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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각 사람 특징에 맞춤형 축복하기>의 줄거리 :
야곱이 무슨 축복을 하든지 운명적으로 400년간의 노예 생활이 그 자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야곱이 성령의 감동으로 아들들에게 축복한다면 어떤 내용들이 되어야 할까요? 열두 아들이 각각 특이한 인격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고 이런 특질들을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삶을 사는 한 절대로 참 축복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지막으로 열두 아들 각각이 참된 축복에 이르려면 노예 단계를 거쳐 없어져야만 할 인격적인 특질들을 나열합니다.
각 사람 특징에 맞춤형 축복하기
(창세기 49:1~33)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야곱은 이제 임종을 앞두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할 것을 부탁하고 열두 아들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피부로 느낄만한 축복을 받은 아들은 유다뿐입니다.
1절을 보면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라고 하였고, 28절을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너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이야기하겠고 그것은 축복이다.’라고 말했던 셈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직관적으로 볼 때 유다 외에는 축복이라고 할 내용이 없습니다. 요셉에 대한 유언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이미 축복을 누리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8~12절까지 이어지는 유다에 대한 축복을 보면 유다가 백수의 왕인 사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아도 통치자로서의 면모가 묘사되고 있으며 특히 11절에서는 그 축복의 풍성함이 표현됩니다. 이러한 왕권에 대한 묘사에는 그리스도가 장차 이 땅에 임하시리라는 내용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들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봐도 축복이라고 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 중심으로 ‘각 사람 특징에 맞춤형 축복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28절에는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들 각자에게 합당한 축복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과연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난감합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야곱이 정말 아들들을 축복한 것인지에 대해 의심이 생깁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선민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선민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조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의 삼각주는 선민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삼위일체 되심의 삼각주 안으로 들어가면 영광의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소유감으로 충만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는 동안에 땅에서는 성령님에 의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삶이 됩니다. 이처럼 하늘에서 땅에서 복이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선민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한편 이렇게 선민의 복이 이루어질 때 복 받음의 겉모습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똑같은 복을 받아도 솔로몬의 부귀영화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사도 바울처럼 고난으로 점철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적인 점은 솔로몬은 그야말로 깔려 죽을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서 1장 2절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한 반면에,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는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 받음의 겉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든 하늘에서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소유감으로 충만한 것이야말로 선민의 진정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는 솔로몬의 모습이 되었든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이 되었든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사는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의 야곱은 아들들의 축복이라는 굉장히 힘든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야곱은 백삼십 년 세월을 산 이후에 비로소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칠 년간 애굽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이 선민에게 준비하신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정한 복을 아는 자로서 아들들을 축복하는데 유다와 요셉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의 아들들이 자기의 옛날 모습과 똑같음을 봅니다. 야곱은 요셉을 계기로 영광의 하나님 자신이 복인 것과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져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자기 주체성으로 살았던 삶은 험악한 세월이었음을 바로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야곱은 이전의 자신과 똑같은 상태로 살고 있는 열 명의 아들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축복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있습니다.
유다와 요셉을 제외한 야곱의 열 아들들은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세상 것을 많이 갖는 것을 복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자기 주체성으로 그 복을 추구하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하면서까지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이전의 야곱을 빼다 박았습니다. 야곱은 열 아들들을 어떻게 축복해야 했을까요? 이제 우리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야곱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마음으로 이 세상 것을 집중하여 바라보면서 그것을 얻겠다고 자기 주체적 생각과 판단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사람에게 무슨 축복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가족이든 지인이든 복을 모르는 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축복은 없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야곱이 죽고 요셉도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머지않은 장래에 애굽의 노예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무려 400년가량 지속됩니다. 400년이면 조선시대의 오 분의 사에 해당하는 장구한 세월입니다. 이 시점에서 야곱의 열 아들들은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설령 야곱이 아들들이 직관적으로 복이라고 느낄 수 있는 내용의 복을 빌어준다 한들 400년이라는 세월을 노예로 살 것을 염두에 두자면 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축복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성령님의 감동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야곱이 머지않은 장래에 후손들이 400년 노예 프로젝트에 휩쓸려 들어갈 것을 알고서 이러한 축복을 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이 축복의 내용들이 하나님이 주신 언어임을 염두에 두자면 400년 노예 프로젝트가 고려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이제 야곱이 죽고 요셉의 죽음과 함께 창세기는 50장으로 끝나고 출애굽기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요셉이 죽은 이후로 이스라엘에 노예 생활이 임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야곱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아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상황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흘러가는 과정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을 빌어주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들들 각자에게 축복한 것을 보면 애초에 축복도 아닌 것 같습니다. 4절을 보면 맏아들 르우벤에 대한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야곱은 르우벤이 라헬의 몸 종 빌하를 범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이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사건을 꺼낸다는 것이 참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죽기 전에 마음에 담아두었던 원망과 한 맺힘을 푸념하듯이 털어놓는 것 같습니다. 르우벤이 패륜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죽기 전에 모든 형제들 앞에서 죄를 축복이랍시고 언급하는 장면에서 지독한 괴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다른 형제들에 대해서도 발견됩니다. 5~7절에서는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축복이 이어집니다. 5절을 보면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겜에 머물 때 디나가 욕보임을 당한 사건에 대해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를 핑계로 세겜 남자를 몰살한 사건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6~7절을 보면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것이 과연 분량대로의 축복일까요? 야곱은 노골적으로 시므온과 레위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으로 레위 지파에서 모세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로 선택받습니다. 야곱은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라고 했는데 정작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인도하는 성전의 집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앞날을 염두에 두자면 대체 야곱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쉽사리 짐작되지 않습니다.
주석들을 보면 야곱의 축복을 먼 훗날 사사 시대라든지 가나안 땅에 진입하여 왕국 시대가 시작 되었을 때 지파별로 분배받은 땅이 어떤 땅이냐로 연결하고, 장구한 역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상당히 억지스럽고 너무 궁색 맞습니다. 유다에게 주어진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는 축복은 예수님의 탄생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다 이외의 다른 아들들에 대한 축복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애초에 축복도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400년 노예 생활을 거쳐야 하는 이들에게 어떤 축복도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일까요?
실제로 축복의 내용들이 어떠한지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3절을 보면 스불론에 대한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라고 언급됩니다. 학자들은 정말로 스불론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 해변인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변 땅을 분배 받은 것은 아셀 지파였습니다. 설령 스불론 지파가 해변의 땅을 분배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당장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어서 14~15절을 보면 잇사갈에 대한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라고 언급됩니다.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라는 표현이 독특합니다. 이러한 묘사로부터 잇사갈은 순하고 충직한 성격이었으리라 예상됩니다. 반면 16~17절을 보면 단에 대한 축복이 이어지는데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라고 언급됩니다. 단이 잇사갈과는 반대의 성격을 가졌음이 예상됩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단 지파는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인을 받은 선민 십사만 사천 명이 언급될 때 없어집니다.
또 21절을 보면 납달리에 대한 축복이 이어지는데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라고 언급됩니다. 납달리가 암사슴 같아서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축복일까요? 이러한 언급 때문에 어떤 학자는 납달리 지파에서 노래하는 사람을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이 그 노래하는 한 사람을 위해 예언한 것일까요? 야곱이 그렇게 아꼈던 베냐민에 대한 축복도 의외입니다. 27절을 보면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라고 언급됩니다. 물어뜯는 이리를 어떤 의미에서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대체 야곱의 축복 같지 않은 축복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유다와 요셉을 제외한 나머지 열 아들들에 대한 축복은 야곱이 아들들과 함께 살면서 겪은 인격적인 특질을 보여줍니다. 납달리는 암사슴 같다고 했습니다. 암사슴은 위협 앞에서 민첩하게 피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로부터 납달리가 심각하고 부담되는 일에 깊이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머문다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해변은 배가 정박하는 곳으로서 무역의 장소였습니다. 이로부터 스불론은 이권을 추구하는 장사꾼의 기질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각 아들들의 인격적 특질을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야곱이 아들들의 인격적 특질을 언급하는 것을 축복으로 기록한 것일까요?
분량대로 축복하였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아들들에게 맞춰졌다는 것입니다. 몇 아들들은 단 한 줄로 그 인격의 특질이 언급됩니다. 르우벤에 대해서도 이제 와서 죄를 들춰내고자 했다기보다는 끓는 물 같아서 순간적인 정욕을 참지 못하는 인격적 특질이 있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도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잔악함을 드러낼 수 있는 인격적 특질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언급이 축복인 이유를 18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들들의 특질을 언급해 나가던 야곱은 18절에서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전의 야곱은 기다리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주체적으로 뛰쳐나가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강요했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이제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삶이 복임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18절은 삶을 향한 주체성이 완전히 죽었음을 고백하는 야곱의 심정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야곱이 아들들의 인격적 특질을 나열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옛 야곱처럼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바라보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 각자의 인격적 특질대로 주체성을 발휘하였습니다. 단의 호전성과 교활함, 스불론의 이권을 탐함, 납달리의 어렵고 힘든 일을 피하려는 모습, 잇사갈의 나귀로 비유되는 순하고 충직함 같은 인격적 특질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이들 각각의 인격적 특질이 영광의 세상 것을 보면서 주체적으로 나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야곱은 18절에서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말로 그 핵심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격적 특질이 400년 노예 프로젝트를 통해서 없어져야 할 부분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갖는 것이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전 단계는 나의 주체성의 죽음입니다. 나의 인격적 특질로부터 다양한 색깔로 나타나는 삶에 대한 주체성은 노예 프로젝트를 통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들의 인격적 특징을 축복으로 나열한 이유입니다. 쉽게 말해 ‘다양한 색깔로 나타나고 있는 너희들의 인격적 특질과 주체성은 앞으로 다가올 400년 노예 프로젝트에 의해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선민에게 허락하신 복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축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 축복한 내용을 보면 저주에 가깝습니다. 6절에서는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라고 했고 7절에서는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잔혹한 피바람을 일으키는 인격적 특질과 색깔로부터 나타난 주체성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기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복을 아는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축복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주를 퍼부어야 되는 상황이 임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화 있을진저”를 무한 반복하시며 질책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말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고난이 임하리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율법을 지킨다는 이유에서 자기 주체성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내가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내가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주실 것이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들에게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참혹한 고난의 상황이 저주처럼 주어져서 완전히 그 주체성이 묵사발 나야만 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될 복의 지점까지 도달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와 요셉에 대한 축복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앞서 우리는 유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여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베레스가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갑니다. 그 사건이 유다로 하여금 자신이 주체적으로 손대는 일마다 모두 혼란과 혼돈의 파국으로 치닫게 됨을 깨닫게 했습니다. 일찍이 유다는 요셉을 애굽에 팔도록 형제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랬던 유다가 나중에는 베냐민이 인질로 잡혀야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청합니다. 모든 형제들 중에서 유다만이 자신의 인격적 특징과 색깔이 드러나도록 주체적 삶을 살면 결국 괴물이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는 축복의 문 앞에 와 있었습니다. 내 인격적 특징과 색깔을 드러내며 산다는 것은 나를 괴물로 만드는 일입니다. 내 삶은 혼돈과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삶을 향하여 주체적인 나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라야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축복의 문턱에 와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요셉은 이미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고 있었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축복에 대해서는 아버지 야곱보다 요셉이 더 선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야곱을 축복해야 하는 처지였던 셈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에 기록된 요셉에 대한 내용을 보면 무성한 가지, 깊은 샘, 젖먹이는 복과 태로 언급됩니다. 앞으로의 일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많은 사람을 살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적 이끄심 안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풍요로움을 누리는 상황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정리해 봅니다. 본문 전체의 내용을 보자면 각 사람의 인격적 특질에 대한 맞춤형 축복입니다. 얼핏 축복과는 무관해 보이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등장한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광의 세상 것을 붙잡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 주체가 되어 살고 있는 사람에게 진정한 축복은 주체성의 죽음뿐입니다. 나의 인격적 특질에서 비롯된 주체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삭제되고, 절단되고, 끊어지고, 지워지고, 없어지고, 말살되고, 뿌리뽑혀야만 합니다. 야곱은 바로 그렇게 죽어야만 하는 인격적 특질을 언급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진정한 축복으로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영광의 세상 것을 보고 있고, 세상 삶에 대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있는 상태에는 십자가 죽음이라는 저주를 퍼붓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내가 죄와 저주에 찌들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9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을 갖는 마음 상태에서는 세상 것들은 도저히 마음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을 때는 이렇게 배설물에 준하는 것들을 자꾸 갖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겠다고 세상을 향한 주체성이 발동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마주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갖는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하고, 오직 아버지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삶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의 인격적 특질과 색깔이 드러나는 상태는 저주를 받아야 되고 말살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축복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 대한 축복을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 비유라고 생각하여 각 아들들의 인격적 특질과 색깔을 상상해 보시면서 동서남북 교회에서 이야기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인격적 특질과 색깔을 띠고 나타나는 주체성이 노예 생활을 통하여 반드시 멸절되어야만 진정한 축복에 이를 수 있기에 야곱은 이러한 언급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분량대로 했던 축복에 담긴 의미입니다. 없어져야 할 것을 이야기함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축복을 오해했습니다.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갖는 삼각주 안에 들어간 마음에서는 배설물처럼 여겨져서 도저히 가질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들을 가지고 싶어 안달복달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이 세상 것을 많이 받으라!’는 이야기를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축복이 아닌 진정한 저주입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향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은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고 세상 삶에 대해 주체가 된 상태에서는 오히려 진정한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를 무한 반복하시며 질책하셨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질책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실 수 있는 최선의 축복입니다. 우리의 축복의 개념 자체가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떤 권사님이 남편의 사업 때문에 신앙생활을 못하는 문제로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나가서 날마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사업해서 돈 벌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 믿는 복을 누려야지 돈 버는 것은 복이 아니다.’라고 계속 기도하셨더니 정말로 남편의 사업이 망했다고 합니다. 이후 남편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고 장로님까지 되시더니 믿음 생활 속에서 사업도 다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그분들을 만나서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 정도로 깊이 있고 실감 나게 진짜 축복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전혀 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그 복에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로서 저주가 필수적입니다. 노예 생활로 예표 된 십자가를 통해 세상 삶을 향한 인격적 특질과 색깔을 띠고 나타나는 주체성이 뿌리뽑혀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특질과 색깔이 뿌리뽑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셉처럼 허락하신 축복을 누리게 하시고, 유다처럼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세상에 대해서 주체성이 죽어 노예의 위치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머지 열 아들들의 특징과 색깔이 어느 것이 나와 가장 부합하는지 이제는 무조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의 주체성이 표현되는 특질과 색깔이 앞으로는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