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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지(鄭宗之)가 찾아왔기에 대작(代作)하다. 3수(三首)
필마로 군대 따라 삭방으로 향했다가 / 匹馬從戎向朔方
돌아오니 봉화가 고향을 또 비추누나 / 歸來烽火照家鄕
누가 알랴 베갯머리 끝없는 이 생각을 / 誰知枕上無窮意
텅 빈 섬돌 빗소리에 밤은 더욱 긴데 / 雨滴空階夜更長
강호의 떠돌이 생활 어언 십 년 세월 / 流落江湖已十年
조정의 아는 이들 부러 동정하는 척 / 朝中親舊枉相怜
구괘 삼진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으니 / 明明九卦三陳處
다시 무슨 마음으로 하늘을 원망하랴 / 更有何心敢怨天
선인께서는 말 한마디로 분란을 해소시켜 / 先子談鋒立解紛
한 시대의 호걸들이 은근한 정을 바쳤는데 / 一時豪傑致慇懃
나는 지금 입만 열면 비방을 초래하곤 하니 / 我今開口翻招謗
이것이 명인가 시운인가 참으로 부끄럽도다 / 命也時耶愧十分
[주C-001]정종지(鄭宗之)가 …… 대작(代作)하다 : 종지는 정도전(鄭道傳)의 자(字)인데, 목은이 그의 심경을 대변해서 지은 것이다.
[주D-001]구괘 삼진(九卦三陳) :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7장에, 아홉 개의 괘를 나열하고 각각 이에 대해서 간단한 해설을 붙인 내용이 나오는데, 그중에 어렵고 힘든 처지를 상징하는 곤괘(困卦)와 관련하여 “곤괘를 보고서 원망하는 마음을 줄여야 한다.[困以寡怨]”고 덧붙인 내용이 보인다. 송(宋)나라 진단(陳摶)이 이 제7장의 내용을 기초로 해서 괘의 이름과 체(體)와 용(用)을 해석하여 이른바 ‘삼진 구괘’의 ‘용도(龍圖)’를 발표하였는데, 송유(宋儒)들이 대체로 이 설을 채용하였다.
-목은시고 제31권
압구정부(狎鷗亭賦)
이 관람의 광대함을 좋아한 이가 있음이여 / 客有好玆觀覽之博大兮
끝없이 넓은 나의 소원을 품었도다 / 齎予志之瀁瀁
어찌 답답하게 내 이 한구석에 있으리요 / 夫豈鬱鬱予一隅兮
혼돈 상태와 광활한 공간을 뛰어넘어 / 超澒洞與空廣
사방 끝을 다하여라 어찌 끝이 있으랴 / 窮四際兮焉極
고금을 열력하며 함께 오르내리도다 / 閱古今而俯仰
갑자기 하토의 적소를 내려다봄이여 / 忽臨睨夫下土之積蘇兮
그 누가 나의 호탕함을 알겠는가 / 孰知予之浩蕩
한고에서 나의 수레를 멈추고 / 弭予節兮漢皐
압구정에 올라 이리저리 바라보니 / 登狎鷗兮騁目
건곤의 혼돈 상태를 열었음이여 / 開乾坤之混沌
우주의 광대함이 확 트이었도다 / 廓宇宙之盤辟
인간 세계로부터 운우 위에 치솟아 / 軼雲雨於下界
항해를 취하여 하늘에 다다르도다 / 挹沆瀣而上薄
줄줄이 서 있는 사방 산들을 마주하고 / 面四山之立立兮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도다 / 俯江流兮湯湯
아스라이 만 리가 요원 광활함이여 / 渺萬里兮泱莽
광활함 속에 삼라만상을 포함했도다 / 涵衆象於淼茫
동으로 바라보면 산악들이 지극히 높아 / 東望則列岳峻極
위로 하늘 높이 치솟았고 / 上磨寥廓
겹겹의 등성이와 봉우리들은 / 重岡複嶺
용이 날고 범이 뛰는 듯하네 / 龍跳虎躍
금대는 지극히 높고 / 金臺兮嶔岑
화개는 우뚝하도다 / 華蓋兮崒嵂
여섯 자라는 힘을 크게 써서 / 六鼇奰屭
봉래 영주를 머리에 이었도다 / 頭戴蓬瀛
하늘의 별들은 빛을 나눠주고 / 天星分曜
지축은 신령함을 나타내도다 / 地軸效靈
낙천정은 드높아 용마루가 화려하고 / 樂天崇兮畫棟
화양정은 우뚝해라 높다란 정자로다 / 華陽屹兮危亭
월악산은 첩첩으로 깊숙하여 / 月岳嶙峋
한강의 발원지가 되었으니 / 有江發源
여강으로 들어서 질펀히 흐르다가 / 納驪水兮汪汪
용진을 삼키어 더욱 광대해지도다 / 呑龍津兮沄沄
광나루를 구불구불 돌아서 / 逶迤廣津
삼전도를 질펀히 흐르다가 / 演漾三渡
세차게 흘러 백 번 꺾여져서 / 奔流百折
더욱 제멋대로 쏟아져 흐르도다 / 益肆以注
저자도는 희미하게 눈에 들오고 / 島楮子兮熹微
새매들의 늪은 빙 둘러 있도다 / 藪鷂兒兮回互
큰 들은 손바닥처럼 편평하고 / 鉅野掌平
살곶이 교외의 주위에는 / 箭郊周遭
말 목장이 빙 둘러 있는데 / 沙苑盤回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여 / 水草肥饒
검고 누런 준마의 떼가 / 驪黃騄駬
아침놀의 무늬를 이루어 / 雲錦成章
바람을 따르고 번개를 쫓는 듯 / 追風逐電
매우 날래서 날아오를 듯하도다 / 天驕騰驤
고기 잡고 나무하고 말 치는 곳이 / 畋漁樵牧
번다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고 / 紛紜布濩
짐꾼이며 실어나르는 수레는 / 擔負馱輦
앞뒤로 줄을 이어 달리도다 / 前鶩後續
남으로 바라보면 뭇 산들이 얽혀 있어 / 南望則群山糾紛
푸르른 초목들이 무성하고 / 薈蔚葱蘢
태수가 수시로 왕래할 적엔 / 五馬盤桓
대궐을 향해 공손히 읍을 하네 / 拱挹朝宗
오른쪽으론 관악산 청계산이 험준하고 / 右冠岳淸溪之崚嶒
왼쪽으론 대모산성이 불룩 솟아 있어 / 左大母山城之穹窿
도성의 경내로부터 / 曰自畿甸
사방의 요충으로 나누어졌고 / 區分四衝
관산과 하수가 아득하여라 / 關河綿邈
큰길은 숫돌처럼 평탄하도다 / 周道如砥
지방 고을들은 별처럼 나열하여 / 列郡星羅
경계를 나누어 각각 다스리고 / 界畫疆理
역관은 바둑알처럼 펼쳐 있어 / 驛館碁布
사마의 수레가 나란히 다니고 / 轍駟方軌
여염집은 사방에 가득하여 / 閭閻撲地
비늘처럼 빗살처럼 늘어서 있도다 / 鱗次櫛比
누런 벼논과 푸른 밭둑은 / 黃畦綠塍
시야 가득 구불구불 펼쳐 있고 / 彌望逶迤
심고 매고 거두고 방아 찧어 / 耕耘穫舂
농사일을 서로 다투어 힘쓰고 / 競效農功
누에 치고 실 켜고 명주베 짜서 / 蠶繰紡織
아낙의 일을 다투어 다스리니 / 爭脩女紅
농토와 상전의 천 리 벌판에 / 農桑千里
집집마다 자급자족하도다 / 家給人豐
서쪽으로 바라보면 해문이 탁 트여서 / 西望則海門唅呀
가득한 물이 용솟음쳐 흘러서 / 瀰漫汨潏
작은 물결과 큰 파도가 / 鰌濤鯨浪
밀물 썰물을 삼키고 뱉고 하도다 / 呑吐潮汐
한강은 웅장한 관문이 되어 / 漢江雄關
산천의 요해를 누르고 있는데 / 控扼襟帶
선박들이 줄을 이어 왕래하매 / 舸艦牽聯
돛 그림자가 하늘을 가리도다 / 檣帆掩靄
깎아지른 절벽들은 험준하고 / 絶壁巃嵷
높은 누각들은 우뚝 솟아서 / 傑閣岧嶢
아래로는 물가를 굽어 임하고 / 下臨芳渚
위로는 높은 하늘을 찌르도다 / 上揷層霄
고관 대작 공경 사대부 중에 / 縉紳卿士
장수나 지방관에 임명되어 / 杖鉞分符
혹 전송을 하거나 영접할 때면 / 或餞或迓
높은 수레들이 길에 그득하고 / 冠蓋塞途
수시로 왕래하는 장사꾼들은 / 來商往旅
서로 따라 앞서고 뒤서고 하여 / 攀援後先
분잡하게 서로 줄을 이어서 / 紛紜絲絡
시끄럽게 떠들며 늘어섰도다 / 喧鬧騈闐
초목이 무성한 성단에 접근함이여 / 近星壇之蓊鬱
아득한 데에 노량과도 연접하도다 / 控露梁於澶漫
율도엔 연기가 활짝 걷히고 / 栗島兮煙開
마포엔 물결이 차가운데 / 麻浦兮波寒
용산의 조운선들이 빽빽이 이어지고 / 龍山之漕舶織織
양화도의 바람 돛이 펄펄 나부끼거든 / 楊渡之風帆飛飛
가을 흥취의 호기를 들이마시고 / 吸秋興之灝氣
맑게 내리는 단비를 맞기도 하도다 / 來喜雨之淸霏
북으로 바라보면 도봉산은 험준하고 / 北望則道峯峭截
삼각산은 높고도 뾰족하며 / 三山巑岏
화산은 연꽃이 핀 것 같고 / 華岳蓮開
종남산은 용이 서린 듯하니 / 終南龍蟠
귀신이 아끼고 비장한 곳으로 / 神慳鬼祕
천지가 전환하여 일신되었도다 / 乾轉坤旋
금성 탕지로 험고함 이루니 / 金城設險
대궐 광채가 하늘에 빛나도다 / 玉闕麗天
상서로운 해는 빛을 거듭하고 / 瑞日兮重光
상서로운 구름은 오색이 찬란하도다 / 祥雲兮五色
왕도는 하 넓고 넓음이여 / 王道兮蕩蕩
사문은 지극히 화목하도다 / 四門兮穆穆
장수와 재상 공경들은 / 將相公卿
고요 기 위청 곽거병과 같고 / 皐夔衛霍
문인이며 재사들은 / 文人才士
반고 사마천 유향 순숙과 같아 / 班馬劉荀
뛰어난 영재가 줄을 이어서 / 翹英接武
날개에 붙고 비늘을 부여잡도다 / 附翼攀鱗
천문 만호는 / 千門萬戶
개밋둑 벌집처럼 널려 있어 / 綴蟻點蜂
구준과 춘대를 누리면서 / 衢樽春臺
격양가 부르며 화락하도다 / 擊壤熙雍
공장과 장사꾼 놀이꾼들은 / 工商遊冶
어지러이 서로 달려 왕래하니 / 紛紛駾駾
거수와 마룡은 / 車水馬龍
웅성웅성 많이도 다니어라 / 彭彭藹藹
사방이 모여드는 도회가 되어서 / 爲四方之都會
팔방의 창이 탁 트여 밖이 없으니 / 洞八窓兮無外
이는 바로 시야를 넓혀서 사방을 두루 보아 / 此所以豁雙眸騁四望
높은 데서 조망하여 스스로 유쾌해짐이로다 / 登眺自快者也
봄 경치가 화창함에 이르러서는 / 至如韶光駘蕩
만물을 발육시키는 가운데 / 萬物發毓
바람은 순주처럼 훈훈하고 / 風醇如酒
햇볕은 옥같이 온화한지라 / 日溫如玉
꽃나무는 서로 고운 꽃을 피워 / 花木喧姸
청홍의 채색들이 찬란하고 / 紅碧酣縟
맑은 강물은 새로 벌창하여 / 澄江新漲
포도처럼 푸르게 물들어서 / 葡萄染綠
움킬 만도 하고 마실 만도 하며 / 可掬可啜
거울처럼 맑고 환해지나니 / 宜鑑宜燭
이때엔 난간에 기대 배회하면서 / 當此時憑闌徙倚
술잔을 들어 정서를 즐긴다면 / 擧酒敍暢
난정의 풍류에다 / 有蘭亭風流
무우의 기상을 겸하게 되리로다 / 舞雩氣像者矣
남풍이 재물 풍부케 함에 미쳐서는 / 及其南薰阜財
만물을 기르는 여름날이라 / 恢台長嬴
보릿가을은 언뜻 지나가고 / 麥秋奄逝
초여름 장마가 쾌히 걷히고 / 梅霖快晴
뜨거운 더위가 발산하는지라 / 火傘旣張
무서운 태양이 한창 성하여 / 畏日方赫
산을 태우고 들을 태우며 / 焦山燎原
무쇠와 옥이 녹아 흐르고 / 金流玉鑠
소낙비는 강물을 쏟듯 내려서 / 急雨懸河
급한 여울에 눈발이 튀어오르고 / 驚湍湧雪
어룡들은 까불며 춤을 추고 / 魚龍簸舞
오리들은 물속을 출몰하나니 / 鳧鴨出沒
이때엔 옷깃을 풀고 두건을 벗고 / 當此時披襟露頂
읊조리고 술마시고 한다면 / 俯仰詠觴
무더위를 씻고 청량함을 취할 수 있으리로다 / 可以滌煩暑而賭淸涼者矣
하늘 높고 기후 맑은 때에 미쳐서는 / 迨至天高氣晶
바람은 나무 끝에 불어대고 / 風號樹杪
은하수는 영롱히 반짝거리고 / 明河耿熒
깨끗한 달은 하얗게 빛나며 / 皓月皦皎
난초 꽃의 향기는 농후하고 / 蘭香馥郁
국화의 향기는 그윽한 가운데 / 菊馨窈窕
구름 걸친 산은 푸르디푸르고 / 雲山蒼蒼
가을 기럭은 아득히 날아가며 / 霜鴻渺渺
도랑물은 마르고 못물은 맑아 / 潦盡潭淸
하늘과 물이 한 빛을 이룰 제 / 天水一色
티끌 하나 없는 옥호의 맑은 / 玉壺無塵
그림자는 구슬이 잠긴 듯하나니 / 淨影沈璧
이때엔 기둥 기대어 먼 데를 바라보면서 / 當此時倚柱遐矚
광막한 속에 정신으로 노닌다면 / 神遊沖漠
또 하필 등림 부하여 요락을 슬퍼할 것 있으랴 / 又何必賦登臨而悲搖落者乎
그리고 짙은 구름이 어두컴컴하고 / 若乃凝雲潑墨
매서운 바람에 솜이 부러지며 / 嚴風綿折
눈은 내려 우뚝하게 쌓이고 / 積雪嵯峨
얼음은 겹겹으로 꽁꽁 얼며 / 層氷沍結
참새들은 서로 짹짹거리고 / 冷雀査査
까마귀는 두려워 두리번거리며 / 寒鴉矍矍
얼음은 틈새 없이 꽁꽁 얼어 / 凍合無縫
배가 묶여 건너지 못하는지라 / 舟膠不涉
장사꾼들은 오가지도 못한 채 / 商旅踟躕
검은 살결에 소름이 일어나고 / 肌黧膚粟
어부들은 머뭇거리는 가운데 / 漁子逡巡
손이 트고 머리털이 솟구치거든 / 龜手蝟髮
이때엔 영서로 추위를 물리치고 / 當此時靈犀辟寒
술 마시고 갖옷을 껴입나니 / 醉擁貂貉
또한 어찌 나귀 타고 추위를 참거나 / 亦何數夫騎驢忍凍
드러눕고 맨발 벗은 걸 셀 것 있으랴 / 僵臥跣足者乎
이상은 바로 사시가 순환하는 가운데 / 此所以四時循環
즐거이 시절과 함께 자적하는 것이로다 / 樂與時適者也
곁에서 누가 힐난하길 물은 용 때문에 신령하고 / 傍有詰者曰水靈以龍
산은 신선 때문에 신령해지나니 / 山靈以仙
아무리 뛰어난 경계가 있더라도 / 有地雖勝
사람 없이는 전해지지 않고말고 / 非人不傳
그러기에 무창의 남루는 / 武昌南樓
원규를 인하여 드러났고 / 以元規而著顯
양양의 현수는 / 襄陽峴首
숙자를 인하여 알려졌거늘 / 以叔子而昭宣
지금 그대는 주인의 덕업을 근본하지 않고 / 今子不本主人之德之業
정자 이름의 소이연도 추구하지 않았으니 / 不究之亭之名之所以然
주렴 모퉁이의 한 굽이만을 보고 / 得非覩簾隅之一曲
당실의 완전한 모양은 빼놓은 격이 아닌가 / 而遺堂室大全者乎
아 그 연원을 상고하건대 / 粤惟□源
성악이 신령함을 잉태하여 / 星岳孕靈
명문의 선인 음덕을 입어 / 名門食德
대대로 영재가 태어나서 / 世有俊英
고관 대작이 대대로 이어져 / 蟬貂聯奕
종정에 공훈이 새겨졌도다 / 鼎刻鐘銘
그중에 당당한 상당군은 / 堂堂上黨
창성한 시기에 태어나서 / 生膺昌期
잠저 시절의 광묘로부터 / 光廟龍潛
한번 만나서 알아줌을 받았으니 / 一見受知
풍운의 기이한 만남이요 / 風雲奇遇
어수가 서로 만난 것이로다 / 魚水相得
손으로 붉은 태양 붙들어서 / 手扶紅日
구오의 용이 날아오르니 / 龍飛九五
천지가 조용하고 편안해지매 / 乾淸坤寧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도다 / 萬物咸覩
공은 이때에 / 公於是時
유악 안에 조용히 들앉아서 / 從容帷幄
소조의 논의를 하고 / 蕭曹論議
양평의 계책을 내니 / 良平籌策
태산과 황하로 맹세하여 / 泰山黃河
운대와 기린각에 초상 걸렸네 / 雲臺麟閣
나가면 장수요 들오면 재상으로 / 出將入相
문모와 무략을 겸비했으니 / 文謨武略
재차 조정의 우두머리 되어선 / 再長巖廊
임금을 보좌하여 다스렸고 / 燮理黼黻
누차 부월 잡고 지방에 나가선 / 屢杖鐵鉞
온 강역을 진정시켰으니 / 鎭定疆域
공은 그와 같이 클 수 없고 / 功莫與京
덕은 그와 같이 높을 수 없도다 / 德莫與崇
지위가 높을수록 맘은 되레 작아지고 / 位尊而心轉小
은총이 높을수록 몸은 더욱 공손하여 / 寵極而身愈恭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갖고 / 恒存挹損
늘 만족함을 알려고 경계해 / 每戒知足
묘당에 있으면서도 강호를 생각하고 / 處廟堂而思江湖
고량진미가 넘쳐도 담박함을 즐기도다 / 飫膏粱而嗜淡薄
정자를 여기에 얽어 세우니 / 有亭斯構
넓고도 한적하고 적막하여라 / 寬閑寂寞
위로는 녹야당을 뒤따르고 / 上追綠野
아래로는 독락원을 벗삼아서 / 下友獨樂
이에 아침엔 대궐로 달려가고 / 於是朝趨丹鳳
저녁엔 백구와 가까이하니 / 莫狎白鷗
깊은 맹약 맺어서 저버릴 수 없음이여 / 托深盟兮不可寒
기심을 잊고 서로 평화로이 지내도다 / 庶息機而相夷猶也
푸르고 깨끗한 물결 먹을 수는 없지만 / 波綠潔而不可飱兮
백설 같은 깃털을 깨끗이 씻어주도다 / 白雪羽毛之無塵也
때로 왕래하며 서로 가까이하거니 / 時往來而相近兮
누가 아득하여 길들이기 어렵다 했는고 / 孰曰浩蕩而難馴也
아 퇴청하여 먹으며 종용 자득하여라 / 羌退食而逶蛇兮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자유자재하도다 / 聊逍遙以自由也
거북 물고기를 모아서 주인이 됨이여 / 會龜魚而作主兮
나날이 구렁을 찾고 언덕을 지나도다 / 日尋壑而經丘也
내 자취 이미 쓸모없는 재목 같음이여 / 跡已同於散木兮
마음 또한 이 때문에 빈 배가 되었으니 / 心亦以之虛舟也
이것이 어찌 세속 밖에 멀리 초월해서 / 此豈非超乎流俗之表
즐거이 조물주와 함께 노는 이가 아니겠는가 / 而樂與造物而同遊者乎
나아가서는 큰 띠 띠고 홀을 꽂고 / 進則垂紳正笏
왕궁을 보호하고 왕의 직무 보충하고 / 保王躬而補袞職
물러와서는 야인 복장의 차림으로 / 退則黃冠野服
물고기와 짝하고 사슴을 벗삼도다 / 侶魚蝦而友麋鹿
사직하고픈 생각은 비록 간절하나 / 掛冠之念雖切
만백성의 기대가 더욱 중해지고 / 而萬姓之望愈重
물러나 쉬려는 뜻 또한 급급했지만 / 退休之志亦勤
임금의 은총은 더욱 깊어만 갔으니 / 而一人之眷益寵
그래서 은하수 빛이 창벽에 도는 건 / 是以雲漢昭回於櫳壁者
하늘 문채가 초목에 입혀지는 것이요 / 天章之衣被草木也
규벽이 문지방 위에 찬란한 건 / 奎壁燦爛於楣宇者
신조로써 일월의 빛을 그려낸 것이라 / 宸藻之繪畫日月也
산천이 이 때문에 닫히고 열리고 / 山川以之闔闢
귀신이 이 때문에 멀어졌거니와 / 鬼神以之扃鐍
천조의 큰 솜씨로 화려하게 꾸미고 / 賁飾天朝之大手
한 시대의 큰 문장으로 단장했으니 / 粧點一代之鉅筆
이 때문에 명성이 천지간에 가득 차서 / 此所以聲名滿於天地
태산북두처럼 우러르게 된 것이로다 / 而仰若山斗者也
그러나 압구는 해옹의 한가한 일이거늘 / 然狎鷗者海翁之閑事
이로써 정자를 명명함은 무엇을 취한 건가 / 而獨揭此名亭何取耶
아 한 위공은 / 猗韓魏公
바로 송 나라 현상으로서 / 是宋賢相
원훈 공신에 현량한 보필 되어 / 元勳碩輔
높은 덕과 큰 아량이 있었는데 / 宿德偉量
그 실명을 압구정이라 했으니 / 名亭狎鷗
고상한 풍류를 넉넉히 보겠도다 / 足見雅尙
아 먼 조상의 아름다운 모범을 / 繄鼻祖之懿範
먼 후손이 본받아야 하고말고 / 宜耳孫之取則
전세의 한공과 후세의 한공은 / 前韓後韓
행적이 아주 서로 똑같아서 / 同符合轍
문덕 무략으로 천하를 다스려 / 文武經緯
천지의 조화 육성을 참찬하여 / 參贊化育
충성은 일월을 꿰뚫을 만하고 / 忠貫日月
공은 사직을 보존하였거니와 / 功存社稷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지고서 / 佩國家之安危
민심을 산악처럼 진정시켰으니 / 鎭民心如山岳
공과 충헌은 / 公與忠獻
둘이면서 하나인 셈이로다 / 二而爲一
급류를 탄 날에 한가함을 구하고 / 求閑於急流之日
한창 강건할 때에 숨어 지내면서 / 佚處於强健之時
산수 속의 한가로운 낙을 다하고 / 盡山水優游之樂
물아간의 시기하는 사심을 없애서 / 無物我忌克之私
시종 한 가지 절조를 굳게 지키어 / 終始堅乎一節
진퇴 거취가 시의에 합당하였으니 / 進退合於時宜
공과 충헌 두 사람 가운데 / 公與忠獻
누가 더 낫고 못하다 할꼬 / 孰仲孰伯
모두 나는 백구를 잊고 백구는 날 잊었으니 / 皆能我忘鷗而鷗忘我
이 때문에 서로 친해질 수 있었던 걸세 / 是以能相熟而相狎也
나는 객과 함께 농서의 보리를 다 거두고 / 吾將與客窮隴西之麥
강남의 나락을 다 수확해서 / 殫江南之稻
감주를 만들고 술도 만들고 / 爲醴爲酒
동해의 물결에 소금을 치고 / 鹽東海之波
오창의 곡식을 곱게 빻아서 / 屑敖倉之粟
면을 만들고 건량도 만들어 / 爲麵爲糗
천지를 흘겨보아 여관으로 삼고 / 睥睨天地而籧廬
일월을 여닫아서 창문으로 삼고 / 開闔日月爲戶牖
남기를 부여잡고 올라가 / 攀南箕
북두로 술을 떠 마시고 / 酌北斗
공을 따라 이 정자에 노닐면서 / 邁從公于斯亭
공의 백세 향수를 축복드리리 / 祝眉壽而黃耈
그리고는 다시 백구와의 맹약을 찾아 / 然後更與白鷗而尋盟
세한 불변의 굳은 우정을 맺고 / 結歲寒之耐友
푸른 절벽 위에 황견을 새겨서 / 鐫黃絹於蒼崖
만고에 전하도록 하겠다 하누나 / 傳萬古而不朽
이 말에 객은 깜짝 놀라 얼굴 고치고 / 客矍然改容
빗자루 휘두르듯 붓을 휘둘러 / 落筆揮帚
무지개를 뱉어내어 부를 써내리니 / 吐虹霓而作賦
어슴푸레 손에서 벼락을 치는 듯하구나 / 恍若霹靂之在手也
[주D-001]적소(積蘇) : 쌓아 놓은 땔나무를 말한다. 주 목왕(周穆王)이 일찍이 도사(道士)를 따라 천상(天上)에서 노닐 적에 인간세계(人間世界)를 내려다보니, 그 궁사(宮榭)들이 마치 포개 놓은 흙덩이나 쌓아 놓은 땔나무〔累塊積蘇〕처럼 보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周穆王》
[주D-002]한고(漢皐) : 주(周) 나라 때 정교보(鄭交甫)란 사람이 한고대(漢皐臺) 아래서 두 여인(女人)을 만나 구슬 두 개를 얻었다는 고사가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한강(漢江) 가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주D-003]항해(沆瀣) : 선인(仙人)이 마신다는 밤중의 기〔夜半氣〕를 말하는데, 《초사》 원유(遠遊)에, “육기를 먹고 항해를 마심이여, 정양으로 양치질하고 아침 놀을 머금는다.〔飡六氣而飮沆瀣兮 漱正陽而含朝霞〕” 하였다.
[주D-004]금대(金臺) : 곤륜산(崑崙山)에 있다는, 신선(神仙)이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곧 압구정을 가리킨 것이다.
[주D-005]화개(華蓋) : 귀인(貴人)들의 수레 위에 받치는 일산(日傘)을 말한다.
[주D-006]여섯 …… 이었도다 : 발해(渤海)의 동쪽에는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신산(神山)이 있는데, 이 산들이 조수(潮水)에 표류(漂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천제(天帝)의 명에 따라 금색의 자라〔金鼇〕 15마리가 이 산들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湯問》
[주D-007]검고 …… 이루어 : 당 현종(唐玄宗) 때 감목사(監牧使) 왕모중(王毛仲)이 수만 필의 말을 잘 길러서 각 색깔별로 대열(隊列)을 나누어 놓으니, 바라보기에 마치 아침놀〔雲錦〕 빛과 같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08]천지가 전환하여 일신되었도다 : 새로운 임금이 등극(登極)하여 천하를 일신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9]상서로운 …… 거듭하고 : 일월(日月)같이 밝은 덕을 전왕(前王), 후왕(後王)이 계속해서 펴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書經)》 고명(顧命)에, “옛 임금이신 문왕, 무왕이 빛난 덕을 거듭 베푸시어 백성들이 의지할 바를 정해 주고 가르침을 펴셨다.〔昔君文王武王 宣重光 奠麗陳敎〕” 하였다.
[주D-010]왕도(王道)는 …… 넓음이여 : 《서경》 홍범(洪範)에, “비뚤어지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넓고 넓으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1]사문(四門)은 지극히 화목하도다 : 《서경》 순전(舜典)에, “사방의 문으로 손님을 맞이하게 하시니, 사방의 문이 화목하였다.〔賓于四門 四門穆穆〕”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2]고요(皐陶) …… 곽거병(霍去病) : 고요와 기(夔)는 순(舜) 임금의 두 현신(賢臣) 이름이고, 위청(衛靑)과 곽거병은 모두 한대(漢代)의 명장(名將) 이름이다.
[주D-013]반고(班固) …… 순숙(荀淑) : 반고는 《한서(漢書)》의 저자이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의 저자이며, 유향(劉向)은 전한(前漢) 때의 학자(學者)이고, 순숙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이다.
[주D-014]날개에 …… 부여잡도다 : 봉황(鳳凰)의 날개에 붙고 용(龍)의 비늘을 부여잡는다는 뜻으로, 전하여 영주(英主)를 섬겨서 공명(功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주D-015]구준(衢樽)과 춘대(春臺)를 누리면서 : 구준은 큰 길거리에 설치한 술동이를 말한 것으로, 《회남자(淮南子)》 무칭훈(繆稱訓)에, “성인의 도는 마치 큰 길거리 한가운데에 술동이를 두어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각 적당하게 떠 마시도록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致樽邪 過者斟酌 多小不同 各得所宜〕”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임금이 인정(仁政)을 베푸는 데에 비유한 것이고, 춘대는 《노자(老子)》 제 12 장에, “세속의 중인들은 화락하여 마치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다스운 봄날 높은 누대에 올라서 사방을 조망한 듯 즐거워한다.〔衆人熙 如享太牢 如登春臺〕” 한 데서 온 말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주D-016]격양가(擊壤歌) : 요(堯) 임금 때에 한 노인(老人)이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흙덩이를 치면서〔擊壤〕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서 쉬도다.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 갈아서 밥을 먹거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何有於我哉〕” 했다는 데서 온 말로, 역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주D-017]거수(車水)와 마룡(馬龍) : 이것은 “수레는 흐르는 물과 같고, 말은 헤엄치는 용과 같다.〔車如流水 馬如游龍〕”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거마(車馬)의 왕래가 빈번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後漢書 卷10上 皇后紀 明德馬皇后紀》
[주D-018]무우(舞雩)의 기상(氣像) : 공자(孔子)가 일찍이 자로(子路),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등의 제자에게 각각 자기의 포부를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이 말하기를, “저문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5, 6인, 동자 6, 7인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주D-019]남풍(南風)이 …… 함 : 옛날에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 시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염을 풀어줄 만하도다.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리로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0]무서운 태양 :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7년 조에, “조최는 겨울날의 태양이고, 조돈은 여름날의 태양이다.〔趙衰冬日之日也 趙盾夏日之日也〕” 하였는데, 그 주석에, “겨울날의 태양은 사랑스럽고, 여름날의 태양은 무서운 것이다.〔冬日可愛 夏日可畏〕”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1]티끌 …… 듯하나니 : 옥호(玉壺)는 밝은 달을 비유한 말이고, 구슬이 잠긴 듯하다는 것은 곧 밝은 달 그림자가 물속에 잠긴 것을 형용한 말이다.
[주D-022]등림(登臨) …… 있으랴 : 요락(搖落)은 초목의 잎이 흔들려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슬프다, 가을의 기후됨이여. 쓸쓸하여라, 초목은 낙엽이 져서 쇠하였도다. 구슬퍼라, 흡사 타향에 있는 듯하도다. 산에 올라 물을 굽어봄이여, 돌아갈 사람을 보내도다.〔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 憭慄兮 若在遠行 登山臨水兮 送將歸〕”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3]영서(靈犀)로 추위를 물리치고 : 영서는 곧 한기(寒氣)를 물리칠 수 있는 서각(犀角)을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 초기에 교지국(交趾國)에서 황금빛의 서각 하나를 바쳐 왔는데, 그 사자(使者)의 청(請)에 따라 이것을 금반(金盤)에 담아 전중(殿中)에 놓아두자, 다스운 기운이 발산하므로, 상(上)이 그 까닭을 물으니, 사자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추위를 물리치는 서각입니다.〔此辟寒犀也〕”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24]나귀 …… 참거나 : 나귀를 탄다는 것은,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 시에서 당(唐)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눈 속에 나귀 타고 시 읊던 모습을 일러 “그대는 못 보았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 읊느라 뫼산 자 어깨 으쓱인 것을.〔君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 한 데서 온 말이고, 추위를 참는다는 것은, 소식의 사인견화(謝人見和) 시에, “서생의 사업은 참으로 가소로워라, 추위 참고 외로이 읊자니 붓끝이 안 나가네.〔書生事業眞堪笑 忍凍孤吟筆退尖〕”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5]드러눕고 …… 걸 : 드러누웠는다는 것은, 후한(後漢)의 명상(名相) 원안(袁安)이 일찍이 미천했을 때, 한번은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려서 낙양 영(洛陽令)이 친히 민가(民家)를 순행하다 보니, 원안의 집만 유독 눈도 치우지 않은 채 방 안에 가만히 드러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던 데서 온 말이고, 맨발을 벗었다는 것은,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고사(高士) 초선(焦先)이 풀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고, 두건도 쓰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結草以爲裳 科頭跣足〕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26]물은 …… 신령해지나니 :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에, “산은 높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선이 있으면 이름이 나고, 물은 깊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용이 있으면 신령해진다.〔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7]무창(武昌)의 …… 드러났고 : 원규(元規)는 진(晉) 나라 재상 유량(庾亮)의 자이다. 유량이 일찍이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무창에 있을 때, 장강(長江) 가에 누각(樓閣)을 세웠던바 이를 남루(南樓)라 하는데, 어느 가을날 밤 천기(天氣)가 아주 쾌청할 적에 유량이 이 남루에 올라가서 그의 좌리(佐吏)인 은호(殷浩), 왕호지(王胡之) 등과 함께 시를 읊조리며 고상한 풍류(風流)를 만끽했던 일로 인하여 이 남루가 세상에 널리 드러나게 되었던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28]양양(襄陽)의 …… 알려졌거늘 : 현수(峴首)는 현산(峴山)의 다른 이름이고, 숙자(叔子)는 진(晉) 나라 명장(名將) 양호(羊祜)의 자이다. 양호가 일찍이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관계로 그 지방 백성들이 양호의 덕을 사모하여 현산에 비(碑)를 세워서 그를 기렸는데, 이 비를 바라보는 이는 모두 눈물을 떨구었다 하여 두예(杜預)가 이를 타루비(墮淚碑)라 이름하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29]성악(星岳)이 신령함을 잉태하여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신백과 여후는 산악에서 내려왔고, 부열은 죽은 뒤에 별이 되었다.〔申呂自嶽降 傅說爲列星〕” 하였는데, 부열은 은 고종(殷高宗)의 현상(賢相)으로 일찍이 은(殷) 나라를 중흥시키고 죽어서 별이 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고, 신백(申伯)과 여후(呂侯)는 산신령이 내려와서 탄생했다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두 현상으로,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디높은 산악이, 우뚝 하늘에 닿았도다. 이 산에서 신령을 내려, 보후와 신백을 내셨도다. 보후와 신백 두 사람은, 주 나라의 기둥이라, 사국의 번병이 되어, 사국에 덕을 베풀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 維申及甫 維周之翰 四國于蕃 四國于宣〕” 한 데서 온 말이다. 여후는 보후와 같다.
[주D-030]상당군(上黨君) : 조선 세조(世祖)의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진 한명회(韓明澮)를 가리킨다.
[주D-031]잠저(潛邸) 시절의 광묘(光廟) : 광묘는 능호(陵號)가 광릉(光陵)인 세조(世祖)를 가리킨 것으로, 세조가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을 말한다.
[주D-032]풍운(風雲)의 기이한 만남이요 : 용호(龍虎)가 풍운을 만나서 득세(得勢)하듯이,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 것을 의미한다.
[주D-033]어수(魚水)가 …… 것이로다 : 이 또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난 것을 의미한 말로, 촉한(蜀漢)의 선주(先主)가 이르기를,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마치 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4]손으로 …… 날아오르니 : 붉은 태양은 임금을 상징한 말이고, 구오(九五)의 용(龍)이 날아오른다는 것은,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구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이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한 데서 온 말로, 왕위(王位)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주D-035]만물이 모두 우러러보도다 : 《주역》 건괘 문언(文言)에,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르는지라, 성인이 일어나매 만물이 우러러보도다.〔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6]소조(蕭曹)의 …… 내니 : 소조는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합칭한 말이고, 양평(良平)은 한 고조의 모신(謀臣)인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을 합칭한 말이다.
[주D-037]태산(泰山)과 황하(黃河)로 맹세하여 : 한 고조의 공신에 대한 봉작(封爵)의 서사(誓辭)에,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도록 나라가 영원히 편안한 그날까지 복록이 후손에게 미치리라.〔使河如帶 泰山如厲 國以永寧 爰及苗裔〕” 한 데서 온 말로, 공신에 책록(冊錄)된 것을 의미한다.
[주D-038]운대(雲臺)와 …… 걸렸네 : 운대는 후한(後漢) 때에 공신의 초상(肖像)을 걸었던 곳이고, 기린각(麒麟閣)은 전한(前漢) 때에 공신의 초상을 걸었던 곳으로, 이 역시 공신에 책록된 것을 의미한다.
[주D-039]녹야당(綠野堂) :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 배도(裴度)가 조정에서 은퇴하여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세운 별장 이름이다.
[주D-040]독락원(獨樂園) : 송(宋) 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재상(宰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세운 원명(園名)이다.
[주D-041]누가 …… 했는고 : 두보(杜甫)의 증위좌승(贈韋左丞) 시에, “백구가 아득한 물결 속에 숨거든, 만 리 밖의 백구를 누가 능히 길들일꼬.〔白鷗沒浩蕩 萬里誰能馴〕”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2]아 …… 자득하여라 : 《시경》 소남(召南) 고양(羔羊)에, “크고 작은 양의 가죽이여, 흰 실로 다섯 줄을 꿰맸도다. 퇴청하여 집에서 먹으니, 종용하고 자득하도다.〔羔羊之皮 素絲五紽 退食自公 委蛇委蛇〕”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남국(南國) 사람들이 문왕(文王)의 정사(政事)에 교화되어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모두 검소하고 정직하므로, 한 시인(詩人)이 그것을 찬미하여 부른 노래이다.
[주D-043]나날이 …… 지나도다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이미 깊숙하게 들어가 구렁을 찾고, 또한 험한 길을 따라 언덕을 지나도다.〔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4]마음 …… 되었으니 : 《장자》 산목(山木)에, “배를 나란히 하여 하수를 건널 때에 다른 빈 배가 와서 나의 배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아무리 속 좁은 사람일지라도 성을 내지 않는다.〔方舟而濟於河 有虛船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 한 데서 온 말로, 빈 배란 곧 물욕(物欲)이 전혀 없어서 마음이 아주 넓고 평온한 것을 의미한다.
[주D-045]은하수 …… 것이요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서쪽으로 함지에 노닐고 부상에 다다르니, 초목에까지 은하수 밝은 빛을 입히었도다.〔西游咸池略扶桑 草木衣被昭回光〕” 한 데서 온 말로, 이 묘비의 본뜻은 한유(韓愈)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초목에까지 문(文)과 도(道)의 은택을 입혔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압구정(狎鷗亭)의 주인 한명회(韓明澮) 또한 한씨(韓氏)이기 때문에 특별히 한유에 관한 글을 끌어댄 것이다.
[주D-046]규벽(奎壁)이 …… 것이라 : 규와 벽 두 별은 문운(文運)을 주관한다는 데서, 전하여 문원(文苑), 또는 문장(文章)을 의미하고, 신조(宸藻)는 제왕(帝王)의 시문(詩文)을 가리키며, 일월의 빛을 그린다는 것은 한유(韓愈)의 진찬평회서비문표(進撰平淮西碑文表)에, “천지의 얼굴과 일월의 빛은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두꺼운 낯으로 뻔뻔스레 글을 지어서 분부에 답하는 바입니다.〔乾坤之容 日月之光 知其不可繪畫 强顔爲之 以塞詔旨〕”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7]천조(天朝)의 …… 꾸미고 : 당시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압구정(狎鷗亭)의 기문(記文)을 지은 것을 비롯하여 중국의 수많은 문사(文士)들이 시(詩)를 지어서 압구정을 찬미(讚美)한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48]한 위공(韓魏公) : 북송(北宋) 시대 현상(賢相)으로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그의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그의 실명(室名) 또한 압구정(狎鷗亭)이었다.
[주D-049]급류(急流)를 …… 구하고 : 송(宋) 나라 때 한 도승(道僧)이 진단(陳摶)에게 전약수(錢若水)의 사람됨을 가지고 말하기를, “이는 급류 속에서 용감히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했었는데, 뒤에 과연 전약수가 벼슬이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도 채 안 된 나이로 용감하게 관직에서 물러났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관로(官路)가 한창 트인 때에 용감하게 은퇴하는 것을 말한다.
[주D-050]오창(敖倉) : 진(秦) 나라 때의 창고(倉庫) 이름이다.
[주D-051]남기(南箕)를 …… 마시고 : 남기는 남쪽에 있는 기성(箕星)을 말하는데, 이 별자리는 마치 키〔箕〕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북두성(北斗星) 자리 또한 말〔斗〕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므로, 술을 뜬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주D-052]황견(黃絹) :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이 조아비문(曹娥碑文)을 보고는 그 비석(碑石) 배면(背面)에다 은어(隱語)로 ‘황견유부외손자구(黃絹幼婦外孫齍臼)’ 여덟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뒤에 양수(楊脩)가 이것을 해석하기를, “황견은 색사(色絲)이니 글자로는 절(絶) 자가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니 글자로는 묘(妙) 자가 되고, 외손은 여자(女子)이니 글자로는 호(好) 자가 되고, 자구는 매운 맛을 받는 것이니 글자로는 사(辭) 자가 되므로,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라 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뛰어난 문장(文章)을 의미한다.
[주D-053]무지개를 뱉어내어 : 시문(詩文) 짓는 재주가 풍부함을 이른 말이다.
[주D-054]손에서 …… 듯하구나 : 재사(才思)나 문장(文章)이 매우 민첩하고 유창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사가집(四佳集) 제1권 부류(賦類)
삼각산 문수사(三角山文殊寺)
이장용(李藏用)
성남 10리엔 희디 흰 모래벌판 / 城南十里平沙白
성북엔 두어 떨기 푸른 봉이 겹겹인데 / 城北數朶重岑碧
늙은 태수 게을러 일찍 공무 끝내고 / 老守疏慵放早衙
훨훨 나다니며 좋은 경치 찾아 가네 / 出遊浩蕩尋幽跡
양주의 학을 탐은 그만두고 / 還他駕鶴楊州天
화산의 나귀 타는 명부에 한 사람 보태리 / 添却騎驢華山籍
관사를 마치려 하나 어리석어 무가내요 / 官事欲了無奈癡
구경에 철 잃을까 가석하기 때문일세 / 賞心易失尤堪惜
노랑 옷들 벽제함은 너무나 속된 일 / 黃裾唱引大俗生
푸른 눈과 함께 감이 더욱 높은 격이것다 / 碧眼相携有高格
비탈진 돌길을 한참 돌아가다가 / 試攀崎嶇石逕斜
인간 세상 벗어나니 고개 숲이 또 막히네 / 漸出像籠林嶺隔
깊은 골을 굽어보니 아득하기만 / 俯臨絶谷但蒼茫
가파른 봉에 올라보니 더욱 오들오들 / 上到危巓增跼蹐
갠 봉우린 해와 상거가 겨우 두어 길인 듯 / 晴峯距日纔數尋
구름 속 잔도는 허공에 몇천 자를 솟았는고 / 雲棧淩虛幾千尺
나는 새 가물가물 남천이 나직하고 / 鳥飛杳漠楚天低
넓은 벌판을 또렷이 한강이 쭉 그었네 / 野廣分明漢江畫
서쪽으로 바라보니 연기낀 듯 신선 물가 / 非煙西望卽仙洲
남으로 흘러 흘러 큰 물과 통해 / 大浸南連通水驛
한 번 올라와 홀로 탄식하니 / 一廻徙倚獨嗟咨
팔극을 금방 내휘두를 듯 / 八極須臾可揮斥
가파른 돌층계 울툭불툭 90단에 / 懸磴參差九十層
희미한 옛 자취는 나무신이 앞뒤굽 / 舊躅依稀上下屐
어허 이게 세상 아닌 청련궁일세 / 奇哉不世靑蓮宮
이르되 대지진인이 이룩한 절이라고 / 云是大智眞人宅
휑 뚫린 석굴 벽에 이끼가 아롱지고 / 石崛呀開苔蘚斑
번쩍이는 용 숲 속에 단청이 휘황하구나 / 林龍眩晃丹靑射
인자한 부처님 얼굴 복성 동쪽 그대로인 듯 / 睟容宛若福城東
가부좌로 높게 금사자를 타셨네 / 寶趺高馭金猊脊
편길장자 계시는 곳 마주 바라보나 / 相望遍吉長者居
법계 현관을 뉘라서 열 줄 알리 / 誰識法界玄關闢
대자비의 환한 얼굴이 속세 생각 덮어주고 / 大慈的的蠲煩襟
영천이 졸졸 흘러 더운 번뇌 가시는데 / 一掬涓涓貯靈液
유인이 천과 용의 꾸지람이 두려워서 / 遊人恐觸天龍嗔
북처럼 잔을 던져 주문 외고 물 마시네 / 卜領試呪杯梭擲
이내랑 안개 속에 흰 탑 홀로 우뚝 섰고 / 煙霞影裏孤㙮白
종 소리 은은한데 붉은 등 하나 켜 있네 / 鍾梵聲中一燈赤
수승한 법회는 보광에서 옮겨온 듯 / 依然勝會移普光
갖가지 묘한 공양은 향적에서 오는 듯 / 應有妙供來香積
들으니 선왕께서 어향을 사르셨다고 / 聞昔先王焚御香
지금도 중사(궁중의 내시)들이 종사의 복을 비네 / 至今中使祈宗祐
내가 오니 때마침 가을인데 / 我來適値雲揚秋
중의 만류로 머물러 저녁 산빛을 보게 되네 / 僧留歡賞山色夕
처마 끝의 산봉은 옥처럼 뾰죽뾰죽 / 倚簷列岫玉嵯峨
난간 앞의 숲에는 비단필을 두른 듯 / 當檻瑤林錦狼籍
산나물에 깨끗한 밥을 반가이 배불리 먹고 / 喜飡蔬食飫淸芳
포단을 빌어 앉아 곤한 몸을 쉬노라니 / 旋借蒲圑寄安適
이야기가 조용하자 하현 달이 문에 들고 / 語闌缺月入深扉
밤이 깊자 미풍이 잣나무를 스치는데 / 夜久微風吟聳栢
대견할손 선탑은 이리 고요하다마는 / 最憐禪榻靜寥寥
우스워라 인생은 어찌 저리 부산한고 / 忽笑人生何役役
쉽사리 벼슬 옷을 못 벗어버리는 몸 / 未能容易掛衣冠
혹시나 공명을 죽백에 드리울 건가 / 倘可功名垂竹帛
아이놈이 부르기에 번쩍 단잠을 깨니 / 淸眠恰被健稚呼
먼동이 벌써 터서 붉은 해가 솟았네 / 紅暈已動鴉輪赫
태애(台崖)에 손짓하며 부르는 이 좇으려다 / 擬追台崖招手人
여산(盧山)의 눈썹 찡그리는 손 됨이 부끄럽네 / 愧同廬嶽攢眉客
진세의 말로 청산을 더럽힌다 꺼려 마소 / 莫嫌塵語汚靑山
일찍이 단액에 입직 임금 말씀 받잡던 몸 / 曾演綸言直丹掖
[주D-001]양주(楊州)의 학(鶴)을 탐 : 여기서는 양주(楊州)의 수령으로 있기 때문에 인용하였다.
[주D-002]화산(華山)의 나귀 : 화산처사(華山處士) 진단(陳摶)이 일찍이 흰 나귀를 타고 변중(汴中)으로 들어가려다가 송 태조(宋太祖)가 등극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웃고 나귀에서 떨어지며 말하기를, “천하가 이제야 정(定)해졌군.” 하였다. 여기서는 삼각산(三角山)을 화산이라 한 것이다.
[주D-003]노랑 옷 : 수령(守令)이 행차할 때 앞을 인도하며 갈도(喝道)하는 졸노(卒奴)배.
[주D-004]푸른 눈 : 고승(高僧)은 벽안(碧眼)이 많다 한다.
[주D-005]희미한 …… 앞뒤굽 : 진(晉) 나라 사령운(謝靈運)이 등산(登山)을 좋아하였다. 등산할 때에 나무신[屐]을 신고 산에 올라갈 때에는 나무신의 앞 니를 떼고, 내려올 때에는 뒷굽을 떼었다.
[주D-006]인자한 …… 동쪽 : 《화엄경(華嚴經)》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선지식(善知識 불법을 잘 아는 이)을 찾아 두루 다니다가 복성 동쪽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났다.
[주D-007]법계 현관(玄關) : 현묘(玄妙)한 도(道)와 관문. 《보등록(寶燈錄)》에, “현관을 크게 열고 바른 눈을 유통케 한다[玄關大啓 正眼流通].”하였다.
[주D-008]보광(普光) : 부처가 보광명장(普光明藏)에서《원각경(圓覺經)》을 설하였다. 보광명은 부처의 덕이 두루 밝다는 뜻이다.
[주D-009]태애(台崖)에 손짓하며 부르는 이 : 천태산(天台山) 벼랑으로 신선이 왕래한다는 곳. 이백(李白)의 시에, “신선이 나를 사랑한다면, 손을 들고 와 부르리라.[仙人如愛我 擧手來相招]”라는 구절이 있다.
[주D-010]여산(盧山)의 눈썹 찡그리는 손 : 진(晉) 나라 혜원사(惠遠師)가 도잠(陶潛)더러 자주 연사(蓮社)에 들라고 권하자, 연명(淵明)이 눈썹을 찡그리고 갔다. 《周續之 虞山記》
[주D-011]단액(丹掖) : 붉게 칠한 액성(掖省). 액성은 궁중의 문하성(門下省)ㆍ중서성(中書省).
-<<동문선(東文選)>>제18권 칠언배율(七言排律)
정자중(鄭子中)이 병풍의 화제(畫題)를 청하다 8절(八絶)
상산사호(商山四皓)
선비 갓에 오줌 누니 그 임금을 섬길 건가 / 溺冠曾恥事龍顔
후한 폐백 받고서 아녀자를 따랐으나 / 應幣還隨兒女間
그래도 천년 뒤에 높은 이름 남은 것은 / 尙得高名千載後
그때 다시 산으로 돌아왔기 때문일세 / 應緣當日再還山
동강(桐江)에 낚시를 드리우다
하늘의 별 놀래 주고 다리 절로 펴졌더니 / 驚動乾文脚自伸
돌아오매 용의 덕을 진정 못에 감추었네 / 歸來龍德政淵珍
옛 친구 누구인가 유문숙이 그이리라 / 故人可是劉文叔
동강에 만고의 봄 온통 맡겨 주었네 / 全付桐江萬古春
초려(草廬)를 세 번 찾다
초려 세 번 찾는 예법 탕처럼 은근해라 / 草廬三顧禮勤湯
담소하는 잠깐 동안 제왕의 일 마련했네 / 談笑逡巡辦帝王
역적 토벌 못 마친 것 한스러워 마시라 / 莫恨天誅功未訖
간웅은 기운 빠져 울며 향을 나눴다오 / 姦雄心死泣分香
강동(江東)으로 가는 배
티끌 속의 모기와는 같이 즐길 수 없나니 / 望塵蚊蜹不同娛
어느 저녁 가을바람에 고향 더욱 그리웠네 / 一夕驚秋倍憶吳
만리 가는 돛배에 바람이 편을 주니 / 萬里歸帆風與便
순채 농어 때문이란 사람들 말 그냥 두네 / 任他人道爲蓴鱸
율리(栗里) 은거
천지가 뒤집히는 그 일일랑 말을 말라 / 地覆天飜事莫論
가을 향기 좋은 빛이 찬 동산에 가득하네 / 秋香佳色滿霜園
알아 주는 이 없으니 거문고 줄 쓸 데 없지만 / 知音世遠絃無用
의를 사모해 찾는 사람 발자취 존귀해라 / 慕義人攀足亦尊
화산(華山)에서 나귀에서 떨어지다
어수선한 시대라 경륜 알 수 없더니 / 草昧經綸未可知
천심 놀라 기뻐하니 예언대로 맞았네 / 天心驚喜果前期
화산에 말 돌리기 오늘부터 시작이니 / 華山歸馬從今日
나의 나귀 다시 불러 타고 갈 필요 없네 / 不用吾驢再喚騎
염계(濂溪)의 연꽃 사랑
하늘이 부자 낳아 건곤을 열었으니 / 天生夫子闢乾坤
쇄락한 그 가슴에 티끌 한 점 없어라 / 灑落胸懷絶點痕
어여뻐라 맑고 통한 아름다운 그 꽃이여 / 卻愛淸通一佳植
꽃 가운데 군자로서 그 묘함 말할 수 없네 / 花中君子妙無言
고산 매은(孤山梅隱) 그림에는 배가 돌아오고 학(鶴)도 돌아왔는데, 문밖에는 손님이 없다.
배를 돌려 돌아오매 학도 사람 쫓아와 / 返棹歸來鶴趁人
매화 곁에 고이 앉으니 맑고도 참되어라 / 梅邊閒坐自淸眞
문 앞에 찾은 이도 속객이 아닐 텐데 / 門前想亦非凡客
무슨 일로 머뭇머뭇 몸을 아직 숨기는가 / 底事逡巡尙隱身
[주D-001]상산사호(商山四皓) :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이다.
[주D-002]선비 …… 누니 : 한 고조(漢高祖)가 임금이 되기 전에, 유학자(儒學者)를 멸시하여 그들을 만나면 갓을 벗겨 오줌을 누었다.
[주D-003]후한 …… 따랐으나 : 한 고조(漢高祖)가 임금이 된 뒤에 태자를 바꾸려 하자, 여후(呂后)가 후한 폐백을 가지고 상산사호를 청하였더니, 네 노인이 나와서 태자를 보좌하였다.
[주D-004]하늘의 …… 펴졌더니 :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임금이 된 뒤에, 옛 친구 엄자릉(嚴子陵)을 찾아 불러와서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엄자릉은 마침내 듣지 않고 광무제와 한자리에서 자다가 다리를 뻗어 광무제의 배 위에 얹었다. 다음 날 아침에 천문(天文)을 맡은 태사관(太史官)이 아뢰기를, “간밤에 객성(客星)이 제좌(帝座)를 범하였습니다.” 하니, 광무제가 웃으며, “짐이 고인(故人) 엄자릉과 한자리에 누워 잤다.” 하였다. 엄자릉은 다시 동강(桐江)으로 돌아가서 낚싯대를 들었다.
[주D-005]초려 …… 은근해라 : 은(殷)나라 탕(湯)이 이윤(伊尹)을 신야(莘野)에 가서 세 번 청하였다.
[주D-006]간웅(奸雄)은 …… 나눴다오 : 간웅은 조조(曹操)로, 죽을 때 남은 향(香)을 부인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유명을 내렸다.
[주D-007]가을바람에 …… 두네 : 진(晉)나라 장한(張翰)이 낙양에 와서 벼슬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인 강동(江東)의 순채(蓴菜)와 농어[鱸魚]가 생각나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강동으로 돌아갔다. 《晉書 文苑列傳 張翰》
[주D-008]율리(栗里) : 도잠(陶潛)의 은거지이다.
[주D-009]화산(華山)에서 나귀에서 떨어지다 : 오대(五代) 말기(末期)에 진단(陳摶)이 화산에 숨어 살았는데, 화음시(華陰市)에 나왔다가 송 태조(宋太祖)가 황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제는 천하가 안정되겠구나.” 하고, 크게 웃으며 나귀의 등에서 떨어졌다.
[주D-010]화산(華山)에 말 돌리기 : 주 무왕(周武王)이 천하를 평정한 뒤에, 전마(戰馬)를 화산으로 놓아 돌려보내어 다시는 전쟁하지 않을 뜻을 표시하였다.
[주D-011]하늘이 …… 열었으니 : 부자(夫子)는 염계(濂溪) 즉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키는데, 그가 〈태극도(太極圖)〉를 그려서 건곤(乾坤)의 이치를 밝혔다.
[주D-012]쇄락(灑落)한 …… 없어라 : 황산곡(黃山谷)이 주돈이의 인품을 칭찬하여, “흉금(胸襟)이 쇄락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하였다.
[주D-013]맑고 …… 꽃 : “연(蓮)이 탁한 물에 났으면서도 맑고, 줄기의 속은 비어 통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있는 말이다.
[주D-014]배가 …… 없다 : 임포(林逋)가 고산(孤山)에 살면서 간간이 서호(西湖)에서 배를 타고 노는데, 집에 손님이 오면 집안사람이 기르는 학을 풀어 놓아 학이 임포가 노는 데를 찾아갔다. 임포는 학을 보고 곧 손님이 온 줄 알고 배를 저어 돌아왔다.
-퇴계선생문집 제3권
박대붕(朴大鵬)
하늘이 만들어 낸 저 무등산 / 天作山無等
최정상 산봉우리 기묘하구나 / 奇峯最上頭
천지 음양 기운이 감돌아 / 扶輿二儀氣
오행이라 그 흐름 충만하여라 / 坱圠五行流
높고 밝은 하늘에 솟아오르고 / 標挺高明域
넓디넓은 땅속에 뿌리 뻗어서 / 根蟠廣博陬
우뚝할사 언덕마루 뛰어넘었고 / 嵯峨超培塿
드높아라 숭구라도 맞먹고말고 / 崔崒軼嵩丘
맑은 옥 그림자 남해에 비끼고 / 玉影橫南海
상서로운 구름 전역을 비추네 / 祥雲映九州
강풍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고 / 剛風吹不動
짙은 안개 덮어도 가릴 수 없어라 / 霪霧蔽無由
멀리 연봉의 달과 맞닿아 있고 / 逈接蓮峯月
멀리 태악의 가을과 잇닿았는데 / 遙連泰岳秋
봄날에 지초 난초 향기 토하고 / 芝蘭春馥郁
풍설에 솔과 잣이 쏴쏴 운다네 / 松柏雪颼飅
종산의 험준함은 진작 털어 버렸고 / 已碎鍾山險
귀곡의 유심함은 아예 없는데 / 初無鬼谷幽
천하를 작게 봄은 노에 오름이요 / 小天登自魯
바다를 보았나니 식견이 추와 통했네 / 觀海見通鄒
우뚝함은 한진이 될 만도 하고 / 赫可爲韓鎭
거대함은 보후가 나기에 마땅하지 / 蔥宜降甫侯
단심은 백악을 향해 기울고 / 丹心輸白嶽
인의는 동주에 뜻을 두었네 / 仁義志東周
온화한 빛 명봉을 맞아들였고 / 和色迎鳴鳳
향기로운 바람 취유를 제거했는데 / 馨風拔臭蕕
공동에서 거마를 멈추어 서고 / 崆峒期挽駕
요포로 돌아가리 마음먹었네 / 瑤圃誓回輈
해와 달의 광명을 열고 닫으며 / 日月纔開闔
음양의 조화를 수답하면서 / 陰陽此獻酬
구름을 일으키고 단비도 내려 / 興雲兼致雨
상서 만들고 길운 빚었네 / 生瑞且陶休
남쪽의 천주로 길이 간주하였고 / 永擬南天柱
북쪽의 두우로 한창 우러렀는데 / 方瞻北斗牛
어찌하여 두 기둥 꿈을 꾸어서 / 如何兩楹夢
우리 유가 근심으로 변했단 말가 / 翻作孔門憂
무너져 내린 사록에 통곡 심하니 / 哭甚崩沙鹿
밀려오는 초휴를 누가 당하리 / 疇堪壓楚咻
쓸쓸한 천지에 속절없이 섰노라니 / 乾坤空獨立
떨어진 맥 하염없이 서글프기만 / 墜緖慨悠悠
이 세상에 참 남자 몇몇일런고 / 世幾眞男子
선생이 그중에서 우뚝하여라 / 先生獨擅雄
마음은 성정 위에 보존하였고 / 心存誠正上
기운은 호연지기에서 우러나왔네 / 氣發浩然中
환로에선 이름 구하기 멀리하였고 / 宦海求名倦
학문에선 도에 들기 깊이 하였네 / 書林入道竆
사람들은 범에게 물은 말을 가지고 / 人將問虎語
전하여 몽매한 자들 깨우쳤다네 / 傳作啓羣蒙
기맥은 서로 통하는 자 찾는 법 / 聲氣相求合
참으로 알아준 분 퇴옹 계시어 / 眞知有退翁
공통된 견해는 격물에 있고 / 一揆存物格
합치한 덕은 신통에 있었네 / 合德在神通
전해 오는 남녘의 맥 끊어져 버려 / 道絶曾南脈
첫째가는 산봉우리 무너진 뒤에 / 山頹第一峯
연달아서 나라 쇠할 재앙 만나니 / 連逢邦殄瘁
어디서 높은 풍도 찾아볼 건가 / 何處遡高風
우리 동방 가르침 이루어 놓아 / 成敎吾東國
넉넉하게 예의가 나타났는데 / 優優見禮儀
몇 년 수명 하늘이 허락 아니해 / 數年天不假
하룻밤 새 우리 도 부칠 데 없네 / 一夕道無依
용 사라진 날 구름은 쓸쓸해지고 / 雲冷龍亡日
범 가버린 때 바람은 힘이 없어라 / 風殘虎逝時
이내 후생 눈물을 뿌리는 뜻은 / 晩生揮淚意
모두가 공과 사를 위하기 때문 / 都只爲公私
나라 다스릴 뜻은 속절없이 되었고 / 已矣經邦志
세상 구제할 기대 쓸쓸해졌네 / 蕭然濟世期
강호는 흘러 흘러 다함이 없고 / 江湖流不盡
천지간에 한스러움 끝이 없어라 / 天地恨無涯
평소의 각별한 정 그리워하고 / 爲憶平生處
꿈속에서 자주 서로 만나 본다오 / 時多夢裏隨
어찌 알랴 서울의 한 번 이별이 / 那知京洛別
뜻밖에도 영원한 헤어짐 될 줄 / 忽作永離違
[주D-001]숭구(嵩丘) : 중국 오악(五嶽) 가운데 중악(中嶽)으로 불리는 숭산(嵩山)이다. 여기서는 높은 산의 대명사로 쓰였다.
[주D-002]멀리……있고 : 연봉(蓮峯)은 중국 화산(華山)의 별칭인데, 송나라 초기에 진단(陳摶)이 그곳에 은거하였다. 무등산이 멀리 연봉 위에 뜬 달빛을 같이 받는다는 것은 고봉이 수백 년 전 대학자인 진단과 학문이 서로 통한다는 뜻이다. 진단은 〈선천도(先天圖)〉를 그렸는데 이것이 나중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太極圖)〉가 되어 송대 성리학자들의 상수학(象數學)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宋史 卷457 陳摶列傳》
[주D-003]멀리……잇닿았는데 : 태악(泰岳)은 태산(泰山)이다. 송나라 때 손복(孫復)이 태산에 은거하여 석개(石介), 문언박(文彦博), 조무택(組無擇) 등 유수한 학자를 배출한 일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무등산의 청명한 가을이 태산의 그것과 같다는 것은 역시 고봉의 고명한 학문이 손복과 서로 통한다는 뜻이다. 《宋元學案 卷2 泰山學案》
[주D-004]종산(鍾山)의……버렸고 : 종산은 곤륜산(崑崙山)의 별칭이다. 섬서(陝西)에 위치한 높은 산으로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아 설산(雪山)이라고도 한다. 신선 서왕모(西王母)가 그곳에 산다고 하여 신선 세계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무등산이 경사가 완만하고 곤륜산처럼 험준하지 않아 고봉이 괴벽한 선술(仙術) 같은 것을 멀리하였다는 뜻이다.
[주D-005]귀곡(鬼谷)의……없는데 : 귀곡은 하남(河南) 등봉현(登封縣)에 있는 골짜기로 육국(六國) 시대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스승인 귀곡 선생이 살던 곳이다. 무등산이 귀곡처럼 유심(幽深)하지 않듯이 고봉에게는 종횡가의 괴술(怪術) 같은 것도 없다는 뜻이다.
[주D-006]천하를……오름이요 : 무등산이 높아서 그 위에 오르면 노나라 태산에 오른 것처럼 천하가 작게 보인다는 것이다. 고봉의 도학이 높아 공자와 서로 맥이 통한다는 뜻이다. 노는 태산 또는 공자를 가리킨다. 《맹자》〈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께서 동산에 올라서는 노나라를 작다고 여기시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다고 여기셨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하였다.
[주D-007]바다를……통했네 : 추(鄒)는 맹자의 나라로서 맹자를 가리킨다. 무등산이 높아서 멀리 바다가 보이듯이 고봉의 기국이 원대하여 맹자와 서로 통한다는 뜻이다. 《맹자》〈진심 상〉에 “바다를 구경한 사람과는 강물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어렵다.〔觀於海者難爲水〕” 하였다.
[주D-008]우뚝함은……하고 : 한진(韓鎭)은 한(韓)나라 진산(鎭山)으로 양산(梁山)을 말한다. 주 선왕(周宣王) 때 제후인 한후(韓侯)가 재능이 출중하여 양산 아래에서 주위의 소수 부족을 단결시키고 낙후한 지역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역시 무등산을 양산에 비유하고 고봉을 한후에 비유한 것이다. 《시경》〈대아(大雅) 한혁(韓奕)〉에 “하늘 높이 솟은 양산을 하우(夏禹)께서 다스렸는데 한후가 밝은 덕 지녀 천자는 그에게 사명을 내렸네.〔奕奕梁山 維禹甸之 有倬其道 韓侯受命〕” 하였다. 본문의 혁(赫) 자는 혁(奕) 자와 통용된다.
[주D-009]거대함은……마땅하지 : 보후(甫侯)는 보국(甫國)의 공후(公侯)이다. 보후가 사악(四嶽)인 대산(岱山)ㆍ곽산(霍山)ㆍ화산(華山)ㆍ항산(恒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듯이 고봉도 무등산의 정기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시경》〈대아(大雅) 숭고(崧高)〉에 “산악이 신을 내려 보후(甫侯)와 신후(申侯)를 내셨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 하였다. 본문의 총(蔥) 자는 숭(崧) 자와 통용된다.
[주D-010]단심(丹心)은……기울고 : 백악(白嶽)은 서울의 백악산, 곧 지금의 북한산으로 대궐을 상징하는바 항상 임금에게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주D-011]인의(仁義)는……두었네 : 동주(東周)는 동방의 주나라란 뜻으로 조선을 가리킨다. 인으로 다스렸던 이상적인 나라인 옛 주나라처럼 만들어 보려고 했다는 뜻이다. 《논어》〈양화(陽貨)〉에 “만일 나를 써 주는 자가 있다면 나는 주도(周道)를 동방에 다시 일으키겠다.〔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하였다.
[주D-012]온화한……맞아들였고 : 명봉(鳴鳳)은 우는 봉황이란 말인데, 봉황은 어진 임금이 나오면 나타난다는 길조(吉鳥)로서 어진 신하를 뜻한다. 군신 상하와 백성들이 화합한 것은 고봉 같은 현인이 조정에 나갔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시경》〈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소리쳐 우네, 높은 산 저 위에서.〔鳳凰鳴矣 于彼高岡〕” 하였다.
[주D-013]향기로운……제거했는데 : 취유(臭蕕)는 악취 나는 풀로, 소인에 비유된다. 고봉이 조정에 나가니 소인들의 기세가 꺾였다는 뜻이다.
[주D-014]공동(崆峒) : 서울을 뜻하는 말이다. 옛사람은 북극성이 하늘 중앙에 있고 북극성의 아래는 공동이라고 여겼는데, 낙양(洛陽)이 땅 중앙에 위치하므로 낙양을 공동이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D-015]요포(瑤圃) : 아름다운 동산으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위아래의 글로 보아 여기서는 성군(聖君)이 있는 조정을 말하는 듯하다. 《초사》〈섭강(涉江)〉에 “청룡 타고 백룡 몰고서 나는 중화와 요포에서 놀리라.〔駕靑虯兮驂白螭 吾與重華遊兮瑤之圃〕” 하였다.
[주D-016]남쪽의 천주(天柱) : 안휘(安徽) 잠산현(潛山縣)에 있는, 남악(南嶽)으로 불리는 천주산을 말한다. 고봉이 세상을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주D-017]북쪽의 두우(斗牛) :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북방의 두성(斗星)과 우성(牛星)이다. 고봉이 선비들의 추앙을 받는 사표가 되었다는 말이다.
[주D-018]어찌하여……말가 : 스승인 고봉이 죽은 것을 말한다. 《예기》〈단궁 상(檀弓上)〉에 공자가 “내가 지난밤 꿈에 두 기둥 사이 마루에 앉아서 궤전(饋奠)을 받았다.…… 나는 아마 죽을 것이다.〔予疇昔之夜 夢坐奠於兩楹之間……予殆將死也〕” 하였는데, 혼령이 되어 제삿상을 받는 꿈을 뜻한다.
[주D-019]무너져 내린 사록(沙鹿) : 사록은 하북(河北) 대명현(大名縣)에 있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토산(土山)으로, 이것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은 재앙의 조짐을 뜻한다. 《춘추좌씨전》〈희공(僖公) 14년〉에 “가을 8월 신묘에 사록이 무너졌다. 진나라 복자 언이 말하기를 ‘1년 후에 장차 큰 재앙이 일어나 나라가 망할 것이다.’ 하였다.〔秋八月辛卯 沙鹿崩 晉卜偃曰 期年將有大咎 幾亡國〕”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D-020]밀려오는 초휴(楚咻) : 거센 이론(異論)을 말한다. 《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제나라 사람 한 명이 가르치고 많은 초나라 사람이 떠들어 대면 매일 매를 때리면서 제나라 말을 습득하게 하더라도 될 수 없을 것이다.〔一齊人傅之 衆楚人咻之 雖日撻而求其齊也 不可得矣〕”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1]성정(誠正) : 《대학장구(大學章句)》의 팔조목(八條目) 가운데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줄여서 일컬은 말이다.
[주D-022]몇 년……아니해 : 해야 할 일을 미처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애석해하는 말이다. 《논어》〈술이(述而)〉에 “하늘이 만일 나를 몇 년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마침내 《주역》을 전심으로 연구하여 큰 과실은 없게 될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하였다.
[주D-023]용……없어라 : 용과 범은 성현의 비유로서 고봉을 뜻하는데, 고봉이 죽자 남아 있는 세상 사람들이 기운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주역》〈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듯이 성인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하였다.
-<<고봉집(高峯集)>>제2권 <만장(挽章)>
사직하며 걸해하는 소〔辭職乞骸疏〕 선문대왕(宣文大王 효종) 3년(1652) 임진년 3월, 공이 승지(承旨)로 서울에 있을 때 지었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지난달 27일에 외람되게 과분한 은혜를 입고 차서(次序)를 건너뛰어 감당할 수 없는 직임에 올랐기에, 즉시 수문(脩門) 밖에 달려가 사피(辭避)하는 소(疏)를 대략 진달했는데, 정성이 하늘에 닿지 않아 개차(改差)한다는 허락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에 외람되게 명소(命召)를 받고 또 수문의 안에 나아가서 재차 미천한 정성을 토로하였으나, 단성(丹誠)을 아직도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어서 역시 개차한다는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애면글면 직임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또 그다음 날에 듣건대, 미원(薇垣 사간원)의 원중(院中)에서 논의가 준열하게 발동하여 별의별 말들이 오갔는데,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우선 유보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창황히 밖으로 나와 감히 다시 정고(呈告)하고는 고심하며 재계(齋戒)하시는 기간이 지나기를 공손히 기다리다가 입계(入啓)하여 본직(本職)이 체차(遞差)되었습니다만, 관례에 따라 단지 은가(恩暇)를 받기만 하였으므로 신은 실로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청재(淸齋)하시는 날을 당하여 우러러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은, 참람하여 그 죄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미천한 신이 낭패를 당한 정상을 생각하고 고인(古人)이 진퇴(進退)한 의리를 생각하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감히 면류(冕旒)의 아래에 다시 진달하게 되었습니다.
신은 사세(事勢)로 볼 때 감히 멀리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구(區區)히 바라는 바는 직임의 삭탈에만 있지 않고 바로 향리로 돌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삼가 전하께서 신이 사진(仕進)에는 뜻이 없이 반드시 영영 떠나려고만 하면서, 세상을 우습게 보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려고 할 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없다고 여기실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기에, 신이 감히 20년 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고 침묵했던 말씀을 토로하게 되었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긍휼히 여겨 굽어살펴 주소서.
신은 계유년(1633, 인조11) 봄에 등제(登第)를 하고는 바로 그 가을에 대귀(大歸)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막 벼슬길에 오르게 된 때에 퇴휴(退休)의 계책을 내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만, 신이 그렇게 한 까닭은 당시에 강석기(姜碩期)가 재상(宰相)이 되어서 신의 벼슬길을 봉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신이 강석기와는 연가(連家)의 옛정과 삼세(三世)의 두터운 연분이 있어서 평소에 서로 알고 지내며 조금도 은원(恩怨)이 없었으니,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신이 뼛속이 서늘해지고 간담이 떨려서 곧바로 일구일학(一丘一壑)의 뜻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재차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 임명되었지만 체직(遞職)을 청하였고, 한번 대각(臺閣)에 끼었지만 해면(解免)을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술년(1634, 인조12) 봄 초에는 관서(關西)의 변방 수령으로 의망(擬望)되고, 또 호서(湖西) 막부(幕府)의 관원으로 의망되었다가 결국에는 성산 현감(星山縣監)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성은(聖恩)의 곡진한 배려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와 함께 조의(朝議)가 좌천(左遷)에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았기 때문에, 감히 면직(免職)을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그해 여름에 신이 김령(金坽)과 함께 옥당(玉堂)의 본관록(本館錄)에 끼었는데, 다시 김령과 함께 도당(都堂)에서 명단이 삭제되었습니다. 이를 주장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올리고 내린 저의가 분명히 있을 터인데, 신이 아닌 다른 사람까지도 배척하려고 하다니 괴이하기도 합니다.
오래도록 전성(專城 지방 수령)을 향유하는 것은 신의 본정(本情)이 아니었습니다만, 마침 양전(量田)하는 때를 만나서 감히 체차(遞差)되기를 꾀하지 못하고, 양전이 끝난 뒤에 병장(病狀)을 올려 감사(監司)에게 파직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이 중하면 파직하여 내보내는 것이 원래 규례인데도, 기필코 무함하려 하면서 교묘하게 말을 꾸며 장계(狀啓)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아무 뜻 없이 나온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대각(臺閣)에서도 논박(論駁)하는 의논이 한꺼번에 일제히 일어나, 내외가 모두 공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으니, 신이 이 뒤로는 일구일학(一丘一壑)의 뜻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신이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에 소(疏)를 진달하였는데, 이는 바로 고시(古詩)에서 말한 “거룩하고 밝으신 임금님을 만나, 감히 흥망의 말씀을 진달하였네.〔遭逢聖明主 敢進興亡言〕”라는 것이었을 뿐, 다른 뜻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을 배척하려는 자들은 벼슬길에 진출할 계제(階梯)를 만드는 것이라고 일단 의심하고는 시기하며 질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비(聖批)가 특별히 우악(優渥)하고 천의(天意)가 끈끈한 정을 보이시며 “헤어진 지 이미 오래되어 보고 싶은 생각이 매우 간절하다. 종용히 길을 떠나 올라오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는 하교가 있기까지 한 것을 보고는, 의심하던 자들이 노하여 극력 저지하려는 꾀를 더욱 치밀하게 꾸미면서 나국(拿鞫)하여 정죄(定罪)하라고 논하는 계사까지 내놓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계사에서 운운한 말들이 모두 햇수가 오래된 일들이고, 국상(國喪)에 달려갈 수 없었던 것도 벌써 6개월이나 지난 일인데, 그 일들을 논죄(論罪)하는 것이 어째서 꼭 소(疏)를 진달한 뒤에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또 아들을 보내 상소하며 은연중에 조정을 염탐했다고 말한 것은 그 뜻이 교묘한 말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데에 있는 것으로, 자기들 스스로 언로(言路)를 막아 가리는 죄에 빠지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신이 이 뒤로는 한마디 말도 감히 입에서 꺼내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구나 어떻게 감히 이런 몸을 가지고 다시 세상길을 향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천서(天書)를 특별히 내리며 은총으로 부르시는 은혜가 우악하였으므로, 신이 부득이 병을 무릅쓰고 올라오긴 했습니다만, 사람들이 의심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에 소를 진달할 때보다 심하다는 것을 본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일에 외람되게 성상의 간택을 받고 근밀(近密)한 자리에 끼이게 되었으므로, 신이 부득이 두꺼운 낯으로 출사하기는 하였습니다만, 의심하는 자들이 성내며 극력 막는 것이 기축년의 소에 비답을 내리신 뒤보다도 심하다는 것을 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이 성은(聖恩)에 감격하여 감히 자신의 소견을 고수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알아서 처신하지 못한 나머지, 남의 안색에 징험되고 남의 음성에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서리를 밟게 되면 두꺼운 얼음이 곧 얼게 된다고 성인이 깊이 경계하셨으니, 신이 이 뒤에도 그칠 줄을 알지 못한다면, 겸시(鉗市)의 환란이 아마 며칠도 되지 않아서 닥쳐오고 말 것입니다.
신도 물론 과거의 일을 제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이처럼 자세히 차례로 말씀을 올린 것은, 과거의 일을 가지고 미래의 일을 유추함으로써, 신이 앞으로는 더욱 스스로 계신공구(戒愼恐懼)하지 않을 수 없는 뜻을 밝히고자 함이요, 또 신이 왕년에 나아오기 어려워한 것도 이 때문이고 오늘날 물러나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을 성명(聖明)께서 통촉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대개 신은 품성이 오활(迂闊)하고 처신이 세상과 어긋나서, 때를 살펴 주선하거나 시세(時勢)를 따라 진퇴(進退)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동서남북 어디든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이 오직 의리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일곱 번 쓰러지고 여덟 번 넘어지며 천 가지 만 가지 간난신고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차마 그러한 일을 그만둘 수 없었고 보면, 창랑(滄浪)을 스스로 취한 것 아님이 없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대저 이와 같고 보면 사람에게 용납될 수가 있겠으며, 세상에 행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일구일학(一丘一壑) 이외에는 신이 몸을 둘 곳이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신은 체질이 포류(蒲柳 창포와 갯버들)처럼 허약한 데다, 나이도 상유(桑楡)에 임박한 까닭에, 머리는 벗겨지고 치아는 빠졌으며 온갖 질병이 교대로 침노하여, 기력이 나른하고 정신이 혼미하니, 후설(喉舌)의 중한 자리에는 본디 일각(一刻)도 처할 수가 없습니다. 설혹 백집사(百執事 백관)의 대열에 속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처지에서야 어떻게 끼어들 수가 있겠습니까. 공연히 진현관(進賢冠)을 머리에 높이 쓰고, 태창(太倉)의 곡식을 허비하는 것은 신의 소원이 아닐 뿐더러, 성조(聖朝)에서 사람을 처우하는 도리도 못될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나이 칠십에 벼슬을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삼대(三代) 이래로 변치 않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견마(犬馬)의 나이가 예순여섯이고 보면 칠십에 얼마 남지 않았고, 기력으로 비교해 보면 실로 팔구십의 사람보다도 못합니다. 송(宋)나라 신하 전약수(錢若水)는 나이 사십에 관직을 그만두었는데도, 자기 편할 대로 한다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고, 경솔히 허락했다고 송조(宋朝)를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일이 지금까지 청사(靑史)에 휘황하게 빛나 길이 천재(千載)의 미담이 되고 있으니, 신이 금일 청하는 것과 같은 것도 결코 망녕된 일이 아니요 또 외람된 일도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삼가 청하옵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위태하고 절박한 사정을 살피시고, 신의 쇠하고 병든 정상을 불쌍히 여기시어, 중서(中書)를 삭탈하도록 속히 명하심과 동시에 전리(田里)에 살아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리하여 신이 다시 동산의 늙은이며 냇가의 벗들과 함께 성스러운 조정을 노래 부르며 일구일학(一丘一壑)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전하께서 뼈에 살을 입혀 주신 은혜 아님이 없을 것이요, 또한 성명(聖明)의 조정에 아름다운 일이 되어 천년토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입니다. 신은 하늘을 쳐다보고 태양을 우러르며 위축되어 떨면서 간절히 기원하는 지극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답하기를 “소(疏)를 보고 지극히 간절한 심정을 모두 잘 알았다. 인심과 세도(世道)가 아무리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나라의 법이 있는데, 저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가 어찌 감히 우리 조정에서 간사한 꾀를 부릴 수 있겠는가. 소를 보고 나니 내가 매우 놀라워서 뭐라고 말할 수도 없다.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직임(職任)을 살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주C-001]걸해(乞骸) : 걸해골(乞骸骨)의 준말로, 해골이 고향에 돌아가 묻힐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다는 뜻인데, 보통 벼슬길에서 완전히 물러나 은퇴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01]대귀(大歸) : 출가한 부인이 시집에서 나와 영원히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은퇴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주D-002]일구일학(一丘一壑) : 하나의 언덕과 하나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은퇴하여 초야에서 산수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권100상 〈서전 상(敘傳上)〉에 “하나의 골짜기에서 낚시하면 만물이 그 뜻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하나의 언덕에서 소요하면 천하가 그 낙을 바꾸지 못한다.〔漁釣於一壑 則萬物不奸其志 棲遲於一丘 則天下不易其樂〕”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거룩하고 …… 진달하였네 : 이백(李白)의 〈나의 뜻을 기록하여 사인 채웅(蔡雄)에게 주다〔書情贈蔡舍人雄〕〉라는 시에 나온다. 《李太白集 卷9》 보통은 “거룩하고 밝으신 임금님을 만났으니, 어찌 감히 흥망의 말씀을 진달하랴.”라고 해석하지만, 여기서는 고산이 단장취의(斷章取義)한 뜻을 감안하여 이렇게 번역하였다.
[주D-004]남의 안색에 …… 말았습니다 : 사람들이 이제는 고산을 미워하여 배척하는 기색을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내고 목소리로 나타내어 본격적으로 논죄(論罪)하며 제거하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이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의 “사람은 항상 잘못을 저지른 뒤에야 고칠 줄을 알고, 마음이 괴롭고 생각한 대로 되지 않은 뒤에야 분발하게 되고, 남의 안색에 징험되고 남의 음성에 나타난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人恒過然後能改 困於心衡於慮而後作 徵於色發於聲而後喩〕”라는 말을 발췌하여 인용한 것이다.
[주D-005]서리를 …… 된다 : 조짐을 보고 앞으로 닥칠 일을 미리 알아서 대처해야 함을 말한다. 《주역》 〈곤괘(坤卦) 초육(初六)〉에 “서리를 밟게 되면 두꺼운 얼음이 곧 얼게 된다.〔履霜堅氷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겸시(鉗市)의 환란 : 목에 쇠사슬을 감고 저잣거리에 끌려 다닌다는 뜻으로,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다가 마침내 치명적인 굴욕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신공(申公)과 백생(白生)과 목생(穆生)이 동시에 전한(前漢)의 초 원왕(楚元王)을 섬겼는데, 목생이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원왕이 알고는 주연을 베풀 때마다 그를 위해 항상 감주〔醴〕를 내놓았다. 그런데 뒤에 원왕의 손자인 왕무(王戊)가 사위(嗣位)하여 주연을 베풀 적에 어느 날 깜박 잊고서 감주를 한번 내놓지 않자, 목생이 “이제 떠나가야겠다. 감주를 내놓지 않은 것은 왕의 뜻이 태만해진 것이니, 떠나지 않는다면 초나라 사람들이 장차 나의 목에 쇠사슬을 걸고 저잣거리를 끌고 다닐 것이다.〔可以逝矣 醴酒不設 王之意怠 不去 楚人將鉗我於市〕”라고 하면서, 신공과 백생이 극력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로 마침내 떠나갔는데, 신공과 백생은 계속 남아 있다가 결국에는 서미(胥靡)의 형(刑)을 받고서 붉은 옷〔赭衣〕을 몸에 걸치고 저잣거리에서 절구질하는 치욕을 당하였다. 《漢書 卷36 楚元王傳》 서미(胥靡)에 대해서 안사고(顔師古)는 “서로들 줄줄이 묶여 복역하기 때문에 서미라고 하니, 오늘날 복역하는 죄수들이 쇠사슬로 서로들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聯繫使相隨而服役之 故謂之胥靡 猶今之役囚徒以鎖聯綴耳〕”라고 해설하였다.
[주D-007]계신공구(戒愼恐懼) : 경계하고 근신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인데,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이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8]길을 …… 후회하면서도 :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길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목을 길게 빼고서 이제 돌아가려 한다.〔悔相道之不察兮 延佇乎吾將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창랑(滄浪)을 …… 없으니 : 세상의 용납을 받지 못하는 것이 모두 자기 탓이라는 말인데, 역시 굴원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의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는 말을 전용(轉用)한 것이다.
[주D-010]상유(桑楡) : 노년을 뜻한다. 서쪽으로 지는 햇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 가지 끝에 비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11]진현관(進賢冠) : 고대에 황제를 조현(朝見)할 때 쓰던 일종의 예모(禮帽)인데, 당나라 때에는 백관들이 모두 이 관을 썼다. 한유(韓愈)의 〈조귀(朝歸)〉 시에 “머리엔 높고 높은 진현의 관을 쓰고, 허리엔 맑게 빛나는 수창의 패옥을 찼네. 복장이야 어찌 멋있지 않으랴만, 덕과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원.〔峨峨進賢冠 耿耿水蒼佩 服章豈不好 不與德相對〕”이라는 표현이 있다. 《韓昌黎集 卷7》
[주D-012]태창(太倉)의 곡식 : 국록(國祿)을 뜻한다. 태창은 서울에 있는 거대한 곡물 창고의 이름이다.
[주D-013]나이 …… 것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대부는 나이가 칠십이 되면 일을 그만둔다.〔大夫七十而致事〕”라는 말이 있다. 또 백거이(白居易)의 〈불치사(不致仕)〉라는 시 첫머리에도 “칠십에 벼슬을 그만둔다고, 예법에도 분명히 기록되었네.〔七十而致仕 禮法有明文〕”라는 말이 나온다. 《白樂天詩集 卷2》
[주D-014]송(宋)나라 …… 그만두었는데도 : 전약수(錢若水)는 북송(北宋)의 저명한 문신이다. 소년 시절 거자(擧子)일 당시에 화산(華山)에서 진단(陳摶)을 만나 관상을 부탁했더니, “급류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평하였는데, 과연 그가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갓 40세 된 젊은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일화가 공포 소백온(邵伯溫)이 지은 《문견전록(聞見前錄)》 권7에 나온다. 이 고사에서 유래하여 벼슬자리에서 과감히 물러나는 것을 급류용퇴(急流勇退)라고 칭하기도 한다.
-고산유고(孤山遺稿) > 고산유고 제2권 > 소(疏)
외편(外篇)
잡지(雜識)
한유(韓愈)의 문장 중에 〈원도(原道)〉를 위시하여 〈맹간(孟簡)에게 준 편지〉와 〈문창(文暢)을 전송한 서(序)〉는 논의의 정대(正大)함과 필력의 호방함이 맹자의 문장보다 못하지 않다. 〈맹간에게 준 편지〉는 특히 더 좋으니, 맹자에 대해 논한 부분이 억양이 반복되어 극히 보기 좋다. - 무오년(1678, 숙종4)에 기록한 것이다. -
밤에 꿈속에서 어느 절에 갔다가 변사(辨師)라는 이름의 노승을 만나 유가와 불가의 차이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내가 희로애락을 운운하자 중이 이르기를, “그것은 바로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이 자아내는 망상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마음은 어떤 물건입니까?” 하자, 중이 이르기를 “진여(眞如)의 체(體)입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희로애락은 마음의 용(用)입니다. 용이 곧 체이니 용만 유독 진여가 아니란 말입니까?” 하였다. - 이하는 기미년(1679, 숙종5)에 기록한 것이다. -
영평(永平) 응암(鷹巖)에서 철원(鐵原) 풍전역(豐田驛)으로 향하는 길에 낭유령(狼踰嶺)에 들렀는데, 고개 아래의 수석이 매우 아름다워 말을 멈추고 잠깐 앉았다. 세차게 흐르는 여울과 맑은 못, 푸른 벼랑과 늙은 나무가 극히 심원(深遠)하고 호젓한 운치가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일어설 생각을 잊게 하였다. 이어 생각하기를, ‘깊은 산 외딴 골짜기 안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을 텐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또 가지 못하니, 개탄스럽다.’ 하였다.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이르기를, “인간 세상의 요로 통진 눈에 아니 뜨이고, 세상 밖 청산녹수 꿈에서도 돌아가네.[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 하였는데, 이 말을 세 번 반복해 되뇌며 한스러워하였다.
나는 밤에 꿈속에서 산수를 노니는 일이 매우 많다.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뒤로 8, 9년 동안 꿈속에서 비로봉(毗盧峰)과 만폭동(萬瀑洞) 사이를 밟은 것은 이루 다 기억할 수도 없고, 이따금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경치를 만나기도 하는데, 이 어찌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 주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몇 밤을 연달아 꿈속에서 글을 풀이한다.” 하고, 이것이 비록 좋은 일이기는 하나 이 또한 꿈에 나타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산수 꿈을 꾸는 것이 비록 영화와 이득을 꿈꾸는 것과 다르기는 하나 한쪽에 치우쳐 매인 마음의 발로라는 점은 똑같다. 이 점을 스스로 경계해야 하겠기에 우선 이렇게 써 놓고 보는 바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상사에는 형식만 잘 차리는 것보다 차라리 슬퍼하기만 하는 것이 낫다.[喪 與其易也 寧戚]”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비문(碑文)을 지으면서 누가 거상을 잘했다고 말할 적에는 대체로 다 ‘척이함비(戚易咸備)’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법과 애통한 심정이 모두 갖추어졌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뜻은 바로 형식만 잘 차리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차라리 슬퍼하기만 하는 것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주자가 풀이하기를, “이(易)는 다스린다는 말이니 절문(節文)은 익숙하나 애통하고 비통한 진심이 없는 것이고, 척(戚)은 오로지 슬퍼하기만 하여 절문이 부족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 두 가지는 정반대의 것이다. 어찌 둘을 겸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예를 들어 부자(夫子)가 이르기를, “사치하는 것보다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다.” 하였는데 지금 만약 ‘사치와 검소를 모두 갖추었다.’고 한다면 무슨 의리를 담은 글이 되겠는가. 그런데도 선배들의 글 중에 이 말을 사용한 경우가 매우 많으니, 한때 우연히 실수한 것을 인습하여 쓸 뿐 더 이상 깊이 살펴보지 않아서가 아닌가 한다. 또 내 생각에 이 말의 잘못은 명(明)나라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 같으니,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의 비문에는 이러한 말이 없다. - 이하는 신미년(1691, 숙종17), 임신년(1692) 연간에 기록한 것이다. -
그리고 비문(碑文)의 글이 잘못을 인습하여 우습게 되는 것은 ‘대자리를 바꾸었다[易簀]’는 말만 한 것이 없다. 대자리를 바꾸는 것은 사실 성현이 바르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다. 그러나 증자(曾子)의 대자리는 바로 계손(季孫)이 준 것으로 예법에 어긋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바꾼 것이니, 그 때문에 생을 바르게 마감한다는 뜻이 되었다. 사람들이 어찌 모두 계손의 대자리를 가져서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문장가들이 고사(故事)를 인용하는 것은 실로 이런 부류가 많다. 그러나 비문의 경우에는 그 성격이 본디 신중하고 엄격하여 이력과 생졸(生卒)을 서술할 적에 오직 사실에 근거하여 그대로 써야지 옛말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 비록 혹 고사를 인용한다 하더라도 상세히 살펴 합당하게 해야 하니, 예를 들어 이불을 걷어 손발을 보라는 것과 대자리를 바꾼 것이 모두 증자의 일이기는 하나 이불을 걷어 손발을 보라는 말은 사람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대자리를 바꾸었다는 말은 사람마다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주자가 지은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제문에 비록 ‘들어냈다[擧扶]’는 말이 있기는 하나 이는 ‘대자리를 바꾸었다’고 직접 말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그리고 제문은 비문과는 다르니, 이것을 선례로 삼아 원용해서는 안 된다.
왕감주(王弇州 왕세정(王世貞))는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배웠다고 스스로 말하였으며 비문(碑文)에 일을 서술할 적에는 그들의 글을 극력 모방하여 추종할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실은 송(宋)나라의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보다도 훨씬 못하였다. 지금 구공(歐公)의 비문들을 읽어 보면 강령을 제시하고 의리가 드러나는 중요한 점을 착종하는 데에 종종 법도가 있어 간략하면서도 빠짐이 없고 상세하면서도 번다하지 않아서 느낌이 한가하면서도 사정이 곡진히 담기고 기풍이 생동하는 부분은 또 왕왕 그림을 그린 것 같으니, 모녹문(茅鹿門 모곤(茅坤))의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 정수를 터득했다.”는 말이 이것이다. 왕감주는 옛사람이 강령을 제시하고 의리가 드러나는 중요한 점을 착종한 묘미를 알지 못하고 그저 옛사람의 글귀와 글자를 그대로 따라서 모방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비문에 일을 서술할 적에 대소경중을 막론하고 모두 써서 걸핏하면 온통 번다하고 잗단 일들로 가득 차곤 하였으니, 강령을 제시하거나 의리가 드러나는 중요한 점을 끌어내어 써넣지도 못하고 수미 본말에 늘이거나 줄여 변화를 준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스스로 기풍이 돋보인다고 한 부분은 사마천의 글자, 반고의 글귀를 인용하여 수식하고 부회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 어찌 옛사람의 묘미와 함께 놓고 논의할 가치가 있겠는가.
옛사람들의 간략함은 문장 작법을 간략히 한 것이었는데 명(明)나라 사람들의 간략함은 자구(字句)를 간략히 한 것이었으며, 옛사람들의 상세함은 대체(大體)를 상세히 한 것이었는데 명나라 사람들의 상세함은 작은 일을 상세히 한 것이었다. 그래서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이 지은 왕 문정공(王文正公 왕단(王旦)), 범 문정공(范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의 비문은 그 글이 2000자가 채 못 되면서도 이들이 정승이 되어 펼친 사업과 일생 동안의 중요한 품행을 거의 다 묘사하였다. 반면에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는 장사꾼이나 부녀자의 전기를 지을 적에도 인물이 보잘것없어 기록할 가치가 없는데도 그 글이 걸핏하면 수백, 수천 자에 달하였으니, 여기에서 글솜씨가 있고 없는 차이를 볼 수 있다.
《마사(馬史)》 중에 예를 들어 〈신릉군전(信陵君傳)〉의 신릉군이 후생(侯生)을 맞이한 일을 서술한 대목과 〈관부전(灌夫傳)〉의 관부가 좌중을 꾸짖은 일을 서술한 대목 등은 곡절이 자세하여 털끝만치도 빠뜨린 것이 없다. 감주(弇州), 창명(滄溟 이반룡(李攀龍)) 같은 이들은 전기를 지을 적에 대체로 모두 이런 글을 모방하면서도 〈신릉군전〉은 오직 선비를 예우하고 현자에게 겸손하여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힘을 얻은 것을 주제로 하고 〈관부전〉은 오직 전분(田蚡)과 두영(竇嬰) 두 집안이 원수를 져 서로 다툰 것을 주제로 하였는데 후생을 맞이한 대목과 좌중을 꾸짖은 대목이 바로 그 의리가 드러나는 긴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상세하게 서술할수록 묘미가 더해진 것임을 몰랐다. 이것을 미루어 유례(類例)를 찾아보면 《사기》와 《한서(漢書)》의 여러 전(傳)들이 모두 그러하다. 만약 일의 대소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두 자세히 순차적으로 서술하려 한다면 어찌 요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감주 등 여러 사람들은 이러한 뜻을 몰랐기 때문에 전기를 지을 적에 그 사람이 일생 동안 한 일을 들어 일상생활의 자잘한 일까지 한결같이 《사기》, 《한서》의 순차적인 서술법에 따라 묘사하였으니, 이 또한 가소롭다.
비문은 역사서의 전기와 문체가 대체로 같다. 그러나 역사서의 전기는 그래도 상세하고 풍부한 것을 위주로 하는 반면에 비문의 경우는 오로지 간략하고 엄격한 것을 위주로 한다. 그래서 한유(韓愈)의 비문에 사실을 서술한 것이 《사기》, 《한서》의 전기와 매우 다른 것이니, 비단 문장이 다를 뿐만 아니라 글의 기본 성격도 당연히 그렇게 다른 것이다. 구양공(歐陽公)이 사마천의 문장을 배웠으면서도 비문을 지을 적에 역사서의 전기의 문체를 다 쓰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명나라 사람들에 이르러 비로소 순전히 역사서의 전기의 문체를 사용하여 비문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게다가 옛사람들이 일을 서술한 법도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장에 요점이 없어져 비문의 간략하고 엄격한 필법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범 문정공(范文正公)은 송(宋)나라의 제일가는 인물로서 일생 동안 행한 일 중에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 극히 많았다. 그런데도 구양공이 신도비를 지을 적에는 오직 출사(出仕)와 은거에 따른 사업 및 일생 동안의 중요한 품행만을 서술하고 그 나머지 좋은 말과 선행 따위는 모두 생략하였다. 예를 들어 친족들을 구휼하기 위해 의전(義田)을 설치한 일과 벗의 상사(喪事)를 돕기 위해 보리를 실은 배를 통째로 부의한 일은 더욱이 옛사람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비문에 이 일조차 싣지 않았으니, 일을 서술하는 데에 있어 이처럼 간략하고 엄격하여 구차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대의 비문은 비록 큰 사업을 펼치고 명절(名節)이 뛰어난 명현(名賢), 위인(偉人)이라 해도 반드시 그 자잘한 행실을 다 기록하고 심지어는 문장을 쓴 작은 일조차 모두 빠뜨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문을 받는 이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짓는 사람도 마음이 편치 않아 하는데, 습속이 잘못된 지가 오래되어 변화시키기가 어렵다.
명(明)나라 사람들은 시(詩)를 일컬을 적에 걸핏하면 한대(漢代), 위대(魏代), 성당(盛唐) 시대를 말하곤 한다. 그러나 한대, 위대는 본디 시대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말하는 당대(唐代)의 시라는 것도 진정한 당대의 시는 아니다. 나는 일찍이 “당대의 시가 어려운 것은 비범하고 활달한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기품이 있는 것이 어렵고, 고상하고 수려한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온후(溫厚)하고 깊고 담박한 것이 어렵고, 성음이 맑고 큰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화평하고 유원(悠遠)한 것이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는데, 명나라 사람들은 당대의 시를 배울 적에 오직 비범하고 활달함만 배우고 자연스럽고 기품이 있는 것은 터득하지 못하였으며, 오직 고상하고 수려한 것만 배우고 온후하고 깊고 담박한 것은 터득하지 못하였으며, 오직 성음이 맑고 큰 것만 배우고 화평하고 유원한 것은 터득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완전히 딴판이 된 것이다.
시는 성정(性情)의 발현이자 타고난 기지가 동한 것이다. 당(唐)나라 사람들은 이 점을 터득하고 시를 지었기 때문에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을 막론하고 대체로 다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이 점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성음과 모습을 모방하고 분위기와 격식에 힘써 옛사람을 따르려고 하는데, 그 성음과 면모가 비록 혹 비슷하기는 하나 기상과 흥취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명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점이다.
송(宋)나라 사람들의 시는 역사 사실에 대한 의론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는 시인들의 큰 병통이므로 명나라 사람들이 이 점을 공격한 것은 옳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지은 시가 꼭 이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고 간혹 도리어 이보다 못하기도 한데, 이는 어째서일까? 공포 사람들은 비록 역사 사실에 대한 의론을 위주로 하기는 하였으나 축적된 학문과 가슴에 맺힌 뜻이 뭔가에 감격하여 촉발되고 솟구쳐 나와서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관습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기상이 호탕하고 힘이 넘쳤으며 때로는 타고난 기지가 발하는 데에 가깝기도 하였으니, 그 시를 읽노라면 그래도 성정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명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격식에 얽매이고 걸핏하면 모방을 일삼아 전체적인 맥락에 맞지도 않는 것을 본뜨려고 애쓰다가 더 이상 천진함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그들이 도리어 공포 사람들보다 못하게 된 까닭일 것이다.
시는 실로 당(唐)나라 시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또한 당나라 시를 닮을 필요는 없다. 당나라 사람의 시는 성정이 일어나 담기는 것을 위주로 하고 역사 사실에 대한 의론을 일삼지 않았는데, 이것이 본받을 만한 점이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이다. 서로 간의 시간적 거리가 천백여 년이나 되는데 성음과 기상이 조금도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는 이치와 형세상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억지로 비슷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무를 깎아 만들거나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 같은 것이 될 뿐이니, 형체는 비록 흡사하다 할지라도 그 천진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이 어찌 귀할 것이 있겠는가.
공포의 시 중에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과 후산(后山 진사도(陳師道))의 시가 당대에 으뜸으로 숭상되었다. 그러나 황씨의 함부로 격식을 어겨 생경한 시와 진씨의 앙상하여 매우 딱딱한 시는 온후(溫厚)한 맛이 없는 데다 또 초탈한 운치가 부족하여 당나라의 시에 비해 매우 수준이 낮을 뿐만 아니라 두보(杜甫)의 시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니, 공동(空同 이몽양(李夢陽))의 “색(色)과 향(香)이 흐르지 않는다.”는 비판이 정말로 확론이다. 간재(簡齋 진여의(陳與義))는 비록 기상이 다소 부족하기는 하나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가락을 터득하였고 방옹(放翁 육유(陸游))은 비록 격조가 다소 낮기는 하나 시인의 흥치(興致)를 극히 잘 체화하였으니, 산곡, 후산을 배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간재, 방옹에게서 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들은 시도(詩道)와의 거리가 그래도 가깝기 때문이다.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이전의 구양공(歐陽公),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 같은 이들은 비록 당나라의 시를 순전히 체화하지 못하기는 하였으나 율시와 절구 등 여러 시체(詩體)들이 그래도 당나라 시의 격조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았다. 다만 구양공은 지나치게 유창하고 형공은 지나치게 정밀한 데다 또 역사 사실을 의론하는 누(累)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동파(東坡 소식(蘇軾))가 나와 비로소 한 번 변하고 산곡(山谷), 후산(后山)이 나옴에 이르러 또 한 번 크게 변하였다.
모녹문(茅鹿門)이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를 지은 것은 왕세정(王世貞), 이반룡(李攀龍) 등 여러 사람들의 표절하는 습성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금의 문장에 대해 치우치거나 바름, 잘되거나 잘못됨을 논한 말이 대체로 적절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지은 문장을 보면 만연체로 쓸데없이 길고 경박하고 사치스러워 말은 많으나 뜻이 부족하고 수사에 치우쳐 실질이 약해서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문장이 체재가 정돈되고 구성이 치밀한 것보다 도리어 못하다. 이는 기풍 있고 유창한 구양공(歐陽公)의 문장을 배우려다가 법도와 조리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니, 문장을 짓기란 참으로 어렵다 할 것이다.
명(明)나라 문장가 중에 예를 들어 손지(遜志 방효유(方孝孺)),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준암(遵巖 왕신중(王愼中)), 형천(荊川 당순지(唐順之))은 모두 구양수, 소식의 유파인데, 이 가운데 손지는 규모가 크고 필력이 활달하기는 하나 수렴하여 불필요한 것을 잘라내 버리는 노력이 부족하고, 양명은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고 민첩하여 글을 다루는 능력이 있고 열고 닫는 등의 변화를 잘 구사하기는 하나 깊고 전아(典雅)하고 중후한 운치가 부족하다. 이것이 구양수, 소식의 경지에 미치지 못한 점이다. 준암, 형천은 큰 규모가 손지만 못하고 뛰어나고 민첩한 재주가 양명만 못하지만 체재는 더 정밀하다. 그러나 요컨대 방효유, 왕수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명나라의 시인 중에 예를 들어 서창곡(徐昌穀 서정경(徐禎卿)), 고자업(高子業 고숙사(高叔嗣))은 비록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과 서로 화응(和應)하기는 하였으나 그 타고난 재주가 본디 당나라 시인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룩한 경지가 당대에 매우 출중하였다. 서창곡은 기풍과 수려함이 뛰어났고 고자업은 그윽하고 담박함이 뛰어났는데, 고자업은 성정(性情)에 있어 더욱 근사하였다. 이 밖에 당응덕(唐應德 당순지(唐順之)), 채자목(蔡子木 채여남(蔡汝楠)) 같은 이들도 모두 당나라 시를 배웠으니, 이들의 시는 온화하고 한가하고 고요하여 목청 높여 부르짖거나 과격하게 특이함을 추구하는 습성이 없었다.
고자업의 시는 은은하고 질박하고 심오하고 온아(溫雅)하니, 비록 말은 간단한 듯하나 맛이 실로 깊다. 그리고 그 빛이 어두우면서도 소리가 맑아서 독자로 하여금 반복하여 읊조리기를 그치지 못하게 하니, 만약 당나라 때에 있었다면 그도 명가(名家)가 되었을 것이다. 일찍이 그의 자서(自序) 몇 편을 읽어 본 적이 있는데 대체로 그의 시와 비슷해서 매우 좋아하고 많이 얻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감주(弇州)의 무리가 비록 공동(空同 이몽양(李夢陽))을 추앙하는 것 같기는 하나 그들의 논의를 보면 늘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이는 공동이 시어를 골라내고 다듬는 노력이 미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보건대, 공동의 장점은 거칠고 혼연(渾然)하며 고집스럽고 질박한 것으로, 이는 바로 시어를 골라내고 다듬는 노력이 미진한 까닭에 참된 기운이 그래도 다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감주 등 여러 사람의 경우는 헤아리기를 공교롭게 하고 다듬기를 정밀하게 할수록 참된 기운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도리어 공동보다 못하게 된 까닭이다.
하대복(何大復 하경명(何景明))은 타고난 자질이 온아(溫雅)하였다. 그래서 비록 옛것을 배운다고 자처하기는 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처럼 괴벽하고 과격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시가 비록 진지하고 뛰어남이 부족하기는 하나 기상이 넓고 평탄하며 온화하고 전아(典雅)하여 그래도 시인으로서의 풍도가 있었다.
헌길(獻吉 이몽양(李夢陽))은 사람들에게 당나라 이후의 글을 읽지 말도록 권하였는데, 이는 실로 너무나 협소하고 비루한 견해이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작법을 배우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괜찮다. 이우린(李于鱗 이반룡(李攀龍))의 무리는 시를 지을 때에 전고를 사용함에 있어 당나라 이후의 말은 쓰지 말도록 금지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가소롭다. 시를 짓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성정을 풀어내고 사물을 묘사하되 생각과 느낌이 닿는 것마다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한 일과 거친 일, 아담한 말과 속된 말도 가려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고금을 구별한단 말인가. 이우린의 무리는 옛것을 배움에 있어 애당초 정신적으로 오묘한 이해와 깨달음이 없이 그저 언어를 본뜰 뿐이었다. 그래서 당나라의 시를 배우려고 하면 당나라 사람의 시어를 사용해야 하고 한(漢)나라의 문장을 배우려고 하면 한나라 사람의 문자를 사용해야 했으니, 만약 당나라 이후의 전고를 사용한다면 그 말이 당나라의 시어와 같지 않을 듯했다. 그 때문에 서로 이처럼 경계시키고 금지한 것이니, 이들에게 어찌 진정한 문장이 있겠는가. 원미(元美 왕세정(王世貞))도 처음에는 이 경계를 지키다가 속고(續稿)에 이르러서는 다 그렇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만년에 식견이 진보한 데다 형세상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사이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이 엮은 《기아(箕雅)》의 목록을 보니 이규보(李奎報)의 문장을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고 칭찬하였는데 내 생각에 그 논의는 매우 옳지 못하다. 이규보의 시는 동방에 명성을 떨친 지가 오래되었으니, 여러 선배 공(公)들도 모두 따라 미칠 수 없다고 추앙하였다. 이는 그의 재능이 민첩하고 축적된 식견이 풍부하여 많이 짓고 빨리 짓기를 겨루자면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조어(造語) 능력이 있어 과거 사람들의 언어를 답습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았으니, 또한 시인으로서의 재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학식이 비루하고 기상이 용렬하여 시의 격조가 비천하고 잡되며 언어가 잗달고 의미가 천박하였으니, 고체시(古體詩), 율시, 절구 수천 수백 편 가운데 한 자 한 구도 맑고 깨끗하며 고상하고 광활한 의미를 담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기뻐하며 ‘남들이 쓴 적이 없는 말’이라고 한 것은 대체로 다 서응(徐凝)의 나쁜 시와 같은 부류이니, 참으로 엄우(嚴羽) 경(卿)의 이른바 “저열한 시마(詩魔)가 폐부에 들어간다.”라는 경우이다.
그중 몇 구를 들어 보면, 예컨대 “솔과 대가 사원 가득 중은야 부귀하고, 안개 끼고 달빛 비친 강가의 절 운치 있네.[滿院松篁僧富貴 一江煙月寺風流]”, “땅 위 솟은 대 뿌리는 굽어진 용의 허리, 창 앞의 파초 잎은 기다란 봉황 꼬리.[竹根迸地龍腰曲 蕉葉當窓鳳尾長]”, “호수는 잔잔하여 한 가운데 달 비치고, 포구는 넓어서 밀물 한껏 들이켜네.[湖平巧印當心月 浦濶貪呑入口潮]” 같은 구들은 모두 사람들이 즐겨 읊조리며 뛰어나고 재치 있다고 평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을 살펴보면 시골 학동이 익히는 《백련초(百聯鈔)》의 어구와 거의 흡사하니 어찌 숭상할 가치가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그가 풍부하고 민첩한 글로 독장치는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외경하여 심복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 글을 논할 적에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3, 4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감히 이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시만 가지고 말한 것이고 다른 문장의 경우는 깊이 논할 가치가 더욱 없으니, 비록 사(詞), 부(賦), 변려문(騈儷文) 중에 취할 만한 것이 상당히 있기는 하나, 만약 그것들이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 여러 사람들의 작품을 압도하여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된다고 평한다면 수긍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문장을 논할 적에 누구 한 사람이 으뜸이라고 단정하기는 실로 어렵다. 그러나 문장은 목은을 대가로 추앙해야 하고 시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을 훌륭한 시인으로 추앙해야 한다. 목은은 비단 문장으로만 대가인 것이 아니라 시도 규모가 크고 호방하여 그 기상이 볼 만하니, 이규보가 도량이 좁은 것과는 같지 않다.
읍취헌은 비록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의 글을 배우기는 하였으나 타고난 재주가 매우 높아 그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문의 운치가 맑고 혼연하며 풍격이 호탕하고 분방하였으며, 흥이 생긴 대목에 이르러서는 천진함이 난만히 드러나고 기운이 가득 흘러넘쳐 사람의 힘으로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는 황정견, 진사도의 문장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일찍이 읍취의 시가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와 꼭 닮았다고 생각하였으니, 안평대군의 글씨는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을 본보기로 삼았으면서도 필획이 이왕(二王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과 같았고, 읍취의 시는 황정견, 진사도의 시를 배웠으면서도 분위기와 정취가 당나라의 시인을 닮았다. 이는 모두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읍취의 시 중에 예컨대 “바람이 나뭇잎을 솨아솨아 불어댈 제, 아내에게 술을 맡겨 조금씩 치게 하네.[風從木葉蕭蕭過 酒許山妻淺淺斟]”, “흐린 봄날 비 올 듯해 새들 서로 지저귀고, 늙은 나무 무정한데 바람 홀로 서글퍼라.[春陰欲雨鳥相語 老樹無情風自哀]”, “성난 폭포 하늘 저편 메아리를 울리고, 근심 어린 구름이 해 주변에 끼려 하네.[怒瀑自成空外響 愁雲欲結日邊陰]”, “깊은 밤 눈썹달이 빛을 내기 시작하고, 고요한 산 차가운 솔 절로 소리 내누나.[夜深纖月初生影 山靜寒松自作聲]”, “한 해 중에 가을 흥취 남산 빛이 좋은데, 외로운 밤 슬픔 속에 이지러진 달이 떴네.[一年秋興南山色 獨夜悲懷缺月懸]”, “벗은야 스스로 청운에 올랐는데, 늙은 나는 외로이 황국 곁에서 읊조리네.[故人自致靑雲上 老我孤吟黃菊邊]”, “비 갠 뒤라 바다와 산 빛깔 모두 빼어나고, 봄이 오니 새들의 소리 절로 화기롭네.[雨後海山皆秀色 春還禽鳥自和聲]”, “돛은 불룩 바람 안고 밀물 함께 올라오고, 어부 집들 몰린 언덕 기울어지려 하네.[風帆飽與潮俱上 漁戶渾臨岸欲傾]” 같은 말들은 비장하고 노련하고 힘이 있으며 맑고 산뜻하고 매우 뛰어나니,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같은 것 속에 어찌 한마디라도 이와 같은 말이 있겠는가.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시는 비록 풍격이 읍취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나 원만하고 화기롭고 전아하며 의취가 노성(老成)하여 당대의 맞수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의 오언고시 중에는 왕왕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따라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우리 조선의 시가 목묘(穆廟 선조(宣祖)) 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시의 도가 쇠한 것이 실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목묘 이전에는 시를 짓는 이들이 대체로 다 송(宋)나라의 시를 배웠기 때문에 격조가 대부분 전아(典雅)하지 못하였으며 음률도 간혹 조화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요컨대 질박하고 진실하며 중후하고 노련하면서도 힘이 있었지 곱게 겉치장을 하거나 화려하게 문식하지는 않아서 각자 일가언(一家言)을 이루었다. 목묘 때에 와서 문사(文士)가 많이 나오고 당나라의 글을 배우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으며 중국의 왕세정(王世貞), 이반룡(李攀龍)의 시도 차츰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비로소 그들의 시를 사모하고 모방하여 정교히 다듬었으니, 그 이후로는 문사들이 따르는 작법이 한결같고 음조가 서로 비슷해져서 천진함이 더 이상 보존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목묘 이전의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나 목묘 이후의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좀처럼 알 수가 없는데, 이것이 시의 도가 성하고 쇠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점이다.
노소재(盧穌齋 노수신(盧守愼))의 시는 선묘(宣廟) 초기 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으니, 무게 있고 함축적이며 노련하고 힘이 있으며 드넓고 비장한 것이 두보(杜甫)의 풍격을 깊이 체득하였다. 그 뒤에 두보를 배우는 이들 중에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으니, 그는 공력을 많이 들인 끝에 우환 속에서 터득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노인은 19년 동안 섬에서 오직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만 지었으면서도 그 의리를 그다지 잘 받아들여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나왔을 때에 기개와 절조가 태반은 사그라져 버린 것 같다. 다만 두보의 시를 배운 것만이 이처럼 좋았던 것이다.
세상에서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소재(穌齋),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을 병칭하지만 세 사람의 시가 실은 같지 않다. 호음은 글의 짜임과 수사가 상당히 서곤체(西崑體)와 흡사하나 풍격이 소재만 못하고, 지천은 힘차고 기발한 것이 황정견(黃庭堅), 진사도(陳師道)에게서 나왔으나 활달함이 소재만 못하니, 소재가 가장 낫다고 할 것이다.
간이(簡易 최립(崔岦))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람들은 시가 그의 본색이 아니라고 하나 요컨대 그의 시도 소재, 지천과 같은 부류이다. 그의 시는 풍격이 강직하고 바탕의 운치가 깊고 두터운 것은 소재에 미치지 못하나 필력이 힘 있는 것은 그보다 낫다. 그리고 그 뛰어난 부분은 성음이 마치 금석(金石) 악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맑게 울리는 것이 요컨대 후세의 시인들이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일찍이 들으니, 권석주(權石洲 권필(權韠))가 간이를 만나 묻기를, “지금 문장에는 실로 우리 어른이 계십니다만 시에 있어서는 누구를 독장친다고 추앙해야 하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는 그 뜻이 간이가 필시 자신을 인정해 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간이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이르기를, “늙은 이 몸이 죽은 뒤에는 누가 독장칠지 알 수 없네.” 하였다. 이에 석주가 무안하여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으니, 간이는 자부심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명(明)나라 문장의 폐단은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에게서 시작되어 왕세정(王世貞), 이반룡(李攀龍)에게서 깊어지고 종성(鍾惺), 담원춘(譚元春)에게서 전환 개변되어 극도에 달하였다. 근래에 전목재(錢牧齋 전겸익(錢謙益))의 문장을 보니 이에 대해 논한 것이 매우 상세하였는데, 그 본말을 미루어 밝히고 폐단의 핵심을 지적한 말이 대부분 절실하고 엄격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아도 수긍할 만하였다.
근래에 목재(牧齋)의 《유학집(有學集)》을 보니 그는 역시 명나라 말기의 제일가는 대가였다. 그의 글은 본보기로 삼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대체로는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에게서 나왔으니, 손 가는 대로 써서 겉치레에 구애되지 않은 것은 상당히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과 비슷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 감개하는 가운데 기풍이 돋보이는 것은 또 구공(歐公)과 비슷하다. 다만 호방함과 자유분방함이 지나쳐 이따금 협기(俠氣)가 있고 또한 이따금 들뜬 감정이 있으며 전아하고 중후하며 엄중한 운치가 부족하고 또 괴이하고 불합리한 말이 상당히 섞인 것이 품격 높은 시에 큰 누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그 초탈하고 자연스러워 이것저것 주워 모으거나 관습에 속박당하지 않아서 감주(弇州 왕세정), 태함(太函 왕도곤(王道昆))의 무리처럼 한결같이 남의 작품을 표절하지 않은 점이 좋았다.
목재의 비문은 한퇴지(韓退之), 구양수의 작법을 완전히 본받지는 않았으니, 그 가운데 대작은 사실을 서술하고 의론을 제시하되 경위(經緯)를 착종하고 묘사를 잘하여 요컨대 사정을 다 밝히고 경색(景色)을 그대로 묘사하였으며 또 때로는 육조(六朝) 시대의 어구를 섞어 글을 이루었으니, 나름대로 일가(一家)의 문체가 되었다. 예를 들어 〈장익지묘표(張益之墓表)〉와 〈진우모묘지(陳愚母墓誌)〉 등 몇 편은 기풍과 감정의 기복이 구공(歐公)의 글과 매우 흡사한데, 이는 명나라의 문장 중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목재의 비문 중에 서울을 말한 곳은 대부분 장안(長安)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온당치 못하다. 장안은 본디 관중(關中)의 한 작은 고을인데 한(漢)나라, 당(唐)나라 때에 그곳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서울이라 칭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서울은 연(燕) 지방인데 어찌 다시 관중의 한 작은 고을의 이름으로 그곳을 일컬을 수 있겠는가. 시문에 옛말을 인용할 경우 가차하여 써도 되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지명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시는 그나마 괜찮지만 문은 더욱 안 되고 다른 문장은 그나마 괜찮지만 비문처럼 일을 서술하는 문장은 더욱 안 된다.
주자의 〈장위공행장(張魏公行狀)〉, 왕감주(王弇州)의 〈서계행장(徐階行狀)〉, 전목재(錢牧齋)의 〈손승종행장(孫承宗行狀)〉은 모두 분량이 2권이나 되는데, 이는 전에 없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서는 오직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사마공행장(司馬公行狀)〉이 상당히 길었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길지는 않았다. - 〈장위공행장〉은 130판(板)이고 〈손승종행장〉은 111판이다. -
모녹문(茅鹿門)이 구양수의 문장 가운데 〈장응지묘표(張應之墓表)〉에 대해 비평하기를, “공포의 제도에 따라 관찰추관(觀察推官)으로서 참군(參軍)으로 옮겨 양무현(陽武縣)을 맡고 또 미주(眉州)의 통판(通判)으로서 들어가 원외랑(員外郞)이 되고 다시 양무현을 맡았으니, 당시에 직책을 중복하여 맡기기를 이와 같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공포의 관제에는 계관(階官)이 있고 직사관(職事官)이 있다. 지금 장응지가 역임한 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그는 처음에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옮겨 양무현을 맡고 미주의 통판이 되었다가 또 누차 옮겨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이 되어 다시 양무현을 맡았는데, 저작좌랑과 원외랑은 모두 계관이고 통판과 지현(知縣)은 직사관이다. 그가 통판이 되고 지현이 되었을 때에 본디 좌랑, 원외랑의 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지 들어가 원외랑이 되고 또 원외랑에서 나와 양무현을 다스린 것이 아니다. 녹문의 “들어가 원외랑이 되었다.”는 말은 이 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말인 것 같다. 공포 사람의 비문에서 이력을 서술한 대목을 볼 적에는 계관과 직사관을 분별하여 혼동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한유(韓愈)의 문장인 〈공사훈묘지(孔司勳墓誌)〉에 이르기를, “전 부인을 시부모의 묘역에 장사 지냈는데 점쟁이가 올해는 합장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점쟁이의 말을 따라 합장하지 않았다.[前夫人從葬舅姑兆次 卜人曰 今玆歲未可以祔 從卜人言 不祔]” 하였는데, 모녹문이 비평하기를, “전 부인을 시부모의 묘역에 미처 합장하지 못한 까닭을 덧붙여 기록하면서 사훈과 합장한 곳을 상세히 밝히지 않았으니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본디 글의 뜻은 ‘전 부인이 처음 죽었을 때에 시부모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지금 사훈과 합장해야 하는데 점쟁이가 뭐라고 했기 때문에 합장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녹문은 ‘점쟁이[卜人]’ 이하도 모두 시부모의 묘역에 장사 지낼 때의 일로 오인하고 도리어 한공(韓公)이 글을 엉성하게 쓰지 않았나 의심하였으니 정말 가소롭다.
녹문의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에 논하기를, “세상에서 한유의 문장을 논하는 이들은 모두 맨 먼저 비문을 일컫는다. 그러나 나는 한공의 비문은 대부분 기괴하고 음험하여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서사법(敍事法)을 체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기풍에 혹 힘차고 자유분방함이 부족한 것이다. 구양공(歐陽公)의 비문의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의 정수를 체득했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녹문의 이 논의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비문과 역사서의 전기가 비록 모두 서사문(敍事文)에 속하기는 하나 그 기본 성격은 실로 같지 않다. 게다가 한공의 문장은 세상에 이름이 날 정도로 훌륭하여 《사기》의 작법을 모방할 필요가 없는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한공은 비문을 지을 적에 오로지 엄격하고 간략하며 깊고 중후하며 예스럽고 심오함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상서(尙書)》, 《춘추좌전(春秋左傳)》을 근본으로 한 것이다. 금석문(金石文)은 영원히 이것을 종조(宗祖)로 삼아야 할 것이니 어찌 굳이 《사기》의 기풍을 요구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한공이 일을 서술한 부분은 왕왕 나름대로 한 가지 특색이 있는데, 다만 한결같이 문장을 유창하게 구사하다가 간결하고 엄격한 문체를 손상하는 결과를 초래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구공으로 말하면 문체가 본디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비문에 일을 서술한 것이 대부분 《사기》의 기풍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범으로 말하면 또한 《사기》, 《한서》의 문체를 완전히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한공의 문장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한유의 비문은 양식이 실로 극히 간결하고 엄격하여 본받을 만하나 그 자구는 이따금 너무 무참하게 분할하거나 아주 생소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조성왕비(曹成王碑)〉는 전편이 모두 그러하여 후인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니, 녹문(鹿門)의 비판도 일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오로지 《사기》, 《한서》를 기준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동방의 문인들은 비문을 지을 적에 대체로 한유의 비문에 있는 자구, 예를 들어 “때를 벗기고 가려운 데를 긁다.[櫛垢爬痒]”, “선조의 훌륭한 공덕을 품다.[胚胎前光]” 같은 말들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만 전편의 양식은 실로 한유의 비문과 같지 않다. 이는 마치 성긴 베로 만든 치마에 비단실로 수놓은 천 조각을 붙여 놓은 것과 같으니 어찌 어울리겠는가.
한유의 문장 가운데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序)〉는 일을 서술한 것이 극히 복합적이니, ‘남제운이 구원하러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南霽雲乞救]’부터 ‘이러한 다짐에 대한 징표이다[所以志也]’까지의 한 단락은 노인이 한 말이고, 그 아래에 삽입된 ‘정원 연간에[貞元中]’ 한 단락은 또 한공(韓公)이 일찍이 직접 보았던 것을 스스로 기술하여 그 일을 증명한 것이며, 그 아래에 또 이어진 ‘성이 함락되자[城陷]’ 한 단락은 또한 노인의 말이다. 그리고 ‘장순(張巡)은 키가 일곱 자 남짓이고[巡長七尺餘]’부터 ‘나이가 마흔아홉이었다[年四十九]’까지의 한 단락은 모두 장적(張籍)이 우숭(于嵩)에게 진술한 것이고, ‘우숭은 정원 연간 초에[嵩貞元初]’ 이하는 또 장적이 스스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장적이 말하였다[張籍云]’ 세 글자로 맺은 것이니, 그렇게 쓰지 않으면 누구의 말인지 모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주제별로 서술하면서 서로 의미를 보충해 주는 내용이 거듭 나오되 모두 지극한 법도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사기》, 《한서》의 오묘한 부분으로 후인들이 참조하여 연구해 보아야 할 점이다. 그중에 ‘성이 함락되자’ 한 단락은 독자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기가 매우 쉽다. 일찍이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이 “이는 당연히 노인의 말이다.”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러하다.
한유의 문장 가운데 〈공좌승묘지(孔左丞墓誌)〉 같은 것은 역임한 벼슬과 행한 일에 대한 서술이 매우 상세하면서 그 사람됨에 대해서는 도리어 상세하지 않아 간략한 것 같다. 그러나 명(銘)에 이르기를 “흰 낯빛 큰 키에, 웃음 적고 과묵했네.[白而長身 寡笑與言]” 하였는데, 이 여덟 자를 보면 공공(孔公)의 용모와 기상을 또렷이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서문에 공공을 만류해 달라는 한공(韓公)의 상소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절개를 지키며 빈궁하게 살았고 논의가 올바르고 공평하였습니다.[守節淸苦 論議正平]”, “나라를 걱정하느라 집안을 잊었으며 마음을 쓰는 것이 극진하였습니다.[憂國忘家 用意至到]” 하였으니, 그 사람됨의 대체를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어 실로 더 이상 번거롭게 서술할 필요가 없다. 〈왕홍중지문(王弘中誌文)〉에서도 명(銘)에 그 사람됨을 상세히 서술하기를, “기상이 예리하고 방정했으며, 게다가 굳세고 엄격했으니[氣銳而方 又剛而嚴]”, “다른 사람 사랑하고 성심 다하기, 싫증 나 그만둔 적이 없으니[愛人盡己 不倦而止]”, “벗과 함께 있을 적엔, 여인처럼 유순했네.[與其友處 順若婦女]” 하였는데, 왕홍중의 자품과 행실이 여기에 모두 드러나 있다. 이들은 모두 본받을 만하다.
한유의 비문 가운데 〈조성왕비(曹成王碑)〉, 〈평회서비(平淮西碑)〉, 〈오씨묘비(烏氏廟碑)〉, 〈원씨묘비(袁氏廟碑)〉, 〈전홍정선묘비(田弘正先廟碑)〉 등의 글은 모두 ‘야(也)’ 자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상서(尙書)》를 본받은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금석문자 중에는 그와 맞먹을 만한 것이 결코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한유의 〈평회서비〉, 구양수(歐陽脩)의 〈농강천표(瀧岡阡表)〉가 그런 경우이다.
이공동(李空同 이몽양(李夢陽))의 글은 좌씨(左氏)와 사마천(司馬遷)을 본받았으니, 비록 모방한 것이 지나치게 드러나고 자신의 것으로 녹여낸 것이 충분치 않아서 전편 중에 가작(佳作)이랄 것이 드물기는 하나 왕왕 고아(古雅)하고 질직(質直)하고 굳세어 한두 가지 좋은 곳이 있다. 일찍이 우옹(尤翁)이 그의 글을 상당히 칭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우옹은 명나라 문장에 익숙지 않은 상황에서 일찍이 그의 〈주자실기서(朱子實記序)〉를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공동의 이 글은 의론이 좋은 데다 체재도 법도가 있으니, 참으로 가작이다.
나는 또 일찍이 ‘두보(杜甫)의 글은 비록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 통창(通暢)하지 않기는 하나 그 기상과 격조는 또한 고풍스럽고 힘차서 좋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공손대랑검무서(公孫大娘劍舞序)〉는 겨우 백여 자에 불과한데도 기복과 변화가 많으며 감개가 물씬 배어 나고 기상이 거침없는 것이 태사공(太史公)의 글과 매우 흡사한데, 이는 재주가 비슷한 까닭이다. 뒤에 보니 우옹도 자미(子美 두보)의 문장이 매우 좋다고 하였는데, 우옹은 문장에 있어 특이한 것을 숭상하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우옹은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문장을 자주 추앙하여 동방에서 제일간다고 하였다. 한번은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에게 말하기를, “계곡은 구양수, 소식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 명나라 300년을 통틀어 그와 견줄 만한 문인이 없었으니, 양명(陽明)은 비록 과장된 글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하나 실상은 그와 같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 의론은 옳지 않은 것 같다. 계곡의 문장은 전아(典雅)하고 통창하여 문사와 조리가 모두 갖추어지고 체재가 구차하지 않아서 우리 동방에 있어서는 실로 대가이다. 그러나 그 기상과 격조 및 재주와 능력은 사실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였다. 명나라 사람 중에 공동(空同), 감주(弇州)의 유파로 말하면 실로 한유, 구양수의 맥을 바르게 이어받지 못하였으나 손지(遜志), 양명(陽明), 준암(遵巖), 형천(荊川) 등 몇몇 대가는 모두 경술에 대한 조예가 깊고 이치에 밝아 규모가 크고 깊이가 있으며 고상하고 힘있고 간결하였으니, 모두 계곡이 따라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양명은 참으로 글을 과장되게 쓴 부분이 있기는 하나, 그는 타고난 재주가 본디 높아 문장 구사에 뛰어났던 것이니 부질없이 장황하게 벌여 쓰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옹은 사실 명나라의 문장을 많이 보지 못하여 “명나라 사람들은 모두 고문의 껍데기만 배웠다.”고 싸잡아 평가하고 준암, 형천의 유파가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계곡의 수준은 바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계곡의 문장은 구성과 법칙, 의리와 정취가 비록 송(宋)나라의 대가들과 가깝기는 하나 지나치게 평탄하고 완만한 것이 흠이다. 공포의 문장 가운데 예를 들어 구공(歐公)의 문장은 비록 평탄하고 완만하기는 하나 그의 상소와 차자는 이해(利害)에 대한 지적과 사정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고 절실하여 골수에 사무친 나머지 임금으로 하여금 그것을 듣고서는 마음을 움직여 깨닫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서(序), 기(記), 비문, 제문 등의 글은 기풍이 힘차고 수려하며 음조가 호탕해서 깊은 생각에 잠겨 감개한 마음으로 감탄해 마지않게 하고 왕왕 숨이 끊길 듯 목메게 하는 부분도 있으니, 이것이 남들이 따라 미칠 수 없는 점이다. 그런데 계곡의 글은 한결같이 평탄하고 완만하기만 하고 격하거나 절실한 부분이 전혀 없어서 소장을 지으면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비문을 지으면 생동하는 기풍이 없고 제문을 지으면 구슬픈 오열을 자아내는 맛이 없다. 이는 그의 타고난 자품이 너그럽고 평탄한 데다 문장을 짓기도 손쉽게 하여 깊은 사색을 기울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룩한 경지가 그러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글을 높여 원숙하고 혼연(渾然)하여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을 전혀 지적해 내어 의론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그가 이룩한 경지에 대해서만 하는 말이라면 괜찮으나 만약 옛사람의 글과 견주어 본다면 나른하여 미치지 못함을 잘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어찌 의론할 점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계곡의 비문은 비록 초연한 음조가 부족하기는 하나, 일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는 번다하고 간략한 정도가 적당하고 인물의 훌륭한 점을 칭찬한 부분도 철저하게 잘 헤아려 하였으니, 이 때문에 그의 비문이 훌륭한 것이다.
간이(簡易 최립(崔岦))의 문장은 계곡이 충분히 논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문장을 계곡의 문장과 비교해 보면 수준이 높은 곳은 계곡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수준이 낮은 곳은 계곡이 그런 글은 짓지 않을 정도로 낮으니, 요컨대 수준이 엇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간이집(簡易集)》 가운데 중국에 올린 주문(奏文)은 매우 좋다. 이러한 글은 무엇보다 상투를 그대로 답습하기가 쉽고 그것을 피하려면 또 사정이 두루 상세히 언급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게 되는데, 간이의 주문들은 실정을 진술한 것이 간절하고 곡진한 데다 문장 구사도 고아(古雅)하고 간결하여 한마디도 쓸데없이 들어가거나 천박하고 속된 말이 없다. 이를 보면 그가 재주가 높고 공부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중국 사람들이 탄복하여 몹시 칭찬한 것도 당연하다.
우옹(尤翁)이 이르기를, “간이의 비문은 소편(小篇)은 좋으나 대편(大篇)은 좋지 않다.” 하였는데, 정말 그렇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장은 전체적인 모양새의 혼연(渾然)함이 계곡의 문장만 못하나 짜임새의 정밀함은 그보다 나으며 계곡의 사부(詞賦)와 택당의 변려문(騈儷文)은 또 서로 맞먹을 만하니, 옛사람에 견주어 보면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과 매우 흡사하다. 근세의 채호주(蔡湖洲 채유후(蔡裕後))는 늘 장유(張維), 이식을 일컬으며 이르기를, “택당의 시가 계곡의 시보다 낫다.” 하였는데, 이 점도 자후(子厚 유종원), 퇴지(退之 한유)와 비슷하다.
택당의 글은 너무 상세하고 치밀하여 문자 이면의 여지(餘地)를 볼 수 없는데, 이는 계곡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그러나 상소, 차자 등 일을 논한 글로 말하면 정밀하고 상세하며 절실하고 깊이가 있어서 계곡의 글이 평범할 뿐 격하게 논파하는 곳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동시대에 나란히 이름이 났는데, 지금까지 논자들의 평이 서로 엇갈려 왔다. 당시 문단의 논의는 상촌을 상당히 우위에 두었으니, 계곡이 쓴 두 공의 문집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근세에 이르러 우옹이 비로소 월사를 우위에 두었는데, 이는 상촌은 옛 수사법에 비해 꾸미는 노력을 많이 기울인 데에 반해 월사는 마음 가는 대로 풀어내어 곡절을 묘사한 흥취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문사를 중시하는 이들은 상촌을 우위에 두고 이치를 위주로 하는 이들은 월사를 높이 산 것이니, 이는 실로 각기 주안점이 있는 것이다.
상촌은 타고난 재주가 민첩하고 묘하나 성품의 깊고 두터운 점이 부족한 데다 제자(諸子)와 《전국책(戰國策)》을 배우고 또 명나라의 대가들을 좋아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문장은 뛰어나게 아름다운 기품이 있고 광채가 찬란한 반면에 꾸밈없이 진실한 뜻과 의미심장한 맛이 부족하다. 월사는 타고난 재주가 아름답고 넉넉하나 청고(淸高)함과 간결함이 부족한 데다 옛사람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 문장을 짓기를 매우 쉽게 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문장은 변화가 있고 통창하여 난삽하고 궁색한 모습이 전혀 없는 반면에 체재에 엄격함이 부족하고 격조가 고아하지 않다. 이 두 문장가의 장단점은 대체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선배를 따르겠다고 한 공자의 뜻을 가지고 보면 우옹의 논의가 상당히 그에 가깝다 할 것이다.
신최 계량(申最季良 신최는 신흠의 손자)의 문장을 혹자는 상촌의 문장보다 낫다고 하는데, 지금 그의 원론(原論)의 여러 편을 살펴보니 풍부하고 웅대한 것이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글들의 경우는 명나라 사람들의 기습(氣習)을 벗지 못하였으니, 요컨대 물려받은 가법(家法)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가 그 조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동회(東淮 신익성(申翊聖))는 명나라의 문장을 배웠으나 너무 심한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문장이 상당히 힘이 있고 간결한 장점이 있는 것이니, 비록 창작력의 민첩함과 묘함이 상촌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나 간결함과 단정함은 도리어 좀 낫다. 동시대의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도 명나라의 문장을 배웠는데, 그는 오로지 난삽한 문체와 표절을 일삼는 것만 답습하여 쓸데없이 번다하고 장황할 뿐 전혀 요점이 없으니 동회보다 훨씬 못하다.
동회 부자(父子)는 시재(詩才)가 모두 신계량(申季良 신최(申最))보다 못하다. 시는 더욱 좋지 못하여 조화로운 성음이 부족한 데다 기력도 없으니, 그의 문집 가운데 고시, 율시는 좋은 작품이 전혀 없다. 동회가 다소 낫기는 하나 그래도 상촌에 미치지는 못한다.
정동명(鄭東溟 정두경(鄭斗卿))은 말세에 나와서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고시와 악부시(樂府詩)가 본받을 만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가(歌), 행(行) 등 장편은 이백(李白), 두보(杜甫)를 따르고 율시, 절구 등 근체시는 성당(盛唐)의 작품을 모방하여 만당(晩唐)의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을 전범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으니 위대하다. 그러나 그는 재주와 기력이 실로 읍취(挹翠 박은(朴誾)) 등 여러 공에 미치지 못한 데다 일찍이 세심히 독서하고 시(詩)의 도(道)를 깊이 탐구하여 깊은 사색 속에 스스로 터득하고 확충, 변화시켜 본 적이 없이 그저 한때의 의기(意氣)로 옛사람들의 자취를 따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 시가 비록 청신(淸新)하고 뛰어나서 세속의 악착스럽고 진부한 기운이 없기는 하나 정한 말과 묘한 생각이 옛사람의 심오함을 엿보지 못하고 분방한 필치가 또 시가(詩家)의 변화를 다 구현하지 못하였으니, 요컨대 그가 이룩한 경지는 석주(石洲 권필(權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동명의 시가 유속(流俗)에서 높이 평가받기 쉬웠던 것은 그가 평소에 《마사(馬史)》를 즐겨 읽은 데다 옛 악부시에 뜻을 두어 시가(詩歌)를 지을 적에 그 말을 잘 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세상 사람들이 익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언뜻 보았을 때에 이목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옛사람의 이른바 ‘둔한 도적’이라는 것이지 흰 여우 갖옷을 훔쳐 내는 솜씨가 아니었다.
《좌전(左傳)》에 관계(官階)를 낮추는 일을 물은 정정(程鄭)의 질문에 대해 연명(然明)이 논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올라서 관계를 낮추려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정정에게는 있지 않으니 도망할 징조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병이 있어 죽음을 앞두고 근심하는 것이다.[夫旣登而求降階者 知人也 不在程鄭 其有亡釁乎 不然 其有惑疾 將死而憂也]” 하였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만약 정정에게 있지 않다면 그 집안이 장차 도망하는 화가 있을 것이다.[若不在程鄭 其家將有出亡之釁乎]” 하였는데, 이 주는 잘못된 것 같다. 내가 살펴보건대, ‘부재정정(不在程鄭)’은 위에서 말한 지혜로운 사람이 정정 같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이니, 지금 관계를 낮추는 일을 물은 것은 그 자신이 장차 도망할 징조가 있어 그런 것에 불과하고 그렇지 않으면 장차 죽게 될 것이란 말이다. 이는 위 글의 “그는 장차 죽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과도 서로 호응하는 것으로, 도망하는 것과 죽는 것이 모두 정정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 어찌 다시 그의 집안을 말했겠는가. 주를 낸 사람은 ‘부재정정’ 한 구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이와 같이 빗나가게 한 것이니 따를 수 없다.
옹규(雍糾)의 처는 남편이 자신의 아비를 교외의 연향(宴享) 자리에서 죽이려는 것을 알고 제중(祭仲)에게 그 일을 고하였는데, 옹규는 그 때문에 모의가 실패로 돌아가 죽임을 당하였다. 노포계(盧蒲癸)의 처는 남편이 자신의 아비를 사당의 가을 제사 자리에서 죽이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일을 고하여 경사(慶舍)를 격동시켰는데, 경사는 그 때문에 결국 가서 화를 당하였다. 이 두 부인은 처한 상황이 서로 똑같았는데 대처하기는 정반대로 하였다. 내 생각에 이 두 부인의 입장에서는 다만 지극한 정성과 애통절박한 심정으로 남편을 만류하고 남편이 따르지 않으면 죽는 것이 마땅하지, 남편과 아비 사이에서 상황을 좌지우지해서는 결코 안 된다. 노포계의 처는 함정을 파 화를 재촉한 것이니 그러한 일은 더더욱 차마 해서는 안 된다.
《좌사(左史)》의 최저(崔杼)가 장공(莊公)을 죽인 일에 대한 전(傳)을 읽어 보면 동곽강(東郭姜)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장공, 가거(賈擧), 주작(州綽), 병사(邴師), 공손오(公孫敖), 봉구(封具), 탁보(鐸父), 양이(襄伊), 누인(僂堙), 신괴(申蒯), 신괴의 가신과 종멸(鬷蔑), 태사(太史) 2인, 동곽언(東郭偃), 당무구(棠無咎), 최성(崔成), 최강(崔强), 최저 등 모두 19인이고 그 자신도 부녀(婦女)의 재앙을 면치 못하였으니 두려워할 일이다.
《좌전》은 일을 서술한 것이 극히 간결하고도 묘한 부분이 있으니, 예를 들어 진(晉)나라의 장격(張骼)과 보력(輔躒)이 정(鄭)나라의 완야견(宛射犬)과 함께 초(楚)나라 군대에 가 도전한 일을 서술한 한 단락은 앞뒤의 곡절이 매우 많은데도 끝내 두 사람과 완야견의 이름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음 볼 때에는 어지럽게 뒤섞인 듯하나 자세히 음미해 보면 피차의 주객 관계가 모두 극히 분명하니, ‘모두 승거(乘車 문인들이 타는 편안한 수레)를 탔다’, ‘모두 자루에 걸터앉아 거문고를 탔다’, ‘모두 자루에서 투구를 꺼내어 썼다’, ‘모두 수레에서 내려 초나라 사람들을 손으로 쳐서 수레로 집어던졌다’, ‘모두 수레에 뛰어올라 활을 뽑아 들고 쏘았다’, ‘모두 웃었다’는 말은 모두 두 사람의 행동을 가리킨 것이고, ‘고하지 않고 수레를 내몰았다’,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는 말은 모두 완야견의 행위를 가리킨 것이다. 두 사람을 말할 때에는 다 ‘모두[皆]’ 자를 썼으므로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것이 두 사람임을 알 수 있고, 이것이 저것과 대가 되게 하였으므로 또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저것이 완야견임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일을 서술함에 있어 간결하고도 묘한 부분이다. 그리고 앞뒤로 여섯 개의 ‘모두[皆]’ 자를 여기저기 배치한 것이 또 매우 묘하다.
젊었을 적에 《좌전》의 “들어가 시를 읊기를, ‘땅속 길 안에 오니 즐거워 화목하네’ 하고[入而賦 大隧之中 其樂也融融]”, “나와서 시를 읊기를, ‘땅속 길 밖 나서니 즐거워 근심 풀리네’ 하였다.[出而賦 大隧之外 其樂也洩洩]”는 대목을 읽고는 이것이 일을 서술한 것이라 여기고 너무나 익살스럽다고 의심했다. 뒤에 비로소 두 ‘부(賦)’ 자에서 구두를 떼어야 하고 ‘대수(大隧)’ 이하의 18자는 읊은 시로 보아야 함을 깨닫고는 전에 품었던 의심이 대번에 풀렸다. 근래에 전목재(錢牧齋) 문집을 보니 이미 이 단락에 대해 논변한 것이 있었는데, 당시에 종성(鍾惺), 담원춘(譚元春)의 무리가 꼭 내가 어렸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이 글을 잘못 읽고서 경솔하게 감히 옛사람을 비평한 데에 대해 목재가 매우 명쾌하게 논변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옛사람의 문장은 거친 마음으로 읽고 지나쳐도 안 되고 함부로 비평을 해도 안 됨을 알게 되었다.
주 선생(朱先生 주희(朱熹))이 〈남헌(南軒)에게 준 편지〉에 정자(程子)의 문집을 교정하는 일과 관련하여 ‘질(姪)’과 ‘유자(猶子)’를 비교하여 논하기를,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여자가 형제의 자식을 일컬어 질(姪)이라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좌씨전(左氏傳)》에 ‘조카가 고모를 따라갈 것이다.[姪其從姑]’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풀이하였다. 그런데 반복하여 살펴보아도 끝내 남자가 형제의 자식을 일컬어 뭐라고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한서(漢書)》를 가지고 살펴보면, 이소(二疏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는 바로 오늘날 이른바 숙질간(叔姪間)인데 전(傳)에 부자(父子)라고 일컬었으니, 그렇다면 옛사람들이 곧바로 ‘자(子)’라고 일컬은 것은 한(漢)나라 사람들도 그러했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순박하여 혐의스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일컫는 것을 편안히 여겼던 것이다. 후대로 내려와서는 마음에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있게 되어 고모가 자신을 일컫는 말을 빌려 칭하게 된 것이니, 이것이 비록 옛 제도가 아니기는 하나 혐의스러운 것을 분별하고 미묘한 것을 밝히는 뜻이 있다.” 하였다. 내가 《마사(馬史)》의 〈전분전(田蚡傳)〉을 살펴보니, “위기(魏其)를 모시고 술을 마실 적에 무릎 꿇고 일어서고 하는 것을 마치 자질(子姪)처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볼 때 남자가 형제의 자식을 일컬어 질(姪)이라고 하는 것은 한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자의 문집에 질(姪)이라고 일컬은 근거가 될 수 있다. 주 선생이 위와 같이 말한 것은 어쩌면 우연히 이 글을 기억하지 못한 소치일 것이다. 다만 《한서》를 살펴보면 ‘질(姪)’이 ‘성(姓)’으로 되어 있는데, 어쩌면 《마사》에도 본디 ‘성(姓)’으로 되어 있던 것을 뒤에 글자가 비슷한 관계로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알 수 없다.
또 이 편지를 살펴보건대, 아래의 글에 “유(猶)는 곧 같다는 말이니, 그 뜻이 위의 글에 매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뚝 끊어 버려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만약 위의 글을 떼어 버리고 이것만 일컫는다면 세속의 헐후(歇後)한 말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헐후’의 뜻을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겠다. 내가 《야객총서(野客叢書)》를 살펴보건대 홍구보(洪駒父)가 이르기를, “세상에서 형제를 일러 ‘우우(友于)’라 하고 자손을 일러 ‘이궐(貽厥)’이라고 하는데, 이는 헐후어(歇後語)이다. 내가 역사서를 살펴보건대 동한(東漢) 이래로 이러한 말이 많이 쓰였으니, ‘이궐(貽厥)의 초기에 살면서’, ‘우우(友于)의 정이 더욱 두텁다’라느니, ‘색사(色斯)’, ‘혁사(赫斯)’, ‘측철(則哲)’ 따위의 말이 매우 많다.” 하였다. 또 육방옹(陸放翁 육유(陸游))의 《노학암필기(老學菴筆記)》를 살펴보건대, “한퇴지의 시에 ‘저녁에 좌천되어 조양 가는 길이 팔천[夕貶潮陽路八千]’이라 하고, 구공(歐公)이 이르기를 ‘이릉은 여기서 또 삼천이나 된다네[夷陵此去更三千]’ 하였는데, 이는 팔천 리, 삼천 리를 이르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헐후어라고 하는데 아니다. 《서경》에 ‘오복(五服)의 제도를 도와 이루되 오천에 이르게 하고’라 하였는데 그 주에 ‘오천 리’라고 하였으며, 《논어》에 염유(冉有)가 ‘사방 6, 7십이나 5, 6십 되는 나라’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도 ‘6, 7십 리’, ‘5, 6십 리’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설에 근거하면 ‘헐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우우(友于)’라고만 말하면 벗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이궐(貽厥)’이라고만 말하면 끼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혁사(赫斯)’라고만 말하면 혁연(赫然)한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고, ‘측철(則哲)’이라고만 하면 명철한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고, ‘팔천’, ‘삼천’이라고만 하면 팔천, 삼천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실제적인 일과 바른 뜻을 빠뜨리고 빈말만 하기 때문에 헐후하다고 하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유자(猶子)의 의미는 본디 상복의 규정은 형제의 아들을 자신의 중자(衆子)와 같이 한다는 말인데 지금 앞의 글 여섯 자가 없이 ‘유자’라고만 일컫는다면 ‘이궐’, ‘우우’의 부류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의 설이 이와 같은 것이다.
마영경(馬永卿)이 지은 《난진자(嬾眞子)》에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일을 기록하기를, “낙양의 소강절 선생은 술법(術法)이 높은 데다 지모(智謀)도 남보다 뛰어났다. 거처하는 곳에 ‘홀(笏) 모양의 구멍[圭竇]’과 ‘동이 창문[甕牖]’이 있었는데, 홀 모양의 구멍은 벽에 문을 뚫되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나게 하여 홀 모양으로 만든 것이고, 동이 창문은 깨진 동이의 입구를 방의 동서쪽 벽에 박고 붉은색 종이와 흰색 종이를 발라 해와 달을 상징한 것이다. 그 거처를 안락와(安樂窩)라고 하였다. 선생은 날씨가 따뜻한 봄이나 시원한 가을이면 안거(安車)를 타고 누렁소에 멍에하여 제공(諸公)의 집으로 놀러 나가곤 하였는데, 제공들은 선생이 오기를 바라서 각기 안락와 한 곳을 설치해 두었다. 선생이 그 집에 이르게 되면 노소, 부녀, 양천(良賤)을 막론하고 모두 문에서 맞이하여 안락와로 맞아들이고는 앞 다투어 노고를 여쭙는 한편 선생의 말을 들었는데, 집안의 고부간에, 동서 간에, 비첩(婢妾)들 간에 다툼이 있어 시일이 지나도 결판나지 않는 일을 스스로 선생 앞에 진술하면 선생이 낱낱이 분별하였다. 그러면 사람마다 각기 기뻐하여 술과 안주를 다투어 내오곤 하였다. 선생은 이에 며칠 동안 배불리 먹고 마시며 한집에서 놀다가 달포 만에야 돌아가곤 하였으니, 비단 선생의 지모가 오묘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낙양(洛陽)의 선비들의 기풍이 아름다웠음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일은 사마문중 집(司馬文仲)에게서 들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는 다른 책에 기록된 것과 대략 다 같으나 홀 모양의 구멍에 관한 일 및 동이 창문으로 해와 달을 상징한 것, 안거를 누렁소에 멍에한 것은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록하는 바이다.
당(唐)나라 배정유(裴廷裕)의 《동관주기(東觀奏記)》에, “선종(宣宗)이 시를 읊고 직학사(直學士) 소치(蕭寘)에게 주어 화답하게 하였는데, 소치가 수장(手狀)을 올려 사양하기를, ‘폐하의 이 시는 「계수는 나날이 천리를 흐르는데, 평소의 이내 회포 그 물에 부치노라.[桂水日千里 因之平生懷]」는 시구도 그보다 낫지는 못합니다.’ 하였다. 이튿날 선종이 학사(學士) 위오(韋澳)를 불러 이 두 구에 대해 묻자 위오가 아뢰기를, ‘공포 태자가령(太子家令) 심약(沈約)의 시입니다. 소치는 성상의 시가 청신(淸新)하여 심약의 시에 비길 만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불쾌해하며 이르기를, ‘남의 신하를 나에게 비길 수 있단 말이냐.’ 하더니, 은혜로운 대우가 점차 줄어들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위의 두 구는 바로 강엄(江淹)이 휴 상인(休上人 탕혜휴(湯惠休))의 〈원별시(怨別詩)〉를 본떠 지은 시인데 지금 심약의 시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위오가 잘못 대답했거나 아니면 배정유가 잘못 기록한 것일 것이다.
《동관주기》에, “남전위(藍田尉) 직홍문관(直弘文館) 유규(柳珪)가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자 급사중(給事中) 소방(蕭倣)과 정예작(鄭裔綽)이 논박하여 조서를 봉환(封還)하기를, ‘폐하께서 벼슬을 높이 매달아 두셨던 것은 본디 현량(賢良)을 기다린 것이었는데 경박한 자를 임명하셨으니, 이는 유능한 자를 권면하고 무능한 자를 징계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유규는 집 안에 있을 적에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는데 나라를 섬기면서 어찌 충절을 다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형부 상서(刑部尙書) 유중영(柳仲郢)이 동상합문(東上閤門)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려 ‘아들 유규는 재주와 기국이 용렬하여 외람되이 간원(諫垣)에 기용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효하다고 무함한다면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하고, 태자소사(太子少師) 유공권(柳公權)도 조카가 사실과 달리 비방당하였다고 쟁론하였다. 그러나 상은 유규의 관직을 면직시키는 한편 집 안에서 몸을 닦고 반성하게 하였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유씨의 가법(家法)은 당대에 으뜸이었는데 그 자제가 불효로 논핵을 당하였으니 불행하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유중영, 유공권이 모두 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쟁론하였으니, 그것이 사실과 달리 무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옛사람은 자손을 위해 억울함을 쟁론하기를 혐의스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사이 누구에게 《패해(稗海)》를 빌려 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명(明)나라 사람이 한(漢), 당(唐), 송(宋) 이후의 소설을 수집하여 한 부(部)의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그중에는 비록 신괴(神怪)하여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나 근거 없는 농담으로 급총서(汲冢書), 제동야언(齊東野言)에 가까운 것도 있기는 하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일과 처음 듣는 말, 명언과 아름다운 이야기는 역사서에 빠진 내용을 보충하고 예문(藝文)의 문채를 갖추어 줄 만하였다. 또한 명교(名敎)에 관계되고 이치를 돕는 내용도 많을 뿐이 아니었으니, 풍부하고 고상한 문사(文辭)를 돕기에도 충분하였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판각이 정하지 못하여 오류가 매우 많은 것인데, 심지어 편목(篇目)조차 극히 엉성하고 잘못되었다. 예컨대 《석림연어(石林燕語)》는 공포의 섭몽득(葉夢得)이 지은 것인데 목록에는 정모(程摸)가 지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본서의 권수(卷首)에 쓰기를, “섭몽득이 짓고 아들 섭간, 섭정, 섭모가 교정하였다.[葉夢得撰 子揀挰摸校]” 하였다. 이 세 사람은 곧 섭몽득의 아들인데 책을 엮은 사람이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정모(挰摸)’를 사람의 성명으로 오인하고는 함부로 ‘정(挰)’을 ‘정(程)’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또 《냉재야화(冷齋夜話)》는 바로 공포의 중 혜홍(惠洪)이 지은 것으로, 이른바 홍각범(洪覺範)이라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런데 편목에는 그 이름이 빠져 있다. 그리고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대해 편목에는 당나라 농서(隴西)의 이석(李石)이 지었다고 하였는데, 그 글 속에 공포의 일도 상당히 들어 있다. 예컨대 “관상가가 이르기를, ‘신하가 용의 지체(肢體)를 하나라도 얻으면 벼슬이 삼공(三公)이나 재상에까지 이른다. 증공량(曾公亮)은 용의 척추를 얻었고, 왕안석(王安石)은 용의 눈동자를 얻었다.’ 하였다.” 하고, 또 ‘역대 임금들이 남달리 총애한 구양수(歐陽脩), 석연년(石延年) 같은 이들’이라 하고, 또 “진정민(陳正敏)이 높이 산 이들은 진단(陳摶), 이독(李瀆), 임포(林逋), 위야(魏野) 등으로 모두 세상을 피해 은둔한 선비들이다.” 하였다. 어쩌면 혹시 후세 사람이 딴 데서 따다 넣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알 수 없다.
《속박물지》에 또 이르기를, “지금 임금은 이전 왕조 때에 수양 태수(睢陽太守)였는데, 개국하여 대송(大宋)이라고 국호를 정함에 이르러서는 또 대화(大火 28수(宿) 중의 하나인 심성(心星)) 아래에 도읍을 건설하였다.”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볼 때 이 책의 작자는 또 송 태조 때의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왕안석, 증공량이라는 말이 또 그 뒤에 들어 있으니 누가 지은 것인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
당(唐)나라 사람들의 시에 쓴 ‘차막(遮莫)’ 자는 그 말뜻을 상고해 보면 애당초 금지하는 말이 아니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대부분 잘못 사용하였으니, 《학림옥로(鶴林玉露)》에 ‘비록……라 하더라도[儘敎]’로 풀이한 것이 옳다. 일찍이 최여화(崔汝和 최석정(崔錫鼎))와 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최여화가 이르기를, “그것은 정말 그렇다. 하지만 예컨대 이백(李白)의 시에 이 말을 쓴 것은 금지하는 말로 쓴 것 같다.” 하였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그 말은 어찌 ‘차막지근장백장(遮莫枝根長百丈)’, ‘차막인친연제성(遮莫姻親連帝城)’의 두 구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에 이는 바로 ‘비록……라 하더라도’의 뜻이니, 이백의 뜻은 ‘설령 종손과 지손들이 뒤얽히고 인척과 친척들이 신분이 귀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래도 교유하는 이들이 많고 자기 자신이 부귀한 것만은 못하다.’는 것이다. 만약 금지하는 말로 본다면 이 두 구는 말이 되지 않는다.” 하자, 최여화도 그렇겠다고 하였다.
남곤(南袞)이 지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만사(挽詞)에 “인물은 공포 원풍(元豐), 희령(熙寧) 연간의 인물이다.[人物宋豐熙]”라는 말이 있는데, 《계곡만필(谿谷漫筆)》에는 이 말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설은 너무 융통성이 없는 것 같다. 희령, 원풍 연간에 조정에 있던 사람은 실로 대부분 왕안석(王安石)의 당인(黨人)이었다. 그러나 당대의 인물 중에는 명현(名賢)이 실로 많았으니, 이 때문에 소자(邵子 소옹(邵雍))의 〈사현음(四賢吟)〉에도 “공포 희령 연간에 당대의 으뜸가는 인물들이 되었다네.[有宋熙寧之間 大爲一時之壯]”라고 한 것이다. 이에 근거하면 ‘희령, 원풍 연간의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희령, 원풍 연간의 옛사람[熙豐舊人]’이라는 지목은 바로 당시 사람들이 서로 지목할 적에 오로지 권력가를 가리켜 말한 것이기는 하나 이 때문에 혐의스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곤의 시에 경력(慶曆), 원우(元祐) 연간을 말하지 않고 원풍, 희령 연간을 말한 것은 운을 맞추기 위한 것일 뿐이다.
《강인기잡지(江隣記雜志)》의 〈호사자기(好事者記)〉에 “봄 한 철 가운데 날씨 좋은 날은 20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근년을 살펴볼 때 90일 중에 날씨 좋은 날 20일을 얻는 것도 매우 어려우니, 천지의 기후가 나날이 이상해져 감을 알 수 있다.
미원장(米元章 미불(米芾))이 이르기를, “붓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마치 썩은 대나무를 상앗대 삼아 배를 움직이고 굽은 젓가락으로 음식물을 먹는 것과 같다. 세상에 좋은 붓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요사이는 더욱 심하여 예사로운 글자를 쓸 때에도 사람의 기력을 극도로 소모시킨다.” 하였다. 우연히 미원장의 이 말을 보고는 적절한 비유가 좋아서 기록하는 바이다.
이하(李賀)의 작품 중에 〈오립소송가(五粒小松歌)〉가 있는데, ‘오립(五粒)’은 곧 ‘오렵(五鬣)’으로 우리 동방의 해송(海松)이 그것이다. 보통 소나무는 잎자루마다 두 개의 바늘잎이 달려 있는데 오직 해송만은 다섯 개의 바늘잎이 달려 있다. 이 수종(樹種)이 중국에는 매우 드물어 화산(華山)에서만 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화산송(華山松)이라고 부른다. 오대(五代) 때에 정오(鄭遨)가 화산에 은거하면서 오렵송(五鬣松)을 먹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있는데,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이르기를, “껍질에 비늘이 없고 열매를 맺는데, 대부분 신라에서 심은 것이다.” 하였다. 이로 볼 때 천하에서 우리나라에만 이 소나무가 많음을 알 수 있으니, ‘해송’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소나무가 보통 소나무와 비록 모습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요컨대 소나무의 별종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소나무라고 통칭하고 오직 바늘잎의 개수로 명칭을 달리할 뿐인 것이다. 우리 동방의 풍속에는 잣나무와 혼동하여 일컫는데, 통속적인 말에서만 그와 같을 뿐 아니라 시문에도 잘못된 용어를 그대로 이어받아 그렇게 일컫고 있는 실정이니 매우 온당치 못하다.
도연명(陶淵明 도잠(陶潛))의 〈여자소(與子疏)〉에 이르기를, “내 나이 50을 넘겼다. 나는 젊어서 곤궁하였으니, 늘 집안이 가난하여 동서로 돌아다녀야 했다.” 하였는데, 이는 이 소(疏)를 지을 때의 나이가 바로 50세 남짓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위 글의 ‘장수와 요절은 정해진 운명이 있어서 달리 요청할 수 없다.’는 뜻을 이어 자신의 수명이 부족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젊어서’ 이하는 바로 출처가 곤궁하게 된 까닭을 서술한 것이니, 50세를 넘겨서야 동서로 돌아다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조천산(趙泉山)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도연명은 나이가 50을 넘겼을 때에 10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유환(游宦)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50은 30이 되어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공포 마영경(馬永卿)이 지은 《난진자(嬾眞子)》에 이르기를, “어릴 적의 이름과 어릴 적의 자(字)는 〈이소경(離騷經)〉에서 비롯되었다.” 하였다. 이는 굴원(屈原)은 자가 평(平)이고 정칙(正則), 영균(靈均)은 그의 어릴 적의 이름과 어릴 적의 자라는 뜻인데 매우 옳지 못하다. 주자(朱子)의 《초사(楚辭)》 주에, “이름은 평(平)이고 자는 원(原)이다. 정칙(正則)과 영균(靈均)은 각기 그 뜻을 풀이하여 아름다운 칭호로 삼은 것이다.” 하였는데, 평(平)을 정(正)으로 풀이한 것은 그 뜻이 실로 알기가 쉬우나, 원(原)을 균(均)으로 풀이한 것은 《시경》의 ‘개간된 언덕과 습지[畇畇原隰]’라는 글을 기초로 한 것 같다. 마영경은 이 점을 살피지 못하고 마침내 영균은 어릴 적의 이름이고 정칙은 어릴 적의 자라고 하였으니 잘못되었다.
옛 법에 우물을 파는 사람은 먼저 수십 개의 동이에 물을 담아서 땅을 팔 곳에 두는데, 밤에 보아 동이 속에 뭇별과 달리 큰 별이 있는 자리에서 반드시 감천(甘泉)을 얻는다 하니, 이것을 공포 방작(方勺)의 《박택편(泊宅編)》에서 보았다. 또 근래에 신무(愼懋)라는 사람이 있는데 지술(地術)에 상당히 밝다. 그가 이르기를, “우물을 파려면 먼저 동(銅)으로 만든 동이 몇 개를 땅 위에 엎어 두고는 밤을 지낸 뒤 관찰해서 그중에 이슬 기운이 많이 맺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파면 반드시 샘물을 얻게 된다.” 하였는데, 이 말도 일리가 있다. 우리 집 농암(農巖)은 안타깝게도 샘이 없어서 늘 시냇물을 길어다 마시곤 하는데, 이 두 가지 방법을 시험해 볼 일이다.
육방옹(陸放翁)의 《노학암필기》에 이르기를, “유자후(柳子厚)의 시에 ‘바다 위 뾰족한 산 예리한 칼끝처럼, 가을 들자 곳곳에서 수심에 찬 간장 끊네.[海上尖山似劍鋩 秋來處處割愁腸]’ 하였는데, 동파(東坡 소식(蘇軾))가 그 구절을 응용하여 이르기를, ‘시름을 끊는 건 칼끝처럼 뾰족한 산[割愁還有劍鋩山]’이라고 하였다. 이에 혹자는 ‘시름에 찬 간장을 끊네.[割愁腸]’라고 할 수는 있어도 ‘시름을 끊는[割愁]’이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작고한 형 중고(仲高 육승지(陸升之))는 이르기를, ‘진(晉)나라 장망(張望)의 시에 「밀려오는 시름을 끊을 수 없네.[愁來不可割]」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시름을 끊는[割愁]」이라는 말의 출처이다.’ 하였다.” 하였다. 내 생각에, ‘밀려오는 시름을 끊을 수 없네’는 시름을 억제하기 어렵다는 말이고 ‘수심에 찬 간장 끊네’는 수심이 지극하여 간장을 끊는다는 말로, 두 가지 뜻이 정반대이다. 지금 동파의 시는 실로 유자후의 시를 기초로 하였으니, 그렇다면 장망의 시를 가지고 증거를 삼아서는 안 된다. 어쩌면 동파공은 실로 장망의 뜻을 취하면서 유자후의 말을 사용하여 번안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시름을 끊는’이라는 말의 온당치 못함이 정말 혹자의 의심과 같을 것이다.
《노학암필기》에 이르기를, “한(漢)나라의 예서(隸書)는 세월이 오래되어 풍우에 벗겨지고 침식되었다. 그래서 그 글자에 더 이상 봉망(鋒鋩)이 없는 것이다. 근래에 두중미(杜仲微)는 일부러 모지라진 붓을 사용하여 예서를 쓰고는 스스로 한나라 각자(刻字)의 유법(遺法)을 얻었다고 말하는데, 어찌 그렇겠는가.” 하였다. 내가 볼 때 근세에 허목(許穆)이 쓴 고전(古篆)도 이와 똑같다. 비단 전서(篆書), 예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시도 그러한 것이 있으니, 옛 악부시(樂府詩)의 요가(鐃歌), 고취(鼓吹) 따위는 자구에 단속(斷續)이 많아 왕왕 이어 읽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로 자구가 빠져서 그런 것이다. 이반룡(李攀龍)의 무리는 이 점을 살피지 못하고 억지로 난삽한 말을 만들어 고체(古體)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두중미의 한예(漢隸), 허목의 고전과 같은 부류이다.
나는 일찍이 가야산(伽倻山)을 유람하다 ‘치(寘)’ 운을 사용하여 오언 장편(五言長篇)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 ‘취(觜)’ 자로 압운(押韻)하여 “이건 마치 은하수 새벽 맞을 제, 뭇별 중 삼성 취성 남은 것 같네.[髣髴雲漢曉 列宿餘參觜]”라고 한 구가 있다. 나중에 운서(韻書)를 살펴보니 ‘參觜’의 ‘觜’는 바로 ‘지(支)’ 자 운에 있었다. 그래서 압운이 잘못된 줄 알았지만 고칠 수도 없었다. 지금 마영경(馬永卿)의 기록을 보니 “28수 가운데 ‘觜’의 음이 자(訾)라는 것은 잘못되었다. 서방(西方)의 별자리는 백호(白虎)인데, 취성(觜星), 삼성(參星)이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한다. 그래서 ‘부리[觜]’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다. 이와 같다면 내 시에 압운한 것은 잘못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 밖에 ‘宿’의 음을 ‘수(繡)’, ‘亢’의 음을 ‘강(剛)’, ‘氏’의 음을 ‘저(低)’라고 하는 것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분별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근거가 있는 듯하다. 요컨대 운서에 오류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소자유(蘇子由 소철(蘇轍))의 《용천지(龍川志)》에 이르기를, “범 문정공(范文正公)은 충량(忠亮)에 독실하여 비록 공명을 좋아하기는 하였으나 붕당을 짓지는 않았으니, 젊은 시절 여 허공(呂許公 여이간(呂夷簡))을 배척하고 훌륭한 일을 이루는 데에 용감하면서도 그의 무리가 그로 인하여 지나치게 엄하고 지나치게 꼿꼿한 것은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월주(越州)에서 조정으로 돌아왔다가 서쪽 변방을 다스리러 나가게 되었는데, 여 허공이 도와주지 않으면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을 탓하는 글을 써서 원한을 풀고 갔다. 그 뒤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섬서(陝西)를 안무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늙어 정주(鄭州)에 살고 있었던 여 허공과 길에서 서로 만났다. 범 문정공은 자신이 중서성(中書省)에 있어 봐서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오직 허물을 뉘우치는 말만 하였다. 이에 여 허공이 날이 저물도록 흔연히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여 허공이 묻기를 ‘어찌하여 급히 조정을 떠났습니까?’ 하자, 범 문정공이 말하기를 ‘서쪽 변방을 다스리고 싶어서입니다.’ 하였다. 여 허공이 이르기를 ‘서쪽 변방을 다스리는 것은 조정에 있는 것이 편함만 못합니다.’ 하자, 범 문정공이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그래서 구양공(歐陽公)이 범 문정공의 신도비문을 지으면서 ‘두 공이 만년에는 기쁘게 서로 마음이 맞았다.’ 한 것이다. 후생(後生)들은 그런 줄을 모르고 모두 구양공을 비판하는데, 나는 장공(張公)이 말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믿게 되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주자(朱子)가 주 익공(周益公 주필대(周必大))에게 준 편지에 범 문정공과 여 허공이 원한을 푼 일에 대해 논하기를, “《용천지》는 이에 대해 또 장안도(張安道 장방평(張方平))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하여 증거를 삼았는데, 장안도는 실로 여 허공의 당인이므로 믿을 만한 증거로 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였다. 지금 이 지(志)에 기록된 것을 상고해 보면 오로지 범공이 지난날 여 허공을 공격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그와 화해했다고 한 것 같은데, 소자유는 아마도 장안도의 말을 근거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일 것이다. 이는 바로 장안도가 여 허공의 편을 들어준 뜻인 만큼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주자가 도리어 “장안도는 실로 여 허공의 당인이므로 믿을 만한 증거로 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일까? 어쩌면 오로지 범 문정공이 허공이 도와주지 않으면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을 탓하는 글을 써 원한을 풀고 갔다는 한 대목만을 가리켜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일찍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만시(挽詩)를 지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상고대[樹稼]’라는 글자를 썼다. 그것은 편(篇) 안에 따로 ‘목(木)’ 자가 있기 때문에 ‘수(樹)’ 자로 ‘목(木)’ 자를 대신한 것이었으니, 의미를 말하자면 그것이 실로 해로울 것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처가 없는 생경한 말이라고 의심하였다. 뒤에 보니 《동헌필록(東軒筆錄)》에 이르기를, “당(唐)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상고대가 피었는데 영왕(寧王)이 죽었다. 그래서 당시 속언에 ‘얼음이 초목에 맺혀 상고대가 피면 높은 벼슬아치가 두려워한다.[冬凌樹稼達官怕]’고 하였다.” 하였는데, 이에 근거하면 ‘수가(樹稼)’라고 쓰는 것이 옳은 것이다. 옛날 소자첨(蘇子瞻 소식(蘇軾))은 글을 지을 적에 전고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자제, 문생들로 하여금 그 출처를 상고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렇게 한 뒤에야 마음에 흡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년에 청풍(淸風)에 있을 적에 종인(宗人) 김해보(金楷甫)와 이것저것 담론하다가 고금에 절의(節義)를 지킨 인사가 많고 적은 데에 이야기가 미쳤다. 김군이 이르기를 “공포 때에는 예의로 사대부를 배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강(靖康) 연간의 변란에 의리를 위해 순절한 이가 이 시랑(李侍郞 이약수(李若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리도 적었단 말입니까?” 하므로, 내가 답하기를 “그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다. 왕안석(王安石) 이래로 올곧은 인사는 내쫓고 소인배들을 끌어다 썼으며, 소성(紹聖), 숭녕(崇寧) 연간에 이르러서는 장돈(章惇), 채경(蔡京)의 무리가 서로 이어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하여 당대의 현인, 군자는 내쫓기지 않으면 지방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었을 뿐 조정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요직을 채우거나 외번(外藩)에 포진된 자들은 오직 채경, 왕보(王黼), 동관(童貫), 양방평(梁方平)의 사인(私人)들뿐이었다. 이런 무리와 함께 변란을 당하였으니,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팔아넘기며 달가운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당시에 변경(汴京)이 포위된 지 몇 개월도 되기 전에 두 황제가 북쪽으로 끌려가고 고종(高宗)이 남쪽으로 강을 건넜다. 그래서 비록 충신, 의사(義士)가 있기는 했으나 먼 지방에 있는 관계로 미처 때맞추어 일어나 변란에 달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뚝이 충절을 바친 자가 어찌 한두 사람에 그쳤겠는가. 지금 이 점을 살피지 않고 사람이 없었다고 싸잡아 말한다면 이는 빈틈없이 충실한 논의가 아니다.” 하였다. 김군은 이에 깊이 수긍하였다. 오늘 우연히 장채(張采)의 〈명신속록서(名臣續錄序)〉를 보았더니 그가 이미 이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뜻이 내가 지난날 말한 것과 완전히 부합하였다. 다만 김군이 먼 곳에 있어 이 서문을 꺼내어 함께 읽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나는 일찍이 〈귀거연서(歸去淵序)〉를 지은 적이 있는데, 도연명(陶淵明 도잠(陶潛))이 팽택(彭澤)을 버린 일을 논하여 이르기를, “연명은 기괴한 것을 찾고 괴상한 일을 행하는 부류가 아니다. 그가 벼슬한 것은 본디 가난 때문이었으니, 어찌 일개 독우(督郵)에게 허리를 굽히기를 꺼려서 버리고 떠나기를 그처럼 단호하게 하였겠는가. 당시에 기노(寄奴 남조(南朝) 송 고조(宋高祖) 유유(劉裕))가 정권을 잡을 만한 형세가 이미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떠나기를 마치 공자가 제사 고기를 보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魯)나라를 떠난 것처럼 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이러한 의론을 낸 것은 한 때의 억견에서 나온 것으로, 과연 도연명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뒤에 왕위(王褘)의 〈여산기(廬山記)〉를 읽어 보니, “정절(靖節 도잠(陶潛))은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관복을 갖추고 독우를 만나는 것을 꺼려 마침내 벼슬자리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에 유유가 유중문(劉仲文)을 죽이고 장차 진(晉)나라의 국권을 잡으려 하였는데 도연명은 의리상 두 성씨를 섬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핑계 삼아 사직하고 떠나기를 마치 공자가 사소한 죄 때문에 떠나려고 했던 것처럼 한 것이니, 어찌 일개 독우 때문에 그처럼 발끈하여 벼슬을 그만둔 것이겠는가.”라고 하여, 내가 전에 논한 것과 완전히 부합하였으며, 더욱이 공자의 일을 끌어 댄 것마저 부합하였다. 나는 내 소견이 그다지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으며, 또 고금의 사람의 생각이 이처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독창적인 견해를 내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 애당초 과거 사람들이 이미 설파하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중국에서 ‘동(洞)’이라고 칭하는 것은 모두 바위에 뚫린 굴이나 구멍으로서 그 속이 비어 거처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아니하여 모든 산골짜기의 깊은 곳을 ‘동’으로 명명하곤 한다. 운서(韻書)를 살펴보면, “동(洞)은 ‘비었다.[空]’는 말이다.” 하였는데, 두 산 가운데 골짜기가 있으면 이 또한 비어 있는 뜻이 있으니 ‘동’이라고 칭하는 것이 안 될 것도 없다. 그러나 경성(京城)의 방리(坊里)의 이름을 또한 ‘동’이라고 칭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한데, 언제부터 이런 오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주(周)나라 사람들은 옥을, 송(宋)나라 사람들은 쥐를 똑같이 박(璞)으로 명명한 것을 보면 지방의 풍속에 따라 익숙해져 이름이 같으면서 실상이 다른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 비단 이 한 가지 일뿐만이 아니다. 이는 또한 각기 그 명칭에 따르면 될 뿐이다. 《명산기(名山記)》를 읽다가 우연히 기록하는 바이다.
또 중국인들은 바위에 구멍이 있는 것을 ‘암(巖)’이라고 칭하는데, 예컨대 영주(永州)의 조양암(朝陽巖), 시흥(始興)의 영롱암(玲瓏巖), 영복(永福)의 방광암(方廣巖), 계림(桂林)의 여러 복파암(伏波巖)이 모두 그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천 길 짜리 거대한 바위라 하더라도 ‘암’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런데 《운서》를 살펴보면 “암(巖)은 ‘봉우리[峰]’이다.” 하였다. 구멍이 있는 바위에 대해 어찌하여 봉우리라는 뜻을 취하여 굳이 이렇게 칭하는지, 그 가소로운 것이 우리나라에서 방리(坊里)를 ‘동(洞)’으로 칭하는 것과 거의 다름이 없다. 내 생각에 이는 본디 남방의 풍속에서 칭했던 말인데 마침내 중국에서 통칭하는 이름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황보숭(皇甫嵩)은 부풍(扶風)에 주둔하여 동탁(董卓)을 토벌하려고 개훈(蓋勳)과 모의했는데 동탁이 성문교위(城門校尉)로 부르자 나아갔고, 주준(朱雋)은 하남(河南)에 있으면서 이각(李傕)을 토벌하려고 도겸(陶謙)과 모의했는데 이각이 태복(太僕)으로 부르자 나아갔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 모두 황건적(黃巾賊)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으며 그 지혜와 용기도 서로 필적하였으나 말로에는 모두 거취를 잘못 정하여 군자들의 비판을 샀으니, 일이 똑같아 우습다.
하서(河西)의 삼명(三明) 중에 황보규(皇甫規)는 지조와 절개가 뛰어나 가장 어질었다. 장환(張奐)은 얼떨결에 속임을 당하여 충량(忠良)을 해쳤으므로 비록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후작(侯爵)을 힘껏 사양한 데다 진번(陳藩), 두무(竇武)를 위해 글을 올려 해명해 주었으니 그 또한 허물을 잘 만회한 자이다. 오직 단경(段熲)만은 환관에게 아부하여 재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었다가 끝내는 또한 그 때문에 몸을 망쳤으니, 가장 저급한 인물이다.
원본초(袁本初 원소(袁紹))의 부하 중에는 명사가 매우 많았으나 저수(沮授), 전풍(田豐)이 가장 어질었는데, 저수는 지모, 계략이 특히 뛰어났으니 저수 같은 이는 당대의 인걸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 자에게 몸을 맡긴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근준(靳準)은 연총(淵聰 유요(劉曜))의 자손을 죽일 적에 유씨의 남녀를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베었고 염민(冉閔)은 석호(石虎)의 38명의 손자를 죽여 석씨를 완전히 멸족시켰으니, 그 일이 똑같다. 이는 모두 하늘이 이들의 손을 빌린 것이다.
위현(韋賢)이 이르기를, “자식에게 황금 만 광주리를 남겨 주는 것은 자식에게 경전 하나를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 하였는데, 세상에서 이를 명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식에게 영예를 가르치는 것이 부유함을 남겨 주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겠는가. 방공(龐公)이 유표(劉表)에게 대답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운 것을 남겨 주는데 나만은 편안한 것을 남겨 주겠습니다. 비록 남겨 주는 것이 다르기는 하나 남겨 주는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 말이 한층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말일 것이다.
귀진천(歸震川 귀유광(歸有光))의 문집에 실린 〈하씨선영비명(何氏先塋碑銘)〉에 “진나라서 처음으로 은택을 받고, 여강에서 명성이 드러났으니, 문목공이 정성스레 유주(幼主) 도왔네. 훌륭하다, 효성스러운 자식들이여. 참으로 이들은 형이며 아우, 모두 다 명망과 덕망 있었네.[晉興恩澤 著自廬江 文穆贊密 懿哉孝子 實維昆季 皆有名德]” 하였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하구(何求)와 아우 하점(何點)ㆍ하윤(何胤)을 세상에서 하씨삼고(何氏三高)라고 칭하는데, 하점은 또 효성스러운 은사라고 지목받는다. ‘훌륭하다, 효성스러운 자식들이여. 참으로 이들은 형이며 아우, 모두 다 명망과 덕망 있었네.’라는 말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비문에 이미 “하씨는 진(晉)나라의 효자 하기(何琦)의 후예이다.”라고 하였으니 명(銘)에 말한 ‘효자’는 바로 이 하기이다. 어찌 하점이 될 수 있겠는가. 주를 낸 사람은 하점 형제가 명망이 있었다는 생각에 형제들이 모두 명망과 덕망이 있었다는 글에 이들을 견강부회한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형제라는 것은 바로 하기가 하충(何充)의 종형이고 위의 글의 ‘문목(文穆)’을 이어 말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일 뿐, 하점 형제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 이하는 신사년(1701, 숙종27)에 기록한 것이다. -
일찍이 동파(東坡) 문집의 〈장익로제금찬(張益老諸琴贊)〉을 읽고는 그 글이 다른 글들과 비슷하지 않음을 매우 이상하게 여겨 생각하기를, ‘이 노인이 일부러 변격(變格)으로 특이한 글을 써서 이처럼 침중(沈重)하고 정교한 작품을 지은 것일 뿐이다.’ 하였다. 뒤에 《산곡집(山谷集)》을 읽다 보니 거기에도 이 글이 실려 있었고, 또 산곡이 장익로에게 답한 글도 보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여러 거문고들에 대해 두루 품평하고 싶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더욱 분명한 증거이다. 그제서야 《동파집》에 잘못 실린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동파의 〈차운등원발허중도진소유(次韻滕元發許仲途秦少游)〉 시에
두 공은 시격이 늙을수록 참신한데 / 二公詩格老彌新
취하여 읊조리는 야인도 허여하네 / 醉後狂吟許野人
앉아 보니 푸른 언덕 못의 티끌 삼키는데 / 坐看靑丘呑澤芥
흙탕물과 시내 마름 대접하기 부끄럽네 / 自慚潢潦薦溪蘋
두 고을 깃발이 밝게 서로 비추는데 / 兩邦旌纛光相照
십 묘 밭에 쟁기 호미 손에 잡고 일을 하네 / 十畝鋤犁手自親
진랑은 문장 솜씨 천하에 으뜸이니 / 何似秦郞妙天下
머지않아 〈동순송〉 어찌 아니 올릴쏜가 / 明年獻頌請東巡
하였는데, 그 주에 “두 고을 깃발이라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등원발과 허중도가 모두 태수였던 것 같다. 그러나 파제(破題)에 그를 가리켜 ‘허 야인(許野人)’이라고 하였으니, 알 수 없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허(許)’는 곧 허여한다는 뜻으로, 두 공이 시를 잘 지으면서도 야인이 취하여 분방하게 읊조리는 것을 허여해 준다는 말이다. 두 공은 등원발, 허중도를 가리키고 야인은 동파가 자신을 지칭한 것이니, 어찌 허중도와 관계된 말이겠는가. 그렇다면 두 고을이 등원발, 허중도에 대한 말임은 맞는 것이다. 주석에서 ‘허(許)’ 자 하나 때문에 이처럼 의심하고 논란하였으니 가소롭다. 우연히 《동파집》을 보다가 쓰는 바이다. - 혹자는 두 공은 등원발과 진소유를 가리키고 야인은 허중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제7구에 ‘진랑’이 별도로 나올 리가 없다. 그리고 진소유는 동파의 후배인데 어찌 늙었다고 할 리가 있겠는가. ○ 이하는 계미년(1703, 숙종29)에 기록한 것이다. -
유몽득(劉夢得 유우석(劉禹錫))의 〈죽지사(竹枝詞)〉에 “동쪽에서 해 뜨더니 서쪽에선 비, 날 흐린가 하였더니 도로 개었네.[東邊日出西邊雨 道是無情還有情]” - 정(情)은 모두 청(晴)이다. - 하였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 뜻을 알지 못한다. 내 생각에 이는 고시의 〈독곡가(讀曲歌)〉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정(情)은 청(晴)과 음이 같기 때문에 동쪽의 해와 서쪽의 비를 가지고 남녀 사이가 무정한 듯하면서도 유정한 듯도 함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독곡가〉의 “단단한 돌문이 입안에 생겨, 슬픔을 머금고 말을 못하네.[石闕生口中 含碑不得語]” - 비(碑)는 비(悲)이다. - 와 〈석성악(石城樂)〉의 “바람이 황벽나무 울타리 불어, 안타깝게 이별의 소리 내누나.[風吹黃蘗藩 惡作苦籬聲]” - 리(籬)는 리(離)이다. - 등과 똑같은 것이다. 내가 비록 이와 같이 풀이하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믿지 않았다. 뒤에 장문잠(張文潛 장뇌(張耒))의 《명도잡지(明道雜志)》를 보니, “한지국(韓持國)은 술을 마신 뒤에 늘 유삼변(柳三變)의 시가 중 한 곡을 읊조리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구에 이르기를, ‘정이 많은 까닭에 병이 많은 지경이 이르렀네.[多情到了多病]’ 하였다. 늙은 계집종이 늘 그것을 듣고 번번이 이르기를, ‘높은 분은 몸속도 늘 보통 사람들과 다르구나. 나는 비가 오려면 몸속이 좋지를 못한데 귀인은 맑은 날이 많으면 병이 난단 말인가.’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情)’을 ‘맑다[晴]’로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으로, 앞서 말한 시의 증거가 될 수 있다. - 동파의 〈대인증별(代人贈別)〉 시에 “연밥을 쪼개거든 중심을 보소, 바둑을 다 두면 다신 못 두리. 헤어져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터, 한 끼 밥을 먹을 때도 어이 잊으랴.[蓮子擘開須見臆 楸枰著盡更無期 破衫却有重逢處 一飯何曾忘却時]” 하였는데, 이 또한 이러한 부류이다. -
강절(康節)이 66세에 지은 시에 이르기를, “내가 만일 십 년만 젊어진다면 조금은 성공할 수 있을 테지만, 어찌하리 천지간 이 세상에는 해가 두 번 중천하는 이치 없는걸.[使吾却十歲 亦可少集事 奈何天地間 日無再中理]” 하였는데, 이는 깊이 탄식한 것이다. 소강절의 학문은 천하의 일에 대해 이미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말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이른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자신을 생각해 볼 때 나는 올해에 아직도 소강절의 당시 나이보다 13세나 젊으니 진보할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전에 공부한 것이 전혀 없으니, 만약 열 배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어찌 조금이라도 일을 이룰 가망이 있겠는가. 이것이 두려운 마음으로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점이다. 우연히 《격양집(擊壤集)》을 보다가 이렇게 쓰는 바이다.
산곡(山谷)의 〈유백화주이씨원(游百花洲李氏園)〉 시에
머리가 희기 전에 삼정승에 오르고 / 三公未白髮
한집안 열 사람이 붉은 바퀴 수레 타도 / 十輩乘朱輪
그건 다만 남들 눈에 보기가 좋을 뿐 / 只取人看好
백 년밖에 못 사는 이 몸에 무슨 소용 / 何益百年身
오로지 바라는 건 오늘이 영원하여 / 但願長今日
맑은 술동이 끼고 벗님 마주 대하는 것 / 淸樽對故人
하였는데, 이는 가설적으로 말하여 검은 머리로 정승이 되고 가세(家世)가 빛나는 것은 그저 남들이 보기에 좋은 것일 뿐 요컨대 자기 몸에는 무익하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주를 낸 사람은 ‘삼공(三公)’을 구 내공(寇萊公 구준(寇準)), 범 문정(范文正), 사희심(謝希深 사강(謝絳))이라고 하였다. 이는 백화주에 이 세 공의 유적이 있는 것만 보고 이처럼 견강부회한 것으로 작자의 본의를 크게 잃었으니 가소롭다.
산곡의 〈화형돈부추회(和邢敦夫秋懷)〉 시에 “가을 바람 맞으며 장부의 눈물, 정호를 위하여 뚝뚝 떨구네.[西風壯夫淚 多爲程顥滴]”라고 하였는데, 이는 안타까워한 것이다. 산곡은 소식(蘇軾)의 문인이었는데도 그 말이 이와 같았으니, 어쩌면 당시의 공론을 실로 가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덕성이 관대하여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방정하고 엄숙한 기상과는 달랐기 때문에 비록 소식의 당이라 해도 모나게 대하지 않았던 것일까?
산곡의 〈사마온공만(司馬溫公挽)〉에 “인물평은 관 뚜껑을 덮어야 끝나는 법, 공은야 이제 와서 명성 실로 높아졌네.[毁譽盖棺了 于今名實尊]” 하였는데, 주에 이르기를 “사람이 죽으면 칭찬과 헐뜯음도 따라서 사라지는데 오직 공만은 죽은 뒤에 그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말이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죽은 뒤에야 완전히 정해지기 때문에 공이 죽은 뒤에 명성이 실로 더욱 높아졌다는 말이다. 주석의 설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고종(高宗)이 처음 즉위했을 때에는 아직 원우(元祐)와 희령(熙寧), 원풍(元豐) 연간의 당(黨)을 변별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왕백언(汪伯彦), 황잠선(黃潛善) 등 하는 짓이 바르지 못한 자들을 기용하였는데, 왕백언, 황잠선은 또 소인 중에서도 제일 하질인 자들이다. 조 승상(趙丞相 조정(趙鼎))이 승상 벼슬에 오르고 나서 바야흐로 조금 변별할 줄을 알았고 또한 맹 황후(孟皇后)가 궁중에서 힘껏 고종을 설득하였으며 고종이 또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등의 글을 보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고종이 하루아침에 깨달아 스스로 그들을 미워하였으니, 군자, 소인의 당이 비로소 밝혀졌다.” 하였다. 내가 볼 때, 근세에 조정론(調停論)을 주장하는 이들은 늘 “우리나라의 붕당은 이미 누대를 거쳐 와서 거의 백여 년이 되었으니, 이전 시대에 일시적으로 분당(分黨)한 것과는 같지가 않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익숙히 보고 들어 온 까닭에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게 되었으니, 지금 비록 부정하고 바른 차이가 없지는 않으나 출척(黜陟)과 용사(用捨)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희령, 원풍과 원우 연간의 붕당이 고종이 금(金)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강을 건널 때까지도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주자의 논의는 그들을 변별하는 것을 옳다고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이 조항에서 논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정하고 바른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모르겠으나 만약 부정하고 바른 차이가 있다면 어찌 그 유래가 깊다고 하여 옥석을 가리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또 《주자어류》에 “호정 덕휘(胡珵德輝)가 지은 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인하여 묻기를 ‘호덕휘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선친의 벗이다. 진릉(晉陵) 사람으로 일찍이 구산(龜山 양시(楊時))을 종유하였는데, 조 충간공(趙忠簡公 조정(趙鼎))이 국정을 담당할 적에 장얼 거산(張嵲居山)과 함께 사관이었다. 조공이 벼슬을 떠나자 장 위공(張魏公 장준(張浚))이 홀로 정승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원우 연간의 당인이라고 반드시 모두 옳지는 않으며 희령, 원풍 연간의 당인이라고 반드시 모두 그르지는 않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하윤중(何掄仲), 이사표(李似表) 두 사람을 발탁하여 사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호덕휘, 장거산이 편수한 사서(史書)를 모두 뽑아내어 고치려고 하자 호덕휘, 장거산은 결국 자청하여 벼슬을 떠났다. 조 충간공이 다시 정승으로 들어가 마침내 하윤중, 이사표를 제거하고 호덕휘, 장거산을 기용하여 사관으로 삼고는 글을 써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하였다.” 하였다. 이를 근거로 볼 때 두 당의 다툼은 고종이 남쪽으로 강을 건넌 뒤까지도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유(韓愈)의 비문은 직설적인 서술이 많고 구양수(歐陽脩)의 비문은 종횡으로 뒤섞어 서술한 것이 많다. 한유의 비문은 문체가 근엄한데 그의 뛰어난 점은 자구를 운용하는 데에 있고, 구양수의 비문은 언어가 점잖고 기품이 있는데 그의 뛰어난 점은 편장(篇章)의 변화에 있다.
한유는 풍격이 바르고 힘이 있으며, 구양수는 격조가 초연하고 사물에 대한 대응이 원만하다.
한유는 《상서(尙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필법에 뿌리를 두었고 구양수는 《시경(詩經)》의 〈국풍(國風)〉, 〈이소경(離騷經)〉, 《사기(史記)》의 맛을 터득하였다.
왕세정(王世貞)의 비문은 체재는 대부분 구양수에 가까운데 언어는 때때로 한유와 비슷하다.
천하의 일은 모름지기 먼저 진위와 허실을 가린 뒤에 공졸(工拙)과 정조(精粗)를 논할 수 있는데, 문장도 그러하다. 예컨대 명나라의 왕세정, 이반룡(李攀龍) 등은 고문(古文)에 힘써 당(唐), 송(宋)의 문장을 모방하였으니, 언뜻 보면 고상하고 걸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모두 비슷해 보이는 말을 표절한 것일 뿐이니, 이는 바로 문장에 있어서 가짜인 것이다.
한퇴지(韓退之)는 문장을 지을 적에 되도록 진부한 말을 제거하였는데, 진부한 말이란 비단 저속하고 평범한 말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옛사람이 이미 한 적이 있는 말이면 모두 그에 해당한다. 예컨대 《춘추좌씨전》, 《국어(國語)》, 《한서(漢書)》, 《사기》의 문장이 비록 아름답고 특이하기는 하나 한 번이라도 혹시 그대로 답습하여 사용한다면 모두 진부한 말인 것이다. 지금 한유의 문집에 실린 수백 편의 문장을 읽어 보면 한마디도 옛사람의 성구(成句)를 그대로 답습하여 쓴 말이 없다. 예를 들어 〈평회서비(平淮西碑)〉는 오로지 《상서》를 본받았으나 《상서》 속의 말이 한마디도 없고, 〈동진행장(董晉行狀)〉은 《춘추좌씨전》을 모범으로 삼았으나 《춘추좌씨전》 속의 말이 한마디도 없고,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序)〉는 《마사(馬史)》와 매우 비슷하나 《마사》 속의 말이 한마디도 없으니, 참으로 뛰어난 식견이다. 명나라의 문장 중에 예컨대 이우린(李于鱗)은 오로지 옛사람의 자구를 취해 이어서 문장을 지었으니 참으로 비루하다. 원미(元美 왕세정(王世貞))도 일찍이 이러한 문제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 자신이 지은 글을 보면 그도 이러한 병통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비문에 일을 서술한 것이 대체로 다 《사기》, 《한서》의 어구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편마다 중복하여 나오기 때문에 보이는 것마다 모두 진부하다. 한퇴지가 되도록 제거하려고 했던 것을 바야흐로 극력 행하면서 스스로 당, 송의 문장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고 말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형돈부(邢敦夫 형거실(邢居實))는 비단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당대에 높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 인물도 제공(諸公)들에게 매우 중하게 여겨졌다. 황노직(黃魯直 황정견(黃庭堅))이 일찍이 절구 10수를 지어 원우(元祐) 연간의 제공(諸公)들의 일을 차례로 서술한 적이 있는데, 그중 한 수에 이르기를,
미친 듯이 덤벼드는 노 지방의 형 상서는 / 魯中狂士邢尙書
본디 해를 부지하여 하늘 높이 가려 했네 / 本意扶日上天衢
만약 돈부 살아 있어 이 노인을 말렸다면 / 敦夫若在鐫此老
평지풍파 일으키게 놓아두지 않았을 터 / 不令平地生崎嶇
하였으니 그에 대해 기대하고 허여한 뜻을 알 수 있다. - 이하는 갑신년(1704, 숙종30)에 기록한 것이다. -
소자첨(蘇子瞻 소식(蘇軾))의 시에는 “몸은 지금 어떠냐고 산사람이 묻는다면, 아직은 등 앞에서 잔글씨를 쓴다 하리.[山人若問今何似 猶向燈前作細字]” 하고, 육방옹(陸放翁)의 시에는 “궁유 자질 타고난 줄 스스로 알겠으니, 오십이라 노년에도 등 앞에서 잔 글 보네.[自知賦得窮儒分 五十燈前見細書]” 하였다. 나는 올해 쉰네 살로 쇠병(衰病)이 벌써 심하고 늙은이의 모습을 모두 갖추었으나 유독 시력만은 젊었을 때보다 떨어지지 않아 등 아래에서 아직도 잔글자로 된 책을 읽을 수가 있다. 그래서 두 공이 말한 것에 가깝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육방옹의 시가 더욱 맛이 있다.
상서(尙書) 남이성(南二星)이 배천(白川)으로 유배 갔을 적에 정유악(鄭維岳)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숙부님은 올해 운수가 좋지 않으니 과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정유악은 공의 족질로서 운수를 점칠 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당부한 것이다. 공은 답장을 쓰지 않고 그저 척독의 뒷면에 사운시(四韻詩)를 써서 돌려보냈는데, 그중 한 연에 이르기를, “나는야 세상 만사 점괘 아니 따르나니, 오직 평생 한탄하네 쫓겨난 몸 깨 있음을[萬事懶從詹尹卜 一生長恨楚臣醒]” 하였다. 이 말은 정련(精鍊)되고 요점이 있어 읽는 사람을 깊이 경동시키는 점이 좋다. 갑신년 3월 23일에 이양숙(李養叔 이이명(李頤命))에게서 들었다.
범난계(范蘭溪 범준(范浚))의 〈심잠(心箴)〉을 주자가 자주 칭찬하고 《맹자집주(孟子集註)》에 실었는데 나는 그 글을 읽을 적마다 늘 그의 인물과 출처를 상세히 밝히지 않은 것이 유감스러웠다. 근래에 옥당에서 《송시초(宋詩鈔)》를 빌려 보았는데, 범준의 시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편 머리에 그의 본말을 대략 서술하기를, “범준은 자가 무명(茂明)이고 무주(婺州) 난강(蘭江) 사람인데, 소흥(紹興) 연간에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천거되었으며 형제들이 대부분 고관을 지냈다. 나중에 진회(秦檜)가 국정을 담당하자 출사하지 않고 꼿꼿한 절개를 지키며 향계(香溪)에 은거하였는데, 그로 인해 향계선생(香溪先生)이라고 불렸다. 그는 글을 지어 도를 밝히되 대체로 경학을 근간으로 하였다.” 하였다. 이를 근거로 보면 그는 인품이 실로 범상하지가 않았다.
범준의 문집에 〈독양자운전(讀揚子雲傳)〉 시가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자줏빛과 파리 소리 철부지를 기만하니 / 蠅聲紫色欺昏童
높이 나는 기러기처럼 의로운 이 떠나가네 / 義士遠引如冥鴻
어이하여 정신없이 낭관 벼슬 지내며 / 胡爲顚眩尙執戟
머리 숙여 신(新) 높이고 신하를 자처했나 / 美新屈首稱臣雄
민산의 옥야에 고구마가 크건만 / 岷山沃野蹲鴟大
불우해도 안 돌아감 참으로 잘못일레 / 拓落不歸良已過
그의 몸 위태롭기 우물가의 병 같은데 / 近危竟似井眉甁
〈반이소(反離騷)〉를 지어서 굴원(屈原)을 비웃었네 / 虛作反騷嗤楚些
양심 속여 작록 연연 남의 조롱을 받으면서 / 詭情懷祿遭嘲評
오로지 문필로써 명성을 남기었네 / 但用筆墨垂聲名
하였다. 주자 이전에는 양웅(揚雄)을 비판한 것이 이 시처럼 통렬한 것이 없었으니, 왕증(王曾) 등 여러 사람이 양자운의 편을 들어 주어 왕망(王莽)의 신하 노릇한 죄를 변호해 주었던 것에 비하면 소견이 월등히 뛰어나다.
구양수(歐陽脩)의 문집에 실린 〈길주학기(吉州學記)〉는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비단 자구에 증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단락과 장(章)의 선후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나는 석각본(石刻本)이고 하나는 공포가 태평할 적에 인쇄한 본인데, 석각본은 《육일거사집(六一居士集)》에 실려 있고 인쇄본은 그 외집(外集)에 실려 있다. 석각본은 자수가 상당히 줄었고 문장도 한층 간결하고 유창한 것으로 보아 뒤에 개수한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구양공은 글을 지음에 있어 비록 척독처럼 범상한 글이라 해도 대부분 뒤에 개수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처럼 글을 짓는 데에 있어 구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기(記)도 그 한 가지 증거이다. 두 본을 가지고 한번 비교 대조해 살펴보면 자구를 취하고 버림으로써 자세히 하고 간략히 한 뜻과 글자를 정밀히 선택하고 윤색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주 익공(周益公 주필대(周必大))의 서(序)에 “전에 지은 것과 윤색한 새 작품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글을 짓는 법을 깨닫게 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이하는 을유년(1705, 숙종31)에 기록한 것이다. -
구양공(歐陽公)의 문집에 매성유(梅聖兪 매요신(梅堯臣))의 시집 서문이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매성유가 살아 있을 적에 지은 것이다. 예컨대 “나이가 지금 쉰이다.” 하고, 또 “세상 사람들은 그가 오랫동안 곤궁하게 지내며 늙어 가는 줄은 모른다.” 하였으니, 매성유가 죽은 뒤에 지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끝에는 “15년 뒤에 매성유는 병들어 죽었다.”는 말이 있다. 공은 처음에 사경초(謝景初)가 편집한 것을 바탕으로 앞에 말한 것처럼 서문을 짓고 매성유가 죽은 뒤에 다시 그 완전한 시고(詩稿)를 편집하여 정하자 이전에 쓴 서문에 이 몇 마디 말을 사족(蛇足)처럼 보태고 전후의 글을 합하여 한 편으로 만든 것이니, 비록 의심스럽기는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저간의 사정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공이 매성유에게 준 편지를 살펴보면 “시집의 서문을 삼가 명하신 대로 부쳐드립니다. 뛰어난 솜씨를 지닌 작자의 훌륭한 점을 기술하여 말하기는 했습니다만 마음에 들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이 또한 이 서문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 우연히 구양공의 문집을 보고 기록하는 바이다.
구양공의 문집에 서무당(徐無黨), 초천지(焦千之)가 지은 서(胥), 양(楊) 두 부인의 명(銘)이 실려 있다. 이는 공이 모친 정 부인(鄭夫人)의 상을 당하여 두 부인을 합장하려고 하였는데, 자신은 상기(喪期) 중에 있기 때문에 두 문인에게 명하여 대신 명을 짓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공이 지은 것이니, 그 문사와 체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두 명이 모두 매우 훌륭한데 모녹문(茅鹿門)이 《당송팔대가문초》에 넣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것이 공의 작품임이 분명치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
두보(杜甫)의 시에 대한 소씨(蘇氏)의 주석이 위작이라는 것은 주자(朱子)가 이미 분명히 말하였으며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진씨(陳氏)의 설과 명나라의 양승암(楊升菴 양신(楊愼)), 전목재(錢牧齋)의 문집에도 논한 것이 있다. 그 주석에 인용한 옛사람의 사적과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식견이 있는 사람은 한 번만 보아도 저절로 분명히 드러나 애당초 고증할 것도 없이 그 허무맹랑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에 유서(類書)를 편찬한 자들은 왕왕 제대로 살피지 않고 간혹 도리어 그것을 인용하여 역사 사실로 삼곤 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나는 일찍이 아우들과 함께 《사문유취(事文類聚)》와 기타 유서들을 보면서 거기에 인용된 역사 사실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늘 ‘이는 필시 두보 시에 대한 소씨 주의 말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곤 하였는데, 검토해 보면 과연 그러하였으니 그 말투가 분변하기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니, “두보의 시에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 얻은 것만 같네.[家書抵萬金]’라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양(梁)나라 왕균(王筠)이 오랫동안 전장에 있던 중에 하루는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고 이르기를, ‘만금을 얻은 것 같다.’라 하였는데, 시의 말은 전적으로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라 하고, 또 “‘하지장(賀知章)이 말 탄 모습 마치 배를 탄 것 같아.[知章騎馬似乘船]’라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진(晉)나라 완함(阮咸)이 취하여 기우뚱하게 말을 타자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웃으며 이르기를, ‘저 노인이 말 탄 모습은 마치 배를 타고 파랑 속을 가는 것 같다.’ 하였는데, 시의 말은 이러한 뜻을 사용한 것이다.”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백(李白)의 시에 ‘어이하여 그리도 야위었나 물어보니, 종전에 시 짓느라 고달파서 그랬다나.[爲問如何太瘦生 摠爲從前作詩苦]’라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최호(崔浩)가 시를 읊조리기를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병이 나자 벗이 이르기를, ‘그대는 병이 난 게 아니라 시를 짓느라 고달파서 야윈 것이다.’ 하였다. 시의 말은 이러한 뜻을 사용한 것이다.” 하였다. 이 세 가지 말을 상고해 보면 모두 소씨의 주에서 나온 것 같으니 검토해 볼 일이다. 다만,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이 이 세 가지 말을 인용하면서 모두 ‘내가 살펴보건대[按]’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나름대로 고찰한 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소씨의 주에서만 본 것이라면 이처럼 스스로 고증했다는 말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지봉유설》에 또 이르기를, “두보의 시에 ‘아우 생각에 구름 보다 한낮에 잠이 드네[憶弟看雲白日眠]’라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운록만초(雲麓漫抄)》에 이르기를, ‘양선(梁瑄)이 돌아오지 않자 아우 양경(梁璟)이 동남쪽의 흰 구름을 볼 때마다 늘 우두커니 서서 서글프게 바라보곤 하였다.’ 하였는데, 시의 뜻은 이러한 뜻을 사용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상고해 볼 때 이 역시 소씨(蘇氏)의 주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운록만초》에서 보았다고 하였으니, 어찌 《운록만초》의 저자 역시 소씨의 주에서 취해 쓰면서 그것이 허무맹랑한 것임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릇된 것이 계속하여 전승되는 것이 더욱 가소롭다. - 뒤에 두보의 시집을 살펴보니 이 말이 과연 소씨의 주에 나와 있었는데, ‘언제나 동남쪽의 구름을 바라보면[每見東南雲]’ 아래에 보였다. 《운록만초》는 이를 바탕으로 한 것 같은데, 지봉은 이것이 ‘아우 생각에 구름을 본다’는 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인용하면서 그것이 본디 근거 없는 설에 속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
한유(韓愈)의 문장은 고무적이어서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의기가 솟구치게 하고, 구양수(歐陽脩)의 문장은 깊은 정회를 읊는 것이어서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취하게 한다. - 이하는 정해년(1707, 숙종33)에 기록한 것이다. -
〈국풍(國風)〉과 〈이소경(離騷經)〉의 맛으로 문장을 지은 것은 오직 구공(歐公)만이 그러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풍락정기(豐樂亭記)〉, 〈현산정기(峴山亭記)〉 같은 것이 그것인가?” 하므로, 내가 이르기를 “근사하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장도 대체로 다 그러하니, 반복하여 깊은 정회를 읊은 부분을 살펴보면 그것이 바로 그러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현산정(峴山亭)은 본디 양숙자(羊叔子 양호(羊祜))를 위해 지은 것인데 구공(歐公)이 지은 기(記)에는 두원개(杜元凱 두예(杜預))와 아울러 동등하게 말하였으며 그 사이에 양숙자에게 중점을 둔 곳은 한두 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 가닥의 터럭으로 천 균(勻)을 끄는 힘이 있으며, 필세가 민첩하고 활달한 것이 마치 잠자리가 물 위를 날면서 꼬리를 수면에 스치고 곧 다시 날아오르는 것처럼 전혀 어느 한쪽에 구애되지 않는다. 대체로 한 편 안에 혹은 열고 혹은 닫고 혹은 잡고 혹은 놓는 것이 모두 의미가 있으면서도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으니,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노련한 문장가의 솜씨가 아니면 그러한 경지에 미칠 수가 없다.
경전 이외에는 《사기(史記)》, 《한서(漢書)》만이 여러 번 읽을 만하고 그 나머지는 비록 한유, 구양수의 문장이라 해도 수십 번을 읽을 수는 없다. 다만 증공(曾鞏)의 문장은 여러 번 읽을 만한데, 이는 바탕이 돈후하고 운치가 깊기 때문이다.
남풍(南豐 증공)이 지은 《전국책(戰國策)》 서문과 《열녀전(列女傳)》 서문은 의론이 특히 극히 순수하고 올바른 데다 작법이 또 전아(典雅)하여 서한(西漢)의 문장에 가까우니, 여러 번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증공의 문장은 순경(荀卿)의 문장과 비슷하고 소식(蘇軾)의 문장은 맹자(孟子)의 문장과 비슷하니, 순경의 문장은 풍부하여 자상하고 맹자의 문장은 간명하여 예봉이 있는데 두 사람도 문장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동파(東坡 소식)는 일찍이 맹자의 문장을 배운 것이 사실이나 남풍은 순경의 문장을 배웠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컨대 모두 재주가 비슷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남풍의 〈의황현학기(宜黃縣學記)〉는 정밀하고 깊이가 있으며 빈틈이 없는데, 선왕이 학교를 세운 뜻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내었다. 한(漢)나라, 당(唐)나라 이후로 유자(儒者)들에게는 이러한 식견과 의론이 전혀 없었다.
《열녀전》 서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문왕이 흥하게 된 까닭이 내조(內助)를 얻었기 때문임은 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까닭은 알지 못하는데, 이는 문왕이 덕행을 몸소 행하여 남을 감화시킨 데에 근본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 뜻은 극히 좋으니, 종래의 논자들은 이 점까지는 언급하지 못했다. 주자가 《시서변설(詩序辨說)》에서 이미 이 설을 분명히 드러내었고 《시경집전(詩經集傳)》의 주남편(周南篇) 뒤에 논한 것도 이러한 뜻이다.
《전국책》 서문에 “법(法)은 변화에 맞게 하는 것이므로 굳이 완전히 같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도(道)는 근본을 세우는 것이므로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스리는 의리를 극히 간결하고 타당하게 말한 것으로, 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바꿀 수 없다.
동파(東坡)의 정통론(正統論)은 그 설을 전혀 바꿀 수 없으니, 주 선생(朱先生)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취한 정통의 뜻도 이와 똑같다. 이 뜻은 본디 간결하고 쉬운 것인데 뒤에 정통설을 낸 이들은 모두 너무 지나치게 추론하였으니, 요컨대 억지로 일을 만든 것일 뿐이다.
남풍(南豐)이 왕심보(王深甫 왕회(王回))와 양웅(揚雄)의 일을 논한 것은 사리에 어긋난 설이 종종 있다. 그의 식견으로 그렇게까지 어긋난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본디 양웅을 너무 중하게 보아 맹자 이후에 으뜸가는 사람으로서 지조를 잃은 일은 그가 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처럼 말한 것이다. 의중에 조금이라도 치우친 점이 있으면 당장 바른 식견을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
한유(韓愈)의 문장 가운데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의 ‘사물이 평안함을 얻지 못하면[物不得其平]’ 한 구는 옛사람들이 간혹 문제점이 있지 않나 의심하기도 하였으니, 아래 글에 언급한 고요(皐陶), 기(夔), 이윤(伊尹), 주공(周公)이 평안함을 얻지 못하여 울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퇴지(退之 한유)의 ‘평안함을 얻지 못했다’는 말이 그저 뭔가에 감촉됨을 이르는 것으로 칠정(七情)이 발하는 것이 모두 그것이지, 비단 슬픔, 근심, 원망, 분함, 감개함, 억울함만이 평안하지 못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말에 대해서도[人之於言也]’와 ‘사람에 대해서도[其於人也]’의 두 구는 언뜻 보면 비록 서로 비슷해 보이기는 하나 실은 같지 않으니, 위의 구는 사람을 주체로 하여 말한 것이고 아래의 구는 하늘을 주체로 하여 말한 것이다. 이 서(序)를 자세히 살펴보면 맨 처음 사물의 울음을 말하고 다음으로 사람의 울음을 말하고 그 다음에 하늘의 울음을 말하였는데, 사물은 스스로 울 뿐이고 사람은 비단 스스로 울 뿐만 아니라 사물을 빌려 울 수도 있으니 예컨대 팔음(八音)이 그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울 수는 없고 오직 사물과 사람을 빌려서만 우는데, 사물에 있어서는 새, 우레, 벌레, 바람이 하늘이 빌려서 네 철에 우는 것이고 고요, 우(禹)부터 이고(李翶), 장적(張籍)까지는 하늘이 빌려 역대(歷代)에 우는 것이다.
“사람이 말에 대해서도 그러하다.[人之於言也 亦然]”는 것은 비단 사물만 평안함을 얻지 못하면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평안함을 얻지 못한 뒤에 운다는 말이고,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其於人也 亦然]”는 것은 하늘이 비단 사물에 대해서만 잘 우는 것을 가려서 그것을 빌려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잘 우는 사람을 가려서 그를 빌려 운다는 말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의 글에 열거한 역대에 잘 운 이들은 모두 하늘이 빌려 운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중간에 몇 개의 ‘하늘[天]’이란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하다. 예컨대 “하늘이 장차 부자를 목탁으로 삼을 것이다.[天將以夫子爲木鐸]”라 하고, “하늘이 그 덕을 추하게 여겨 돌아보지 않아서인가?[將天醜其德 而莫之顧]”라 하고, “하늘이 장차 그 소리를 화기롭게 하여 국가의 성대함을 울게 할까?[天將和其聲 使鳴國家之盛]” 하고, “세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三子者之命 則懸乎天矣]”로 끝을 맺었는데, 이는 모두 하늘을 주체로 하고 사람은 그저 하늘이 부리는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기는 문사로 울지 못하여[夔不能以文辭鳴]’라고 한 한 단락은 매우 재미있다. 하늘은 기(夔)를 빌려 우는데 기는 스스로 울지 못하여 또 스스로 소악(韶樂)을 빌려 운 것으로, ‘또[又]’와 ‘스스로[自]’라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실로 퇴지(退之)가 희극(戱劇) 비슷하게 말을 가지고 유희한 것인데, 우와 고요 이하의 운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그들을 빌려서 운 대상이지 스스로 운 것이 아님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구양수(歐陽脩)의 문장 가운데 왕 문정(王文正 왕단(王旦))의 비문은 오로지 정승의 사업만 서술하였고 호 안정(胡安定 호원(胡瑗))의 묘표(墓表)는 오로지 스승의 도만 서술하였고 매성유(梅聖兪)의 묘지(墓誌)는 오로지 시학(詩學)만 서술하였고 다른 일과 행적은 모두 생략하였으니, 요컨대 그는 일을 서술하는 데에 있어 이처럼 요체가 있었던 것이다.
왕 문정(王文正)의 비문에서 왕공이 진사가 된 것부터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기까지는 그 일을 서술한 것이 겨우 200자에 불과하나 정승이 된 뒤의 일을 서술한 것은 거의 천여 자에 달한다. 중간에 한림학사에서 추밀원(樞密院)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된 일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먼저 그 사람됨의 대략을 써서 정승에 걸맞은 인품이었음을 보이고, 또 전약수(錢若水)의 말을 인용하여 정승에 걸맞은 그릇이었음을 증명하고, 또 진종(眞宗)과 전약수가 문답한 말을 써서 크게 쓰일 조짐을 보였다. 그런 뒤에 비로소 정승에 제수된 일을 썼으니, 이들에 모두 지극한 법이 있다.
구공(歐公)의 문장 가운데 비문에 일을 서술한 것은 한결같이 서로 연관이 있는 일을 취합하여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법을 썼으니, 비단 연월(年月)의 선후를 순서로 삼았을 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왕 문정(王文正)의 비문은 평장사(平章事)에 제수된 일을 쓴 뒤에 곧 “정승이 되어서는 옛 일을 힘써 행하고……”라 하고 그 다음에 “정승 벼슬에 있는 10여 년 동안……”이라 하고 “지금까지 어진 재상으로 일컬어진다.”라고 끝맺어 그 대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또 세 단락으로 나누어 서술하되 한 단락은 사람을 기용하고 선비를 천거한 것, 한 단락은 과묵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었다는 것, 한 단락은 임금의 노여움을 잘 풀고 남의 죄에 대해 변론해 주었다는 것을 주제로 매 단락마다 각기 몇 가지 일을 가지고 실증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정승이 되어 펼친 사업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환히 밝혀졌다. 만약 후세 사람들이 일을 서술할 적에 단지 연월에 따라서만 순서를 삼은 것처럼 했더라면 이러한 일은 선후의 일이 섞여 나오는 만큼 그 요점을 짚어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구공이 일을 서술한 방법은 대체로 태사공(太史公)의 필법을 근간으로 한 것이니, 《사기》의 여러 전(傳)들을 자세히 보면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구공의 문장 가운데 두 기공(杜祁公 두연(杜衍)), 유원보(劉原父 유창(劉敞))의 묘지(墓誌)와 정원진(丁元珍 정보신(丁寶臣))의 묘표(墓表)는 일을 서술한 것이 더욱 복합적이고 변화가 많으니, 자세히 뜯어보아야 그 인물의 이력의 순서를 알 수 있다.
이목(李牧)의 아들이 이골(李汨)이고 이골의 아들이 이좌거(李左車)이고 이좌거의 10세손이 이응(李膺)이며, 그 뒤에 당나라에 이르러 또 이서균(李棲筠), 이길보(李吉甫), 이덕유(李德裕)가 있다. 《남풍집(南豐集)》에 실린 이우(李迂)의 묘지(墓誌)를 보면 이목은 이름난 장수였는데 그 손자 중에 또 좌거(左車)가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좌거는 스스로 진여(陳餘)를 위하여 한신(韓信)의 군대를 물리칠 계책을 낸 일 밖에는 더 이상 역사서에 보이지 않는데 그의 후세가 끊임없이 번창하여 이원례(李元禮), 이문요(李文饒) 같은 이가 연이어 나왔으니 더욱 기이하다.
명나라 말기의 문사(文士)들은 입을 열거나 붓을 놀릴 적에 걸핏하면 선(禪)의 이치를 말하곤 하였으나 실상은 모두 허무맹랑한 것이었으니, 선에 대해선들 어찌 터득한 것이 있었겠는가. 지금 《중랑집(中郞集)》을 읽어보면 한편으로는 선을 말하고 불가를 들먹이지만 한편으로는 술을 탐하고 여색에 연연하고 있으니, 이는 푸줏간이나 술집 사람이 경전을 외는 것과 같아 가소로울 뿐이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본디 욕망을 이치라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방종함을 좋아하고 검속함을 싫어하는 자들이 모두 그에 가탁하여 도피처로 삼는 것이니, 이는 형세상 당연한 것이다. 명나라 때의 학자들 중에 여요(餘姚 왕수인(王守仁))에서부터 그 맥을 이어받은 우강(旴江) 일파는 그 설이 더욱 창광(猖狂)하여 더 이상 기탄이 없다. 유학자라는 이들이 이와 같았으니 문사(文士)는 실로 말할 것도 없다. - 이하는 어느 해에 기록한 것인지 상세하지 않다. -
《삼선생논사록(三先生論事錄)》 서문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있는데 진동보(陳同甫 진량(陳亮))의 문집에도 있고,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실려 있는 한퇴지에 관하여 논한 한 단락은 《동파집(東坡集)》에도 보인다. 주자와 진동보, 정자와 소동파는 그 도가 어찌 연(燕)나라, 월(越)나라처럼 거리가 멀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문장이 이처럼 서로 혼재되어 있고 후세 사람들도 변별해 내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옛사람의 문집에는 다른 글이 잘못 섞여 들어간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퇴지에 관하여 논한 한 단락은 정자(程子)의 말임이 실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삼선생논사록》 서문은 아마도 진동보에게서 나온 것 같다. 아쉬운 대로 기록하여 이치를 아는 자가 질정해 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 정자가 이르기를 “한유도 근세의 호걸스러운 선비이니, 예컨대 〈원도(原道)〉의 말은 비록 병통이 있기는 하나……” 하였다. -
빗대자면 긴 수염 지닌 사람이 / 譬如長鬣人
긴 것을 괴롭다고 여기잖다가 / 不以長爲苦
하루아침 어떤 이 물어오기를 / 一朝或人問
잠잘 때에 어디에 두느냐기에 / 每睡安所措
돌아와 이불 위에 뒀다 내렸다 / 歸來被上下
온밤을 지새도 둘 곳이 없어 / 一夜著無處
뜬눈으로 새벽까지 뒤척이더니 / 展轉遂達晨
모두 뽑고 싶어한 일과 같구나 / 意欲盡鑷去
위는 동파(東坡)의 〈서초산윤장로벽(書焦山綸長老壁)〉 시이다. 전에 본 소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공포 어떤 사람이 수염이 길었는데 인종(仁宗)이 우연히 “경은 잠 잘 적에 수염을 이불 위에 두는가, 이불 밑에 두는가?”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대답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이불 위에 두어도 보고 이불 밑에 두어도 보았으나 모두 편안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파는 아마 이 일을 끌어 쓴 것 같은데 주석에서 인용하지 않았다. 소설은 무슨 책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살펴볼 일이다. - ‘어떤 이’는 채군모(蔡君謨 채양(蔡襄))가 아닌가 한다. -
[주D-001]육근(六根) : 이를 통해 대상을 깨닫는 작용인 육식(六識)을 낳는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근원을 말한다.
[주D-002]육진(六塵) : 육경(六境)과 같은 말로서, 육식(六識)으로 깨닫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주D-003]진여(眞如) :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우주 만유의 본체인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이르는 말이다.
[주D-004]마사(馬史)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가리킨다.
[주D-005]서응(徐凝)의 나쁜 시 : 서응은 당(唐)나라의 시인이다. 그가 지은 〈여산폭포(廬山瀑布)〉 시의 끝 구절에 “한 가닥 폭포가 푸른 산빛 깨뜨리네.[一條界破靑山色]”라 한 것에 대해 소식(蘇軾)이 속되고 비루하다고 비판하며 장난삼아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그중에 “폭포수가 흩뿌리는 물거품은 많건마는, 서응의 나쁜 시를 씻어 주지 않는구나.[飛流濺沫知多少 不與徐凝洗惡詩]” 하였다. 《東坡全集 卷12 世傳徐凝瀑布詩云云云作一詩》
[주D-006]저열한 …… 들어간다 : 시마(詩魔)는 시의 작법이나 기풍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 시상(詩想)이 괴벽한 것을 말한다. 송(宋)나라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의 〈시변(詩辯)〉에 “시를 배우는 사람은 식견을 위주로 하여 입문(入門)을 바르게 하고 뜻을 높이 세워야 하니, 한(漢), 위(魏), 진(晉), 성당(盛唐)의 시인을 스승으로 삼아야지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 이후의 인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위축되고 물러나면 저열한 시마가 폐부에 갈 것이니, 이는 뜻을 높이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7]서곤체(西崑體) : 당(唐)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시체를 본받아 고사를 나열하고 대구, 수사에 치중했던 오대(五代) 및 송(宋)나라 초기의 시풍을 말한다. 서곤이란 이름은 북송(北宋) 때 이러한 시풍을 숭상한 양억(楊億), 유균(劉筠)의 시집에서 유래된 것이다.
[주D-008]선배를 …… 뜻 : 《논어》 〈선진(先進)〉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가 “지금 사람들은 선후배들이 예악에 대해 한 것을 보고 선배들은 촌스러운 사람, 후배들은 군자라고 하는데, 내가 만일 예악을 쓴다면 나는 선배를 따르겠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악에 있어 바탕이 부족하고 문채가 넉넉한 것보다는 문채가 부족하고 바탕이 넉넉한 쪽을 선택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형식미는 부족하나 호방한 문장을 구사한 월사를 선배로 지칭하여 허여한 말이다.
[주D-009]실상은 …… 아니었다 : 송(宋)나라 증조(曾慥)의 《유설(類說)》 제51권 〈시원유격(詩苑類格)〉의 삼투조(三偸條)에서 시를 지을 때에 행해지는 세 가지 도적질을 소개하였는데, 남의 작품에서 어구, 뜻, 기세를 훔치는 것이 그것이다. 그중에 어구를 훔치는 것이 가장 둔한 도적이고, 기세를 훔치는 것은 재주가 공교롭고 뜻이 정밀하여 흔적이 없는 것이 흰 여우 갖옷을 훔쳐 내는 솜씨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흰 여우 갖옷을 훔쳐 내는 솜씨란 표시 나지 않게 남의 물건을 감쪽같이 훔쳐 내는 것을 말한다. 전국(戰國) 시대 때 진 소왕(秦昭王)에게 붙잡힌 맹상군(孟嘗君)이 소왕의 총애하는 여인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의 석방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문객(門客)을 시켜 전에 진 소왕에게 바쳤던 흰 여우 갖옷을 훔쳐 내게 한 일이 있었던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75 孟嘗君列傳》
[주D-010]좌사(左史)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리킨다.
[주D-011]부녀(婦女)의 재앙 :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것을 말한다.
[주D-012]급총서(汲冢書) : 진(晉)나라 부준(不準)이 도굴한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가 유실된 책들로, 선진(先秦) 시대의 과두문자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신빙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글이다.
[주D-013]제동야언(齊東野言)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 말로, 제(齊)나라 동쪽의 야인(野人)들이 길거리에서 퍼뜨리는 근거 없는 말이다.
[주D-014]공자가 …… 것 :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내용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가 노(魯)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었는데, 그 말이 쓰이지 않고 이어서 제사 지낸 고기가 이르지 않자 면류관을 벗고 떠났다. 이것에 대해 공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기 때문에 떠났다 하고, 공자를 아는 사람들은 무례(無禮)한 것 때문에 떠났다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사소한 죄를 구실로 삼아 떠남으로써 구차히 떠나지 않고자 한 것이니, 군자가 하는 바를 뭇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15]하서(河西)의 삼명(三明) : 삼명은 자(字)에 ‘명(明)’ 자가 있는 후한 시대의 세 사람을 말하는데, 자가 기명(紀明)인 단경(段熲), 자가 위명(威明)인 황보규(皇甫規), 자가 연명(然明)인 장환(張奐)을 가리킨다.
[주D-016]푸른 …… 삼키는데 : 푸른 언덕이 못과 초목을 포용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상대방이 넓은 도량으로 변변찮은 자신을 포용함을 빗댄 것이다.
[주D-017]진랑(秦郞)은 …… 올릴쏜가 : 진소유(秦少游)가 머지않아 천자에게 문장을 인정받아 크게 영달할 것이라는 말이다. 후한(後漢) 안제(安帝) 때에 마융(馬融)이 〈동순송(東巡頌)〉을 올리자 안제가 그 문장을 기특하게 여기고 그를 불러 낭중(郞中)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60上 馬融列傳》 진소유는 진관(秦觀)이다.
[주D-018]미친 …… 형 상서(邢尙書)는 : 형 상서는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형서(邢恕), 곧 형거실(邢居實)의 아버지를 가리킨다. 광사(狂士)는 일 처리에는 미숙하면서 뜻이 원대하여 진취적인 기상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로,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에 있으면서 노(魯)나라의 광사를 그리워했다는 말이 나온다.
[주D-019]본디 …… 했네 : 신종(神宗)이 병들었을 때에 형서(邢恕)가 선인태후(宣仁太后)의 조카 공회(公儈), 공기(公紀)를 종용하여 연안군왕(延安郡王)을 태자로 옹립하려 했던 일을 말한다.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도리어 선인태후를 무고하여 당고(黨錮)의 화를 일으켰는데, 뒤에 이로 인해 파직되었다. 《宋史 卷471 邢恕傳》 연안군왕은 뒤에 철종(哲宗)이 되었다.
[주D-020]만약 …… 말렸다면 : 형거실(邢居實)이 20세의 젊은 나이로 그의 아버지 형서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21]사람이 …… 구 : 위 항목에 이어 한유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아래 항목도 마찬가지이다.
[주D-022]팔음(八音) : 악기를 만드는 재료에 따라 나눈, 아악(雅樂)에 쓰는 여덟 가지 악기를 말한다. 여덟 악기의 재료는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이다.
[주D-023]이목은 …… 일이다 : ‘좌거(左車)’에는 현자(賢者)를 우대하기 위해 수레의 왼쪽 자리를 비워 둔다는 뜻도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농암집(農巖集)제34권 <잡지(雜識)>
[세상에서 진희이가 송 나라 태조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世言陳希夷與宋祖同年生非也]]
진희이(陳希夷)가 송(宋) 나라 태조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세상의 말은 잘못되었다. 희이는 후당(後唐) 장흥(長興 930~933년) 연간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했다가 급제를 하지 못하자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는데, 이때 예조(藝祖)는 태어난 지 겨우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희이와 동갑이 될 수 있겠는가. 다만 희이가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를 알 수 없을 따름이다.
[주D-001]진희이(陳希夷) : 사호(賜號)가 희이 선생(希夷先生)인 송 나라 진단(陳摶)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위백양(魏伯陽)이 만든 태극도(太極圖)가 그에게 전수되고, 다시 여러 사람을 거쳐 주돈이(周敦頤)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주D-002]예조(藝祖) : 문덕(文德)을 소유한 시조(始祖)라는 뜻으로,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오는데, 보통은 송(宋) 나라 태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에 대해 청(淸) 나라 고염무(顧炎武)는 “사람들은 송 나라 사람들이 자기 태조(太祖)를 예조(藝祖)로 부르는 것만 알지, 이전 시대부터 태조를 예조라고 해 온 사실은 모르고 있다.” 하였다. 《日知錄 藝祖》
-계곡집(谿谷集) > 계곡만필 제1권 > [만필(漫筆)]
무술년(1898) 7월
3일
갑인. 비.
박 대감 온재(溫齋)가 지은 설문(說文)이 있는데 방금 고쳐 지운 곳이 있으니 나에게 정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밥을 먹은 뒤 가서 썼다. 밤에 강 진사(姜進士)와 또 시를 읊었다.
악목탐천공비린(惡木貪泉共比隣) / 악목과 탐천이 함께 이웃이니
종래계화미생신(從來計話未生新) / 종래의 계책을 새로 내지 않았네.
당추선음능유세(當秋蟬飮能遺世) / 가을에 매미처럼 마시며 세상을 잊고
철야공음사한인(徹夜蛩音似恨人) / 밤새 귀뚜라미 소리 사람을 한탄하는 것 같네.
각선오호소식원(却羨五湖消息遠) / 오호의 소식이 부럽지만 소식이 아득하고
만심삼도몽혼빈(謾尋三島夢魂頻) / 부질없이 삼도를 찾은 꿈을 자주 꾸네.
수군원향선원리(隨君願向仙源裏) / 그대 따라 선원 속으로 향하고 싶으니
염득도화만수춘(斂得桃花萬樹春) / 복사꽃 얻으면 모든 나무에 봄이 오리.
영남인이 나귀를 송사(訟事)하여 인아가 변백(辨白)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훔쳐서 판 정(鄭)은 방금 잡혀서 경무청에 갇혀 징역 하는 것을 보니 장차 재판을 하려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 정과 대변(對辨)할 수 없으니, 아래에서 상의하여 결말을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인아가 부득이 내려와 안정기(安鼎基)ㆍ정창섭(鄭昌燮) 두 사람과 함께 3등분을 하여 나귀값 235냥을 징급하도록 귀정하였다. 진희이(陳希夷)의 〈산명자미수(算命紫微數)〉를 등초(謄抄)하였다.
[주D-001]설문(說文) : 조선 말기의 문신 박선수(朴瑄壽, 1821∼1899)가 지은 《설문해자익징(說文解字翼徵)》을 의미함. 박선수는 호가 온재(溫齋)로,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다.
[주D-002]악목과 …… 이웃이니 : 악목(惡木)은 질이 나쁜 나무이고, 탐천(貪泉)은 마시면 탐욕스러워진다는 중국 광동성의 우물로서, 모두 불의(不義)의 뜻으로 쓰인다.
[주D-003]오호(五湖) : 중국 태호(太湖) 부근에 있는 5개의 호수.(《後漢書》)
[주D-004]변백(辨白) : 사리를 분변하여 밝힘. 변명(辨明).
[주D-005]진희이(陳希夷) : 중국 공포 때 화산(華山)에 살던 도사인 진단(陳摶). 《자미두수(紫微斗數)》는 자미성과 북두칠성의 빛과 위치를 보아 길흉을 점치는 책으로, 진희이가 지었다.
-<<하재일기(荷齋日記)>>5 무술년(1898) 7월
황 연풍(黃延豊)에게 답함 - 갑신년 4월
진한(秦漢) 이후로 역학(易學)은 그 올바른 전통을 잃었으니, 경(京 경방(京房))ㆍ곽(郭 곽박(郭璞))의 무리는 그 지류만 얻었을 뿐 본원에는 어두웠으며 오직 수련가(修練家)들만이 비밀히 서로 전수하였으니, 《참동계(參同契)》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체로 참은 ‘잡(雜)’, 동은 ‘통(通)’, 계는 ‘합(合)’의 뜻이니, 《주역》과 이치가 통하고 뜻이 합함을 말하는데 그중에 납갑법(納甲法)은 무엇보다도 요지(要旨)입니다. 선천도(先天圖)도 숨겨져 전해 오지 않다가 진단(陳摶)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나왔는데 진단은 사실 백양(伯陽 한 나라 위백양(魏伯陽))의 부류입니다. 소자(邵子 송 나라 소옹(邵雍))가 이 그림을 얻어서 과거를 헤아리고 미래사를 아는 뜻을 밝혀냈으며, 그런 다음에 비로소 공자의 《대전(大傳)》의 말씀과 서로 부합되었습니다. 주자는 이 책을 《역》의 할아버지라 하고 또 납갑법과 상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체로 저 방술가(方術家)들은 그저 이것을 빌려 동정과 진퇴를 관측하는 뜻을 붙였을 뿐, 본디 《역》의 이치를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참으로 복희(伏羲)가 괘를 그은 본의를 추구한 점이 있으므로 이모저모로 궁리하여 그것을 통한다면 매우 오묘한 곳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자께서 일찍이 이 책에 마음을 두시어 채계통(蔡季通 채원정(蔡元定))ㆍ원기중(袁機仲 원추(袁樞)) 등 제유(諸儒)와 나눈 말씀이 매우 많았으며, 다른 판본과 서로 대조 교정하고 뒤쪽에 발문을 쓰기까지 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은 《대전(大全)》에 나와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른바 《참동주주(參同朱註)》라는 것은 다름아닌 유씨 염(兪氏琰)이 모아 편집한 것이고, 이른바 부록(附錄)은 황씨 서절(黃氏瑞節)이 주자께서 평소에 이 책에 대해 언급하신 말씀을 채집하여 참고하고 궁리할 수 있는 자료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들은 다 완비되지 못하고 소략하여 핵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드러내 밝히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추측컨대 주자께서 시종 이 책을 좋아하여 보셨던 것은 그저 문장이 고상하고 질박해서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세상에 전해 오지 않는 묘리를 찾고 궁리하여 희경(羲經 《주역》의 별칭)을 돕는 자료로 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께서 저술하신 책은 연보와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이 《참동계》의 주는 실리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주D-001]납갑법(納甲法) : 한(漢) 나라 경방(京房)과 삼국(三國) 우번(虞翻)이 《주역》의 이치를 해설한 법인데, 팔괘(八卦)를 십간(十干)ㆍ오행(五行)ㆍ오방(五方)과 서로 배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건곤(乾坤)의 효(爻)는 갑을(甲乙)ㆍ목(木)ㆍ동(東)이고, 간태(艮兌)는 병정(丙丁)ㆍ화(火)ㆍ남(南)이고, 감리(坎離)는 무기(戊己)ㆍ토(土)ㆍ중(中)이고, 진손(震巽)은 경신(庚辛)ㆍ금(金)ㆍ서(西)이고, 건곤(乾坤)은 임계(壬癸)ㆍ수(水)ㆍ북(北)에 속하는데, 후세의 복서가들이 괘효를 간지와 오행에 분배하는 기초가 되었다. 《夢溪筆談 卷7 象數1》
-한수재집(寒水齋集) > 한수재선생문집 제5권
세종(世宗)이 진단(陳摶)을 불러서 치도(治道)를 묻지 않고 신선이 되는 방법과 연단(鍊丹)하여 금을 만드는 술법을 물었으니, 독자들이 이것을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세종이 비록 치도를 물었더라도 진단이 반드시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겠다. 세종이 오대(五代)의 임금 중에 진실로 훌륭하기는 하나, 그가 천하의 진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고명(高明)한 진단이 그 점을 알지 못했겠는가. 송 태종(宋太宗)은 천하의 진짜 주인이었는데도 진단은 오히려 속에 있는 생각을 모두 토로하려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세종에게 있어서랴. 그렇다면 세종이 치도를 묻지 않은 것에 대해 한탄하는 자들은 세종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진단의 고명한 점도 알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유학 이진관(李鎭觀)이 대답하였다.]
진단이 세종에 대해서 만일 진짜 주인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나온 것이라면 그 식견이 고명하지 못한 것이요, 그 식견이 고명하지 못하다면 어찌 세상을 도야하고 만물을 생장하여 성숙시키는 지극한 도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평론하는 자들이 진단이 세종을 위하여 세상에 나온 것에 대해서는 한탄하지 않고 단지 세종이 치도를 묻지 않은 것만을 한탄하니, 당연히 한탄해야 할 것을 한탄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경사강의(經史講義) 56 ○ 강목(綱目) 10
[후주 세종(後周世宗)]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9권 > 경사강의(經史講義) 56 ○ 강목(綱目) 10
주자대전(朱子大全) 1 갑인년(1794)에 문신 김근순(金近淳), 이존수(李存秀), 김희락(金煕洛)을 선발하였다
채계통에게 답한 편지[答蔡季通書]에, “《참동계(參同契)》의 설은 그 이치를 자세히 미루어 찾아보건대, 한 호흡 사이에 곧 초하루와 그믐, 상하현(上下弦)과 보름이 있다.”고 하였는데, 신 김근순(金近淳)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참동계》는 도가(道家)의 수련서(修鍊書)로, 주자가 감흥시(感興詩)에서 그 이치에 어긋나고 도와 위배되는 실상을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만년에 와서는 채계통(蔡季通)과 자주 편지를 왕복하며 《참동계》에 관해 논하였으니, 이는 실로 신 같은 후생 말학(後生末學)이 감히 논급(論及)할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당시 위학(僞學)에 대한 금령(禁令)이 화급하여 죄망(罪網)이 조여 왔으니, 정안(淨安)의 별석(別席)에서 유독 이 《참동계》를 강론하신 것은 어쩌면 주자에게 은미한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소 강절(邵康節)의 학문은 희이(希夷)에게서 얻었고 희이의 학문은 《참동계》에서 얻었은즉, 연(燕) 나라와 제(齊) 나라의 바닷가에 사는 도사(道士)들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가 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30권 고식(故寔)2
주역강의(周易講義) 5권 사본 ○ [신해년(1791, 정조15) 편찬]
조문(條問) 및 계묘년(1783, 정조7)에 뽑은 《강의(講義)》 4권은 을사년(1785, 정조9)에 각신 김희(金憙)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이고, 조문 및 갑진년(1784, 정조8)에 뽑은 《강의》 1권은 신해년(1791, 정조15)에 초계문신(抄啓文臣) 서유구(徐有榘)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이다.
《주역》이라는 책은 그 내용이 광대무변하고 세상의 모든 이치를 포함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제각각 해설을 하여도 대개 다 뜻이 통한다. 경방(京房)은 괘상(卦象)의 변화로써 《주역》을 풀이하여 점을 쳐서 예언하는 책으로 생각하였고, 비직(費直)은 역전(易傳)의 글 뜻을 가지고 《주역》을 설명하여 그 장구(章句)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왕필(王弼)은 《주역》에 있어서 노장(老莊)의 현허(玄虛)함을 종지(宗旨)로 여겼고, 진단(陳摶)은 상수(象數)를 부연(敷衍)하였는데, 모두 각각 그 지향하는 바를 지극히 하여 나름대로 《주역》에 있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문왕(文王) 및 주공(周公)의 《주역》과 공자(孔子) 및 그 문하(門下)의 십익(十翼)에 비추어 보면 또한 편견에 얽매인 것이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치의 일면을 얻은 것일 뿐이다. 이천(伊川)의 《역전(易傳)》은 한결같이 궁행(躬行)에서 출발하였기에 단사(彖辭)만 보면 《주역》의 반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여겼으며, 자양(紫陽 주자(朱子))의 《본의(本義)》는 이수(理數)를 겸비하여 우뚝하게 사변상점(辭變象占)의 《주역》이 되었다. 학자들이 전의(傳義)를 바탕으로 공자와 그 문하의 십익의 의미를 이해하고 공자와 그 문하의 십익을 바탕으로 문왕의 괘사(卦辭)와 주공의 효사(爻辭)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주역》의 정맥(正脈)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자(朱子) 이후로 500년을 내려오면서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이 점점 많이 나왔다. 그 가운데 선천(先天)을 의심한 사람으로는 원추(袁樞)와 임률(林栗) 같은 이들이 있고, 하도(河圖)를 배격한 이로는 항안세(項安世)와 왕위(王褘)의 무리가 있다. 설시(揲蓍)에 여책(餘策)을 쓰고 삼변(三變)하여 모두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주자를 존숭하는 이광지(李光地) 같은 이들까지도 주자의 설을 버리고 곽옹(郭雍)의 주장을 따랐으니, 어찌 정자(程子)가 선천(先天)을 말한 적이 없다고 생각해서이겠는가. 그리고 하도(河圖)에 보이는 흑점(黑點)과 백점(白點)은 유목(劉牧)의 설에서 나온 것이고, 관랑(關朗)의 《통극경(洞極經)》은 완일(阮逸)의 손에서 나왔으며 설시(揲蓍)에 정책(正策)을 쓰고 이변(二變)하여 나누지 않은 것은 또 이천(伊川)과 횡거(橫渠)의 학설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학자들이 주자가 취사(取舍)한 것에 대하여 의혹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성인(聖人)의 손을 거친 것은 한 글자도 비평할 수 없다.” 하였으니, 주자와 같은 총명함과 역량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주자가 취사(取舍)한 것의 시비를 어떻게 가릴 수 있겠는가. 학자들은 마땅히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에서 밝힌 의리(義理)를 깊이 연구하고 《본의(本義)》에서 말한 상수(象數)를 반복해서 음미하여 의리는 모두 내용 없는 허리(虛理)가 되지 않고, 상(象)은 모두 실상(實象)이 되도록 한다면, 자연히 《주역》의 가르침인 결정정미(潔淨精微)의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만 복잡한 이론(異論)에 묶여서 기준이 없는 것은 《주역》을 읽는 바른 방법이 아니다.
내지덕(來知德)의 괘종(卦綜)과 모기령(毛奇齡)의 괘변(卦變)은 한유(漢儒)들이 말한 것을 훔쳐다 정자와 주자를 헐뜯은 것이니 이는 또 무슨 마음인가. 주자는 강유(剛柔)와 왕래(往來)를 말할 때면 언제나 괘변(卦變)을 썼다. 다만 한유(漢儒)들처럼 견강부회와 천착(穿鑿)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왕보사(王輔嗣)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한유들의 설을 정자와 주자가 잘 몰랐다고 한다면 누가 믿으려고 하겠는가. 정자의 《역전》은 의리를 가지고 상수(象數)를 추론한 것이고, 주자의 《본의》는 상수에다 의리를 실은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학자들의 주장에서 보이던 편고(偏枯)의 흠은 없어지고 대역(大易)의 충만하는 쓰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수(象數)는 밖을 향해 치달려 나가기 쉽고 의리는 체험에 절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조문(條問) 수백여 항목은 의리(義理)의 측면에서 논한 것이 대부분이고 간간이 상수를 참고한 것도 있으니, 독자들은 이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 내가 신축년에 하교(下敎)하기를,
“문풍(文風)이 진작(振作)되지 않는 것은 인재 양성을 위한 방법의 기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명망(名望) 있는 뛰어난 인재의 배출은 논할 수도 없고, 문장과 같은 하찮은 재주도 단계를 뛰어넘어 갑자기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부단히 연마하고 고무 격려한 후에야 재주를 이루어 실제에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의 젊은 문관(文官)들은 과거(科擧)에만 급제하면 곧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여 책 한 자도 읽지 않고 글 한 줄도 짓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히 서적은 묶어서 버려두고 무엇 하는 물건인지 도무지 관심이 없다. 이러한 분위기가 점점 고질이 되어 바로잡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경(專經)의 규례와 월과(月課)의 정식이 있기는 하지만 무수히 시행하였다 말았다를 반복하여 이름과 실제가 맞지 않고 있다. 조정에서 권면하는 바가 이미 그 방도에 어긋나니 신진(新進)이 게으르고 소홀히 하는 것만을 탓할 수도 없다.
내가 지난번에 10가지 일로 나 자신을 책(責)할 때 인재(人才)가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 간절히 말한 적이 있다. 대개 인재는 한 가지 기준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문학(文學)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그들이 덕행(德行)을 쌓아 사업(事業)으로 발현하는 것에서부터 임금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피폐한 풍속을 정화하며 국가의 흥성(興盛)을 노래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실로 세도(世道)의 쇠퇴와 융성 및 치교(治敎)의 흥기와 쇠락에 관계가 있으니, 어찌 작은 보탬만이 될 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옛날의 제도를 본떠서 교육 제도를 만들어 인재를 기르는 방법으로 삼고자 한다면, 호당(湖堂) 제도는 너무도 간단해서 한갓 분경(奔競)의 풍조만 열어 줄 것이고, 지제교(知製敎)를 두는 방법은 점점 미약해져서 도리어 외람되고 자질구레한 규식에만 얽매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문신(文臣)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나이를 제한하고 선발 대상을 넓혀서 매달 경사(經史)를 강하고 열흘마다 정문(程文)을 시험 보여 월말에 모아서 점수를 매기고 근만(勤慢)을 비교하여 상벌(賞罰)을 행한다면, 문풍(文風)을 진작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이니, 문신(文臣) 참상(參上)과 참하(參下)에서 나이 몇 세 이상을 뽑아 보고하라.”
하였다.
마침내 이해부터 새 급제자가 발표되고 나면 묘당(廟堂)에서 상의하여 괴원(槐院)에 분관(分館)된 사람 중 37세 이하로서 문학(文學)과 식견이 있어 가르칠 만한 자를 뽑아 보고하고, 이들을 초계문신(抄啓文臣)이라 불렀다. 오경(五經)과 사서(四書)를 윤강(輪講)하고, 혹은 연석(筵席)에 나와 발문(發問)ㆍ토론하고 혹은 문제를 내어 답변의 우열을 매기는 한편 각신(閣臣)과 초계문신들에게 지시하여 계속해서 편집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경서강의(經書講義)’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다. 조문(條問)은 전편을 그대로 실었고, 신하들의 대어(對語)는 절략(節略)해서 해당 조문의 아래에 붙였다.
周易講義 寫本. 奎4532
[주D-001]조문(條問) : 의의조문(疑義條問) 혹은 경의조문(經義條問)의 줄임말이다. 즉 정조가 초계문신(抄啓文臣)을 비롯하여 일반 유생(儒生)들의 학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경서의 내용 중 의미의 이해가 어려운 부분을 조목조목 문제로 만든 것이 조문이다. 정조는 초계문신을 창설한 뒤 한겨울이나 무더위 때 경연을 중지하는 대신에 강학(講學)해야 할 부분의 처음부터 끝까지 난해한 부분을 조문으로 뽑아서 그들로 하여금 집에서 조목조목 대답을 적어 오게 하였다. 《弘齋全書 卷166 日得錄6 政事1》 현재 공장(公藏)되어 있는 것으로는 《어제맹자조문(御製孟子條問)》(奎1026), 《어제서전조문(御製書傳條問)》(奎12233)이 있으며, 《주역》, 《상서》, 《모시(毛詩)》, 《춘추》, 삼례(三禮),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모든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어제조문(御製條問, 국립중앙도서관장 한古朝01-19)이 있다. 이런 조문들은 대개 정조 초년인 1781년(정조5)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후에도 간헐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조는 이 조문을 초계문신뿐만 아니라 일반 유생에게도 시험 문제로 제시하였는데, 그중 우수한 답안을 선정하여 묶은 것이 바로 《강의(講義)》이다. 《正祖實錄 15年 5月 9日》
[주D-002]경방(京房) : 한(漢) 나라 사람으로 양(梁)의 초연수(焦延壽)에게 《주역》을 배워서 정통하였으며, 특히 재변(災變)에 대한 점을 매우 잘 쳤다. 저서로는 《경씨역전(京氏易傳)》 3권이 있다. 《中國學藝大事典 京房》 《漢書 卷75 眭兩夏侯京翼李傳 京房》
[주D-003]비직(費直) : 한(漢) 나라 사람으로, 거북점과 시초점을 잘 쳤다. 또한 《주역(周易)》에 장절(章節)과 구두(句讀)가 구분되지 않았었는데 비직이 단지 단(彖), 상(象), 계사(繫辭), 문언(文言) 등 10편으로 상경과 하경을 해설하였다. 저서로는 《역림(易林)》 2권, 《주역장구(周易章句)》 10권이 있다. 《漢書 卷88 儒林傳 費直》
[주D-004]진단(陳摶) : 오대 송초의 유명한 도교학자이자 신선가(神仙家)로서, 그의 학문은 송대의 내단도(內丹道) 및 상수역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진단의 《주역》 해석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도식(圖式)을 이용하는 방식인데, 이는 연단(鍊丹)의 과정을 도식을 이용하여 설명해 온 도가(道家)의 전통을 계승한 측면이 있다. 《廖名春 등 지음, 심경호 옮김, 주역철학사, 예문서원, 1998》
[주D-005]원추(袁樞) : 자는 기중(機仲)이며, 송대(宋代)의 학자이다. 저서에 《역전해의(易傳解義)》, 《동자문(童子問)》, 《학역색은(學易索隱)》,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등이 있으나 《통감기사본말》을 제외한 책은 모두 실전되고 전하지 않는다. 《宋史 卷202 藝文志1, 卷389 袁樞列傳》
[주D-006]임률(林栗) : 남송(南宋)의 학자로, 자는 황중(黃中)이며,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지냈다. 《주역(周易)》과 서명(西銘)에 대하여 주희(朱熹)와 토론하다가 의견이 갈리자 상소하여 주자의 도학(道學)을 공격하였다. 저서로 《주역》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담은 《주역경전집해(周易經典集解)》 36권이 있다. 《宋史 卷394 林栗列傳》 《四庫全書總目提要 卷3 經部3 易類3》
[주D-007]항안세(項安世) : 자는 평보(平父), 호는 평암(平庵)으로, 송대의 경학자이다. 경원(慶元) 연간에 당금(黨禁)이 일어나 주희(朱熹)가 위학(僞學)으로 배척받을 때 상소하여 변호하다가 위당(僞黨)으로 몰려 강릉(江陵)에 좌천되었다. 강릉에 있으면서 경학의 연구에 몰두하여 《주역완사(周易玩辭)》 16권을 지었다. 그의 역설(易說)은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의 의리를 밝히는 것을 중심으로 하면서 정전(程傳)에서 다루지 않은 상수(象數)까지 언급하여 《주역》의 뜻을 해석하였다. 《宋史 卷397 項安世列傳》 《四庫全書總目提要 卷3 經部3 易類3》
[주D-008]유목(劉牧) : 자는 선지(先之), 호는 장민(長民)으로, 송대의 경학자이다. 송대 역학자 중 도서파(圖書派)의 수창자로, 충방(种放)에게서 역학을 배웠는데, 충방은 진단(陳摶)의 문도(門徒)이다. 《송사》 예문지에는 그의 저서로 《신주주역(新註周易)》 11권, 《괘덕통론(卦德通論)》 1권, 《역수구은도(易數鉤隱圖)》 1권, 《왕필역변(王弼易辨)》 2권이 저록되어 있다. 그중 《역수구은도》가 《사고전서총목제요》 역류(易類)에 채록되어 전한다. 《四庫全書總目提要 卷2 經部2 易類2》
[주D-009]관랑(關郞)의 …… 나왔으며 : 《통극경(洞極經)》은 《송사》 예문지의 유가류(儒家類)에 보이는 《통극원경전(洞極元經傳)》 5권을 가리킨다. 주자에 의하면 이 책은 그가 역리(易理)를 풀이한 《관랑역(關郞易)》, 병서(兵書)인 《이공문답(李公問答)》과 함께 남송의 완일(阮逸)이 지은 위서(僞書)라 한다. 완일의 자는 천은(天隱)으로, 저서에 《역전(易筌)》 6권 등이 있다. 《朱子語類 卷129 本朝3 自國初至煕寧人物》
[주D-010]내지덕(來知德)의 괘종(卦綜) : 내지덕의 자는 의선(矣鮮), 호는 구당(瞿塘)으로, 명대(明代)의 경학자(經學者)이다. 평생 학문에 심취하여 문달(聞達)을 바라지 않았으며, 특히 《주역》의 연구에 진력하여 29년의 노력 끝에 《주역집주(周易集註)》 16권을 지었다. 그의 역학(易學)의 입설(立說)은 오로지 계사전(繫辭傳)의 “착종기수(錯綜其數)”라고 한 말을 가지고 역상(易象)을 논하는 것이다. 그는 한대(漢代) 이후 상수학(象數學)의 집대성자로 불린다. 《四庫全書總目提要 卷5 經部5 易類5》
[주D-011]모기령(毛奇齡)의 괘변(卦變) : 모기령의 자는 대가(大可), 호는 서하(西河)로, 청초(淸初)의 경학자(經學者)이다. 주역에 관한 저서로 《중씨역(仲氏易)》 30권, 《추역시말(推易始末)》 4권, 《춘추점서서(春秋占筮書)》 3권, 《역소첩(易小帖)》 5권, 《역운(易韻)》 4권, 《하도낙서원천편(河圖洛書原舛編)》 1권 등이 있다. 그의 역학은 박학(樸學)을 제창하여, 순상(荀爽)ㆍ우번(虞翻) 등의 한역(漢易)을 연구하여 괘변(卦變)과 괘종(卦綜)의 법을 발명하고 송대의 도서학(圖書學)을 비판하였는데, 특히 주희(朱熹)의 설을 공격하였다. 《寥名春 등 지음, 심경호 옮김, 주역철학사, 예문서원, 1998》
[주D-012]문풍(文風)을 …… 보고하라 : 이 글은 강제문신설치교(講製文臣設置敎)라는 제목으로 《홍재전서(弘齋全書)》 제31권에 수록되어 있다. 《정조실록》 5년 2월 17일 조에도 보이는데, 두 글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주역강의(周易講義) 5권 사본 ○ [신해년(1791, 정조15) 편찬]
-<<홍재전서(弘齋全書)>>제180권 <군서표기(羣書標記)> 2 ○ 어정(御定) 2
상이 이르기를, “소자(邵子)의 선천학(先天學)은 매우 바른 것으로서, 화산(華山) 진단(陳摶)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희이 선생(希夷先生)의 선천상수도(先天象數圖)와 이것을 풀이한 강절(康節)의 글은 도가(道家)의 발단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하였다.
-<<홍재전서(弘齋全書)>>제164권 <일득록(日得錄)>4
상서를 읽고[讀尙書] 5수
후직이 사실 죄가 없는데 / 后稷實無罪
땅에 떨어지자 버림을 당하다니 / 落地爲棄人
하마터면 백성들 살릴 솜씨꾼이 / 殆哉活民手
재먼지가 되고 말 뻔했지 / 幾乎成灰塵
신명이 돌보지 않았던들 / 明神苟不顧
새짐승이 그리도 인자했으랴 / 禽畜乃能仁
단후가 비록 불초하다고 해도 / 丹侯雖不肖
직이나 설과는 여하 가까운 사이였는데 / 稷契乃懿親
어찌하여 하늘의 사랑을 / 如何薦天寵
멀리 미천한 사람에게 가게 했던가 / 遠及側陋人
엄연히 직과 설을 신하 삼았던들 / 儼然臣稷契
민심을 크게 얻었을 것이지만 / 因之大得民
의심도 않고 부끄러워도 안 했으니 / 不疑亦不耻
어쩌면 마음 그리 순박했을까 / 心志何其淳
단목은 기가 궁한가 했고 / 端木疑夔窮
공부자는 치우치다고 했는데 / 夫子謂夔偏
백이가 기에게 양보한 것은 / 伯夷實讓夔
기가 어질다는 마음에서였겠지 / 其心謂夔賢
또래가 분명 더 잘 알았을 것인데 / 同列必知德
그의 전문이 왜 한 가지 예술이었겠는가 / 一藝豈所專
그런데 예에 훤했던 그를 / 嗟哉達禮士
일개 악관으로만 알게 만들다니 / 獨以伶官傳
희도는 역량이 부족하고 / 姬度力量小
또 천명도 모르는 자였지 / 且未識天命
온 천하가 다 은을 그리워하기에 / 普天皆懷殷
자기 힘으론 통일천하 못할 것을 알고 / 自揣終莫定
면면히 이어온 유태 제사도 / 綿綿有邰祀
차마 자기 대에서 끊기게 할 수는 없어 / 不忍於吾竟
차라리 두형을 제치고 / 寧割二兄恩
서백의 성스러움을 드러냈던 것 아닌가 / 以彰西伯聖
아무래도 찜찜한 그 뜻이 / 此意終晻昧
만고토록 왜 밝혀지지 않을까 / 萬古何由暝
상용은 일개 간인이었는데 / 商容一奸人
그를 의사로 정표하다니 / 迺以義士旌
문신이래야 무인 바탕이고 / 羽籥馮馬徒
권모술수 쓰면 의병이 아니지 / 狙詐非義兵
직필을 든 사가가 있었던들 / 史家有直筆
수란의 죄를 면치 못했으리 / 寧逃首亂刑
사실 진승과 같은 무리였고 / 陳勝實同調
도남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 圖南可齊名
[주D-001]후직이 …… 당하다니 : 후직(后稷)은 뒤에 주(周)의 시조(始祖)이자 요(堯)의 신하로서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임. 그의 어머니 강희(姜姬)가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느낌을 받아 그를 잉태하여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게 여겨 좁은 골짝에다 내다버렸으나 지나가는 마소들이 그를 밟지 않고 피해 갔다. 그리하여 다시 얼음판 위에다 버렸더니 이번에는 새가 와서 날개로 덮어주는 것이었다. 그를 이상히 여겨 다시 주워다 기르면서 그의 이름을 기(棄)라고 하였다는 것임. 《史記 卷4》
[주D-002]단후 :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를 이름.
[주D-003]단목 : 공자의 제자 단목 사(端木賜)를 말함.
[주D-004]기 : 순(舜)의 신하 이름. 당시 전악관(典樂官)이었음.
[주D-005]공부자는 …… 했는데 : 노 애공(魯哀公)이 공자에게 묻기를, “옛 악정(樂正) 기(夔)가 발이 하나[一足]였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기가 사람이었는데 왜 발이 하나이겠습니까. 다만 그가 다른 특이한 것은 없었지만 성율(聲律)에만은 능통하여 요(堯)가 하는 말이, 악(樂)인 경우 기 하나로도 족하다[一而足] 하고는 그를 악정(樂正)으로 삼았던 것인데, 그것이 잘못 발이 하나인 것으로 전해진 것이지 사실은 발이 하나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고 함. 《韓非子 外儲說 左下》
[주D-006]백이가 …… 마음에서였겠지 : 상대가 자기보다 나을 것이라는 마음에서 양보한 것이겠지. 순(舜)이 사악(四岳)에게 물어 삼례(三禮)를 맡을 인물을 추천하라고 했을 때 모두 백이(伯夷)라는 신하를 적격자로 추천했는데 이때 백이는 그것을 기(夔)와 용(龍)에게 양보하였음. 《書經 舜典》
[주D-007]희도 : 주 무왕(周武王)의 아우 채숙(蔡叔)을 이름. 도(度)는 그의 이름임. 무왕이, 관숙(管叔)과 함께 주의 아들 무경(武庚)의 봉국(封國)인 은(殷)을 감시하도록 하였는데, 끝에 가서 유언(流言)을 퍼뜨리고 무경과 함께 반(叛)하였음. 《孟子 公孫丑 下》
[주D-008]유태 : 나라 이름. 성이 강(姜)인 후직(后稷)의 어머니 나라. 뒤에 후직을 그 나라에 봉하였음. 《史記 周紀》
[주D-009]차라리 …… 아닌가 : 비록 장자(長子)가 아니더라도 천하를 통일할 만한 성덕(聖德)이 있는 자를 후계자로 삼음.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맏인 태백(太伯)과 둘째인 우중(虞仲), 그리고 태강(太姜)이 낳은 막내 계력(季歷),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계력이 장차 서백(西伯)이 될 창(昌)을 낳자 그 창이 성덕이 있음을 알고는 계력에게 위(位)를 전할 뜻을 비쳤으므로 태백ㆍ우중이 자기 아버지 뜻을 알아차리고 형만(荊蠻)으로 망명하여 살면서 막내 계력에게 양보하였음. 여기서는 당시 천하는 모두 은(殷)의 천하였는데, 후직 이후 유구한 세월에 걸쳐 많은 덕을 쌓은 끝에 문왕 창(文王昌)의 아들 무왕 발(武王發)에 이르러 비로소 얻은 주(周)의 천하를 채숙(蔡叔)이 하루 아침에 무경(武庚)과 함께 넘어뜨리려고 한 것은 역량이 부족하고 천명(天命)을 모른 데서 나온 소치라는 뜻임. 《史記 周本紀》
[주D-010]상용 : 은(殷) 나라 주왕(紂王) 때 사람. 주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쫓겨났는데 무왕(武王)이 은을 정벌한 후 그의 여리(閭里)에다 정표(旌表)를 하였음. 《書經 武成》
[주D-011]진승 : 진(秦) 나라 사람. 진 이세(秦二世) 때 오광(吳廣)과 함께 어양(漁陽)에서 수자리살면서 제 기간을 대지 못해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반기를 들고 일어나 그곳 도위(都尉)를 죽이고 함께 수자리살던 졸도들과 기치를 들고 진(秦)과 맞서 싸우면서 자기 스스로 초왕(楚王)이 되었음. 《史記 卷48》
[주D-012]도남 : 송(宋)의 진단(陳摶). 도남(圖南)은 그의 자(字)임. 그는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화산(華山)에 가 살면서 도(道)를 닦고 벽곡(辟穀)의 술을 익혀 몇백 날이고 계속 잠을 잤으며 송 태조(宋太祖)가 등극(登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제 세상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하면서 웃었다고 함. 《宋史 卷457》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다산시문집 제4권
모습이 없는 것은 그릴 수 없다
형태를 이루고 있는 모든 물건은 그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이기(理氣)를 탐구하는 계단(階段)이 되거니와, 형질이 없는 것은 그려낼 수 없으니, 비록 그린다 하여도 다만 이치를 궁구하는 데 방애를 보태고 또 후학의 분쟁거리가 될 뿐이다.
성도(星圖)와 지도(地圖) 및 인물과 기명이나 수목(數目)을 배열하는 등의 형상은 모두 그림으로 그려 놓아 형상을 의방(依倣)하고 의미를 비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형질이 없는 것은 그 곡직(曲直)과 방원(方圓)을 형용하기 어렵다.
옛적의 진단(陳摶)의 학문은 마의(麻衣 승(僧) 수애(壽涯)이다.)에게서 배웠는데, 위백양(魏伯陽)이 지은《참동계(參同契)》중의 수화광곽도(水火匡廓圖)와 삼오지정도(三五至精圖)의 두 도면을 절취하여 합쳐서 하나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태극도(太極圖)이다. 단은 이것을 충방(种放)에게 전하였고, 방은 목수(穆修)에게 전하였으며, 수는 주염계(周濂溪)에게 전하여, 드디어 그가 도설(圖說)을 짓게 되었다.
남헌(南軒) 장식(張栻)은 이르기를 ‘태극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하였고, 황중(黃中) 임 율(林栗)은 이르기를 ‘태극은 형상이 없으니 무엇을 그리겠는가?’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그림으로 형상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다만 태극도 하나뿐이 아니라, 심성이기(心性理氣) 등의 그림도 모두 이것을 가지고 미룰 수 있다.
-기측체의(氣測體義) > 추측록 제6권 > 추물측사(推物測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