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삼위일체라는 미로를 탈출하는 법:
톰 라이트와 사도 바울이 만난 ‘진짜’ 하나님
https://youtu.be/qXGq83-D8pg
우리를 가둔 교리의 감옥
“삼위일체는 신비니 무조건 믿으세요.” 우리는 이 한마디에 질문을 멈춰왔습니다. 본질, 위격, 양태론... 헬라 철학의 차가운 단어들은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멀리 떼어놓았습니다. 입으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지만, 우리 무의식 속에는 엄격한 성부, 친절한 성자, 신비로운 성령이라는 세 명의 신이 조각나 있지는 않나요?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만난 하나님은 결코 그런 복잡한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세계적인 신약학자 톰 라이트의 눈을 통해, 바울이 왜 예수와 성령을 ‘한 분 하나님’의 거대한 사건으로 보았는지, 그 지적인 해방의 서사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바울의 뿌리: 조각날 수 없는 유일신
바울 신학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그가 철저한 유대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매일 아침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시라”는 ‘쉐마’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이 세 조각이 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세 분처럼 느끼게 되었을까요? 톰 라이트는 우리가 ‘이신론(Deism)’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저 멀리 하늘에 가두고, 세상 일에는 관심 없는 분으로 분석하는 태도죠.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고, 성전의 영광(쉐키나)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셨던’ 분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거하시는 하나님’이 다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여호와의 귀환: 건물에서 우리 사이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셨다고 믿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언젠가 여호와께서 다시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약속했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셨을까요?
첫째는 ‘해방을 위해 오시는 하나님(엑소도스)’입니다. 바울에게 구원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내려오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언급하며,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원형임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6장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으로 설명할 때, 바울의 머릿속에는 홍해를 직접 가르며 죄의 노예 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명령만 내리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사망이라는 영적 바로(Pharaoh)로부터 직접 끄집어내기 위해 인간의 고통 속으로, 심지어 죽음의 바다 한복판으로 직접 ‘오신’ 해방자이십니다.
둘째는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떠나간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로 돌아왔을까요? 화려한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벽돌 건물이 아닌 ‘예수의 몸’을 성전 삼아 돌아오셨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전율이 시작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예루살렘의 특정 장소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나아가 그분의 영을 모신 여러분, 즉 ‘우리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꿈꿨던 성전의 회복은 건물의 재건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이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로 완성된 것입니다.
수정된 유일신 신앙: 하나님의 심장 속에 계신 예수
바울이 새로운 신을 만든 걸까요? 아닙니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유일신 신앙 ‘안에’ 예수와 성령을 포함시키는 ‘수정된 유일신 신앙(Revised Monotheism)’을 가졌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유대교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바울은 오직 야훼 하나님께만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라는 이사야 45장의 그 독점적인 찬양의 시를, 주저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립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왜 그랬을까요? 바울은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낮아지고 부활로 높아지신 예수의 얼굴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기로 결단하신 ‘야훼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세 분으로 나눈 게 아니라,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의 심장 한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버린 한 인간의 경이로운 고백입니다.
성령: 내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숨결
그렇다면 성령은 누구일까요? 제3의 에너지가 아닙니다. 돌아오신 하나님의 영이며 동시에 예수의 영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시기에 다행입니다. 우리의 깊은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생수처럼 흐르고, 때로는 방망이처럼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것. 이것은 별개의 신이 우리를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그 간절한 마음이 성령이라는 통로를 통해 내 영혼에 직접 닿는 사건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바울의 권면은 결국 “돌아오신 하나님, 나를 아시는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됨을 위한 실천적 삼위일체
바울에게 삼위일체는 ‘설명해야 할 신비’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일치’였습니다. 후대의 학자들에게 이것이 철학적 숙제였다면, 목회자 바울에게는 분열된 교회를 묶는 유일한 밧줄이었습니다.
에베소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언제나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가 되라”고 외칩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도, 구원하신 분도, 우리 안에 계신 분도 한 분이시기에 그분을 믿는 우리도 결코 나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옆의 지체와 화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톰 라이트의 요약: 철학을 넘어선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
톰 라이트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단 한 번도 헬라 철학의 추상적인 언어를 빌려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본질이나 위격 같은 철학적 개념 대신, 아브라함과 이사야가 들려준 ‘구약의 위대한 서사’를 붙들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삼위일체라는 미로에 갇힌 이유는, 바울이 전해준 ‘이야기’를 버리고 철학의 ‘공식’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삶 속에 걸어 들어오셨는가”라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바울의 신학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한 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오셨고, 이제 그 약속의 성취를 우리 삶 속에 실현하기 위해 성령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계신다.” 이것이 바울이 가졌던 ‘수정된 유일신 신앙’의 실체입니다. 이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능력이었습니다. 이 신앙이 있었기에 바울은 로마 황제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죄와 사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권세 앞에서도 태산처럼 견고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세상을 변화시킨 위대한 능력이라면, 그 능력은 철학적 공식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가운데 살아 움직이시는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제 당신의 서사를 시작하십시오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미로를 지나,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앞에 섰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린 성령의 방망이질은 무엇이었나요? 내 사정을 다 아시는 그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제는 방황을 끝내고 참된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에 여러분을 계속 초대합니다. 지금까지 [생명의 바다 교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