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교자 가정에는 예수성가정, 성모마리아와 같이 신앙의 본보기로 교회의 뿌리가 되신 분들이 많이 있다.
충남 진산면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의 고향이다.
차디찬 바람이 볼을 때리며 다가온다.
버젓한 기념성당 하나 없이 오래된 낡은 교회만이 십자가를 세우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여 광화문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등 124위 시복식미사를 집전한 후부터 진산은 주목받기 시작했던 거다.
대전교구는 청양 다락골성지를 개발하신 신부님을 파견하여 성지화 작업을 시작하였다.
대전교구 산하 성지 중에서 첫 번째 순례지로 진산을 잡았다.
이는 중요한 문제를 다시 확인하게 해주었다.
시대의 양반 가정이며 과거에 급제한
젊고 총명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받들었던 순교자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복자가 한국의 첫 번째 순교자로 기록되기까지는
그 분들이 받아들였던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앙을 기억해보아야 할 거다.
그 분들의 신앙은 성지순례의 이유를 가르쳐준다.
조선왕조는 아래로부터 위로 섬기는 제도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을,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 등 삼강오륜에 입각한 유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이 받아들인 천주교 진리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섬기는 거였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여 낮은 곳, 천한 곳에 친히 강생하여
자비의 손으로 인간의 죄를 씻어주고 영생으로 이끌었다는 천주교의 진리는 그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봉건적 사회에서는 땅이 뒤집힐 일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사랑을 만났던 거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의 어머니, 권상연 야고보의 고모였던 안동권씨는
천주교에 입문하여 유교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뒤집어 자신이 죽었을 때 제사를 금지하도록 유언했다.
당시 조선은 <가례>에 의하여 부모의 혼을 의탁하는 신주를 모시고 제를 올려야 했다.
당시 죽은 사람의 혼을 의탁하는 제례방식은 세 가지로 구분되었단다.
첫째, 망자의 웃옷에 실려서 시신을 의탁한다.
둘째, 목욕 후 혼백을 접어서 의탁한다.
셋째, 시신을 매장한 후 신주를 만들어 4대 손이 죽을 때까지 사당에 모시었다가 산소에 묻는다.
결국 망자의 혼이 신주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 제례의식이다.
이런 전통습관에 의해서 사람이 죽으면 신주를 모셨던 거다.
헌데 이를 거부하면서 신주를 불태워버리고
초혼제를 지내지 않았다는 것은 조정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극악무도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산사건’ 인 거다.
당시 양반과 상놈으로 구분된 신분사회의 근간을 뒤집는 일이었다.
천주교 교리는 만인평등사상으로 받아들였으며
상놈들은 죽기 전에 단 하루만이라도 천주교를 믿고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거다.
양반과 상놈이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거다.
하느님은 잘난 놈들보다는 사람취급 받지 못하는 자들을 먼저 찾아오시어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내미신 거다.
이런 하느님을 만났으니 그들에게는 양반은 다 허상이었을 거다.
두 분의 고향 교회 뒤편에는 아기를 업은 어머니가 서 있다.
이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의 어머니일 거다.
신분제도의 높은 벽과 반상의 불합리한 봉건적 제도 하에서 강압되어온
가례의식을 파헤치고 만고의 진리이신 하느님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조선시대 양반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광야로 나선 거다.
양반의 아들과 조카에게 제사를 지내지 말도록 하였다.
그 분이 믿었던 하느님은 낮은 곳에 오신 분으로서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었던 거다.
그들은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상을 뒤집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 거다.
비녀를 찌르고 애기를 업고 있는 상은 한국의 성모상일 거다.
최초의 순교자를 낸 권씨가 복음의 씨앗을 전라도 땅에 훌훌 뿌려서 깊게 뿌리를 내려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한 거다.
신약 성경에서도 여인의 힘은 복음의 씨앗을 잘 간수했던 자비스런 자궁이었던 거다.
<2018. 2. 10 진산성지에서>
첫댓글 순례길의 목적을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하여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봉건사회는 아래에서 위로 섬기고 천주교는 위에서 아래로 섬기는 진리는 오래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