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제주 도보 순례피정 열두 번째 날
3일 동안 머물렀던 조수공소를 오늘 떠납니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릴 거라고 합니다.
게다가 제주에는 최대 150mm까지 내릴 수
있다고 하니 걱정이 됩니다.
오늘은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를 걸어가야
할 때가 많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오전 7시,
조수 공소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이라네요.
주님의 일꾼이 많이 필요합니다.
성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가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건강한 가정에서 수도자와 사제가
많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8시, 아침식사
오늘 아침은 정말 정신없이 바쁩니다.
이사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식사 당번인 미카엘님, 율리엣다님,
사비나님이 어제 밤부터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신부님이 반찬 재료로 미나리, 브로콜리, 마늘을
사 오셔서 아침상에 올리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신부님, 자꾸만 일거리를 주지 마세요. 이삿짐도 싸야 하거든요~
미나리는 데쳐 리본모양으로 돌돌 말아놓고,
브로콜리도 데치고, 마늘은 얇게 저며 기름에
살짝 튀기듯 구웠습니다. 어제 남은 찰밥으로
구수한 누룽지도 만들었습니다. 삶은 달걀, 빵,
우유, 사과, 포도, 없는 게 없습니다. 미나리와,
브로콜리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니 정말 맛있습니다.
식사 당번의 힘든 수고가 우리에게는 아주 큰 행복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아침 9시 20분, 봉고차로 오늘 출발지로 이동합니다.
토마스님은 우리를 내려주고 다시 조수공소로 돌아갑니다.
무거운 트렁크, 식재료와 생필품 박스들인 이삿짐을 마지막
숙소인 김녕 성당으로 옮겨야 합니다.
운전기사로, 짐꾼으로, 사진기사로 봉사하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더 홀쭉해져 집으로 갈까 걱정입니다.
오전 10시, 도보를 시작합니다.
애월 해안로를 걸어갑니다.
푸르디 푸른 바다와 화산석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습니다.
이 애월 해안로를 지나면 내일 마지막 순례까지
더 이상 해안으로는 걷지 않습니다.
오전 10시 40분, 구엄 돌 염전에 도착해
정자에 앉아 잠시 쉽니다.
율리엣다님이 배우자이신 미카엘님께 손을 내밀고
진료(?)를 받습니다. 율리엣다님 통증이 정말 심한가
봅니다. 왠만해서는 잘 참으시는 분이거든요.
미카엘님은 수지침을 하십니다.
우리의 아픈 곳을 잘 찾아내어 고쳐줍니다.
정말 신통방통하게도 아픈 곳의 통증이 줄어듭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게는 주치의와 같습니다.
애월해안로 끝자락인 가문동 마을길을 걸어갑니다.
자그만 해안 마을입니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마을길을
빠져나오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집니다.
하귀 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빗방울이 굵어집니다.
작은 빌라 1층 주차장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비옷을
꺼내 입고 성당에 도착하니 오후 12시가 되었네요.
방금 주일미사가 끝났는지 교우들이 많이 보입니다.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2년 전에는 보이지 않던
카페 같은 쉼터가 보입니다. 주일미사를 마치고 가는
교우들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있네요.
봉사하고 있는 자매님께 “저희들은 순례자들인데
비를 피해 잠시 쉬고 여기서 점심식사를 하고 갈 수
있을까요?”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하십니다.
잠시 비가 그쳐 성전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나오니
갈수록 비가 억수같이 쏟아집니다. 신부님께서 잘
오셔야 하는데...신부님이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많기는 했지만 비가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후텁지근하기는 했지만 잘 걸었습니다.
오후에 이처럼 비가 많이 내리면 배낭을 메고 비옷을
입고 걷는 것보다는 배낭이 없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신부님께 배낭을 부탁해 봅니다.
오후 1시 30분, 배낭을 맡기고 출발합니다.
율리엣다님은 신부님 차를 타기로 하고,
나머지 우리 9명은 하귀 성당을 나와
큰 차도로 들어서 약 40분 동안 직진하여
걸어갑니다. 이제부터는 계속 시내로 들어갑니다.
도로도 넓어지고, 도로를 달리는 차도 많아지고
소음도 심해집니다. 차도 쌩쌩 달립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고 걸으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비가
내릴 거 같아 배낭도 맡기고 비옷을 입었는데
구름 사이로 간간히 햇빛이 보이며, 오후 2시 20분
정난주 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오지 않습니다.
정난주 성당에 신부님과 율리엣다님도 도착하여
함께 기도하고 사진을 찍으려 제대 앞에 앉았습니다.
성당 안 뒤쪽에 형제님 한 분이 보입니다.
우리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을 보고 앞으로 오셔서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합니다.
도보순례 첫날 동문성당에서 만났던 분이시네요.
팔순 노모를 모시고 성체경배(감실이 모셔진 곳에만 방문)
순례 중이시랍니다. 성당 밖에 25인승 크기의 소형버스
한 대가 보입니다. 버스 뒤에 휠체어가 실려 있고, 자매님도
한 분 계십니다. 수원교구의 북수동 성지의 성당에서 오신
베드로 형제님과 베로니카 자매님이라고 합니다.
연로하신 어머니를 위해 순례를 하시는 두 분 모습이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두 분이 부부이신 줄
알았는데 부부가 아니라 남매라 하네요. 그것도 각자 가족이
다 있다고. 사실 저는 남매라고 하기에 독신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잠시 성모님을 뵙고 제5피들이 모인 곳에 돌아오니
다들 뭔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 사탕이네요.
신부님께서 저더러 통에 든 말씀 사탕을 하나 뽑으라고
합니다. 얼떨결에 하나 뽑았습니다. 모두 제게 읽어보라고 합니다.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에제키엘서 9.6
헉! 요즘 내가 신부님께 반항(?)하는 걸 어찌 알았지?
오후 2시 45분, 정난주성당을 출발하면서
오후에는 비가 오지 않을 거 같아 신부님께
맡겼던 배낭을 찾아 등에 집니다...한 5분쯤 갔을까?
비가 한 방울 한 방울 내리더니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합니다. 잠시 멈추어 도로변 문 닫힌 가게 앞
처마 밑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걸으니 또 다시 비가 그칩니다.
노형성당으로 가는 길은 하귀 성당에서
정난주 성당으로 가는 길보다 더 조심해서
걸어야 합니다. 한 줄로 나란히, 가능하면 인도 쪽으로
바짝 붙어 걸어갑니다. 공기도 탁하고 숨이 턱턱 막힙니다.
1시간 정도 걸은 뒤, 노형동 골목길을 지나갑니다.
시골의 작은 마을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 멀리 팔 벌려
우리를 맞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오후 4시 노형성당에 도착합니다.
성전에 들어가 제대 위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니
뭔가 달라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왕 예수님’인가?
본당 사무장에게 물어보니 ‘부활 예수님’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부활 예수님’이 아니라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오후 4시 30분, 노형성당에서 연동성당으로 출발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신부님과 차로 먼저 연동성당에 간
율리엣다님이 이삿짐을 내려놓고 연동성당으로 온 토마스님과
노형성당 방향으로 걸어온다고 합니다. 한라대학교 입구에서
율리엣다님과 토마스님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제5피 완전체가 되어 걷습니다.
연동성당으로 올라가는데 다시 비가 내리면서 빗방울이
굵어지고 장대비로 변합니다. 비옷을 꺼내 입습니다.
비옷을 입고 벗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비가 멈출 것 같지 않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연동성당이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벌어진 비옷 사이로 빗물이 스며듭니다. 바지 무릎 아래가
비에 흠뻑 젖습니다. 그래도 오전 오후 동안 크게 비에 젖지
않고 걸을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오후 5시 10분,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종착지 연동성당에
도착합니다. 비에 흠뻑 젖어 축축한 상태로 성전에 들어가
주님께 감사기도 드립니다.
얼마 지났을까. 5시 30분 ‘딩동’ 소리가 들리며
제주 호우경보 문자가 뜹니다. 비가 밤새 많이 내리고
내일 아침이 되면 아주 말끔히 그쳐주면 좋으련만....
봉고를 타고 재 입주하게 된 친정(?)인 김녕성당으로 향합니다.
앞으로 3일 동안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묵게
될 숙소에 다다르니 우리의 짐들이 먼저 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느님
모든 은혜에 감사합니다.
시원한 바람
거센 비바람까지도...
아멘!
첫댓글 어느덧 벌써 도보 마지막 날까지 왔네요. 정말 대단하시고 존경스럽니다. 결코 쉽지 않은 순례의 길을 끝까지 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일찍 온 사정이 아쉽기도 하고 다시 김녕성당으로 숙소를 옮기셨다니...제주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합니다. 오늘 서울에는 비가 많이 내리는데...제주도 비소식이 있더군요. 끝까지 건강 유의하시면서 화이팅 하시길...기도드립니다. !!!
오늘은 부산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립니다.
비가 오는 날은 더 힘들겠지요.
고통과 힘든 가운데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순례단 발걸음의 봉헌에 유종의 미를 거두시길 기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화이팅!
오늘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아픈 몸으로 비바람을 맞으며 마지막까지.
지나온 모든 성당 가실 일만 남았네요.^^*
순례길이 아니면 비맞으며 하루종일 걸을 수 있을까요. 바보같은 일을 하시는 순례자님들. 유종의 미를 거두시길 기원합니다.
걸어서 제주도를 한바퀴 도는 순례길! 이제 그 끝무렵이네요. 함께하고 있어요. 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