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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금같이 나오리라† 원문보기 글쓴이: 켈로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
[시편 126편]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나무 심는 여인-동영상보기 : 동영상은 주일예배 동영상보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참 감동적인 영상입니다. 한 여인의 수고가 얼마나 큰 축복을 일구어냈는지 말입니다.
여기서 ‘축복’이라는 말에 주목하겠습니다. 축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삶을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물론 우리는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지키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고하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보상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을 가장 복되게 지나는 것은 수고한 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고, 그 기쁨을 가져다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노트르담 박물관에 가면 렘브란트의 그림 두 점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그가 무명 시절에 그린 그림이고 또 하나는 그의 명작이라고 하죠. 그런데 천재로 알려진 렘브란트의 무명시절 그림에는 전혀 천재성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가 아는 천재 렘브란트를 보면서 감탄하지만, 그의 수고를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사진을 보고 무척 놀랐던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을 아시지요?
우리가 아는 그녀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무용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1986년에 입단하여 군무를 추는 댄서에서 솔리스트 그리고 주역 무용수가 되어 프리마가 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는 것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99년 최고의 무용수로 선발된 그녀의 발을 보고 비로소 우리는 그녀가 연습벌레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년에 150여 개의 토슈즈를 버려야 했고 평균 하루에 10시간, 많이는 19시간까지 연습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매일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면 어딘가가 아파요. 아픈 것도 무용수 생활의 일부분이죠. 아무 데도 아프지 않은 날은 오히려 내가 어제 무엇을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고통만큼이나 큰 기쁨!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감격을 노래한 구절입니다. 말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기쁨과 감사로 넘쳐있습니다.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기쁨의 황홀함을 잘 표현한 문구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런 큰 기쁨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생활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 5절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인용하는 구절이지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거두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기쁨의 크기는 고통의 시간이 크면 클수록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헛된 고통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고통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제가 몇 주 전에 페북에 올린 글입니다. 서두르면서 일어났던 해프닝을 소개한 것이죠. 때로는 쉽게, 때로는 서두르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다 갑자기 찬양을 부르게 되었답니다. 그때그때 타이핑을 해서 자막을 만들던 시절. “예수는 주, 예수는 중.”또 다른 찬양“나 누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말씀으로 은혜받고 함께 기도하려고 부른 찬양인데, 참 기도하기 힘든 분위기가 되었다고요. (혹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분은 가사를 잘 보세요.) 이 가사를 타이핑한 사람이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잘하려고 한 일인데 말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서둘러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내공은 아무리 바쁜 순간에도 한 박자 쉬어 갈 수 있는 여유입니다. ‘급함보다는 바름과 옳음’을 생각하며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해프닝은 늘 서두름으로 올 때가 많습니다. 옛 어른들이 했던 말 "바쁠수록 쉬어가고 돌아가라!"이 시간에 우리는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때 찾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한 박자만 쉬어보세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당신의 분노도 잠재우게 될 것입니다.
댓글 몇 개를 소개합니다. - 학교 수업 중에 이런 사례들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 "주의 자비가 내려와" 중.. 주의 바지가 내려와 내려와~- 너무 재미있어요.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단어순서가 반대로 들어가서 완전히 뜻이 바뀐.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복음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어둠의 빛 비춰라단지 단어순서만 바뀐 것인데 복음을 물리치라니 이런 불경스러운!ㅋ
- 저희 교회는 '마음 이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으로 담당자가 미처 수정을 못했는데 한동안 알아서들 불렀다는~~ㅎㅎ
- 성령의 불 타는 교회 -> 성령의 불 탄 교회!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 싱싱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이것도 있어요ㅎㅎ우리의 실수도 귀엽게 봐주시겠죠?^^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시니까~^^
이런 서두름이야 웃으면서 지나갈 수 있지만,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일이 서두름 때문에, 진중하지 못해, 조금 편해지려는 이유로 오점을 남긴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참 기쁨과 감사를 깨닫게 하려고 쉬운 길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어려운 고통의 시간 70년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실 능력이 없으셨겠습니까? 여호와의 군대를 보내서 싸우게 하신 일도, 출애굽 당시에는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는 싸움도 하게 하셨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전쟁에서 이기게 한다면 이스라엘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또 신앙을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눈물’은 쉽게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뼛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눈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은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인 발명가 벨입니다. 그의 친구가 스미소니언 재단의 이사장으로 있을 때 워싱턴에 찾아가 삶을 한탄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여보게 내게 전기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연구가 더 진행이 안 되네.”
그때 친구인 헨리가 이렇게 말하죠.
“안됐군, 아직 자네에게 전기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니 말이야.”
헨리는 친구를 동정하거나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런 발명품을 만들면서 전기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말했습니다. “공부를 더 하라고.”
그의 말 한마디가 인류에게 가장 유용한 발명품 중의 하나인 전화를 만들게 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꾸기를 원하시는 분이죠.
제가 구약성경공부를 하면서 교인들과 나눴던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를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반복적인 삶의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40년 주기로 똑같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에 평화가 찾아오면 얼마 되지 않아 우상을 섬기고 타락합니다. 하나님은 여지없이 이방의 족속들을 통하여 그들을 심판하시고 고통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사사를 보내 구원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찾아온 평화 속에서 또 죄를 짓습니다.
저는 사시기를 묵상하면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우리에게 바로바로 구원하시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절을 지나지 않으면 그렇게 절실하게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 것이며, 조금만 틈이 생기면 또 죄를 지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를 범했던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었고, 타국에서 살아야 했던 설움도 겪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드렸던 예배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결코 뼈가 시리도록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시편 137편 1절에 나오는 구절을 보세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시간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어쩌면 그들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라 없는 민족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을 지나는 것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은 고향이 그리워 시리도록 아팠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혹시 여러분은 정말 예배에 목말라, 영적으로 고팠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are you ready?]라는 북한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북한 땅에서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들은 성경을 외워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를 드리다 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1998년 처음 중국에 갈 때, 단동으로 가는 배 위에서 드렸던 예배를 기억합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예배도, 찬양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배 위에서 드렸던 예배가 얼마나 비장했는지 말입니다.
그들이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기에, 오늘 본문 1절의 고백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무리 고통 중에 울부짖고 기도했을지라도. 그들을 돌아오게 하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무기력하게 강가에서 울고 있었던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힘으로는 저 커다란 강대국 바벨론을 어찌할 수 없었기에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이는 하나님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신앙적으로 이런 정의(definition)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울면서 씨를 뿌리십시오!”
“겁을 내지 말고 뿌리십시오!”
유대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울어라. 그리고 사람 앞에서는 웃어라!”
웃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요즘 웃음 치료라는 것이 유행하지 않습니까?
웃음은 면역력을 높여 준다고 합니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하루에 45초를 웃으면 고혈압이나 스트레스가 물러가고 3분간 웃으면 11kcal가 소모된다고 합니다. 많이 웃으면 살도 빠진답니다. 15초간 웃으면 이틀의 수명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웃음이 어떤 웃음이냐는 것이죠.
웃는 것이 아무리 건강에 좋다고 해도 시도 때도 없이 실실 웃으면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쾌락과 기쁨이 다르듯이 웃음과 진정한 미소는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들이 죄를 지으면서 웃는 웃음, 누군가 잠깐 웃겨준다고 웃는 웃음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웃음의 비결이 있습니다.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웃으면서 단을 거두리라는 것입니다.
곤고한 삶, 피곤한 삶,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억지로 웃는 웃음, 그저 그렇게 대충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울라는 것입니다. 그 눈물의 씨앗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거두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웃음을 상실한 이유는 진지한 눈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씨를 뿌리는 사람 중의 염려와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찬송가 496장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비가 오는 것과 바람 부는 것을 겁을 내지 말고 뿌려봅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비와 바람을 이겨내야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가 오고 바람 부는 것을 제어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은혜를 베푸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5절에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를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슬렘들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인솨 알라” 알라의 뜻이라는 것이죠.
그들은 구걸을 하면서도 알라의 뜻이라고 하죠. 모든 것이 이 말 하나로 용서가 됩니다. 그런 그들을 탓할 것이 없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삶을 정당화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건강, 직장, 가정, 배우자, 사역. 모든 것을 책임지시겠지.’
미국 속담에 계란을 깨지 않으면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세요.
꿈꾸는 듯한 기쁨과 감사의 찬양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인가요?
시편 기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인데 그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 우리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2005년 K리그에서 울산 현대의 김정남 감독팀이 우승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우승이 값진 것이겠지만, 김 감독에게는 남다른 기쁨이 있었다죠.
그가 1989년 유공을 맡아 감독으로 우승한 지 16년 만에 우승이기도 하구요.
중요한 것은 그가 우승의 비결을 ‘새벽기도’로 돌리며 간증했기 때문이지요.
평소에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김 감독은 우승 전 여름부터 새벽기도에 나가 하나님께 매달렸다고 합니다. 항상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 있죠. 아무리 잘해도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그는 새벽기도 시간에 늘 자신과 선수들이 다윗처럼 용맹하고 솔로몬처럼 지혜롭게 해 달라고 부르짖었답니다. 프로 축구팀 감독이 연습을 마치고, 경기를 마치고 시즌 중에 새벽기도를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경기가 있는 곳에서 여지없이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플레이오프전에 진출하고 우승을 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습니까?
그가 만일 기도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기뻤겠습니까? 그에게 눈물을 흘리는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참고 인내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쁨이 크지 않았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하나님께서 알아서 자라게 해 주실 거야!’라고 생각하며 대충 뿌렸다고 합시다. 풍성한 소출을 거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에게 축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기쁘기는 할지 모르지만, 감격이 그렇게 크지도, 그가 받은 축복도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할 것 같지 않습니다.
김정남 감독이 시즌을 지나는 동안 피곤하고 힘들기에 그냥 숙소에서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아무리 힘들어도 교회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던 기억이 있기에 더욱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것이지요.
농부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기에 그 기쁨이 큰 것입니다.
어느 부부에게 아무런 메모도 없고 발신인이 누군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이상한 선물이 배달됐다. 그 선물은 당시 성황리에 공연 중이었던 브로드웨이 공연 입장권 2장이었다. '누가 보냈을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부부는 그 입장권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공연을 보러 갔고 굉장히 즐겁게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도둑이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간 뒤였다. 도둑은 침대 위에 이런 메모를 남겨놓고 갔다.
“이제 누가 보냈는지 알겠지?”
복권 열풍이 불고 있다. 카지노의 매출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한다. 공짜 뒤에는 늘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짜로 얻은 것은 늘 뼈아픈 대가를 요구한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그 얻은 소득으로 기쁨과 보람을 얻는 우리 국민이 되면 좋겠다.
오늘날은 노력 없는 대가를 바라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강도근성이나 거지 근성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나도 공짜가 좋아!'라는 광고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질 정도이다. 남다른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남다른 보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훔쳐온 플라스틱 꽃나무에 나비가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 몸은 비록 힘들고 고단할지라도 공짜가 아닌, 땀 흘려 얻은 것이 훨씬 값지고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겠다.
큰 기쁨과 감사는 눈물과 땀을 흘린 사람들이 누려야 하는 위대한 특권입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죠.
여러분이 자녀를 위하여 축복을 구하며 기도할 때, 요행을 구하는 것보다는 땀의 수고를 아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요행으로 좋은 학교를 가고, 자격이 되지 않는데 좋은 직장에 가고, 군대에 가서도 그냥 좋은 곳에서 보내다 온 것. 이 모든 것이 축복이지만, 더 큰 축복을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땀을 흘리고 공부한 자녀에게 주시는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것, 열심히 노력해서 자격을 갖추고 좋은 직장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 어느 곳에 가든지 잘 견딜 수 있는 믿음과 체력을 주셔서 군 생활을 마치게 하신 감사.
거두는 자의 축복은 끝까지 견디어 낸 자들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눈물과 땀을 흘리는 삶을 살 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지 않겠습니까?
눈물을 흘린 자들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그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헌성이 쓴 [최고의 은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자랄 때, 세상에서 제일 높은 빌딩 하면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알았습니다. 그 높이가 무려 102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이 102층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지난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들의 숫자입니다.
첫해 겨울에 굶주림과 질병,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44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지속되는 흉년에도 낙심하지 않던 그들에게 3년째 되던 해 풍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추수를 얼마 앞두고 벌레들이 수없이 나타나 곡식을 갉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벌레를 잡아도 소용이 없자,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밤새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곳에 왔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살았던 저희를 용서해 주소서.”
다음 날 아침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참새 떼가 하늘을 덮을 듯이 새까맣게 날아와 벌레들을 모조리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외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노라.”
그 일로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부족했음을 깨달았으며,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추수감사예배를 풍성하게 드렸습니다. 이로부터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는 추수의 원리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신이 후손에게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의 수고가 축복입니다.
그 축복을 주신 이를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