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92 93 94
《 조선왕조실록(92) 》 효종 현종 5
- 환국(換局)시대의 돌입
예송논쟁은
단순히 복상문제를 둘러싼,
당파의 대립이 아니라,
왕권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서
장자의 예를 따를 수 없다는 서인의 견해는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즉
신권(臣權)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반면 비록 효종이 둘째 아들이지만
왕은 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남인의 견해는,
왕권을 일반사대부의 예와 달리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다른말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신권의 약화를 위한 의도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숨은 의도가 있디하더라도
상복을 몇년 입는 것을 가지고
온나라가 몇해 동안
나라가 죽기살기로 논쟁을 벌이며
실제도 귀양보내고, 사람이 죽이기까지.
현시점 우리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부국강병 등 긍적적인 이슈로
이런 논쟁을 오래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이야기는 듣기 어려웠던 때 였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본질이고 또 한계라 하겠습니다.
이 시기에 백성은,
방납과 가혹한 군역 등으로 큰고통을 받았는데,
현종 말년에는 유례를 찾기 힘든
혹독한 기근이 연속해서 찾아왔습니다.
조선 8도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각종 전염병이 들끓었으며
곳곳에 파묻지 못한 주검이 언덕을 이루었고,
비가 오면 냇물에 시체가 떠내려갔으며,
거리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넘쳐났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시기의 실록에는,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의 수를
각도의 감사들이 월별로 보고 한 것이 나오는데,
전국의 아사자와 병사자의 합계가
1만 명을 웃도는 달이 많았습니다.
현종은 1674년 8월,
15년 재위기간 동안 별다른 치적도 없이,
또한 죽음에 이른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야말로
남인과 서인의 예송논쟁과 당파싸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근 외에는
특별한 것이 전혀없던 시대였습니다
현종이 죽은 후 그의 외아들이,
13세의 어린나이에 보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입니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당쟁(黨爭)입니다.
그것은 국정운영은 물론
사상적 지향과 교유,혼맥 같은
인간관계에 이르는 여러 현상의 향배를 결정한
핵심 요소였습니다.
숙종은
이러한 당쟁의 중심에서 한평생을 보냈는데,
이러한 숙종의 치세를
요약하는 정치사적 단어는 “환국(換局)”
즉 정치적 국면의 전환입니다.
환국은
당파의 교체와 정책의 변화,
인명(人命)의 처분 등을 수반했습니다.
장희빈과 관련된 익숙한 주제는
환국의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 사건입니다.
담회로~
[출처] 조선왕조 실록 92|작성자 DJ Song
《 조선왕조실록(93) 》 숙종 1
- 경신환국(庚申換局)(1)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숙종대 초반의 정국을 이끌어간 인물은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입니다.
서인의 대표적 명문가 출신에
현종, 숙종의 가까운 외척이기도 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신 서인 출신이었으나,
송시열이
김석주의 조부이며 대동법을 추진한
김육과 반목하는 바람에
송시열과 관계가 좋지 않아졌습니다.
김석주는 한직에 머무르다
현종 말년의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임에도
자신의 스승인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정권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4세의 소년 임금 숙종은 즉위 후,
과거 예송논쟁에서송시열이 했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기다렸다는듯이
송시열 등 서인들을 줄줄이 내쳤고,
이로써 인조반정 이후
50여년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허적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소년 군주 숙종의 지원,
그리고 김석주의 은밀한 공작을 발판 삼아
집권을 하게 된 남인세력은,
오래지않아
송시열 등 서인을 엄벌해야한다는 측과
비교적 온건한 측으로 갈리게 되었는데,
전자의 사람들을 청남(淸南)이라 불렀고,
후자측 사람들을 탁남(濁南 :남인의 분열)
이라 불렀습니다.
권력을 잡은 남인은
너무 오래간만의 집권이어서인지
그 권력의 힘에 도가 지나치게 되었으며
그러면 그럴수록
임금의 의심과 버림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안일에 젖기 시작했습니다.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무사안일이 불러온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한편 소년 숙종은 성장해가면서
권력에 눈이 트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서인을 악으로 간주하고
남인에게 힘을 주었으나
남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결국 임금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숙종이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에는
김석주의 처세와 공작의 힘이 컸습니다.
원래 서인 출신인 김석주는
남인정권 탄생에 기여했지만
허적이 이끄는 남인정국을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당초부터 전혀 없었습니다.
김석주.
그는 뛰어난 처신으로 자신은 근왕파라는 것을
숙종에게 강하게 인식 시키는 한편,
허적 등 남인에 대한 숙종의 경계심을
한껏 자극시켰습니다.
담회로~
[출처] 조선왕조 실록 93|작성자 DJ Song
《 조선왕조실록(94) 》숙종 2
- 경신환국(庚申換局)(2)
1680년(숙종 6년) 2월,
남인의 리더 영의정 허적은
조부의 시호를 받은 것을 축하해
대신들을 불러 축하잔치를 벌이고있었습니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는데,
숙종은 허적을 위해 왕의 잔치때 쓰는
유악(기름 먹인 장막)과 차일(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볕과 비를 막기위한 천막)을
영상에게 갖다 주라는 지시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적은 이미
유악과 차일을 갖다 쓰고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를 안 숙종은
"과인의 허락도 없이
임금의 물건을 가져갔단말이냐.
한명회도 못한 짓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라며 대노했습니다.
숙종은
바로 그날로 남인이 맡고 있던
훈련대장, 총융사 등의 병권에 관한 요직을
서인측 인사로 물갈이해버렸고,
승지와 대간마저 대거 서인으로 교체했습니다.
이어서 남인인
좌의정, 우의정, 대사헌이 사직 소를 올리자
즉시 이를 수리해버렸습니다.
또 새로 제수된 서인들이
남인의 비리를 들먹이며,
파직과 유배할 것을 아뢰자
숙종은 이를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을
"경신환국"이라 합니다.
그러나 경신환국의 원인으로
늘 제시되는 이러한 유악사건은
갑작스런 환국을 만들어내기 위한 소설로
보여집니다.
허적의 잔치는
숙종이 이미 아낌없는 지원을 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고,
특히 임금의 유악을
말도 없이 가져다 쓰는 일은 신중한 허적의
성격과 어울리지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신환국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김석주가 오래도록 준비한 드라마였고,
김석주의 노련한 공작에 세뇌된,
숙종의 전격적 뒤집기 한판이었습니다.
김석주는
곧이어 정원로 등에게 허견(남인 실세)이
종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아들들로 ‘삼복’이라 불리움)과
함께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정원로의 집에서
허견과 삼복이 모인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복평군이 허견에게
“왕은 곧 돌아가실 것이오.
그대의 아비는 나를 왕으로 세우려 했는데
나는 곧 병조판서가 될 것이오.
그대와 피를 나누어 마셔 맹세하고
함께 의논하여 서인을 몰아냅시다”
라고 말한 것을,
김석주가
정원로로 하여금 고변하게 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남인의 실세 허적과 허견 그리고 삼복(三福)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김석주가 주도한 정치 공작은
결과적으로 남인 축출,
서인 득세의 권력 교체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김석주가 확실한 증거 없이 역모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담회로 ~
[출처] 조선왕조 실록 94|작성자 DJ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