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광해군의 폭정기에 이조 참판 정공(鄭公) 휘 협(協)이 먼저 패륜의 기미를 알고 은퇴를 한 적이 있다. 그 아들 휘 세미(世美)도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당시의 사람들과 의론이 맞지 않아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으니, 광해군 4년(1612) 때의 일이다. 이 때문에 세상을 마칠 때까지 불우하게 지냈다. 하지만 벼슬은 낮았어도 마음만은 편하게 지냈으니, 군자가 운명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도라 하겠다. 공의 증손 화(璍)가 행장(行狀)을 간략하게 지어서 나에게 명(銘)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나는 공의 부인에게 귀손(歸孫)이 되므로 도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의 본관은 동래(東萊)요,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와(東窩)이다. 시조는 고려 시대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목(穆)이다. 조선에 들어와 예조 판서 가종(可宗)이 있으며, 대대로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5대를 내려와 우의정 휘 언신(彦信)에 이르렀으며, 부친 참판공은 바로 의정공의 맏아들이다. 평양 조씨(平壤趙氏) 직장 순명(順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만력 계미년(1583, 선조16) 8월 1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풍모가 깨끗하고 지조가 청렴하여 사람들로부터 중망을 받았다. 병오년(1606)에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봄에 괴원(槐院)에 선발되어 권지 정자(權知正字)가 되었으며, 겨울에 한원(翰院)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 또 이듬해 가을에 홍문관정자 겸 춘방설서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참하관(參下官)으로서는 극선(極選)에 해당된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저작과 박사로 승진되었다가 마침내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이 시기에 은계도 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에 들어와서는 벼슬이 기랑(騎郞)이나 판교(判校)에 지나지 않았고, 밖으로는 서윤(庶尹)이나 경력(經歷)에 지나지 않았다. 지방 고을들을 사양하지 않은 것은 부모님의 봉양을 위해 마지못해 한 것이었다.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황연도 주선정리 어사(黃延道舟船整理御史)에 제수되어 일 처리를 매우 잘 하였다. 그 공로로 정3품 통정대부에 특별히 가자(加資)되고 장연 도호부사(長淵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624, 인조2) 겨울 10월 20일에 임소에서 별세하였다. 묘소는 장단부(長湍府) 읍치 서쪽 묵음동(墨音洞) 유향(酉向)의 언덕에 있다. 그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것으로 인하여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규례에 따라 겸직도 추증되었다.
공은 어려서 종형인 판서 휘 세규(世規)와 함께 연봉(蓮峯) 이기설(李基卨)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효성과 우애를 하늘로부터 타고났으며, 백성을 다스릴 때 청렴하여 평양에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성품이 악을 미워하였다.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였을 때의 일이다. 공이 하루는 술에 취하여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문 앞을 지나다 자신의 노복에게 이 동네의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다. 노복이 사실대로 대답을 하자 “네가 어찌 감히 사대부를 모시고 적신(賊臣)의 집 앞길을 지나가게 한단 말이냐.” 하고 큰소리로 꾸짖고는 곧장 수레를 돌렸다. 암울한 그 시기에 지방으로 쫓겨나는 정도에 그쳤으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부인 여흥 이씨(驪興李氏)는 바로 나의 증조부 찬성 휘 상의(尙毅)의 따님이다. 병술년(1586, 선조19) 3월 25일에 태어나 공보다 12년 뒤인 을해년(1635, 인조13) 10월 24일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공과 합장하였다. 규방에서의 범절이 훌륭하여 정씨 가문에 아직도 기록으로 보관하여 후세에 전한다고 한다. 공의 수명이 중년(中年)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나 자식들이 창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하늘의 보답이 그 자신에게 내리지 않고 후손에게 내린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큰아들 위(偉)와 막내아들 이(儞)는 요절하였고, 둘째 유(攸)와 셋째 수(脩)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둘째는 좌승지를 지냈고 셋째는 정언을 지냈다. 두 딸은 응교 윤계(尹棨)와 정계세(鄭繼世)에게 시집갔다.
큰아들은 양자 운상(雲祥)을 두었고 딸은 남득로(南得老)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은 필상(弼祥), 운상(雲祥), 일상(日祥) 등 아들 셋을 두었는데, 필상은 군수를 지냈고 운상은 양자로 나갔다. 또 서출의 아들로 길상(吉祥), 취상(就祥), 응상(應祥) 등 셋을 두었는데, 취상은 찰방을 지냈다.
셋째 아들은 아들 둘에 딸 둘을 두었다. 아들은 내상(來祥)과 지상(至祥)으로 내상은 과거에 급제하여 부윤을 지냈고, 지상은 현감을 지냈으며, 두 딸은 영의정 남구만(南九萬)과 정랑 이정만(李庭萬)에게 시집갔다.
막내아들은 딸 둘을 두었는데, 현감 이우익(李宇益)과 조원현(趙元鉉)에게 시집갔다. 또 서출의 아들로 만상(晩祥)이 있다.
사위 윤계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현감 윤이명(尹以明)이다.
정계세는 양자 정하천(鄭河千)을 두었다.
손자 운상은 양자 규(珪)를 두었다. 필상은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원(瑗)이고 딸은 참봉 이현량(李玄亮)에게 시집갔다. 일상은 아들 하나 규(珪)를 두었는데 양자로 나갔고, 딸 둘을 두었는데 오상백(吳尙白)과 송이(宋異)에게 시집갔으며, 또 서출의 아들 황(璜)을 두었다. 내상은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탁(琢), 욱(頊), 섭(𤫉)으로 욱은 생원시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딸은 이제후(李齊厚)에게 시집갔다. 지상은 아들 하나에 딸 셋을 두었는데 아들은 화(璍)이고, 세 딸은 직장 한처상(韓處相), 생원 이광세(李光世), 송취정(宋聚井)에게 시집갔다.
손녀사위 남득로는 아들 남용서(南龍瑞)를 두었고, 외손자 윤이명(尹以明)은 양자로 도정(都正) 윤홍(尹泓)을 두었고, 손녀사위 남구만은 아들로 징사(徵士) 남학명(南鶴鳴)을 두었고, 이정만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생원 이인두(李寅斗)와 진사 이인규(李寅奎)이다. 이우익은 아들 이구서(李九敍)를 두었고, 조원현은 아들로 부사 조태겸(趙泰謙)을 두었고, 외손자 정하천(鄭河千)은 아들 모(某)를 두었다.
서출 손자 길상은 호(琥), 박(珀), 완(琬) 등 아들 셋을 두었고, 취상은 인(璘), 기(琦), 빈(玭) 등 아들 셋을 두었는데 인은 진사이고 빈은 생원이다. 응상은 아들 날(㻋)을 두었고, 만상은 아들 기(璣)를 두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강한 쇠는 휘어서 가락지 만들 수 없고 / 剛金不可使繞指
단단한 돌은 꿰매어 합칠 수 없듯이 / 介石不可使合縫
올빼미는 올빼미와 무리 지어 다닐 뿐 / 梟方鴟羣
난새와는 본성부터 다르다네 / 鸞性不同
가난하게 살면서 낮은 벼슬 마다 않으니 / 居貧居卑
그게 바로 공의 성품일세 / 乃所以爲公
[주-D001] 귀손(歸孫) : 친정 조카의 아들을 이른다.[주-D002] 병오년에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 정세미(鄭世美)는 1606년(선조39)에 실시한 증광시(增廣試)에 진사 3등 65위로 입격하였다. 《司馬榜目》[주-D003] 문과에 급제하였다 : 정세미는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실시한 별시(別試)에 병과 5위로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주-D004] 이기설(李基卨) : 1556~162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이며,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서울 삼청동의 백련봉(白蓮峯) 아래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학문에 전심하여 경사, 천문, 지리, 율학, 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하였다. 문집으로 《연봉집(蓮峯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