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家苑 千字文 大觀』 중2권
[416. 京 서울 경, 亠部 (서울, 언덕, 높다, 성하다, 크다)
京은 구릉 위에 세운 도읍지의 성문 모양을 나타내고, 뜻을 취했다. 고대에는 구릉 위에 임금이 사는 성을 세우고 방어를 위해 城郭(성곽)을 두르고 垓字(해자)를 팠다. 도읍지인 서울을 가려면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는데 성 전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높은 문루(亠와 口)만 보이고 나머지는 햇볕에 눈이 부셔 잘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이에 京자 아래의 小는 ‘빛 광(光)’의 위 글자에서 취한 글자이다. 景(빛 경) 影(그림자 영)은 ‘京’에서 파생된 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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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을 통해서 본 漢字의 기원
서울이 북한산의 높은 지대가 아닌 평지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골에서 서울로 갈 경우 ‘올라간다.’하고, 서울에서 지방으로 갈 경우 ‘내려간다.’고 한다. 또한 기차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에 가보면 서울 방향은 ‘상행선(上行線)’으로, 지방행은 ‘하행선(下行線)’으로 나눠 도착시각과 출발시각을 적어놓고 있다.
서울은 항상 上京하는 곳이고, 지방은 항상 下鄕(하향) 혹은 落鄕(낙향)하는 뜻으로 쓰인다. 就(나아갈 취)’는 京에 尤(멀리 떨어질 우)를 쓰는데, 尤는 尢(절름발이 왕)에 丶(점 주)로, 서울을 가는 데는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지리적으로 서울을 가장 높은 곳으로 보는 기준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앞서 京의 字解와 ②의 예문인 鄘風에 은나라의 마지막 도읍지인 朝歌의 땅을 나눠 봉토한 鄘나라(衛나라로 편입)의 도읍지를 건설하는데, ‘升彼虛矣(승피구의. 저 옛 성인 큰 언덕에 올라)’고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都邑은 低地帶(저지대)가 아닌 高地帶에 건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내용으로는 詩 書 가운데 商나라와 관련하여 전하고 있다.
<사진설명 :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산성인 성산산성은 중국 요녕성 대련 장하시 성산향(城山鄕) 사하촌(沙河村) 만덕둔(萬德屯) 북쪽의 성아산(城兒山) 에 있으며 산성 둘레는 2,898m이다..>
商나라는 현재까지 발견된 最古의 文字인 甲骨文의 나라이기도 하다. 위에 예시된 글자 가운데 甲骨文인 여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의 글자에 京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商나라는 여덟 번이나 도읍지를 옮겼는데, 中期인 盤庚 임금 때 殷 땅으로 遷都한 뒤부터는 주로 殷나라로 불렀다.
商書 盤庚下편에 “古我先王이 將多于前功하리라 適于山하사 用降我凶德하사 嘉績于朕邦하시니라(옛적 우리 선왕이 ‘장차 전대의 공보다 많으리라.’하시고, 산으로 가시어 우리의 흉덕을 내려놓으시어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공적을 이루셨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先王은 탕임금을, 산으로 갔다는 亳(박) 땅으로 갔다는 뜻이다. 순임금의 신하이자 商나라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契(설)이 처음으로 亳땅에 거처하였고, 그 뒤로 商나라의 창업군주인 成湯이 다시 亳 땅을 도읍으로 정했다.
『춘추좌전』(昭公四年春)에 “商湯有景亳之命(상탕이 경박의 명을 두었다.)”이라 했는데, 景은 景山으로, 亳땅이 景山에 있기 때문에 ‘산으로 갔다’고 표현한 것이다. 도읍지를 산에 의지하면 땅은 높고 물은 낮아서 하수로 인해 무너지는 근심이 없기에 ‘우리의 흉덕을 내렸다.’고 했다. 또한 주역 重水坎䷳괘 彖傳에 “天險은 不可升也요 地險은 山川丘陵也니 王公이 設險하여 以守其國하니라(하늘의 험함은 가히 오르지 못하고, 땅의 험함은 산천구릉이니, 왕공이 험함을 베풀어서 그 나라를 지키느니라.)”고 했듯이 구릉에 도성을 지으면 백성의 수고로움을 훨씬 덜 수 있기에 ‘옛 우리의 선왕이 前代의 공보다 많으리라.’고 한 것이다.
위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낸 最古의 문헌이 商頌 玄鳥편의 “邦畿千里여 維民所止로소니 肇域彼四海로더 四海來假하니 來假祁祁로다 景員維河에 殷受命咸宜라 百祿是何로다(나라 서울 천리여. 오직 백성이 그칠 바이로소니 경계를 저 사해에까지 열어 놓으셨도다. 사해가 와서 이르렀으니 와서 이름이 많고 많도다. 경산의 둘레에 있는 하수에 은나라가 명을 받음이 모두 마땅한지라 모든 복을 이에 받도다.)”이고,
경산에 도읍지를 만드는 모습은 殷武편에 “陟彼景山하니 松栢丸丸이어늘 是斷是遷하여 方斲是虔하니 松桷有梴하며 旅楹有閑하니 寢成孔安이로다(저 경산을 오르니 송백이 쭉쭉 뻗어 있거늘 자르고 옮겨서 반듯하게 깎고 이에 자르니 소나무 서까래가 길기도 하며 여러 기둥들이 크기도 하니 침전이 이루어짐에 심히 편안하도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肇 열 조 假 이를 격 祁 성할 기 何 받을 하 丸丸은 곧다의 뜻 斲 깎을 착 虔 자를 건 桷 서까래 각 梴 길 연 旅 많을 려 楹 기둥 영
곧 높은 구릉 위에 도읍을 짓고, 성문의 모습을 본떠 ‘서울’의 뜻을 나타낸 이들은 옛 東夷族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주역의 이치에 입각하여 뜻글자인 漢字를 공부하다보면 그 文字가 ‘과연 華夏族의 글자였을까?’하는 의문이 많이 든다. 黃帝 때 倉頡이 글자를 만든 이래로 계속 변화 발전하여 漢나라 때 글자가 완성되는데 그 과정에 적극 반영된 문화는 華夏族보다는 東夷族의 문화라는 점이다. 화하족은 주로 드넓은 평야지대에 살다보니 광활한 天地라는 자연환경으로 인해 도교가 흥성하거나 음양개념이 주로 발달하였다.
반면에 같은 중국 땅이라도 동이족이 살았던 지리적 환경은 화하족과는 다르다. 동이족은 황하강 주변과 그 위쪽으로 오늘날의 산동성 일대와 한반도와 그 위쪽 지역 모두를 아우르는 지역에서 생활했다.
다시 말해 동이족은 화화족과 같이 농경문화를 기초로 하면서도 화하족과는 다르게 산이 많은 가운데 들과 바다와 강이 적절히 어우러진 자연환경을 생활무대로 삼다보니 음양오행이 고루 어우러진 문화를 낳았다. 구들문화와 五色의 때때옷과 윷놀이와 訓民正音의 창제 등에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다보니 동이족은 천지자연의 이치인 음양오행에 매우 밝았다. 대표적으로 글자가 없던 시절 卦를 지어 농사에 도움을 준 伏羲氏와 12달의 원리에 입각해 음악과 제도를 완성한 舜임금과 한자의 어원인 甲骨文을 만들어낸 商나라와 오행의 이치를 전한 箕子 등이 있는데 모두 황하문명의 원류를 이뤄냈다.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산동성 일대와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달한 것이 도읍지의 성곽이다. 고구려인들은 도읍지 외에도 곳곳에 산성을 쌓을 정도로 산성이 발달한 나라였다. 국가명칭인 高句麗는 엄밀히 말하면 高丘麗(고구리)로 보아야 한다. 앞서 成湯이 ‘適于山’한데서 볼 수 있듯이 高丘는 높은 곳에 있는 도읍지이고, 麗는 ‘걸릴 리, 붙을 리’로, 곧 도읍이 높은 구릉에 의지해 있다는 뜻이다.
고구려인들의 선조는 夫餘人들이고 夫餘人들의 선조는 東夷族이다. 太白山 神檀樹 아래에서 神市를 연 桓雄과 熊女의 자손이 檀君이다. 檀君은 朝鮮을 건국하고 평양성에 도읍지를 정하였다가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모두 高丘이고 京이다.
반면에 화하족으로 대표되는 周나라는 鎬京과 洛邑인 東京을 도읍지로 하였는데 모두 평지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순임금 때와 은나라 시기를 거치며 동이족이 만든 글자를 화하족이 共有하면서 황하문명으로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유대교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서구 기독교문명으로 정착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