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광섭 관장님의 <울산 역사문화의 이해> 후기입니다. 강의 주요 내용은 울산 역사의 이해, 울산의 근대와 현재, 울산의 문화재, 울산과 고래, 울산의 자연환경, 울산의 사람들입니다.
신관장님 특유의 활기참과 관객들과의 교감을 통해 강의는 시종 일관 열띤 호응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강의 참여 인원은 약 50여명 정도로 강당을 꽉 메운 느낌이었지요. 도광재의 수리 관계로 강당에서의 조촐한 뒤풀이도 좋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울산은 문화복합도시로서 현대의 대한민국이 가난을 극복하고 공업화에 성공케 하는데 기여한 일등공신 도시입니다. (면적: 1057.50㎢, 서울의 1.7배, 인구: 약 120만명, 대한민국 7대 도시)
현재의 울산은 1914년 울주군이 설치된 데서 시작됩니다. 60년대에는 공업도시 울산으로 거듭나, 중공업, 자동차. 석유화학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산업의 중추적인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고 울주군과 언양, 경주 일부를 통합하여 울산광역시가 되었고, 현재는 인구 120만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팽창에 비해,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한편, 울산 사람의 특징은 검소하고, 한편으로는 인색하다 할 정도의 평가 받기도 하며,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 많고, 그러기에 장사도 많다고 합니다.
이 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우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 왔습니다. 대곡천변에 산재한 공룡발자국,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 그리고 원삼국시대의 삼한 유적 등은 일찍부터 울산이 우리 역사에 기여해 온 흔적을 잘 보여 줍니다.
울산에는 구석기 유적이 존재합니다. 무거동 옥현유적, 신화리 유적 등인데요,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생활의 터전을 잡은 울산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뜻이겠지요
또 신석기시대에는 우리나라라 신석기유적으로 꽤 유명한 신암리 유적이 존재합니다. 특히 여기에서 나온 <흙으로 만든 여인상>은 당시의 미인의 기준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 주지요. 당시 미인상은 어떠했냐고요? 음.... 지금 같이 ‘S’라인 미인이 아니라 살집이 풍부한 뚱뚱한 여성이 진짜 미인이었지요. 당시엔 풍부하게 먹을 수 있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진짜 미인이었겠지요. 이 여인상은 당시 사회가 지향했던 다산과 건강의 기원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물로 중요한 하나는 황성동 세죽유적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화살촉이 박힌 고래 뼈>입니다. 고래를 그렇게 잡았다는 증표가 되니까요. 뭐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 뼈를 증거로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시기가 신석기시대라는 주장이 특히 이 지역 학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청동기시대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또 이곳 세죽유적에서 발견된 흑요석은 일본산으로서 당시의 문물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산물이랍니다. 이 밖에도 울산의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우봉리유적, 성암동유적, 궁근정리 유적 등이 있습니다.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우리 청동기 역사에 있어 괄목할만한 유적 <울산 검단리>가 등장합니다. 이 유적은 약간 높이가 있는 구릉지에 조성 되었는데요, 주거지 외에 대규모 회합 공간인 광장, 거기에다 이 주거단지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나라 발굴에서는 처음발견된, 환호시설이 확인됩니다. 여기에서 출토된 손잡이가 달린 토기는 특별히 <검단리식 토기>라고도 명명됩니다. 또 주거지는 울산형 주거지라 불리기도 하는데요, 주거지의 가장자리애 또랑을 판 것이 특징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가 연암동 유적에서는 주거지 주위에 환호까지 둘렀지요. 그런데 발굴 후 이들 유적은 제대로 보존과 활용이 안 되고 있어 안타깝다는 평입니다. 어떤 유적은 유리로 덮어 위에서 내려 보게 했는데 습기가 차서 제대로 볼 수도 없다고 하네요. ,
원삼국시대에 이르면 웅천 하대리 유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울산’이란 지명의 기원이 된 <우시산국>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유적에서 나온 세발 달린 청동 솥은 제작기술과 조형미도 뛰어나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솥이 이 지역 지배층의 신성한 의기였다는 것이고, 중국의 역사에 나오는 천하의 패권을 상징하는 <9정>과 비교됩니다.
울산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하나는 삼한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철이 생산되던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달천유적이 대표적인 곳인데요, 비소(As)함량 조사로 경주 등지의 철리 이 곳에서 공급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철 생산의 주요산지여서인지 중산동 유적에서는 판갑옷과 투구와 같은 철제품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철의 생산은 울산을 있게 한 힘이었고, 오늘 날의 공업도시 울산의 기원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거 같습니다.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의 울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처용설화입니다. 다들 아시지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한 번 읽어 보시지요.
처용은 설화(說話) 상으로는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이다.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길을 잃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까닭을 물으니, 일관(日官)이 “이는 동해 용의 조화이오니 좋은 일을 행해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이곳을 ‘개운포’라 하였다.
동해의 용이 기뻐해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왕의 정사를 도왔다. 그리고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이 그에게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여 머물러 있도록 하고, 급간(級干: 級湌)의 관등을 주었다. 아내가 대단히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흠모한 나머지 사람으로 변해 밤에 몰래 그 집에 가서 동침하였다.
이 때 밖에서 돌아온 처용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에 역신은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당신의 아내를 사모해 잘못을 저질렀으나 당신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긴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당신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린 부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 들였다고 한다.
처용이 지어 부른 노래를 「처용가(處容歌)」라 하고, 춘 춤을 처용무(處容舞)라 하여 후대까지 전해 내려왔다. 한편, 처용을 당시 울산지방에 있었던 호족(豪族)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시 신라에 내왕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또는 경문왕가와 화랑의 친연성을 고려하여 화랑집단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처용이 등장한 헌강왕(憲康王)대는 사치스런 왕경(王京)의 번영과 호국신(護國神)들의 잦은 출현, 가무(歌舞)의 성행 등으로 상징된다. 더욱이 이러한 번영의 모습이 정강왕(定康王)에 이은 진성여왕(眞聖女王) 시기의 혼란과 분열의 모습과 이어져 있어 신라 멸망의 원인을 헌강왕대 사회에서 찾기도 한다. 처용설화 역시 이러한 헌강왕대 정치 사회적 정황의 한 표상인 것이다. 용신신앙, 호국신신앙, 벽사진경(辟邪進慶) 등의 사상은 헌강왕이 속한 신라 하대 신앙의 일단면과 아울러 그 배경이 되는 하대의 사회·정치상을 보여준다.
이런 내용입니다. 신라의 수도는 경주였지요. 그리고 울산은 수도 경주의 관문이었습니다. 당시 물류는 수로 교통을 통해 대량의 유통이 이루어졌고요, 울산은 해상을 통해 신라가 뻗어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지요. 그 것이 울산의 위상입니다. 요즘의 인천 같은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 현대를 빼면 이 때가 울산이 가장 번성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여지네요. 울산의 반구동유적은 당시 항구 울산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하겠지요.
고려 초기 울산은 박윤웅이 후삼국 통합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흥려부(興麗府)로 격상되었고요, 오늘의 울산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울산 중심지는 학성산과 반구동유적 토성, 이 일대였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게 되어, 이를 방비하기 위해 1385년(우왕 11)에 울산읍성, 1390년(공양왕 2)에 언양읍성을 축조했다고도 합니다. 또 하나, 고려시대의 주목받는 유적으로 연자도(燕子島) 유적이 있습니다. 이 유적은 온산 앞바다의 작은 섬으로, 고려시대 건물지 20여 동, 구덩이 300여기가 발굴 되었고, 여기에서 청자대접과 접시, 기와, 금동불상, 철제 솥, 젓가락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때 울산 지배층 일부가 연자도로 피신하여 항거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조선시대에는 울주(蔚州)라 불렸습니다. 태종 13년(1413년) 울산군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울산은 군사적 요충지여서 경상도 육군과 수군 본부에 해당하는 병영과 수영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에 의해 서생포왜성과 울산왜성(도산성)이 축조되었는데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울산왜성에서 두 차례나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1597년 조명연합군은 서울로 북상 중이던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여 다시 동남해안 쪽으로 밀어내었는데요, 이 때에 다시 서생포왜성으로 돌아온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이 북방 30km 떨어져 있던 최전선인 울산에 왜성을 축조한 것이 도산성(울산왜성)입니다.
근현대의 울산은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울산광역시 홈페이지에 게시된 <울산광역시의 연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한시대>
•진한에 속함
<삼국시대>
•신라 제5대 파사왕 때 굴아화현을 취함
<고려시대>
•태조 때 하곡, 동진, 우풍의 3현을 합하여 흥례부로 승격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년) 울주를 울산군 개칭
•선조 31년(1598년) 울산도호부로 승격
•고종 32년(1895년) 울산도호부가 울산군으로 개칭
<1900년대 ~ 현대>
** 근대
•1914년 부, 군을 정리하는 지방제도 개편 시 언양군을 울산군에 병합
•1931년 종래의 면제를 개편, 울산면을 울산읍으로 승격
•1936년 방어진면을 읍으로 승격
** 현대
•1962년 1월 27일 각령 제403호로 울산 특정공업지구로 지정 공포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승격
•1985년 중, 남구의 구제 실시(2구 1출장소 40개 동)
•1988년 방어진 출장소를 동구청으로 승격(3구 40개동)
•1995년 1월 1일 울산시, 군 통합
•1996년 12월 31일 울산광역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공포(법률 제5243호)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출범
이 밖에 울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울산의 인물입니다. 몇 분 들어보면 신라의 충신 박제상, 독립운동가 박상진, 한글학자 최현배, 민속학자 송석하, 소설가 오영수, 가수 고복수와 윤수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더 관심을 가는 것은 고래잡이 기지 장생포를 비롯한 고래 관련 콘텐츠와 태화강 대공원과 십리대숲, 대왕암 공원, 산불산 억새평원, 외고산 옹기마을 등지와 같은 풍부하고 매력적인 관광자원입니다. 공업도시인 줄만 알았는데, 그리고 보니 유서 깊은 역사의 내력과 볼거리도 많은 도시 중의 도시가 울산이었네요. 참 멋진 도시 울산입니다. 이러한 울산의 참모습을 몇 달 동안이나, 조사, 연구, 분석하여 우리에게 한 시간 반 동안 축약하여 강의해 주신 신광섭 부대표님, 울산박물관장님께 감사의 박수를 힘차게 보내드립니다.
이상 후기를 마칩니다. 저의 게으름으로 후기가 늦었네요. 무더운 여름 모두들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소장님, 장문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 이 더위에 좀 늦게(?) 올리실만 하셨네요^^
이소장님 강의보다 더 자세한 후기를 올리셨습니다 이래서 우리 회원들은 행복합니다 바쁘신 와중에서도 이렇게 성의있는 후기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소장님! 후기 올리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잘 정리가 되어 강의를 듣지 못한 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통상 국가의 입장과 시각에서 지역사회를 바라보게 됩니다. 지역사적 관점에서 국가의 역사를 바라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서에 울산인을 崇武藝 好商買 稟性剛毅로 표현 하였는데 충신,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등이 배출되고, 울산이 산업도시인 것으로 보아 맞는 이야기인 모양입니다. 문인과 가수 등도 많이 배출된 것으로 보아 문예에도 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구대 암각화 보존문제가 슬기롭게 처리되어 이 유적이 세게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 상도4동에서 5년째 살고 있는 울산 출신 와이프랑 가야 했었는데 ~ 정말 아쉽네요 ~
2018년 도광포럼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