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63)-동양인은 이웃사촌. 이제는 제품을 포장해서 운송하고 항공편으로 발송할때까지 틈새시간을 이용해 파리를 투어 할 참이었다. 제품이 포장되어 운송되는데 2-3일 갭이 생겼다. 그 당시 한국 여건으로는 평생 다시 한번 올 수 있을지 모르는 파리라서 ‘파리투어 7일’이라는 파리가이드 북을 영어판과 일어판을 샀다. 영어보다 길찾기는 일어가 편하나 관광유적지의 명칭과 설명은 영어로 볼 생각이었다. 한국사람이 동경을 수없이 다니고 동경이라고 부르지만 전세계인은 도오교라고 하지 동경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원어로 관광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날 아침부터 열심히 발 품을 팔아 파리시내를 다녔다. 개선문에서 시작해서 책자를 따라 앵발리드(Invalides) 돔 사원, 병기창, 알렉산드로(Alexander) 3세 브리지, 에펠타워, 콩코오드(Concord) 광장, 오페라하우스와 루우불(Luvre) 박물관까지 섭렵했다. 그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콩코오드 광장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오벨리스크(Obelisk)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 세워진 것을 가져온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오벨리스크라고 자랑하고 있으나 강대국의 제국주의 표상이기도 했다. 또 하나는 루이 15세의 청동 기마상이 세워져 있는데 시민혁명에 의해 루이 16세와 황후인 마리 앙뚜아네뜨(Marie Antoinette)가 이곳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광장에는 오벨리스크 탑 양측으로 분수가 있으나 하나는 강을 상징하고 또 다른 하나는 바다를 상징한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제하권과 제해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서 각 분수대에 새겨진 조각이 다르고 뜻이 있다고 했다. 발 품을 한참 팔고 나니 배도 고파 오페라하우스 부근에 있는 ‘르 서울’ 한식당에서 두 달 만에 한식도 푸짐하게 먹었다. ‘르 서울’ 강사장도 만나 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일을 하길래 그렇게 오래 파리에 체류하느냐는 등 내 이름과 비슷하다며 누구를 아느냐고 물었다 오래동안 뵙지는 못했지만 바로 10촌형이었다. 그 다음날도 제품의 포장상태를 확인하고 ‘르 서울’ 한국 식당에서 들은 대로 발 품 대신 전차표 쿠폰을 사서 노트로담 대성당과 영화에 나와 유명한 뽕 네프 다리를 거닐었다. 프랑스에서는 전차승객들은 타자 마자 전차표를 땅바닥에 버렸다. 전차표를 탈 때 개찰만 하고 내릴 때는 그냥 나가게 되어있어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쉽게 버리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전차표를 줍기 시작했다. 조금있더니 지하철에서도 검표를 하고 다녔다. 버리지 않고 갖고 있은 것이 다행이었다. 내친김에 몽마르트(Montmartre) 언덕의 샤크레쾨르(Sacred Heart Cathedral) 성당까지 발 품을 팔았다. 몽마르트 언덕엔 길거리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려 주고 있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160프랑에서 4-500프랑까지였다. 모두들 의자를 내어주고 앉으라고 야단이었다. 파리에서 초상화 하나 그려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가격이 중간쯤 되는 의자에 앉았는데 조금 있더니 웬 동양인이 팔 소개를 끌어당겼다. 돌아보니 그는 ‘니혼진데쇼우(일본인이지요)’하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리에 일어섰다. 그는 ‘가사바루나(바가지를 쓸 거야)’라고 했다. 그는 자리를 옮겨서 일본어로 길거리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다가 중간에 브레이크 타임이라며 콜라 한잔 주면서 콜라 값은 물론 시간을 끌어서 그 시간만큼 바가지를 씌운다는 것이다. 그럼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냐 물었더니 자기도 화가인데 유학 와서 김밥장사를 하며 공부하고 있다고 해서 일본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가끔 도와준 준다는 것이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같은 동양 사람이라며 동양인들이 많이 당하는 걸 볼 때 마다 안타깝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이웃 사촌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김밥 생각이 나서 그의 상점으로 갔다. 가계가 아니고 숙소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시간대로 김밥을 팔아생활을 한다고 했다. 꽤 오래되었는지 고객이 제법 된다고 했다. 오랜만에 김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그는 파리에 체류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루우불(Louvre) 박물관 앞에 있는 ‘모리야 수시’집에서 도움을 받으라며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 곳이 파리주재 일본인들의 연락처라고 했다. 그 다음날 제품이 쥬몽에서 파리로 이송되는 날이다. 제품은 오후에 야 도착할 것 같았다. 발 품을 팔아 이틀을 파리를 보고 나니 베르사이유를 빼고는 거의 다 본 것 같지만 외관만 보았지 루우불 박물관 내의 전시품이 보고 싶어서 박물관 내부를 관람했다. 교과서에만 보던 모나리자그림을 보고 촬영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 앞에는 촬영금지라고 영어로 표시가 되어 있었지만 플래쉬를 터트리지 않고 조용히 찍다가 들통나면 못 알아듣는 척하면 된다던 60년대 말 대만인이 일본에서 가르쳐 준 생각이 났다. 일본 나라에서 금당벽화를 촬영하다가 들켜서 한번 시도해서 성공한 적이 있어서 또 한번 시도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후에 인화를 해보니 나리자 그림에는 사진촬영이 되지 않도록 그림보호를 위해 차광장치가 되어있어 사진은 검게 나왔다. 한더위에 발 품을 팔다 보니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은데 당시 프랑스에서는 물값이나 주스 값이나 같았다. 같은 값이면 콜라를 마시고 싶어서 루부르 박물관 광장에 있는 매점에서 사려는 데 한병에 6프랑을 달랬다. 지금까지 매점에서 1프랑에 사서 마셨는데 바가지가 너무 심했다. 한국도 외국인에게 바가지로 유명했지만 6배는 아니었다. 너무 심했다. 목마름을 참고 바로 김밥 장수 화가가 말한 모리야 수시로 가서 우동을 시켜서 목을 축였다. 주인에게 몽마르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더니 잘 알고 있는 화가라며 서양에서는 동양사람끼리 보호하고 살아야 한다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며 명함까지 주었다. 관광시에는 집시를 조심하라는 것과 호텔 로비에 혼자 앉아있는 콜걸을 조심하라며 친절하게 주의를 주며 어떤 일을 당할 때는 자기에게 연락해 주면 형편대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고마운 분이었다. 역시 이웃 사촌인 것 같았다. 오후에는 종일 제품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국적기 항공사에서 선적일자를 다시 확인하고 제품을 항공화물 선적장에 운반하고 본사에 전화를 했다. 회장님은 수고했어 하며 진담인지 위로인지 파리시내를 좀 보면서 시야를 넓혀 오라고 하셨다. 그 다음날은 제품을 선적해서 한국으로 보내는 날이었다. 화물만 보내면 내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항공기가 출발할 시간은 아직 멀었지만 아침 일찍부터 긴장이 되었다. 화물선적은 볼 수 없어 출항하면 보고만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호텔 룸 전화가 울렸다. 세심의 관련자였다. 그는 국적항공사가 오늘 선적을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까지 확인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직접확인 해 보라는 것이다. 국적항공사는 미안하다며 다음번에 꼭 선적하겠다고 했다. 당장 사무실로 쫓아가서 지금이라도 화물을 바꾸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미 선적이 완료되어 화물을 교체할 수 없다고 한다. 당시 국적항공사는 화물편은 없고 여객편이 한주에 2편있었다. 결과적으로 3일이 늦어지는 것이다. 단 하루를 줄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당장 책상이라도 업고 싶었지만 한국화물은 국적기에 실어야 하는 규정 아닌 국가정책때문에 가슴에 올라오는 것을 참고 다음편이라도 부탁에 부탁을 거듭했다. 바로 세심으로 들어가 본사로 전화를 했다. 본사 외자부는 외자부대로 난리가 났다. 회장님이 대로하셔서 다른 항공편을 수배 중이라고 했다. 운송은 외자부 담당이라 이미 먼저 알고 세심과 에어프랑스를 교섭하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넘어가도록 세심에서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법석거리자 초조하고 불안하기 시작했다. 세심에서 처음부터 에어프랑스를 주장했는데 국적항공사를 위해 고집한 게 창피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시니어 매니저가 Mr. AHN, It’s OK. 라며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 보이며 웃었다. 그 다음날 에어프랑스 편으로 보낸다고 했다. 세심은 그날 중으로 다시 국적기 적치장에서 에어프랑스 적치장으로 옮겨야 한다며 중장비를 동원하고 야단이었다. 세심이 도와주어 그렇지 혼자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저녁 늦게 화물을 국적기 항공사 적치장에서 에어프랑스 적치장으로 옮기고 그 다음 날 출항하는 시간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자 세심에서 전화가 왔다. 예정대로 선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공항에 갈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제품이 한국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시니어 메니저는 직원이 픽업하겠다고 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간단하게 조식을 하고 호텔로비에서 직원을 만나 그의 차로 공항에서 화물이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이제 내 임무는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피로에 지쳐 호텔에서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얼마나 잤는지 벌써 밖은 어두웠다. 외부레스토랑은 클로스 되었고 4성급 호텔이라 룸 서비스는 되었지만 내 형편으로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먹을 게 있나 싶어 호텔주변을 기웃거리는 데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빈대떡 같은 것을 팔았다. 두 판을 사서 혼자 실컷 먹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피자였다. 이제 귀국을 서둘러야 한다. 유럽까지 온 김에 로마를 꼭 보고 싶었다. 세심에 들어가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 다음날 떠난다고 인사를 하니 베르사이유를 보았냐고 물어서 아직이라고 했더니 귀국일정을 하루 늦추어 꼭 보고 가는 게 좋다고 권했다. 하지만 난 베르사이유 보다 로마(Rome)이 우선이었다. 그러자면 한국대사관을 찾아 여권 행선지에 이태리를 추가부터 해야 했다. (당시 여권은 여행할 수 있는 국가가 지정되어 기재되어 있음)
세심에서 나오는 즉시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갔으나 점심시간이라고 샷터를 내려놓았었다.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해서 주변에 볼거리가 없나 하고 가이드북을 보니 로댕 (Rodin) 박물관과 꼬레(Corea) 박물관이 인근에 있었다. 시간도 보낼 겸 먼저 로댕 박물관에 둘렀다. 입구에 들어서니 중고등학교 미술교재에서 보던 ‘생각하는 사람’조각이 우뚝 솟아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런 조각을 직접 보다니 행운이었다. 카메라로 몇 장을 담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서 전시실로 들어가니 로뎅의 여러가지 작품들이 전시 되어있었다. 그런데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진품은 실내 창가에 전시되어 있고 크기도 아주 자그만 했다. 그 표지석의 글을 보니 창가의 것이 진품이고 정원의 것은 모조품이었다. 다시 한국대사관으로 갔으나 점심을 몇시간이나 먹는지 아직 클로스 되어 있었다. 그래서 시간도 보낼 겸 다시 꼬레 박물관을 찾아갔다. 한 선교사가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한사군 시대 유물이라며 녹슬은 유물이 보였다. 놀라운 일이다. 한국 국립박물관에도 없는 한사군 시대의 유물이 프랑스까지 흘러 들어와 전시 되어있다니. 1966년도 일본 우에노(上野) 박물관에서 한사군 유물을 볼 때 일본 식민지 시대에 도적질해 갔겠지 했는데 선교사마저 유물을 가져 갔다면 한국의 얼마나 많은 유물이 유출되었을까? 선교사니까 도적질은 하지 않았겠지 만 씁쓸한 마음은 금할 수 없었다. 오후 세시가 되어 대사관 문이 열렸다. 들어가니 프랑스인 여자 한사람만 있고 한국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말 하는 사람이 없냐고 영어로 물었더니 불어로 무어라고 지끄린다. 답답했다. 조금 기다렸더니 안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큰소리로 한국인 있으면 좀 나와 주세요라고 말했더니 손에 화투장을 든체 와이샤스 바람으로 무엇 때문이냐고 물어서 이태리 여권을 받으려고 그런다고 했더니 아가씨에게 불어로 지시를 했다. 양식은 영어와 불어로 되어있었다. 여권 번호를 적고 이름을 적고 이태리 입국목적 란에 뭐라고 쓸까 망 서리다가 그냥 관광이라고 한글로 솔직히 썼다. 그 아가씨가 한글을 알리 없지만 3프랑을 달래서 3프랑을 주었더니 이태리 여권은 얻었다. 이제 이태리 비자를 받으려 이태리 대사관을 찾아야 했다. 이태리 대사관은 영어로 통했다. 투어차 로마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아무 말 않고 서류를 주어 작성하고 또 3프랑을 지불했다. 이제 비자까지 얻어서 막 나가려는 데 비자를 준 아가씨가 로마투어 여행사들이 대사관에 한코너에 있으니 가보라고 알려 주었다. 여행사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 당일코스도 있지만 로마와 바티칸을 보려면 1N2D를 추천했다. 거기다 가 몇 시까지 도착하면 가이드가 각곳에서 오신분들을 함께 안내까지 해 준다니 여행사의 추천대로 투어비를 내고 항공권은 내 항공권을 보더니 다시 파리에 다시 돌아오지않는다면 파리-서울행을 추가요금없이 파리-로마-서울로 바꿀 수 있다며 대사관에 붙어있는 이태리 항공사에 전화를 해주며 누구를 찾아가서 메모지를 주면 처리가 된다고 했다. 바로 옆에 있는 항공사에 가서 메모지와 표를 주었더니 바로 파리-서울행 티켓을 파리-로마-서울로 바꾸어 주었다. 당시 내 항공권은 오픈티켓으로 항공기 전액을 지불한 것이라 경유지를 로마로 해서 바꿀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로마 여행 준비는 다 끝났다. 항공사에서 얼마간의 추가비용을 걱정했는데 오픈티켓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파리에서 마지막 밤이라 칵테일 바에서 칵테일이나 한잔 하려고 라운지로 들어갔다.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데 노란 원피스를 입은 인형 같은 아가씨가 옆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으며 대답도 하기전에 옆자리에 앉았다. 자기도 칵테일 한잔하겠다며 룸 넘버를 물었다. 그제서야 밤거리 여자라는 걸 알고 겁이 났다. No Thanku라고 대답하며 다른 자리를 옮기자 어디선가 메니저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룸넘버’를 알려주었느냐' 물어서 아니라고 했더니 알려주면 방으로 올라 가는 콜걸이라는 것이다. 젊은 혈기에 한번 백인도 안아보고 싶었지만 로마 여행계약을 한 터라 비용도 모자라고 당시 죽음의 병이라는 에이즈도 두려웠다. 호텔방에 올라왔지만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마음도 설레어 잠이 오질 않았다. 본래 술을 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프랑스 와인이라도 한잔 해야겠다 며 냉장고에 비치된 작은 병을 고르는데 전화가 울렸다. 뒤셀돌프 소장이었다. 본사에서 귀국하지 말고 며칠 파리에 대기하라는 명령이었다. 사유도 모르고 명령만받았으니 내일 아침 비서실로 전화를 직접하라는 것이다. 뒤셀돌프 소장도 모르게 로마패키지 투어 예약을 마치고 내일 출발하려는 데 큰일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 사정이 이렇다고 했더니 그래 유럽오면 로마를 보려고 하는데 하루 다녀오면 몰라도 1N2D는 다음기회로 미루라는 권고였다. 밤새 잠이 오질 않았다. 그 다음날 여행사에 가서 사정상 로마를 갈수 없다고 했더니 15%의 페날티를 물라고 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할 수 없지 만 로마가 꼭 보고 싶어서 귀국길에 둘러갈 생각으로 예약을 보류하고 페날티는 내지 않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