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남매 가수인 장미리, 장은아. 이들은 가족 전체가 팀을 이루었던 ‘작은 별 가족’이나 형제자매 팀 ‘김트리오’ ‘김씨스터즈’, ‘김보이스’ , ‘아시아나’와는 달리 각기 독자적으로 활동을 벌여 각기 인기 가수가 된 후 친남매임이 밝혀져 화제를 모았다.
맏이 격인 장미리는 컨트리, 소울, 팝, 락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로 70년대를 풍미했던 폭발적 가창력의 여가수였다. 깡마른 체격에서 뿜어대던 낭랑한 고역에서 탄탄한 저역의 폭넓은 허스키 창법으로 노래한 ‘아 어떻게 할까’, ‘말 전해다오’ ‘당신이 좋아서’ 등 은 그녀의 빅 히트곡들이다. ‘제2의 송창식’으로 불린 오빠 장재남은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외모와 텁텁한 보컬의 소유자였다. ‘빈 의자’,‘사람을 찾습니다’ 등은 당대 젊은 층의 사랑을 받았던 그의 히트곡들. 특히 ‘빈 의자’는 대화형식의 노래로 화제가 되었다. 밝고 명랑한 성격의 막내 장은아는 여고 졸업 후 ‘시모나’,‘맛댕기’ 등 CM송 가수로 출발했다. 맑은 중음이 매력적인 그녀는 1978년 ‘고귀한 선물’을 히트시키며 주목을 받았다. 고역이 뛰어났던 언니, 오빠와 달리 맑은 중역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닌 그녀는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고귀한 선물’, ‘오늘 밤 내게’등 포크송계열의 노래로 사랑을 받았다.
조용한 아이였던 막내 장은아는 아레사 플랭클린과 낸시 윌슨 등 외국 팝 음악을 많이 들었던 언니와 기타를 즐겨 연주했던 오빠의 어깨너머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서울 을지초등학교 4학년 때 높은 경쟁률을 뚫고 염광 어린이합창단원으로 선발되었다. 친구처럼 절친한 언니 장미리의 영향은 지대했다. 나이차이가 컸지만 어디든 따라다녔다. 당시 양희은의 노래와 방의경의 ‘불나무’등 포크송들이 너무 좋았다. 언니를 졸라 방의경의 서소문집에까지 찾아갔다. 이때 기타를 잘 치는 김의철도 만났다. 이후 기타교본을 보고 집에 있던 오빠의 통기타를 독학으로 익히며 취미 삼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가수가 되려는 마음은 없었다.
1976년 어느 날, 명동 ‘오라오라’무대에서 노래했던 중학교 동창 박효근을 따라 업소에 놀러 갔다. 그곳엔 가수 김정호도 출연을 했다. 친구가 연예부장에게 ‘가수 장미리의 동생’이라고 소개를 해 떠밀리듯 무대에 올랐다. 통기타를 들고 양희은의 ‘내님의 사랑은’ 과 오세은의 ‘고아’를 불렀다. 깜짝 놀란 연예부장은 그날부터 계속해 ‘노래를 하라’고 집으로 연락을 해왔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이젠 나도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사람이 없는 초저녁 무대에 올랐다. 30분 타임동안 외국 팝송과 포크송을 주로 불렀다.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의 성품을 타고난 장은아는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군에서 제대를 한 오빠 장재남은 기타 2대를 부셨을 정도로 동생의 가수활동을 반대했다.
정식 가수의 길을 열어준 것은 라이브무대에서 장은아의 노래를 듣고 반한 방송사회자 허참이었다. 허참의 소개로 동양방송 라디오에 출연을 하게 되었다. 첫 방송은 가수 김만수가 사회를 본 생방송 프로 ‘노래하는 곳에’였다. 그녀의 맑은 음색 노래가 방송을 타고 나가자 CM송 제의가 밀려들었다. 그래서 1977년부터 수많은 CM송을 취입하며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 김정호를 만나 그를 통해 작사가 박건호를 소개받았다. 당시 박인희와 결별했던 박건호는 맑은 음색의 장은아 노래를 듣고 ‘제2의 박인희’로 키우려는 꿈을 품었다. 김정호가 2곡을 짓고 박건호가 가사를 썼다. 하지만 절규를 해야 되는 강렬한 스타일의 김정호 곡은 장은아와 음악적 색깔이 맞지 않아 취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1977년 말 박건호는 계동균 곡 ‘어떤 옛날에’, 오동식곡 ‘잊어버리자’를 받아 음반준비를 했다. 1978년 데뷔음반 ‘잊어버리자’를 발표했지만 반응이 없어 절판을 시키고 곧바로 오동식곡 ‘고귀한 선물’을 타이틀로 다시 데뷔음반을 발매했다. 적중했다.
좋은 반응 속에 1979년 ‘이거리를 생각하세요’와 1980년 ‘결혼의 꿈’이 연속 히트를 터트렸다. 이에 지구레코드는 장은아를 주력 신인가수로 삼고 적극 밀었다. 장은아는 1981년 KBS 2FM '젊은이의 노래‘ 프로를 임백천과 함께 8개월 동안 진행했다. 이후 오빠와 같은 서라벌레코드로 전속사를 옮겼다. 장은아는 신인 작곡가 이범희가 지은 디스코 풍의 신곡 ‘작은나비’를 연이어 발표했다. 이때 ‘서울’이란 노래를 장은아, 장재남 남매가 듀엣으로 취입했다. 두 사람은 언론의 관심을 의식해 듀엣 음반을 염두에 두었지만 음악적 색깔이 달라 성사되지는 못했다. 당시는 디스코 열기로 인해 포크와 록 음악의 힘이 많이 빠졌던 시절이었다. 장은아의 신곡 ‘작은 나비’는 대중적으로 튀어 보기 위한 음악적 외도였다. 신곡 ‘작은 나비’가 빅히트하자 작곡가 이범희는 MBC국제가요제에 출전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강한 비트의 경쾌한 댄스곡을 취입은 했지만 춤과는 거리가 멀었던 장은아 때문에 결국 가요제 출전을 포기한다. .
이후 장은아가 ‘제2의 박인희’로 거듭나려는 음악적 야심을 품고 선택한 장르는 포크음악이었다. 짙은 감성적 분위기로 노래하는 조동진의 노래가 마음에 들어왔다. 그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용기를 내 대한극장 인근에서 만났다. “목소리는 마음에 드는 데 내 노래를 할 수 있을까?”라며 반신반의하는 선배 조동진에게 당돌하게 “할 수 있다”고 적극성을 보였다. 그때 받은 노래가 ‘오늘밤 내게’등 5곡. 그중 3곡을 취입했다. 당시 조동진은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장은아에게 맞춰주기 위해 음악적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1982년 5월, 신보 ‘오늘밤 내게’의 반응이 대단했다. 음악색깔이 변한 장은아의 노래들은 빅히트의 조짐을 보이며 각 방송국의 주목받았다. 1983년 연이어 ’꿈꾸는 인형‘이 좋은 반응을 보였지만 개인사정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오랜 공백 끝에 장은아는 1990년 조덕배가 곡을 붙인 ‘내 작은 고운 님’과 함께 ‘덧없는 마음’ 등을 수록한 9집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컴백 유혹이 많았지만 1993년 기획사 화인픽스를 설립해 제작자로 변신했다. 첫 작품은 록그룹 ‘라이너스’의 보컬이었던 고상록의 독집음반. 그는 ’구름과 나‘를 록그룹 ’블랙테트라’의 구창모에게 제공했던 싱어송라이터다. 이어 록 그룹 ’점프‘의 음반까지 제작했다.
1998년 장은아는 미사리 무대로 컴백했다. 이후 행복의 나라로, 보고싶다, 향수등 각종 7080콘서트를 비롯, 라이브 무대는 물론 2006년부터 국군방송에서 ‘7080 뮤직스테이션’ 의 진행자로 거듭났고 현재도 ‘2시의 가요산책’의 MC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29년 만인 2007년 7월 젊은 분위기가 물씬한 신곡들을 수록한 새 앨범을 발표했다. 처음부터 각기 다른 색채의 음악 항해를 하고 있는 3남매가수 장미리 장재남, 장은아. 각자가 남긴 히트 넘버들은 지금도 대중의 애창곡으로 기억되는 주옥같은 노래들이다.
앨범 타이틀은 ‘그건 잠시 지나간 바람일 뿐’. 한동안 공백기를 거친 후 걸어온 오랜 추억 위주의 활동의 끝을 알리는 음반이다. 더욱이 국내 대중음악계에선 보기 드물게 여가수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한 음반이라 더욱 뜻 깊다. 통기타 스타일에 재즈와 모던 록을 접목한 독특한 퓨전스타일로 음악적 변신을 시도하며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총 10곡이 수록된 이번 음반엔 ‘축복’, ‘잠시 지나간 바람일 뿐’, ‘사랑 후’, ‘자유인’ 등 4곡의 신곡과 더불어 자신의 히트곡 중 5곡, 그리고 김창기의 ‘거리에서’를 새롭게 리메이크했다.
이번 앨범작업에서는 록그룹 라일밴드의 박경원이 작곡, 편곡을 맡았다. 그결과 가볍고 경쾌한 젊은 감성과 7080분위기가 적당히 믹스된 독특한 맛의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이번 음반의 뚜렷한 타이틀 곡은 정하지 않았지만 첫곡 ‘축복’은 강산에의 ‘넌 할 수 있어’를 작곡한 홍성수의 곡으로 깔끔하고 경쾌한 멜로디와 가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것으로 기대된다. ‘잠시 지나간 바람일 뿐’은 장은아가 직접 작사한 곡으로 가요계 데뷔전인 20대초반 노래한다고 명동 다닐 때,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등의 옛 추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자서전 형식의 코끝이 찡해지는 곡이다. ‘덧없는 마음’은 최고의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기타반주가 목소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편안한 분위기의 트로트 포크다. ‘자유인’은 시인이자 작사가인 박건호씨의 시에 김성봉이 곡을 붙였다.
리메이크곡도 변화가 있다. 그녀의 대표곡인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와 ‘고귀한 선물’은 원래 1절밖에 없는 노래들이었는데 작사가인 박건호씨가 거의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2절을 각각 붙여줘 인생의 깊은 느낌을 주는 곡들로 새롭게 다가왔다. 90년에 발표한 조덕배 곡 ‘내 작은 고운 님’은 첼로를 사용해 더욱 애잔하고 풍성한 사운드로 다시 태어났다. 김창기의 ‘거리에서’는 장은아의 애창곡으로 그녀의 풍부한 감성과 맑고 깊이 있는 목소리가 노래의 맛을 제대로 표현해 주고 있다.
현재 국군방송에서 ‘2시의 가요산책’ 프로를 진행하고 있는 장은아. 새 앨범 발표 후 작은 음악회 형태의 전국 순회공연과 본격적인 콘서트, 데뷔 30주년기념앨범 제작등 왕성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내년이면 벌써 데뷔한 지 30년이 되지만 깊이 있는 음악과 자신만의 음악 색깔 찾기에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있는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에 목말라하고 있다.
[출처] 추억의 음반 가수 / 장은아 고귀한선물.이거리를 생각하세요|작성자 훈장
하얀나비 김정호와의 인연
3남매 중 두 번째로 정식 가수에 입문을 한 것은 장은아였다. 그녀는 을지초등학교 4학년 때 높은 경쟁률을 뚫고 염광 어린이 합창단원으로 뽑혔던재주꾼이었다. 학예회와 소풍 때는 단골로 불려 나가 노래 불러야 했을 만큼 학교에서는 유명했다. 한양여중에 진학하면서 절친했던 언니 장미리를따라 방송국에 따라 다녔다. 사춘기 시절, 언니의 구두, 옷에 대해 참견을하며 예쁜 옷은 몰래 입곤 했다. 장은아는 언니의 노래보다 양희은과 방의경 등의 포크송이 좋았다. 언니와 함께 방의경의 집으로 찾아 갔을 정도다. 이후 라디오 음악 프로를 통해 팝송과 포크송을 많이 들었다. 서문여고3학년 때부터 독학으로 기타 교본을 보며 오빠의 통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만 취미 삼아 노래를 했을 뿐 가수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여고를 졸업하고 명동 오라오라에서 노래를 했던 중학교 동창 박효근을 따라 놀러 갔다. 친구가 그곳의 연예부장에게 “인기가수 장미리의 동생”이라고 소개를 해 얼떨결에 무대에 올랐다. 이때가 76년 후반. 무대에 있던통기타를 들고 양희은의 '내 님의 사랑은'과 오세은의 '고아'를 불렀다.깜짝 놀란 연예부장이 “노래를 하라”고 제의했지만 가수가 될 생각이 없어 거절을 했다. 하지만 집요하게 집에까지 계속 찾아오자 어렵게 결심을했다. 30분 타임을 배정 받아 사람이 없는 초저녁 무대에 올라 주로 외국팝송과 포크송을 불렀다.
우연하게 가수 생활을 시작한 장은아는 노래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당시 오라오라에는 고 김정호도 출연을 했다. 사회를 맡았던 허참의 소개로 77년, 김만수가 사회를 본 TBC 라디오 생방송프로 '노래하는 곳에'에도 출연했다. 첫방송이 나가자 맑은 목소리 때문에 CM송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TBC PD출신 이수담의 CM송 사무실에서 곡을 받기 위해 고 김정호를 만났다. 작사가박건호는 김정호를 통해 만난 신인 장은아를 픽업했다. 당시 김정호로부터2곡을 받았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취입은 못한 장은아는 77년 후반, 계동균과 오동식의 곡을 받아 78년 2월, 데뷔 음반 '잊어버리자/지구,1978'를발표했다.
군에서 제대를 한 장재남은 78년 부산 '미리내'에서 언더 가수로 노래를했다. 데뷔 음반을 준비중이던 장은아는 박건호를 부산으로 초청해 오빠를소개시켰다. 송창식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 박건호는 최종혁에게 의뢰해 장재남의 데뷔 음반제작을 장은아와 동시에 착수했다. 먼저 발표된 장은아의 데뷔 음반은 흥행이 되질 않아 곧 바로 절판이 되고, 2달만에 오동식 곡 '고귀한 선물'을 타이틀로 2집을 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3집 '이거리를 생각하세요-1979년'는 연속 히트를 터트리며 인기가수로 떠오르게했다. 3남매 중 가장 늦게 솔로 가수로 데뷔한 장재남. 데뷔 곡인 대화 형식의 독특한 노래 '빈 의자'를 포함, 경쾌한 컨튜리풍의 '사람을 찾습니다', '항아리'의 반응은 대단했다. 동시에 두 남매가 히트 퍼레이드를 벌이자 은퇴한 장미리까지 거론되며 각 언론들은 '한국 최초의 삼남매 히트 가수 탄생'이라며 집중 조명했다.
이때부터 삼남매는 ‘ 열린음악회’, ‘토요일 토요일 밤에’, ‘ 쇼2000’ 등 TV무대에 함께 올랐다. 동생들을위해 모습을 드러낸 장미리는 강력한 활동 재개 요청을 받았다. 팀 결성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장미리의 제한된 활동과 판이한 음악 색깔 때문에실현되지는 못했다.장재남은 데뷔 음반 이후 자신의 음악 방향과 폭을 넓히기 위해 2년 간 칩거했다. 81년 9월, 슬로우 풍의 애절한 신곡 '멀어진 사람'과 고고 풍의'동대문' 등을 발표하면서 YMCA 대강당에서 '신곡 발표회' 콘서트를 개최했다. '동대문'은 옛 것과 오늘을 보면서 미래를 생각한다는 젊은 의식이담긴 야심작이었다. 당시 게스트는 장은아, 유심초, 김학래 등. 이후 장은아는 81년 KBS 2FM '젊은이의 노래'에서 임백천과 함께 DJ를 맡아 8개월여진행했다.
이후 오빠와 같은 서라벌로 전속사를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신인 작곡가 이범희가 지은 디스코 풍의 신곡 '작은 나비'를 발표했다. 이후81년 12월 KBS 라디오 PD 김종건과 세실극장에서 결혼을 했다. 장재남 역시 82년 3월 함세웅 신부의 주례로 82년 4월 결혼을 했다. 10개월만에 재기를 한 장은아는 조동진 곡 '오늘 밤 내게'를 발표해 변화된 음악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83년 '꿈꾸는 인형'등 음반을 몇 차례 발표했지만활발한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다.
93년 초반, 장은아는 기획사 화인픽스를 창립, 록 그룹 '점프' 등 몇몇 음반을 제작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한동안 가정에만 전념하다 98년, 포크 바람을 타고 미사리 무대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작년엔 어린이대공원에서 양희은, 박경애 등 10명의 여성 포크 가수들과 조인트 공연을 열었다. 장은아는 방송 활동보다는 소극장 위주로 성숙된 음악적 분위기에서 노래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예전의 히트곡을 포크적으로 편곡하고 3곡 정도 신곡을 준비해 신보를 발표할 마음을 품고 있다. 한편 재작년까지 경기도 안양근방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했던 장재남은 지금도 라이브 무대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장미리는 논현동에서 딸 둘을 낳은 평범한 가정 주부로만살아가고 있다.
처음부터 서로 다른 음악 항해를 해 오고 있는 3남매. 음악 색깔이 달라팀 결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남긴 히트 넘버들은 지금도 대중의 애창곡으로 사랑 받고 있다.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