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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호수 (누가복음 8:22~25)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 세상을 해석하는 잣대가 우리에게 다 있다. 넓게 보면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은 두가지뿐. 모든 인간은 생존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 내가 살아남기에 필요? 나의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 무엇?
태양은 태양광에너지. 물 수력발전소.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유익되는 방향으로 끌고올 수밖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자기 중심. 성경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언약의 차원에서 모든 만물을 해석한다.
그런데 언약 차원에서 인간 보게 되면 인간은 저주 가운데 있다. 어떤 축복과 행복 누릴 주제가 못된다. 이게 언약 관점에서 인간 바라보는 해석. 생존 차원에서 인간 바라보면 모든 인간은 마땅히 생존, 행복권리 누릴 수 있다.
말씀 보면 호수 나온다.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갈릴리 호수를 말한다. 아주 아름다운 호수. 갈릴리호수 물에 갔을 때 이스라엘 땅 같지 않아. 헐몬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물들.
많은 사람들이 호수를 노래한다. 내마음은 호수요. 아름다운 호수를 자기 마음에 빗댄다. 이 배는 달맞으러 강릉 가는 배. 그 모든 강물 호수 우리에게는 다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 내 생존 행복을 표출하기 위한 도구로 호수가 존재.
그런데 사실 그것은 우리 중심의 해석. 본문 말씀에 호수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광풍이 호수를 내리쳤다. 원래 언약적 관점에서 인간 바라보면 인간에게 행복 평안 어디? 매분 일초가 고통이어야 마땅. 욥의 표현 주께서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나를 압박한다
언약이 닥쳐오면 우리를 숨쉴 틈 없이 쥐어짠다. 호수 위에 배 띄우고 뱃놀이? 그야말로 개소리. 광풍이 닥쳐 배에 물이 차고. 우리가 교회 나와 함께 예배 드리는 이유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간 바라보는 순간.
인간이 만물의 주체. 천상천하 유아독존. 홍익인간. 인내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해석의 주체에는 다 인간 자신이 들어있다. 나 없이는 다 필요없다. 그래서 우리는 호수에 배 띄우고 정취를 만끽하고 아름다운 클래식 들으며 삶의 여유. 그정도는 누려야..
하나님께서 보호막을 제거하고 인간에게 닥치면 연주회 듣다 불나서 열명 사망. 호수에 뱃놀이 하다가 광풍으로 수십명 사망. 세월호 타고 제주도 놀러가는 게 언약의 창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것. 모든 배들이 매일 침몰하고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고. 그런 일 벌어져 마땅하다는 것이 언약적 관점에서 해석.
그 클라이막스가 요한계시록. 일곱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 완벽한 재앙이 끝없이 닥친다. 세상 가운데서. 그런 전제를 깔고 이 말씀을 보는 것. 언약으로 인생 보게 되면 내 인생 가운데 끝없이 뭔가 불행 저주 사건사고가 닥쳐오는게 마땅.
맑은 갈릴리호수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삶. 우리가 세상 바라보는 큰 틀. 언약적 관점으로 다시 세상 보면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런 말씀 대하며 마치 우리는 이런 광풍 맞으면 안되는 존재인것처럼 미친 인간 만나서 호되게 당해서는 안되는.. 행복한 인생 살아야 마땅한 것처럼 이 말씀 대하면 예수를 막 깨우며 자기 자신의 생존 위해 예수 흔들어 깨우는 기도 한다.
그 기도가 격려받아 마땅한 교회라면 그 교회는 비언약적 교회. 나의 생존 행복 위해 주여 부르는 기도가 오히려 책망받아야. 잘 살아보려고 예수께 기도하는 기도. 행복한 삶 위해 기도하는 기도가 불신앙. 책망 받는 교회가 언약적 교회.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지금은 불교 가든 기독교 가든 차별 없다. 즉문즉답. 승려들 얘기나 교회 목사들 얘기나 가만히 들어보면 결론은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당신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모든 이야기 풀어간다
따라서 절이나 교회나 똑같이 언약적 관점 아닌 비언약 관점으로 흘러간다. 주님 보시기엔 교회도 아닌 것. 교회 나올 때 마땅히 행복해야 내 인생은 왜 불행? 따진다면.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니가 지금 믿음 갖고 날 깨웠는데 예수를 깨운 믿음이 언약의 믿음 아니고 비언약의 믿음
그 언약의 믿음과 비언약의 믿음의 강렬한 충돌 보여주는 최초의 전쟁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 금식 후 마귀에게 시험받음. 생생한 현장. 마땅히 우리는 먹고 살아야 된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빵이 없으면 다른거 먹지. 우리에게는 빵을 달라 빵이 있어야 산다 마땅히 빵 먹고 살 권리 있다. 그 먹고 살아야 한다 라는 외침을 인정해주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사실 마귀.
교회에서 마치 하나님이 우리 생존문제 해결해주는 것처럼 이야기 - 물론 하나님이 생존문제 해결해주는 것 맞지만 -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요구를 듣고 움직이시는 것 아냐. 천상천하에 하나님이 듣고 움직이는 분은 예수 뿐.
기도가 가상하다 들어주는 하나님은 하나님 아니고 마귀. 그래서 마치 우리에게 당연히 먹고 살 권리가 있다 주장하고 그 권리 수용해주는 하나님은 마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 아냐. 그럼 뭘로 사는데요? 떡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거야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죽어있다. 떡을 먹고 살면 죽어있는 것. 말씀먹고 사는 사람만 살아있는 것. 로마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 구원의 전제? 어딘가에 빠져 있어야.
그래서 우리는 죄와 죽음 가운데 빠져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넌 죽어있는 거 인정? 나 지금 살아있는데. 떡으로만 사는 삶 자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있는 것 아냐. 말씀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자만 살아있는 것.
예수님께서 떡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하니까 마귀 반응. 그렇다면 말씀대로 살아봐. 네가 말씀대로 사는가 보자. 시91 말씀 제안하며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네 발이 돌에 닿지 않을 것이다. 섣불리 우리가 말씀대로 삽시다 라는 말을 함부로 뱉을 수 없다.
법을 주지 않는 이유. 어떠한 법을 줘도 반발 들어올 수 있어. 그럼 너는? 목사님은 말씀 다 지킴? 목사님은 미워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치고 들어오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 물론 지킨다는 사람 있다. 그런 분은 곧바로 손들어 뺨을 한 대 쳐봐야. 말씀대로 돌려 대야.
그 사람의 겉옷을 벗겨야. 그러고 나서 그 다음 말씀 요구. 속옷 원하는 자 겉옷 줘라. 그 사람 핸드폰 가방 아무튼 탐나는 거 다 갖고 와야. 달라고 하면 다 지킨다며? 어떤 성자라도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 권리 없어. 요구하는 그 사람이 그 말씀 못 지키니까.
마귀가 그걸 이용.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거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고? ㅇㅋ 그럼 말씀 줄게 시편 91편 갖고 뛰어내려봐. 마귀는 예수님 시험하기 위해 그 말씀 준 것. 예수 답변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그 물어보는 그 사람의 의도를 알고있는 것. 어떤 분은 저에게 방언 하십니까 천사 보신 적 있나요 그런 질문 한다. 거기 답할 이유 없는게 다 시험하기 위해서. 가끔 맛배기 얘기해준다. 깜짝 놀라며 목사님 그런 체험도 있나요
마귀는 우리에게 요구. 말씀대로 니가 살아서 뭔가 이 세상 물리법칙 뛰어넘는 뭔가를 체험했냐? 부도위기 기업체. 내일모레 문닫게 생겼는데 주여 기도했더니 중대한 문제가 해결. 우리는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게 아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와 표적 요구. 물 위를 걷듯 오병이어로 이천명 먹이듯. 뭔가 자연계 물리법칙 뛰어넘는 신기한 표적 요구. 앞서가기 위해서. 그 요구하는 그 사람의 중심에는 자기 생존 자기 영광이 들어있다. 내가 저들보다 앞서나가 내 이름 알리겠다
뭔가 기도해서 신기한 일 겪어서. 남보다 열걸음 앞서나갔다 해도 여전히 그는 마귀 포로. 자기 생존 영광 거기서 누리고 있으니까. 마귀가 기뻐한다. 넌 역시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었어. 말씀대로 살면 네게 복 주게 되어있다 하면서 마귀가 뒤에 웃고 있다
유튜브 간증. 미국유학 장로님. 갈 때 비행기표만 갖고 가서 겪은 좌충우돌 간증. 그 간증을 사람들이 왜 볼까? 편도만 끊어 낯선 미국땅 들어가서 희한한 일의 연속으로 승승장구해서 세계 무역협회 부회장.
그런 이야기 들으면 듣는 사람들이 어떤 꿈을 꿀까? 뛰어내려라 네 발이 땅에 안 닿는다. 그냥 미국으로 가 주께서 네게 모든 것 해주실거야. 말씀의 권능 경험. 아 하나님은 저렇게 우리를 살펴주시는 분이구나. 무엇을 전제? 나의 생존과 평안함 안정된 삶을 인정해주시는 분으로 바라본다.
바로 그 우리 생존 지켜주고 평온 보장하는 하나님이 사실 마귀였다는 게 예수께서 육신 입고 이땅에 오셔서 마귀와 붙는 전쟁을 통해 처음으로 드러난다. 유대인이 수천년 믿어왔단 여호와가 사실 마귀. 생존 보장해주었던 여호와가 마귀.
지금도 똑같이 많은 교회들이 우리 생존 보장해주는 하나님을 믿고 부른다. 그게 마귀. 예수님 답변은 간단.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말씀대로 살았다, 그런데 교회는 망했다. 사업 망했다. 매일 말씀대로 살았는데 애들 가출. 사고. 네가 하나님 뜻대로 살았으면 그러겠니? 제발 이제 뜻대로 살아.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욥의 친구들.
그렇게 따지면 가장 실패한 자가 예수.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 신명기에 기록. 그 말씀 그대로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음. 말씀대로 보자면 빼도박도 못하게 저주받아 죽은 사람. 아무도 저주받아 죽은 젊은이 믿을 자 없어
믿을 거면 차라리 편도 끊고 가서 미국에서 성공한 그 사람 믿지. 그를 성공시켜준 하나님. 자기가 못박혀 죽어가면서 뭔 헛소리? 누굴 살림? 본인이 죽는데. 그래서 십자가 밑에 다들 외친 것 내려와서 너를 구원하고 우리를 살려봐라.
이쪽 강도는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생존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동일한 요구 우리 생존을 보장하라. 예수님은 생존은 개뿔 본인이 죽어버림. 그래서 생존 차원으로 성경 보게 되면 예수는 실패한 자.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눈이 가리워져 계속 우리는 나 봐달라고 기도. 그게 바로 십자가 밑에서 내려와라 너를 구원해봐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똑같은 기도. 그걸 교회에서. 주여 돈이 없고 아프고..제발 나를 살려달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안 내려왔다. 하나님을 시험 말라 하고 안내려왔다. 저 인간 황당한 인간 죽어버렸네. 하고 가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 생존과 자기 평안의 본능을 못 벗어난다.
박상민 해바라기. 실화 바탕. 사랑해요. 세상의 말 다 지우니.. 아내가 사라진 것에 대한 본능적 불만. 하나님께서 주시고 데려가신 것에 대해 안 수용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항상 불평 원망할 수밖에. 인간 본능.
초점은 그것. 풍랑 오면 우리는 우리 생존 자체에 민감할 수밖에. 그래서 예수를 깨운다. 지금 힘들어요 살려주세요. 생존 차원으로 모든 만물 바라보는 우리 본성 확인시키는 과정. 왜 내 부인을 데려가심? 왜 네 부인? 내가 준 건데.
내 의지 우리 생존으로 만물 해석할 수 밖에 없는 본성을 들춰낸다. 거 봐 너는 네 중심이잖아 네 생존 행복 중심. 뭐든지 너의 평안 행복 기쁨 위주로 모든걸 해석하고 있잖아. 그런 우리 본성을 까발림
그 말은 곧이어 뒤의 말씀처럼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넌 대체 뭘 믿고 살아가는거야? where is your faith? 나는 평안하고 우리 식구... 나 생존 중심으로 예수를 자꾸 깨우는 것.
생존 위해 기도말라는 법 주는 것 아냐. 생존과 행복 위한 기도는 자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내 기도가 내 생존 행복 위주의 이기적 기도, 이것이 불신앙이라는 걸 알게 되는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
예수님과 동행하면 풍랑 없는 것 아냐. 얼마나 나 중심 행복 중심적인 자들인지 확인받는. 책망 받는 것. 믿음 어디? 나를 믿니 너를 믿니? 우리의 불신앙 확인받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언약이란 것이 나타난다.
나 중심적 불신앙에 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마땅. 우리 믿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 그 사실을 확인받는다. 닥쳐오는 사건 앞에서 우리 본성이 발현될 때. 그 때 우리 본성은 하나님 필요없다 나 살려주면 장땡
내 생존이 진리가 되어버리는 사건. 예수님 앞에서 도망치고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는 사건 속에서 나의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내 믿음은 사실 내 생존 위해 내가 만들어낸 믿음
그래서 베드로가 도망치듯 우리는 다 생존 앞에서 예수 부인하고 예수께 반항 불평. 우리의 23시간 59분 57초는 다 불평원망의 시간.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영어 스펠C.
박상민 노래 부른다는 것이 주님 앞에 시위. 믿음 없다. 이러니까 주님은 우리 믿음으로 뭘 하는게 아니다. 우리 믿음 다 갖다 버려야. 하나님 앞에 우리 믿음은 갖고 와봤자 쓸데 없다. 다 살아보겠다고 눈이 벌개서. 하나님 보시기엔 니들 다 죽어야
가장 큰 표적은 요나의 표적. 너희들은 떡 먹고 배불러서 나 찾고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 니들이 아는 생존 말고 다른 차원 있어. 생존말고 생명. 그 생명은 니들이 아는 생존 너머에 있다
생존의 옷 입고 생명 따라가다가 예수 십자가 오면 다 도망. 포스코.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 지고 죽음 속으로 들어감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우리는 다 죽어 마땅. 하나님이 내리시는 쓴 잔을 곱게 마실 사람 없다. 생존 행복 중심 인간.
호수에 광풍이 일어서 배를 쳐버리니 그때 인간의 잠들었던 생존본능이 깨어난다. 다급하게 주여 기도. 그 때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도라고 인정 않는다. 생존본능의 몸부림. 그런건 절에가도 이단에도 어디에도 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 바로 그런 우리의 본질을 일깨우신다. 생존 차원에서 못 벗어난 우리 본질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주께서 육신 입고 친히 이 땅에 오신 것. 너 자신 믿지 말고 예수 믿어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부인이 깔려있는 것. 우리로선 안 되기 때문에 예수 죽으심.
예수 은총만 믿는 것. where is your faith? 내 기분 좋을 때 슬플 때 문제 안돼. 포대기에 싸서 애 데리고 가듯. 웃든 울든 불평하든 상관무 예수 은총에 의해 구원됨을 알 때 우리 자신에서 자유. 스스로 만든 법에 갇힐 필요 없어. 그렇다고 볼 때마다 짜증내면 불편. 주님과 아무 상관없지만 듣는 사람 피곤.
내가 원인 아니다. 예수님이 원인 그분이 결과 모든 영광 그분에게. 저주 엉겅퀴 마땅. 웬일인지. 선순환 구조 벌받아 마땅한 우리 본질 발견. 이래서 나는 안되는구나 내게 주어진 모든 행복이 예수 십자가에 있다 선순환 구조에서 교회 탄생 예배 주를 향한 찬송의 순간
우리 삶이 하루하루 우리 본질 봄과 동시에 예수 은총. 그 순간 예배.
당연히 인생 호수 지날 때 광풍 내리쳐 우리 인생 배 흔들려야 마땅 그러나 평안함이 있다면 우리가 만든 것 아니라 우리 주 예수 십자가 희생. 날마다 십자가 발견 놀라운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