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카위 ~미리 3편. 악몽의 말라카 해협과 해적출몰해역 통과
2023년 6월 7일 수요일
오후 1시 30분. 누룽지를 끓여 점심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치자, 역풍에 역조류가 시작된다. 노고존 16~19노트. 선속 3.6~4.5 노트를 오르내린다. 싱가포르 해역까지는 이제 40해리. 10여 시간 후면 해적 출몰해역으로 진입한다. 역풍, 역조류 때문에 진입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이제는 모두 하느님의 뜻이다.
오후 3시 25분. 맞바람 13~15노트. 선속 2.6~3.2노트다. 배는 역조류, 역파도에 끊임없이 시소를 탄다. 펀칭은 덤이다. 크루들은 멀미와 피로로 누워있다. 가끔 콕핏으로도 파도가 들이친다. 그야말로 인내심 시험이다. S. Benut 앞바다에서 풍파를 겪고 있다. 문득 아덴만 항해가 떠오른다.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다만 아덴만은 소말리아 보사소 앞바다까지 4일간 혼자 이 상황을 겪었고, 여기는 4명이 함께 이틀간 겪는 상황이다. 아덴만은 역조류가 약했고, 말라카 해협은 맞바람이 아덴만 보다 덜하다. 어찌됐건 해협들은 세일러에게 순순히 길을 내주지 않는다. 항해만으로는 어제와 오늘이 이번 항해의 최대 고비이고, 오늘 밤부터 내일 밤까지는 해적 출몰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말라카 해협 항해는 위기의 연속이다.
오후 4시 30분. 선속 2.7~3.2노트다. 오후 내내 역조류로 이 속도다. 성질 급한 사람은 2,000Rpm으로 치고 나갈 수도 있을 거다. 12시간만 치고 나가면 금방 싱가포르 해역을 빠져 나갈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중고요트로 그런 속도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고장 없이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중고 요트 중고 엔진은 지금 당장이라도 고장이 날 수 있다는 거다. 치명적인 고장이 생긴다면 그때부터 재난 영화가 시작된다. 죽고 싶은 세일러 또는 진짜 2,000Rpm으로 탈출해야만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High Rpm을 사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세일러들은 시속 5노트를 기준으로 항해한다. 하루 120해리가 기본거리다. 세계일주 세일러들은 3~4노트를 기준으로 (범주로만) 항해하는 선장들이 대부분이다. 평속 하루 120해리도 엔진까지 사용해서 딜리버리 운항하는 선장들의 기준이다. 3,000Rpm이 최대인 엔진을 가진 선장들은, 일반적일 때, 1,200 Rpm을 잘 넘지 않는다. 나처럼 해협을 탈출해야만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1,300~1,500Rpm을 사용한다. 바람이 잘 도와 줄 때는 엔진을 끄거나 1,000Rpm으로 배터리 충전하는 정도로 다닌다. 2년 전 ‘님파’호로 캄차카 반도를 항해하고 온 젊은 김강훈 선장이 한 말이 있다. “1,200Rpm 미만으로 다니면 엔진에 문제생길일 없어요.” 200% 공감한다.
지금처럼 역파도가 높을 때는 속도가 5노트 이상이라도 펀칭이 문제다. 결국 바다가 허락할 때까지 주어진 속도로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서두르면 사고다. 바다가 허락하지 않는 무모한 모험을 시도하면 다시는 세일링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결국 아덴만 탈출 때, Rpm 1,600~1,800을 시도한 것은 그곳을 그때 탈출하지 못하면 5월부터 시작되는 인도양의 사이클론 때문에 9월까지 기다려야 하는 절대 절명의 타이밍에 ‘바람의 틈’을 보고 목숨 건 모험을 한 것이다. 만약 그때 제네시스가 무리한 운항으로 고장 났다면, 나는 소말리아나 예멘에 난파할 수도 있었다. 말뿐만 아니라, 정말 생명을 건 모험을 한 거다. 다시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 한번으로 족하다. 그 모험의 결과로 스리랑카 Galle에서 엔진 고장이 발생한 거고, 마리나에서 엔진이 멈춰서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말라카 해협의 역조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350~1,450 Rpm으로 운항중이지만, 이것 역시 특수상황이다. Miri 마리나에 도착하면 엔진오일, 임펠러, 각종 필터들을 모두 교체할거다. Miri 마리나에서도 한국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오후 6시. 카레 파스타를 했다. 다행이 크루들 모두 바닥까지 긁어 먹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저녁 한 끼를 해결한다. 바닷물로 초벌 설거지를 하고 수돗물로 헹군다. 날씨가 좋다. 바다 풍경도 좋다. 저녁 식사도 맛났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역풍으로 2.3~2.6노트다. 펀칭도 심하고 정말 답답하게 진행한다. 그러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 순간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다. 말라카 해협에서 역조류를 만나는 일은, 우리네 세일링 인생에서 두 번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말라카 해협을 세일 요트로 다시 지날 일이 있을까? 감사하고 기도하자.
오후 8시. 선속이 3.5노트로 올라간다. 이제 슬슬 역조류가 풀리나 보다. 싱가포르 해역까지 남은 거리 30마일. 역조류가 제대로 풀리면 6시간이면 도착이다. 거기서부터는 해적을 조심하며 항해해야 한다. 자 근데 어떻게 조심해야 하나? 아무 대책도 없다. 크루들은 아이폰도 감추는데, 그런 게 무슨 소용 있나? 노련한 외국 세일러들 말대로, ‘해적이 왜 돈도 안되는 세일요트를 노리겠나?’ 에 공감한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 해적들이 내 지갑을 노린다면 줘야지. 돈 몇 푼에 목숨을 걸 이유는 없다.
2023년 6월 8일(목요일) 오전 5시 30분. 싱가포르 요트 클럽 앞 바다를 지나고 있다. 맞바람 6.6노트. 이상하다. 지금쯤은 옆바람이 되어야 하는데, 헛! 선속 9.4노트. 이럴 수가. 조류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고 있는 거다. 이런 데를 진입하려니 속도가 2.7노트 밖에 안 나올밖에. 다시 한 번 강조 하지만, 말라카 해협과 싱가포르 해안은 울돌목과 비슷하다. 조류가 엄청나다. 하지만 규칙적으로 바뀐다. 느렸으면, 다시 빨라진다.
싱가포르 야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배 모양으로 만들어진 멋진 호텔도 보이고, 대관람차도 보인다. 우리 바로 곁 400미터 지점에는 온통 조명을 밝힌 아름다운 유람선도 지나고 있다. 우리는 싱가포르의 야경에 넋을 잃고 있다. 그런데 여기가 해적 출몰지역이다. 잊지 말자. 하지만 아이러니다. 이렇게 싱가포르가 빤히 보이는 지역에서 해적질이라니. 오른쪽엔 인도네시아 Pulau Batam이 보인다.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의 야경을 동시에 보고 있다. 눈으로 보기에 한강 보다 좀 넓은 해협 양쪽에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가 있다.
순간적으로 선속이 10노트를 넘어선다. 조류가 예상을 벗어난다. 현재 위도 1도 11분. 여전히 야간엔 상당히 쌀쌀하다. 아직 해적 출몰지역의 중앙이다. 마음을 놓을 순 없다. 40해리만 더 가면 해적 출몰 지역을 벗어난다. 무사히 벗어나기를 기도한다. 그나저나 싱가포르 해협에서 보는 싱가포르는 진짜 아름답다. 평생 마음에 남을 한 순간이 될 것 같다. 이런 순간, 세일링 요트 여행의 진가가 확인 된다.
오전 6시 20분. 싱가포르 해협의 여명이 시작되고 있다. 이제 34.8마일만 더 가면 해적 출몰 지역을 벗어난다. 그 다음은 남중국해다.
신이여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