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전산책]『신심명』⑪ 여우같은 의심 다하면 신심 곧아진다 마음의 평등이 체득되면 분별이 모두 쉬어진다. (契心平等 所作俱息) (狐疑盡淨 正信調直)
‘호의’는 앞에서도 나왔지만 가지가지의 생각으로 백가지의 분별을 나타내며, ‘조직’은 우두법융의 『심명(心銘)』에 “일심도 망녕되지 않으면 만 가지 인연이 조화롭고 바르다”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직’은 선가에서 많이 쓰는 용어다. ‘직관(直觀)’ ‘직절(直截)’, ‘직지(直指)’, ‘직하(直下) 등에서의 직은, 마치 금강저에 더러움이 미처 달라붙기도 전에 불타 없어지는 번개와도 같이 빠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용된다. 선 세계에서의 물음과 대답 즉 선화(禪話)는 그 사이가 ‘직’이라야 심인을 전하게 된다.
조직은 천태의 지·관의 용어에도 해당된다. 이처럼 이원(二元)의 분별의 대립, 차별이 사라지면 마음은 평등의 경지에 인계(印契)하는 것. 다시 말해서 분별의 소작이 완전히 그쳐져 맑음의 당체(信)가 된 것이다. 이는 바로 지도(至道)의 심경으로서 드러나 보인 것이다.
(一切不留 無可記憶) (虛明自照 不勞心力) (非思量處 識情難測)
법융은 “두 곳(분별)이 생기지 않으면 적정하여 허명하며, 허명이 저절로 드러나 적정은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허명이 비추는 곳에 ‘본래무일물’의 심경이 열리고 ‘일체불류’하여 심력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량분별이 없는 곳, 지식 분별로는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의미이다. 경전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는 능히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 바로 ‘비사량’이다.
스님(약산)이 좌선하고 있을 즈음, 한 납자가 물었다. “부동의 자세로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스님은 말했다. “생각 없이 생각하고 있네.” 납자는 말했다. “생각 없음인데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입니까?” 스님은 말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일 뿐(비사량)이야.”
‘허명자조’의 당체로 있는 스님의 자세가 납자에게는 무엇인가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언제나 이원론적인 사고로 삶을 살아가는 습기로서는 기억할 것이 없는 허명의 세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혜원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
|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