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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정남진 전망대)
주제 : 목표/전도
제목 : 다른 목표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4)-전도(2)
성경 : 마28:18-20
찬송 : 495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190526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지난 주일에 드린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리를 놓아 주는 것입니다. 다리는 두 개의 언덕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리를 놓을 수 있습니까?
먼저는 예수님이라는 언덕에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다리가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은 사람들 언덕에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지상 명령의 또 다른 언덕은 사람 편에 연결된 언덕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햄버거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지상 최대의 지혜, 세계를 복음으로 축복하기 위한 예수님의 위대한 지혜를 줍니다. 동사 네 개가 이 명령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가라, 제자 삼으라, 세례를 베풀라, 가르치라” 이 넷 중 하나는 대들보이고, 너머지 세 개는 서까래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동사가 세상을 복음으로 축복하기 위해 순종해야 할 대들보 동사라고 생각되십니까?
1)가라(포류오)
2)제자 삼으라(마쎄튜오)
3)세례를 베풀라(밥티조)
4)가르치라(디다스코)
이 네 개의 동사 중 어떤 동사를 대들보로 보느냐에 따라서 한 사역자의 사역, 한 성도의 삶이 아주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수결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헬라어의 문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제자를 삼는 것이 본동사이고 나머지는 모두 분사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제자를 삼기 위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가야 합니다. 그를 데려다가 제자단에 입단하는 표시로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그를 제자로 양육하기 위해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오셔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다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지상사명에서 명령하신 것은 그분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라는 것입니다. 곧 가서 제자들을 불러다 세례를 주고 가르쳐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은 전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으로서 우리가 사람 편 언덕에서 해야 할 일의 핵심원리입니다. 그러면 이 원리로 어떻게 사람 편 언덕에서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할지 그 행동 계획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장사가 아닌 농사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서 만남의 다리가 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큰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죄 지은 사람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의 원리는 작은 제사장인 우리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 역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육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전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회학자들은 한 사람에게 연결된 관계망에는 250여 명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게는 형이 있고, 형의 부인인 형수가 있습니다. 형수의 친정어머니는 내게 사돈이고, 그 친정어머니의 다른 자녀와도 관계의 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장례든, 혼례든 관계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 증거 대상자 250명과 엮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관계망이 복음이 타고 흐르는 축복의 파이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을 관계전도라고 부릅니다. 오늘 현대의 전도방식은 관계 전도여야 합니다. 복음의 변증은 복음의 실체를 삶과 섬김으로 보여주는 시청각적 증거로 나타나야 합니다. 관계전도는 어떻게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려는 결과 중심의 증거가 아닌, 성육신적으로 그분의 삶 속에 참여하는 과정 중심의 전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안드레가 베드로를 전도한 것이나 빌립이 헬라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도 다 관계 전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육신 전도, 관계 전도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십니까? 전도는 장사가 아니라 농사입니다. 전도는 설득과 변증을 통해 결심을 받아내는 보험 설계 같은 일이 아닙니다. 전도는 밭을 일구고, 씨를 심으며,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며, 물을 주고, 기다려 주며, 돌봄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농부의 일과 같은 것입니다. 나의 사랑과 희생, 땀과 눈물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시려고 하신 일은 장사가 아닌 농사였습니다.
2)수평적 증거뿐 아니라 수직적 증거로
축산 농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구제역이나 AI일 것입니다. 구제역이 휩쓸고 가면 모든 기르는 가축을 생매장해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소중한 교회와 가정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과 기능을 잃고 죽게 만드는 오랜 전염병이 있습니다. 그것을 ‘요나단 신드롬’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중심인물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비참한 파멸로 이끈 모세의 손자 요나단(삿18:30)에서 딴 이름입니다. 모세는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고, 율법을 주며, 축복의 땅으로 인도한 민족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손자 요나단은 자유로워진 백성을 사로잡혀 가게하고, 율법을 파기했으며, 복 받은 땅에서 백성을 온 세계로 흩어지게 한 민족의 파괴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영적 대가 끊어지는 현상이 바로 요나단 신드롬입니다. 이 무서운 역병은 시대를 넘고 지역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과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영국교회는 믿음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해 영적 대가 끊어진 현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100년 전 영국인의 80%가 출석하던 영국교회는 지금 7.5%만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당시 26,000명이었던 성직자 수는 현재 8,000명으로 감소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2040년에는 전 국민의 0.5%만이 교회에 출석할 것이라고 합니다.
요나단 신드롬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한국교회도 점차 주일학교가 없어지고 있는 추세가 아닙니까?
강돈욱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강돈욱은 교육가였고, 조선과 만주에서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고 칠골교회와 창덕교회를 담임했던 목사였습니다. 그에게 강반석이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강돈욱은 딸에게 반석이란 든든한 이름도 지어주고, 평생 교회 생활을 이어갈 종교성도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동네의 믿는 총각 김형직을 남편으로 짝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수직적인 증거를 확실하게 해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김형직과 강반석 사이에 김일성이라 부르는 김성주가 태어났습니다. 김형직과 강반석은 아들에게 풍채 좋은 외모와 똑똑한 머리와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 등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빼 놓고. 그러나 그들이 제쳐 놓은 한 가지 일, 곧 복음의 수직적 증거에 실패하여 우리 민족은 반 백 년이 넘도록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김일성의 자서전을 보면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나의 손을 붙들고 교회에 갔다. 목사의 설교는 지루했다. 어머니는 계속 졸고 있었다.....” 그것이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김일성이 자서전에 기록한 영적 경험의 전부였습니다. 그가 늙은 날 어머니를 생각하며 당비로 칠골교회를 건축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의 가정에서 자란 무서운 무신론자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복음은 수평적으로뿐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증거 되어야 합니다. ‘청출어람이청어람’이라는 말을 마음에서 잊으면 안 됩니다. 청색이 남색에서 나왔지만 오히려 남색보다 푸르듯, 우리를 능가하는 건강한 제사장을 세워야만 우리의 증거는 땅 끝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3)삶과 말로
복음 전도는 시청각적이어야 합니다. 우선 복음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보여야 합니다. 삶으로 입증되지 않는 소리만 있는 복음은 그 영광을 가립니다. 그렇다고 삶의 화면만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복음의 영광을 보지 못한 채 감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칭찬을 돌릴 것입니다. 그것은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하고 복음으로 향해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으로 보여야 하고, 우리의 말로 증거 되어야 합니다.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많은 사람들이 말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큰 부담을 느낍니다. 혹시 복음에 이의를 제기하면 어떻게 하지? 혹시 복음을 거부하면 어떻게 하지? 괜히 어쭙잖게 말했다 망신당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복음을 변증할 능력이 없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강의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막 5: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거라사인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간증집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합니다. 이전에 귀신 들렸던 그에게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4)중보기도로
영어로 중보자를 ‘갭 스탠더’(gap stander)라고 부릅니다. 중보자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하나님 사이에 서서 하나님과 그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이 전도라면, 그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모든 전도는 하나님에 대해 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캐리는 인도에서 수십 년간 성경을 번역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인생 말년에 어떤 사람이 힘든 가운데서도 꺾이지 않는 열정과 헌신으로 섬겨온 사역비밀에 대해서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누이가 50년 간 병상에 누워있지만, 제 사역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 제 사역의 절반은 누이의 몫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족과 친척, 친구와 이웃 가운데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들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그들을 향한 복음이 축복이 이미 그들에게로 흐르게 됩니다.
5)교회에 초대하는 것으로
문준경이라는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문준경은 신안군 암태면 유지의 딸로서 옆 섬인 중동으로 출가했다가 남편에게 버려졌습니다. 20년 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다, 손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목포로 나와 삯바느질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강력한 부흥의 역사를 이끌던 이성봉 목사가 시무하는 북교동교회에 다니던 한 여성도의 간곡한 인도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그 집회에서 예수님을 만난 문준경은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신학공부를 하고 전도사가 되어 고향 주변 열 한 개 섬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나룻배를 타고 다니며 간호사로, 때로는 산파로, 때로는 돌본 목자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일 년에 신발 아홉 컬레가 다 떨어지도록 섬사람을 돌보던 그녀는 5.25 때 ‘새끼를 많이 깐 씨 암탉’으로 불리며 예수님을 전한 죄로 공산당의 죽창에 온몸이 벌집처럼 찔려 순교했습니다. 이듬해 그녀의 회갑이자 순교 1주기가 되던 날, 호남 지역 성결교 교역자들은 다 두건을 쓰고 상복을 입고 그녀를 추모하였습니다. 그녀가 전도하고 사랑과 도움을 준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당시 추모인파가 김구 선생의 장례 행렬보다 더 길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전도로 암태면 주민 90%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암태면에서 김준곤, 정태기, 이만신 목사 같은 큰 지도자를 포함하여 목회자 68명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교회로 인도하였더니 이렇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듣고 자랄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군가를 교회로 초대해야 합니다. 강권하여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바른 목적을 위해 우리 복을 사용하고 있는지 늘 자문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그가 복음에 매기는 가치와 같습니다. 복음이 시시한 그리스도인은 시시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복음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존귀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복음만큼 풍성하고, 복음만큼 영광스러우며, 복음만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