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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기술
"사랑이란 한 순간에 피었다가 지고마는 감정 따위가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자 결단이다" - 에리히 프롬 -
즉 사랑은 감정적 경험이 아니라 이성적 훈련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하는 단련된 기술의 산물이라는 말씀이죠. 하지만 사랑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프롬과는 무척이나 다릅니다.
▣ 사랑에 대한 대중의 인식?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그저 누구에게나 불쑥 찾아오는 자연스런 감정으로 여길 뿐, 훈련이나 기술이 필요한 행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프롬은 이러한 대중의 인식을 사랑에 대한 오해라고 단호히 못박으며 그러한 오해가 발생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사랑을 '하는' 문제보다는 '받는'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다시말해,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상대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는 데에만 집중한다는 것이죠. 이 경우 사람들은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매우 불행하게 인식하며, 심지어 이별을 결심하기도 합니다. 받지 못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착각하기 때문이죠.
두번째 배경은 사랑을 능력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로 바라보는 인식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이 실패하는 이유가 단지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자신에게 사랑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끝없이 더 좋은 사람을 찾아 이곳저곳을 방황할 뿐입니다.
세번째로는 사랑에 빠지는 최초의 순간만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즉 연애 초반에 경험하는 감정의 폭발만이 사랑의 뜨거운 증거라고 여기며, 그러한 열정이 식은 뒤 권태로움이 밀려오면 마침내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프롬은 마음의 온도를 근거로 사랑을 정의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그동안 서로가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방증할 뿐이라는 설명입니다.
▣ 마음의 온도는 외로움의 반영
프롬은 사랑에 대한 이 세가지 오해들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즉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며, 사랑의 '대상'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고, 또한 감정은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프롬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감정적인 사랑은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 실존적 고독 : 유일한 해결책은?
프롬에게 사랑이란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존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 대해 프롬은 인간과 동물을 비교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설명합니다.
프롬에 따르면 동물은 살아남는 데 필요한 본능을 자연으로부터 이미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동물은 자연이 그들에게 선사한 본능에 따라 그저 순응하여 살아갈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동물의 삶은 처음부터 자연에 의해 결정된 삶이라고 할 수 있죠. 다시말해 동물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에 예속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부단히 개발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컨대 인간에게는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도, 추운 날씨에 견딜 수 있는 털가죽도 없지요.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노력은 세상이라는 벽 앞에서 쉴새없이 좌절되곤 합니다. 또한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지요. 즉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연과의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연과의 단절감은 인간에게 고독과 불안을 선사하죠. 이를테면 이 커다란 세상 속에 자신만 홀로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 즉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고립된 단독자라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프롬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인간의 실존적 문제이며, 사람들은 이러한 고독감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고 설명합니다.
첫번째는 도취적인 해결 방식입니다. 가령 원시 부족들이 단체로 성적 황홀경에 이르는 의식들이나 혹은 그 밖에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성적 도취 등이 포함되지요. 프롬에 따르면 그들은 도취 상태로 회피함으로써 자신이 단독자라는 사실을 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집단과의 합일입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과 강력한 일체감을 형성함으로써 자기 내면의 고독감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죠.
세번째는 창조입니다. 창조란 말 그대로 자신이 의도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동적인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창조자는 자신이 세상에 의해 운명 지어진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외부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동적 존재라고 자신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창조자는 자신이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깊게 참여하는 존재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프롬은 이러한 방법들이 인간의 실존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안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상실하는 것이며, 또한 권위주의에 물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프롬은 사랑을 제안합니다. 인간의 실존적 고독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과의 합일, 바로 사랑이라는 설명이죠.
그렇다면 프롬이 꿈꿨던 사랑은 무엇일까요?
▣ 성숙한 사랑의 특성
프롬은 사랑을 공서적 합일과 성숙한 사랑으로 구분합니다. 먼저 공서적 합일이란 각자의 개성과 자율성을 상실한 채 서로에게 의존하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양상에 따라 다시 한 번 두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로 수동적인 공서적 합일은 피학대 음란증, 즉 마조히즘에 해당하는 것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실존적 고독을 회피하는 성향입니다. 반면 능동적인 공서적 합일은 가학성 음란증, 즉 사디즘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대를 자신에게 복종시키거나, 혹은 상대에게 명령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려 합니다. 이 또한 실존적 무력감을 잘못된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심리이죠.
그런데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공서적 합일의 흔적들은 보통의 관계속에서도 발견된다고 하겠습니다. 예컨대 연인 사이에서 상대방의 복장을 통제한다던가, 혹은 중요한 선택을 상대에게만 내맡기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서적 합일의 관계는 실존적 고독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을 외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복종시키거나 복종 당함으로써 자신이 단독자라는 사실을 은폐할 뿐인 것이지요. 따라서 프롬은 실존적 문제에 대한 성숙한 사랑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프롬에 따르면 성숙한 사랑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두 사람이 각자 자기다움을 유지한 채로 맺는 관계를 뜻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앞서 예로 든 것처럼 상대의 자기다움을 헤치려 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자기다움을 포기하는 공서적 합일은 성숙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성숙한 사랑은 능동적인 활동입니다. 다시말해, 사랑은 수동적으로 경험되는 감정, 이른바 격정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이성적 활동이라는 이야기지요. 따라서 성숙한 사랑은 설레고 흥분되는 감정에만 맴돌아서는 안 되며, 구체적이고 분명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셋째로 성숙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ㅡ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다만 이때 우리는 꼭 물질적인 것을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는 그저 따뜻한 눈빛과 진심어린 말 한 마디로도 상대방의 삶으로 뛰어들 수 있지요. 가령 우리는 상대에게 진지한 관심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며, 그의 행복감을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우리의 '주는 사랑'은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주는 사랑에 동참하도록 이끕니다. 예컨대 따뜻한 눈빛을 건네 받은 상대방은 그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귓가에 속삭일지 모르지요. 즉 사랑을 '주는 것'은 상대방도 '주는 자'로 이끄는 길이며 따라서 '주는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갖는다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성숙한 사랑의 요소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 성숙한 사랑의 자질
프롬은 성숙한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로 다음의 네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보호란 상대방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뜻합니다. 프롬은 이를 꽃을 기르는 한 여인에 빗대어 설명하죠. 예컨대 꽃을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정작 물을 주지 않아 꽃을 죽게 만든다면 이는 성숙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즉 성숙한 사랑은 상대방의 생명과 성장을 보호하기 위한 능동적인 행동이어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둘째로, 책임이란 상대방의 문제를 나의 문제처럼 여기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즉 상대방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기꺼이 함께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존경이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또한 상대방의 고유한 개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이러한 존경의 태도가 없다면 자기통합성을 상실한 공서적 합일의 관계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지식이란 상대방의 핵심으로 다가서기 위한 지식을 뜻합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꽃을 기르는 여인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꽃을 온전히 보호하고 책임지기 위해선 어떤 주기로 물을 줘야 하는지, 물의 양은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겠지요.
만약 이러한 지식을 갖지 않은 채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무작정 물을 들이붓기만 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지식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행동 양식을 구성할 수 있지요.
프롬은 이상의 네 가지 요소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서로의 발달을 돕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소들을 필요로 하는 사랑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 사랑의 유형
프롬은 사랑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첫째로 형제애란 모든 사랑의 밑바탕에 놓인 보편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어떠한 배타성도 존재하지 않는 사랑, 즉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인류애적 사랑이라 할 수 있지요.
둘째로 부모의 사랑은 모성애와 부성애로 구분됩니다. 먼저 모성애란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즉 보호의 원리를 상징하며, 부성애란 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즉 사회의 원리를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부성애는 합당한 행동에 대해서는 상(賞)을, 부적절한 행동에는 벌(罰)을 내리는 교육의 원리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아이는 사회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롬에 따르면 우리는 모성애와 부성애를 균형있게 종합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지요. 즉 우리는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하고 책임지려는 모성애적 태도와 더불어, 상재방의 왜곡된 도덕성을 안타깝게 여길 수 있는 부성애적 태도를 겸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애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타인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자기애는 이기심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기심은 타인을 외면하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배타적인 감정이지만 건강한 자기애는 만인을 향한 사랑 안에 다만 자기 자신도 포함시키는 사랑이라 할 수 있지요.
넷째로, 성애(性愛)는 연인 사이의 사랑을 뜻합니다. 프롬에 따르면 성애 또한 마찬가지로 연인 간의 배타적인 사랑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애는 한 사람과의 약속이라는 측면에서 일면 배타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바람직한 성애는 인류에 대한 사랑, 즉 형제애에 바탕해야만 한다는 설명입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우리만 행복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니라 두 사람의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다는 설명입니다.
끝으로 신에 대한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프롬에 따르면 인류가 초기에 숭배했던 신은 모계적인 신이었습니다. 즉 대자연 속에서 무력감을 느낀 인간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는 따뜻한 어머니를 필요로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사람이 늘고 사회가 형성되자 사람들은 서서히 부계적인 신을 찾게 됩니다.
사회가 올바르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머니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더불어 합리적인 질서와 규칙, 즉 아버지 신의 지도 원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훌쩍 흘러 현대에 이르게 되면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크게 변화합니다. 더이상 인간은 외부의 신에 의지할 필요 없이, 스스로 신의 원리를 자기 내부에 확립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과거에 신을 숭배했던 단계를 지나 스스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갖춘 사랑의 화신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랑의 기술 : 노력하는 사랑
프롬은 성숙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성숙한 사랑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을 거듭해야 하며, 또한 온전히 상대에게 몰두하는 연습과 더불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마음 가짐을 유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훈련의 과정이 더딜지라도 인내를 가지고 임할 수 있어야 하며, 사랑의 성장에 대한 분명한 관심을 갖고 사랑의 능력을 계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고루 갖출 때, 비로소 우리는 성숙한 사랑으로 다가설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실천하고 또 무엇을 훈련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프롬은 크게 두 가지를 주문합니다.
하나는 자아도취의 극복이며, 또 하나는 신뢰의 회복이죠.
먼저 자아도취란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상대방의 언행을 자기 식대로만 해석하며,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는 진정한 소통을 방해할 뿐 아니라 상대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혼자만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겸손함을 갖고, 타인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즉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고 서로의 사랑이 더욱 깊어질 수 있음을 기대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로써 에리히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프롬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삶의 양식을 두 가지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소유적 삶이란 물질화 된 가치에 매몰된 삶의 양식입니다. 가령 돈이나 지위, 혹은 지식 등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며, 그것의 증식과 확대를 삶의 목표로 삼는 양식입니다.
이에 반해 존재적 삶이란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삶의 양식입니다. 즉 존재가 지닌 본연의 의미를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삶의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삶의 양식은 사랑에 관해서도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예컨대 소유적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과 발전에 관심을 갖기보다 상대를 자기 내면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소유물로 대하는 마음일지 모릅니다. 상대방이 지닌 본연의 의미 대신 그의 가치만을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우리 사회가 여성들에게 정절과 순결을 강요했던 것도 여성을 존재 그 자체가 아닌 소유로 바라봤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소유적 사랑은 존재와 존재가 아닌 소유자와 소유물 사이에 형성되는 매우 폭력적인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존재적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사랑입니다. 즉 사회가 그의 가치를 어떻게 펑가하든 우리는 상대방의 존재를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왕자의 이야기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성숙한 사랑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성숙한 사랑의 전문기술자기 되시기를 응원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유자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