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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함양박씨 족보
밀양박씨족보
분량은 1책이며, 호남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표제는 “밀양박씨족보”, 판심제는 “밀양세보(密陽世譜)”이다. 크기는 반곽 가로 19.5㎝, 세로 24㎝이며,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P>
박승건의 발문에 따르면, 밀양박씨는 구보가 있었으나 임란을 거치면서 전해지지 않자 박승건의 아버지 박안성(朴安性)이 동종의 합의와 충청감사 박계현(朴啓賢)의 도움을 바탕으로 1621년(광해군 13) 에 족보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신유보(辛酉譜)이다.</P>
그러나 이 신유보는 상당수의 후손들이 누락되는 등 미비점이 많아 박안성은 보유 작업에 착수하여 원고를 정리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했다.</P>
이에 그 아들인 박승건이 전라도 판관으로 부임하여 밀양박씨 외손이던 감사 이태연(李泰淵)의 전적인 협조를 받아 간행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족보는 사실상 신유보의 개간본이며, 편찬자는 박안성이다.</P>
체제는 표지(表紙), 신라팔대군형제분봉연혁(新羅八大君分封沿革), 보도(譜圖) 상·중·하,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의 우측에는 묵서(墨書)로 “강희 원년 임인에 간행했다(康熙元年壬寅刊)”라는 간기가 표기되어 있다.
신라팔대군형제분봉연혁은 신라 경명왕의 8대군의 분봉 사실과 이를 바탕으로 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을 약기한 것이다.</P>
장자 밀성군(密城君)은 밀양박씨의 시조, 2자 사벌군(沙伐君)은 상주박씨의 시조, 3자 완산군(完山君)은 전주박씨의 시조, 4자 죽성군(竹城君)은 죽산박씨의 시조, 5자 속함군(速咸君)은 함양박씨의 시조, 6자 강남군(江南君)은 순천박씨의 시조, 7자 고양군(高陽君)은 고령박씨의 시조, 8자 월성군(月城君)은 경주박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견해인 바 박씨의 분파연혁이라 할 수 있다.</P>
보도는 6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 면은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字標)가 매겨져 있다. 총 수록 대수는 16대로서 상에는 1대 박현(朴鉉: 司憲糾正)에서 6대까지, 중에는 6대에서 11대까지, 하에는 11대에서 16대까지 수록되어 있다.</P>
이 족보는 1대 박현의 후손들을 최대한 수렴하고 있지만 박현의 현손 박강생(朴剛生)의 3자 의문(疑問)·절문(切問)·심문(審問) 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절문→중손(仲孫:默齋)계열, 심문→원충(원충:判官) 계열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P>
이 시기 다른 족보류와 마찬가지로 본손은 물론 외손·서자녀들까지도 수록되어 있다. 외손은 수록 대수에 있어 본손과 동일한 비중을 보이고 있으나 서자녀는 대체로 당대 또는 자녀대에 한정되고 있다. 다만 자녀의 등록 순서는 출생순이 아닌 철저히 선남후녀(先男後女)의 방식을 취하고 있어 이 시기 다른 족보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P>
각 인물의 주기는 개인에 따라 상략(詳略)이 심한 편이다. 12대 이전 대수에는 크게 현달한 인물이면 자(字), 호(號), 생년(生年), 과거(科擧), 관직(官職), 졸년(卒年), 시호(諡號), 묘소 위치, 배위(配位)의 성관(姓貫)과 처부의 이름 등이 기재되었다.</P>
그러나 그 이하 대수로는 비록 문과를 거쳐 고관을 지냈더라도 과거와 관직만 간단하게 기록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박계현(朴啓賢)·박안세(朴安世)·박승종(朴承宗)·박자흥(朴自興) 등 극소수 인물에 한하여 졸년, 향년(享年), 묘소위치, 배위관계 등이 부기되어 있는 정도이다. 사위와 외손은 거의 대부분 본관(本貫)조차 표기하지 않았다.</P>
이 족보는 신유보의 미비점을 수정·보완한 개간본이라는 점에서 일차적인 의의를 발견할 수 있고, 자녀 등록에 있어 선남후녀의 형태가 비교적 빨리 나타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신유보와의 상호 대비를 통해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의 하나로 생각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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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박씨 족보
물건 1829년 고령박씨족보(高靈朴氏族譜) 6책완질 (물건번호: 3007801)
물건구분 일반물건 물건상태 매각
연 대 1829년 기축보 판매가격 1,800,000원
물건설명 1829년 고령박씨족보(高靈朴氏族譜) 6책완질
상태좋음
크기:21.5*33센치
보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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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은 불분권 1책, 판종은 목판본이며, 크기는 가로 25cm, 세로 29.5cm이다. 표제는“함양박씨대동보(咸陽朴氏大同譜)”, 판심제는 “함양박씨족보”이다.</P>
부록 말미의 “갑술년 봄에 중간하여 광산의 유곡촌에 갈무리 하였다(甲戌春重刊 藏于光山柳谷村)”는 간기에 따른다면, 이 족보는 호남의 광주에서 간행되었고, 책판도 광주 인근 지역에 보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희귀본으로 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의 함양박씨 구당종가(九堂宗家)에 소장되어 있다.</P>
체제는 표지(表紙), 서문(序文), 부록(附錄), 보도(譜圖),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시기에 간행된 다른 족보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P>
서문은 1678년(숙종 5)박염(朴恬)이 지은 것이며, 부록은 박씨의 상대 세계인 신라세대(新羅世代)를 약술한 것이다. 발문은 이 족보의 편찬자인 박경후가 1694년 족보 간행을 마무리하며 그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P>
원래 이 족보는 서문의 찬자 박염이 1678년 편집·간행하여 배포한 것을 이로부터 16년이 지난 1694년에 박경후가 중간(重刊)한 것이다. 전자가 무오보(戊午譜)이고, 후자가 바로 갑술보(甲戌譜)인데, 현재로서는 무오보의 잔존 현황은 자세하게 알기 어렵다.</P>
서문에 따르면, 박염은 화순(和順)과 남평(南平)의 수령으로 부임한 동종 인사의 협조를 바탕으로 족보간행에 착수하였는데, 화순군수의 인적사항은 미상이나 남평현감은 바로 박경후의 할아버지 박종형(朴宗亨)이었다.</P>
박염은 이 두사람이 제시한 가전(家傳) 구보(舊譜)와 여러 동종으로부터 입수한 보첩(譜牒)·계보류(系譜類)를 바탕으로 약 2년 동안의 작업 끝에 모두 5편(篇)으로 편집을 완료하였다. 간행에 따른 제반 경비도 화순현감과 남편현감이 전적으로 부담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함양박씨족보의 초간본인 무오보(戊午譜)이다.</P>
그러나 무오보는 관계 문헌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이에 간행과 동시에 영남, 특히 함양(咸陽)의 동종으로부터 오류가 지적되는 한편 개정 요구에 직면하여 제대로 배포되지 못한 채 10여년을 경과하게 되었다.</P>
이런 상황에서 1694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박경후가 무오보의 오류를 바로 잡아 간행한 것이 바로 이 족보로서 함양박씨 내에서는 갑술보(甲戌譜)로 통칭되고 있다.</P>
이 갑술보는 무오보의 오류를 수정하여 개간한 것이기 때문에 체제와 분량에 있어 무오보와 별다른 차이점이 없지만 무오보가 전하지 않아 수정된 부분과 수정의 정도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박염의 서문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개간·중간의 배경과 전말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록한 것으로 구서(舊序)와는 차이가 있다.</P>
본 족보의 체제상의 특징은 범례가 없고 부록이 매우 소략하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간행된 대부분의 족보는 범례가 붙어 있고, 부록을 통해 성관(姓貫)의 내력, 관향(貫鄕)의 연혁, 현조(顯祖)의 행적, 가전(家傳)의 호적 등을 수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 외 천자문의 순서에 따른 자표(字標)와 한 면을 7층의 횡간으로 설정한 것 등의 형태적인 면은 다른 족보류와 차이가 없다.</P>
제일 첫 면에는 시조 박선(禮部尙書)에서 6대까지 등재한 다음 나머지 한 간은 공란으로 처리하였으며, 그 다음 장부터는 7간을 채우는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다.</P>
이는 박선의 6대손 박지문(朴之文)·지빈(之彬)·지량(之亮)·지수(之秀)·지영(之潁) 5형제의 파계(派系)가 본 족보의 골자를 이루는 만큼 이들 분파조들을 부각시키는 한편 족보 열람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생각된다.</P>
각 인물의 주기(註記)는 개인에 따라 상략이 심한 편이다. 자(字), 호(號), 과거(科擧) 사항, 관직(官職) 사항, 배위(配位) 사항, 묘소(墓所) 위치와 좌향(坐向) 등이 상술된 경우도 있고, 이름만 기록하거나 생원, 진사, 문과 등의 과거 사항이나 관직 사항만 부기도 경우도 있다.</P>
자녀는 출생순으로 등록하고 있어 이른바 선남후녀(先男後女)의 유교적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적서(嫡庶)는 엄격하게 구분하여 서자일 경우는 이름 위에 ‘서(庶)’ 또는 ‘서자(庶子)’, 서녀(庶女)일 경우에는 사위의 이름 위에 ‘서녀’로 표기하였다.</P>
계후한 경우에도 ‘계자(繼子)’로 표기하여 출계 사항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즉 전반적으로 개인에 대한 상술보다는 함양박씨의 계통과 파계를 체계화하는데 간행의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결과적으로 이 족보는 사실상 함양박씨족보 초간본이나 마찬가지이며, 무오보의 오류를 수정·보완한 족보라는 점에서 일차적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P>
나아가 무오보가 발견될 경우 상호 대조를 통해 오류의 정도와 수정의 범위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족보의 간행 과정은 지방관으로 부임한 자손의 임지에서 족보가 편찬된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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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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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족보(咸陽朴氏族譜)
가곡리의 함양박씨 구당종가(九堂宗家)에 소장되어 있다.</P>
체제는 표지(表紙), 서문(序文), 부록(附錄), 보도(譜圖),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시기에 간행된 다른 족보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P>
서문은 1678년(숙종 5)박염(朴恬)이 지은 것이며, 부록은 박씨의 상대 세계인 신라세대(新羅世代)를 약술한 것이다. 발문은 이 족보의 편찬자인 박경후가 1694년 족보 간행을 마무리하며 그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P>
원래 이 족보는 서문의 찬자 박염이 1678년 편집·간행하여 배포한 것을 이로부터 16년이 지난 1694년에 박경후가 중간(重刊)한 것이다. 전자가 무오보(戊午譜)이고, 후자가 바로 갑술보(甲戌譜)인데, 현재로서는 무오보의 잔존 현황은 자세하게 알기 어렵다.</P>
서문에 따르면, 박염은 화순(和順)과 남평(南平)의 수령으로 부임한 동종 인사의 협조를 바탕으로 족보 간행에 착수하였는데, 화순군수의 인적사항은 미상이나 남평현감은 바로 박경후의 할아버지 박종형(朴宗亨)이었다.</P>
박염은 이 두사람이 제시한 가전(家傳) 구보(舊譜)와 여러 동종으로부터 입수한 보첩(譜牒)·계보류(系譜類)를 바탕으로 약 2년 동안의 작업 끝에 모두 5편(篇)으로 편집을 완료하였다. 간행에 따른 제반 경비도 화순현감과 남편현감이 전적으로 부담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함양박씨족보의 초간본인 무오보(戊午譜)이다.</P>
그러나 무오보는 관계 문헌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이에 간행과 동시에 영남, 특히 함양(咸陽)의 동종으로부터 오류가 지적되는 한편 개정 요구에 직면하여 제대로 배포되지 못한 채 10여년을 경과하게 되었다.</P>
이런 상황에서 1694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박경후가 무오보의 오류를 바로 잡아 간행한 것이 바로 이 족보로서 함양박씨 내에서는 갑술보(甲戌譜)로 통칭되고 있다.</P>
이 갑술보는 무오보의 오류를 수정하여 개간한 것이기 때문에 체제와 분량에 있어 무오보와 별다른 차이점이 없지만 무오보가 전하지 않아 수정된 부분과 수정의 정도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박염의 서문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개간·중간의 배경과 전말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록한 것으로 구서(舊序)와는 차이가 있다.</P>
본 족보의 체제상의 특징은 범례가 없고 부록이 매우 소략하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간행된 대부분의 족보는 범례가 붙어 있고, 부록을 통해 성관(姓貫)의 내력, 관향(貫鄕)의 연혁, 현조(顯祖)의 행적, 가전(家傳)의 호적 등을 수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 외 천자문의 순서에 따른 자표(字標)와 한 면을 7층의 횡간으로 설정한 것 등의 형태적인 면은 다른 족보류와 차이가 없다.</P>
제일 첫 면에는 시조 박선(禮部尙書)에서 6대까지 등재한 다음 나머지 한 간은 공란으로 처리하였으며, 그 다음 장부터는 7간을 채우는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다.</P>
이는 박선의 6대손 박지문(朴之文)·지빈(之彬)·지량(之亮)·지수(之秀)·지영(之潁) 5형제의 파계(派系)가 본 족보의 골자를 이루는 만큼 이들 분파조들을 부각시키는 한편 족보 열람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생각된다.</P>
각 인물의 주기(註記)는 개인에 따라 상략이 심한 편이다. 자(字), 호(號), 과거(科擧) 사항, 관직(官職) 사항, 배위(配位) 사항, 묘소(墓所) 위치와 좌향(坐向) 등이 상술된 경우도 있고, 이름만 기록하거나 생원, 진사, 문과 등의 과거 사항이나 관직 사항만 부기도 경우도 있다.</P>
자녀는 출생순으로 등록하고 있어 이른바 선남후녀(先男後女)의 유교적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적서(嫡庶)는 엄격하게 구분하여 서자일 경우는 이름 위에 ‘서(庶)’ 또는 ‘서자(庶子)’, 서녀(庶女)일 경우에는 사위의 이름 위에 ‘서녀’로 표기하였다.</P>
계후한 경우에도 ‘계자(繼子)’로 표기하여 출계 사항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즉 전반적으로 개인에 대한 상술보다는 함양박씨의 계통과 파계를 체계화하는데 간행의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결과적으로 이 족보는 사실상 함양박씨족보 초간본이나 마찬가지이며, 무오보의 오류를 수정·보완한 족보라는 점에서 일차적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P>
나아가 무오보가 발견될 경우 상호 대조를 통해 오류의 정도와 수정의 범위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족보의 간행 과정은 지방관으로 부임한 자손의 임지에서 족보가 편찬된 전형적인 사<LI>『함양박씨족보(咸陽朴氏族譜)』(甲戌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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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고문서집성(45)-부여 은산(恩山) 함양박씨편(咸陽朴氏篇)-』(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출처정보 펼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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