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글들은 오늘을 사는 신자들에게 너무 적실합니다. 특히 저는 한국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을 다 읽지는 못해도 적어도 신앙감정론은 읽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어쩌면 순전히 저의 관점일 수 있지만 저는 최근에 일부 교회들이 교리를 회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역사는 마치 진자의 추처럼 한쪽 극단에서 반대 극단으로 치우쳐왔기 때문입니다. 무분별하고 잘못된 감정과 신앙체험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교리를 다시 확립하고 정통신앙을 회복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자칫 죽은 정통주의, 메마른 신앙으로 치우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찬양만 해도 한쪽에서는 찬양을 통해 감정이 고양될 때 인위적인 감정을 조장한다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시편찬양만 하고 반복을 아예 금지하기도 합니다. 또 한쪽에서는 그런 이들을 은혜가 없는 메마른 율법주의와 근본주의라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감정을 조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찬양곡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찬양으로 표현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관점으로 치우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이 우리에게 너무 필요합니다.
18세기 부흥의 시기에 신자들에게 벌어지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사람들마다 평가가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정적 열광을 보며 두려워하고 미심쩍어 하며 반지성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또 다른 극단은 그들이 겪는 모든 감정을 성령이 주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양자가 다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는 진정한 신앙감정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습니다. 성령의 불이 역사할 때 사탄이 일으키는 들불도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과 미국의 교회는 자유주의의 거센 도전을 받습니다. 이때 걸출한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와 논쟁하며 정통주의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 유럽은 교회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그에비해 미국교회는 온갖 세속화의 영향으로 타락하고 은사주의로 인해 병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덤은 아닙니다. 저는 한국교회도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느 쪽이든 치우치게 할 것이고 이 전략은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입니다. 정통주의 신앙이 곧 차갑고 냉정한 이성주의적 신앙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그런 착각에 빠집니다. 열정적인 기도와 찬양이 반드시 열광주의는 아닙니다.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신앙 감정일까요? 그 답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그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참된 신앙감정을 찾고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시대를 접하고 있습니다. 다음세대는 어떨까요?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헤쳐 나가야 할 많은 과제가 있습니다. 죽은 정통주의를 피해야 하고 죽은 정통주의에 반해 개인의 경건만을 추구하는 객관을 상실한 경건주의를 주의해야 하고 번영신학과 신사도와 같은 세속주의와 불건전한 감정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이 아닌 종교적 관습에 붙들린 근본주의를 피해야 합니다. 신자는 시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날씨는 알면서 시대를 모르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 시대를 분별하라, 하셨습니다. 저는 미약하나마 목회자로서 지금 우리와 다음세대 교회를 위해 이 작은 힘이라도 혼신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제가 신앙감정론을 읽고 소개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