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티 성지 - 최양업 신부의 사목 거점 |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471( 도로명 주소는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배티 성지가 자체적으로 밝히는 성지로서의 의의와 자랑거리는 4가지이다. 첫째는 박해시대의 교우촌(한국의 카타콤)이요, 둘째는 조선 대목구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며, 셋째 탁덕 최양업 신부의 사목 거점이 되었던 곳이며, 넷째 순교 복자를 위시하여 수많은 순교자의 본향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네 가지를 순서대로 정리하면서 배티 성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박해 시대의 교우촌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배티는 '배나무 고개'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이치(梨峙)라고 표기한다. 진천에서 안성으로 넘어가는 이 고개 주변에 돌배나무가 유독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서북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로 통하고 남쪽으로는 옥천, 공주, 전라도로 통하며,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던 오지인 데다가 충청좌도와 우도, 충청도와 경기도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어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천혜의 피신처였다.
이곳 배티 일대의 산간지대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로 추정된다. 이후 박해가 계속되면서 신자 수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1830년대 초에 와서는 이 일대에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배티도 그 중의 하나이다. 당시 교우촌으로는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이나 된다.
1837년 5월에는 성 모방 신부가 배티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 하였다. 당시 이곳의 교우로는 중국사신단의 일행으로 모방 신부의 입국에 참여했던 ‘조선교회 밀사’ 김 프란치스코, 그리고 수원 느지지 교우촌(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이 고향인 복자 장 토마스, 충주 출신인 복자 송 베네딕토 가족 등이 모두들 배티 교우촌에 거주했던 신자들이다.
1850년에는 성 다블뤼(안토니오) 신부가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곳 배티 교우촌에 두 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여 신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이 초가집은 성당 겸 사제관이자 신학생들의 기숙사 역할도 했다.
1853년 여름부터는 최양업 신부가 이 초가집에 약 3년 동안 거주하면서 우리나라 남부 5개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한편 틈틈이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최앙업 신부에 이어 배티 교우촌을 방문한 사제는 메스트르 신부, 페롱 신부였으며, 특히 1858년 10월부터는 순교자 프티니콜라 신부가 배티 교우촌을 자신의 사목 활동 중심지로 삼아 장기간 거주했다. 다블뤼 주교가 배티 교우촌에 와서 견진성사를 집전한 것도 이때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발생한 뒤에는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칼래(니콜라오) 신부가 배티 이웃의 삼박골 교우촌(현 백곡면 용덕리)으로 피신해 와서 보름 남짓 머물며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하다가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이후로 계속된 박해 때 배티와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던 교우촌에서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다. 오반지 바오로, 장 토마스, 김원중 스테파노, 송 베네틱토 가족, 박경진 프란치스코 부부 등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만 34명이나 된다.
박해가 끝난 뒤 배티 마을은 다시 교우촌으로 재건되었고, 1888년에는 공소로 재설립되었다. 1893년에는 이곳에 교리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웃 용진골(현 백곡면 용덕리)에서는 소설 ‘은화(隱花)’의 작가 윤의병(바오로) 신부가 성소의 꿈을 키웠다. 또 그때부터 이곳 교우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을 돌보면서 신앙선조들의 참신앙을 이어받는데 노력해 왔다..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 마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설립된 것은 1855년 제천 배론(舟論)의 성 요셉 신학당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배티 지역의 교우촌에 배론의 신학교보다 몇 년 더 빠른 시기에 조선대목구(지금의 서울 교구청)에서 설립된 소신학교가 배티에 존재했었다.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성 다블뤼(안토니오) 신부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대목구 소신학교’ 설립의 명을 받고 배티 교우촌에 온 것은 1850년이었다.
당시 배티 지역 교우는 20가족 약 120명이었다. 다블뤼 신부는 내려온 그해에 집 한 채를 마련했다. 흙과 짚으로 지은 두 칸짜리 집이었는데 방 하나는 다블뤼 신부가, 다른 하나는 그의 복사가 사용했다. 다블뤼 신부는 자신의 방을 사제관과 소성당, 신학교로 꾸몄다. 나중 페레올 주교가 배티 신학교를 ‘허술한 작은 신학교’라고 표현했듯, 배티 신학교 교사(敎師)는 다블뤼 신부와 조선인 한문 선생, 2명이 전부였다. 다블뤼 신부는 라틴어를 비롯한 그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학생도 5명에 불과했다. 다블뤼 신부는 배티 교우촌에서 학생, 교우들과 함께 산을 개간해 채소를 가꾸고, 조와 담배 등을 수확해 신학교를 운영했다.
1850년 당시 조선 교회 성직자 수는 단 3명이었다.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최양업 신부였다. 페레올 주교는 서울과 경기 일부의 사목을 자신이 맡고 그 밖의 5개 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의 교우촌을 최양업 신부에게 맡기면서도 다블뤼 신부를 신학교 전담 사제로 임명했다. 그 이유는 더는 조선인 사제 양성을 미룰 수 없었고, 그러기 위해선 신학교 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가 1853년 2월에 선종하자 그가 맡은 교우촌을 사목하기위해 다블뤼 신부는 부득이 배티를 떠나게 되고, 신학교 교육은 최양업 신부님이 맡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교우촌 사목을 위해서 교우촌을 누비면서도 신학교 학생들을 교육했다. 당시 교구장 선종 후 그 직무를 대행한 메스테르 신부의 지시로 신학생들의 외국 유학도 준비했다. 그리하여 1854년 3월에는 신학생 3명(임 빈첸시오, 김 사도요한, 이만돌 바울리노)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이후 1885년 제천 배론(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새 신학교가 설립되어 배티 신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초가집 성당 겸 사제관에는 최양업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페롱 신부 등이 오랫동안 거처했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사목 활동 거점
최양업 (1821 ~1861)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이시다. 순교자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복자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1836년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최양업 신부는 그곳 신학교와 필리핀의 마닐라, 만주의 팔가자 등지를 전전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849년 4월 15일에는 마침내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게 된다. 이후 토마스 신부는 요동의 차구 성당(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에서 7개윌 동안 사목하다가 귀국했다. 그리고 선종하는 순간까지 11년 6개월 동안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등 다섯 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순방하기 위해 '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가 되려고 했다.
최양업 신부는 1853년 여름에 배티 조선대목구 신학교의 지도를 맡은 이후 약 3년 동안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요 본당으로 삼았다. 또 사목 순방이 끝나는 9~10윌에는 배티 사제관에 거처하면서 저술에 몰두했다. 글을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여러 편의 천주가사를 짓고, 기도서 천주성교공과와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무리한 활동으로 경신박해 와중인 1861년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사목보고를 위해 길은 나서 서울로 가다가 문경 진안리 교우촌에서 과로에 장티푸스 합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의식이 꺼져 가는 가운데서도 최 신부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들을 불렀다고 한다. 선종일은 1861년 6월 15일. 나이는 40세였다. 시신은 가매장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초 배론(舟論, 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성지) 성요셉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Pourthié, 中 요한) 신부에 의해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배론의 신자들이 무덤을 단장하고 그 앞에 묘비를 안치한 것은 180년이 지난 1942년 12월이었다. 죽림굴에서의 그의 마지막 서한은 이미 그의 최후를 예고하는 듯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최양업 신부의 1860년 9월 3일자 서한)
복자 9위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본향
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 그 가운데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에 그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오반지 바오로, 이영준 아우구스티노, 김원중 스테파노, 김준기 안드레아, 손관보 베드로, 오사룡, 윤바르바라, 이종여, 김조이 막달레나, 이호준 요한 등 모두 34명에 이른다. 이에 따라 배티와 인근에는 유명·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 6인 무명 순교자 묘지(배티 성재골)
○ 14인 무명 순교자 묘지(배티 고개)
○ 이 요한의 아내와 딸 순교자 2기(삼박골)
○ 유 데레사와 남편 순교자 2기(배티 옛 성당및 은골)
○ 이 스테파노 순교자 1기(이월 새울)
○ 박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바르바라 순교자 2기(백곡 공소)
순교자 34명 중에서 지장골 출신 오반지(바오로), 배티 출신 장 토마스, 절골 출신 박경진(프란치스코) 등 8명과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성례(마리아) 등 9명은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에 의해 시복되었다. 배티 성지에서는 이들 9명의 시성과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위한 기도와 공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성지 조성 과정
청주교구는 유서 깊은 배티 성지를 성역화하고 한국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1997년 최양업신부 탄생 175주년을 맞아 최양업 탄생 기념성당을 봉헌했다. 그리고 거기서 산상제대까지 맷돌모양의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하였다.
1999년에는 최양업 신부 사제 서품 150주년을 맞아 최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우선적으로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현양 활동과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같은 해 최양업 신부가 머물렀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에 있던 농가를 매입해 철거하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한 후 최양업 신부 동상도 세웠다.
2002년 12월 3일 양업 영성관(현 피정의 집)을 신축해 봉헌식을 거행했다. 양업 영성관은 지상 2층 규모로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피정이 가능하다. 복원된 최양업 신부 옛 성당 및 사제관 입구에 103위 순교 성인 계단을 조성하였다.
2009년 청주교구는 교구 내의 대표적 성지인 배티와 연풍을 잇는 84.6km의 도보성지 순례길을 마련하였다. 2011년 3월 4일 배티 성지의 조선교구 신학교지와 무명 순교자 14인 묘소 그리고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역 등 3개소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면서 진천군 및 충청북도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성지개발에 들어갔다.
2011년 4월 15일 성지 들머리 주차장의 조립식 강당이 있던 자리에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고, 2012년 4월 15일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고딕 양식 기념성당을 완공(현 대성당)해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2012년 10월 10일에는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와 박해시대의 역사와 신앙 선조들의 삶을 보여줄 최양업 신부 박물관 기공식을 가졌고, 2014년 4월 11일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순례자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최양업 신부 박물관 봉헌식을 가졌다. 그리고 같은 해 최양업 신부 성당터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새로 조성하고, 성당 및 사제관으로 사용된 초가집 마당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양업 토마스 신부, 복녀 이성례 마리아 흉상을 새로 제작해 설치하였다. 또한 배티 일대에 산재한 15개의 박해시대 교우촌을 산길로 잇는 배티 순례길 조성 및 삼박골 피정센터 등도 추진하고 있다.
배티 성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30분. 먼저 탁 트인 넓은 마당이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옛날 산골 교우촌 지역에 이런 훌륭한 성지가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광장 한쪽엔 똑 같이 검은 색 지붕에 붉은 벽돌 건물이 사이좋은 형제처럼 붙어 있다. 카페 사무실 겸 성물방이다. 그 맞은편 광장에 고딕식 4각형 종탑과 함께 아름답고 품위 있는 대성당이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날마다 눈 씻어 (배티에서) <김영수>
바람들이 헤매다 닿아
눈물 왈칵 쏟아내는 골짜기엔
죽어서 살아 있는 음향 가득합니다
잠을 자지 않는 숲들
고요해서 그윽이 기도가 되고
흔들려서 뜨거이 꿈을 낳는 숲들
나는 언제 죽음에 닿으며
황홀히 살아날까요
날마다 눈 씻어 순간을 건지며
가난한 이웃 하나로 부활하여
날마다 새 부두에서 떠나볼까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하늘 건너는 사람들 바라보며
눈물 속에서 눈을 떠 볼까요
아득히 투명한 슬픔에서는
순간이 영원을 비추는 것입니까
대성당 종탑 아래에 성모동산이 있고 종탑 벽에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을 상징하는 갓과 지팡이와 짚신이 기도문과 함께 걸려있다. 여행자의 차림으로 전국의 교우촌을 누비시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기도문은 1847년 부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가 홍콩에서 기해 · 병오박해 때에 순교한 82분의 순교행적을 라틴어로 집필하고 난 뒤에 비친 기도이다.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주님
영원으로부터 감추어진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를
제 마음 안에 부어주시어
당신의 발자취를 따름으로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의 종들과 함께
당신의 거룩한 마음과
지극히 거룩한 성모님의 달고 단 사랑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통하여
현세에는 전우가 되게 하시고
후세에는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이 기도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십자가의 전쟁에 순교자와 함께 전우가 되어 참전하지 못하면서도 공짜로 그리스도의 상속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은총이기는 하면서도 죄스럽다.
최양업 선부 선종 150주년 기념 대성당
배티 성지 대성당은 최양업 선부 선종 150주년을 맞아 2012년 4월 15일 봉헌한 성당으로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느낌이 든다.
안으로 들어가면 환하고 밝은 로비의 벽을 아치형 아름다운 유리화가 커다랗게 채우고 있다. 천상 예수님과 성모님의 자리에 천사가 영광을 노래하는 가운데 최양업 신부가 교우들을 기쁘게 만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좌우 벽에는 자비의 예수님상과 이 성당을 봉헌할 때 도움을 준 수많은 교우천사들의 명단이 최양업 신부의 사목 목각상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성당내부는 간결하고 소박하다. 옆면이 넓어서 나지막하게 보이는 제대 뒤에 십자고상이 걸렸는데 둥근 광배(光背) 조명이 비추어져 신비감을 주고 시선을 더욱 집중시키고 있다. 8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제대의 오른쪽에는 장미다발에 둘러싸인 성모님이 서계시고 그 오른쪽 제대 단상에는 최양업 신부님의 영정 액자가 세워져 있다.
양쪽 벽면에는 스테인드 글라스에 순교자와 순교 행적을 담아 아치형 창문을 장식하고 있다. 참 많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아쉬운 것은 해당 순교자가 누구인지 어떤 행적인지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라도 있었으면 더 좋겠다. 그리고 유리화 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조성되어 있다.
성당을 나와서 순례 코스를 알아보기 위해서 안내판이 줄지어 서있는 곳으로 갔다. 안내판에는 배티성지에 대한 소개, 순회 코스, 거기다 이곳 진천군의 관광 안내 등도 곁들여 있다.
여기에서 안내되고 있는 순례처는 대성당, 탄생기념 성당, 십자가의 길, 산상제대, 최양업신부 박물관, 최양업 신부 옛성당 · 신학교, 6인 무명순교자 묘역, 오반지 묘 및 14인 무명순교자 묘역 등 7-8곳이 된다. 하지만 순교자 묘역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시간상 가기가 어려울 것 같다.
대성당은 이미 참배했고 최양업 박물관으로 향했다. 성지 안내 게시판을 뒤로 하고 길 따라 가다보면 한 그루 나오는데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식수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최양업 신부의 탄신인 1821년이니 175주년이면 1996년이다. 정진석 주교(후일 추기경)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을 미루어 보아 방문 기념으로 세운 것 같다.
조금 더 오르면 길은 갈라진다. 바로 언덕으로 오르면 최양업 탄생 기념 성당과 야외 제대, 더 멀리는 6인 무명순교자 묘에 이르고, 오른쪽 양업교를 건너가면 최양업 박물관과 최양업 옛성당 신학교, 더 멀리는 복자 오반지 묘소와 14인 무명순교자 묘가 나오고 더 가면 6인 무명순교자 묘와 이어진다.
시냇물 양백천에 걸려있는 양업교는 최양업 박물관으로 가는 다리일 뿐 아니라 마카오(최양업 신부가 유학한 곳)와 조선을 이어주는 배를 상징하며, 그 아래 흐르는 양백천은 서해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있다. 다리 건너기 직전에는 돌 형구 2개가 전시되어 있다.
최양업 박물관
최양업신부 박물관은 최양업 신부의 신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2014년 12월 개관했다. 이 박물관은 유물 전시관으로서의 박물관이 아니라 누구나 '보고 느끼고 기도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체험관으로서의 박물관이다. 현재의 최첨단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을 이용하여 한국에서는 최초로 시도되었다고 한다.
전체 주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기원하는 “만남과 동행"이고, 5개의 체험관과 1개의 기획 전시실, 1개의 시복 시성 기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의 두 동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조선대목구 신학생인 최양업이 동료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과 함께 공부했던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건물과 그 인근에 있는 성 안토니오 성당의 외관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전시관은 두 건물 중 앞동이다.
전시관은 1층과 2층인데 1층 로비에서 안내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2층 전시관으로 이어진다. 모든 시설과 전시물은 영상 시대에 걸맞게 과거와 같은 정적인 전시가 아니라 동적인 영상물과 입체적 전시를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영적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안내 동선을 따라가며 주요 전시물 위주로 소개한다.
제1전시실(한국 천주교회사) - 말 그대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도표와 패널로 설명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각종 박해, 사건, 사고를 별개로 보지 않고 한 그루의 나무의 가지로 연동하여 제시한 것이다. 천주신앙의 수용과 교회의 설립, 조선대목구 설정, 최양업신부의 귀국과 선교 확대,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과 병인박해를 네 그루의 나무로 표현하였다.
베티 성지의 의의는 박해시대의 교우촌(한국의 카다콤), 최양업 신부의 첫 본당, 최초의 조선대목구 소신학교 교우촌, 순교자들의 본향으로 소개되어 있고 교우촌 지역의 순교자와 무덤이 소개되어 있다
제2전시실(최양업 신부의 생애) - 최신부의 출생에서 선종까지의 삶의 역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충청, 전라, 경상, 경기, 강원 5개도 127개 교우촌을 12년 동안 9만리를 걸어 다녔으니 정말 길의 순례자, 땀의 순교자가 아닐 수 없다.
▲출생 성장기 - 1821년 3월1일 충남 청양군 화성면 다리골에서 최경환, 이성례의 6남중 장남으로 출생한 후 신앙의 젖을 먹고 하느님의 종의 꿈을 키웠다.
▲소년기와 성장기 - 부평 접프리에서 살 때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 신학교에서 1937년부터 1842년까지 수학했다.
▲귀국탐색기와 활동기 - 1842년동안 요동, 훈춘 등지에서 지내면서 귀국 탐색, 1844년 부제품, 1849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1860년까지 5개도를 순회하며 사목에 열중했다.
▲선종 - 1860년 경상도 언양 죽림굴에서 마지막 편지를 쓰고 이듬해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를 하러 가다가 과로로 문경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제3전시실(사목활동) - 영상실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길을 따라가는 체험 공간이다.
제4전시실(최양업 신부 유물) - 최양업 신부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그의 서한문과 저작물이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문 - 서간문은 21통인데 그중 18통은 파리외방 전교회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1997년에 영구 이관되었다. 첫 서간문은 1842년 마카오 신학교에 떠나기 전인 4월 26일자에 쓴 것부터 부터 1860년 죽림공소에서 작성한 것까지 18년 동안에 걸쳐 쓴 것이며 수신자는 마카오 신학교 때의 스승 르그레즈와 리브와이다. 모두가 라틴어로 썼으며 우리나라 초기 교회 박해 상활을 여실이 드러내 주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저작물 - 최양업 신부의 저작물은 주로 천주가사와 한글 기도서, 그리고 한글 교리서이다. 당시 교리서는 대부분 한문으로 씌어졌기에 일반 교우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글로 번역한 책이 필요했다. 가사는 우리의 전통적인 문학 장르인 전통 운율을 지닌 가사를 직접 지어 교우들에게 낭송하게 함으로 낭송하기 좋아서 교리의 토착화도 의도했다.
전시되어 있는 것은 최양업 신부가 지은 대표적인 가사 사향가, 공심판가, 사심판가 등을 비롯한 당시 교우들이 지은 가사들과 자신이 번역한 한글 천주 성교 공과(天主聖敎功課)와 한글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인데 한글 번역 교리책으로 처음이었다.
그 중 사향가는 833행으로 이루어진 4·4조의 한글가사다. 내용은 천주교의 가르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르침에 따라 고향 또는 본향으로 여겨지는 천주교에 귀의하고 의지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 시작부분은 아래 와 같다. 풀이를 곁들인다.
어와 벗님네야 우리 낙토(樂土)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 곳이 낙토런고
지당(至堂)으로 가자하니 아담 원조 내쳐있고
복지(福地)로 가자하니 모세 성인 못 열었고
이러한 풍진세계 평안한 곳 아니로다.
부귀영화(富貴榮華) 얻었던들 몇 해까지 즐겨하며
빈궁재화(貧窮災禍) 걸려신들 몇 해까지 근심할고
인간 영락(榮樂)다 얻어도 죽어지면 헛것이라."
제5전시실(멀티홀) - 멀티미디어홀은 시청각 자료를 통해 최신부의 순교영성을 깨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제6전시실 (기획전시실) -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그린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계단을 통해 2층 마지막 전시실로 오른다.
2층 전시관 마지막 전시관에는 닥종이 공예 인형전이 열리고 있다. 너무나 처참한 장면을 재현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한다.
최양업 신부 옛성당 및 신학교
박물관에서 나와 최양업 옛성당 신학교로 향한다. 넓은 포장도로가 나 있는 길을 따라 약 300m 올라가니 길가에 안내표지판이 서 있다.
이곳은 1853년 최양업 신부가 약 3년 간 머물면서 교우촌을 사목하고 신학교 학생을 가르친 곳이다. 1년에 7000리를 걸어 다니며 심할 때는 한 달에 겨우 나흘 밖에 못 잣다는 최양업 신부가 전국을 앞마당처럼 다니는 가운데서도 장마철에는 여기에 머물면서 직접 천주가사를 짓고 한글 교리서를 필사하는 등 저작활동을 한 곳이다. 모든 당시 유적이 세월 속에 묻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1999년 이곳이 최양업 신부가 머물렀던 곳으로 확인이 되자 부근의 농가를 매입해 철거하고 2002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왼쪽으로는 103위 성인 계단이라 부르는 시멘트 블록길이 있고, 그냥 흙길도 있다. 눈을 밟으며 흙길 따라 오르니 약간은 미끄럽기는 하지만 눈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몇 번 가쁜 숨을 몰아쉬자 큼직한 안내판과 조그만 초갓집이 나타난다.
이름 그대로 초가삼간이다. 이 작은 집이 조선교구 최초의 신학교로 여기서 라틴어와 서양 근대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집의 방 두 칸이 성당도 되고 사제관도 되고 신학교 교실도 되고 기숙사도 된다. 이보다 더 작은 성당, 학교, 사제관, 교실이 또 있을까? 그리고 이보다 더 다용도 건물이 있을까? 오늘날 아무리 작은 십여 평 짜리 아파트라 하더라도 여기에 비하면 대궐이다. 공연히 넓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죄스럽기도 하다. 내부에 최양업 신부상이 있다고 하여 문을 당겨보니 오늘 따라 짐궈져 있다.
집 옆에는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서 있고 마당 한쪽에는 최양업 신부와 부모님 흉상이 있다. 아버지는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이고 어머니는 복자 이성례 마리아이다. 두 분 모두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이때 장남 최양업은 마카오 신학교에 유학중이었다.
초가 성당 아래에는 배티 성지 앞산에서 이곳으로 이장한 유 데레사 순교자의 묘가 있다.
그리고 최양업 성당 바로 오른쪽에는 십자가의 길이 둘러져 있는 야외제대가 있다.
엄청 아름다운 조각품이다. 그리고 15처까지 있다. 십자가의 길은 보통은 14처이나 예수 부활을 포함시켜 15처로 기도하기도 한다, 십자가의 고통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지는 길이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최양업 탄생 성당
최양업 성당 · 사제관을 떠나 최양업 탄생성당으로 향했다. 최양업 탄생성당은 1997년 최양업신부 탄생 175주년을 맞아 봉헌한 성당이다. 지금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이 지어져 한적한 곳이 되었다. .
다시 박물관 앞으로 돌아와 양업교 다리를 건너 바로 대성당으로 내려가지 않고 오른쪽 오르막길을 택하여 오른다. 갈림길 길가에 높이 솟은 둘 기둥 하나가 보인다. 안내표지판을 보니 순교현양비이다.
안내판을 보니 이 돌은 병인박해 때 배티와 인근 교우촌에서 체포한 천주교 신자들을 관아로 압송하는 포졸들이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동안 신자들을 묶어 놓았던 돌기둥이라 한다. 당시는 선돌이라고 했다. 1949년 백곡 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었다가 1980년 큰 가뭄 때 옛 두건 마을 수몰터(진천읍 건송리)에서 배티 성지로 옮겨 1982년 9월 27일 순교현양비로 제막되었다.
다시 언덕을 오르면 수녀원이 나타나고 이어서 신망애(신망애) 삼덕 표지판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탄생기념성당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에는 윗성당이라고 되어 있다. 성당 표지판 바로 뒤에는 성지를 올 때의 마음가짐을 써 놓았는데 첫째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라. 둘째 홀로 머물러라 셋째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라는 성 알퐁소의 명언을 써 놓은 표지판도 서 있다. 이렇게 여러 사람과 바쁘게 와서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라는 말은 감당 못할 말이다.
지하 소성당 옆 유해실로 통하는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내부를 찍은 자료 하나를 참고오 올린다. 유해실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나가는 갈림길에서 안내판을 만났다. 안내판 옆에는 맷돌 모양의 14처가 있다. 왼쪽 십자가의 길을 택하면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산상 제대와 (영성관)피정의 집, 그리고 6인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간다. 순환코스이기에 그 길을 계속 가면 오반지 바오로 묘, 14인 무명순교자 묘역, 더 가면 우리가 다녀온 최양업 성당, 사제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바로 내려가면 대성당으로 간다.
더 오르느냐 내려가느냐가 문제다 하지만 지금 벌써 오후 5시가 넘었다. 지금 귀로에 올라도 밤 9시가 넘어야 갈 판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생각 같아서는 약 200-300m 지점에 있는 산상제대까지는 가보고 싶으나 마음을 접었다.
언제쯤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순례하는 날이 올까? 따라서 오늘 못 간 산상제대, 6인 무명순교자 묘역, 오반지 묘 및 14인 무명순교자 묘역 은 다른 순례객이 찍어 올린 사진 몇 장을 소개함으로 순례기를 끝낸다. .(김요한)
▲산상 제대와 큰 손 성모님
▲오반지 바오로 묘
복자 오반지(吳盤池) 바오로 (1813-1866)
오반지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이내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후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관장의 유혹에 오반지는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가 사형 집행 전 그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66년 2월 11일(양력 3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 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가 배티 성지로 이장됐다.
▲14인 무명순교자 묘역
▲6인 무명 순교자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