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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5> 서장 (書狀)
증시랑에 대한 답서(3) 진리를 깨닫게 되면 불안(佛眼) 혹은 심지법안(心地法眼)을 갖춘다고 하듯이 깨달은 마음을 흔히 눈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선(禪)에서 자기의 ‘마음’을 찾는 것을 자기의 ‘눈’을 찾는 것에 비유하여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한결 쉽다.
나에게 눈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나에게 ‘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사실은 내가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은 늘 밖을 볼 수 있을 뿐이고 자기 스스로를 보지는 못한다. 스스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이 자기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른 무언가를 ‘본다’는 사실을 통해서이다.
여기에 보여줄 모습이 특별히 정해져 있을 수는 없다. 즉 보이는 모습은 무엇이든 눈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편이 된다. 그러나 어떤 모습도 보이는 모습이 눈을 이렇게 저렇게 규정할 수는 없다. 보이는 모습은 단지 ‘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인연(因緣)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 생멸변화하는 식의 움직임을 통하여 마음은 드러나고 있다. 말하자면 식은 순간 순간 생멸하며 지나가는 현상에 불과하지만, 현상이라는 모습을 벗어날 수 있다면(현상이라는 모습에 머물지 않을 수 있다면) 모습이 아닌 순수한 생멸변화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순수한 움직임에게 마음 혹은 자성(自性)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현상[色]과 별개의 것은 아니지만[不二] 현상이라는 모습만 보고 있다면 이 움직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움직임에게 공(空)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즉 ‘식의 정지’ ‘절대무’는 ‘식의 활동’ ‘절대유’의 상대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은 색을 통하여 파악될 수밖에 없다. 즉 현상(識=色) 속에서 현상의 모양에 막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현상이 고정된 모양이 아니고 끊임 없는 변화의 움직임 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방거사는 마음의 체험을 언급하여 ‘다만 있는 것[色]을 모두 비워버리기를 바랄 뿐, 없는 것[空]을 결코 진실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없는 것을 진실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곧 있는 것이 된다.
선사(禪師)의 가르침은 모두 이러한 방편이다.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을 가리키는 방편이므로, 마음을 확인시키는 특정한 방편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대혜는 방편을 통해 마음을 파악하지 않고 옛 스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따르기만 하는 사람은 영원히 선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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