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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4장 25-31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유월절 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앞두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발을 씻기신 대상 모두가 끝까지 사랑하시는 대상으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자 중 가룟 유다의 경우는 이름만 제자일 뿐 사실은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룟 유다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4장의 시점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처럼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이런 내용은 직접적으로 예정론에 대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예정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너희’와 ‘세상’이라는 대조를 통해 나타내고 계시는데, 예를 들어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19절도 보시면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라고도 말씀합니다. 즉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누군가? 제자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참된 제자요, 제자로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요, 참된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된 택자가 그 대상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면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 수 있도록 하셨을 때 가룟 유다만 제외된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다른 열 한명의 제자들처럼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도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성령의 내적 역사가 그에게도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내적 역사는 오직 택자 외에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에게 나타난 역사는 무엇인가? 성령의 외적 충동으로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참된 믿음과 상관없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그런 역사로만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가룟 유다가 아닌 또 다른 유다의 질문, 왜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시는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23절과 2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언뜻 보면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뭔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십니까? 왜 우리에게만 나타내 보이십니까? 그러면 이런 저런 이유 때문이라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열매로 그들을 알라는 식으로 말씀합니다. 즉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내 말에 순종하는 자, 그가 나를 사랑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더욱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안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인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이라는 말로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있지 않고는 결코 사람이 먼저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택자가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나타난 자들, 그리고 그 사랑은 택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그들만이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 있게 됩니다.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기반은 어디에 두고 있느냐? 예정론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아닌 또 다른 유다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엉뚱한 대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에게는 나타내고 세상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너희가 택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런 전제 아래 너희의 마땅한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면서 너희가 세상에서 어떤 자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리십니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을 제자들이 다 이해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내용을 알게 된다는 것으로 저들을 위로하십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잠시 언급한 25절과 26절로부터 다시 보겠는데,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자께서 성부에게 구하여 성부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으로 표현합니다. 성부가 성령을 보내시되 성자의 이름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으로 넘어가면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분도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기서는 성자 예수님께서 아버지인 성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한 분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다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때 삼위는 세 분이 계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한 분 안에 세 위격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부가 하나님인 것처럼 성자도 하나님이요,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부도 하나님, 성자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이 무한 영원 불변하신 분으로 계시다고 할 때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성령도 그런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세 무한하신 분, 세 영원하신 분, 세 불변하신 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한 무한하신 분, 한 영원하신 분, 한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속성에 있어 동등하신 세 위격의 구별에 대해 말할 때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말합니다. 성부가 성자를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성에 있어 동등하시기 때문에 나셨다는 말이 우리가 표현하는 것처럼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성자도 성부와 마찬가지로 무한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성부와의 관계가 나셨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성부가 보내시는 분으로, 또한 성자도 보내시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성부만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성자도 성부로부터 보내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역순을 성경이 말하는가?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부를 전 신성의 근원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신 분으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분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틀은 각 위격의 사역을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것처럼 성자 예수님은 그의 모든 사역이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4장 13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10절도 보시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이르시는 모든 말씀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내놓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계시는가? 전 신성의 근원이신 성부로부터 성자가 나셨다고 할 때 성자는 성부의 말만 함으로서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분으로 계셨다면, 성령 하나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그분의 사역은 성자와 무관할 수 없고, 성자만이 아니라 성부와도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때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은 성부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부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성부의 말씀에 성자께서 가감하는 어떤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부의 말씀과 성자의 말씀이 일치하는 것이고, 나아가 성자의 가르침과 성령의 가르침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칼빈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결코 새로운 계시의 건설자가 아니십니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할 때 성부와 성자와 상관없는 다른 뜻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은 성부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성부의 가르침을 성자께서 가르치는 것이고, 성자의 가르침을 성령께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신약 성경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계시가 아닙니다. 성부의 말씀이 성자의 입을 통해 증거 되었다면 증거 된 그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하게 하시는 것뿐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다른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복음서의 경우 예수님과 관계되지만 사도행전 이후 요한계시록까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과 무관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장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여기서는 하나님이 주체로 있는데,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면 신약에서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지만 신약 전체가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구약과 신약은 결코 다른 말씀이 아닙니다. 일치되는 가르침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 일치되는 가르침을 성령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말할 때 기록된 성경의 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계시를 말하는 모든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성령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성자 하나님, 성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칼빈은 모하멧과 교황은 성경에는 완전한 교의가 담겨 있지 않으며, 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 후에 성령에 의해서 계시되었다는 원칙을 고수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칼빈 당시 재세례파들과 자유사상가들 역시 동일한 입장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주의 혹은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어떤 체험 쪽으로 연결시킵니다. 말씀과 관련해서도 무슨 환상이나 실제적인 어떤 음성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성경과 무관한 내용이기에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과 무관하다는 것은 성령과도 무관하다는 것이고, 성령과 무관하다는 것은 성자와도,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도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아니란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없는 성령의 가르침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과 말씀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게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말씀과 상관없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약속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평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이 있기를 구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인사말과 같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또 헤어질 때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인사법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거저 인사말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평안하기를 바란다는 정도가 아니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입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의 평안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유대인들이 서로 평안하기를 바랄 때 그들의 평안은 사실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평안하기를 바랄 때 그들이 바라는 모든 평안은 세상적인 시각에서의 평안을 바랄 뿐입니다. 성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지 않는 삶,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평안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남편 사업이 잘 되고, 자녀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 등 이런 것이 세상이 말하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고자 하시는 평안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그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무엇인가? 매튜 풀 주석을 참고 하여 말씀드리면 이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즉 복음 안에서 계시되고 주님의 피로 사신 평안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의 날까지 인치시고 그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에 평안을 끼치시는 것으로, 로마서 5장의 말씀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 되거나 화목을 이루게 하여서 양심이 쉼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안은 허황된 소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효력이 있습니다. 비록 평안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면 승천하여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평안은 늘 제자들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도망갔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부인할 때 저주가지 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도행전 5장 41절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공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으로는 평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주의 이름 때문에 능욕을 받는데 그것이 어떻게 평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평안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고자 하시는 평안은 세상이 말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비록 외적으로는 평안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께서 우리 마음에 새기신 그 평안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평안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돌에 맞으면서도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
이런 평안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오늘 본문 26절과 27절의 내용을 함께 이해하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되,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고 하면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는 이 평안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평안이 그들 가운데 없었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고백을 했다는 것은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이요,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받아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평안의 효력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평안이 우리 삶 가운데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지만, 실상 성도의 삶을 돌아보면 평안이 아니라 늘 불안합니다. 불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먹고 마실 것들 달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는데 그 평안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기보다는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단회적이지만,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는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는 무엇을 도구로 사용하시느냐?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안이 아니라, 세상의 평안을 구하는가? 단순합니다. 말씀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과 씨름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힘이 없으면 어떤 물리적인 어떤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1장이 그 말씀 아닙니까!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말씀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갑니다. 말을 의지하고, 병거의 많음,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평안이 어떻게 효력을 발휘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으로 살려고 발버둥 치셔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할 때(신8:3) 소위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으로 사는 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외적으로는 평안처럼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 그 말씀의 주체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인 줄 알고 늘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요셉의 형통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내용입니다. 그가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래서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면서 종으로 살았지만, 그때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때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창39:2). 뿐만 아니라 억울한 누명으로 종에서 죄수가 되었을 때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창39:23). 물론 내용 자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실 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뭔가 잘 되는 일로 나타나고 있지만, 적어도 세상이 말하는 그런 평안이 형통으로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환경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에서 종으로, 종에서 죄인으로 나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상 어떤 환경 속에서도 형통함이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밑바닥인 인생 속에서도 뭔가 빛을 볼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빛을 볼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떠날지라도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보낼 성령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할 뿐만 아니라, 그가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시작부터 하신 말씀인데,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로 있다면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요, 오늘 본문은 여기에 더하여 무엇까지 말씀하시는가?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시는 성령 하나님이 너희 안에 계시고, 그 성령은 너희에게 말씀으로 역사하신다고 알리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평안이 너희 안에 있기 때문에 결코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8절을 보시면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떠나게 되지만 때가 되면 올 것이고, 때가 되기 전까지 너희를 떠나 아버지께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은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근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꾸 떠난다고 하시니까 뭔가 모를 동요가 지금 제자들에게는 있는 겁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다는 마음이요,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점과 흠이 없는가?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랑에는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평안이 섞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섞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말하는 것이 근심입니다. 자신들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기뻐할 일이라고 하시는 것은 그 일이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28절에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인성을 따라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부가 하나님이요, 성자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 동등하신 하나님으로서는 누가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신성으로는 동등하시지만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작습니다. 또한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 계시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도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인성을 취하셨다는 점을 반영한 것인데, 인성을 취하셔야지 만 작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른 질서적인 차원에서도 예수님은 스스로 아버지보다 작은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신성 자체로는 동등하시지만 질서적인 차원에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하였으리라고 할 때 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성자의 모든 목적은 성부를 높이고 성부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로 가시는 이유는 너희를 위한 일로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완성을 위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목적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성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은 결국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일과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주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있습니다. 당연히 성부와 성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일하심은 우리를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일을 통해 결국에는 성부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성자께서,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께서 일하시되 그 일이 택한 백성이요 교회를 위한 일로 있다면, 주의 몸 된 교회의 모든 목적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성부의 영광이 성자의 영광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자의 영광은 성령의 영광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은 결국 교회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성자께서 성부에게 영광을 돌릴 때 그 영광은 성자의 영광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우리의 영광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택한 백성 모두를 영광스럽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것처럼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이 말씀에 근거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이 고난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삶을 어떻게 평안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고난은 영광을 위한 고난이요, 그런 고난 속에서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하기에 고난이 있다는 것으로 근심할 수밖에 없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는데, 내가 주는 나의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같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무엇보다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도록 하여 그 말씀을 붙들고 살도록 만들겠다고 알리십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위로는 주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요, 그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를 세우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로 오면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지금 요한복음 14장을 통해 말씀하신 모든 내용은 약속의 형태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25절에서처럼 지금은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28절의 말씀처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그 일은 일어난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너희에게 말한 것이 일어날 때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란 것입니다. 말씀을 저들 마음에 심으시는 이유도 결국 저희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믿음을 주시기 위해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0절을 보시면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계속해서 요한복음 15장, 16장의 말씀을 하시지만 3년 동안 가르쳐 오던 것처럼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특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게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세상 임금은 국가 위정자란 의미가 아니라 요한복음 12장 31절을 설명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의미합니다(엡2:2). 그가 세상의 임금으로 와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입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던 것도 세상의 임금이라 일컫는 사탄입니다(요13:2).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세상의 임금이라 일컫는 사탄이 오고 있다는 것이고,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임금이 온다고 해서 그가 내게 관계할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사탄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어떤 빌미를 찾아낼지라도 사탄과 관계된 어떤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31절입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성자께서 성부를 사랑하신다는 것,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부의 명령대로 행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세상이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성자께서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셨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인성을 취하신 성자께서 친히 죽으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사탄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사탄은 가룟 유다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일하고, 사탄도 일하고,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도 일합니다. 그러나 사탄과 가룟 유다의 목적은 악하고 악한 방식을 취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악한 자들을 사용하시는 거기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입니다.
그 모든 일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한다는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누구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을 얻느냐? 택한 백성이요,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이요, 실제로 때가 되어 믿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에 내놓으시고자 하시는 것이고, 죽음 이후 부활, 승천하심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그들이 있도록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그 영광은 결국 교회요 성도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누구에게 모든 시각을 두고 계시는가? 모든 만물을 만드셨기에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보시지만, 그 가운데 택한 백성, 주의 몸 된 교회만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지금도 일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우리의 죄와 악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와 악함은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선을 이루시되 궁극적으로 완성에 이르도록, 영광에 이르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