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7권
42. 초품 중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뜻을 풀이함
[經] 대자(大慈) 대비(大悲)로써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느니라.
[論] 대자대비라 함은 4무량심(無量心) 가운데서 이미 분별했지만 이제 다시 간략히 설명하겠다.
대자는 온갖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대비는 온갖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는 것이다. 대자는 기쁘고 즐거운 인연을 중생에게 주는 것이고, 대비는 괴로움을 여의는 인연을 중생에게 주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여러 아들이 감옥에 갇혀서 장차 큰 죄를 받게 될 때에 그의 아버지는 사랑과 측은한 생각으로 약간의 방편을 써서 괴로움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대비(大悲)이며, 이 괴로움을 여의게 하고 나서 다섯 가지 바라는 바[五欲]를 아들들에게 주는 것이 바로 대자(大慈)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로 구별하게 된다.
[문] 대자대비는 그렇다 하고, 그렇다면 어떤 것이 소자(小慈) 소비(小悲)인가? 이 소(小)로 인하여 대(大)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답] 4무량심 안에서의 자비(慈悲)는 소라 하며, 여기 18불공법 다음에 설명하는 큰 자비를 일컬어 대라 한다. 또 모든 부처님의 마음속의 자비를 대라 하고, 그 밖의 사람들의 마음속의 자비는 소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보살이 대자대비를 행한다고 하는가?
[답] 보살의 대자라 함은 부처님보다는 작지만 2승(乘)보다는 크므로 이것을 임시로 이름 붙여서 대라 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진실로 가장 크다.
또 소자(小慈)는 다만 마음으로만 중생에게 즐거움을 줄 것을 생각할 뿐 실제로는 즐거운 일이 없다. 소비(小悲)는 중생에게 있는 갖가지 몸의 괴로움[身苦]과 마음의 괴로움[心苦]을 관찰하여 가엾게 여길 따름이요 거기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함을 일컫는다.
대자는 중생이 즐거움을 얻게 되기를 생각하면서 역시 즐거운 일을 주는 것이며, 대비는 중생의 괴로움을 가엾이 여기면서 또한 그 괴로움에서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또 범부나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보살의 자비를 일컬어 소라 하고, 모든 부처님이 자비를 일컬어 비로소 대라 한다.
또 대자는 대인(大人)의 마음속에서 생겨나고,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碍智)ㆍ18불공법(不共法)은 대법(大法) 가운데서 나와 능히 3악도(惡道)의 큰 고통을 부수고 세 가지 큰 즐거움, 즉 천상의 쾌락[天上樂]과 인간의 쾌락[人樂]과 열반의 쾌락[涅槃樂]을 준다.
또 이 대자는 시방과 3세의 중생에서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 사랑은 골수에 사무치도록 두루 차면서 마음에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다. 가령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이 3악도에 떨어졌을 때 어떤 사람이 그들을 대신하여 그 고통을 받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뒤에 5욕의 즐거움과 선정의 즐거움과 세간의 최상의 즐거움을 그들 마음대로 주어서 모두 만족하게 한다 해도 부처님의 자비에 비교하면 천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간의 즐거움은 속임수여서 진실하지도 않고 생사를 여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문] 법은 부처님의 마음속에 있고 온갖 것이 모두가 크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자비만을 대(大)라 말하는 것인가?
[답] 부처님께서 지닌 모든 공덕과 법은 모두가 대라고 할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자비만을 대라고 하는 것인가?
[답] 자비는 바로 부처님 도의 근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과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과 이 세상이나 뒷세상에서 받을 고통 등 모든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큰 자비심을 내어서 이러한 고통을 구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는 마음을 내어 아눗다라삼먁삼보디를 구하고 또한 대자대비의 힘으로써 한량없는 아승기 세상에서 나고 죽고 하는 동안에도 싫증내는 마음이 없으며 큰 자비의 힘 때문에 오래전에 열반을 얻었어야 했는데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온갖 모든 부처님 법 중에서 자비를 크다 하는 것이다. 만일 대자대비가 없었다면 일찍이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
또 부처님이 도를 얻었을 때에 한량없고 심히 깊은 선정과 해탈과 모든 삼매를 성취하여 청정한 즐거움이 생겼는데도 이를 버리고 누리지 않으면서 마을이나 성읍으로 들어가 갖가지 비유와 인연으로 설법하고, 그 몸을 변화하여 한량없는 음성으로 온갖 중생을 맞이하고 모든 중생들의 욕설과 비방을 참아내며, 나아가 스스로 음악을 울리기도 하나니, 이것은 모두 대자대비의 힘이다.
또 대자대비에서 대(大)라는 이름은 부처님께서 지은 것이 아니고 중생들이 이름붙인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자는 큰 힘을 지녔지만 제가 힘이 세다고 말하지 않고 짐승들이 이름을 붙인 것과 같다.
중생들은 부처님의 갖가지 미묘한 법을 듣고 부처님께서 중생을 도와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한 줄을 알고 있나니, 중생들은 이러한 일을 듣고 보고 하면서 이런 법을 이름하여 대자대비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에게 두 사람의 친한 벗이 있었다. 그가 죄의 인연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한 친구는 필요한 생활용품을 공급해 주고 한 친구는 그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여러 사람들은 그 능히 대신 죽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하면서 큰 자비를 행한 이라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세상마다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머리와 눈과 골수며 뇌를 모두 보시한지라 중생들은 이런 일을 보고 듣고 하면서 곧 다 함께 대자대비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마치 시비왕(尸毘王)과 같다. 그는 비둘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몸의 살을 다 떼어주면서 그를 대신했으나 오히려 비둘기의 무게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시 손수 저울을 붙잡고 그 몸을 대신하자 이때에 땅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바닷물은 파도가 일며 모든 하늘은 향과 꽃으로 왕에게 공양했나니, 중생들은 칭송하면서 “한 마리의 작은 새를 위해서도 정감(情感)이 이러하니, 참으로 이는 대자대비이시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으로 인하여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에 “대자대비”라 한 것이니, 이러한 등의 한량없는 일들은 본생경(本生經)에 모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문] 선정 등 그 밖의 모든 공덕은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대(大)라고 이름붙이지 못하지만 지혜와 설법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대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 부처님께서 지혜로 능히 하는 것을 두루 아는 이는 없다. 대자대비하기 때문에 세상에서마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면서 중생을 구호하셨다. 사람들이 모두가 그것을 알지만 부처님의 지혜는 견주어서 유사하게 알 수 있으되 분명히는 알지 못하고, 자비로운 마음과 곳곳에서 변화하며 큰 사자처럼 외치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으로써 알 수 있을 뿐이다.
또 부처님의 지혜는 미세하고 묘해 모든 보살이나 사리불 등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겠는가. 자비로운 모양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믿고 받을 수 있지만 지혜는 깊고 오묘하므로 헤아려 알 수는 없다.
또 이 대자대비는 온갖 중생이 사랑하고 즐기는 바이다. 마치 달콤한 약은 사람들이 먹기 좋아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지혜는 마치 쓴 약을 먹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대개 좋아하기 때문에 자비를 일컬어서 대라고 한다.
또 지혜라 하면 도를 얻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믿고 받을 수 있지만, 큰 자비로운 모양은 온갖 무리들도 모두 믿음을 내게 된다. 마치 형상을 보거나 말소리를 듣고는 모두 믿고 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요익됨이 많기 때문에 대자대비라 하는 것이다.
큰 지혜는 버림의 모양[捨相]과 멀리 여윔의 모양[遠離相]이라 하고, 대자대비는 가엾이 여기면서 이익되게 하는 모양[憐愍利益相]이라 한다. 이 가엾이 여기고 이익되게 하는 법은 온갖 중생들이 좋아하는 바이니, 이 때문에 대(大)라고 한다.
이 대자대비는 마치 『지심경(持心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대자대비에는 32종이 있어 중생들 가운데서 행한다. 이 대자대비의 거두는 일[攝]과 모양[相]과 대상[緣]은 4무량심(無量心)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공덕은 모두 마치 가전연(迦旃延)의 법 가운데에서처럼 분별하면서 그 모양을 구해서는 안 된다. 위의 모든 논의사(論議師)들이 비록 가전연의 법을 이용하며 분별하고 드러내 보인다 하더라도 다 믿거나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가전연은 대자대비와 온갖 지혜를 말하면서 “이것은 유루(有漏)의 법이고 매임의 법[繫法]이며 세간의 법”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나니, 왜냐하면 대자대비를 온갖 부처님 법의 근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것을 유루의 법이요 매임의 법이며 세간의 법이라 하겠는가.
[문] 대자대비가 비록 그것이 부처님 법의 근본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유루이다. 마치 진창 속에서 연꽃이 핀다하여 그 진창까지도 역시 묘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대자대비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그것이 부처님 법의 근본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무루(無漏)는 아니어야 한다.
[답] 보살로서 아직 부처님이 되시지 않았을 때의 큰 자비 설령 유루라 한다면 당연히 그 허물을 인정하겠지만, 지금은 부처님으로서 무애해탈(無碍解脫)의 지혜를 얻으셨기 때문에 온갖 법들은 모두가 청정하며 온갖 번뇌와 습기가 다하신 것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무애해탈의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번뇌와 습기가 다하지 않았으며, 곳곳마다 의심이 다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은 마땅히 유루이어야 하지만 모든 부처님은 이러한 일이 없다. 그러니 어찌 부처님의 큰 자비를 유루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문] 내가 감히 공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자비로운 마음을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내시니 마땅히 유루인 것이다.
[답] 모든 부처님의 힘과 기세도 불가사의하다.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은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지 못하면서 자비심을 내지만 모든 부처님은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면서 자비심을 내신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시방의 중생의 모양을 얻을 수 없는데도 중생이란 모양을 취하면서 자비를 내지만, 지금 모든 부처님은 시방으로 중생을 구해도 얻을 수도 없고 또한 중생의 모양을 취하지도 않으면서 능히 자비를 내시기 때문이다. 마치 『무진의경(無盡意經)』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의 자비가 있나니, 중생연(衆生緣)과 법연(法緣)과 무연(無緣)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온갖 중생 가운데서 오직 부처님만이 속이지 않는 법[不誑法]을 행하신다. 만일 부처님께서 중생들에 대하여 모양을 취하면서 자비심을 행하신다면 속이지 않는 법을 행한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마침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속이지 않는 법을 모두 행한다고 일컫지는 못한다.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은 중생에게나 법에 대해서 모양을 취하거나 모양을 취하지 않거나 간에 비난하지 않아야 하나니, 속이지 않는 법을 모두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온갖 지혜로써 온갖 번뇌[漏]를 능히 끊었고, 온갖 유루의 법 중에서 잘 벗어났으며, 무루의 인연을 짓기도 하는데 이런 법이 어찌 스스로 유루가 되겠는가.
[문] 무루의 지혜는 저마다 반연할 바[所緣]가 있어서 온갖 법을 모두 반연할 수 는 없다. 오직 세속의 지혜[世俗智]만이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있나니, 이 때문에 “온갖 지혜도 이것은 유루의 모양이다”고 한 것이다.
[답] 그대의 법에서는 이런 설명이 있을 수 있으나 부처님 법에서는 말할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스스로 말[斗]을 가지고 저자로 들어갔을 때에 관청의 말과 서로 맞지 않으면 이용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대도 역시 그와 같아서 자기 자신은 그대의 법을 쓸 수 있지만 부처님의 법과는 맞지 않으므로 이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루의 지혜가 무엇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지 못한다 하는가. 유루의 지혜는 임시로 붙인 이름이라 거짓이며 세력이 적기 때문에 진실로 온갖 법을 반연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그대의 법에서는 스스로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이 성문의 법에는 10지(智)이고 마하연의 법에서는 11지(智)가 있나니, 여실지(如實智)라고 한다. 이 10지가 여실지에 들어가면 전부 하나의 지혜로 되나니, 이른바 무루의 지혜[無漏智]이다. 마치 시방의 물이 큰 바다로 들어가면 전부 하나의 맛으로 되는 것과 같다.
이 대자대비는 부처님의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와 사자유희삼매(師子遊戱三昧)에 속한다.
이와 같이 대자대비의 뜻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經] 보살마하살이 도지(道慧)를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며, 보살마하살이 도혜로써 도종혜(道種慧)1)를 구족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느니라.
[論] 도(道)에서 하나의 도라 하면 오로지 열반으로만 나아가고 착한 법 가운데서 일심으로 방일하지 않음이니, 이런 도는 몸과 마음을 따른다.
도에는 다시 두 가지의 도가 있나니, 악도(惡道)와 선도(善道), 세간도(世間道)와 출세간도(出世間道), 정도(定道)와 혜도(慧道), 유루도(有漏道)와 무루도(無漏道),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학도(學道)와 무학도(無學道), 신행도(信行道)와 법행도(法行道), 향도(向道)와 과도(果道), 무애도(無碍道)와 해탈도(解脫道), 신해도(信解道)와 견득도(見得道), 혜해탈도(慧解脫道)와 구해탈도(俱解脫道)이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두 가지의 도문(道門)이 있다.
----------------------------------------------------------------
1) 범어로는 mārgākārajñatā.
----------------------------------------------------------------
다시 세 가지의 도가 있나니, 지옥도(地獄道)와 축생도(畜生道)와 아귀도(餓鬼道)이다. 세 가지의 지옥으로서 열지옥(熱地獄)과 한지옥(寒地獄)과 흑암지옥(黑闇地獄)이 있고, 세 가지 축생도로서 지행(地行)과 수행(水行)과 공행(空行)이 있으며, 세 가지 아귀도로서 아귀(餓鬼)와 식부정귀(食不淨鬼)와 신귀(神鬼)가 있다.
세 가지 선도(善道)가 있으니, 인도(人道)와 천도(天道)와 열반도(涅槃道)이다. 인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죄를 짓는 이와 복을 짓는 이와 열반을 구하는 이이다. 다시 세 가지 사람이 있으니, 욕망을 받아 악을 행하는 이와 욕망을 받고도 악을 행하지 않는 이와 욕망을 받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 이이다.
천도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욕계의 하늘[欲天]과 색계의 하늘[色天]과 무색계의 하늘[無色天]이다.
열반도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성문의 도[聲聞道]와 벽지불의 도[辟支佛道]와 부처님의 도[佛道]이다.
성문의 도에도 세 가지가 있나니, 배울 것이 있는 이의 도[學道]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도[無學道]와 배울 것이 있는 이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이도 아닌 도[非學非無學道]이다. 벽지불의 도 역시 그와 같다.
부처님의 도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바라밀의 도[波羅蜜道]와 방편의 도[方便道]와 청정한 세계의 도[淨世界道]이다. 부처님의 도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처음 뜻을 일으키는 도[初發意道]와 모든 선을 행하는 도[行諸善道]와 중생을 성취하는 도[成就衆生道]이다.
다시 세 가지 도가 있나니, 계도(戒道)와 정도(定道)와 혜도(慧道)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세 가지 도의 문이 있다.
다시 네 가지 도가 있나니, 범부의 도[凡夫道]와 성문의 도와 벽지불의 도와 부처님의 도이다.
다시 네 가지의 도가 있나니, 성문의 도와 벽지불의 도와 보살의 도[菩薩道]와 부처님의 도이다.
성문의 도에 네 가지가 있나니, 괴로움의 도[苦道]와 쌓임의 도[集道]와 사라짐의 도[滅道]와 길의 도[道道]이다.
다시 네 가지의 도가 있나니, 몸을 관하는 실상의 도[觀身實相道]와 느낌[受], 마음[心], 법(法)을 관하는 실상의 도이다.
다시 네 가지의 도가 있나니, 아직 생기지 않은 악(惡)과 착하지 않은 법을 끊어 생기지 않게 하는 도와 이미 생긴 악을 끊어 빨리 없어지게 하는 도와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을 생기게 하는 도와 이미 생긴 착한 법은 더욱 자라게 하는 도이다.
또 네 가지 도가 있나니, 욕증상도(欲增上道)와 정진증상도(精進增上道)와 심증상도(心增上道)와 혜증상도(慧增上道)이다.
다시 네 가지 성종도[四聖種道]가 있나니, 옷[衣]과 음식[食]과 침구[臥具]와 의약(醫藥)을 가리지 않고 즐거이 괴로움을 끊으면서 선정을 닦는 것[樂斷苦修定]이다.
다시 네 가지의 행하는 도[四行道]가 있나니, 괴롭고 어려운 도[苦難道]와 괴롭고 쉬운 도[苦易道]와 즐겁고 어려운 도[樂難道]와 즐겁고 쉬운 도[樂易道]이다.
다시 네 가지의 닦는 도[四修道]가 있다. 첫째는 지금 세상의 즐거움[今世樂]을 위하여 닦는 도이고, 둘째는 생사를 아는 지혜[生死智]를 닦는 도이며, 셋째는 번뇌를 다 끊기[漏盡] 위하여 닦는 도이며, 넷째는 분별하는 지혜[分別慧]를 닦는 도이다.
다시 네 가지 하늘의 도[四天道]가 있나니, 이른바 4선(禪)이다.
다시 네 가지 도가 있나니, 하늘의 도[天道]와 범천의 도[梵道]와 성인의 도[聖道]와 부처님의 도[佛道]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네 가지의 도문이 있다.
다시 다섯 가지의 도가 있나니, 지옥도와 축생도와 아귀도와 인도와 천도이다.
다시 다섯 가지의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들의 도가 있나니, 배울 것이 없는 이의 계율의 도[戒道] 내지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해탈지견의 도[解脫知見道]이다.
다시 다섯 가지 정거천의 도[五淨居天道]가 있고, 다시 다섯 가지 욕계 하늘을 다스리는 도[五治欲天道]가 있으며, 다시 다섯 가지의 법다운 말의 도[五如法語道]가 있고, 다시 다섯 가지의 법이 아닌 말의 도[五非法語道]가 있다.
다시 다섯 가지 도가 있나니, 범부의 도와 성문의 도와 벽지불의 도와 보살의 도와 부처님의 도이다.
다시 다섯 가지의 도가 있나니, 색법(色法)을 분별하는 도와 심법(心法)을 분별하는 도와 심수(心數)를 분별하는 도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을 분별하는 도와 무위법(無爲法)을 분별하는 도이다.
다시 다섯 가지의 도가 있나니, 고제에서 끊어야 할 도[苦諦所斷道]와 집제(集諦)에서 끊어야 할 도와 멸제(滅諦)에서 끊어야 할 도와 도제(道諦)에서 끊어야 할 도와 사유(思惟)에서 끊어야 할 도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다섯 가지 법의 도문이 있다.
다시 6도(道)가 있나니, 지옥도와 축생도와 아귀도와 인도와 천도와 아수라도이다.
다시 6진(塵)을 버리는 도가 있고, 다시 6화합(化合)[구역(舊譯)으로는 6종(種)이라 한다.]의 도와 6신통의 도와 6종아라한(種阿羅漢)의 도와 6지수(地修)의 도와 6정(定)의 도와 6바라밀(波羅蜜)의 도이다. 낱낱의 바라밀에는 저마다 여섯 가지씩의 도가 있나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여섯 가지의 도문이 있다.
다시 일곱 가지의 도가 있나니, 7각의도(覺意道)와 7지무루도(地無漏道)와 7상정도(想定道)와 7정도(淨道)와 7선인도(仙人道)와 7재복도(財福道)와 7법복도(法福道)와 7조정도(助定道)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일곱 가지의 도문이 있다.
다시 여덟 가지의 도가 있나니, 8정도(正道)와 8해탈도(解脫道)와 8배사도(背捨道)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여덟 가지의 도문이 있다.
다시 아홉 가지의 도가 있나니, 9차체도(次第道)와 9지무루도(地無漏道)와 9견단도(見斷道)와 9아라한도(阿羅漢道)와 9보살도(菩薩道)이다. 9보살도란 이른바 6바라밀과 방편(方便)과 성취중생(成就衆生)과 정불세계(淨佛世界)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아홉 가지의 도문이 있다.
다시 열 가지의 도가 있나니, 이른바 10무학도(無學道)와 10상도(想道)와 10지도(智道)와 10일체처도(一切處道)와 10불선도(不善道)와 10선도(善道)이다. 나아가 162종에 이르기까지의 도가 있으니,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도문이 있다. 이러한 모든 도를 모두 다 알고 두루 아나니, 이것이 도종혜(道種慧)이다.
[문] 반야바라밀은 바로 보살의 으뜸가는 도이고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 갖가지의 도를 말하는가?
[답] 이 도는 모두가 하나의 도[一道] 가운데 들어가니, 이른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다. 처음 배울 때에는 갖가지 구별이 있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동일하여 차별이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겁(劫)이 다해 불에 탈 때에는 온갖 존재하는 것이 모두 허공과 같이 되는 것과 같다.
또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보살은 분별하면서 이 갖가지 도를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세간의 도와 출세간의 도이다.
[문] 어찌하여 보살이 한 모양인 무상(無相) 가운데 머무르면서 “이것은 세간의 도이다. 이것이 출세간의 도이다”라고 분별하는가?
[답] 세간이라는 이름은 다만 뒤바뀐 생각과 거짓이라는 두 가지 법에서 생기는 것이니, 마치 환2)과 같고 마치 꿈과 같으며, 마치 불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다. 범부는 억지로 세간이라 여기지만, 이 세간은 모두가 허망한 가운데서부터 온다. 지금도 역시 허망하고 본래도 역시 허망하다. 그것은 실로 나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으되 다만 안팎의 6정(精)과 6진(塵)이 화합한 인연(因緣)에서 생길 뿐인데, 범부가 집착하는 바를 따르는 까닭에 세간이라 부르게 된다. 이 세간이라는 갖가지 삿된 소견의 그물은 마치 실로 엉켜서 서로 달라붙은 것과 같나니, 항상 생사 가운데서 왕래하니, 이와 같이 해서 세간인 줄 안다.
어떤 것이 출세간도(出世間道)이냐 하면, 여실히 세간을 아는 것이 곧 출세간의 도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혜로운 이는 세간과 출세간을 구하여도 두 가지 일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얻을 수 없다면 임시로 붙인 이름으로서의 세간ㆍ출세간인 줄 알아야 한다. 다만 세간을 깨뜨리기 위하여 출세간을 설명했을 뿐이다.
세간의 모양은 그것이 곧 출세간이며 다시 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세간의 모양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출세간과 세간의 모양은 항상 공하여 세간법의 정해진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수행하는 이는 세간을 얻지 않으며 또한 출세간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일 세간을 얻지 않고 또한 출세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애(愛)와 만(慢)이 파괴되기 때문에 세간과 함께 다투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이는 오래전에 세간이 공하여 아무것도 없고 거짓임을 알고 있으므로 생각하거나 분별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을 5중(衆)이라 하는데, 5중의 모양은 가령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것을 구하신다 해도 역시 얻을 수 없어서 오는 곳도 없고 머무르는 곳도 없으며 또한 가는 데도 없다. 만일 5중의 오고 머무르고 가는 모양을 얻지 못하면 그것이 곧 출세간이다.
수행하는 이는 그때에 이 세간과 출세간을 관찰해도 실로 볼 수가 없나니, 세간이 출세간과 합하는 것도 볼 수 없고, 또한 출세간이 세간과 합하는 것도 볼 수 없다. 세간을 여의고서 또한 출세간도 볼 수 없고, 출세간을 여의고서 또한 세간을 볼 수도 없다. 이와 같이 되면 두 가지의 알음알이[識], 즉 세간과 출세간이 생기지 않나니, 만일 세간을 버리고 출세간을 받지 않는다면, 이것을 출세간이라 한다.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알게 되면 곧 중생을 위하여 세간과 출세간 길을 분별하게 된다.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온갖 길들 역시 이와 같아서 하나의 모양[一相]에 들어가나니, 이것을 도종혜(道種慧)라 한다.
[經] 도종혜로써 일체지(一切智)를 구족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며, 일체지로써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구족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느니라.
[論] [문] 일체지와 일체종지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별은 없다. 때로는 일체지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체종지라 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전체의 모양[總相]이 바로 일체지요 개별적인 모양[別相]이 바로 일체종지이며, 원인[因]이 바로 일체지요 결과[果]가 바로 일체종지이며, 간략하게 설명하면 일체지요 자세히 설명하면 일체종지이다.”라고 한다.
일체지라 함은 통틀어 온갖 법 중의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깨뜨리는 것이고, 일체종지라 함은 갖가지 법문(法門)을 관하면서 모든 무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일체지라 함은 마치 4제(諦)를 말하는 것과 같고 일체종지라 함은 마치 4제의 뜻을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일체지라 함은 고제(苦諦)를 말하는 것과 같고 일체종지라 함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의 모양을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일체지라 함은 마치 나는 괴로움[生苦]을 말하는 것과 같고 일체종지라 함은 갖가지 중생들이 곳곳에서 받아 나는[受生]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또 온갖 법[一切法]은 눈의 빛깔[眼色]에서 뜻과 법[意法]에 이르기까지 말한다. 이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은 역시 전체의 모양[總相]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 등을 아나니, 이 12입(入)을 알기 때문에 일체지라 한다.
성문이나 벽지불조차도 오히려 모두 개별적인 모양[別相]으로 한 중생의 태어나는 곳과 곱거나 추함과 사업의 많고 적음을 알지 못하며, 미래와 현재의 세상 역시 그와 같은데 하물며 온갖 중생이겠는가.
마치 한 염부제(閻浮提) 안의 금(金)의 이름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의 한 물건 안의 갖가지 이름에 대해서나 또는 하늘의 말[天語]이나 용의 말[龍語] 등의 이러한 갖가지 말이겠는가. 금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금에 대한 인연과 나는 곳과 좋은 점과 나쁜 점과 귀하고 천함을 알 수 있겠는가.
그로 인하여 복도 얻고 그로 인하여 죄를 얻으며 그로 인하여 도를 얻는다는 이러한 현재의 일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마음[心]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 이른바 선정과 지혜 등의 모든 법이겠는가. 부처님은 모든 법의 전체의 모양과 개별적인 모양을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한다.
또 후품(後品) 중에서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일체지는 바로 성문과 벽지불의 일이요 도지(道智)는 바로 모든 보살들의 일이며 일체종지는 바로 부처님의 일이다”고 하셨다.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다만 통틀어 일체지가 있을 뿐 일체종지는 없다.
또 성문이나 벽지불은 비록 개별적인 모양에 분한[分]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체라는 모양[總相]으로 이름을 받게 된다. 부처님의 일체지와 일체종지는 모두가 진실이지만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니, 일체지란 비유하건대 마치 낮에 켠 등불과도 같아서 이름만 있고 등불의 작용은 없는 것이다.
성문이나 벽지불 같은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어려운 질문을 하면 때로는 모두 대답하지 못하여 의심을 끊을 수 없기도 하나니, 마치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세 번을 물었는데도 대답하지 못한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일체지가 있었다면 어찌하여 대답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일체지라는 이름만이 있을 뿐이며 범부보다는 나으나 진실함이 없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진실한 일체지요 일체종지로서 이러한 한량없는 이름이 있다. 때로는 부처님을 일컬어 ‘일체지를 지닌 사람’이라고 하며, 때로는 ‘일체종지를 지닌 사람’이라고도 하나니, 이러한 등으로 일체지와 일체종지의 갖가지 차별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문] 경에서 말씀하듯이 6바라밀과 37품(品)과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 등의 모든 법을 행하여 일체지를 얻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도종지(道種智)만으로써 일체지를 얻는다고 하는가?
[답] 그대가 말한 바의 6바라밀 등이 곧 도(道)이다. 이 도를 알고 이 도를 행하여 일체지를 얻는 것인데 의심할 것이 무엇인가.
또 처음 발심하여 도량(道場)에 앉기까지의 그 중간에 온갖 착한 법은 모두 다 도라 한다. 이 도 가운데서 분별하고 사유해서 행하는 것을 도지(道智)라 한다. 이 경의 뒤에서 설명하듯이 도지는 바로 보살의 일이다.
[문] 부처님은 도의 일을 이미 구비했기 때문에 도지라 하지 않으나, 아라한과 벽지불의 모든 공덕은 아직 구비하지 못했는데 무엇 때문에 도지라 하지 않는가?
[답]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는 스스로 행할 바를 역시 마쳤나니 이 때문에 도지라 하지 않는다. 도(道)는 곧 행상(行相)이기 때문이다.
또 이 경에서 성문이나 벽지불을 말하지만 성문 가운데서는 세 가지 도[三道]를 포섭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도는 크기 때문에 도지라 하지만 성문과 벽지불의 도는 작기 때문에 도지라 하지 않는다.
또 보살마하살은 스스로 도를 행하면서 역시 중생에게 각각 행할 바의 도를 나타내 보이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도지를 행하여 일체지를 얻는다고 설명한다.
[문] 어떤 것이 일체지가 알아야 할 온갖 법인가?
[답] 마치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을 위하여 온갖 법을 말해 주리라. 어떤 것이 온갖 법이냐 하면, 이른바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접촉, 뜻과 법이니, 이 12입(入)을 온갖 법이라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또 온갖 법이 있나니, 이름[名]과 물질[色]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중경(利衆經)』3)의 게송과 같다.
만일 진실한 관[眞觀]을 구하고자 하면
다만 이름과 물질이 있을 뿐이며
만일 진실한 앎[實知]을 살피고자 하면
역시 이름과 물질을 알아야 한다.
비록 어리석은 마음과 많은 생각으로
모든 법을 분별한다 하더라도
다시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름과 물질을 벗어나는 일 없다.
또 온갖 법은 이른바 빛깔[色]과 빛깔이 없는 법[無色法], 볼 수 있는 것[加見]과 볼 수 없는 것[不可見], 대할 수 있는 것[有對]과 대할 수 없는 것[無對], 번뇌가 있는 것[有漏]과 번뇌가 없는 것[無漏], 지어진 것[有爲]과 지어지지 않은 것[無爲], 마음[心]과 마음이 아닌 것[非心], 마음과 상응하는 것[心相應]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것[非心相應], 마음과 함께 나는 것[共心生]과 마음과 함께 나지 않는 것[不共心生], 마음을 따라 행하는 것[隨心行]과 마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不隨心行], 마음의 인을 따르는 것[從心因]과 마음의 인을 따르지 않는 것[不從心因] 등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두 개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마치 아비담(阿毘曇) 섭법품(攝法品)4)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온갖 법은 이른바 착한 법[善法]과 착하지 않는 법[不善法]과 무기의 법[無記法], 견제에서 끊어야 할 것[見諦所斷]과 사유에서 끊어야 할 것[思惟所斷]과 끊지 않는 법[不斷法], 과보가 있는 법[有報法]과 과보가 없는 법[無報法]과 과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보가 없는 것도 아닌 법[非有報非無報法]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세 가지씩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
2) 범어로는 māya. 곧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3) 범어로는 Arthavargīya-sūtra. 『중의경(衆義經)』를 말한다.
4) 범어로는 Dharma saṃgraha-parivarta.
----------------------------------------------------------------
또 온갖 법은 이른바 과거의 법[過去法]과 미래의 법[未來法]과 현재의 법[現在法]과 과거ㆍ미래ㆍ현재도 아닌 법[非過去未來現在法], 욕계에 매인 법[欲界繫法]과 색계에 매인 법[色界繫法]과 무색계에 매인 법[無色界繫法]과 매이지 않는 법[不繫法], 착한 인을 좇는 법[從善因法]과 착하지 않은 인을 좇는 법[從無善因法]과 무기의 인을 좇는 법[從無記因法]과 착한 것도 아니고 착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무기도 아닌 인을 좇는 법[非善非不善非無記因法], 대상을 반연함이 있는 법[有緣緣法]과 대상을 반연함이 없는 법[無緣緣法]과 대상을 반연하는 법이 있기도 하고 대상을 반연하는 법이 없기도 하는 법[有緣緣法無緣緣法]과 대상을 반연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을 반연하는 법이 없는 것도 아닌 법[非有緣緣非無緣緣法] 등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네 가지씩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또 온갖 법은 이른바 물질의 법[色法]과 마음의 법[心法]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의 법[心不相應諸行法]과 무위의 법[無爲法]과 4제(諦) 및 무기무위(無記無爲) 등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다섯 가지씩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또 온갖 법은 이른바 5중(衆)과 무위(無爲)와 고제에서 끊어야 할 법[苦諦所斷法]과 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ㆍ사유에서 끊어야 할 법[思惟所斷法]과 끊지 않는 법[不斷法] 등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여섯 가지씩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그리고 일곱 가지, 여덟 가지, 아홉 가지, 열 가지 등의 모든 법문은 바로 아비담(阿毘曇)에서 그 뜻을 분별한다.
또 온갖 법은 이른바 있는 법[有法]과 없는 법[無法], 공한 법[空法]과 진실한 법[實法], 반연할 바의 법[所緣法]과 능히 반연하는 법[能緣法], 모이는 법[聚法]과 흩어지는 법[散法] 등이다.
또 온갖 법은 이른바 있는 법과 없는 법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법[亦有亦無法], 공한 법과 진실한 법과 공한 것도 아니고 진실한 것도 아닌 법, 반연할 대상의 법과 능히 반연하는 법과 반연할 대상도 아니고 능히 반연하는 것도 아닌 법[非所緣非能緣法] 등이다.
또 온갖 법은 이른바 있는 법과 없는 법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법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법[非有非無法]과 공한 법과 공하지 않는 법[不空法]과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는 것도 아닌 법[非空非不空法]과 나는 법[生法]과 멸하는 법[滅法]과 나기도 하고 멸하는 법[生滅法]과 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닌 법[非生非滅法]과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不生不滅法]과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닌 법[非不生非不滅法]과 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닌 법[不生不滅亦非不生非不滅法]과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나지 않음이 아닌 것도 아니고 멸하지 않음이 아닌 것도 아닌 법[非不生不滅亦非不不生亦非不不滅法]이다.
또 온갖 법은 이른바 있는 법과 없는 법과 있고 없는 법[有無法]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법[非有非無法]의 이 네 구절[四句]을 버린다. 법이 공(空)하고 공하지도 않고[不空] 나고[生] 없어지고[滅]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不生不滅] 이 다섯 구절도 모두가 역시 그와 같다.
이와 같은 갖가지 한량없는 아승기의 법의 문에 포섭되는 법들이 있으니, 이 무애의 지혜[無碍智慧]로써 위의 모든 법을 두루 다 아는 것을 일컬어 ‘일체지,’ ‘일체종지’라 한다.
[문] 온갖 중생들은 모두가 지혜를 구하는데 어찌하여 유독 부처님 한 사람만이 일체지를 얻으셨는가?
[답] 부처님은 온갖 중생 가운데서 으뜸이기 때문에 혼자만이 일체지를 얻으셨다.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발이 없는 것, 두 발 달린 것, 네발 달린 것, 여러 발 가진 것, 모양[色]이 있는 것, 모양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非有想非無想] 것 등 온갖 중생 가운데서 부처님은 가장 으뜸이시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수미산(須彌山)은 많은 산 가운데서 저절로 가장 으뜸인 것과 같고, 4대(大) 가운데서 불[火]의 힘이 가장 세기 때문에 능히 비추고 태우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중생 중에서 가장 으뜸가기 때문에 일체지를 얻으셨다.
[문]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온갖 중생 가운데서 홀로 가장 으뜸이라고 하는가?
[답] 앞에서 대답했듯이, 일체지를 얻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설명하자면, 부처님은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다른 이들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중생들 가운데서 가장 으뜸인 것이다.
마치 온갖 비추는 것 가운데서 해가 가장 으뜸이고, 온갖 사람 가운데서는 전륜성왕이 가장 으뜸이며, 온갖 연꽃 가운데서는 청련화(靑蓮華)가 가장 으뜸이고, 온갖 육지에서 나는 꽃에서는 수만(須曼)의 빛깔이 가장 으뜸이며, 온갖 나무 향 가운데서는 우두전단(牛頭旃檀)이 가장 으뜸이고, 온갖 구슬 가운데서는 여의주(如意珠)가 가장 으뜸인 것과 같다.
또 마치 온갖 계율 가운데서는 성인의 계율[聖戒]이 가장 으뜸이고, 온갖 해탈 가운데서는 불괴해탈(不壞解脫)이 가장 으뜸이며, 온갖 청정함 가운데서는 해탈(解脫)이 가장 으뜸이고, 온갖 모든 진리 가운데서는 공관(空觀)이 가장 으뜸이며, 온갖 법들 가운데서는 열반이 가장 으뜸이니, 이와 같이 한량없는 것들이 저마다 으뜸이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중생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시며, 으뜸이신 까닭에 혼자만이 일체지를 얻으셨다.
또 부처님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큰 서원으로 장엄하여 온갖 힘을 잃고 가라앉는[衰沒]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모든 착한 길을 두루 행하면서 선(善)이란 선은 쌓지 않음이 없었고, 고행(苦行)이란 고행은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쌓으셨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부처님은 온갖 중생 가운데서 유독 으뜸이시다.
[문] 3세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 역시 이러한 공덕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부처님 혼자만이 가장 으뜸이라고 하는가?
[답] 모든 부처님을 제외한 그 밖의 중생들의 세계에서 부처님 혼자만이 가장 으뜸이라고 말한다. 모든 부처님은 평등하고 동일한 공덕을 지니셨다.
또 살바야다(薩婆若多)5)라 했는데, 살바(薩婆)는 진나라 말[秦言]로 온갖 것[一切]이라는 말이고, 야(若)는 진나라 말로 지혜[智]라는 말이며, 다(多)는 진나라 말로 모양[相]이라는 말이다. 온갖 것[一切]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이름과 물질[名色] 등의 모든 법이다. 부처님은 이 온갖 법의 동일한 모양[一相]과 다른 모양[異相]과 번뇌의 모양[漏相]과 번뇌가 아닌 모양[非漏相]과 지어진 모양[作相]과
지어지지 않은 모양[非作相] 등 온갖 법의 각각의 모양과 각각의 힘과 각각의 인연과 각각의 과보와 각각의 성품과 각각의 장점과 각각의 단점을 다 아신다.
온갖 지혜의 힘 때문에 온갖 세상과 온갖 종류를 모두 두루 아신다. 이 때문에 “도종혜(道種智)로써 일체지(一切智)를 구족하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며, 일체지로써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구족하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도를 증득하실 때 도지(道智)로써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두루 갖추게 되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일체지로써 일체종지를 구족하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인가.
[답] 부처님은 도를 증득하실 때 도지로써 비록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구족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일체종지를 쓰지 않으시니, 마치 큰 국왕이 왕위를 얻었을 때에 국토와 보물 창고를 이미 모두 얻었으면서도 다만 아직 열어서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
[經] 일체종지로써 번뇌의 습(習)을 끊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한마음 가운데서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얻으며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인데 이제 무엇 때문에 일체지로써 구족하게 일체종지를 얻고 일체종지로써 번뇌의 습기를 끊는다는 것인가?
[답] 실은 온갖 것을 한꺼번에 얻으셨다. 여기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반야바라밀을 믿게 하기 위하여 차례로 차별되게 말씀하는 것이요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한 마음을 얻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비록 한마음 가운데서 얻는다 하더라도 역시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차례가 있는 것이니, 마치 한마음에 세 가지 모양이 있어서 나는 것[生]은 머무르는 것[住]에 인연이 되고 머무는 것은 사라지는 것[滅]에 인연이 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과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不相應諸行]과 그리고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같아서 도지(道智)로써 일체지를 구족하고, 일체지로써 일체종지를 구족하며, 일체종지로써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먼저 말한 일체종지가 바로 일체지이며, 도지는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처음 내시는 마음이 곧 일체지요 일체종지이어서 이때에 번뇌의 습기는 끊어진 것이니, 일체지와 일체종지에 대한 모양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온갖 번뇌의 습기가 끊어졌다고 했는데, 번뇌라는 이름은 간략하게 말하면 3독(毒)이요 자세히 말하면 삼계(三界)의 98사(使)이니, 이것을 번뇌라 한다. 번뇌의 습(習)이라 함은 번뇌의 남은 기운[殘氣]이다. 만일 신업과 구업이 지혜를 따르지 않으면 번뇌로부터 일어난 것과 같게 되며, 다른 이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그 일어나는 것만을 보고서 청정하지 않은 마음을 내게 되나니, 이것은 진실한 번뇌가 아니요 오랫동안 번뇌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러한 업(業)을 일으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오랫동안 다리에 쇠고랑을 차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풀려나게 되어 걸어갈 때에는 바로 지금은 쇠고랑이 없다 하더라도 아직도 있는 것처럼 걷는 것과 같으며, 마치 유모(乳母)가 오랫동안 옷을 입어서 때가 묻었을 때에 비록 맑은 잿물로 깨끗이 빨아서 때가 없어졌다 하더라고 때의 기운[氣]이 아직도 옷에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성인(聖人)의 마음의 때나 모든 번뇌 같은 것도 비록 지혜의 물로서 깨끗이 씻었다 해도 번뇌의 습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다른 성현도 비록 번뇌는 다 끊었다 하더라도 습기는 끊을 수 없다. 마치 난타(難陀)는 음욕의 습기 때문에 비록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하더라도 남녀의 대중 가운데에 앉으면 눈이 먼저 여인들이 있는 데를 보면서 말도 하고 설법을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사리불은 성을 내는 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사리불은 청정하지 못한 음식을 먹었다”고 한 말씀을 듣고 이내 음식을 토(吐)해 버리면서 다시는 끝내 청을 받지[受請] 않은 것과 같다.
또 사리불은 자신이 게송으로 말했다.
죄를 덮고 망념(妄念) 있는 사람은
지혜가 없어 게으름을 피우므로
끝내 이런 이들이 망령되어 와서
내게 다가와 머무르게 하고 싶지 않다.
마하가섭(摩訶迦葉) 같은 이는 성을 내는 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법을 결집(結集)할 때 아난(阿難)으로 하여금 여덟 가지 돌길라죄(突吉羅罪)를 참회하게 하고는 다시 자신이 아난의 손을 끌어 내보내면서 “그대는 번뇌가 아직 다 끊어지지 못한 부정(不淨)한 사람이라 함께 법을 결집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또한 필릉가바차(畢陵迦婆蹉) 같은 이는 항상 항하의 신[恒神]에게 “이 어린 여종아!”라며 욕을 했다.
마두바사타(摩頭婆私吒) 같은 이는 뛰놀며 장난하는 습기 때문에 때로는 횃대에서 들보로 뛰어오르고 들보에서 선반으로 왔다가 다시 선반에서 누각으로 뛰어다녔다. 또한 교범바제(憍梵鉢提) 같은 이는 소로 있었던 업의 습기 때문에 항상 먹은 것을 새김질 했다.
이와 같은 모든 성인들도 비록 번뇌가 다했다 하더라도 번뇌의 습기는 남아 있나니, 마치 불이 땔나무를 태운 뒤에 아직도 잿더미 속에 불기운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다 타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겁이 다할 때에 불이 삼천대천세계를 태우게 되면 다시는 남은 것이 없게 됨은 그 불의 힘이 크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일체지의 불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번뇌를 태우고서 다시는 그 남는 습기조차 없다.
어떤 바라문 같은 이는 5백 가지 나쁜 말로써 대중 가운데서 부처님께 욕설을 퍼부었는데, 부처님께서는 다른 기색이 없고 또한 마음도 달라짐이 없었다. 그래서 바라문은 마음에 감복하여 다시 5백 가지의 말로써 부처님을 찬양했으나 부처님은 역시 기뻐하는 기색도 없고 즐거워하는 마음도 없으셨으니, 이런 비방이나 칭찬에 마음과 안색에 변함이 없었다.
또 전차(旃遮) 바라문 여인이 물통을 배에 차고는 부처님을 비방했지만 부처님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으셨으며, 그 사정이 모두 탄로된 뒤에도 부처님은 기뻐하는 기색이 없으셨다. 법륜(法輪)을 굴릴 때에 찬미하는 소리가 시방에 가득히 찼는데도 역시 뽐내는 마음도 없으셨고, 손타리(孫陀利)가 죽은 뒤에 나쁜 소문이 널리 퍼졌으나 역시 마음이 주눅들지 않으셨다.
아라비(阿羅毘)6)나라는 바람 불고 추우며 납가새가 많았는데, 부처님은 그 안에서 앉고 눕고 하면서도 괴롭다고 여기지 않으셨으며, 또한 천상의 환희원(歡喜園)7) 가운데서 여름 동안 안거(安居)하실 때에 검파석(劍婆石)8)의 부드럽고 청결한 데에 앉아 마치 하늘의 면류관 싸개와 같은데도 역시 즐거운 느낌을 갖지도 않으셨다.
대천왕(大天王)이 꿇어앉아 하늘의 음식을 바치는데도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고, 비란야국(毘蘭若國)9)에서 말이 먹는 보리[馬麥]를 잡수시면서도 싫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모든 큰 나라 왕들이 훌륭한 음식으로 공양할 때에도 얻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고, 살라(薩羅)라는 마을에 들어가 빈 발우로 나오실 때에도 얻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
5) 범어 sarvajñatā의 음사어. 여기에서는 sarva-jña-tā로 분석해 설명하고 있다.
6) 범어로는 Āḷavī.
7) 범어로는 Nandanavana.
8) 범어로는 Kambalaśilā.
9) 범어로는 Verañja.
----------------------------------------------------------------
제바달다(提婆達多)가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돌을 밀어뜨려 부처님을 해치려 할 때에도 부처님은 역시 미워하지 않았고, 이때에 라후라(羅睺羅)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데도 역시 부처님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사세(阿闍世)가 취한 코끼리들을 풀어 놓으면서 부처님을 살해하려 할 때에도 부처님은 역시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미친 코끼리들을 항복 받으시니 왕사성(王舍城)의 사람들이 더욱더 공경하면서 향과 꽃과 영락을 가지고 나와 부처님께 공양을 하였으나 부처님은 역시 기뻐하지 않으셨다.
96종(種)의 외도들이 어느 한때에 어울려서 의논하기를 “우리들도 역시 모두가 일체지를 지닌 사람들이다”고 하면서 사바제(舍婆提)로부터 와서 부처님과 함께 논의(論議)하려고 했다. 그때 부처님은 신족(神足)으로써 배꼽에서 광명을 놓으시어 그 광명 속에는 모두 변화로 된 부처님들이 계시게 하자 국왕 바사닉(波斯匿)도 역시 그들에게 명하여 그 자리 위로 오게 했지만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는데 하물며 부처님과 논의할 수가 있었겠는가.
부처님은 온갖 외도의 도적들이 오는 것을 보아도 마음에 역시 물러남이 없이 이런 외도들을 깨뜨리시며,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이 갑절 더 공경하는데도 마음이 역시 나아가지도 않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들이 와서 부처님을 훼방하려고 해도 부처님은 동요시킬 수가 없었다.
비유하건대 마치 진짜 염부단금(閻浮檀金)은 불에 태워도 변하지 않고 망치로 때리고 갈고 찍는다 해도 부서지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것처럼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욕설과 비방과 논의를 당한다 해도 동요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모든 번뇌와 습기는 모두가 다하여 남은 것이 없는 줄을 알 수가 있다.
[문]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다 같이 무루의 지혜[無漏智]로써 모든 번뇌와 습기를 끊었는데 무엇 때문에 다한 이와 다하지 않은 이가 있다고 하는가?
[답] 먼저 “지혜의 힘이 엷어 마치 세간의 불과 같고 모든 부처님의 힘은 커서 마치 겁(劫)이 다할 때의 불과 같다”고 이미 설명했지만 이제 다시 대답하겠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모든 공덕과 지혜를 쌓은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혹은 한 세상이나 두 세상 아니 세 세상이 고작이지만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널리 닦고 널리 익히면서 착한 법을 오래도록 훈습(熏習)했기 때문에 번뇌의 습기에서 다시는 남은 기운이 없다.
또 부처님은 온갖 모든 공덕에 있어서 모두 이미 거두고 다하셨기 때문에 모든 번뇌의 습기까지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착한 법의 공덕으로 모든 번뇌를 녹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아라한은 이 공덕들을 다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세간의 애욕만을 끊고 곧장 열반에 들어갈 뿐이다.
또 부처님은 번뇌[結使]를 끊는 지혜의 힘이 심히 날카롭고 10력(力)으로써 큰 칼을 삼아 막힘이 없는 지혜[無碍智]로써 곧장 지나가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모두 다 끊고 다시는 남은 것이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중한 죄가 있으므로 국왕이 그의 7세(世)의 근본까지 다 죽여 버리고 남은 자손이 없게 하는 것처럼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번뇌의 중한 도적을 그 근본까지 뽑아 없애고 남은 것이 없게 하시나니, 이 때문에 “일체종지로써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문] 다만 습기만을 끊어도 역시 번뇌가 제거되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번뇌가 끊어지면 습기도 함께 다한다.”고 했는데, 마치 먼저 습기가 다하여 남은 것이 없다고 설명한 것과 같다.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다만 번뇌만을 끊었을 뿐 습기는 끊지 못했지만 보살은 온갖 번뇌와 습기를 끊고 다하여 남은 것이 없게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오래전에 이미 욕망을 멀리 여의셨다. 마치 부처님께서 ‘나는 정광불(定光佛)을 뵙게 된 이후부터 이미 욕망을 여의었으나 방편의 힘 때문에 나고 죽으면서 처자와 권속이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후부터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기 때문에 온갖 번뇌와 습기가 다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처음 마음을 내실 때부터 번뇌는 있었고 도량(道場)에 가 앉으신 뒤에 새벽이 되어서야 온갖 번뇌와 습기를 끊으셨다”고 한다.
[문] 이와 같은 갖가지 설은 어느 것이 진실인가?
[답] 이것은 모두 부처님 입으로 하신 말씀이라 진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성문의 법 가운데서는 부처님께서 방편의 힘을 쓰시기 때문에 실제로 인법(人法)을 받아서 나고 늙고 병들고 춥고 덥고 배고프고 목마름 등이 있으시다. 사람으로서 나서 번뇌가 없는 이는 없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도 사람의 법을 따르면서 번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무 왕[樹王] 아래서 밖으로는 먼저 악마와 군사를 깨뜨리고 안으로는 번뇌의 도적을 없애서 밖과 안의 도적을 깨뜨렸기 때문에 아눗다라삼먁삼보디를 이루셨나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받아들여 “이 사람은 이런 일을 하셨으니, 우리들도 역시 이런 일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할 것이다.
만일 “오래전부터 번뇌가 없었다”고 하고, 또 “연등부처님[然燈佛]으로부터 무생법인을 얻은 이후로는 번뇌를 끊어 다하셨다”고 한다면 이것도 역시 방편의 말씀이니, 모든 보살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보살로서 오래전에 이미 온갖 번뇌를 끊었다면 성불하실 때에는 또 어떤 일을 하셨겠는가.
[문] 부처님께는 갖가지의 일이 있는데 번뇌를 끊는 것도 한 가지의 일이다. 그 밖에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하게 하는 일 등이 있지만 아직 갖추지 못하셨고, 많은 일들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한다.
[답] 그렇다면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번뇌를 끊은 것은 바로 맨 마지막의 몸[末後身]이다”고 하셨다. 사람으로서 만일 도무지 번뇌가 없었다면 어떻게 생(生)을 얻었겠는가.
[문] 무생법인을 얻은 이후부터는 항상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으면서 변화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답] 변화로 된 법에는 반드시 변화하는 주인[化生]이 있어야 하며 그런 뒤에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무생법인을 얻고 온갖 번뇌를 끊었었다면 죽을 때 이 육신(肉身)을 버리고 진실한 몸이 없었을 터인데 그 누가 변화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무생법인을 얻은 이후에도 번뇌가 다해서는 안 된다 함을 알 수 있다.
또 성문의 사람이 말하기를 “보살은 번뇌가 끊어지지 않았고 도량에 가 앉으신 연후에야 끊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큰 착오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의 법 가운데서 “보살은 이미 3아승기의 겁을 다 채웠고 뒤에 다시 백 겁 동안 있으면서 항상 숙명지(宿命智)를 얻었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기억하건대, 가섭불(迦葉佛) 때 울다라(鬱多羅)라는 비구가 되어 부처님이 법을 수행했는데 어찌하여 이제 6년 동안 고행으로 삿된 도법(道法)을 수행하면서 하루에 깨 한 알과 쌀 한 톨을 먹는다는 말인가. 마지막 몸의 보살은 하루조차도 오히려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6년 동안이겠는가.
성내는 일도 또한 그와 같다. 오래전의 먼 세상에 독사로 있을 때 사냥꾼이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는데도 오히려 성을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맨 마지막의 몸이면서 다섯 사람에게 성을 내었겠는가. 그러므로 성문의 사람들이 부처님의 뜻을 잘못 받아들인 줄 알 것이다.
부처님은 방편의 힘으로써 외도들을 깨뜨리려고 6년 동안의 고행을 나타낸 것이다. 그대가 말한 “다섯 사람에게 성을 내었다”는 것도 이것은 방편으로 역시 성을 내는 습기이지 번뇌는 아니다.
이제 사실대로 말해 주겠다.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으면서 번뇌는 이미 다했지만 습기는 아직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에 습기로 인하여 법성생신을 받아 자유자재로 화생(化生)하였고, 큰 자비로 중생들을 위하여 또한 본래의 서원[本願]을 완성하기 위하여 도로 세간으로 오셨으며, 남은 부처님의 법을 구족하고 성취하기 위하여 10지(地)가 원만하면서 도량에 앉아 무애해탈(無碍解脫)의 힘으로써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얻고는 번뇌의 습기를 끊으신 것이다.
마하연(摩訶衍)의 사람이 말하기를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은 온갖 번뇌와 습기가 모두 다한다.”고 하나, 이것 역시 잘못이다. 만일 모두 다하여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면 역시 법성생신을 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고서도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生身]을 버리고 법성생신을 얻은 것이다.
만일 “도량에 앉기에 이르러 온갖 번뇌와 습기가 함께 다했다”고 하면 이 말도 역시 잘못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3독(毒)이 있었다면 어떻게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독이 든 병에 비록 감로(甘露)를 넣는다 하더라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은 모든 순수하고 청정한 공덕을 쌓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3독이 섞였다면 어떻게 청정한 부처님 법을 갖출 수 있겠는가.
[문]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3독을 엷게 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청정한 공덕을 쌓으실 수 있었다.
[답] 3독이 엷으면 전륜성왕과 모든 천왕(天王)의 몸은 얻을 수 있지만 부처님 공덕의 몸을 얻고자 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3독이 끊어지고 습기가 아직 다하지 못했으면 모든 공덕을 쌓을 수 있다.
또 엷다 하면 마치 욕망을 여읜 사람[離欲人]이 아래 경지[下地]의 번뇌를 끊었으나 아직 높은 경지[上地]의 번뇌는 남아있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수다원(須陀洹)이 견제(見諦)에서 끊어야 할 번뇌를 다하고 사유(思惟)에서 끊어야 할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한 것과 같음을 바로 ‘엷다’라고 한다.
마치 부처님께서 “3결(結)을 끊고 음욕[婬], 성냄[瞋], 어리석음[癡]이 엷어지면 사다함(斯陀含)이라고 한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그대가 만일 “엷어지면 마땅히 이것은 끊어져야 하나니, 그 때문에 무생법인을 얻은 때에 번뇌가 끊어졌고 부처님이 되셨을 때에 번뇌의 습기가 끊어진다” 한다면 이것은 곧 진실한 설명이 될 것이다.
[經]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지위[菩薩位]에 오르려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보살의 지위라 함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이 바로 그것이다. 이 법인을 얻으면 온갖 세간이 공임을 관하면서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머무르면서 다시는 세간에 물들지 않는다.
또 반주반삼매(般舟般三昧)가 바로 보살의 지위이니, 이 반주반삼매를 얻으면 현재 계신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모두 뵙게 되고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는 모든 의심의 그물이 끊어지게 된다. 이때에 보살의 마음은 동요되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보살의 지위라 한다.
또 보살의 지위라 함은 6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방편의 지혜[方便智]를 내며, 모든 법의 실상에서도 역시 머무르지 않으면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증득하여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도 않아서 설령 악마가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와도 마음은 역시 미혹되지 않는다.
또 보살로서의 법과 지위의 힘에 들어가기 때문에 아비발치보살(阿鞞跋致菩薩)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또 보살마하살이 이 법위(法位)에 들어가면 다시는 범부의 범주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도를 얻은 사람[得道人]이라고 한다. 온갖 세간의 일이 그의 마음을 파괴하려 하여도 동요하게 할 수 없으며, 3악취(惡趣)의 문을 닫고 모든 보살의 범주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보살의 집에 태어나고 지혜가 청정하게 성숙한다.
또 꼭대기[頂]에 머무르면서 떨어지지 않으므로 이것을 보살의 법위[菩薩法位]라 한다. 마치 학품(學品)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상위(上位)보살은 악취에 떨어지지도 않고 하천한 집에 태어나지도 않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도 않고 또한 꼭대기에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문] 무엇을 꼭대기에서 떨어진다[頂墮] 하는가?
[답] 마치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만일 보살마하살이 방편의 마음이 없이 6바라밀을 행하면 공하고 모양 없고[無相] 지음 없는[無作] 가운데에 들어간다 해도 보살의 지위에 오를 수 없으며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공덕의 법에 애착하고 5중(衆)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에도 모양을 취하고 마음에 집착하면서 “이것은 도(道)요 이것은 도가 아니며 이것은 행해야 하고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모양을 취하고 분별하면 이것이 곧 보살이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꼭대기에 머무르는[住頂] 것인가? 곧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법에 대한 애착이 끊어지고 애착이 끊어진 법에 대하여 또한 취하지도 않는 것이니, 주정의(住頂義)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때에는 내공(內空)에서는 외공(外空)을 보지 못하고 외공에서는 내공을 보지 못하며, 외공에서는 내외공(內外空)을 보지 못하고 내외공에서는 외공을 보지 못한다. 나아가 없는 법과 있는 법의 공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상위의 보살은 등등함이 없는[無等等] 마음을 얻는데도 역시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고 마음의 모양이 진실로 공임을 알면서 모든 있고 없는 등의 쓸모없는 다른 논리가 소멸된다.
[문] 무엇 때문에 성문의 법에서는 바른 지위[正位]라 하고, 이 보살의 법에서는 다만 지위[位]라고 하는가?
[답] 설령 바른 지위라 해도 역시 허물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보살의 법에서 말하면 지위 그것이 곧 바른[正] 것이기 때문이다. 성문의 법에서는 다만 지위를 말하면서 성문의 지위[聲聞位]라고 말하지 않을 뿐이니, 이 때문에 바른 지위라고 말한다.
또 성문을 배우는 사람은 큰 자비의 마음이 없고 지혜가 날카롭지 않기 때문에 싫증내는 마음을 내지 못하고 모든 법을 많이 구하면서 갖가지 삿된 소견과 의심을 내지만, 보살마하살은 온갖 것을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중생들의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모두 제도하려 하면서 갖가지 의론을 구하거나 분별하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장자가 외아들을 몹시 애지중지하는데 그 아들이 병이 들면 다만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좋은 약만을 구할 뿐이요 그 약의 이름이나 그 약을 취한 시절이나 지어진 분량이나 숫자를 따져 분별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결과[果]를 좇아 12인연(因緣)을 관하지 원인[因]을 좇아 관하지는 않는다. 소견이 많은 이는 원인을 좇아 관찰하고, 애착이 많은 이는 결과를 좇아 관찰한다. 모든 성문의 사람은 인(因)이 곧 지위이기 때문에 바른 지위가 있지만 보살은 삿된 지위[邪位]가 엷기 때문에 다만 보살의 지위라고만 한다.
[문] 성문의 법 중에서는 고법인(苦法忍)에서 도비인(道比忍)까지를 바른 지위라 한다. 경에서 말씀하시듯이, 3악도(惡道) 중에서는 세 가지의 일, 즉 바른 지위[正位]와 성인의 과위[聖果]와 번뇌가 다함[漏盡]을 얻을 수 없으며, 파계(破戒)와 삿된 소견과 5역죄(逆罪) 등도 역시 그와 같다. 어느 법을 얻게 되기에 보살의 지위라 하는가?
[답] 발의(發意)와 수행(修行)과 대비(大悲)와 방편(方便)이 두루 갖추어지고 이 네 가지 법을 행하면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된다. 마치 성문의 법 중에서 먼저 네 가지의 선근인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을 자세히 말한 연후에야 고법인(苦法忍)의 바른 지위에 든다는 것과 같다.
[문] 수행은 모두 네 가지 법을 포섭하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차별하면서 네 가지로 삼는가?
[답] 처음 뜻을 일으키어[發意] 비록 수행한다 하더라도 오래 닦지 않기 때문에 수행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마치 집에 있는 이가 비록 종일토록 집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갔다고[行]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뜻을 일으키는 때에는 다만 뜻에서 원함이 있을 뿐이며, 행할 때에는 조작(造作)하고 재물을 남에게 주고 금계(禁戒)를 받아 지니는 등 이와 같이 6바라밀을 행하므로 이것을 수행이라 한다.
수행한 뒤에는 반야바라밀로써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고 대비(大悲)의 마음으로써 중생을 가엾이 여기게 되지만, 이 모든 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면 세간의 거짓된 법에 물들어 집착하고 갖가지 몸의 괴로움[身苦]과 마음의 괴로움[心苦]을 받는다. 이것은 다시 대비라는 이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수행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방편이라 했는데,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기 때문에 모든 법의 공함을 알고, 대비의 마음 때문에 중생을 가엾이 여기나니, 이 두 가지 법에 대하여 방편의 힘으로써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비록 모든 법이 공임을 안다 하더라도 방편의 힘 때문에 역시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비록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모든 법이 진실로 공임을 안다.
만일 이 두 가지 일에 대하여 평등하면 곧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나니, 마치 성문의 사람이 선정과 지혜의 두 가지 법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이때 곧 바른 지위에 들게 되는 것과 같다.
이 법에 비록 행함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그 밖의 다른 이름이 있으면 수행이라고 하지 않지만,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도량에 가 앉기까지 그 중간에 행한 것은 모두 수행이라 한다. 소소한 차별에 다름은 있지만 명자(名字)를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처음에 아눗다라삼먁삼보디의 뜻을 일으켜 온갖 중생의 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몸과 마음의 모든 고통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큰 서원을 세우며, 공덕(功德)과 혜명(慧明)의 두 가지 일을 장엄하는 인연 때문에 소원이 모두 만족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일에는 여섯 갈래의 수행이 있나니, 곧 6바라밀이다.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인욕(忍辱)은 공덕의 갈래이고, 정진(精進)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는 바로 혜명의 갈래이다. 6바라밀다를 수행하여 이 모든 법의 모양은 심히 깊고 미묘하여 이해하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각하기를 “중생은 삼계(三界)의 모든 법에 집착하고 있으니, 어떤 인연을 써서 중생으로 하여금 이 모든 법의 모양을 알게 할까. 마땅히 모든 공덕을 두루 갖춤으로써 청정한 지혜를 성취해야겠다.”고 한다.
부처님 몸은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로 광명이 두루 갖추고 신통이 한량없으며,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과 4무애지(無碍智)로써 제도해야 할 이를 관찰하면서 설법하고 교화하신다.
비유하건대 마치 금시조왕(金翅鳥王)이 목숨이 끝나는 용을 두루 관찰한 뒤에 날개로 바다를 쳐서 물이 열리게 하고 잡아먹는 것처럼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불안(佛眼)으로써 시방세계의 5도(道) 중생으로서 누가 제도될 수 있는지를 관찰하신 뒤에 처음에는 신족(神足)을 나타내고 다음에는 그를 위하여 그 마음의 나아갈 데를 보여주신다.
이 두 가지 일로써 세 가지 장애[三障碍]를 제거하면서 그를 위하여 설법하며 삼계의 중생들을 구제하시니, 부처님의 힘과 한량없는 신통을 얻게 되는 것이 가령 허망하다 하여도 오히려 믿어야 하는데 하물며 진실한 말씀이겠는가. 이것을 방편이라 한다.
또 보살은 반야바라밀로써 모든 법의 모양을 알고 그 본래의 서원을 생각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생각하기를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서는 중생을 얻을 수 없으니 어떻게 제도해야 될까?”라고 하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모든 법의 실상에서 중생을 비록 얻을 수 없다 하더라도 중생들은 이 모든 법의 모양을 모르기 때문에 이 실상을 알게 하려 한다”고 한다.
또 이 진실한 법의 모양은 역시 중생을 장애하지 않나니, 진실한 법의 모양이라 함은 없애거나 무너뜨릴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지울 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바로 방편이라 한다.
이 네 가지 법을 완전히 갖추면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된다.
[經]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阿鞞跋致地]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보살이 법위(法位)에 들어갈 적에 곧 이미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말씀하시는 것인가?
[답] 비록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다 이룬다 할지라도 모든 법을 저마다 상응하게 차례로 칭찬해야 한다. 마치 한마음 가운데서 한꺼번에 무루(無漏)의 5근(根)을 얻으면서도 저마다 그 모양을 분별하면서 말하는 것과 같다.
보살이 법위에 들 때에는 약간의 번뇌[結使]를 끊고 약간의 공덕을 얻으면서 이 지위를 지나서 이 지위에 머문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시고 또한 모든 보살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갖가지로 찬탄하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마치 이 경의 첫머리에서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서 5천의 비구들과 함께 계셨으니,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어서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고 할 일을 다 마쳤다”고 하는 것 등과 같다. 아라한이란 곧 번뇌가 다한 이[漏盡]이다. 번뇌가 다했다[漏盡] 함은 바로 그것이 할 일을 다 마친[所作巳辦] 것이지만 역시 그 밖의 사람들을 인도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아무런 허물이 없다.
이것 역시 그와 같아서 법위에 드는 것이 곧 아라한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는 것이다. 또 이 법위에 들므로 인하여 아라한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문] 법위에 들어가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초월하며, 나아가 모든 번뇌를 끊고 3악도(惡道)를 깨뜨린다는 등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만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 역시 갖가지 공덕에 머무른다 하며, 무엇 때문에 다만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른다고만 말하는가?
[답] 모든 나쁜 일을 버리면 모든 공덕을 얻게 된다. 머물게 될 공덕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례로 설명하겠지만, 모든 법은 모름지기 차례를 거쳐야 하고 한꺼번에 단번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킬 때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보다 더한 것이 없다. 정작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이보다 더한 두려움은 없으니, 대승(大乘)을 영원히 파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이 대승을 영영 소멸시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넓은 빈 땅에 사마리(舍摩梨)라는 나무가 있었다. 높고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여러 새들이 모여서 잠을 잤다. 마침 비둘기 한 마리가 뒤에 이 나뭇가지 위에 와서 앉았는데 그 나뭇가지가 이내 휘청하면서 부러져 버렸다. 그러자 택신(澤神)이 그 나무신에게 묻기를 “큰 새나 수리는 모두 견뎌내면서 어찌하여 작은 새인데도 이겨 내지 못하시오”라고 했다.
수신이 대답하기를 “이 새는 나의 원수인 니구로나무[尼俱盧樹] 위에서 왔습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다가 와서 나의 나뭇가지에 앉게 되면 틀림없이 똥을 쌀테고 그 씨가 땅에 떨어지면 그 나쁜 나무가 다시 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해로움은 아주 클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한 비둘기를 몹시 두려워한 것이니, 차라리 나뭇가지 하나를 버리고 온전함을 도모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고 한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모든 외도나 악마와 그리고 번뇌와 악업이라도 아라한이나 벽지불만큼은 두렵지가 않다. 왜냐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은 보살 곁에 있으면서 마치 저 비둘기처럼 대승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영원히 부처님의 업을 멸망시키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다만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라고 말할 뿐이다.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른다고 함은,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항상 아비발치의 지위를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모든 보살들이 물러나는 일이 많다 함을 들었기 때문에 뜻을 낼 때에 원을 세우되 “언제나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리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른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이 아비발치의 지위인가?
[답] 보살은 온갖 법은 나지도 않고[不生] 멸하지도 않으며[不滅],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공통하지도 않고 공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하여 삼계(三界)를 벗어나면서도 공으로써 하지도 않고 공이 아닌 것으로써도 하지 않는다.
일심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쓰신 실상(實相)의 지혜를 믿고 알면 파괴할 수 있는 이도 없고 움직일 수 있는 이도 없나니, 이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하는데, 이 무생법인이 곧 아비발치의 지위이다.
또 보살의 지위에 드는 것이 바로 아비발치의 지위이며,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면 역시 아비발치의 지위라 한다.
또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면 세상마다 항상 과보(果報)를 얻고 신통을 잃지 않으며 물러나지도 않는다. 만일 보살이 이 두 가지 법을 얻으면 비록 모든 법의 실상을 얻는다 하더라도 대비(大悲)로써 온갖 중생들을 버리지 않는다.
또 두 가지 법이 있나니, 첫째는 청정한 지혜이고, 둘째는 방편의 지혜이다. 다시 두 가지의 법이 있나니, 첫째는 깊은 마음으로 열반을 염(念)하는 것이고, 둘째는 일을 하되 세간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용이 꼬리를 큰 바다에다 두고 머리는 허공에다 두면서 우레와 번개를 치며 큰 비를 내리게 하는 것과 같다.
또 아비발치보살은 이 모든 법의 실상의 지혜를 증득하여 세상마다 잃지 않고 끝내 잠시도 여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깊은 경전에 끝내 의심을 내지도 않고 또한 방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온갖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요 어느 방편이나 어떤 인연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이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아비발치보살은 항상 깊은 마음으로써 끝내 악(惡)을 내지 않으며, 아비발치보살은 깊은 마음으로써 모든 선행(善行)을 쌓고 얕은 마음[淺心]으로써 여러 착하지 않은 일을 짓는다.
[문] 만일 아비발치의 모양이라면 무생법인을 얻었는데 어찌하여 얕은 마음으로써 여러 착하지 않은 일을 짓는다고 하는가?
[답] 두 가지의 아비발치가 있다. 첫째는 무생법인을 얻은 이이고, 둘째는 비록 아직 무생법인은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그의 과거와 미래에 짓는 바의 인연을 알고 반드시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므로 주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위하여 수기(授記)하신 이이다. 이 보살은 나고 죽는 육신(肉身)과 번뇌는 아직 끊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든 범부 가운데서는 가장 으뜸이므로 그도 역시 아비발치의 모양이라 한다.
만일 무생법인을 얻었다면 모든 번뇌를 끊었으므로 이야말로 청정하여서 마지막의 육신도 다하고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게 되며 번뇌에 방해 받지도 않고 가르치거나 훈계할 필요도 없나니, 마치 큰 항하(恒河)에 떠 있는 배는 끌어갈 필요도 없이 저절로 큰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이는 처음 뜻을 일으킬 때에 큰 마음[大心]을 내면서 모든 번뇌를 끊고 모든 법의 실상을 알면서 곧 아비발치를 얻기도 하며, 어떤 이는 다만 단(檀)바라밀만을 행하면서 곧 6바라밀을 두루 갖추기도 하나니, 나아가 반야(般若)바라밀도 역시 그와 같다.
어떤 이는 6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아직 아비발치를 얻지 못하다가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는 순간에 곧 아비발치를 얻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만일 모든 법이 모두 공하다면 중생이 없으므로 누가 제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미약해 지기도 하며 때로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도 모든 법이 공하다는 관[空觀]에 있어서는 약해지기도 한다.
만일 방편의 힘을 얻게 되면 이 두 가지 법이 평등하여 치우침이 없을 것이므로 대비의 마음도 모든 법의 실상에 방해될 것이 없고 모든 법의 실상을 얻는 데서도 대비에 방해될 것이 없다. 이와 같은 방편을 내면 이때에 곧 보살의 법위에 들게 되며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른다. 마치 <왕생품(往生品)>10)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아비발치의 모양에 대해서는 이 뒤에 <아비발치이품(阿鞞跋致二品)>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
10) 범어로는 Upapada-parivar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