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은
조선 고종 32년(1895)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인을 물리치다 순사한 홍계훈, 이경직 및 여러 신하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碑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이다.
앞면에는 ‘장충단(奬忠檀)’이라는 비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글씨이다.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광무 4년(1900) 고종의 명에 의해
장충단을 지을 때 비도 함께 세워 놓았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이 비를 뽑아 버렸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시설들을 마구 설치하여
‘장충단
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안개 낀 장충단공원/배호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달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지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원래 이곳 장충단 공원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하여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곳이기도
하지만
김두한이 일본
하야시 패들과 1:40으로 싸웠다고 하는 그 장소이기도 하고,
오래 전 대통령 선거 때 유세 연설장소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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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장충단공원 건너 편 리모델 직전의 장충체육관
내년 1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예정입니다.
세월 따라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아련한 추억 속에 남아있는 장충단공원의
모습입니다.
가을의 정취와 잊고 있던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많이 변해버렸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장충단공원의 몇몇 장면을 담아봅니다.

장충단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한옥으로 되어있는
다담에뜰이라는 밥과 차를 파는 고풍스러운 음식점이
있습니다.





장충단공원 입구에 놓인 벤치에 앉아있는 노 부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요

이준열사
동상
64년에는 이준 열사의 동상이 1968년에는 사명대사의 동상이
건립되었습니다.





수표교
장충단 공원에는 아주 오래되고 멋진 돌다리가
있습니다.
그것도 조선시대엔 꽤 유명했던 다리였습니다.
바로 청계천에 놓여 있었던 수표교라는 돌다리입니다.
이 수표교는 조선 세종 때 지어진 돌다리로,
지난 1958년 청계천
복개 당시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졌지만
청계천이 복원된 지 한참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이 다리는 장충단공원에 외롭게(?) 서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청계천에선 각종 문화행사가 많이 펼쳐졌는데
특히 정월 대보름에는 수표교 주변에선
장안의 아이들이 몰려나와 연을 날리고 쥐불놀이와 돌싸움을 즐겼다고 합니다.



수표교 밑에서 한가히 노니는 오리 떼들







장충정에서 한가한 시간




장충단공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동국대학교




첫댓글 배호의 장충단 공원 노래를 부르면서 수표교를 생각치 못했슫니다 감사함니다
제가 올사모의 특별회원이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장충단은 한국의 근세와 근대 현대를 잇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즈넉한 풍경이 아름담고 정겹기 그지 없습니다. 이덕선씨의 좋은 자료를 많이 올려주신 공로를 인정하여 특별회원이란 최상급의 등급을 올려드렸습니다. 올사모 전회원의 이름으로 축하드립니다. 계속 좋은 내용을 올려주시기 앙망합니다.
축하합니다
특별회원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71년도 대선에서 김대중후보가 100만 청중을 모하놓고 사대공약으로 포효하던것, 그 공약중에는 68년도 김신조사건후 급조한 예비군을 해산하고 학생들의 군사훈련을 폐지하며 사대국 감시하에 평화를 유지하며 남북 교류를 한다는 등이였습니다. 여러분 1월 1일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햇습니다. 박정희는 한번만더 나를 뽑아주면 다시는 더 부탁하재ㅣ 않겠씁니다. 하고 간절히 호소했지요. 근소한 차로 선출된 박정히는 4년후에 재 집권은 불가능합을 인식하고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7.4.공동성명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공동 선언이 발표되자 국내는 물론 전세계가 놀랐습니다.
7.4.공동선언은 '외세를 배격하고'를 시작으로 거의 김일성이 불러주는대로 적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하여 세부사항을 조율하도록 하여 이 남북조절위원회를 서너차례 여는 동안 박정희는 김기춘 당시검사(현 비서실장)등으로 하여금 유신헌법을 기초하게 하여 작업이 끝나자 유신을 선언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대통령은 직선제를 간선제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 장충체육관에서 선출하고,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지명하는 등의 유신헌법을 국민투투표에 붙여 무려 91.5%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 시켜 유신독재의 권력을 틀어쥐게 된 것이란 것이 본인의 생각입니다. 그래서장충단공원하면
김대중후보가 100만 군중 앞에서 표효하던 신문 기사(사진)가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