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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전용루페>의 줄거리:
루페(loupe)란 소형 확대경입니다. 시계수리나 보석세공 그리고 병원에서 수술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미세한 신경이나 실핏줄이 제법 굵은 노끈 굵기로 확대되 보이니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고가의 루페라도 그 용도는 매우 한정적입니다. 오직 수술 전용으로만 사용 될 수 있을 뿐이지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 전용루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 전용루페
(눅18:35-43)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전용루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전용루페’
여러분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습니다만 루페라는 것은 소형 확대경을 말합니다.
아마 보셨을 거예요.
그 좁은 부스 안에서 시계를 수리하시는 시계 수리공 아저씨들이 이렇게 안경 같은걸 쓰고, 그러나 안경 앞에 돋보기가 달려있는 듯이 삐죽 튀어나온 그런 것을 쓰시고 시계를 고치는 그런 모습들을 아마 보신 적이 있으실 것이고 또, 우리가 직접 그런 광경을 목격하지는 못했어도, 영화라든지 드라마에서 보면 의사 선생님들이 수술을 할 때에 이 안경을 쓰는데, 제가 지금 쓰는 안경 같은 거 앞부분에 불룩 튀어나온, 돋보기 같은 것이 달려 있는 것, 이게 다 루페입니다, 확대경이에요.
그러니까 실핏줄이나 아주 미세한 신경을 수술해야 되는 이런 경우에, 이 루페를 쓰게 되면 통상 다섯 배 정도 크게 확대 돼서 보인다니까,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실핏줄이 다섯 배로 크게 확대되면 얼마나 수술하기가 편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찾아보니까 어떤 그 수술 전용루페는 가격이 240만원 이런 것도 있더라고요, 더 비싼 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70만원 80만원 240만원까지 제가 찾아 봤는데…
이렇게 비싼 루페이지만 수술실에서만 씁니다.
그것도 아주 미세한 모세혈관이라든지 신경을 건드려야 되는 그런 수술을 할 때 쓰게 됩니다.
보석세공을 할 때 쓰던 루페는, 일어나서 보석세공하지 않는 자리에서 쓰고 다니면서 다른 걸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루페는 시계를 수리할 때 쓰든, 보석세공을 할 때 쓰든, 수술용으로 사용을 하든 언제나 전용루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을 보는 루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여리고를 향해 가까이 가셨을 때’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여리고가 두 개가 있었어요, 그래서 마태와 마가에서는 ‘여리고를 떠나셨을 때’에 이렇게 얘기하는데, 여긴 ‘여리고를 가까이 왔을 때’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봐서, 더 북쪽으로 옛 여리고, 여호수아가 정복한 그 옛 여리고가 있고, 그리고 거기서 1.5km 떨어져 있는 데에 새 여리고를 헤롯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말하면, 종로가 구시가지라 그러면 강남이 신시가지인 것처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누가는 새 여리고를 기준으로 봐서 ‘가까이 왔을 때’ 라고 기록을 한 거지요?
맹인을 하나 고치시게 됩니다, 시각 장애인을.
근데 누가가 이것을 쓴 것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까이 왔을 때 한 맹인을 고쳤다는 역사적인 fact를 보고하고자 기록한 게 아닙니다,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일어난 건 맞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그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말씀을 전달하고자 하는 성령의 의도에 사로잡힌 거예요.
그 fact를 그냥, 한 시각장애인이 예수님께 강렬하게 요구 해 가지고 눈을 떴다! 이걸 전달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메시지를 담자고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는 것인가? 이 역사적 fact를 활용하고 있는 것인가?
바로 앞 절에 34절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34절에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이 말씀이 그들에게 감추어졌다는 겁니다.
이러면 큰일 납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이 십자가사건이 감추어져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기독교인도 없어집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어느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라 하지만, 사업장에 나가서 사업을 하면서 바쁜 바람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이 마음에서 감추어져 버리지 않습니까?
이 세상일이 바빠서, 이 세상일들 때문에 신경을 쓰느라고 망각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이?
그러면, 기독교의 능력과 힘과 은혜와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다는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감추어졌다는 이 사실은, 왜 감추어졌는가를 드러내서 감추어지는 일이 없게 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과 연관지어서 우리는 온갖 신비한 모~든 얘기를 다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만대장경보다 더 많은 이야기, 더 많은 신비한 이야기를, 더 심오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내용들이 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이 기억할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아~! 엄청난 심오한 이야기가 다, 주님을 마음으로 기억할 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이 바라보고 있을 때에, 나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거 한 가지만 하면 너무너무 심오하고, 너무너무 신비하고, 너무너무 넓고 큰 모든 은혜가 다 주어집니다.
요거 하나만 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만을 마음이 늘~ 기억하고 있으면, 그러면 다~ 되는 거예요.
어떤 심오한 이야기가 표방하는 그 깊이까지 다 도달하게 됩니다.
이게 감추어졌다는 겁니다, 왜 감추어졌을까?
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가복음에는 이름이 나오지요.
이 바디매오라고 하는 시각장애인이 고침을 받는 사건을 배경으로 삼아서, 왜 제자들에게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사건이 감추어졌는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겁니다.
자, 왜 감추어졌을까요?
이 시각장애인의 고침 사건으로 들어가 봅니다, 거기에 이유가 나오니까.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소리 지르고, 그 소리 지르면서 요란을 떠는 이 맹인을 향하여 제자들이 꾸짖고 나무라면서 조용히 하라고 그러는데, 그럴수록 더욱 소리를 지르자 그 사람을 앞으로 데려오라 하십니다.
데려왔을 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언뜻 보면 참으로 우문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당연히 시각장애인이니까 눈 뜨기를 원하겠지 하고 생각을 해 버립니다.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어보실 때는,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든지 지금 이 바디매오의 상태에서 다른 소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장애라는 것은 지금 발전하고 있는 질병상태와는 다릅니다.
이미 질병상태에 발전적인 전개가 마무리가 지어진 상태입니다.
병이 지금 현재 발전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장애인일 경우, 많은 경우에 장애를 안은 채로 이 세상을 적응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자체 안에 개발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 바디매오 같은 이 경우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여리고 가까이 가는 그 길목에 자기 자리를 잡고, 거기서 구걸을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생활에 패턴이 있었고 스타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안정되게 삶의 패턴이 유지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눈뜨는 것이 아니라, 눈뜨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받아들여서, 마음 깊숙~이 장롱깊이 넣어 두었고, 목하 현재 지금 이 바디매오가 바라는 소원은 얼마든지 다른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물어 보신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이야기를 깊이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바디매오는 눈을 뜨기를 원하면서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물어 보신 겁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런데 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 보기를 원한다는 말 속에 숨겨진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보기를 원한다는 얘기입니다.
시끌벅적하자 이 바디매오가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이 무슨 일이냐?’ 그때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이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메시아라는 신앙고백이 들어있는 명칭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목수 예수입니다, 목수로 살던 예수를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얘기를 합니다.
구걸을 하면서 살던, 정해진 자리에서 자기 직업처럼 삶의 패턴이 굳어져 있고 삶의 스타일이 정해져 있던 이 맹인이, 갑자기 불쌍히 여겨 달라 그러고, 사람들이 뭐라고 꾸짖는데도 불구하고 더욱 강렬하게 요청하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지금 이 맹인의 마음속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보고 싶다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메시아다, 메시아가 아니면 그런 말씀, 그런 행위가, 그런 역사가 나타날 수 없다고 확증하고, 다윗의 자손 메시아라고 마음속에 믿고 있었습니다.
근데 바로 앞으로 지나갑니다.
그 동안 아내가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하여간 아내가 있었으면 아내, 자식이 있었으면 자식, 가족이 있었으면 가족, 그 모~든 사람에 대해서 보기를 포기했습니다.
왜 안 보고 싶었겠습니까?
손으로 만지는 것이 다인데, 손으로 만짐의 형태를 느끼면서 포기했습니다.
하늘이 아름답다 그래도 하늘 보는 것을 포기했고, 호수가 아름답다 그래도 호수 보는 걸 포기했어요, 모~든 걸 다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데, 내 마음 속에 메시아로 받아들여진 그 예수가 지나간다는데, 그분 예수님을 보고 싶은 이 마음의 간절함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안 봐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인 이분만은 봐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맹인의 마음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보고 있던 예수를 육체의 눈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너한테 해주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보기를 원한다는 얘기는, 이 육체의 시력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그 동안 내가 나사렛 예수를 들을 때마다 메시아라고 확증하면서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 앞으로 지나간다 하니까, ‘내 육체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셔서, 예수님 전용시력으로 회복시켜 주세요, 예수님을 보게 해 주세요!’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좇아갑니다.
자!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성령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서 쫓아다녔지마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이 맹인은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마음으로 예수님을 봤습니다.
그러므로 보기를 원한다고 예수님께 말할 때, 이 육체적인 회복은 예수님을 보기 위한 시력, 예수님 전용시력을 회복시켜 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을 육체의 시력으로 보기를 원하니까.
근데 제자들이 육체로 예수님을 보면서도 이들이 마음으로 본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덕분에 생길 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입성해 들어갑니다, 들어가시면 왕으로 선포할 것입니다, 왕으로 선포한 다음에는 권력을 장악하실 것입니다.
유대의 권력을 장악하시면 이제 주변국가를 정복해 가시면서, 다윗의 태평천하의 치세를 이루실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고 있었던 게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마음으로 보고 있었던 게.
반면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교해 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죽음까지 쫓아갑니다, 무덤까지 쫓아가게 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다 도망을 가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는 이 세상을 떠나는 관문이에요.
마치 여리고가 요단강을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관문인 것처럼, 십자가는 요단강을 건너가는 입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볼 일이 남아있고 이 세상에서 보고 싶은 상황이 있고 보고 싶은 단계가 있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감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떠날 문이니까, 세상을 떠나야 되는 문이니까, 죽음으로 들어가는 문이니까.
그리고 부활하고 나면 곧바로, 세상에서 뭔가 잘 살고 잘 먹는 게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로 들어서게 되면, 곧바로 하늘까지 마음이 가버리는 거고 세상을 떠나는 겁니다.
서울에서 볼 일이 있는 사람이 서울역에 가서 기차타면 안됩니다.
마찬가지에요.
아직도 이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있고, 갖고 싶은 것이 있고 소원이 있는 경우에, 십자가가 감추어질 수밖에 없고, 십자가가 감추어지면 기독교가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는 기독교인 됨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제자들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디매오는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지 않았지마는 마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보기를 원한다는 이 ‘보기’는, 눈의 시력은, 마음으로 보고 있는 예수님, 그래서 그리워했던 예수님을 보기 위한 루페를 원했던 겁니다.
예수님 전용루페로써 이 육체의 시력을 회복하기를 원했는데, 그렇게 육체의 시력이 예수님보기 전용루페가 되기를 원했던 것은 마음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밝히 보기만 하면,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바울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누가 너희를 꾀더냐?’
누가 우리로 하여금 마음으로,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못 보게 하느냐 이겁니다.
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감추어졌느냐 이겁니다.
자식문제 때문에?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서? 사업이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에? 갖고 싶은 자동차가 있어서 그 자동차를 보느라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느냐, 십자가의 모습이?
그러면 기독교 끝나버리는 겁니다, 그 순간에 끝나는 겁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고백은 스물 네 시간 기억한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스물 네 시간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라는 말이냐?
그러라는 얘기에요.
십자가만을 바라본다는 얘기는 내 마음이 이제 이 땅을 떠나서 하늘을 향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하늘을 향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을 보좌 앞으로 끌고 가서,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십니다.
오늘 이 맹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랐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게 뭐라고요? 하나님이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 조명이 비춰진다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나는 맹인이 됩니다.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자식의 문제에 대해서도 맹인이 되고, 사업문제에 대해서도 맹인이 되고, 이 나라 문제에 대해서도 맹인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세상에 대해 맹인이 될 때라야만, 마음에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하나님이 보입니다.
내가 맹인이 된 이 세상의 문제는 걱정하지 말아요, 하나님의 눈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보고 계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감추어지지 않으려면, 오늘 이 바디매오의 사건을 기억하세요.
바디매오가 시력을 회복하기를 원했던 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으로 보고 그리워했던 예수님을 확인하기 위한 전용루페를 원했던 것이에요.
확대경을 원했던 거예요, 예수님 전용시력을 원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본다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보기를 원한다’는 이 말이 그 뜻이라는 겁니다.
전용시력을 원한 이유가 뭐냐? 예수님 보기 전용시력을 원한 이유가 뭐냐? 마음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세상의 성공을 보고 있었고, 눈으로 예수님을 봤지만 십자가가 감추어져 버립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끝났다면, 영영히 제자들은 기독교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온~ 세상일에 대해서 맹인이 될 각오가 있어야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이 보이고, 내가 하늘을 보며 평강과 기쁨과 행복에 젖어 있으면, 내가 맹인이 돼서 보지 못한 이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눈이 보시며 이끌어 가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바디매오가 시력을 회복한 것은 생리적인 의학상의 시력회복을 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전용시력을 회복하기를 원한 것임을 기억하며, 우리 마음도 바디매오처럼 마음으로 집중해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시고, 우리 마음이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맹인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