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수복한 악비는 금나라에 대항한 남송의 명장이다. 악비는 상주 탕음(湯陰, 하남성 탕음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으며 특히 병서를 좋아했다. 또한 힘이 유달리 강해 십대 때 이미 3백 근의 활을 사용했다. 무예가 출중한 주동(周同)에게 활쏘기를 배웠으며 백발백중의 명궁수가 되었다.
악비
악비 좌상 절강성 항주시에 있는 악왕묘(岳王廟)에 있다.
이후 악비는 군대에 들어갔으며, 금나라군이 남하했을 때는 동경에서 군관을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기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황하 기슭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금나라군이 눈앞에 나타났다. 얼핏 보아도 적군의 수가 적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악비는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다. “당황하지 마라. 적들은 우리보다 많지만 우리 병력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쓰면 이길 수 있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돌진해 적장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이에 고무된 병사들도 그를 따라 용맹하게 돌격했고, 적들은 숱한 사상자만 내고 황급히 도망쳤다. 이 일로 인해 악비의 용맹이 널리 알려졌으며, 몇 년 후에는 종택의 수하 장군이 되었다. 악비도 종택과 마찬가지로 금나라의 침략에 대항하는 일을 자신의 직책으로 여겼다. 종택이 죽은 후에는 건강 부근에서 금나라군과 싸웠으며, 올출이 북으로 퇴각할 때는 한세충과 함께 금나라군을 여러 번 크게 무찔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금나라군을 대패시키는 큰 공을 세워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절도사가 되었고, 그 이름을 당시의 명장인 한세충, 유광세(劉光世), 장준(張俊) 등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그는 천고(千古)에 전해질 사(詞) 「만강홍(滿江紅)」을 써서 금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웅대한 기상을 표현했다. 악비는 규율이 엄격했는데, 한번은 병사 하나가 백성의 삼 껍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나뭇단을 묶는 것을 보고 그 병사를 군법에 의해 처단했다. 악비의 군대는 행군 도중 마을을 지날 때도 백성의 집에 들어 숙영을 하지 않고 길가에서 노숙했다. 백성들이 집으로 끌다시피 청해도 누구 하나 집에 들어가는 병사가 없었다. ‘얼어 죽더라도 백성의 집 재목을 뜯어 불을 피우지 않으며, 굶어 죽더라도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악비군의 규율이었다.
악비는 싸우기 전에 항상 장수들을 모아놓고 작전을 의논하곤 했으며 그런 다음에야 결단을 내리고 싸움을 시작했다. 때문에 싸움에서 매번 이겼으며, 금나라군은 모두들 악비 군대를 무서워했다. 그들 사이에서 ‘태산을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악비의 군사를 무너뜨리기는 힘들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1140년 10월, 금나라는 또다시 화의 협정을 어기고 전국의 정예부대를 총동원하여 송나라를 네 갈래로 공격해 왔다. 총대장은 올출이었다.
악비는 부장 왕귀(王貴), 우고(牛皐), 양재흥(楊再興)으로 하여금 각자 군사들을 통솔하여 적군의 남진을 막게 하는 한편, 하북 의병 대장 양흥(梁興)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동과 하북의 의병들로 하여금 적군의 후방을 기습하게 했다. 그리고 악비는 언성(郾城)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며칠 후에 세 부장이 이끄는 군대들은 모두 승전보를 올리고 차례로 영창(潁昌, 하남성 허창시 동쪽), 진주(陳州, 하남성 회양시), 정주(鄭州)를 수복했다. 승승장구로 전진하던 악비의 군대는 동경에서 45리쯤 떨어진 주선진(朱仙鎭)까지 밀고 들어갔다. 악비의 군대가 주선진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한 하북의 의병들은 모두들 기뻐하며 황하를 건너 악비의 군대에 합류했다. 백성들은 수레로 식량들을 운반해 왔으며, 어떤 사람은 향로를 이고 와 춤을 추며 악비의 군대를 환영했다.
승리를 눈앞에 둔 악비
악비가 반격한 중원 전투 약도
는 흥분한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온힘을 다해 적들을 쳐부숩시다. 황룡부(黃龍府)에 이르면 승전을 경축하는 술잔을 듭시다.”
성곽의 방어 시설을 파괴하는 당차(撞車) [남송시대]
철질려(鐵蒺藜) [금나라]
배 모양 벼루 이 배 모양의 청자 벼루는 용천요(龍泉窯)에서 생산된 특색 있는 필기 도구이다. 선창과 선미가 있으며, 선창 안에는 소곤거리는 남녀가 있다. 어촌 마을의 정서와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