수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을 수 있을까요? 이런 본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예수님이 가장 좋은 본을 선사하십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말해주는 누가복음 2장52절을 살펴봅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누가복음의 이 구절은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성장하신 영역을 보여줍니다. 지혜와 키는 정신적, 육체적 영역을,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영적 영역을,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사회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지혜와 키’는 나 자신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 영역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사람에게도 사랑스러워져갔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이 사람들과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관계와 세상과의 관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도 점점 더 사랑스러워져가고 그 관계가 점점 더 깊어졌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개역개정은 이렇게 예수님이 성장하시는 모습을 좀 더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말합니다.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런 여러 영역에서 균형 있게 성장하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성장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키와 지혜가 자라면서 사람들과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워져갔습니다.
점진적으로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처럼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보이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우선,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어느 영역에서 성장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이것이 오랜 시간 과정을 거쳐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입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축복이 그 사람을 성자로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드러나는 일은 평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이 목적이 불분명하고 어디서 성장해야 할지 모르고 인생이라는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닮은 사람들로 성숙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이 되어 무엇을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목적 아래서 각자의 특성에 맞게 이런 일을 할 수도 있고 저런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사명에 사로잡히거나 어떤 직업에 전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다가 정말 중요한 것, 정말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을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묵상질문
1.에베소서5:1과 골로새서3:10을 묵상해 봅시다.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2.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까?
당신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 신앙적 단계에 도달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어떤 영역에서 특별히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2과. 평생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생각해볼 질문-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목표,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고 싶은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성장
<에베소서 4장 13절>은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의 성장목표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성장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입니다.
성장하는 방법은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는 표현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하면서, 서로 도와가면서, 한 공동체 속에서 성장에 이릅니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면 일상에서도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종교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현장, 즉 바로 지금 여기(hear and now)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
<시편 42편 1,2절> 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갈급함은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주를 찾기에 갈급한 것이 우리 신앙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2절 끝부분의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는 새번역 성경의 표현으로는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 곧 그분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서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닮아가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예수님처럼되어서 예수님을 뵙는 것, 그분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갈망으로 평생 살면서 결국 마지막 때에 일어날 놀라운 일을 소망합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마지막 때에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되고 예수님을 잇는 그대로 보게 되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진 자들은 당연히 자신을 더욱더 깨끗하게 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를 닮아갑니다. 또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답하며 기다립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계획하신 삶은 그를 평생 닮아가다가, 결국 그의 앞에,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그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묵상 질문
1. 성장하기 위한 몇 가지 요소 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요한일서 3:2-3을 묵상하며 자신의 소망이 진정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봅시다.
3. 가장 중요한 성장 원리: 믿음
*생각해볼 질문
이제 성장 목표는 분명해졌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런 성장에 이를 수 있습니까?
참된 제자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원리
참된 제자로 성장해 가는 진정한 제자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초기에만이 아니라, 예수를 닮아가는 전 과정에서 가장 필요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 하고 계신 일, 앞으로 하실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배우고, 그것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분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봅시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
먼저 로마서 3장 24-25절을 보겠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것은 우리가 은혜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성경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일 때, 곧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을 때 우리의 것이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림
’하나님이 행하신 진리를 이해하고 믿음으로써‘ 우리가 점진적으로 변화됩니다. 로마서 5장 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구절에서는 ‘믿음으로’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먼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며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이를 본문에서는 은혜의 자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감
로마서의 주제를 담고 있는 1장 17절은 믿음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의 원리로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이 우리 것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인이 된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믿음의 특징: 행함
믿음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전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 기가 막힌 표현이 나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에는 역사(행위 work), 사랑에는 수고, 소망에는 인내가 있다고 합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믿으면 그 믿음은 말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라 행함으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은 믿음을,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한다고 말하지만 바울이나 야고보나 모두 살아있는 믿음, 곧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진리를 믿으면 믿는 만큼 행함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며 변화됩니다. 이제 믿음과 관련된 구체적인 예들을 생각해봅시다.
1. 개인적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 우월하게 느낄 수도 있고, 열등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의 실제적인 반응은 마음의 평안으로 나타납니다.
2. 공동체 생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함께 있기 힘든 사람이 꼭 생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며, 그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한 가족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싫어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계심을 믿으면 그를 행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변화가 생깁니다.
3. 또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우리에게 있는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지 그분께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4. 사업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이 잘 안 되고 인생이 잘 안풀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주관한단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5.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들에게 모함이나 비난을 당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이신다. 너의 진실성을 아신다. 그걸 네가 가서 굳이 얘기 하려고 하지 마라 해봤자 변명밖에 되지 않으니, 넌 하나님 믿고 가만히 네 갈 길을 가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우리의 노력과는 다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묵상 질문
1. 야고보서 2:17을 깊이 묵상해봅시다.
2.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하신 일 가운데 특별히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진정으로 믿어 믿음이 역사하고 있습니까?
4. 믿음으로 훈련하기
생각해 볼 질문 믿음으로 살아가려 할 때 당신에게 가장 큰 방해 거리는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연습하고 훈련하기
우리에게는 연습하고 훈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대로 행할뿐 아니라 그것이 제 2의 천성이 될 때까지 훈련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우리 인격과 인생이 바뀝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습관덩어리입니다.
영적 지도자의 역할
오늘 날 우리 시대에는 이런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본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자기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 드려서 계속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을 본 받아라 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본받고 따라가니까 여러분은 나를 본받으세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믿음이 어린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직접 본 받을수 있습니까? 중간 모델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본 받으라는 영적 지도자의 말은 나도 하나님을 본받으려고 힘쓰고 있으니 넌 나를 따라오면 하나님을 본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지도자들이 보여야 할 본중에서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돈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저는 돈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가장 큰 경쟁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돈에 굴복하고 있고 돈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십일조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힘든 사람이 십일조를 드리면 아마 하나님은 굉장히 불편해지실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바닥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을때 그분이 먹여 살리셨다고 많은 사람들이 간증합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며 고백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본을 보이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돈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영적 지도자들 가운데는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권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지.. 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지도자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머지로 살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자신도 그런 경험이 없으므로 저는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사람한테 십일조하라고 말 못하겠어요 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이란 길바닥에 나 앉아도 하나님이 나를 살리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인생살이에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쌓여 경건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는 성령
성경에는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모든 하늘의 보화, 하나님에 대한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성경을 자꾸 읽다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배웁니다. 그것을 알면 믿음이 커집니다. 믿음이 커지면 그것은 행함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큰 믿음이란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세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이 넘쳐나고 그로인해 내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인격과 인생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예수님처럼 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신분이 바뀐 우리가 우리의 자질도 거기에 따라서 변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열 두 번째 만남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의 청사진
2. 하나님 나라의 계보를 잇는 공동체
3. 하나님 나라 백성을 이끄시는 성령님
4.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삶
풍성한 삶의 기초
Ⅵ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기
열 두 번째 만남,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1.‘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의 청사진
*생각해 볼 질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균형’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제<충성한 삶의 기초>의 마지막 만남에 이르렀습니다. 이 만남을 함께 공부하면 이 훈련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마음속에 새기고 실제로 드러내는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만남에서는 이렇게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내용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향기 없는 그리스도인
보통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 응답을 비롯하여 영적 체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체험을 늘 기억하면서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특별히 많은 훈련을 받고 많이 배웠기 때문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적 체험도, 여러 훈련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참 중요합니다. 가끔 이렇게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에게서 부족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색채를 빼고 말하면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러한 매력을 찾아보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또한 성경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닮은 ‘향기’나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생활에서는 활력이 넘치지만, 세상 삶의 터전에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균형 잡힌 시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란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에서 원래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삶을 종합적으로 보고 성숙하게 해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이러한 전반적인 시각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공동체라는 토양에서 성장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공동체성을 갖고 계시고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지음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서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놀라운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실제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공동체에 속할 때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균형 잡힌 시각도 있고 건강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데도 잘 성장하지 않는 경우는 성령님과 하나님나라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잘 알지만, 예수님의 중심 가르침인 하나님나라에 무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을 이끄십니다. 성령님을 고작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를 안내하고 도우시는 성령님을 실제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균형 잡힌 시각과 좋은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변화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전체적으로 훑어봅시다.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에서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의미,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미 이 훈련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반복어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 ‘그리스도 안에서’일 것입니다. 이 어구는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 무엇인지 온전히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훈련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을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특별한 존재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 속에 속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영적인 사실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 이라고 배웠습니다.
믿음이란 세뇌나 자기 확신이 아니고,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일, 지금
하고 계신 일,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만남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나눌지를 배웠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게 되었는가?’를 가장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옛날에는 진노의 자식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상속자, 즉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로서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아가는 특권을 얻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최고급 정보를 담고 있는 성경을 읽지 않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 가면 그분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하기도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예배를 드리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그분 앞에 토해놓습니다. 이 모두가 다 특권입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만남에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게 된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어떤 잣대로도 바라보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하게 사랑을 입은 자로 바라보십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은 바로 자기 부인과 성령 충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면에서는 성장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장에는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 만남에서는 공동체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나서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은, 우리가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공동체에 속하라고 말하기 이전에 우리가 이미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여서, 우리가 공동체에 속하여 우리에게 주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형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 요한일서에서 그 사랑의 원리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희생하는 사랑, 진실한 사랑 또는 투명한 사랑, 구체적인 사랑, 중심이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면, 서로 순종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공동체 가운데서 서로 섬깁니다.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여서 공동체를 세웁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을 압니다. 진정한 성숙은 섬김의 도에서 나옵니다.
아홉 번째. 열 번째 만남에서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라는 존재로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표현하는 가장 원천적인 방식이 복음 전도입니다. 전도 없이는 하나님나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알리는 것이 복음 전도라면, 이러한 다스림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도록 애쓰는 것이 세상 경영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경영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 원리는 ‘정의’와 ‘사랑’입니다. 세상 경영의 원리가 사랑과 정의라면, 세상 경영의 방법은 노동입니다.
열한 번째 만남에서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으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 그분의 형상에까지 이르는 것,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온전케 되는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열쇠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우리의 인격과 삶을 바꾸는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묵상질문
1.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은 그리스도인, 예수를 닮은 성도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2.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풍성한 삶의 기초>에서 이야기하는 각 영역에서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과. 하나님 나라의 계보를 잇는 공동체
◾생각해볼 질문-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 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멋진 삶을 위한 청사진을 다시 생각해볼 때 가장 기대가 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나
공동체
하나님
자신
세상
하나님과 관계
알아가기와
사랑하기
세상과의 관계
복음 전도와
세상경영
성도와의 관계
형제 사랑과
섬김의 도
자신과의 관계
자기 부인과 성령 충만
예수님을 닮는 것을 모호하게 생각하는데, 다음 그림을 마음속에 청사진으로 간직하면,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가 선명해져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선명한 청사진이 인생을 세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알아가기’와 ‘사랑하기’인데, 알아가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며, 사랑하기에는 예배와 순종, 기도가 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기 부인과 관련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두 가지 욕망이, 성령 충만과 관련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셔서 성령 충만에 이르게 하시는지, 또 그 반대로 근심하여 소멸하기까지 하시는지가 떠오릅니다.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형제 사랑에는 사랑의 네 가지 원리를 기억하고, 섬김의 도에서는 피차 복종의 원리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복음 전도’의 의미를 기억하고, 세상경영의 두 원리인 사랑과 정의 세상을 경영하는 방법인 노동의 의미를 잘 새겨놓아야 합니다.
건강한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과 습관이 바뀔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고 싶다면, 하나님을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닮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고 도전하고 세워주는 곳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배운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우리 영혼은 점점 깨끗해지며,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순결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 속에 잇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변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합니다.
이런 공동체에 매우 중요한 존재가 있는데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서 걷고 있는 이끄미들을 본받으며 살아가야 하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이렇게 영적으로 더욱 진보한 지도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완전함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수를 본받고 있고 이 일에서 조금 앞서 있으니,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하나님을 먼저 따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앞에서 먼저 균형있게 걸어가면 따라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쉬워 지지만 반면 멈칫멈칫하거나 갈지자로 걸어가면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듭니다. 과거보다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고, 보면서 격려와 도전을 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 공동체의 궁극적인 목적
이렇게 주님을 본받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개인이 힘써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장 7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장차 오는 모든 세대가 알고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부탁하여, 그가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나가기를 바랍니다. 복음 전수는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고 누려서 온전히 자기 것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으며, 자신이 이미 그런 삶을 살고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 전수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복음 전수자인데, 복음을 전수하면 할수록 이 복음이 자신 속에서 선명해지고 심화되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공동체 속에서 살아내고, 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주변 사람들과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의 맥을 잇는 것,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묵상 질문
1. 고린도전서 11:1을 묵상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당신에게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을 함께 훈련하고 배울 수 있는 공동체가 있습니까? 이런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또는 이런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주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3. 하나님 나라 백성을 이끄시는 성령님
*생각해볼 질문
기독교 역사에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여건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복음이 전수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그 원인은 균형있게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주축이된 건강한 공동체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균형있게 성장하는 그리스도인과 건강한 공동체들이 세워지기에는 우리의 상황이 너무 열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상황은 어땠을까요?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
초대교회도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혼돈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하나로 묶어서 성숙하게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계셨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군소 종교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통치를 뒤집어엎었습니다. 기독교는 여건이 좋아서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여건이 척박할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른다면 그분으로 인해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과 이 복음의 중심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뜻합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1장 13-14절을 보십시오.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진리의 말씀이요 구원하는 말씀,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이야기해줍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완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이끌어줄 성숙한 리더가 없다 해도 너무 낙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렇게 어두운 상황일수록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십시오.
*교회 공동체의 영이신 성령님
성령님은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할 때까지 그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인 교회를 이끌어 가십니다. 에베소서 2장 22절을 읽어봅시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종국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될 텐데, 이러한 종말론적인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까지 교회를 이끄시고 교회가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주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될 터인데, 이 중간에 교회를 이끄시며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 없이는 교회는 존재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은 이 교회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여기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이 허무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롬 8장). 예수님은 이 깨진 만물을 회복하시고 계시는데, 이 회복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손과 발이 되어서 움직입니다. 성령님은 이 교회를 이끄시며, 이 고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며 지여져가서 종국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의 영이신 성령의 지도와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근심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 개인의 문제에만 연관되어 있지 않고, 공동체와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허약한 이유는 우리가 따라야할 성령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그날까지 우리를 인쳐주신 성령께서 우리 개인과 공동체를 이끄시도록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성령님께 순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늘 따라야 할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묵상 질문
1. 에베소서 1: 13-14을 묵상하십시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2. 당신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장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속한 공동체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12-4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삶 임진희 정리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할 것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
성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잘 믿으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온갖 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뽑아내서 특별 관리를 해주는 하나님의 특수 고객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축복은 이렇게 신음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불완전한 몸조차 온전해지는 그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견딜 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대신하여 기도하십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의 모습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소망을 품고 견디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안전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소망으로 사는 삶
무슨 일을 하든,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만날 때마다 어떻게하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또 사회에서 선한 일을 도모할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실천하고 연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선한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의 선한 일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맡겨진 선한 일을 최선을 다하여 행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하실 때를 기다립니다. 만약 우리 예배에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부분이 빠진다면 우리의 신앙은 현세에서 복을 받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반열에 들기 위한 세속적 예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제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자라신 만큼 우리도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만물을 회복하는 주체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제자로 사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온전히 자기를 완성하고 다음 세대에 진정한 영적 모범이 되며 많은 찾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디딤돌이 되어 세상에서 끊임없이 선한 일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으로는 우리 공동체가 행할 선한 일을 찾아 힘쓰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며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만물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는 메시아의 사역에 참여합니다. 이것이 풍성한 삶입니다.
우리의 구체적 목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기다리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를 구체적으로 닮아가기 위해 애씁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훈련할 때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어느 날 향수 한번 뿌렸다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바뀐 생각에 근거해서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 나옵니다. 우리는 서로 세워주고 이끌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 목적을 한번 써 보십시오. 여러분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써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앞으로 3개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계획해보십시오. 이런 계획을 세울 때 성령님께 기도하며 마음을 정하십시오.
Ⅰ. 내 인생의 목적
Ⅱ. 가까운 목표(앞으로 3개월 사이)
a. 하나님과의 관계
b. 자신과의 관계
c. 공동체와의 관계
d. 세상과의 관계
2. 세 가지 형태의 예배
◾생각해볼 질문-당신은 언제 어디서 예배하고 있습니까?
1) 개인의 찬미
(히 13:15) 그러나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며,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의 이름’이란 그분이 행하신 일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리키는데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우리 입술의 열매가 찬미의 제사입니다. 예배할 기분도, 상황도 아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을 드려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개인 차원의 예배가 풍성해야 합니다. 사실 예배는 하루 종일 계속 드려야 마땅하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닐지라도 매일매일 순간순간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공동체적인 예배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있게 하십시오.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공동체적인 예배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는데 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오고, 우리끼리 서로 권고하고 가르치며, 우리에게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노래와 찬양이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으로는 제의적인 예배, 은사주의적인 예배, 관상적 예배가 있는데 장단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3) 삶으로 드리는 예배
(롬 12:1)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우리가 드릴 정말로 합당한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며, 우리 인생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어떤 행위와 일을 행하며,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일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이며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고 그렇게 예배하는 우리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사랑과 평화와 지혜를 얻어 누립니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며, 이렇게 예배가 우리 삶 가운데 살아있을 때,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풍성한 삶은 바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인격적 관계, 곧 살아있는 예배에서 주어집니다.
◾묵상 질문
1. 당신은 ‘개인의 찬미’를 어떻게 드리십니까? 자주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지금 조용히 악보 없이 외울 수 있는 찬양으로 하나님께 노래해보십시오, 하나님만 들으시라고 노래할 때,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습니까?
2. 골로새서 3:16을 묵상하고 공동체 예배의 세 가지 차원 중 특별히 당신에게더 깊어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
생각해볼 질문
당신은 기도를 몇 분 정도 합니까?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금세 지나갑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지식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녀로써 이야기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점점 알아가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토해놓는 것이 기도입니다.
* 기도의 자세와 축복
기도할 때 우리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또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 빌립보서 4장 6-7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의 자세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급해서 안달이 나서 기도하는 것은 사실 기도의 대상자와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기도가 주는 축복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대로 응답된다는 의미보다는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생각과 마음을 다스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기도에 대한 오해들
1. 우리는 보통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아내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2. 보험성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를 미리미리 해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교육하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기도하면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4. 기도에 대한 오해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경우는 비인격적인 기도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쌍방향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퍼부어버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인격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한 만큼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는 지, 기다리며 들어야 합니다.
* 기도 누리기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에 의지해서,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이런 건강한 기도는 우리의 상황을 바꾸기 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바꿉니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 친교기도와 사역 기도, 이렇게 둘을 나누어서 합니다.
친교기도는 말 그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탄하고 감격하는 기도입니다.
사역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한 가지만 더 제안한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늘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이 기도라면, 기도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다가 본문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발견하면 그것을 아주 짧은 문구로 요약하십시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렇게 발견된 하나님의 성품을 하루 종일 품고 지내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이런 영적인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런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리다 보면, 우리는 점점 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에 더욱 감격하고, 우리 삶에 오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하는 기도는 점점 우리를 성숙한 기도로 이끌고, 그리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로(요 6:33)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성장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그 사랑에 의지해서 말씀드리는 기도는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이런 기도를 매일 드리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기도가 깊어져서, 자녀의 특권을 맘껏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핵심 질문
1. 빌립보서 4:6-7을 묵상하고 우리가 어떤 염려를 내려놓고,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할지 생각해봅시다.
2. ‘기도에 대한 오해들’에 나온 기도 중에서 당신의 기도와 닮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제 어떻게 기도해야겠습니까?
4. 사랑으로 드리는 순종
생각해 볼 질문: 당신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따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징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없어서는 안 될 특징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고 예배하는 사람은 그분이 원하시는 계명, 즉 예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것을 누리고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표현입니다.
*순종의 방해물
재물과 하나님은 같이 섬길 수 없다고 그들은 우리 마음속에 함께 있을 수 없는 라이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가짜 신입니다. 재물은 유사하나님입니다. 헌금은 돈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의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상징적인 선언입니다.
돈은 우리의 가장 큰 적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우리 발목을 잡는 하나님의 강력한 라이벌입니다.
*10-10-10의 습관
돈이면 뭐든지 되는 것 같은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루에 10분씩 세 번 하나님님을 만나는 습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10분 하루 일과 중에 10분 집에 돌아와서 10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습관을 형성하십시오.
성경과 관련된 다섯 가지 활동과 예배 기도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얻어낼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희생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을 누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주셨는데 그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말씀을 통해 듣고 배우고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입니다.
*묵상질문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배웠습니다. 이번 만남을 통해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부분을 깨닭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행동으로 옮겨야 할 부분은 무엇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