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정원】 “♬난 네게 반했어” 고성 그레이스 정원
비가 막 그친 어느 여름날 오후. 습기 가득한 어느 숲길에서
처음 ‘수국’ 군락지를 마주한 적이 있다. 물기를 머금을수록 선명해지는
수십만 개의 꽃잎들을 보며 이걸 한 송이라고 해야 할지, 한 다발이라고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그만 나는 여름이 좋아져 버렸다.
글 백지혜 사진·동영상 김정민·그레이스 정원
경남도 제6호 민간정원, 별칭은 ‘수국 정원’
물 수(水)에 국화 국(菊). 그래서 물을 좋아하는 꽃인 줄로만 알았지, 제 알아서 장마철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일 줄이야. 수국이 왜 여름을 선택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자연의 섭리를 잘 아는 수국은 참 현명한 꽃이다.
별칭 ‘수국 정원’으로 잘 알려진 고성의 ‘그레이스 정원(대표 조행연·79)’을 찾았다. 수국이 만발한 6~7월에는 평일에도 북적거릴 만큼 관람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인파가 몰린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경남에서 가장 큰 정원으로 그 면적이 4만 7204㎡에 이르기 때문이다. 현재 고성군 상리면에 위치하고 제6호 민간정원으로 지정돼 있다. 2020년 6월 첫 개방 후 2년 만에 고성군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건, 개장 당시 때맞춰 핀 수국 덕분이다. 관람객이 SNS에 사진을 올리면서 입소문을 탔다. 지금 그레이스 정원에는 산수국을 포함한 약 20만 주 이상의 수국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정원을 만들기 시작한 조 대표는 “선교활동으로 시작했어요. 창원의 한 수도원에서 수국 300주를 사달라는 권유를 받았고 무심코 심었는데, 다음 해 핀 꽃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죠”라며 그때 이후로 1년에 3~4만 주씩 10년 동안 심었다고 했다. 조 대표가 꽃에 반했던 순간, 그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직접 정원에 핀 수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성’이 피워낸 파스텔 빛 수국
입구에서 조금은 가파른 길을 올라야 정원에 다다른다. 30년 수령의 훤칠한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산책로가 메인이다. 그 사이사이마다 파스텔 빛 수국이 피어있다. 대체로 관리가 쉬운 꽃이지만 올겨울 이상기온으로 전국의 거의 모든 수국이 얼어 죽었단다. 하지만 그레이스 정원 수국은 풍성하고 청량하게 피었다. 반그늘에서 잘 자라기에 메타세쿼이아 아래 나란히 심었고, 수조 차를 타고 하루에 두 번씩 물을 줬으며, 토양에 따라 다른 색깔로 피는 수국의 특성상 제빛을 낼 수 있도록 흙의 성질까지 잘 보살핀 덕분이다. 이 모든 것은 조 대표의 시행착오 끝에 나온 ‘정성’이나 마찬가지다. 무사히 핀 그레이스 정원의 수국들은 길게는 10월 말까지 볼 수 있고 11월부터 4월까지 휴장기에 들어간다.
수국만 있는 건 아니다. 돌계단 양옆으로 단정하게 줄지어 선 황금빛 정원수 에메랄드 골드, 짧지만 쨍하게 사방으로 잎을 낸 해국, 나비 모양을 연상케 하는 산딸나무, 작약과 붓꽃의 향연들까지 어느 하나 자랑 못할 꽃은 없다. 이국적인 돌담이 동선처럼 산책로를 안내하고, 숲 한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은 작은 교회와 나무 그늘이 반사판 역할을 하는 공연장도 있다. 잔디광장에서 즐기는 차 한 잔의 여유도 좋다. 1년 전 새끼 시절부터 꽃들과 자란 고양이 ‘수국이’가 방문객을 반긴다. 여유 있게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반 정도면 정원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외할머니→딸→외손녀로 이어지는 꿈의 정원
꽃이 좋아 정원을 만든 여타 정원과는 다른 시작이지만, 조 대표는 17년 동안 꽃과 나무를 손수 심어 관리해왔다. 오늘은 여기에다 길을 내고, 내일은 이 나무를 심고, 돌을 쌓아 천천히. 지문이 다 닳도록 손수 만든 그 열정만으로도 사랑받기 충분한 정원이다. 지금도 비워진 공간에 다른 꽃을 심고 하루에도 여러 번 꽃의 배치를 구상한단다. 3년 전부터 조 대표의 막내딸 손지원(50) 씨가 대표이사 자리를 넘겨받았다. 처음에는 며칠을 눈물 바람으로 지낼 만큼 부담이 컸지만, 팔순을 바라보는 조 씨의 건강이 걱정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지원 씨다. 조 대표에게 물려받은 감각과 열정으로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정원을 가꿔나가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외할머니의 그릇을 닮고 싶다던 외손녀는 현재 영국에서 조경학을 공부 중이다. 그동안 조 대표가 정원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지금은 지원 씨가 색을 입히는 과정이랄까. 유학 중인 외손녀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터치감 있는 덧칠까지 하고 나면 또 어떤 모습일지, 3대에 걸쳐 완성될 그레이스 정원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