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글
글을 쓰다 글이 막혀 이오덕 선생의 글을 읽는다. 거기 실린 ‘나쁜 글’의 정의에 눈이 멎었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
○알 수는 있어도 재미없는 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만 쓴 글.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쓴 글.
○읽어서 얻을만한 내용이 없는 글. 곧 가치가 없는 글.
○재주 있게 멋지게 썼구나 싶은데 마음에 느껴지는 게 없는 글.
훑고 나니 몇 가지가 나를 쿡쿡 찔러대며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한다. 알지요, 알다마다요. 면구한 마음에 입속말을 하다가, 이쯤 되면 걸려들지 않을 사람 어디 있겠냐며 궁색한 변명도 늘어놓는다. ‘나쁜 글’이란 표현은 좀 가혹한 것 아니냐고 항변을 해보다가 고해성사 볼 때 성찰하듯 내 글의 결함을 구체적으로 짚어본다. 아마 알 수는 있어도 재미없는 글이 많지 않았을까 싶다. 읽어서 얻을만한 게 없는 것도 많았으리라.
그렇다고 어쭙잖게 아는 체 하며 훈수를 두었다간 누구나 알고 있는 걸 되풀이 하는 꼴밖엔 되지 않는다. 이래저래 좋은 글이란 작가의 진액으로 ‘치러야 할 값’을 혹독하게 지불해 낸 작품들일 수밖에 없다.
지금껏 읽어온 타인의 글 중에도 나쁜 글들이 적잖이 보였다. 그런 글들은 시간을 뺏고 눈을 피곤하게 하다가 결국은 밀쳐놓게 되니 역시나 태작(駄作)은 ‘나쁜 글’이 맞다. 내가 주로 써온 게 수필이기에 우선 수필의 예를 들자면 다른 작가들의 글 역시 재미없는 작품이 많았다. 우리네의 일상이 다 고만고만해서였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으론 읽어서 얻을 만한 것이 없는 글이거나 멋지게는 썼으나 마음에 남는 게 없는 글이었다. 나로선 재미없는 글보다 후자에 대한 실망이 더 큰 편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글맛이란 볼품만 화려했지 영양가는 별로 없는 밥상 같았다.
더러는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평론도 만났다. 언젠가 시집 평론 글을 읽다가 도배하듯 열거한 현학적 문투에 질려 책장을 덮었다. 그러고는 작가 다니엘 페낙의 ‘독자의 열 가지 권리’를 떠올렸다. 그에 의하면 독자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도 있고 건너뛰며 읽을 권리도 있고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도 있다. 나는 평생 그 권리를 착실히 누리고 실천했으면서도 문신(文神)의 가호가 없어선지 글로 써낼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책이란 워낙 다양하기에 모든 게 쉬워야만 하는 건 아니다. 난이도가 따르는 글도 때론 읽어야 한다.
그러나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을 땐 나는 다니엘 페낙의 열성 지지자로 되돌아간다. 우리가 공들여 독서하는 건 결국 책을 통해 삶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 아닌가. 먹고 사는 일이든 영혼의 위로를 구하는 일이든 그 속에서 세상을 알고 자기 삶을 성장시키려고 하는 일이다. 이러한 독자에게 시간과 몸의 수고는 요구하면서 선물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 작가는 유죄이리라.
나도 그렇듯 작가들 스스로가 본인의 약점을 안다 해도 당장 개선하기는 쉬운 게 아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내가 고하는 내용이 늘 유사해서 울컥한 적이 있다.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다면서도 번번이 같은 함정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 것에 자괴감이 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각오한 것은 티끌만큼씩만이라도 달라지겠다는 거였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나의 지향 점은 아직 먼 천리 길, 마음이 급해도 한 걸음 한걸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작가란 일반인보다 글을 수월하게 쓰는 사람인가? 딴은 그럴지도 모르나 작가야말로 글쓰기가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일 테다. 허접한 글줄이나마 쓰기를 계속하는 나의 기저엔 용불용설(用不用說)이 작용한다. 한 대 맞은 것 같은 글이 아니라면 읽을 필요가 있냐고 했던 카프카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손 놓으면 퇴화되고 말 것 같아 쓰게 된다. 평생 잡다한 것에 열정을 쏟아보기도 했지만 끝까지 함께 해도 좋은 건 역시나 글쓰기란 동반자였던 걸 어찌 하랴.
그런 의미에서 불용(不用)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기회를 주는 잡지사의 원고청탁은 은혜롭다. 군말 없이 언제나 무보수로 키보드를 두드려주는 내 손가락도 대견하다. 원고를 쓰는 일이란 매양 미완의 현실이라서 허기는 오늘도 여전하지만 어쩌다 어렵사리 한 건 올렸다 싶은 날엔 영약이라도 먹은 듯 황홀해진다. 그럴 때마다 이런 순간이 또 오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풀리며 자기최면을 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일까를 새삼 자문해본다. 무엇보다 진솔해야겠고, 깊이도 있어야겠고, 삶에 대한 위로도 있어야겠지. 독자를 흡인하는 문학성도 갖춰야겠고 대중성도 간과하면 안 되겠고, 약자에 대한 관심도 있어야 할 터. 그뿐이랴. 날로 심각해지는 지구 생태나 사회 문제도 짚어줘야겠고, 참신성과 실험성도 갖춰야겠고, 보편적 공감도 안겨줘야겠다. 거기에다 작가만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고백욕구나 배설작용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의 작가들은 그 목마른 갈망으로 뭍을 향해 달려드는 파도처럼 간단없이 글을 써 나갈 것이다. 나 역시도 퇴고중인 장편 원고를 끌어안고 씨름 하다가 이오덕을 읽으며 이 글을 써 내렸다. 해종일 글 속에서 노닐다보니 창가엔 어느 새 찾아 든 동짓달의 저녁 어둠이 기웃거리고 있다. 낡은 창을 흔드는 바람소리도 들려온다. 아무려나 ‘나쁜 글’ 한 편은 썼지 않느냐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려니 그만 피식 웃음이 나온다.
<2024 창작산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