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의 삶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나요?
이연신, 충남가정위탁지원센터
<저스티스 오브 버니 킹> 영화에는 주인공 버니와 위탁가정으로 보내진 그녀의 두 아이(루벤, 섀넌), 그리고 조카 토냐가 나온다. 버니의 유일한 낙은 아이들을 만나는 것,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집을 구해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버니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지만 아이들 만나는 게 번번이 막힌다. 그러나 그녀는 딸 생일에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상처받은 토냐와 함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영화 속에서 버니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겉모습과 기록만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영화에서뿐 아니라 우리도 보이는 것만으로 너무 많은 것을 판단해버리는 건 아닐까. 특히 입고 있는 옷, 무슨 일을 하느냐, 어디에 사느냐로 그 사람을 대한다. 서류에 작성된 기록으로 사람을 본다. 그녀가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차 유리창을 닦아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그녀에게 한 여자는 “돈이 궁하면 제대로 된 일을 구해!” 하며 멸시 섞인 말을 뱉어낸다. 그녀가 지금 경찰이 오면 도망가야 하는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 상황은 생각이나 했을까.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는 그 한마디에도 그녀는 씩씩하다.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집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부동산 중개업자는 버니의 허름한 옷을 보며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는다. 자신은 신발을 신고 있는 그곳에 무례하게 그녀에게 신발 벗길 요구한다. 집구할 돈이 없을 거라 보며 오히려 빨리 나가달라 재촉한다. 허름한 옷차림이 문제였을까? 다음번에는 면접을 위해 의상대여 서비스를 받아 다른 부동산 중개업자를 찾아간다. 멋들어진 옷과 구두 장신구를 하고 간 그곳에서 중개업자는 너무도 친절하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도 우러러보는 듯한 그의 태도는 실소를 머금게 한다. 결국 옷이 문제였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 기관에 들어오는 사람이 멋들어진 옷을 차려입고 오느냐, 허름하고 씻지도 않고 오느냐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았을까? 혹여 후원하러 왔느냐 후원받으러 왔느냐로 나누어 바라보진 않았을까?
위탁가정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 또한 비슷하다. 친부모가 아닌 위탁부모가 키우고 있기에 작은 일에도 문제아로 바라보기 쉽다. 그럴 것이라 단정한다. 위탁아동을 키우는 위탁부모 또한 편견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저 부모와 자녀로 함께 사는데 사회의 차별적 시선과 편견은 그들에게 상처가 된다.
위탁아동, 위탁부모, 친부모와 함께 일하는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진 않을까? 부모와 분리된 아이들을 가엽고 무슨 문제가 있을 거라 단정짓지 않았는지, 아이를 위탁가정에 보내야만 하는 친부모를 으레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진 않았는지, 그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어디에 사는지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았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영화 속에 여러 사회복지사가 나온다. 우선 Government Family Services 접수 상담을 받는 사람은 버니가 왜 왔는지 묻지도 않는다. 오자마자 “인적사항부터 적어주세요.”가 기계적으로 나온다. 무엇을 물어보아도 대답은 똑같다. “서류부터 작성해 주세요.” 서류를 받으러 앉아 있는 것일까, 그곳에 온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앉아 있는 것일까. 일은 정확히 아침 9시에 시작한다. 버니에게 시급한 일일 뿐 그들에게 그녀의 시급성은 안중에 없고 9시에 시작하는 게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누구를 위한 기관일까? 누구 때문에 존재하는 직원일까?
버니의 담당 사회복지사 아일링. 버니가 다시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일까? 그녀의 일은 기관에서 제공하는 교육과 서비스를 버니가 모두 받도록(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하여 실적을 채워야 하는 게 우선으로 보인다. 엄마와 아이의 교감보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한자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야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버니가 일의 절차 기준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지 감시하는 일이 그녀의 중책같다. 그녀는 버니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도 듣지도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버니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그녀와 이야기 나누지 않는다. 버니가 왜 지금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듣지 않는다. 버니의 이야기기를 전혀 듣지 않는다. 서류에 적혀 있는 살인자이기에 아이들에게 위험하고,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했기에, 위탁가정에 무단으로 찾아갔기에 안전을 위협하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아이들을 만나면 안 될 사람으로 규정해 버린다.
아일링을 대신한 또 다른 사회복지사에게도 버니는 자신이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이유를 얘기하지만 듣지 않고 서류만 살핀다. 서류만 볼 뿐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서류에 나와 있는 위탁가정 무단침입으로 아이들이 다른 위탁가정으로 갔다고만 얘기한다. 아이들 엄마인데 아이들이 다른 위탁가정으로 가는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알고 싶으면 “이메일로 보내주면 전달하겠다.”는 말뿐이다. 이메일 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되지 않는 버니에게 이메일이라니. 아이들 관련한 일을 이메일 보내야만 들을 수 있다니 기가 막힌다. 이렇게 하는 이유를 물으니 “아이들을 지키는 게 제 일이에요.”라고 답하는 사회복지사에게 버니는 되묻는다. “From me?” 학대하는 아빠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낸 엄마인데 이제 세상은 엄마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며 철저히 엄마와 아이 사이를 가로막는다. 그녀는 동생네 머물며 조카들을 하교시키고 먹이고 돌보았다. 조카들보다 더 사랑하는 그녀의 아이들을 그녀가 돌볼 수 없다니, 그녀가 아이들에게 위험한 사람이라니 너무 아이러니하다.
버니는 남편이 딸아이를 흔들고 벽에 던지는 순간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남편을 살해했다. 딸은 그 후 영구장애를 얻었고 그녀는 정당방위로 징역 3년을 살고 나왔다. 그사이 아이들은 위탁가정으로 보내졌다. 징역을 살고 나온 버니는 그녀의 동생네에 머물며 새벽같이 나가 지나가는 차 유리창을 닦으며 한 푼 두 푼 모으고 오후에는 동생의 자녀들과 가족들을 돌보며 쉴 틈 없는 생활을 한다. 그런 틈틈이 상담도 받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교육도 들었다.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집이 있어야 하는데 집을 구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일을 구해야 하는데, 범죄자로 낙인찍힌 버니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렵다. 집을 구하러 가봐도 허름한 자기 모습에 차별과 멸시당하기 일쑤다.
사회복지사는 아이들을 데려오려면 그녀가 직업을 구해야 하고 면접을 잘 보아야 한다며 희망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이런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아이들을 보는 일인데 그마저도 아이들 안전을 위해 사회복지사가 막아선다.
버니는 차비를 빌려 어렵게 아이를 만나러 온 다른 엄마가 매몰차게 예약명단에 없다며 기관에서 거부당하는 모습에 자신이 모은 동전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이다. 그녀는 조카(토냐)가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당하는 것을 알고 조카를 위해 싸워주는 이모이다. 엄마조차 토냐에게 진실을 묻지 않는 집에서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준다. 남편이 애를 흔들고 벽에 던지는 것을 보고 참지 않은 엄마이다. 아이들을 만날 때면 예쁘게 보이기 위해 단장하는 엄마이기도 하고, 딸의 생일에 선물과 케이크를 전해주기 위해 먼길 마다하지 않는 엄마다. 아이들 데려와 함께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하는 엄마다.
누가 이런 그녀에게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무시할 수 있을까? 차 유리창을 닦으며 돈 번다고 멸시할 수 있을까? 남편을 죽인 살인자라며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누가 내 아이와 가족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 불의에 맞서 싸우고, 그들에게 나의 중요한 것을 선뜻 내어줄 수 있을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이럴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 그들을 위해 우리는 최소한 편견 없이 판단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야 한다. 그들의 살아온 삶을 존중하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