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마고지 위령비(白馬高地 慰靈碑)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 중(1952년 10월)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3km 북방에 위치한 무명의 한 작은 고지를 놓고 한국군 보병 제9사단(사단장 김종오)과 중공 제38군 3개 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을 벌인 끝에 우리 국군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해발이 불과 395m 밖에 되지 않는 고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아군과 적군 2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전투기간 중 발사한 포탄은 적측 5만 5천 발, 아군 측 22만 발이며, 12차례의 공방전으로 24회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혈전사투로 처절하게 변모한 산용(山容)이 흡사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 위령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 등 17,535명(아군 3,146명, 중공군 14,389명)의 영혼을 진혼 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회고의 장·기념의 장·다짐의 장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을 기억하고자 건립되었다. ‘회고의장’에는 전사자를 추도하는 위령비와 분향소가, ‘기념의 장’에는 통일의 염원과 전승을 기념하는 전적비와 함께 당시 백마부대장이었던 김종오(金鍾五) 장군의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도 자유의 종각이 건립되어 현재 국민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기 위령비는 1985년 6월 6일 육군 제5사단 장병과 지역주민들이 백마고지 후방에 세운 3.6m 높이의 현무암 비석으로 세워졌으나, 이후 시간이 지나며 비석이 훼손되고, 대규모 위령제를 올리는 데 장소가 협소하다는 문제가 있어 1990년에 철원군이 위령비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이때 백마고지전적지공원이 조성되며 전적비와 백마고지전투기념관도 함께 마련되었으며, 위령비는 현무암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화강암 자연석 비를 세운 형태다. 기단 높이는 300cm, 비신 높이는 360cm다. 비석 앞면에는 ‘백마고지 위령비(白馬高地 慰靈碑)’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모윤숙 시인의 「백마의 얼」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1길 72
● 문의 : 033-455-8436
● 이용시간 : 상시 개방
● 휴무일 : 연중무휴
● 주요 시설 : 위령비, 분향소, 기념관, 전적비, 전망대, 자유의 종각
▶백마고지역에서 DMZ평화의길 15코스 걷기를 종료하고, 인근에 있는 백마고지 위령비를 찾아 잠시 묵념후 기념관과 공원을 돌아보면서 담아본 장면들이다.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 중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일대의 전략 고지를 놓고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이 벌인 치열한 고지전으로, 휴전 협상 전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려는 공방 속에서 12차례 공방전과 24회 고지 주인이 바뀌는 격전이였다. 결국 국군이 승리해 백마고지를 지켜냈고, 이 전투는 철원평야와 UN군 보급로 확보 측면에서 중요했으며 한국군의 방어 능력과 보병·포병·공중 지원 협공을 보여준 대표적 전투로 평가된다.
전투는 중공군의 강력한 포격과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봉래호 제방을 폭파해 역곡천을 범람시킨 작전은 국군의 증원 움직임을 어렵게 했고, 이 때문에 395고지 방어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후 중공군은 병력을 바꿔가며 계속 밀어붙였고, 국군은 대대와 연대 단위로 병력을 교대하며 고지를 버티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고지 자체가 방어하기 까다로운 지형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크게 누적되었으며, 국군은 포병과 공중 지원을 끌어들이고, 일부 전차 부대를 동원해 중공군의 측면을 견제했다. 그럼에도 중공군은 정상부를 여러 차례 점령했고, 국군은 이를 다시 되찾는 과정을 반복했다.
전투 이후 백마고지는 국군이 지켜낸 고지로 남았다. 철원군 자료에서는 이 전투를 “우리 국군의 승리”로 설명하며, 한국군의 방어 능력을 높이 평가받은 사례라고 소개한다. 또한 보병, 포병, 공중 지원이 긴밀하게 결합된 고지전의 대표 사례로 평가되지만, 희생 규모도 매우 컸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자료는 10일 동안 아군과 적군 합쳐 2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철원군청 자료의 위령비 설명에는 아군 3,146명, 중공군 14,389명 등 총 17,535명의 희생자가 언급된다.
“백마고지”라는 이름도 전투의 참혹함과 관련이 있다. 철원군 자료는 혈전사투 뒤 산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듯해 그렇게 불리게 됐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