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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끝보다 길끝이 두려웠던 베드로>의 줄거리: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받으며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진심을 예수님이 아신다는 말로 답을 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 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처형이 길의 끝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했던 것은 세상 끝이 아니라 길 끝이었습니다.
세상 끝보다 길 끝이 두려웠던 베드로
(요한복음 21:15~25)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끝보다 길 끝이 두려웠던 베드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끝보다 길 끝이 두려웠던 베드로”
15~25절의 본문에는 중요한 세 가지 내용이 앞뒤로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두 번에 걸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것, 예수님의 양을 치는 것의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은 서로 얽혀있어서 잘라내려야 잘라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예수님 사랑과 예수님 따름에 대해서만 살펴볼 것이고, 다음 시간에는 예수님 사랑과 따름에 덧붙여 예수님의 양을 치는 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첫 번째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풀레온 투톤(πλέον τούτων)으로 “이 사람들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이것들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로부터 이 말씀은 세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고, 두 번째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도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라는 의미에 집중한다면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배와 만선을 이룰 정도로 많이 잡힌 고기와 고기 잡는 도구들까지 다 포함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번역을 선택하더라도 결국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에 걸쳐 반복하신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부인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정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의 진심을 드러내 말하게 하고 계십니다. 세 번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하게 하심으로써 세 번 부인한 일을 상쇄시켜 버리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때 그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답을 풀어보자면 “예수님이 예고하신 대로 저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니 제 입으로 당당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기가 정말 민망하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제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주님께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라는 답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답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고 세 번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이에 더해 18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9절을 보면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설명됩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죽음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로마의 네로 황제 박해 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이 말씀은 단지 죽음만을 예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라고 하신 말씀은 앞서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했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삶의 문제를 결정하고 시행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랬던 베드로가 이제 예수님을 따라 세상에서 빠져나가 부활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것을 전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베드로의 몸을 통해서 베드로의 의지와 결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완전히 외부의 의지와 결정에 의해서 삶의 여정이 진행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고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과 부활의 지점을 통과하신 상태였습니다. 부활의 나라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여전히 세상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이유는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따름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해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에 대해 사랑함에 한계가 있었고 목숨을 버릴 만큼은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정확한 이유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때나 공생애 때나 부활하신 뒤에나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문제는 사랑이 아니라 따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부인의 사건을 떠올리게끔 세 번 다시 사랑하느냐 물으셨고 사랑에는 문제가 없었음을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등진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따름의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상황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십자가가 끝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무력하게 체포당하시는 대신에 팔을 걷어붙이고 싸우고 저항하셨더라면 베드로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더는 목표가 보이지 않는 인생길의 끝이었습니다. 길과 목표가 보였다면 예수님을 배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실 것을 예고하실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위험할지라도 베드로의 눈에 그 길이 보였더라면 베드로는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물으시며 사랑에는 문제가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다만 베드로가 몰랐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따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면 아무런 길이 없다고 느꼈던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에 무덤 안에 들어가심으로써 세상 끝에 이르신 후에 세상을 뚫고 나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길이 있음을 베드로가 알았다면 결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확인시켜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베드로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길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예수님과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십자가가 끝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와 무덤이 끝이 아님을 부활하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이제 십자가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생각을 접고 무덤에서 이어지는 부활과 앞으로 있을 승천의 길을 보고 십자가 지점을 넘어서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을 해석할 때 순교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베드로도 십자가에서 죽어야할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따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 따르라는 말씀을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교도 불사하라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영웅적인 자아의식을 표현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동원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삶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는 모든 제자와 추종자들의 대표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단순히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것임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순교적 상황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따를 때 이 세상에서 일어나게 되는 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고난을 겪고 낮고 천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왕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고 부자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을 통과하여 부활의 나라에 계신 상태에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름은 이 세상에서의 특정한 삶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삶, 비천한 삶, 고난의 삶, 고통의 삶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물리적인 따름이 아닌 영적인 믿음의 길을 따름입니다. 따름은 앞서가신 길 위에 계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인지를 명확히 함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길은 어떤 길일까요? 공생애를 사시다가 십자가에 이르신 길일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난센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의 끝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가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십자가를 끝으로 알았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십자가를 끝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죄 사함의 사건으로는 믿지만 끝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너머로 가신 길을 따라가지 않고 이 세상으로 귀환합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출발점입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하여 무덤에 이르고 부활에 이르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이르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이제까지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렇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기독교 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처음 듣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같이 가는 것이고 그 따름은 십자가가 출발점입니다. 이는 곧 십자가를 출발점으로 하는 길 위에 계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몸으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은 몸으로 갈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가는 것이고 동일시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순교나 박해나 고난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순교를 당하고 박해를 받고 고난의 길을 걸어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독일의 훌륭하신 목사님 중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히틀러 나치에 저항하다가 옥중 순교하셨습니다. 본회퍼 목사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이 처하셨던 상황 자체만을 두고 이야기해봅니다. 이분께서는 나치에 저항하신 걸로 유명하지만 그 자체로는 예수님을 따른 것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면서 고난을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와 주변의 목사님들로부터 시작해서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오해는 끊임없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의식과 마음이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들어감을 통해서 이 세상을 끝내고 빠져나가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서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좇아가는 것입니다. 나치에 저항하고 고난의 삶을 살았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름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의 나라에 이른 사람은 위로는 예수님이 가신 방향을 따라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좋으심을 구하고 열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부활의 나라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지시를 내려 나치에 저항하게 하실 수는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치에 대한 저항은 예수님과의 동일시와 따름에 대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따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몸은 따름의 재료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나라에 이른 사람들의 몸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재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길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을 보지 못하거나 잘못된 길을 보면 예수님을 따름은 불가능합니다. 따르지 못하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회퍼 목사님처럼 이 세상에 팽배한 불의를 의식하고 저항하고자 하여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와 부정부패로 가득 차 있던 이스라엘 나라에서 쏙 빠져나가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길을 그대로 따라가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의 나라에 이르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이 세상의 부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오히려 얌체처럼 보일 수 있고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달랑 혼자서 세상을 쏙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에 이르고 승천하신 길을 따라 의식과 마음이 하늘 끝까지 좇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주체성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추구하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지시를 하십니다. 그 지시가 부정부패를 저항하며 규탄하는 일이라면 고난이 주어지는 생애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따른 결과이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체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떤 상태입니까? 고통스럽고 문제가 산적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손대고 관심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는 완전히 무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고통스럽고 문제가 산적해 있는 삶의 상황과 조건과 환경으로부터 얌체머리 없이 이기적으로 달랑 혼자 쏙 빠져나가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면 세상에 남아서 문제를 부여잡고 연관된 사람들과 더불어 의리와 사랑을 지켜가며 진땀 흘리며 고난 중에 살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고 믿고 싶다면 얌체처럼 달랑 혼자서 이 세상을 그대로 놔두고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세상을 빠져나가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아버지의 존재감과 아버지의 좋으심만을 추구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지시하시는 바가 있으면 그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세상에 대한 지시는 예수 따름의 결과이지 예수 따름의 자체가 아닙니다.
본회퍼 목사님같이 훌륭한 분일지라도 옥중생활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 생각했다면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물론 본회퍼 목사님께서 그런 분은 아니셨겠지만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일이기에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름은 십자가를 출발점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목표가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의 부정부패와 싸우다 십자가의 죽음 같은 결과를 맞이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 따름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너무나도 휘황찬란한 천국을 향하여 나의 의식과 마음이 줄달음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세상 밖에 있는 천국의 보좌 우편을 향하고 추구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쁨을 추구할 수 없으며 고난을 자처할 수도 없습니다.
영웅주의에 사로잡혀서 고난과 고통을 무릅써도 그것은 예수님을 따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얌체처럼 이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 천국의 기쁨을 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기쁨을 쥔 자들에게 고난처럼 보이는 일을 지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믿음의 선배들도 이러한 일들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평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고난이라는 말이 쓰일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몸이 괴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천국의 기쁨과 평강이 유지되는 가운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마음까지 고난스러운 상황에 빨려 들어가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문제는 길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끝이지 길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야할 길의 시작입니다.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20~2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요한에게 관심을 갖는 내용이 나옵니다. 21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세상 일이 아닙니다. 어떤 가까운 사람도, 어떤 산적한 문제도 다 놔두고 예수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겉으로 볼 때 얌체처럼 보이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 놔두고 이기적으로 달랑 혼자 십자가를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죽으나 사나 예수님만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 대해서는 오직 내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지시만을 따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