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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4-18
엘리야의 이력서 / 김창인 목사
오늘은 열왕기상 19장 14절에서 18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엘리야의 이력서"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은 예수님의 편지였다는 뜻입니다.]
편지를 받아 보면 대충 그 사람을 알지 않습니까?
첫째는 주소가 있기에 어디에 사는지 알게 됩니다.
둘째로 문장을 보면 어느 정도 유식한지 무식한지도 알게 됩니다.
셋째 글자 체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게 됩니다.
넷째 그 편지를 살펴보면 편지를 왜 했는지 내용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 교인은 예수님의 편지라 할 때"에 고린도 교인들을 보면 예수님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력서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이력서라고 하게 되면 어디에 사는지 주소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학력이 나오고, 지금 무엇을 고 있으며 지나간 날에 무엇을 했는지 경력이 나옵니다. 좀 더 자세히 쓰게되면 가족 사항이 나옵니다. 이력서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대충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의 이력서가 너무 멋있습니다. 엘리야의 이력서가 우리의 이력서가 되었으면 하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엘리야는 어떤 이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열심의 사람 (14-)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기 전에 그리고 멸망할 때 또는 포로로 되어 간 이후까지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 활동의 내용이 예레미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어 유다 백성들에게 증거하게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 나라 군대가 쳐들어오거든 절대로 대반항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유다 나라 백성들이 지금까지 망할 짓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쳐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군에 대항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면 항복하고 포로로 잡아가거든 잡혀가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가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로 하여금 유다 왕국을 재건할 때 씨앗을 삼고 그루터기를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더니 예레미야를 향해서 백성들이 얼마나 야단을 하는지 모릅니다. 온갖 욕설과 비난을 가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돌로 치고 또는 죽으라고 물없는 구덩이에 던지고 온갖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비록 보내셨다고 할지라도 예레미야는 나는 더 이상 못하겠다 하여 얼마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랬더니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렘 20:9).
그래서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는 것입니다.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았다”는 뜻은 백명 중에 한명이라도 그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는다면 어떠한 고난과 불행과 핍박을 받더라도 선포해야 되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더니 중심이 불붙는 것 같고 말씀을 선포했더니 선지자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망할 짓을 했을지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동족을 구원하려고 하는 뜨거운 열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예레미야에 대해서 이력서를 한 줄 쓰라고 하면 그는 중심이 뜨거운 사람이라고 쓸 수 있습니다. 즉 민족 구원을 위한 열정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을 보면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제단을 쌓고 보기 좋게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대들었던 바알 선지자들을 전부 처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 왕후가 그냥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브엘세바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누워서 "하나님 이제는 이것으로 끝냅시다. 백성들은 바알 종교로 다 넘어가고 선지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나만 남았는데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물과 고기를 구워 먹도록 하고 힘을 얻은 다음에 호렙산까지 인도를 하셨습니다.
호렙산 동굴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부르셨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방금 읽은 14절의 말씀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이력서 첫째 줄이 열심이 특심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열심은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바알이 참 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데 열심이 남달랐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열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이 없다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열심은 신앙의 생명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만이 승리하고 성공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젊은 두 남녀가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정해진 코스를 돌고 돌면서 버밍엄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 곳에 도착하니 그 곳 주민들이 "당신들이 어디로 다녀서 여기까지 왔오?"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돌아서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버밍엄 주민들이 "그러면 당신들이 지나온 바로 그 길옆에 웨이위크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형무소가 있는데 그 전에는 죄수들을 가두었지만 요즘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니오,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들이 길옆에 있는 것을 못 보았다고 하니 그리로 지나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 길을 지나 왔는데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두 남녀는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서로 서로 이야기하다 보니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위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너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주위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못 보았다고 하는 것은 진심입니다.
너를 사랑하고 너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너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너를 향한 열심이 특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이와 같은 열심이 특심한 성도라고 이력서에 오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사명의 사람 (15-17)
바울 사도는 원래 이름이 사울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못된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기독교라고 하면 잔해했던 사람입니다. 교인들을 보기만 하면 붙잡고 재산을 몰수해 버리고 누구를 죽이겠다고 하면 자기가 책임을 졌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이 더 살려두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인생을 끝내면 그만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항복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제자로 삼으시고 "너를 이방인의 그릇, 즉 이방인의 선교사로 세우노라"고 하시어 사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사건이 있고 난 후에 먼저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3년 동안 기도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삼층천에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에도 주님이 써 주시지를 않고 받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고향땅 길리기아 다소로 내려가서 10여년 동안을 아무 할 일 없이 지냈습니다. 바울의 못된 성질 죽어지고 썩어질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14년 동안을 바울은 그렇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바울의 고약한 성질이 다 죽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안디옥 교회 바나바를 통해서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향한 사도가 되고 세계를 향한 선교사로서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못된 인간을 처리해 버렸으면 간단한데 왜 주님이 살려 두셨습니까? 그가 선교사로서는 가장 적합한 그리고 잘 준비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때 당시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고 하면 로마 제국 판도 안에서는 그를 마구 건드리지 못합니다.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 국적을 가졌다고 하면 아무리 핍박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또 그 당시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지배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은 히브리 문화권에서 산 것이 아닙니다. 길리기아 다소는 유대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헬라 문화에 익숙하고 헬라어에 대해서는 끝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계선교사로서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 두신 까닭은 세계 선교사의 사명을 주어 그 모든 것을 이용해서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사명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명이 있는 사람은 사명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죽음이 여러분들에게 닥쳐오면 내 사명이 끝났다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겁날 것 없습니다. 내 사명이 남아 있으면 천하만민이 죽는다고 해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력서를 쓰라고 하면 첫째로 세계 선교사의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쓸 수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5절에서 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가 죽음의 고비를 넘길 때 하나님께서 힘을 부어 주셨습니다. 힘을 얻어 호렙산에 도착하고 어느 한 동굴에서 머물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하게 들려옵니다. "너는 아람 나라에 가서 하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라"는 사명을 새롭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아람 나라는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이스라엘과는 지금도 원수입니다. 그 나라에 왕이 살아 있는데 남의 나라에 가서 왕을 세우라고 하니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래도 그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아직도 왕이 살아 있는데 예후라고 하는 장군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고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이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세가지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엘리야는 사명을 받고 제일 쉬운 것부터 감당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쉬운 것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의 부하를 시켜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웁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 혹은 세우지 않았다 하는 기록이 없기에 그 사실은 알 재간이 없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사명을 맡겨 주실 때 가장 하기 쉬운 것부터 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어려운 것부터 하려고 하면 '그것은 어려워서 못하겠다'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는 말씀이 많지 않습니까? 내가 힘에 겨운 것, 어려운 것부터 먼저 하려고 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 시작하면 좀 더 어려운 것을 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하여 모두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청년 하나가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고 시험을 치러서 합격을 했습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면 인도의 지리, 인도의 역사, 인도의 풍습을 다 배워서 익혀야 합니다. 그것을 다 끝내 놓고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파송 받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우연히 한국 땅에 영국 선교사 토마스가 상선을 타고 평양 대동까지 올라갔다가 육지에 내려 전도도 제대로 못 해 보고 순교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뜨거워서 "하나님 저 동양에 있는 조선이라는 땅에 저렇게 불쌍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데 선교사를 좀 보내주십시오"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이 달에도 다음달에도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속 애를 태우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마음으로 오기를 "너는 왜 자꾸 남을 보내라고 하느냐? 네가 가면 되지 않느냐? 인도의 선교사는 저마다 가겠다고 하지 않느냐? 그런데 한국 선교사는 자원하는 사람이 없는데 네가 가면 되지 않겠느냐?"
기도하는 중에 깨닫고 한국 선교사라고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때 감리교의 아펜셀라 선교사와 한배를 타고 제물포에 한 날 한 시에 내려왔습니다. 그 젊은 선교사가 언더우드 선교사입니다.
한국의 어머니 교회라고 하는 새문안 교회를 개척해서 세웠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연세대학을 이 분이 세웠습니다. 사명에 충실한 사람에게 성공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직도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이력서에 남겨 놓고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도움의 사람 (18-)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명을 부여받은 엘리사에게 말씀 한마디를 주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바알 종교로 넘어가고 선지자들이 다 죽고 너 혼자만 남았다고 인생을 끝내자고 하는데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고 바알 신에게 꿇어 엎드려 절하지 아니한 칠천명을 남겨 둔 것을 네가 보지 않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40일 전에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어느 신이 참 신이냐고 다투지 않았습니까? 제단을 쌓아 놓고 또 장작을 벌여 놓고 송아지를 잡아 그 위에 놓은 다음에 불을 붙이지 않고 기도만 하면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먼저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그 사람들이 칠천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혹시 바알 신이 참신이 아닌가 싶어서 거기에서 기웃거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의 제단에 불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제단을 쌓아 놓고 다 이리로 오라고 하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제단에 와서 기웃거렸습니다. 그 때 돈을 주면서 바알이 참 신이 아니고 여호와가 참 신이라는 것을 고백하라고 해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불이 내려왔습니다. 그 자리에는 이세벨의 남편 아합 왕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앉아 있지 않았습니까?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여호와가 하나님이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다"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바알은 잡귀신이요, 못 쓸 놈의 귀신일 뿐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입 맞추지 아니한 자가 칠천명이라는 것입니다. 아합 임금 앞에서도 신앙을 정확하게 고백한 칠천명을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칠천명이 누구를 통해서 응답을 받고 신앙을 고백했습니까?
엘리야가 제단을 쌓아 놓고 기도했을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을 보고 큰 은혜를 받고 믿음을 분명히 하고 정확하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칠천명에게 그런 신앙을 갖게 한 것은 엘리야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칠천명에게 믿음에 도움을 준 엘리야입니다.
우리는 남의 믿음에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저 사람이 보기 싫어서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누구가 책임질 것입니까? 그와 반대로 앞집의 개똥이 엄마가 광성교회 집사입니다. 뒷집의 남편이 자기 마누라에게 야단을 합니다. "앞집의 개똥이 엄마를 좀 보세요. 얼마나 훌륭한가? 당신은 밥만 먹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빨리 광성교회에 나가서 등록하시라" 이쯤 되어지면 남의 믿음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까? 엘리야는 이처럼 남의 믿음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엘리야의 이력서를 보면
첫째로 열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서 열심이 특심한 사람이었는데 여러분들의 이력서에도 이 말을 남겨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엘리야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명 중에 쉬운 것부터 감당하여 끝까지 사명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다음에 아무 아무개는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이력서를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도움을 받았다 즉 남에게 믿음에 도움을 준 사람이라는 이력서를 남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