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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깨어있음의 세 가지 효과>의 줄거리:
언제일지 모르는 재림을 향하여 깨어 있기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쉽고 너무 신기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기 자체의 그러함에 더하여 세 가지 기적 같은 효과들을 동반합니다. 물과 기름의 효과, 책받침 빼기 효과, 그리고 하나님 주권 효과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재림을 향한 깨어 있기만 하며 살렵니다.
깨어있음의 세 가지 효과
(마태복음 24:40~51)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깨어있음의 세 가지 효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깨어있음의 세 가지 효과’
어제 “재림 향해 깨어있는 행복 1”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재림 향해 깨어있는 행복 2”가 되겠습니다. 다만 재림을 향해 깨어있을 때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구체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싶어서 “깨어 있음의 세 가지 효과”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깨어있기를 하게 되면 세 가지 기적적인 효과가 동반되어 주어지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깨어있음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주어지는 세 가지 효과는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저는 본문을 대하며 죽을 때까지 재림하실 예수님을 향하여 깨어있기만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제 서울에서 목회하고 계신 친구 목사님과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정말 심각하다고 하십니다. 저는 현재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습니다만 통합측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도 통합측이신데 지난주부터 2주간 모든 예배당에서의 모임을 중단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태가 지금의 기세로 보아서는 2주 안에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해서 “이 시기를 위기와 어려움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전환점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모임이 중단된 상태에서 각자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은총의 완결판인 사위일체를 이루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오히려 이것이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지역에 있는 예배당 조직에 속해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서 진을 다 빼고 집에 와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천국과는 무관한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졌지만 예배당에 모이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예배당 모임이 없을지라도 각자가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갈 수만 있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미 있는 예배당을 없애거나 팔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예배당이라는 개념자체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당은 모여야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는 센터 역할을 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현 상황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예배당이 조직으로써 운영되는 현재의 모습은 끊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유대교를 끊어내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이루고 지원할 수 없다면 예배당 조직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살펴보았습니다만 본문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일어나는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40~41절에서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고자 하시는 장소는 예배당이나 유대교의 회당이나 성전의 뜰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과 만남은 단체나 조직의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삶의 현장에서 개인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깨어있음이 도둑을 막는 집 주인의 마음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도둑을 놓치지 않듯이 예수님의 재림을 놓치지 말라는 것으로써 이는 곧 재림에 적합한 마음상태를 유지해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재림에 적합한 마음상태는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도 삼위 하나님과 관계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도록 마음가짐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지혜롭고 충성된 종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 비유의 요지는 주인부재 상태에서 갖는 종의 마음가짐입니다. 주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게 됩니다. 그 때에 종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종은 모든 종들 중에서 지혜롭고 충성스러움을 인정받아 청지기로 발탁된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보디발의 집안일을 모두 맡아서 통솔하였던 요셉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마치 요셉처럼 지혜롭고 충성된 청지기와 같아야만 합니다.
충성된 종의 비유의 핵심은 주인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는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그대로 예수님의 재림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마음에 항상 담을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있음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을 마음에 담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주인이 없다는 상황에 마음을 두게 된다면 주인에 대한 충성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엄연히 주인이 존재함을 마음에 담고 있을 때에 주인에 대한 충성은 유지됩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서울에 집을 둔 주인이 부산으로 일을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종이 주인에게 충성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부산에 있는 주인에게 보내야만 합니다. “주인이 이제 서울에 없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이제 부산에 계신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음을 마음에 둔다면 그것은 악한 종의 마음가짐입니다. 48~51절을 보면 악한 종의 모습과 그에게 임할 심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악한 종은 주인이 없음을 틈타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습니다. 이는 곧 세상에 취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주인을 마음에 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인이 있는 곳으로 마음을 보내야만 합니다. 주인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악한 종처럼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마음에 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악한 종의 상태는 예수님의 재림을 인정하지 않거나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마음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따라서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깨어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머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멀리 출장 간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뉴욕에 있으니 몸은 한국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애인에게 가 있습니다. 뉴스를 봐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별 관심도 없다가 뉴욕이라는 말만 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이 쏠립니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애인과 화상통화를 하는 시간이 하루 중 제일 기쁜 시간입니다. 한편으로 제일 큰 관심거리는 뉴욕에 있는 애인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애인에 대해 깨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이 가신 곳으로 마음을 보내는 상태가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이고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우리의 마음을 보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해서 깨어있으라 말씀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도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계심을 통해 하늘로 이르는 길을 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란 예수님을 좋아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의 환경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를 빠져나가서 영적 세계인 하늘로 가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이 가신 영적인 세계를 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지혜롭고 충성된 종이 주인이 부재인 상태에서도 항상 주인이 있다는 생각으로 집안을 돌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계신 곳으로 마음을 보내고 주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재림 예수님을 준비하는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어있음으로부터 어떠한 세 가지 효과가 생겨난다는 것일까요?
세 가지 효과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마음상태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시간과 공간의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마음 또한 세상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깨어있는 마음을 가질 때에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게 됩니다.
십자가가 대문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단지 죄 사함의 사건으로만 여기고 세상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죄 사함 받은 의인으로써 세상에 있는 것을 마음껏 추구하며 살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상태를 연출하며 큰 환난을 향해 질주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 속에서 살 때에 육체를 죽여서라도 도망하고 싶을 정도의 마음의 공허함과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좋아하여 마음을 하늘로 보내고자 십자가를 붙잡는 자들의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한편 이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의 약속을 따라 하늘을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방향을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하늘로 향할 때에 세 가지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첫 번째는 물과 기름의 효과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모두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게 되면 재림 전에도 이러한 일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져버립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계시듯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밭을 갈든, 맷돌을 돌리든, 시집가고 장가드는 등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의 세계와 마음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악한 종이 술에 취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세상의 기운이 들어와 마음이 정복당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 것을 빨아들이며 세상 기운에 취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취해있기에 비록 또렷한 정신으로 어떤 생각이나 말과 행동을 할지라도 실제로는 술주정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큰 환난을 향해 질주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마음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됩니다. 마음이 예수님께 향하기 위해 십자가 대문에 들어섰더니 예수님이 계시는 하늘로 향하는 길이 나타납니다. 그 길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내자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세상과는 마음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게 됩니다.
우리는 배우자에 대해서도 마음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배우자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배우자에 취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술주정은 큰 환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내 몸에 대해서까지도 마음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깨어있는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향한다면 몸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은 하늘을 살아가는 기적 같은 효과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삶이고 세상으로부터 자유 하는 참 신앙인의 상태입니다.
두 번째는 책받침 빼기의 효과입니다. 오래전에 TV 예능프로그램에서 벌칙을 주는데 남녀가 책받침을 사이에 두고 입을 맞추게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책받침을 사이에 두고 입을 맞추려는 순간 사회자가 책받침을 싹 빼버렸고 서로 입맞춤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녀 사이에서는 민망한 노릇이지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책받침은 바로 시간과 공간속에 있는 세상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끝나는 순간이 예수님의 재림이기에 책받침을 빼버린다는 것은 재림에 합당한 마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이 세상을 향해서 갖는 관심거리들을 빼낼 때에 마음은 예수님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임박한 종말의식이 생겨납니다. 임박한 종말의식이란 단순히 30~40년을 한 세대로 보고 그 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리라는 단순한 계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시간과 공간의 세상을 빼버리고 예수님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의 마음으로 관심할 수 있는 일이란 예수님의 재림뿐입니다. 십자가 대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시간과 공간의 세계인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책받침 빼기의 법칙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마음에서 첫 번째로 관심할 수 있는 일은 신앙인에게만 허락된 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사이에 책받침을 끼운 채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일들이 모두 책받침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대문에 들어선 신앙인들은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서 가져야 할 모든 관심거리가 사라지고 예수님의 재림을 관심하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30~40년 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니 관심을 갖게 된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에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전부가 되는 상황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주권의 효과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재림을 관심하는 동안에도 육체로는 남은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관심할 수가 없는 나머지 삶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 것일까요?
앞으로 3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재림에 관심하는 동안 삶을 관심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죽고 난 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의식 그대로 깨어나 예수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언제 죽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살아있는 사람도 그 때의 마음 상태로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고, 이미 죽은 사람도 죽을 때의 의식을 가지고 깨어나 예수님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관심할 수 없는 육체를 통해 살아가야만 하는 남은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역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의 효과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가 관심할 대상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해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갑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과 우리의 마음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취하는 법이 없고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관심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뿐입니다. 책받침 빼기를 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의 세상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예수님의 재림과 맞닿게 됩니다. 그러자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관심의 주체가 되어주십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주권의 속성은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을 이끌어 가는 기적 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기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들처럼 유일회적으로 나타난 기적만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일 때에 우리의 삶 전체가 기적의 연속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기적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되 나의 육체와 지정의를 장갑 삼으시고 가면 삼으셔서 주권을 행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쉬운 일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깨어있기입니다.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을 기대하기에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해 물과 기름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고, 책받침 빼기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며, 하나님 주권의 효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은혜를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가 재림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깨어있기 위한 유일한 길임을 주님께서 아셨기에 깨어있으라 말씀하시고 곧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재림하실 주님을 향해 깨어있음으로써 기적 같은 효과까지 함께 누리는 복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