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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 받은 도시들 /마 11:20-24 /20211024낮
어떤 분이 모처럼 교회를 나왔는데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하니 “왜 자기를 보고 그런 설교를 했느냐?”고 시험에 들어 교회를 그만두겠다는 겁니다.
착각을 하는 겁니다.
어떤 목사가 ‘자기를’보고 설교를 합니까?
‘자기가’뭘 그렇게 대단하다고요?
설교는 ‘자기만’ 보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오늘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뭔 설교를 ‘자기만’보고 합니까?
이미 설교준비는 지난주에 다 마쳤고, 아니 마태복음을 시작한 게 1년이 지났고, 순서대로 하다 보니 오늘 본문이 여기인 겁니다.
게다가 누군가를 지목하여 책망할 때는, 그가 정말 열심이 있고, 그만큼 그를 사랑하니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십시오.
주님의 설교 중에 가장 무서운 책망과 저주가 나오는데 그들이 누굽니까?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입니다.
이곳은 주님이 공생애 3년간 주로 사역하신 곳입니다.
그만큼 아끼시는 도시였습니다.
사랑하시는 도시였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도 잘하니까 혼을 내는 겁니다.
가능성이 있을 때 혼을 내는 겁니다.
아닌데 혼을 냅니까?
“여보 애 좀 뭐라고 하세요.”그러면 “놔둬 놔둬 그 놈의 새끼 말을 해서 뭐 한다고?”
소용없다는 겁니다.
책망도 소용이 있을 때 하는 겁니다.
어찌 보면 오늘 주님의 책망도 이때까지는 가능성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때만 돌아서서 가슴을 찢으며 회개했다면 이들은 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망은 단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만을 위한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있었던 모든 교회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있을 교회들, 오늘 저와 여러분까지 포함한 교회들을 향한 책망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들어도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했습니다.
책망의 이유가 무엇이랍니까?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믿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회개는 동반하기에, 안 믿으면 회개를 하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도시를 사람으로 의인화하여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인간의 도리이며 구원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가 없으면 구원이 시작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다운 회개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1) 죄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기의 죄를 보고, 죄를 깨닫고, 죄를 느끼는 겁니다.
2) 그리고 죄를 시인해야합니다.
자기가 지은 죄와 허물을 그대로 인정해야합니다.
변명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는 겁니다.
3) 죄를 고백합니다.
믿음을 자기 입으로 시인하는 것인 것처럼, 죄와 허물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술서를 쓰는 것처럼 지은 죄를 숨김없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이실직고하는 것입니다.
4) 그리고 자백한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만으로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내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5) 그렇게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했으면 사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주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눈보다 더 희게 양털보다 더 희게 사하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사 1:18).
“우리의 죄를 도말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 44:2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시 103:12).
그 외에도 등 뒤에 던지셨다,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지워 버리셨다고, 씻으셨다고, 덮으셨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믿고, 자백한 모든 죄는 이미 사함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6)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죄의 은총을 믿었으면 다시는 그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회’를 했으면‘개’를 해야 하는 겁니다.
죄를 뉘우쳤으면, 그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가던 길을 계속가면 안 됩니다.
하던 일을 계속하면 안 됩니다.
참 회개는 불신앙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악령 마귀로부터,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던 마귀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돌이켜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딴 데로 가면 안 됩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가면 안 됩니다.
그럴 때 성령을 선물로 받으신다고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런데 지금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주님이 행하시는 수없는 이적과 기적도 목격했으면서 회개를 하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신 곳이 바로 갈릴리의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입니다(4:12~17).
예수님은 그 곳을 중심으로 공생애 사역을 하셨습니다.
가버나움 지역은 ‘스불론 땅, 납달리 땅,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인의 갈릴리’(4:15) 지역입니다.
그들은 “큰 빛을 보았고, 그들에게 빛이 비치었습니다.”(4:16).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4:18이하).
예수님은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4:23).
20절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들 지역이 23절에는 “가버나움”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그 곳에 머물러 계시면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거부는 불신으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공공연한 적대감정으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는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의 행하시는 권능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20)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고 선포도 하셨습니다.
수 없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병을 고치시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누린 특별한 사랑이었고, 특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에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 회개하기를 기대하셨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 겁니다.
오늘도 우리들 가운데도 특별히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은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렇게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으시고, 주님을 서운하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보면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21절 중 반절에 보면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두로와 시돈이 어디입니까?
두로는, 오랫동안 매우 강력하고 찬란했던 페니키아인의 항구도시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제와 같은 강력한 사람이 그들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시돈도, 두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페니키아인의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에스겔과 요엘 선지자에게는 두로와 시돈이 인간의 교만과 소유욕의 화신이었으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악한 적이었습니다(겔 26-28; 욜 4:4 이하).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었는데, 그 예언이 에스겔서에서 3장이나 차지할 정도로 그들의 죄는 무겁고 심판은 준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을 영적인 면에서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선지자의 적이며, 미혹하여 믿음을 버리게 하는 인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세벨(왕상 16:31 이하; 계 2:20)이 시돈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판결은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도시를 비유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베옷은 상을 당했을 때나 회개할 때 입는 옷입니다.
재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슬픔을 표시할 때 쓰는 게 재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 사역의 목적인데, 정작 예수님께서 마음을 들여 직접 사역을 하신 곳에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죄악과 포악의 상징적인 도시였던 니느웨는 요나의 말씀을 듣고도(욘 3장), 임금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직접 가셔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수 없는 이적과 기적을 나타내셨는데도 저들에게서는 회개가 일어나지 않고 변화가 나타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말씀이 넘쳐나는 교회에서 정작 회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과 이방은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어디에 가도 하나님을 경배함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이방인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책망은 저들의 교만입니다.
23절을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했습니다.
교만입니다.
패망의 선봉인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올라가겠다고 설쳤던 천사 루시엘이 이 교만으로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시날 평원에 모여 성을 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벽돌을 만들고 역청을 만들어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성의 높이는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하나님보다 자기네 이름을 더 떨치자는 것이었습니다.
교만입니다.
인간이 최초로 쌓으려고 했던 교만의 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탑은 무너졌고,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역시 교만과 패륜과 부도덕으로 유황불에 녹아 사라졌습니다.
이게 교만입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난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개인도, 도시도, 역사도, 왕조도 교만하면 망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의 교만은 금물입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고개를 끄떡이며~~~~~).
온유하시기 바랍니다(계속 고개를 숙이며~~~~~~).
인사도 잘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나 보면 먼저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들한테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조건 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사는 길이오, 잘되는 길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교만 때문에 쫓겨났고, 이스라엘의 사울 왕도 교만 때문에 망했고, 페르시아의 총리대신 하만도 교만 때문에 죽었습니다.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다던 가버나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가버나움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편 119:21을 보면 “교만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잠언 16:18을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야고보사도는 4장 6절에서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러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어느 순간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기 20절에서 “책망을 받았고”, 21절에서 “화가 있을 찐 저”하시는 저주를 받고, 23에서는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는 책망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결국 그 말씀대로 음부에 까지 낮아져 저 음부 아래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땅도,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 설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1) 창세기 3장을 보면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2)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의 저주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결국 그 자손들이 훗날 시돈과 그랄과 소돔과 고모라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저주의 말을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 간에도 저주의 말을 듣지 말고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세 사람이 교회에서 저주하면 하늘에서도 저주가 이루어지고, 두 세 사람이 교회에서 축복하면 하늘에서도 축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저주를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 가족에게서도, 내 친척과 내 이웃과 내 친구와 모두에게 축복만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많이 보고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주님은 인내로 그들을 기다려 주시며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내는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들일수록 더욱 겸손히 은혜에 보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주로 갈릴리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버나움이나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많은 표적들을 보고도 끝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니 그들을 향하여 이런 책망과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도시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고라신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벳새다도 그 원래 위치가 어디였는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악을 선택한 도시들이 멸망하여 사라져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돔 역시 그러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저주를 선택한 소돔은 결국 불과 유황에 타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산 폭발로 사라져 버린 로마의 폼페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도 죄악으로 관영해 있었고, 마지막 회개의 기회마저 차버리고 말았기에 그들은 멸망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한 개인과 도시와 국가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도시와 나라를 위해서 아브라함처럼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노아와 아브라함과 같은 의인들이 많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도시와 나라도 갑자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