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언 얼마 전 서울 강북 모처에서 강의 남쪽 잠실까지 택시를 타고 오는 도중에 택시기사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어느 인생 스토리다
딸래미가 요새 젊은이답게 call taxi 예약을 했다. 그러고 나서 관련정보를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기사분이 나이가 들어서 잘 올려나...' 했다. 의구심은 금새 풀려서 약속포인트에서 차를 타는데 선임탐승해야할 나를 놔주고 출발하려했다. 황급히 윈도우를 두드려서 간신히 타고보니 아닌게 아니라 기사분이 늙수록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Icebraking을 하려고 내가 '날씨가 많이 춥지요?' 했더니 기사왈 '저는 대체로 차안에 있으니 별로 느끼지 못한답니다'했다. 이어서 내가 '날씨가 차갑기는해도 요새는 주거도 의복도 좋아서 옛날에 비하면 지낼만하지요'했더니 그 분도 공감해서 '예전에는 어디 내복이나 있었어요? 형아들이 물려준 헌 옷을 몇 겹이나 덧대어 기운 것을 입었지요'했다.
이어서 '그 시절 어디 난방이란 말이나 있었어요?. 방 아랫목만 겨우 온기가 있었고 그곳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자리였지요. 어르신이 외출시에는 거기에 이불을 덮어서 어르신 밥을 묻어두었지요. 그 밥은 어르신들이 드시고 다른 사람들은 고구마 같은 것을 먹거나 굶기가 일쑤였지요‘. 요새 젊은이들에게 그 시절을 말하면 '라면을 먹으면 되지 않았나요?'한다며 웃으며 말 했다.
기사분과 나는 나이가 엇비슷해서 그 시절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이번에는 내가 화제를 돌려서 '연세가 들어서도 활동하니까 좋으시죠?'했더니 기다렸다는듯이 '그렇고말고요 집에 있으면 뭐합니까?'했다. 나도 '이제는 돈 많으면 뭐합니까? 건강해서 필요한 만큼만 벌어서 쓰면 되지요'하자 '그런다고' 하면서 택시기사를 하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학교라곤 국민학교만 다녔는데 그나마 어려움이 많았었다고 말했다. 사친회비를 못내서 학교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집에 가봤자 부모님은 아니 계셔서 학교로 되돌아가면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단다. 이번에는 들판에서 일하고 있는 부모님께 가서 어렵사리 사연을 말하면 '다음 장날 준다'고 했단다. 그래서 학교로 되돌아가면 회초리가 기다렸단다.
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는 친구 둘이서 영산포역에서 열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단다. 서울역에 내렸을 때 배는 고프고 막연해서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웬 형아들이 다가와서는 '너희들 배고프냐? 따라오라'고 해서 들린 곳이 구두닦기들 아지트였단다. 초짜들이 처음으로 할 일은 염천교 일대의 다방을 돌면서 손님들의 구두를 가져오는 일이었단다.
그 일을 어느정도 하게 되자 이번에는 구두닦는 기술을 배웠단다. 잠은 합숙소에서 여러 명이 부둥켜 지내고 아침식사는 염천교 아래서 파는 꿀꿀이죽을 사먹었는데 새벽 5시만 넘어도 죽이 떨어져서 하루를 굶어야했단다. 내가 '그 집단(소굴)에서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냐?'고 했더니 '모두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냈단다. 그래서 내가 '차암, 좋은 형들을 만났으니 정말 복 많이 받으셨네요'했다.
당시에 구두닦는 나와바리를 두고 자기가 속한 서대문파와 광화문파 간에 영역다툼이 있었단다. 오야들이 자기들 세력을 키우려고 아랫것들한테 복싱을 배우도록해서 그는 뜻밖에 복싱도장을 다니게 되었단다. 실제로 두려웠던 패싸움은 없었고 언젠가는 권투시합에 나가게 되었는데 막상 그 날이 닥치자 코피가 쏟아지고 어지러워서 실제 링에 오르지는 못했단다.
구두닦는 일이 익숙해졌던 어느 봄 날 잘 차려입은 신사분의 구두를 닦게 되었는데 그 분이 '너 양복 만드는 일 해보고 싶지않느냐?'고 해서 생각해보니 그 일이 더 좋아보여서 그 길로 신사분을 따라갔단다. 종로에 있는 양복점에 갔더니 의리의리한 실내가 구두센터와는 사못 다르더란다. 시다바리를 몇 년 동안 하고나니 기술을 익히게 되고 이어서 제단사가 되었단다.
당시에는 양복값이 비싸기도 한데다가 결혼예복을 맞추면 몇 벌씩을 주문해서 일깜이 많았고 잘하는 양복점으로 소문이 나서 돈을 많이 벌었단다. 번 돈으로 잠실에 대지 100평짜리 단독주택을 사고 아내, 딸 둘 네 식구가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단다. 일이 이렇게 잘 나가던 무렵 광산을 하는 친구가 찾아외서는 ‘큰 돈을 벌려면 광산을 해야한다’고 하더란다.
귀가 솔깃해져서 친구와 동업을 하게 되었단다. 우선 저명한 지질학자들에게 연구요멱을 주어서 탐색한 결과 충북에서 대리석광산을 하게되었단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가했더니 150미터쯤 파내려갔을 때 붕괴사고가 났고 3인의 광부가 희생되었단다. 그 길로 구치소에 수감되고 재판을 받게되어서 인생 막장에 쳐박히게 되었단다.
상당기간 옥살이를 끝내고 나와서는 예전의 양복점 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IMF가 닥쳐서 잘나가던 친구들도 모두 부도가 나거나 폐업을 해서 그쪽은 접기로 했단다. 그래서 당장 먹고살기 위해서 식당을 개업했는데 그런대로 잘 되더란다. 그런데 이참에는 자기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두 친구가 보증을 서달라고 해서 잠실의 집을 잡혀서 보증을 섰단다.
이어서 잠실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업친데겹친격으로 이참에는 코로나가 닥쳐서 식당의 손님이 끊기는 바람에 영업용택시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단다. ‘이제는 모든 것 접고 날마다 나와서 일하고 월급타다기 나이든 아내와 둘이서 먹고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