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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4 : 17 - 20 하늘 성전에서 나온 천사 1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8) 충성된 종과 악한 종.
* 마 24: 45-51 –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① 때에 따른 양식
이 세상은 3시대가 있다. 구약시대, 신약시대, 종말시대이다. 우리가 처한 시기가 이 3중에 있다.
종말시대라고 생각한다면 이 대에 필요한 양식을 알아야 한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모두 졸며 잤다고 하였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하였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 예언의 말씀의 다림줄이다.
* 슥 4: 10 -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 척량 줄이다.
예배드리는 자들의 성전 터(마음 밭)
* 슥 2: 1-2 – 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
⒞ 금 갈대로 측량한다.
* 계 21: 15-17 –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 다림줄로 역사한다.
* 암 7: 7-8 – 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8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② 이 양식은 작은 책 두루마리인 요한계시록을 말한다.
* 계 10: 8-11 –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3) 추수의 영적 의미
(1) 씨 뿌리는 비유
* 마 13: 24-30, 36-43 –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렸다.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종들이 와서 말하되, 가만 두어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 마 13: 3-9 –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길 가 밭
돌밭
가시떨기 밭
좋은 땅
* 막 4: 10-20 : 결실하는 자 –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2) 무화과나무의 비유
* 마 21: 18-19 –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 마 24: 32-33 -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막 11: 13-14 : 열매 없는 나무 –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 막 13: 28-29 : 여름이 가까운 때 –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 타작마당의 비유
* 마 3: 12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 눅 3: 17 : 알곡과 쭉정이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4)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 마 21: 33-43 : 열매 맺는 백성 –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5) 달란트 비유
* 마 25: 14-30 –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6) 하나님 나라의 비유
* 막 4: 26-29 : 추수의 때 –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4) 일천육백 스다디온 [ 14 : 20 ]
(1) 여러 견해.
① 상징적인 형벌이다.
핸드릭슨[W. Hendriksen] : 4 X 4, 10 X 10 에서 나온 수이다. 4는 우주와 지구의 수로 이는 악인의 심판이다. 10은 완전수로 악인에 대하여 완전한 심판을 상징한다. [핸드릭슨, 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191]
모리스[C. L. Morris] : 요한의 관심은 실제 거리보다 그 숫자의 의미에 있다. 세상의 수 4의 제곱과 완전수 10의 제곱의 소산이다. 피가 나와서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음은 온 세상에 대한 완전한 심판으로 모든 사악한 자들의 파멸을 나타낸다. [모리스, 틴델 신약주석시리즈 요한계시록, p.225]
② 미래의 역사적 사실이다.
왈부르드[J. F. Walvoord] : 1600 스다디온은 200마일의 거리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200마일 전역이 대학살의 중심이 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세상의 모든 군대가 여기로 모일 것이다. [왈부르드, 요한계시록 해석, p.331]
③ 심판의 참혹함을 상징한다.
래드[G. E. Ladd] : 문자적으로 보면 상상하기 어렵다. 팔레스타인의 전체 길이이기 때문이다. 약 4피트의 높이로 피가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 적대행위를 완전하게 제거하실 것이라는 사상을 보여준다. [래드, 반즈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259]
④ 거룩한 땅의 길이를 나타낸다.
⑤ 로마 교황청이 있는 로마 지역이다.
⑥ 무의미한 것이다.
비더울프[W. E. Biederwolf] : 이것은 학살이 크게 일어날 것을 의미하며 이 수가 사용된 이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연구할 필요도 없다. [비더울프, 성서연구주석 종말과 재림, p.454]
(2) 저자의 견해.
① 문자적인 의미
이스라엘의 남북의 총 길이를 말한다.
② 복음적인 의미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보호를 받는다. 반면에 악인들에게는 살육의 현장이 될 것이다.
③ 예언적인 의미
포도송이 추수는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로 발생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가 받을 완벽하고 철저한 영원한 형벌을 상징한다. 이 형벌의 사건으로 순교자들의 호소가 성취된다.
* 계 6: 10 -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 우리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됨을 알아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 신앙, 속죄 신앙을 가지고 죽는 것은 복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천국에서의 참된 안식이 있고 그 선한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알곡은 천국 곳간에 들어간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추수한 곡식이 곳간에 저장되듯이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성도에게는 복되고 영광스런 천국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하며 오히려 담대히 죽음을 사모해야 한다.
* 히 11: 35-38 –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계 12: 11 -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 고후 5: 8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셋째, 불신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치 않고 섬기지 않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고 살다가 죽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온 세상에 만연한 불경건과 우상 숭배, 미움과 음란과 거짓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들이다.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전쟁을 동반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해야 한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 박 조준 목사 )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에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했는데 그분은 심판날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이심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 시기가 중요한데 그것은 그때가 이르러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교회에 편지하면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사람이 남에게 속아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속아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줄로 생각하는 이가 있다고 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주여 주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진실과 실행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신 말씀 또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원칙입니다. 우리는 먼저 심어야 나중에 거둡니다. 심지 않고 거둘 수는 없습니다. 봄에 심어서 가을에 거둡니다. 그것도 종류대로 거둡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벼를 심으면 벼를 거둡니다. 주님께서도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양대로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그런데 소위 증수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를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둡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두는 시기는 종류에 따라 다릅니다. 가령 보리는 이른 여름에 거둡니다. 그러나 벼는 늦은 가을에야 거둡니다. 과일 나무는 여러 해 후에 거둡니다. 3~4년 후에, 어떤 것은 7~8년 후에 거두게 됩니다. 이 원칙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은 누구나 농부입니다.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여름에 김을 매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농부입니다. 우리 인간의 매일 매일의 생활은 심는 것이고,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 우리의 말하는 것, 우리의 손과 발로 행하는 것 하나 하나가 말하자면 다 심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씨를 뿌리게 되면 거두게 되는 날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을 내 성품, 내 인격에서 거둡니다. 내 가정에서 거둡니다. 내 교회에서 거둡니다. 우리 사회에서 거둡니다. 내가 사업하는 데서 거둡니다. 국민으로서 국가에서 거둡니다.
매일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 말하자면 씨뿌림과 같아서 오늘 심은 것이 내일, 현재 심은 것이 장래에 가서 거두게 됩니다. 젊어서 심은 것을 늙어서 거둡니다. 부모 때에 심은 것을 자손 때에 거둡니다. 이 세상에서 심은 것을 내세에 가서 거둡니다. 이 원칙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서 생각하는 것, 입을 통해서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조심해서 심어야 될 것입니다. 거두는 데도 종류대로 거둡니다. 곡식 가운데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신령한 세계에서 볼 때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뿌리고 거두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체를 좇아 뿌리는 씨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좇아 뿌리는 씨입니다. 육체를 좇아 뿌리는 씨는 썩어질 것으로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정욕으로 심는 사람은 음란과 부패를 거둡니다. 악을 심는 자는 악을 거둡니다. 불의를 심는 자는 불의를 거둡니다. 미움을 심는 자는 미움을 거둡니다. 거짓을 심는 자는 거짓을 거둡니다. 무자비를 심는 자는 무자비를 거둡니다. 탐심과 허영을 심는 자는 그런 것을 거둘 것입니다. 전에 야곱이 자기 아버지를 속여서 형 에서가 받을 장자의 복을 가로챘습니다. 여러 해 후에 그 아들들이 그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아 먹고서는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속였습니다. 자기가 아버지를 속이더니 아들에게 속았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전에 이세벨은 무고한 포도밭 주인 나봇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권력으로 무참하게 빼앗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 후에 자기의 피가 이층에서 던짐을 받아서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조선 500년의 당쟁을 살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작당을 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합니다. 그 사람이 무고히 피를 흘립니다. 몇 해 후에 그들 역시 모함을 받아서 자기의 피를 흘리고 넘어집니다. 전에 어떤 사람은 무고한 자기 아내를 단지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내쫓아 버리고 공부를 많이 한 새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많던 돈, 재산이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몸에는 병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공부 많이 했다고 맞아들였던 그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그 동안 낳은 자식들을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천대하면 자기가 천대를 받습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자기 가슴이 아플 때가 옵니다. 남을 중상하고 모략하면 내가 중상 모략을 당할 때가 옵니다. 그래서 “남 잡이 제 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으로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둡니다. 덕을 심으면 덕을 거둡니다. 자비를 심으면 자비를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둡니다. 친절을 심으면 친절을 거둡니다. 화평을 심어야 화평을 거둡니다.
나치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을 수없이 닥치는 대로 학살할 때였습니다. 어떤 비행장의 한 조종사가 자기 비행기 속에서 무엇을 고치고 있었는데, 어떤 젊은 사람이 상기가 되어서 황급하게 비행기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당신이 살려 주지 않으면 죽겠는데 어서 이 비행기를 띄워서 독일 국경 밖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이 청년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뒤를 지금 비밀 경찰이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 조종사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얼른 비행기를 띄워서 멀리 국경 밖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조종사는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그 사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제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조종사 역시 독일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으로 가서 연합군의 공군으로 종군하면서 전쟁에 가담해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비행기를 타고 출전했다가 큰 사고가 나서 그가 탔던 비행기가 추락을 하면서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뇌를 다쳐서 도무지 의식이 하나도 없고 중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수술을 잘하는 이를 청해서 수술을 하고 두어 주일 후에야 의식을 회복하게 되고 수술을 해 준 의사를 만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그 의사가 바로 여러 해 전에 자기가 독일 비행장에서 건져준 그 유대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덕을 심으면 덕을 거둡니다. 성령을 좇아 심어야 영생을 거둡니다.
또 양(量)에 따라서 거둡니다.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도 이 원리는 변치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사도 바울이 헌금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이로다”했습니다.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씨를 많이 뿌리도록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에 힘써야 합니다. 좋은 생각, 착한 생각, 건설적인 생각, 남을 돕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말도 남을 칭찬하는 말, 싸움을 말리는 말, 아픈 것을 위로하는 말, 아름다운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행동도 좋은 행동, 봉사와 헌신의 행동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착한 것도 적게 심으면 많이 거두고, 나쁜 것도 적게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구약 호세아서 8장 7절에 보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작은 바람으로 심었더니 회오리바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악은 역시 많이 거두게 됩니다. 흥부 놀부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이는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일을 한 흥부는 많은 보화로 보응을 받았습니다. 반면 나쁜 마음을 가지고 나쁜 일을 한 놀부는 악한 것을 많이 거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심는가 항상 조심해서 바로 심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한정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심오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우리 인간이 미리 어떻게 꼭 될 것이라고, 언제 거둘 것이라고 추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의 생전에, 당대에 거둡니다. 그러나 그 후대에 가서, 그러니까 그 자손 대에 가서 거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4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땅의 곡식이 다 익어서 마지막 거둘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둡니다. 크고 흰 보좌 앞에 무론 대소하고 나아가서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젊을 때는 장년기와 노년기를 위해서 심는 때입니다. 바로 심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좋은 씨를 뿌리십니까?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것은 다음 우리 자손의 세대를 위해서 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떻게 심고 있습니까? 성령을 좇아 심어야 합니다. 가령 기도하는 것도 말하자면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의 보좌 앞의 제단의 향기와 같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 기도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추수를 거두게 됩니다.
제가 한번은 사업을 하시는 어느 집사님이 공장을 짓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 원해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제가 이 세상에서도 여러 가지로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제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제 어머님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셨는지 모르는데 아마 그 어머님의 기도가 오늘 저에게 열매를 맺는 것 같습니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기도를 심으면 축복의 열매를 거둡니다. 우리의 감사도 심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은 감사를 드릴 때 많은 감사를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겐 전깃불을 주시고, 전깃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겐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겐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겐 촛불도 전깃불도 달빛도 햇빛도 필요 없는 하늘 나라의 빛을 주신다. 그렇습니다. 감사를 심으면 더 큰 감사를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도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보화를 많이 쌓아 둘 때 그 보화로써 축복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봉사와 선행은 성령으로 심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자입니다. 이 종자를 뿌리는 것이 곧 전도 사업입니다. 많이 뿌리면 많은 수확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으로 목회한 곳이 영등포에 있는 영은교회입니다. 그 지역에는 그 당시 방직공장, 견직 공장, 모방 공장들이 있었는데, 그 공장의 간부들이 그 교회를 출석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저는 네 공장에서 예배를 인도해야 했으므로 매주일 한 번씩 공장 예배를 인도한 셈입니다. 그런데 거의 의무적으로 공장 직원들이 예배를 드리게 되니까 그저 마지못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분도 눈에 띄곤 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사모해서 교회에 찾아오신 분들에게는 말씀을 전하기에도 힘이 나지만, 의무적으로 나와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이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성실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가는 곳마다 그때 뿌린 씨가 열매를 맺는 것을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환자 심방을 하러 화곡동에 갔는데 병중에 있는 부인이 간증하는 것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30여 년 전 회사에 다닐 때 제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때에 한 설교 제목과 내용까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를 믿게 되고 우리 교회에 다니게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며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청교도들이 처음 영국에서 미국 대륙으로 건너왔을 때 그때는 고층 건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미국에 자동차 한 대도 없었습니다. 황폐한 대륙에 건너와 추운 겨울을 지냈습니다. 그 겨울이 지나는 동안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얼어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와 감사와 봉사와 전도로 계속해서 심었습니다. 오늘날 그들의 자손들이 그 추수를 하면서 복을 받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 아십니다. 한 세대가 바로 심어야 다음 세대가 바로 삽니다.
우리는 무슨 씨를 뿌리고 있습니까? 육체의 씨를 뿌렸습니까? 성령의 씨를 뿌렸습니까? 성령의 씨를 뿌려야 우리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성령의 씨를 뿌리려면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먼저 내가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온전히 내 구주로 삼고 거듭나는 축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내가 온전히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때 우리가 성령을 따라 아름다운 씨를 뿌리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과거입니다. 우리에게는 과거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과거의 생활이 잘못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생활을 이 시간에 청산하고 온전히 새사람이 되어서 미래에는 성령을 좇아 사는 아름다운 씨를 뿌려야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했습니다. 곡식을 거둘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했습니다. 인간의 생활이란 확실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와 같이 한 자리에 모여 있지만 내일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내년에 될 일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한 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죽는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분명치 않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 심판은 온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여러 가지 교훈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 사도들이 분명한 글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낼 때가 있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곡식을 거두면 타작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서는 으레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을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말하자면 심판입니다. 알곡은 창고에 넣고 쭉정이는 모아서 불살라 버린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지옥불에 던진다는 말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계속 이삭에 같이 붙어 있습니다. 이삭에 붙어 있는 동안 비슷하게는 알 수 있지만 자세히 분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갈라놓을 때가 옵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할 날짜를 정하여 두셨다고 선언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각각 선악 간에 그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로마서 2장 16절에 보면 “우리의 은밀한 죄가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날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이후에 반드시 내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선악 간에 보응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우리의 이성도 사후의 심판을 지적해 줍니다. 이치로 생각해 보아도 꼭 그래야 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노력은 하지만 공평한 심판이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다면 나는 어디에 속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생각, 말, 행동 하나 하나를 나중에 책임져야 합니다.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미국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인데 한 번은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 저명 인사 20여명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였습니다.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친구가 “웹스터 씨,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웹스터가 조금 있다가 얼굴을 들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예, 나에게 제일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 내가 하늘 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 내 마음이 가장 엄숙해집니다.” 내가 하는 생각, 하는 말, 하는 행동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심고 좋은 것을 거두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