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7. 난주 병령사 석굴
169굴에 새겨진 ‘서진 건홍 원년’ 석굴조성 시기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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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대불> |
사진설명: 병령사석굴 불상을 대표하는 대불. 왼편 뒷쪽의 석굴이 유명한 169굴이다. |
병령사 석굴이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역도원이 지은〈수경주〉, 당나라 도세스님의〈법원주림〉등에 단편적인 자료가 전하지만정확한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사료는 없기 때문이다. ‘병령사’라는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1951년 10월) 지 10년 뒤인 1962년에야 비로소 석굴의 개착을 알려주는 자료가 출토됐다. 이 해 병령사 169굴에서 ‘서진건홍원년(西秦建弘元年)’이라는 제기(題記)가 발견된 것이다.
서진 건홍 원년은 서기로 420년. 중국 석굴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제기’였다. 돈황 막고굴 제285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돈황 석굴 관련 제기(題記)가 ‘대위(大魏) 대통(大統) 4년’. 서기로 538년이 된다. 둘을 비교하면 ‘병령사 석굴’이 ‘돈황 석굴’보다 약 120년 앞서는 셈. 병령사 석굴은 “늦어도 420년부터 존재했고, 개착됐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420년대는 흉노·갈·강·저·선비 등 다섯 북방민족이 한족(漢族)의 높은 콧대를 꺾고 양자강 이북에 연이어 나라를 건설하던, 이른바 ‘5호16국’시대. 당시는 북방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다. 앞선 시기의 한제국(漢帝國)이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고 한문화(漢文化)를 침투시키자, 중국 내지로 거주처를 옮긴 이민족의 수가 늘어갔다. 문화적 자주성을 잃은 그들은 한족으로부터 갖가지 압박을 받았고, 노예나 농노 등으로 전락하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새운 위(魏), 사마염이 건국한 진(晉) 시대에 이르러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상황을 타개하고자 북방민족들은 크고 작은 저항을 거듭했다.
그러던 304년. 흉노의 추장 유연이 ‘팔왕(八王)의 난’에 편승해 거병(擧兵), 산서 지방에 국가를 재건했다(漢. 뒤에 前趙로 바꿈). 같은 해 저족인 이웅(李雄)이 사천성에서 대성황제(大成皇帝)를 자칭하며 나라를 일으켰다. 한편 서진(西晉) 왕조는 흉노의 한군(漢軍)에게 수도 낙양을 빼앗기고 멸망, 강남(江南)에 망명정권이 탄생된다(東晉). 유연이 건국한 전조도 갈족인 석륵(石勒. 後趙)에게 멸망되고, 후조 또한 동북방면에서 남하한 선비족의 전연(前燕)과 저족의 전진(前秦)에게 패퇴(敗退), 후조가 2분되는 등 건국과 멸망이 되풀이됐다.
전연을 평정한 전진(前秦)의 부견왕의 치세는 5호16국 시대에서도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화북 전토는 물론 사천·서역에까지 전진의 영향이 미쳤다. 그러나 385년 동진(東晉) 정복을 꾀하다, 회하(淮河) 남안(南岸) 비수에서 전진이 대패하자 나라마저 망하고 말았다. 화북지방은 다시 후연(後燕)과 후진(後秦)으로 분열되고, 감숙성 방면에서도 여러 민족의 소국가가 분립하여 항쟁했다. 이윽고 일어난 선비탁발부(鮮卑拓跋部)의 북위(北魏)가 여러 국가를 평정하고, 하서주랑에 있던 북량(北凉)마저 멸망시키자, 5호16국 시대도 마침 점을 찍게 된다. 같은 무렵 강남에선 동진이 송(宋)으로 교체,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으므로 이후를 ‘남북조시대’(439~589)라 부른다.
169굴 6감 위쪽 절벽에 24행 발원문 묵서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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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석굴의 이불병좌상> |
호족(胡族) 중심의 국가로 유목사회 특유의 부락제도로 호족을 묶어놓았던 5호의 나라들은 한족에겐 중국 전통의 군현제(郡縣制)를 적용, “이른바 호한(胡漢) 2중 체제를 실시했다”고 서울대 박한제 교수는 지적한다. 군주 중에는 폭군도 적지 않았으나 한문화를 존중하였고 한족 사대부(土大夫)를 예우했으며, 중국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는 경향도 강하여 반드시 야만과 무질서만의 시대는 아니었다. 특히 군주들은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불도징(佛圖澄)·구마라집(鳩摩羅什)스님 등 서역승(西域僧)과 도안(道安)스님 등의 한승(漢僧)이 중국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다만 “정권의 바탕을 이루는 부락제도의 존재가 국가의 통일성을 저해했기에 각 왕조는 모두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박한제 교수).”
5호16국 시대와 남북조시대를 거치며 불교는 양자강 남북에 골고루 퍼졌다. 북방민족들이 서방의 고도한 정신문화인 불교를 저마다 받아들여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기 때문이다. 5호16국 시대가 끝나고 양자강 이북의 북위와 양자강 이남의 송이 서로 대립하는 남북조시대가 되면 중국천하는 ‘완전히 불교국가로 변모’되고 만다. 병령사 석굴 169굴에 남아있는 ‘서진 건홍 원년’(420)이란 제기는 당시의 불교사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군마(軍馬)가 대륙을 달릴 당시 병령사 계곡에 석굴이 개착됐다는 것은 5호16국 시대가 바로 불교전파의 시기였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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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169굴 내부> |
상념을 정리하고 병령사 계곡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서쪽 벽면엔 부처님들이 가득 했다. 서있는 부처님, 앉아있는 부처님 등 각양각색이었다. 저 멀리 대불이 보였다. 대불로 바로 가려다 먼저 ‘특굴’로 불려지는 169굴로 올라갔다. 특굴 답게 중국 돈 300원을, 병령사 석굴 입장료와 별도로 더 받았다. 가파른 절벽에 나무를 박고 마련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밑으로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석굴은 그 만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169굴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병령사 석굴 가운데 최대 규모이고, 가장 풍부한 불상군을 가지고 있는 석굴. 게다가 420년이라는 ‘제기’마저 품고 있는 석굴이기에, 다른 석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폭 27m, 깊이 19m, 높이 15m인 석굴 안에는 서진, 북위, 수대에 만들어진 작은 감실 24개가 있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눈을 들어 북벽을 바라보니, 아미타부처님과 대세지보살·관세음보살이 서있다. 높은 육계에 편단우견(왼쪽 어깨만 덮은) 형식의 가사를 입은 아미타불이 연화대좌 위에 앉아있고,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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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벽에 새겨진 병령사 부처님> |
제6감 위쪽 절벽에 벽화가 있고, 묵서(墨書)로 된 24행의 발원문이 씌어 있다. 자세히 보니 “건홍원년세재(建弘元年歲在)…”라고 적혀있다. 그 유명한 169굴의 제기였다. 가까이 다가 다시 한번 더 읽어보았다. 나도 모르게 사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자, 옆에 있던 관리인이 제지한다. “사진 촬영은 안 됩니다.” 단호한 그의 말에 약간 주춤해졌지만, 눈치를 봐 몰래 한 장 찍는 데 성공했다. 촬영을 마치고 다시 한번 더 제기문 앞으로 갔다. 제기문 바로 옆에는, 인도영향(간다라불)을 받은 불상으로 유명한, 책과 사진을 통해 자주 본 불상이 서 있었다. 실물을 보니 사진보다 훨씬 좋다. 합장한 채 서서 삼배를 드렸다. 169굴을 샅샅이 훑은 다음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169굴 바로 옆 171감에 병령사 대불이 있었다. 높이 27m. 상반신은 절벽에 새기고, 하반신은 소조(塑造)한 부처님. 동서문화 교류가 한창 꽃피던 당나라 초기에 조성된 부처님인데, 천 수백 년의 세월이 준 무게가 어깨에 그대로 남아있는 듯, 훼손이 심하다. 세월의 무게가 어깨에 앉아 있지만, 그래도 부처님은 부처님이었다. 감은 듯한 눈, 의자에 앉은 자세, 무릎에 놓인 두 손, 아직도 선명한 가슴의 두 젖꼭지, 깔고 앉은 옷자락 등 모든 것이 생생하다. 그리고 너무도 당당했다.
병령사 대불 1000여년 역사에도 위의 당당
대불을 지나 맞은 편 절벽으로 통하는 다리를 건넜다. 건너편에서 다시 대불을 바라보니 위용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다리 건너편에서 대불을 보며, 합장한 채 소원을 빌고 있다. 우리도 같이 합장했다. 대불을 돌아보며 조금 더 가니, ‘누워계신 부처님’이 계시는 전각이 보였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니 열반에 든 부처님이 계셨다. 와불을 보니 새삼스레 인도 쿠시나가라 열반당의 부처님과 아잔타 석굴 제26굴의 열반상이 떠오른다. “2002년 3월에 참배한 그 부처님들은 지금 잘 계실까.”
물이 없어 풀들이 자라고 있는 계곡을 밟으며 병령사 석굴을 빠져나왔다. 유적지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쉽게 나올 수 없었다. 입으론 병령사를 외우며, 자꾸만 돌아보았다. 병령사! 〈수경주〉에 의하면 병령사의 초창기 이름은 ‘당술굴(唐述窟)’. 당나라 시대엔 용흥사로 불려지다, 티베트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병령사로 개칭됐다. ‘병령사’란 티베트어 ‘선파병령(仙巴炳靈)’을 줄인 것으로 ‘십만미륵불주(十萬彌勒佛洲)’란 의미. 수많은 불상이 새겨져 있는 석굴이란 뜻이다. “십만의 부처님이 계신 계곡을 어찌 쉽게 빠져 나갈 수 있겠는가, 아니 수많은 중생들의 염원을 들어주던 부처님이 계신 계곡을 어찌 쉽게 나갈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병령사 쪽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대불(大佛)도 169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그분들을 품자 비로소 배가 움직였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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