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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본문<요8:1~11>
바둑에 정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대로 하면 바른 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둑판에 흑백의 돌을 두어 나갈 때, 정확한 수순에 따라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같은 자리에 같은 색의 돌이 놓여져 있더라도 그게 수순대로 두어져야만 그 돌이 산돌이 되는 것이지 바른 수순이 아니면 그 돌은 죽은 돌이 된다는 말이지요. 수순- 이것이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입니다.
율법에 대한 성도의 인식도 수순의 문제가 생사를 가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질문 한 번 해 볼까요? ㅎ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구원받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주셨나요, 아니면 이미 얻은 구원에 감사하라고 주셨나요? (다시 말) 율법이 먼저냐 구원이 먼저냐? 답(구원이 먼저: 출애굽 후에 율법을 주셨으니까.) 먼저 구원, 나중 율법이라면 여기에 따라 율법의 기능과 목적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율법은 왜 주셨을까?)
출애굽 후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사건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구원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세상신 마귀를 상징하며 그가 다스리는 애굽은 사망에 속한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 공로로 빠져 나와 광야로 나온 사건이란, 오늘 날로 비유하자면 이 세상에서 껌딱지처럼 붙어살던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IX십자가 피의 공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지요.
그러므로 애굽은 구원 받기 전의 이방인의 삶을 말하고, 광야 40년은 구원 받은 후 교회생활을 의미하며, 가나안 땅은 장차 가야할 천국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징적인 개념은 이미 알고들 계신 것들이지요? 참고로 행7장을 보면, 스데반이 순교직전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기간을 광야교회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즉 광야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기간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다시 율법을 주신 수순에 대해 언급을 하자면, 출애굽 후에 광야의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는데, 이것은 구원을 시킨 후에 율법을 주셨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좀 해보자는 것이지요. 구원을 시킨 후에 주신 율법이라? 그렇다면 율법의 목적은 무엇이라는 말일까요?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알고 있는데, 정작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것을 잘 깨닫는 것이 ㅎ님에 대한 오해와 율법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이 되며, 동시에 ㅎ님에 대한 바른 이해의 단초가 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ㅎ님께 대한 잘못된 편견을 너무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심판 주, 차갑고 무서운 분), 그런 것이 바로 율법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인 것이지요. 바둑에서 정석이 생사를 가름하듯이 율법이 구원 이후에 주어졌음을 아는 것이 구원에 대한 정석(ㅎ님의 경륜을)을 아는 것이 됩니다.
ㅎ님을 알지 못하면 ㅎ님의 일하심과 ㅎ님의 의도를 알지 못할 테니, 자연히 사람의 열심과 노력으로 구원을 쟁취하려고 동분서주 하게 되는 데, ㅎ님에 대한 진리지식이 없이 나대는 것을 롬10장에서는 ‘ㅎ님의 의를 모르고 사람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서 ㅎ님께 복종치 아니한다’고 질타를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도 무턱대고 제사를 드리면서 자긍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제사가 중요한 게 아니다. 먼저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함과는 상관이 없이 오직 ㅎ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선물을 받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 언약백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ㅎ님의 언약백성의 기능적인 역할로 등용되었던 자들입니다(택한 자의 샘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출애굽 전에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들은 그냥 우연히 존재하던 여타 세상 여기저기에서 살던 인간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ㅎ님의 언약으로 태어난 언약백성들 입니다.
출애굽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창15장에서 ㅎ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사 언약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장차 네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괴로움을 당하다가 400년 만에 이 땅에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야,’는 말씀으로 횃불언약을 하시면서 쪼갠 짐승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당시의 쌍방계약은 짐승의 피를 흘려서 상호간의 계약을 확증시키는 전통이 있었는데, 만일 어기는 자는 쪼개진 짐승의 운명처럼 될 것이라는 묵계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복음을 엿볼 수 있기에 감사한 것이지요. 졸다가 깬 아브라함은 지금 무엇이 진행되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 앞에서 ㅎ님이 맺으신 언약이라는 것은 사실 ㅎ님 자신의 의지로 장차 이루실 구원의 내용을 미리 복선을 깔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감으로 성취되는 언약이란 바로 ㅎ님 자신의 죽음으로 ㅎ님의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십자가 복음의 모형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말씀하신 ‘네 자손’이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인 야곱의 가족 70여명이 기근을 만나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내려가서 살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덧 400년의 세월이 흘러 약 2백만명이라는 민족으로 형성되었지만, 고센 땅에서 노예로 전락되어 개 고생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했던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에 그들이 무슨 독립운동이라도 했나요? 그저 모세의 인도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족속은 그냥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ㅎ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왜 태어났지요?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요? ㅎ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서 태어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ㅎ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 일도 아니했지만, 아니 일은 고사하고 태생적인 죄인이라서 죄를 먹고 마시던 더러운 자들, 그래서 구원은 고사하고, 지옥갈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존재였는데, 아무 조건 없이 오직 ㅎ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 받았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어요? 감격에 겨워서 그 은혜만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자로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ㅎ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찬미의 제사, 입술의 열매)
그래서 사도바울도 롬5장 끝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말합니다. 은혜가 은혜로서 높임을 받으려면 죄를 많이 인식한 자라야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용서의 가치를 알아먹으려면 필히 먼저 죄인됨을 깊이 인지시키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이 말마저도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꾀를 냅니다.
바울이 그 말을 하자, 사람들이 비꼬면서 ‘그럼 은혜를 더 많게 하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져도 좋다는 말인가?’하자, 바울이 정색을 하면서 ‘그럴 수 없느니라’고 잘라 말합니다. 이 말은 이미 너희 죄가 쌓이고 쌓여서 하늘까지 닿았는데 은혜를 빙자해서 더 죄를 짓는다니 무슨 억지들이냐고 질책하는 말이지요.
사람들의 행태가 이러합니다. 자기 죄를 인정치 아니합니다. 그래서 ㅎ님은 할 수 없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시지요. 죄를 경험하도록 막다른 골목으로 안배하시는 거죠. 수없이 ㅎ님을 거역하며 우상을 섬겨온 뻔뻔하고 질겨빠진 이스라엘을 마침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해서 거기서 노예생활을 하게 함으로 ㅎ님께 대한 회개를 불러일으키시지요. 그래서 자기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을 때에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합니다(70이레의 역사, 희년..)
우리 개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6번이나 갈아치우게 하는 인생의 실패자로 간섭하신 후에 만나 주시는 것이구요,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갈지라도 나는 죽는 데까지 따라 가겠다고 장담하더니 닭 울기 전에,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인사 아닌가요? 그런 깜도 안되는 베드로를 주님이 버리셨나요? 부활 하신 후 디베랴 바닷가에까지 다시 찾아와 만나 주시잖아요.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를 만나주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엿볼 수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ㅎ님은 이스라엘을 구원시키신 후에 율법을 주신 이유도 같은 이치라는 말이지요. 정말 엉터리 같은 족속들을 구원은 시켰지만 이들이 은혜와 사랑을 알까요? 당연히 모르지요. 그래서 옛언약(율법)이 반포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ㅎ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인데, 그런 너희들을 ㅎ님의 은혜와 사람으로 구원했으니 그 은혜를 깨닫고 찬양하는 자되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를 알아먹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출19장 이하를 보면, 모세가 시내산 밑에서 율법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모세가 율법 말씀을 선포하면서 조건을 제시 합니다. 이 말씀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 너희들이 ㅎ님과 계약을 하겠느냐? 그러자 아멘, 우리가 잘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쌍방간에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계약서인 두 돌판을 가지러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그 돌판은 ㅎ님이 친수로 쓰신 것입니다(출31)
그런데 그 사이에 산 밑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요?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ㅎ님이라고 섬기며 술에 취하여 춤추고 있었지요. 이 광경을 본 모세가 두 돌판을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계약은 파기 되었고 그 계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3천여명이 죽어나갔지요. 그때에 모세가 ㅎ님 앞에 엎드리며 중보를 합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시고 이들을 살려 주세요. 이들을 다 죽이시면 세상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ㅎ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들을 구원치 못했다고 할 게 아니겠습니까? ㅎ님의 이름을 위해서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죽음에서 살아난 겁니다. 여기서 모세가 자기 목숨을 건 중보는, 장차 IX가 자기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의 피 흘리심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난 것이 무엇인가요? 방금 약속을 했어도 손바닥 뒤집듯이 눈앞의 유익을 위해서 언제든지 배신하는 게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바탕(본질)이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 자기가치 챙기기, 자기유익과 자기자랑과 자기행복을 본성으로 추구하는 자들이기에 죽었다 깨나도 ㅎ님의 말씀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깨뜨려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너희는 실패자야-확증)
그런데 출34장에 가면 다시 ㅎ님께서 두 돌판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ㅎ님 자신의 속성에 대해 비로소 밝히시게 됩니다. 가서 보겠습니다.
<출34:1~7>
1절~내가 그 판에 쓰리니(이 말을 잘 기억해 두세요)
5절~ㅎ님의 이름을 반포할 새(이름= ㅎ님의 속성, 성품을 말함)
6절~이것이 ㅎ님의 마음임(마치 부모가 자식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랑의 마음임)
7절~복은 천대까지 베푸시고, 악의 형벌은 삼사대까지 보응(천과 3,4를 비교해야 함)
-주의: 보응이 버리는 건 아님, 징계일 뿐(자식이 범법을 저질러서 감옥에 가면 호적에서 파버리나? 인간도 안하는데 ㅎ님의 자기백성을 그리하시겠나?)
*참고: 요13장~ 끝까지 사랑, 롬8장E~ 적신위험칼..어떠한 일에도 끊어지지 않는 ㅎ님과 IX의 사랑임. 그러나 잘못해도 징계가 없으면 자식이 호로 자식이 되니까 징계하심(사랑의 일환)
*참고: 출33:19절~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ㅎ님 자신의 속성을 말하심)
-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행함에 대한 오해는 금물, 택한 자를 말하는 바로서, 결국 성령을 보내사 자기 죄를 깨닫는 자를 말함, 병주고 약주고, 짜고 치는~)
*요약: (출19장~34장)에 이르는 사이에 주신 두 번에 걸쳐 주시는 돌판은 옛언약과 새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언약은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새언약은 IX의 십자가에 방점을 둔 것이지요(율법과 복음)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ㅎ님의 히든카드가 바로 성막제사입니다.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 자는 성막에 나아가 흠없는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림으로 용서를 받게 하는 장치입니다.
이때에 지성소의 언약궤 뚜껑의 속죄소에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완전한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언약궤 속에 들어가 있는 돌판은 두 번째 것이지요(심판이 아닌 용서)
따라서 언약궤 뚜껑 속죄소는 이중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속죄소=시은좌: 은혜의 처소)
- 두 번째 돌판 자체가 새언약을 상징하지만 더 완벽하게 확증하기 위해 속죄소로 덮음
- 이는 우리의 죄를 다시는 죄를 기억치 않겠다는 ㅎ님의 사랑의 표식임. 이게 새언약입니다.
성경의 주제가 뭐예요? 십자가에 달리신 IX이십니다(예수 없는 설교 빵점)
율법은 그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 희생당하신 예수를 가르키는 손가락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갈3장에서는 율법은 IX께 안내하는 몽학선생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나 이제나 율법지킴을 신앙의 핵심으로 알고 있는 헛된 신앙을 가진자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안타까운 것이지요. (ㅎ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된다는 개념이 곧 율법신앙임)
오늘 나눌 말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한 내용이 바로 율법과 복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출애굽기의 두 돌판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요8:1~11)을 읽겠습니다.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오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처형에 대해 주님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고소할 꼬투리를 찾고자 질문)
만일,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답하면, 지금까지 사람의 구원은 율법 행함으로 되는 게 아니라 ㅎ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음으로 된다고 역설한 것이 도루묵이 되는 동시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배신감을 느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이걸 노린 것임)
반대로 그 여자를 용서하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니 체포할 근거가 될 것이니 꼼짝없이 당하게 된 형국이 된 것입니다. 이때 주님이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십니다(6E). 지금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신 것일까요? 오늘 주님은 땅에 두 번 글씨를 쓰시는데 어떤 일이 연상이 안되나요?
-바로 출19장과 출34장의 두 돌판을 주실 때에 ㅎ님께서 친수로 돌판에 글씨를 쓴 것을 재연(연출)한 것입니다.
6절에 쓰신 것은 먼저 주신 첫 번째 돌판을 의미 합니다.
십계명 다 아시지요?(1. 나 외애 다른 신을 두지마라. 2 너를 위하여 우상을..3.ㅎ님을 망령되이 부르지 마라. 4안식일을 거룩히..5 네 부모를 공경, 6살인, 7간음, 8도둑질 9거짓증언,
10 네 이웃집을 탐내지 마라. 그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를 탐내지 마라)
출19장에서 처음 주실 때는 쌍무계약에 의해 세워진 율법입니다(어길 시에는 다 저주를 받아 멸망할 거야!) 그러나 누가 이것을 지켜낼 수 있습니까? 좀 전에도 언급한 대로 인간은 자기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들입니다. 자기유익과 자기가치 챙기기, 자기자랑을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에고이즘의 덩어리들입니다. 그렇기에 1계명부터 지킬 수가 없지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이미 다른 신을 섬기는 자인 걸요(선악과 먹으면 ㅎ님처럼?.. /인간은 자신이 신)
2계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데, 이미 자신이 우상인걸요. 그래서 ㅎ님을 찾아도 자기 소원을 위해 찾는 것이 되니 그 자체가 우상으로 ㅎ님을 섬기는 꼴이 되지요(지금 기독교인들의 새벽예배, 철야예배, 각종 충성봉사, 헌금 등이 무엇을 바래서 열심을 낼까요? 구원, 자기 소원성취..)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골3:5)
그런 자들이 여기저기서 ㅎ님의 이름을 부르나요? 다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3계명도 저절로 어기게 되는 형국 입니다. 5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나요? 부모가 건강해서 돈벌어 먹여살릴 때는 엄마아빠 사랑한다고 하지만, 늙어서 골골대면 어때요? 저 늙은이 언제 죽나하고 눈총이나 주는 게 인간들입니다(고령장은 어느 시대나 있어 온 일). 나머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미워만해도 살인이고,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지요.
또한 도적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어도, 사람은 공기나 햇빛이 없으면 죽는데, ㅎ님이 거저 주시는 이런 것을 받아 살면서 ㅎ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자 있나요? 어부는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한다고 하는데, 물고기를 만든 분이 ㅎ님인 줄도 모르고 고작 잡은 댓가를 값으로 챙기는 어부는 도적놈이지요(농사꾼도 동일범. 씨앗의 주인 ㅎ님께 로얄티 주나?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기술에 대해 로얄티 주나? 도적놈들)
십계명 중 특히 열 번째가 핵심입니다.
-네 이웃집을 탐내지 마라. 그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를 탐내지 마라
아마도 주님은 열 계명을 쓰시면서 마지막 계명에서 동그라미를 치면서 강조를 하셨을 것 같아요. 잘 봐라, 이 놈들아! 행위 이전에 마음에 먹은 탐심 그자체가 죄란다. 너 탐심 없어?
그러고 나서 일어서서 일갈하신 말씀이-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군중들이 깜짝 놀란 것이지요. 여태껏 율법을 여하히 잘 지켜낼 것이가에 촛점을 맞추어 살아왔는데, 이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보라니까 부끄러워서 입이 다물어 지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율법지킴에 충동되어서 누가누가 잘하나 경쟁 속에서 살아왔는데,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율법을 보니까 내 속을 들여다보는 거울이었던 것이지요. 아이쿠, 창피해라. 내가 죄인이로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어른들부터 물러가기 시작해서 젊은이들까지 다 갔다고 합니다.
어른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자신의 죄를 깨달은 자를 말합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면 어린아이이지요(철부지가 사리를 분별할 수 없듯이 자기주제를 모르면 어린아이입니다).
그래서 엡4장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는 말도, 죄를 안짓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은 죄만 나오는 무가치한 자인데 주님의 은혜로 지금도 살고 있다고 자인하는 자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자라는 의미입니다(반대로 알면 큰일-다시 행위로?)
여기서 짚고 가야할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 보다 덜 죄를 지은 자가 돌로 치라’고 아니했다는 점입니다. 죄는 경중이 없어요. 더 큰 죄, 더 작은 죄라는 구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죄의 경중이 있다면 지옥도 차등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더 뜨거운 지옥, 덜 뜨거운 지옥?(말도 안되는 발상..)
-죄는 그냥 죄이고 다 ㅎ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바늘 도둑= 소도둑)
8절을 보면, 주님은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십니다. 이것은 출34장의 두 번째 돌판을 상기시키는 연상기법 입니다.
두 번째 주신 것은 새언약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받을 저주를 IX가 대신 받으시고, 우리는 값없는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로 지금 이 여인을 등장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10절~11절>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약4;4절을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ㅎ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ㅎ님을 남편삼아 ㅎ님만 사랑해야 하는 게 성도인 우리의 본문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돋보고 부러워하며 더 많이 소유하려고 분주합니다. 그럼에도 ㅎ님은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여전히 당신의 백성으로 끌어안고 계시는 것은, 우리를 보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IX의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싸개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예수 밖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11절 끝에,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과연 이 여자는 그 후로는 아무 죄도 안 짓고 살았을까요?
육신을 가진 인간이 죄를 안짓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강원도 태백에 있는 석탄 캐는 탄광에서 일하면서 검은 석탄을 안 묻히고 살라는 말과 다를 바 없는 말입니다.
천하의 사도 바울도 롬7장 끝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원하는 바 선을 행지 아니하고 원치 않는바 악을 행하는 나를 보는 도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탄식...)
그러면서 곧바로 반전의 환호성을 지릅니다.
우리 주 IX로 인하여 ㅎ님께 감사하리로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ㅎ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마음 따로 몸 따로라는 고백임- 죄를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정체성)
그러면서 이어서 ‘누구든지 IX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다’(노래 함)
왜냐?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을 지켜내지 못하였는데, ㅎ님이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그 육신에 죄를 정하사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기 때문이다!(고 이유를 설명함)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로 우리가 죽을 자리에 대신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인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ㅎ님의 공의를 이루시고,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생명은 ㅎ님의 아들을 담보로 한 것이기에 절대로 취소될 수 없는 영원하고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항상 IX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여 그 은혜를 붙잡고 사는 것이 죄를 안 짓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생명과 평안이고 예수 밖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날마다 이 IX의 의의 옷을 붙잡고 살아가는 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IX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