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맏이, 누룩 없는 빵에 관한 세칙
탈출 13,1-8
나중에 유배를 갔다온 상황 아래에서 이와 같은 전통들이 중요하게 되었고, 그것을 앞에 있는 이야기로 역으로 투영한게 아닐까? 라고 짐작해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학자들의 의견은 말씀해 주신 두번째 의견 쪽으로 치우치는 양상인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뼈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뼈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여러번에 걸쳐서 언급이 되는 내용입니다.
뼈가 쇠약해 지는 것은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요즘도 왜..골다공증..여성들에게 위험하잖아요...(여기서 말하는 것은 골다공증은 아니것 같습니다)
뼈가 부서지거나 흩어지는 것은 멸망 하는 것으로
뼈가 온전하게 지켜지는 것은 그 존재를 유지, 존재 하는 것으로
따라서 누가 쇠약해져도 뼈만 있으면 다시 회생할 수 있다!
라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뼈는 지켜져야 한다.
에제 37,1-14 <뼈들이 다시 살아남>
→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남을 묘사
뼈(עצם)
º 요한 19,36 :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º 시편 34,21 : 그의 뼈들을 모두 지켜 주시니 그 가운데 하나로 부러지지 않으리라.
요한 19,36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는데 병사들이 예수의 다리 뼈를 꺾기 위해서 옵니다. 그 이유는 병사들이 예수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어떤 사람들은 거의 한 일주일 간을 죽지 않고 거기서 생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 십자가 형의 목적입니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이,
그런데 병사들은 빨리 퇴근해야 해서 그러니까 그 사람이 빨리 죽어야 하는데...사람을 빨리 죽이는 방법 중에 하나가 십자가 매달린 사람에 다리를 꺾으면 몸이 아래로 쳐지면서 질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으려고 왔는데 예수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기 때문에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무덤에 들어갈 때 그 뼈가 온전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시편에서 있었던 그 말씀(시편 34,21)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다. 라고 요한 복음 사간은 우리들에게 시편의 내용을 하나의 예언처럼 해석하는 대목입니다.
이제 얘기가 뒤로 넘어갑니다.
탈출 13,1부터~~
여기서 신부님은 텍스트를 자잘하게 나누셨습니다. 1절, 2절을 그냥 한단락으로 나누셨습니다.
13장 1-16절까지를 한 대목으로 읽어 낼 수도 있다고 합니다.
탈출 13,1-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 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
야훼가 모세에게 이르시는 말씀, 아론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야훼가 모세에게 말할 때는 동사가 여러 종류가 쓰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마르라는 동사를 씁니다. 영어에서도 말한단는 동사가 여러가지 있습니다. say, speak, tell 이라는 동사가 있고, 여러 종류의 동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말에는 대표적인 동사가
→ 아마르 , 다바르 인데 두 가지가 어감의 차이가 있습니다.
책에 쓰신 것을 조금 교정하시겠습니다. p330 인데,
아마르(אמר)가 일반적 의미의 '말하다' 라면
다바르(דבר)는 말하는 행위뿐 아니라 그 말씀을 강조하는 즉 '말씀하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한다는 행위도 다바르를 통해서 더 강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르는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말하다,(누가 말한다. 그가 말한다...)
다바르는 말하는 행위와 그 내용, 다바르에는 사건이라는 그런 뜻도 있습니다.
말씀하는 그 사건 그 자체에 더 강조를 하는, 영어로 표현하면
아마르는 'say', 다바르는 'speak'
특히 다바르가 중요한 이유는? 나중에 우리가 신약성경 요한복음(1,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물론 요한 복음은 그리스 말 로고스라는 말을 씁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는 그리스 말로 엔 아르히 엔호 로고스(?)
그리스어 logos(로고스, 말씀)의 개념이 히브리어로 오면 다바르 입니다.
말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이루어 졌고(사건), 그 말씀을 통해서 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내 말이 내 입을 떠나 그것을 이루지 않고 다시 나에게 돌아온 적이 없다.' 라고 얘기 했을 땐, 다바르
탈출 13,2에서도 우리가 주의 해야할 부분이 나옵니다.
직역하자면,
탈출 13,1
나를 위해 거룩하게 하여라/
모든 맏이를(버코르,בכור)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
모든 자궁의 맏이(페테르,פטר)
사람이거나 동물이거나
그는 내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맏아들과 맏배를 구분했는데, 우리말로 맏아들은 사람, 맏배는 동물에 관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말로는 구별이 안됩니다. 같은 단어(버코르)입니다.
신부님이 쓰신 책에는 맏이라는 개념으로 쓰셨는데, 사실은 맞는 게 아니시라는...
국어 사전에서 맏이를 찾아보면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말로는 동물의 맏배와 사람의 맏아들, 맏이를 함께 얘기 할 수 있는 개념이 못찾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쓰이는 '까다쉬' 라는 특별한 동사입니다.
신부님이 이 강의 처음에 하신 이야기 中
초월적 하느님 신관과 내재적인 신관을 이야기 하시면서, 하느님의 천상과 인간의 지상을 구분하면서 하느님의 천상에 속한 것을 그 드높은 것을 우리가 '거룩하다'
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까다쉬(קךש) 라는 동사의 일차적인 의미가 '거룩하게 하다' 입니다.
지상(인간)에 있는 것을 이제는 천상(하느님)에 속한 것으로 만든다. 라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젊은이가 사제로 서품될 때 - 까다쉬
평범한 공간이 하느님의 성전으로 축성될 때- 까다쉬
평범한 밀떡이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바뀔때 - 까다쉬
거룩하게 한다 - 까다쉬
여기에는 거룩하게 하다의 일차적인 의미와 함께, 분화가 되면서 문맥안에서는 '봉헌된다' '축성된다' '상별된다' 라는 여러가지 용어들로 갈려서 쓰이는데
"까다쉬'의 일차적인 의미는
세속적인 것을 거룩한 것으로....지상적인 것을 천상의 것으로...
인간에게 속한것을 하느님께 속한 것으로.......만든다는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주교회의 성경은 "까다쉬"를 "봉헌하다"로 번역하였습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모든 맏이를 나를 위해 거룩하게 하여라....
탈출 13,1 직역부분에서
'모든 맏이(버코르, בכור): 주로 사람의 맏이
'모든 자궁의 맏이(페테르, פטר): 주로 짐승의 맏이를
의미하는데 사용됩니다.
- 잠시 후에 다시 설명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
레위기 27,26을 보면 이 구절이 조금 바꿔서 등장합니다.
º 짐승의 맏배는, 맏배로서 이미 주님에게 속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봉헌할 수 없다. 소든지 양이나 염소든지 그것은 이미 주님의 것이다
우리가 읽은 규정과 좀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 부분은 그렇게 오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주로 서원예물의 경우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맏배는 이미 야훼에게 봉헌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것을 다시 하느님에게 봉헌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축성된 것은 이미 하느님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하느님에게 가지고 가서 '당신께 드릴께요.' 라고 하는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버코르'와 '페테르'의 문제
버코르는 첫번째로 태어난 아들의 의미가 있는데,
이스라엘은 아시다시피 일부다처제였습니다. 이게 남자에게 있어서의 첫번째 아들인지 여자에게 있어서 첫번째 아들인지가 조금은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그 부분을 명확하게 얘기해 주지 않습니다.
이런의미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장자는 하가르가 낳은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사악이 하느님의 축복을 이어받게 되었는지, 이것은 정실의 아들이냐? 종의 아들이냐? 와 같은 개념들이 나오겠습니다.
또는 탈출기 시작하면서 야곱의 아들들 명단을 말씀하면서 레아와 라헬이 낳은 아들들과 그 종들이 낳은 아들들을 좀 차별하는 듯한 그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구약의 사고 방식을 이해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구약에서 버코르는 장자의 개념인데, 부계의 장자인지? 모계의 장자인지?가 구약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라는 정도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페테르는 모계의 개념입니다.
페테르는 자궁을 열고 나온 첫번째 자식(모계개념) 인데, 첫번째 자식이라는 의미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동물로 본다면 암컷인지? 수컷인지? 가 불분명합니다.
따라서 버코르의 개념에서는 부계인가? 모계인가? 가 불명확
페테르의 개념에서는 수컷인가? 암컷인가?가 불명확 하다는 문제점을 갖고있다.
는 것과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그 부분이 교정됩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맏아들 맏배에서, 다시 누룩 없는 빵으로 넘어갑니다.
이 대목에서,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사건은?
파스카 축제, 무교절, 맏이를 바치는 예식..이것은 일정한 시간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도 역시 예식땐 의식적으로 생각이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맏이를 바쳐야 돼느냐? 무엇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해방 시키셨을 때 이집트의 맏배와 맏이를 치신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그 맏이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
맏이는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파스카 축제는 유목축제입니다. 그렇다면은 무교절은 농경축제입니다. 따라서 파스카라는 하나의 사건 안에는 유목축제의 형식이 녹아들어 있고, 두번째 농경축제의 형식도 녹아들어가 있고, 세번째는 농경축제인지 유목축제인지 모르겠지만은 맏이를 바치는 예식이 녹아들어있습니다.
따라서 파스카 라는 하나의 사건안에 세가지 종교적인 기념 예식이 들어가 있습니다. 맏배를 바치는 예식은 유다 전통에 파스카 사건과 연결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하나에 고대 근동안에 있었던 일반적인 축제였을 것 같습니다.
파스카가 일반적인 유목축제에서부터 이스라엘에 역사적 사건과 결합하고 , 무교절이 일반적인 농경축제에서부터 이스라엘에 역사적 사건과 결합하듯이 맏배와 맏이를 바치는 예식도 일반적인 그런 전통이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건 안으로 녹아 들어 왔는데,
본래는 여인들의 고유한 감사제였습니다.
요즘도 많은 가정에서 그렇지만 여인들이 모두 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다음에 짐승이라고 해도 암컷인데 모두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언제 증명이 됩니까? 옛날에는 첫번째 아이를 낳고 첫번째 새끼를 낳으면 그때 증명이 됩니다.
그것을 굉장히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라는게 밝혀졌구나.' 라는 것을 신에 은총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떤 감사에 제사가 아마 고대 사회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탈출기의 저자는, 탈출기의 텍스트는 그와 같은 일반적인 여인들에 사건을 탈출기라는 역사적인 사건의 역사, 라는 그 사건과 결부시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전에는 내가 여자로서 아이를 낳았으니까, 신께 감사를 드려야돼...라고 얘기하는데 이제는 이유가 바뀐겁니다.
우리가 이집트를 탈출할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이집트의 맏이와 맏배를 치신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똑같은 감사의 제사를 지내더라도 목적이 다른겁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내가 이 제사를 드리는 거야...
이것을 우리가 신학화라고 부릅니다. 야훼와 무관했던 여러가지 것들을 이제 야훼와 관계있는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신학화 작업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탈출 13,3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나온 이날을 기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손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 이날 누룩 든 빵을 먹어서는 안 된다.
3절에서 제일 중요한 용어는
‘기억하여라(자카르, זכר) 이다.
히브리말,
히브리말 후카(חקה), 그리고 기억하여라(자카르). 이 단어도 잊지 말자고..이것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하여라, 라는 것은 단지 잊지 말아라.가 아닌 자카르 라고 하는 것은 기념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여러가지 기념제가 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6.25, 3.1절 그리고 4.19, 어떻게 보면 조금은 그 모든 것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우리에게 상처가 되는 기억들인데, 왜 그런 것들을 기억할려고 애를 쓸까요??
신부님께서 5.18 때 미사를 하시면서 그때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주에서 있었던 사진들을 다운받아서 신자분들에게 보여드려야 겠다..하셨는데 결국 못하셨다는....그 사진들이 너무 잔인해서...보시기에 힘이드는..
강론하면서 말씀만 드리고 사진까지는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미사에 오는 어린이들과 함께 너무 충격적인 부분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으셔서...
하지만 우리는 왜 그런것을 기억해야 합니까?
역사적 아픔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기억해야 합니다.
무쇠솥 처럼....2014년 4월 16일 사건도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카르..잊지 말아라!!
무언가 예식을 통해서 그것을 종교적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카르(기억하여라)의 개념이 신약으로 넘어오면 아남네시스(άνάμησις)연결됩니다.
우리가 미사 하는 것이 바로 아남네시스(기억)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되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것...
따라서 우리들이 하는 미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제사가 아닙니다. 고대 의미에서의 제사는? 내가 하느님을 위해서 동물을 바치고 무언가를 바칠테니까, 하느님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십시오..
일종의 딜이 이루어 지는 겁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하지만 신약의 개념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건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신약의 제사는(미사)?
그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우리가 구원되었음을 기억하는 예식
미사에 와서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따로 더 받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받을 사건은 이미 일어난 거고 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는 겁니다. 잊 지 말 아 라..
더나아가 아남네시스라는 것은?
단지 과거의 사건으로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한다는 의미를 떠나서 그것이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다. 왜냐??
그 근거는 하느님은 시간 안에 제한되어 있는 분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에..
아남네시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현재화)
그런 아남네시스의 뿌리는 바로 구약 성경에 나와 있는 "자카르"라는 이 개념에 뿌리박고 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느냐?
1) "이날"(시간)
2) 하느님이 강한 손으로 그곳에서 나오게 하셨음
(직역, 손에 강함으로...순서를 바꿔 놓을 때는 의도가 있다)
1) +2)
너희는 기억하여라. 바로 이날..
야훼가 자신의 손에 강함을 통해서 너희를 그곳에서부터 이끌어 내었다
문제가 되는 한 문장,
탈출 13,4
너희는 아빕 달 바로 오늘 나왔다.
시간을 강조하고 있고, 시간을 강조한다는 것은 축제를 하는데, 또는 누룩 없는 빵에 축제를 하는데 이것을 언제 하는지를 정확하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겁니다. 아빕달?? 우리는 처음 듣는 달입니다.
아빕, 이라는 말은..
그 단어자체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곡식이 여물었는데 아직 딱딱하게 영글지는 않은 따라서 추수해도 되고 조금 기다려도 되는, 하지만 추수를 시작할 수 있는 그와 같은 상태입니다.
이날이 새해의 첫달인데, 이날의 곡식은 아마도 보리일 겁니다.
밀추수는 가을에 합니다. 보리추수는 봄에 합니다.
이 새해 첫달이(보리가 추수할 때)된 그 아빕달에 이집트 탈출 사건과 누룩 안든 빵 축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탈출 13,5
주님께서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가나안 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를 데려 가시거든,
이 달에 이러한 예식을 올려야 한다.
이부분을 좀더 직역을 해 보셨습니다.
5b
º 그리고 너는 이달에 이 일을 할 것이다.
º "일"= abodah
이일은 히브리어로 abodah 라고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말로 abodah는 에벧이라는 말과 연관이 되었는데 종이라는 뜻으로 종의 일
하느님과 인간 관계를 주종관계로 보라
하느님과 인간을 주종관계로 봤을 때
인간이 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제사입니다.
그와 같은 규정은??
탈출 13,6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고,
이렛날에는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야 한다.
하루가 아닙니다. 일주일...그것을 시작하는 것은 전체적인 이 탈출기 12장, 13장의 문맥을 본다면은 파스카로 시작을 합니다.
그 밤에 저녘 식사를 하고,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계속 해서 누룩이 안든 그와 같은 빵을 먹어야 합니다.
여기서 보면 이 구절은 탈출 12,16절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탈출 12,16
º 첫날에 거룩한 모임을 열고, 이렛날에도 거룩한 모임을 열어라. 이 두 날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희가 저마다 먹어야 할 것만을 준비해도 된다.
아마도 처음과 끝에 있을 거룩한 모임에 대해서 따라서 두번의 거룩한 모임이 있는, 탈출 12,16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신다고 합나다(일반적인 주석가들의 생각) 이고 신부님께서는 책에 쓰시진 않았지만,
순례 축제라는 것은 어딘가 순례를 가는 축제를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가 사는 곳에서 순례를 올겁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거기서 축제를 지내는 것, 그것이 순례 축제이기 때문에 마지막 축제 한번만 있지 않았을까? 라는 ,
그런데 왜 여기서는 두 축제를 얘기하느냐? 왜냐? 시작하는 날 파스카 축제를 여기에 함께 포함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본래 무교절 축제는 일주일 동안 순례를 예루 살렘으로 와서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축제를 벌이는 그 축제가 무교절 축제였는데, 파스카 축제와 함께 결합해 시작되면서, 자기 집에서 축제를 하나하고, 그리고 맨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와서 전체가 모여서 축제를 하는 그와 같은 두축제가 이렇게 합쳐진, 종합된 형식으로 탈출기 12,16에서 얘기가 나온 것이고 따라서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6절의 내용이 무교절 축제에 본래에 폼을 본래에 형식을 우리에게 애기해 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디가서 신부님이 그랬다고 하지는 ....마세요..깊이있는 연구라던지 조사없이 이랬을 것이 아닌가? 라고 상상하신 것이라서..
탈출 13,7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그동안 너희 영토 어느 곳에서든 누룩 든 빵이 보여서도 안 되고, 누룩이 보여서도 안 된다.
이게 참 재밌는 표현으로 안보이면???그것은 된다..라는 식의..
치운다고 치웠는데, 하필이면 어느 구석에 있을 수도 있는 그런 경우를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겠다.. 라는 의미로 의도적이지 않게, 고의적이지 않게
그렇게 누룩이 어디서 조금 발견되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을 안치우면 안 된다. 라는 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7절 앞부분,
직역한다면은...
탈출 13,7
º 누룩 없는 빵이 이레 동안 먹힐 것이다.
라는 표현에 관해서 우리들이 주목해 보면 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7절b 부분입니다.
'너희 영토 어느 곳에서든' 아직 이집트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 너희 영토 어느곳에서든" 에서 처럼 너희 영토가 있습니까??
아직 없죠..따라서 이것은 가나안 땅을 점령한 상태입니다.
반면에 탈출 12,19
이레 동안 너희 집 안에 누룩이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탈출 12,19과 탈출 13,7 절을 보면 어떤게 더 발전된 폼입니까?
탈출 12,19은 집안에만 없으면 된다, 탈출 13,7절은 모든 영토에서 다 없어야 한다...
결국 탈출 12,19절이 더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탈출 13,7절은 더 극단적으로 없애라는 의미를 눈에 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법적으로 좀 완화된 하지만 공간적으로 보면 훨씬더 넓어진, 규정은 완화되고 그 규정의 범위는 넓어지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탈출 13,8
그날 너희는 너희 아들에게, '이것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 때문이란다.' 하고 설명해 주어라.
여기서도 설명하다. 라는 동사와 연결된 개념이 중요합니다. 히브리 말에 '하까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까다. 라는 말은 일차적을 설명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히브리 말에 토라( 가르침)은 크게 두가지 틀안에 그려집니다.
하까다 - 예화,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는 것(아브라함의 이야기, 노아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 등은 모세의 오경이 다 토라지만 여기에 이야기가 있는 것)
반대로 지금 우리가 읽는 이와 같은 내용, 앞으로 읽을 그런 시나이 계약에 나온 계약의 책들 이런 것들은 법규와 규정들입니다. 아까? 나온 후까?그런 법규와 규정들은 설명하는 틀이 아니라 규정하는 틀이라서 할라카 라고 부릅니다.
할라카 - 율법, 계약의 책등 법규와 규정
따라서 토라는 하까다와 할라카로 구성됩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하까다? 할라카? 입니까?
할라카 입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하까다 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를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성당에서 미사를 하면 미사 경본이 있듯이, 파스카 축제를 하면 파스카 축제에( 각 가정에서 하니까) 가장들이 축제를 이끕니다.
그럼 그들이 포도주를 어떻게 가지고? 빵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다 규정이 써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하까다' 입니다.
또는 '파스카 하까다'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냥 하까다.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근데 그 하까다에 보면은 중간에 예식을 하면서, 부모와 자녀가 나누는 대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물어 봅니다.
"아빠! 오늘 저녁 식사에는 왜? 우리가 쓴 풀을 먹나요?" "아빠 오늘 저녁 식사에는 왜 ? 우리가 누룩 없는 빵을 먹나요?" 이런 것들이 다...그게 아이들이 해야 할 대사입니다.
마치 미사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면 '또한 사제와 함께' 와 같이 처럼...
가끔씩 미사때 사도신경을 할 때??
'전능하신 천주 성부..' 해야하는데 깜빡하고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라고 하면 신자들이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라고 나올 때가 있습니다. ㅎ
미사가 다시 도돌이표가 되는...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
여기도 그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텍스트가 고정이 되어있습니다.
아이들이 아빠한테 뭐라고 질문한다.. 그러면 아빠가 뭐라고 대답한다. 라는 형태로 규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들이 "왜? 누룩 없는 빵을 먹나요?" 라고 하면
아빠가 "이것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때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 때문이란다.' 라고 텍스트가 고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목의 직역이 조금 다릅니다.
탈출 13,8
이것 때문에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야훼는 내게 행했다.
여기서 이것은 뭘까요? 무교절입니다.
그런데 이걸 직역을 해놓으면 어떤 판단을 하게 되냐면, 무교절을 하기위해서 야훼가 이것을 행했다. 마치 야훼가 제사를 얻어 드시기 위해서 이것을 행했다. 라고 문장이 번역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서도 그렇고 외국 성경에서도 이 부분을 의역 했습니다.
반대로,
야훼가 내가 이것을 행했기 때문에 우리는 무교절 축제를 지낸다.라는 의미로 뜻이 통하게 전체의 번역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직역은?
이것 때문에 야훼가 내게 행했다....우리를 해방 시켰다...라는 내용이라서 철저하게 무교절이라는 축제가 관심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누룩 없는 빵을 먹는 행위.
그 무교절이 모든 것들에 이유가 된다.
모든 것들에 목적이 된다.라는 그 무교절이라는 축제와 그 예식에 대해서 목적적인, 그 모든 것의 목적으로 삼는 그와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수고하셨습니다!!
히브리어는 항상 최승정신부님의 탈출기 I 을 참조합니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