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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전3권 중 제3권
지은이: 조영래
제4부 전태일 사상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전태일의 수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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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노동판에서 본 것
1969년 10월 초순 어느 날 전태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 어머니에게 평화시장에
일하러 갈테니 빨리 도시락을 싸 달라고 재촉했다. 이미 평화시장에서 해고 당한 지
오래 지난 때였지만 낙담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며칠 전부터 다시 취직이
되었다고 속여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전날 저녁에 한 친척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었다. 밥상머리에 앉아
아들에게 그 얘기를 물어보았다.
"너, 사람들이 그러는데 노동일 하러 다닌다며?"
아들은 된장국을 입에 떠넣다 말고 숟가락을 놓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날 저녁 풀이 죽어 돌아온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더란다.
평화시장에는 이제 정말이지 발 붙일 데가 없고 놀고 있기는 어머니 보기에
너무 미안해서 그 동안 공사판에 나가서 일해왔다. 벌써 한 20일 가까이 되었는데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느낀 것이 많았다. 역시 사람이란 이것저것 다 해봐야
되겠더라. 요즈음은 숭인동 어디에 집 짓는 데가 있어서 거기 나가 일하고
있는데 오늘 낮에는 자칫하면 일하다가 죽을 뻔했다. 자갈 져나르는 인부 중에
나이 한 마흔 좀 더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있는데, 낮이 되면 배가 고파서
자갈지게 지고 발발 떨면서 사다리로 허덕허덕 올라가는데 그이가 곧 떨어질 것만
같이 느껴져서 정신없이 그이만 쳐다보다가 나도 하마트면 떨어질 뻔했다. 공사판
인부들이란 다 그날그날 벌어서 그날그날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요사이 노임이
제때제때 안 나와서 딱해서 못 보겠다. 그 아저씨는 내일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일
못 나오겠다고 하는데 내가 내일 현장책임자에게 이야기해서 그 아저씨 돈 좀
받아줘야겠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속이 답답해왔다. 어머니 역시
일제치하에서 정신대로 끌려간 것을 비롯하여 그 뒤로도 몇 차례 공사판 노동을
해본 경험이 있었던 터라 노동판의 실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가다판에서 막일을 하는 인부라면 핫빠리 중에서도 핫빠리인생, 그야말로
'막가는 인생'이 아닌가? 어릴 때부터 남들한테 미련하다는 소리는 안 들었고
남달리 착한 편이라 자라면 크게 되기까지는 못해도 제 구실을 하겠지 하여 태일이
하나 어서어서 자라기만 고대하며 그 지긋지긋한 반생을 살아오다시피 하였던
어머니로서는 태일이가 끝내는 노동판 막벌이 인생으로까지 굴러떨어지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에 속이 터지고 세상 살기가 싫은 실정이었다.
평화시장에서 고분고분 제 할 일이나 하고 기술이나 배우고 있으면 될 것을
이상한 고집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된 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도 다 누구 때문인가? 딴 부모들처럼 가르치지 못하고 뒤받들어주지
못한 이 못난 애미 때문이 아닌가? "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나? 다 부모 잘못
만난 죄지."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자꾸만 솟구쳐 오르는 통곡을 숨죽여
삼키며 어머니는 눈을 떴다.
'없는 자'의 설움, 그것을 어머니는 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 그 서러운 '없는 자'의 대열에서 내 아들만은 벗어나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알기 때문에 또 한편 내 아들이 스스로도 없는 자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마음 아파한다는 사실이 대견하기도 하였다. 가슴속을
뜨거운 것이 흐르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통곡만은 아니었다. 결코 부끄러운
자식이 아니다. 남들이 다 뭐라 해도 자랑스런 아들이다. 가난한 자의 설움,
그것을 누가 알랴? 내 아들인 네가 알아주지 않는다면 누가 알아주랴? 어머니는
아들을 보았다. 땀에 절어 다 헤진 검은 작업복, 버쩍 야윈 몸매, 핏기없는 얼굴에
노동과 고뇌로 지친 힘없는 눈매. 저 몰골을 하고서 제 주제에 그래도 저보다
못한 사람도 있는지 남을 동정한다고 하고 도와준다고 하다니 뜻없이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했다.
"너 거기서도 노동운동 하니? 그러다가 거기서마저 쫓겨나면 어쩔래?"
아들은 웃었다 얘기를 하면서도 내내 어머니에게 신경이 쓰여 가슴이 죄었는데
뜻밖에도 대범하게, 저렇게 농담을 하시니 기뻤다.
그 다음날도 태일은 노동판에 나갔다가 밤늦게 축 늘어져서 돌아왔다. 그러나
무척 명랑한 표정이었다. 어제 이야기하던 그 아저씨 일이 잘 되었다는 것이었다.
낮에 그 아저씨랑 책임자를 찾아가서 "이 아저씨 밀린 노임 5천원만 좀
주셔야겠다"고 요구하니까 그 책임자가 자기를 돌아보면서 "너는 누구냐?"라고
하길래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딱해서 못 보겠어서 그런다"고 대답하면서 그
아저씨 사정을 세세히 얘기했더니, 책임자가 호주머니에서 3천7백 원을 꺼내어 그
아저씨에게 주면서 "노임은 아직 지불할 형편이 못 되지만 그렇게 딱한 처지라니
우선 내 호주머니에 있는 돈이라도 받아 두시오"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 끝에
태일은 이렇게 덧붙였다.
참 돈이 좋기는 좋은가봐,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니.
그 아저씨 글세 조금 전까지도 곧 죽을 듯이 그렇게 기운이 없어 하던 양반이
돈 3천 7백 원 받고 나니까 갑자기 어디서 기운이 그리 솟아나는지 그 무거운
자갈짐을 지고 곧 나는 듯이 사다리로 올라가더라.
이때를 전후하여 태일은 두 달 가량을 공사판에 다녔다. 왜 그랬을까? 돈이
필요해서였을까? 그것도 있었을 것이다. 한 달 꼬박 노동판에 다니고 나서
오랜만에 1만 원 조금 더 되는 돈을 집으로 가져올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평화시장에서의 그의 외로운 투쟁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이만 느껴지는
저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 부딪쳤던 그 깊은 좌절의 시기에 그리하여 끓어오르는
울분만 터뜨릴 방향을 잃은 채 그의 가슴속을 고통스럽게 맴돌 때 그는 빠져나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나, 너무나 시달려서 지쳐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죽음과 같은 고뇌를 자학적인 육체노동으로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잊어버리자! 잊어버리자!"이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꾸만 떠오르는 평화시장의
괴로운 기억을 지우며, 머리를 흔들며, 묵묵히 묵묵히 감정도 의지도 분노도 사랑도
없는 산송장처럼 노동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끝내 외면할 수
있었던가? 아니었다.
그는 거기서도 또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을 학대하고 짓밟아
불구화하는, 그리하여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으로 만들어버리는 저 잔혹하고
비정한 현실의 냉혈한 얼굴을. 평화시장만이 아니었다. 인간을 억압하는 현실의
힘을 전태일이 가는 곳 어디에서 뻗어 있었다. 그는 도저히 도피할 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거리거리에서 현실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당한 인간들의 고통에 대한 괴로운 연민이 그의 가슴에서 다시금 끓어올랐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 시기에 쓰여진 전태일의 글 하나를 소개한다. 이 글은
원섭이라는 그의 청옥 시절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쓴
날짜는 1969년 9월 30일경. 여기서 그는 고통받고 있는 민중에 대한 뜨거운
연대감과 애정을 절절한 필치로 표현하고 그들을 학대하는 억압적인 현실을
불타는 분노로써 비판,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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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섭이에게 보내는 편지
원섭아.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 얼마나 중대하고 이상한 현상이고 평범한 사실이냐? 너는 내가 아는 친구,
나는 네가 아는 태일이.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이야.
왜 펜을 잡게 되는지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그러나 속이 답답하고 무엇인가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심정이기에 쓰고 있는 것 같구나.
서울에 와서 5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너에게 할 말이 너무나 없다. 그러나
너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애통한 것을 너에게 심적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이렇게 펜대를 할퀴는 것이다. 누구에게 겨누어 할퀴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착잡한 심정을 어느 누구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불행히도 너는 나의 친구.
내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너는 나의 친구이니까 정이라는 것을 통해 너에게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을 보이는 거다. 너도 괴롭겠지만 보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나 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시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나는 한 보름 전에 그러니까 9월 15일경에 공사판에 품팔이를 갔었다네.
자네에게는 좀 이상하게 곧이 안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네. 그날은
날씨도 오늘처럼 침울하고 마음처럼 답답했네. 엷은 잿빛 구름은 온 하늘을
바둑판처럼 넓은 호수에 얼음이 녹는 것 같이 뒤덮고 있었으니까.
그 전날 마음에 다짐을 해서 그런지 아침 5시 40분에 이부자리를
걷어치워버렸어.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이런 시간에 기상을 했다는
것은 백과사전을 다 두들겨보아도 없는 사실일세.
우리 집안 식구들도 이런 나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네.
이상하지만 그저 두고보자는 것일 거야.
곧 양치를 하고 세수하고 낡은 작업복바지를 꺼내 입고 팔꿈치가 보이는 검정
와이셔츠를 바지춤으로 집어넣고 허리띠를 불끈 매었네. 불과 십분도 안 걸렸을
걸세. 어머니께서 아무 말씀 없으신 것이 이상하네. 꼭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데
한 마디의 말씀도 없이 밥상이 들어왔네. 이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일세.
나는 지금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이든지 먼저 하시면 그것을 서두로 해서 오늘
아침의 나의 행동에 관해,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일에 관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려고 버텼지만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내 방엔 두문불출이시니
조용히 식사는 끝나고 아침해가 조금 머리를 내밀었네. 아무말 없이 집을 나왔네.
6시 20분이었네.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이상하네. 어머니의 행동이 마음에 걸려 땅만
내려다보면서 뻐스정류장까지 왔네.
아! 그렇다! 자학이다. 지극히 못난 행동이다!
내가 얼마나 바보였던가. 장사광주리를 이고 그 만원뻐스를 타려고 안간힘을
다 하시는 어떤 부인을 보고, 나는 그만 나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네.
보라! 얼마나 정직한, 충실한, 거짓이 없는, 생존경쟁의 한 인간이냐?
불쌍하다면 곧 집터를 닦을 자리에다 집을 짓고 있는 개미보다도 더 가엾고,
밉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네
이런 어질고 꾸밈없이 현실 그대로를 알몸뚱이로 하나라도 놓칠세라 있는 힘을
다해 약한 자기와 불쌍한 자기의 분신을 위해 강한 이상을 동원하여 팔과 허리
사이를 오리발의 물갈퀴처럼 벌리고 가시투성이고 얼음처럼 찬, 바위처럼 무거운
냉혈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떤 어머니.
왜 내가 저런 현실적인 인간을, 사람을, 내가 정신적으로나마 학대해야 된단
말이냐? 나는 오늘 아침 분명히, 어머니를 정신적으로 학대한 걸세. 그리고 나
자신을 학대한 걸세.
어머니께서는 내가 공사장에 삽질을 하러 간다는 것을 알고 계셨거든. 약한
내가, 그런 일을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자기의 소중한 전체의 일부가 오늘
뜨거운 태양 아래 비지땀을 흘려야 한다. 신체적으로 약하고 자존심이 강한 내가
하루를 무사히 넘길지, 정신적으로 얼마나 많이 상처를 당할 것인가를
생각하신 걸일세. 어미의 그런 심정을 자식은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부조리한
현실을 자식은 어미의 책임인 양 학대했던 거야. 무언으로 책임추궁을 했던 거야.
대답을 못하게 해놓고 대답을 아니한다고 자신에게 냉소했지. 언제나 그랬듯이
언제나 그렇구나.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현실이 나를 보고 외면하고 냉소한다고 나도 현실과 같은 패가 되어 나를
조롱하는구나. 조롱과 냉소가 지긋지긋하고 너무나도 답답했어 잠시나마
본래의 나를 밀어놓고 감정의 나는 입을 비죽거렸던 것일세.
뻐스가 왔네.
콩나물시루 같다고 흔히들 말하지. 뻐스는 고무풍선처럼 자꾸 늘어났고 머리가
긴 화려한 산소, 모자를 쓴 산소, 형형색의 산소들은 철판과 유리로 된 벽돌을
힘껏 밀었지. 조금이라도 더 크게 늘리려고.
드디어 하나 둘 비명소리를 내기 시작했네. 자기의 존재를, 지금 당하고 있는
형편을 좀 알아달라고 거의 동물과 같은 신음소리를 내는 것일세.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알아준단 말이냐?
어찌하란 말이냐?
내가 탄 뻐스엔 한 백 명은 탔을 것 같네. 벌써부터 땀이 나고 공기가 희박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다. 뭇 짐승보다 천대를 받는 인간들. 그것도 인간이 만든
차에게 말이다.
앞에 젖소가 트럭에 실려간다.
다섯 마리를 칸막이를 해서 실었다. 우습지? 원섭아.
악몽 같은 40분이 지나고 현장엘 도착했지.
인부들이 나와 잇었네. 늙은이가 넷, 중년 남녀가 십여 명 되었고 나같은 젊은
사람은 셋이었네. 두 사람은 다 훤출한 키에 머리는 대학생 타입이고 얼굴은 더욱
학생티를 내게 하는 애숭이 청년이었어.
일이 시작되었네.
나는 삽을 하나 배당받았지. 손잡이에 종이 상표도 안 떨어진, 끝이 둥글고
뾰족한 어느 공사판에서나 볼 수 있는 삽이야. 십오륙 명이 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파내다가 중단한 장차 지하실이 될 곳을 향해 파내려갔지. 내가 집에서
생각하던 것처럼 두려움이라든지 또 수치심이라든지 하는 것은 조금도 없었어.
오늘처럼 왔건만 누구 하나 간섭이나 주의를 주는 사람도 없었지. 이름을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고,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저 묵묵하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만을 생각하는 거 같애.
무슨 회사나 공장 같으면 최소한 이름 정도는 물어올 걸세. 그러나 묻는 게 다
뭔가? 아는 체도 않네. 도무지 이상할 지경일세. 원래 노동판이란 다 그런 것인가
싶네.
밑바닥을 파 흙을 위로 올리는 작업이었네.
나는 뚱뚱한 중년 남자와 마주보고 삽질을 했지. 꽤 재미있는 일이었네. 반
시간이 되기도 전에 이마에 땀이 났고 손바닥이 후끈거리거든.
그런데 우스운 일이 있네.
나와 마주보고 삽질을 하던 그 배가 사장배 이상으로 앞으로 쳐지고 키는
1.7m나 될 사람이 어디서 얻어쓴 건지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쓰고 바지는
군복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었네. 런닝샤쓰는 구멍이 벌집처럼 뚫린 것을 입고
오른손엔 목장갑을 끼었는데 손가락은 다섯 개가 다 나오고 손바닥 부분만
장갑구실을 하는 것일세.
얼굴은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꼭 마도로스가 지평선을 바라보는 그런 표정일세.
그저 무의미하게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사는 사람 같았네. 삽질을 하나 점심을
먹으나 시중 무표정일세. 만약에 그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벗겨버린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바보가 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네. 그만큼 그
모자는 그 사람을, 그 돌부처 같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전체를 육체의 맨 꼭대기인 머리 위에 서서 감독하면서 그를 속세의
사람과 같이 만들어버리고 있었네. 지금 현재 삽질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걸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부림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그렇다! 저주받아야 할 불합리한 현실에 쓰다 버린 쪽박이다! 쪽박을 쓰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부서지지 않게 잘 쓰든지 아니면 아예 쓰지를 말든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저 무자비하게 사회는 자기 하나를 위해 이 어질고 착한
반항하지 못하는, 마도로스 모자를 쓴 한 인간을, 아니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를
메마른 길바닥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렸다.
이 가엾은 인간은 처음 얼마간은 뜨거운 길바닥에서 정신을 못 차린 채로
얼마를 지내고, 또 정신을 차리고 얼마간은 인간을 보내고, 또 의지와 자존심으로
얼마를 보내고 마침내 금이 간 쪽박은 뜨거운 열기에 물기가 증발되어 말아
비틀어져서 두 쪽이 난다.
그 중 한쪽은 자진해서 쓰레기통에 기어들어가 눈을 감고 죽어버렸다. 또 한 쪽,
떨어져나간 한쪽은 어떻게든지 다시 물기를 빨아들여 비틀어졌던 육체를 다시
펴고 어떻해서든 그 전체 속에 다시 뭉쳐보기를 희망하는 것일 거야.
그런데 내 앞에 선 이 반쪽은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나간 반쪽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애. 지난 날 그 많은 양이 물을 삼키던 그 반쪽을 말일세. 나도 예외는
아닐세. 그렇지만 나는 그 속에 뭉치지를 않고, 그 뭉친 덩어리를 전부
분해해버리겠네.
오늘 나는 여기서 내일 하루를 구하고 내일 하루는 그 분해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일세. 방법이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나는 그 덩어리가 자진해서 풀어지도록
그들의 호흡기관 입구에서 향을 피울 걸세. 한 번 냄새를 맡고부터는 영원히 뭉칠
생각을 아니하는 그런 아름다운 색깔의 향을 말일세.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걸세.
어떤가?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는 멋있겠지?
배가 고프기 시작일세.
아직 일이 끝나려면 서너 시간은 있어야겠는데 뱃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머리 속이 텅 비어 있네. 확실히 노동은 건강에 좋은가 보네. 내가 배고픈 것을
느끼고 있으니 말일세.
그 운전수 모자를 쓴 사람은 나보다 더 시장한가 보네. 벌써 두 번이나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그리고도 시원찮은지 담배를 꺼내 피우기를 서너 번.
그래도 무엇이 부족한지 연방 십장 쪽을 쳐다본다. 세 삽 뜨고 또 쳐다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지 처음에는 궁금했으나 나의 궁금을 풀어주기나 하려는 듯
십장이 간식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닌가?
아 얼마나 반가운 물질이냐? 십원짜리 삼립빵 두 개. 정말 꿀맛 같다. 두
개만 더 있었으면 얼마나 족할까? 너무 시장했으므로 '코끼리에 비스켓' 정도밖에
욕구를 못 채웠네.
오후 5시.
야, 얼마나 더 지나면 집에를 갈 수 있겠구나. 빨리 가고 싶다. 그 보기 싫던
열무김치에라도, 이십 년을 하루같이 나를 대하던 구수한 밥을 마음껏 욕심을 내어
먹어보리라. 이런 공상을 하면서 한 짓을 계속하고 있었네. 손바닥은 부르터서 피가
나오고 허리는 아파서 펴질 못하겠네. 얼마 있지 않으면 7시가 되겠지.
자넨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를 걸세. 암, 나도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
못하였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겨 나는 그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빨리 넘기려는
생각밖에 없었네. 아침 때 생각으로는 말일세.
자넨 내가 삼년 전부터 제품계통의 재단사인 줄로만 알 걸세.
그리고 묻지 않는 자세의 그 침착한 성격을 잘 아네. 지금쯤은 한참 골똘하게
생각을 하고 있겠지. 애써 생각하지 말게. 내가 서서히 실토할 테니까.
들어보게. 이런 현실 속에서 떨어져 나온 나일세.
내가 일하던 공장은 종업원이 30여 명쯤 되는 어린 아이들 잠바를 만드는
곳이었다네. 지금은 가을잠바를 만들지만 조금 있으면 동복용으로 잠바 속에다
털을 넣고 스폰지를 넣을 걸세.
종업원 대부분이 여자로서 평균연령 19__20세 정도가 미싱을 하는 사람들이고,
14__18세가 시다를 하는 사람들일세. 보통 아침 출근은 8시 반 정도, 퇴근은 오후
10시부터 11시 반 사이일세. 어떤가?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여기에
문제가 있네.
시간을 따져보세. 하루에 몇 시간인가? 1일 14시간일세. 어떻게 어린
시다공들이 이런 장시간을 견뎌내겠는가? 연령이 많은 미싱공들도 마찬가지일세.
남자들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이, 더구나 재봉일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고된 노동일세. 정신과 육체를 조금이라도 분리시키면 작업이
안되네. 공사판 인부들은 육체적 힘을 요구하고 사무원은 정신적 노동을
요구하지만 재봉사들은 양자를 다 요구하거든. 그 많은 먼지 속에서 하루
14시간의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롭네.
아무리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도 체력의 한계가 있는
인간이 아닌가?
원섭아! 나는 재단사로서 이 사람들과 눈만 뜨면 같이 지내거든. 정말 여간
고역이 아니야. 이제 겨우 열네 살이 된 어린 아이가 아침부터 퇴근시간까지 그
힘에 겨운 작업량을 빨리 제시간에 못해서 상관인 재봉사들에게 꾸중을 듣고,
점심시간이면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는데 코끼리가 비스켓을 먹는 정도의
양밖에 안될 거야.
부잣집 자녀들 같으면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한창 재롱이나 떨 나이에,
생존경쟁이라는 없어도 될 악마는 이 어린 동심에게 너무나 가혹한 매질을 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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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를 따르라
전태일. 1969년 가을, 그는 고독하였다.
서울에 와서 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세월 동안 현실의 냉혹한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면서 그의 가슴에 쌓여온
것을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 속에서 끓어오르는 말은 너무나도 많았건만
그러나 그 말을 누구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들어준단
말인가? 온 세상이 '현실과 한패'가 되려고 침묵 속으로 떠나버렸을 때
홀로 소스라쳐 깨어 일어나 짓밟히는 인간들의 괴로운 영상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그의 외로운 길을 누가 있어 동반한단 말인가? 외로운 나머지, 외로움에 너무나도
시달려 지친 나머지 그는 허탈하였다.
나는 삼거리에 이정표처럼 누가
같이 가자고 하는 이가 없구나
바람이 부나 눈비가 오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나
(1969 년 9월말의 낙서에서)
"이렇게 착잡한 심경을 어느 누구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그는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끝내 침묵할 수가 없었다."속이 답답하고 무엇인가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심정"이었기에.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지탱하기에 너무나도 엄청난 고통과 분노와 슬픔의
한가운데에서, 저 깊은 침묵의 끝바닥에서, 마침내 견딜 수 없이 터져오르는
인간의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원섭에게 보낸 편지') 아니, 우리 모두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전태일 사상은 우리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영상을
아로새긴다. 이 사상의 내용과 함축과 의의를 샅샅이 규명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고 싶다. 여기서는 이 사상의 몇 가지 특징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전태일 사상은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밑바닥 인간에게도 '사상'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 있다.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밑바닥 인간에게도 사상은
있다. 전태일 사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첫 번째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수천 권의 장서로 채워진 서재에서 커피를 마셔가며 정교한 개념과
논리를 구사하여 유려한 문체로 서술된 사상은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미칠 듯한
격정에 교란당하면서, 머리 속을 터질 듯이 맴도는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개념을 잡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면서 서투른 어법으로 띄엄띄엄 뱉아낸
외마디소리들의 집합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전태일 사상은 어떤 고명한 철학자의 다변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감동적인 진실을 담은 사상일 수가 있었다.
밑바닥 인간인 전태일은 '소외'라는 어려운 철학용어를 알지 못하였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걸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든 것으로부터 거부당하고 밀려난 소외된 인간의 아픔을,
그 시대의 모순을 이렇듯 정확하게, 생생하게, 절실하게 지적한 표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밑바닥의 체험 속에서, 시대의 모순에 못박혀 존재의 극한상황에 선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전체 인간조건을 적나라게 바라볼 수 있었던 전태일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인식뿐만이 아니라 인가에 대한 사랑 또한 관념과 추상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이고 생생한 체험의 세계였다. 그의 일기장 곳곳에서
우리는 그가 다른 모든 인간을 지칭하여 "나의 전체의 일부" 또는 "나의 또 다른
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본다. 어째서 그가 이렇게 대담한 표현을 거침없이
쓰게 되었던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어려운 추론을 할 필요가 없고, 단지 앞에서
우리가 인용하였던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하면 족하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 전태일 사상은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그것은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서 이제껏 현실이 자신에게 강요해왔던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오직 스스로의 인간적인 체험에 의거하여 그 자신의 가슴으로 느끼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주체적인 인간의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꾸로의 거꾸로, 사회의 거꾸로 된 가치관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그것은 자기비하에서부터 자존으로, 비굴에서 긍지로,
공포와 위축에서부터 분노와 용기로, 의존과 자학으로부터 자주와 해방으로, 체념과
침묵으로부터 비판과 투쟁으로 전환하여 가는 사상, 노예에서부터 인간으로
거듭나는 민중의 사상이다.
전태일 사상의 이러한 특징은 그의 민중관의 저 감동적인 전환에서 가장 잘
표현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버스정류장에서 장사광주리를 이고 만원버스를
타려고 차장과 싱갱이를 벌이는 한 부인을 본다. 그것은 20여 년 동안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지겨울 정도로 보아온 이웃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무 이상도, 희망도 인간다움 삶의 보람도 지니지 못한 채
그저 버러지 같은 목숨을 이어보려고 아둥바둥 기를 쓰며 남과 다투며, 때로는
비굴하게 때로는 매몰차게 이웃을 대하며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품위'니 '인격'이니 '존경'이니 하는 것들과는 담을 쌓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경멸당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태일, 그도 때때로 그 모습을 미워하고 경멸하였고 짜증을 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신경전을 벌이고 집을 나섰던 그 우울한 아침에 웬일인지 그는 그만 그
부인의 모습을 보고 통곡해버렸던 것이다.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저 약하고
어질고 꾸밈없는 한 인간이."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결코 침뱉아야 할 인간상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았던가? 20여 년을 겪어보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았던가? 아무리
정직하게 애써도, 아무리 '근면, 검소, 절약'(?) 했어도 이 권력 있는 자, 부유한
자들이 판치는 사회현실 아래서는 이렇게밖에 될 수 없지 않았던가?
너무나도 뻔하게 알고 있는 진실이었건만 온 세상이 소리를 합하여 경멸하고
조롱하고 냉소할 때에 그는 때때로 이 진실을 잊어버리고 '현실과 한패'가 되어
어처구니없게도 민중, 아니 그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곤 했던 것이다.
노예의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노예의식의 출발도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스스로
업신여김', 억압자의 가치관에 대한 무비판적이며 굴욕적인 동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현실이 나를 보고 냉소한다고 나도 현실과 같은 패가되어 나를
조롱하는구나" 하고 뼈아프게 뉘우쳤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왜 내가 현실과
한패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왜 내가 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아야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는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그것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자학의 늪으로 빠져나왔다.
3) 억압받는 한 인간이 저항과 투쟁의 길로 나서는 데 있어서 이러한 가치관의
전환은 비할 데 없이 중요한 의미를 지나는 사건이다. 비인간으로 몰락한 민중이 그
몰락을 자신의 원죄로 돌리는 한 그리하여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스스로를 경멸하고
자학하는 한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는 절대로 움틀 수 없다. 먼저 터무니없는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터무니없는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서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 같은 처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서 침을 뱉기를 그만두고 돌아서서 자신을
학대하고 경멸해온 질곡의 현실을 향하고, 부유한 자 강한 자들의 세상을 향하고 되려
침을 뱉아야 한다.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인 것이다.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반쪽'만 남은 공사판의 한 처절하게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전태일은 이제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저주받을 인간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사회현실을 보고
그는 "저주받아야 할 불합리한 현실"이라고 분명하고 못박았다. 이 현실은
도대체가 '인간'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관심한 현실이었다. '인간이 만든 차'에게
학대받으며 '자기의 존재'를, 현재의 고통을 호소하는 인간들의 절규.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알아준단 말이냐?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인간'이 죽어버린 시대의 아픔을
그는 이렇게 통곡하였다. 그렇다, 평화시장의 고통, 그렇지만 그것을 누가
알아준단 말이냐?
써먹을 때까지 써먹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아주 간단하게, '그저 무자비하게' 한
인간을 "메마른 길바닥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리는" 현실의 잔인한 얼굴을
눈 앞에 대할 때 그의 비탄은 절정에 달하고, 그것은 곧 "가시투성이고, 얼음처럼
찬, 바위처럼 무거운, 냉혈한" 현실에 대한 새파란 증오로 변하여 불타오른다.
기존 현실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비판으로 인하여 전태일 사상은 완전한
거부(완전한 부정)의 사상으로 된다. 우리가 그가 현실의 '덩어리'속에 뭉쳐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는 데에 주목하여야 한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참된 희망과 관심과 가치를 존중하지 아니하고, 그를 단순히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서 이용하기 위하여 야합하고 있는 기존의 사회의 덩어리, 그것은 완전히
무가치한, 완전히 부정되어야 할, 완전히 추악한 덩어리였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은 그 "덩어리를 전부 분해"해버리는 일뿐이었다.
4) 그리하여 그의 사상은 근본적인 개혁의 사상, 행동의 사상이 된다. 그는 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그것은 모든 인간이 서로서로가 서로서로의 "전체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한 인간에게라도 적대적인 현실은 곧 모든
인간에게 적대적인 현실이며, 한 사람의 이웃의 신음소리는 곧 전태일 그의 가슴을
메어지게 하는 아픔이었다. 그리하여 한 인간이라도 '부스러기'로 밀려나는 일이
없는, 한 인간도 남김없이 그 인간적인 관심을 존중받는 그러한 질서, "모두가
용해되어 있는 상태"가 이룩되기 전까지는 그의 행동은 그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존립조건임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의 사상은 고독한 행동의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라고 우리 모두를 행동으로 불러내는, 우리 모두로
하여금 행동하지 않고는 뱃길 수 없도록 만드는 연대행동의 사상이다. 그는 우리
모두를 향하게 이렇게 선고한다.
너는 괴롭겠지만 보지 않을 수 없을 걸세.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지 않을 수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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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간의 과제
1969년 겨울이 될 무렵부터 바보회의 활동은 거의 정지상태에 들어갔다.
전태일은 이제 친구들과 노동문제를 토의하기보다는 그 혼자서 사회와 인간의
현실에 관하여 곰곰히 생각에 잠기고 이것저것 마음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그날그날의 생활을 위하여 일터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는
했으나 밤중에 집에 들어오면 방에 틀어박혀서 밤을 밝히면서 글을 쓴다든가
멍하니 않아 있는다든가 하는 일이 많았다. 한때는 그렇게 열심이었던 근로기준법
공부까지 중단하였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걸어왔던 고달픈 삶의 발자취를 돌이켜보았다. 어두웠던
어린 시절. 그늘과 그늘로 옮겨다니면서 때로는 부유한 사람들의 세계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때로는 굴욕감과 패배감으로 자신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항의하며 자라온 22년의 지루한 세월, 굶주림과 질병과 짓눌림과
굴욕과 좌절과 노동의 세월.
교차로에서 저는 언제나 좌회전입니다. 세상에서 우회전의 우선권이 있다는
법칙 속에서, 우회전의 부러운 우선권을 바라보며, 알파와 오메가.
(전태일의 1969 년 12월 낙서에서)
밝게 뛰놀지 못하였다. 남들처럼 배워보지도 못하였다. 평화시장의 우리 속에서
갇히어 시들어왔다. 웃음이 없는 세월, 원망스러운 세월이었다. '하루가 또
돌아온다는 것이 무서웠던' 죽음과 같은 고통의 세월, 그 속에서 그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마음속으로 짜증을 내었고 스스로 자학을 짓씹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었다. 부끄러워할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버림받은 과거(그의 가난함은, 그의 배우지 못함은, 그의
얼굴에 패인 어둡고 우울한 그늘은, 그의 비천함은, 그의 잔약한 체구와 질병은, 그의
돼지우리 같은 집과 그의 초라한 차림새는, 그가 '무능한' 한낱 노동자임은), 그
모두가 사회라는 거대한 기구가 지워준 십자가였을 뿐 결코 그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일 뿐이었다. 그는 이 무거운 십자가에
짓눌리면서도 너무나도 정당하게 한인간으로서의 생존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다. 세상은 그의 불우한 과거를 보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마저 자신의 과거를 손가락질한다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싶어한다면
그것으로 그는 주체성을 잃은 인간, '현실과 한패'가 되어 버린 인간이 되는 것이다.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전태일의 1969 년 12월 31일 일기에서)
그의 불우했던 과거는 이 땅 위의 고통받는 모든 민중의 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민중의 역사를 기록해 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자신의 과거를
소설형식으로 회상한 수기를 쓴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그 밖에도 그는 여러 가지
문학형식과 작품구성 방법에 관하여 책을 읽고 메모를 해가면서 극작구상(역시 그
자신을 모델로 한)을 하기도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화시장의 노동문제에
전념하였던 그가 이 시기에 와서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마도 평화시장의 현실이
전체 사회현실의 떼어놓을 수 없는 한 고리이며, 따라서 도려내야 할 '불합리한
현실'의 뿌리는 보다 더 깊은 데에 있다는 것을 그가 어렴풋이나마 직감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말하자면 평화시장의 기업주들만을 상대로 싸워보았자 그것은 표적을 잘못 맞춘
무모한 싸움이 된다는 것이다. 기업주들의 비위만 폭로하기만 하면
근로감독관이니 노동청이니 혹은 사회의 다른 기구들이나 힘들어 그것을 시정시켜
줄 것으로 믿었던 착각이 그의 지금까지의 투쟁을 좌절시키고 바보회를
해체상태로 몰아넣게 한 근본원인이 아니었을까?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은 억압하는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와 힘이 아니었을까? 전태일이 그의 자서전을 쓰려고 했던
것은 이러한 억압적 구조와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적나라게
폭로, 고발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에 가득찬 위선을 발가벗기려는 하나의
투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가 보았던 인간과 사회의 모순과 그 상호관계를 돌이켜 보았고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마땅한가를 꿈꾸어보았다.
그는 먼저 평화시장에서 본 기업주의 초상을 그려보았다. 그들은 최대의 이윤을
유일한 목표로 하여 존재하며, 그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를 착취하고
소비자 대중을 희생물로 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윤리와 희망과 가치'를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그들의 '금전대의 부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위선자였다. 임으로는 무슨 인도주의자인 양 가장하고 자신이 마치 노동자의
아버지와 같은 보호자, 은혜를 베푸는 자인 듯 자처하면서도 기실은 노동자를
기름짜듯 짜낼 생각만 할 뿐 아무런 애정이나 인간적인 관심을 베풀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기업주들의 비인도적인 착취는 사회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만들어져
지배권력에게 보호받고 있다. 전태일은 그가 감독관을, 또는 노동청을 찾아갔을
때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사회는 어째서 기업주들의 죄악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보았다. 근로감독관이나 노동청뿐만이 아니었다.
정치가도, 신문도, 종교인이나 지식인도, 사회의 어느 누구, 어떤 기구도 노동의
참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노동절 행사 때마다 "이 나라 경제성장은
묵묵히 땀흘려 일하는 산업전사들의 헌신의 덕분"이니 무어니 입에 발린 소리를
떠들어대면서도 정작은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복지후생문제가 뒤로 미루어져야 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뻔뻔스러움에 그는
심한 혐오를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분노의 서한을 쓰면서
노동자의 참상을 일일이 열거하고 "이것도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라고 항의하였다.
노동자들만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민중이 비인간적인
약육강식의 질서 아래 짓밟히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을 (자기의) '더욱 살찌기
위한 밑기름'으로 사용하는 기업주들의 모습이 이 사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축도라고 생각하였다. 사회 전체가 "인간의 둘레를 얽매고 있는 타율적인
구속"으로 느껴졌다.
그 타율적인 구속 아래서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하나의 '물질적 가치'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 구속 아래서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는 모두 '타인을 해지는
무책임한 행위', '인간 본질을 해치는 비평화적, 비인간적 행위'로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는 '생존경쟁이라는 없어서도 될 악마' 때문에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세대는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세대"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서로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전체의 일부"이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생각할 줄 알며,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이며, 다같이
"고귀한 생명체"로서의 본능과 희망을 갖춘, "가치적으로는 동등한 인간"이다.
인간은 또한 "서로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모든 인간은 서로의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존중하고 서로의 인간적 요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1969 년 12월 31일 일기에서)
여기서 그는 모든 인간이 서로 용해되어 있는 상태를 꿈꾼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서로에서 무관심한 외톨이로서, 다만 생존경쟁의 냉혹한 질서 아래서 탐욕과
이해관계로 야합하고 있는 세상, 그리하여 그 '덩어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거기에
끼지 못하고 밀려나는 '부스러기'인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회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인간적인 필요에 봉사하면서 참된 관심과 애정으로
결합하고 있는 이상 사회에의 꿈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차디찬 사회현실 아래서도
인간 심정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소박한 물줄기를 볼 때면, 그것이야말로
그러한 이상 사회의 단초이며,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모든 인간이 서로를 적대하고 있는 이 현실, 강자가
약자를 부조리하게 학대하는 이 현실, '인간 최소한의 요구'마저도 외면 당해
짓밟히고 있는 이 현실은 분명히 불의한 현실이었다. 그것은 개조되어야 할
현실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뿌리는 너무나 깊고 그 벽은 너무나 두터운 것이어서
그는 자신이 자꾸만 나약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백 번이고 다시
일어나 '타협하지 않고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자신이 택한 길이 그 자신의 '양심의 명령'이므로 진리이며, '역사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저 주어진 현실'에 순종하면서 남들처럼
안일한 생활을 추구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 때면 그는 그러한 생활이 가치없는
것이며 현명한 삶의 길이 아니라고 그 자신을 꾸짖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안일한 생활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한 생활의 연속일지라도 감방 안에 갇힌
죄수가 감방 벽의 돌담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놓고 자기도취에 취한 꼴"에 불과한,
어리석은 행복의 환각이며, 인간의 참된 기쁨은 서로서로를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고, 오늘보다 내일이 낫도록 노력하는 것이 참된 인생의 길이라고 그는
거듭거듭 확인했다.
이와 같은 그의 관찰, 사색, 분노, 고뇌, 결의, 그때그때의 심정을 그는 생각나는
대로 틈틈이 기록해두었다. 대게 1969년 12월을 전후하여 쓰여진 다음의 글들을
소개한다. 이 글들이 동서고금의 사상을 수십년에 걸쳐 섭렵한 상아탑 속의 철학자의
서재에서 집필된 것이 아니라,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한 밑바닥 인간의 거친
손길에 의해, 서울 외곽 쌍문동 산비탈의 한 초라한 무허가 판잣집 골방 속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여러분은 그것이 얼마나 생생하고 절절한 인간의
육성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제목들은 모두 저자가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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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노예가 되어야 하나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 비인간적 행위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자본가의 초상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정된 자본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면 잘못입니다. 우리 나라의
현실정으로 금리는 3부가 못됩니다. 그러나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여기에 A, B
두 자본가들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이 두 사람은 생산공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A: B씨, 나는 올해 안으로 나의 재산을 현재의 2배로 만들 계획일세.
B: (생략)
A: 자, 그럼 우리 경쟁을 직공들의 공임에서 한다.
생산주들은 서로 경쟁을 직공들의 공임에서 한다.
생산주의 경쟁으로 피해를 당하는 것은 생산공과 소비자들이다.
* 이유: 첫째로" 어떤 수를 쓰든지 가격을 인하할 목적으로 상품을 아주
형식적으로 생산한다. 예를 들면, 원가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 외향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은 보이는 부분보다 떨어지는 비율이 1: 5, 그러니까 겉 기지는 5개월을
입어도 속 우라는 1개월밖에 입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왜 당치도 않는 말을 늘어놓아야 한단 말인가? 저 혼자 가장 인도주의자인 척
빠른 입을 나불거리고, 저 혼자만의 안일한 자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기회주의자의 본심을 다 드러내놓고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제주도의 화이트 빠꾸샤 같은 기업주는 기름기계에 집어넣은 불쌍한
샐러리맨들을 마구 조롱하고, 큰 오락이라도 하는 것처럼 짜낸 샐러리맨들의
기름을 흐뭇한 기분으로 주판질한다.
이런 현실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30명의 자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에서는 의복을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데 몇 년이 지나는 동안에 장사가 점점 잘되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되는 사람은 자녀들을 예전과 같이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아버지 되는 사람은 호의호식하면서 자녀되는 사람들을 혹사합니다.
아버지는 한 끼 점심값으로 2백원을 쓰면서 자녀들은 하루 세 끼 밥값이 50월,
이건 인간으로서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왜 노예가 되어야 하나
업주들은 한 끼 점심값에 2백원을 쓰면서 어린 직공들은 하루 세끼 밥값이
50월, 이건 인간으로서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격차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천지만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다 고귀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입니다.
선생님. 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미생물이
아닌, 짐승이 아닌,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 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
선생님. 그들도 인간인 고로 빵과 시간, 자유를 갈망합니다.
(1970 년 초의 소설작품 초고에서)
근로감독관에게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는 숨은 희생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이런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에게 사회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메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생활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 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해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기업주들은 아무리 많은 폭리를 취하고도 조그마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생산공들의 파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데 왜
현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알지 못합니다.
존경하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 바삐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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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간 최소한의 요구
대통령에게
대통령 각하.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의
청년입니다. 작업은 의류 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서 종업원은 3만여 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합니다. 한 공장에 평균 30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3만여 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를 못합니다. 또한 3만여 명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서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 7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5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을 좀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서는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 못합니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서,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서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가 구두로서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은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서는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일
45시간에 비해, 15세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대부분 6년 전후의 경력자들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해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근로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 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이것도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__12시간으로
단축해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대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1969년 11월경에 집필한 것인데 발송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임)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을 보았느냐구요?
네.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것의 극치를 보았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모파상의
착오)는 "비계덩이" 중에서, 프러시아 군대의 병사가 자기들의 점령지역 안에서
혼자 사는 노파의 빨래를 빨아준다는 그 아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아름다움을
음미했습니다.
내 존경하는 친구여.
자네는 어떤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보신 일이 있으면 저에게도 나누어주십시오. 저의 메마른 심령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부어주십시오. 심한 생존경쟁의 싸움터에서 휴식을 간구하는
미약한 저에게 동심의 감화로 눈물을 일으켜 주십시오.
저는 너무나 메말랐습니다. 너무나 외롭습니다. 휘황찬란한 물질문명의
베일보다는, 밤이 되면 형형색색의 네온싸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자동차의
행렬이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의 소음보다는, 귀뚜라미 우는 사랑방에 모여
동네방네 친구들과 벌이는 사랑의 토론이 얼마나 멋있을까요!
친구여.
나는 그토록 많은 시간을 그토록 허무하게 보냈습니다.
아닐세!
김군. 자네도 나도 인간임에는 틀림없는 것일까? 역시 삼단논법에 의해
태일이도 죽는 날이 한 발 두발 다가오고 있는 것일세. 아무리 화려한 생활의
연속이라도 감방 안에 갇힌 죄수가 감방 벽의 차가운 돌담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놓고 자기도취에 취한 꼴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앞으로 가는 길이 어디며,
가야 할 곳도 목적도 모르며, 그저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가? 젊은 피의 소유자인 인간 내가, 나 역시 화려하지도 못한 벽에
억지로 도취되어야 된단 말인가?
아닐세!
낙서들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공평한 입자인가, 공평한 입자인가?
불공평한 분수에는 공평한 대수를!
인생이란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진리란 경험에 의한 양심의 소리 그것이다.
천차만별. 인생무대는 웅대했지만 배우는 작았다. 인간은 백 가지 욕망을
가진다. 그렇지만 겨우 한두 가지를 달성하고 죽을 뿐이다. 죽음 그 자체를
증오하기에 앞서, 생 그 자체를 감사해라. 앙상한 가지는 잎새마다 매달렸지만
짓궂은 북풍은 앙칼지게 발버둥치는 매달림을 비웃는다. (1970년 1월 7일)
어찌할 수 없는 현재를 세월의 전체 속에 일부씩 떠내려가게 하는 것은?
여보세요. 생각할 수 없는 현재 속에 나라는 무능한 인간은 무척이나 많이
원망도 하였습니다.
신앙이 한 번 실족을 하면 얼마만한 속도로 떨어지는 자네는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과연 가공할 만한 가속도일세.
너의 정신은 결코 헛된 결과를 낳지는 않겠지.
현시점에서 내가, 인간 태일이가 취해야 할 가장 올바른 방향은 어느 길이냐?
사나이 희망은 태양 같이 부글거리지만 너무나 독단적인 이상인지 출발을
못하는구나.
인정(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을 인정받는 것, 인간적인 대우를 보장받는 것을
뜻함. 그의 어떤 극작구상 메모에는, '인간적인 인정의 투쟁' '인정을 얻기 위한
간구'란 귀절이 보인다)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존재한다.
인생은 연극이다.
그런고로, 될 수 있는 대로 슬픈 연기를 하지 말고, 자기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 대중을 위한 연기를 하자.
그는 생각한다.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환멸과, 자기 자신의 나약한 소리를 증오하면서
인간의 둘레를 얽매고 있는,
인간이 만든,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 본질의 희망을 말살시키고 있는, 모든 타율적인 구속을.
그는 생각한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 누구를 지적하며 인간상의 표준을 삼을 것인가. 인간의 참
목적인 평화와 희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생각한다.
인간은 어딘가 잘못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존하는 목적의 본질이 희미함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세대.
흐린 탁류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대.
자기 자신의 무능한 행위의 결과를 타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대
나의 또 다른 나들이여.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므로 그대들의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한 영혼의 절규를 외면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심적 더러움을 점고해본 일이
있는가?
1969년 12월 31일의 일기
왜 안된단 말이냐?
여러분,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끝에서부터 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많이 관람하시고 만장의 대성황을 이루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1969 년 12월 31일)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나는 결단코 투쟁하련다. 역사는 증명한다.
중간치기 비행기 좌석표는 필요없다. 마차의 차부를 원하오. 평화시장주식회사
핑글핑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는 내 마음속에 있는 생각도 정리 못하는 내가
어찌 대망을 바라고 사회 정화의 선구자가 되려고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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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모범업체 설립의 꿈과 죽음의 예감 사이
1970년, 전태일이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결단코 투쟁하련다"고
맹세한 바로 그 해가 돌아왔다. 그리고 이 해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해가 된다.
이 해 3월달의 그의 일기장에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여 종업원들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만들기 위한 구상과 방대한 계획서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그 계획서 첫머리에 있는 일종의 개요 같은 부분이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무엇을 제품계통에서 근로자를 위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일
누구와 제품계통에 종사하는 어린 기능공들과
언 제 1970년 음력 6월달 이전에
어디서.서울 평화시장에서
이 일을 하려면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
1969년 4월달부터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문제는 1968년 12월달에
착상한 것이다. 나 자신이 꼭 해야 될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69년 서울특별시 근로감독관실에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심사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나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가) 나 자신이 직접 제품사업을 시작해서 정당한 세금을 물고, 기능공을 기계와
다른 인간적인, 배움의 적령에 있는 소년 소녀로서 여기에 합당한 대우를 하고도
사업을 성공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사회의 여러 경제인, 특히 평화시장
제품계통의 사업주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A) 첫째는, 사업자금을 구하여야 하기 때문에 사회의 여러 독지가들에게 나의
목적하는 바를 이해시키고 자금을 구하는 것이다. 사회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궁색하고 메마르지 않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각자가 다
해방(해방 직후의 혼란을 뜻함)과 6^3456,12,15^를 겪은 강박관념을 떨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정신적인 오해이다.
나는 사업계획을 세워놓았고 나를 도와서 일할 사람이 주위에 있다. 때문에
사업자금만 준비되면 일의 80% 이상을 행한 거나 다름없다.
B)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1. 나는 학력이 없으므로 대학 동창이 없다. 또한 집안 친척들 중에도 나에게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댈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나의 가진 것 중에서
사회에 내어놓을 것이라고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즉 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로부터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사업을 꼭 이루고야 말 결심 아래
행하는 두 번째 방법이다.
2. 자금주에게 이득이 되는 조건 제시: 나는 이 사업을 3__5년간 내가 전권한을
책임지고 맡는 대신에, 이 사업이 완전한 제도 위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할 시기에는 아무런 조건없이 전부를 자금주에게 반환할 것이다.
자금주는 나의 온 정열과 한 눈을 바친 알찬 결실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이
좋기 때문에 투자를 할 것이다. 나는 이 사업이 끝나면 경제계에서 떠나서
주사업에 일생을 받칠 것이다.
1970년 3월 17일 10시 전태일
이렇게 시작한 사업계획서는 대학노트 30페이지에 걸쳐서 사업방침(10개항),
필요한 각종 설비 비품의 숫자와 가격, 필요한 인원과 직공의 숫자와 인건비,
예상되는 한 달 수입과 지출의 내역과 총계, 생산할 제품의 종류와 그 판매방법,
소비시장 45개를 일일이 조사, 기록한 '서울특별시 시장 조사도', 직공들의
교육, 오락시설과 그 밖의 처우문제 등에 관한 세밀한 구상을 담고 있으며, 그
밖에도 이 사업계획의 성공 여부에 관한 전망 평가('부정적인 것' 3항과 '긍정적인
것'15개항) 및 계획추진에 있어서의 마음가짐, 착상이나 관찰 방법(예컨대, '정확한
관찰을 하기 위한 12법칙')에 관한 주의사항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는 특히
소비자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공급할 것과 또 직공들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할 것에 대하여 세심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계획서 중간 부분에 그는 또다시 이 사업의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목적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
미싱 50대, 종업원 157명, 자본금 3천만 원의 이 업체에 있어서의 노동자
처우문제에 대해서 그가 이 계획서에서 예정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당시 월급
수준이 1 만원 선이었던 미싱사에게는 월 3 만원, 그리고 월급 1천^36,36^1천 5백원
선이었던 시다들에게 8천원을 지급한다. 교사 5명을 1인당 월급 2만 5천원씩으로
고용하여 직공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도록 한다. 직공 1인당 월 8백원의 '위생비'와 월
1천원의 '교육비'를 기업주측에서 지출한다. 노동시간은 8시간 이하로 감축하여 주간
작업반과 야간 작업반으로 나눈다. 직공들에게 편리한 노동환경을 조성해주기 위하여,
다른 업체들이 갖추지 않은 여러 가지 비품을 갖춘다(예컨대 스팀장치, 조립식 탁구대,
도서실 등). 한 달의 작업일수는 25일로 한다.
계획서 내용 중에서 또 한가지 눈에 뜨이는 것은 그가 이 모범기업체를 일종의
학원형태로 운영하면서 직공들을 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정 기간이 지나면
독립하여 다른 기업체를 차리도록 원조해주고 그 기업체에서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도록 만들려고 구상한 흔적이다. 예컨대 이런 구절이 있다.
입학자격을 제한하고, 지방 출신을 위한 단체 기숙사 생활제도로서 단체생활의
이점을 살려 협력정신을 기른다.
여기에서는 모든 절차를 학원식으로 처리한다.
졸업생이 사업을 할 경우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업체로.
요컨대 이 계획서는 피복제조업계통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향상에 발판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선구적이며 시범적인 이상기업체의 실험을 꿈꾸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구상은 전태일이 바보회 창립 당초부터 때때로 친구들에게 이야기한
바 있었던 것인데, 그는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부쩍 이것에 치열한 집념을
보이며 매달렸던 것 같다.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애초에 이러한 구상을 하게
되었던 동기는, 업주들이 걸핏하면 장사가 잘 안된다는 핑계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억누르거나, 심지어는 주어야 할 노임을 몇 달씩 안 주고
미루다가 짤라먹는 일이 흔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분개하여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악조건에 시달리는 것이 사실은 업주의 이익이 박해서가 아니라 업주가 이익을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던 데 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 구상은 무엇으로 보더라도 실현 불가능한, 그야말로 하나의 꿈,
공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 그만두고라도, 우선 전태일의 형편으로 보아 사업자금
문제가 거의 해결될 수 없는 난관인 것이다. 계획서에 의하면 총 자본금이 3천만
원은 되어야 할 것으로 예산을 잡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 아무리 돈많은 독지가가
없지 않다한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일개 재단사인 전태일에게 3천만
원의 거금을 선뜻 내놓을 사람이 있을 리 없고, 뿐더러 다른 업체들보다 모든
경비를 절감한다 하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도리어 직공들 월급을 딴 업체의 서너
배씩 올려주고, 교육비, 위생비 같은 것까지 지출하고, 작업시간을 대폭
단축하고 하여 모든 경비를 잔뜩 늘리고, 반면에 생산능력을 떨어뜨릴 계획만
세우고 있는 이 계획서에 찬동할 자본주도 있을 리 없었다.
그의 친구들도 누구나 이 계획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였으며 그 자신도 이것이
반드시 실현되리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그가 가끔 일기장에다 낙서처럼 이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의 글귀를 쓴 것도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잘
알고 자꾸만 낙담하는 자기 자신을 애써 격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흔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계획서를 작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썼던
소설작품 구상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전문은 이 책 5부 '불꽃'참조).
옛 동창 앞에서 자기 선전을 한다.
J자신이 자기를 극도로 과장해서 선전하며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믿었지만, 얼마 안 있으면 곧 되는 것처럼 동창들에게 과장하며 실로 어처구니
없는 미래의 자기 위치를 설명한다. 즉, 기능공에 대한 교육기관을 건축하고
오락시설을 겸비하며
여기에서 일동은 잠시나마 벅찬 감격을 느낀다. J자신도 자기자신이 정말
그렇게 되는 줄로 느끼다가 자기만이 느끼는 사회환경에 몸서리치면서.(강조는
지은이)
모범업체를 만든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실로 어처구니없는'
공상이라는 것을 그 자신이 스스로 알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이 뻔히 실현 불가능한 계획에 집착하여 적지 않은
시간을 바쳤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그 해결을
위해 택하려던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그 자신이 재단사가 되어서 재단사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함께 일하는
어린 여공들을 돌봐주는 것: 말하자면 온정주의적 방법이다.
둘째는,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하여 기업주와 노동당국에 진정을 하여 그
시정을 호소함으로써 근로기준법이 준수되도록 하려는 것: 말하자면 진정주의라 할 수
있다.
셋째는, 바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시범업체를 설립하는 방법이다.
넷째는, 노동자를 억압하고 노동조건 개선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명백히
투쟁대상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필사적으로 하의 투쟁하는 것: 이것은 1970년
가을의 투쟁에서 택하게 되는 방법인데, 말하자면 적극투쟁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중 첫 번째 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전태일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나설 결심을하기 이전에 품었던 생각으로서, 이것은 평화시장 일대의 전반적인
노동조건을 개선한다는 문제와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나마도
뜻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전태일은 곧 깨달아야만 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방법도 실태조사를 실제로 하고 각계에 진정을 내어보았으나 모두
묵살되고 도리어 조직까지 와해되어 실패로 돌아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모범업체 설립계획을 추진시키느냐 아니면 적극적인
투쟁이냐 두 가지 길 중의 하나이다. 전태일은 최소한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심경이었다. 그것은 물론 그가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지옥을
타파한다는 과제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 길밖에는 어떠한 긍지
있는 삶의 길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적극적인 투쟁으로서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투쟁형태는 대체로 데모나
파업 등인데 이런 것들이 과연 성과 있게 실천될 수 있으리라고 예견하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나 두터웠다. 전태일은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바보회 시절부터 그는 간간이 친구들에게 데모니, 파업이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
1969년도는 이른바 '삼선개헌파동'으로 학생들의 데모가 잦은 해였는데, 이때
전태일은 데모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하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평화시장은 서울대학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데모가 있을 때면 데모
학생들의 함성과 진압경찰의 최루탄가스가 이 부근까지 와서 충돌하는 일도
흔하였다). 그는 이즈음 언젠가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대학생들이 데모 한번
신나게 잘하더라" 하면서, "우리도 대학생 아는 사람 하나 있었으면 데모하는
방법 좀 배웠으면 원이 없겠는데."하고 한탄을 한 일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간간이 하면서도 그가 데모를 하자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던
것은 진정으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을 기대한 탓도 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투쟁자세가 확고하지 못하여 적극적으로 데모에 호응할
만한 사람이 적으리라고 예상했고, 그러니 만큼 그런 상태에서 데모를 해보았자
쉽사리 탄압받고 깨지기만 할 분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전태일이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투쟁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 자신의 죽음, 죽음을 통한 항의였다. 데모를 하되
데모가 벽에 부딪칠 때는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자결을 한다는 실로 보기 드문
참혹하고 격렬한 투쟁의 길을 그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가 이 죽음의 전술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쉽게 밝혀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이 방법을 적어도 바보회 창립 당시인 1969년 6월 이전부터
어렴풋이나마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 당시부터 그는 "몇 목숨
없어지면 해결된다"고 말하곤 했던 것이다.
노동청에 대한 진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바보회가 해체상태에 이르러 그가 깊은
실의와 아울러 종전보다 더욱 깊은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1969년 겨울부터
그는 그 자신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상당히 진지하게 고려해보게 되었던 것 같다.
일종의 예감이었다고 할까? 앞에서도 약간 보았듯이 이 무렵의 그의 일기장
곳곳에는 '죽음'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된다. 다음은 1969년 11월 1일을
전후로 하여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소설작품 구상의 한 대목인데, 특히 이
글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가 현실의 두터운 벽을 얼마나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 X년 X월 X일.
법학도, 법 자체의 모순을 시정 못하자 기준법이 시정되기를 기도, 자살.
서울특별시 관수동 25의 4호에 세들어 자취를 하던 법대생 김준오 군, 오늘
아침 새벽 2시 50분쯤, 방에서 신음하던 것을 주인집에서 발견, 곧 성모병원에
급송되었으나 워낙 다량복용으로 아침 4시 50분에 숨졌다.
보도통제로 기사화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이중환 성모병원 원장의 말씀은
원래 심장병의 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이시다.
이 섬뜩하도록 정확한 예감, 그 자신의 죽음의 예감 앞에서 그는 깊은 인간적인
고뇌에 빠져 있었다. 치욕적인 굴종의 삶에 대한 혐오, 짓밟히고 있는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의 참상에 대한 가슴 찢는 연민, "인간 본질의 희망을 말살시키고
있는 모든 타율적인 구속"에 대한 증오와 울분이 가슴속에서 미칠 듯이 끓어오를
때면 그는 몸을 떨며 죽음을 통한 승리에의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망설임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제 겨우 만 스물 한 살, 꽃다운 나이였다. 가족들 생각, 못 다 이룬 꿈, 해보고
싶은 일들, 숲과 산과 바다와 하늘과 별과 바람과, 그리고 삶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추억과 유혹과 미련들, 이런 것들이 그의 상념을 사로잡을 때면
그는 머리를 흔들어 "절망은 없다" "절망은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죽음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려고 발버둥쳤다.
바로 이러한 순간에, 죽음의 예감을 머리 속으로부터 쫓아내려고 애쓸 때에
그가 안간힘을 쓰면서 매달린 것이 '모범기업체 설립'이 라는 하나의 화려한
꿈이었다고 보여진다.
되풀이 해서 말하자면,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남은 두 가지 방법 중 적극적인
투쟁의 길은 곧 그의 죽음으로 통하는 길을 뜻한다.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의 길은
피할 수 있는껏 피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되든 안되든 모범업체 설립을
모색해보는 길이었던 것이다. 앞서 본 전태일의 모범업체 설립계획서에서 그는 이
계획이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사업(근로조건 개선을 뜻함)을 이루고야 말
결심 아래 행하는 두 번째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 방법은 이미
실패로 끝난 진정 호소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방법은? 그것은 곧 그의
죽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두 번째 방법'에 마지막 정열을 쏟은 후 곧 세 번째
방법에 착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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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번민
싼타클로스를 믿으라. 행복의 신.
긍정적이며 낙천적인, 그리고 활동적인 인생관.
얻는 것은 지불하는 노력보다 훨씬 크다.
매우 곤란한 처지에 부딪쳐도, 실패가 두려워서 하던 일을 포기치 말라.
여하튼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위대하고 강력한 어떤 것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개인의 힘으로는 자기가 바라는 바를 달성하지 못한다.
인생의 건축기사로서 사람은 그 일에 온갖 정력을 퍼붓지 않으면 안된다.
물질적으로 1달러도 못 나가는 육체까지도.
위의 구절들은 전태일의 모범기업체 설립계획서의 앞 페이지에 적혀 있는
구절들이다. 죽음의 예감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 도망치고 싶어서 그는
'행복의 신', '자기 자신보다도 위대하고 강력한 것의 존재'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
행복의 신이란 모범기업체 설립자금 3천만원을 그에게 선 뜻 던져줄 기적의
독지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의 신은 끝내 그에게 미소를 던지지 않았다. 1969년말부터
1970년초에 걸쳐 그의 일기장에다 때때로, "제품계통에서 성공을 하려고
발버둥치지만, 내 인생의 기점에서 나는 걷는 에너지가 모자라 애태우고
있다"라든지 하는 따위의 낙서를 휘갈기곤 했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 방법의
신을 스스로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전태일이 3천만원의 자본금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던 가는 상세히 알
길이 없다. 친구 김개남의 말로는 태일이 가끔 모범기업체 이야기를 하다가
자본금 문제에 부닥치면, "어디 부잣집 딸이라도 하나 꼬실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하고 웃었다고 하니 부잣집 딸이 전태일 같은 노동자에게 반할 리가
없다. 어머니 이소선 씨의 회고에 의하면 태일이 대구에 내려가 친척들에게
자본금 얘기를 한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하도 답답해서 그랬을 테지
되리라고 생각하고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가지, 전태일이 오래전부터 유력한 방법으로서 구상하고 있었던 것은 '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구상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의 눈알
하나를 빼서 신문을 본 독지가가 그의 사람됨을 믿고 투자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1970년 3월 당시의 중아일보(1970. 3. 24) 사회면에 어떤
실명자에 대한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전태일은 그 실명자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자기의 눈을 각막이식 수술용으로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하였다.
형의 불편을 조금이라도 감하기 위하여 제가 취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생각했습니다. 인간으로서 제한된 능력의 한계를 처음으로 인식하면서, 자비로운
배려로 두 눈을 주신 여호와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저의 한쪽 눈을
김형께 드리겠습니다.
형님과 저 사이의 조그만 일이 사회를 위해서 이로운 행위가 될 것을 바라면서
속답을 기다립니다.
1970. 3. 23. 전태일 올림
추신: 3월 26일까지 회답을 기다립니다.
이 편지는 겉봉에 반송 노랑 딱지가 붙어 반송된 채로 전태일의 일기장 갈피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반송 이유는 알 수 없음). 이런 노력들 외에도 방대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였던 그의 집념으로 보아 그는 3천만원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니 결국 모두가 허사였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모범기업체 설립'이라는 꿈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그의 일기장에서 모범기업체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친구들도 그에게서 그 화려한 꿈에 대한 얘기를 일절
듣지 못하게 된다.
이제 그는 차디찬 현실로 돌아와서, 죽음이 손짓하는 저 불길한 미래와
정면으로 맞섰다. 싸울 것이냐? 이제 투쟁이란 그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을
의미하는, 한 치도 물러설 길 없는 낭떠러지이다. 투쟁을 포기하고 연명할 것이냐?
그것은 평화시장의 파괴되고 있는 동심들을 외면하고, 아니 인간성을 파괴하는
현실 앞에 굴복하고, 그 아래에서 굴종의 삶을 감수한다는 것을 뜻한다. "젊은
피의 소유자인 내가, 화려하지도 못한 벽에 억지로 도취하여야 한단 말이냐?"
전태일은 괴로웠다.
그는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였다. 말수도 적어졌다.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한동안은 일기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동네 빚쟁이들은 매일같이 찾아와서 그를
들볶았다. 어느 날인가는 한 빚쟁이가 전태일에게 "남의 빚 내다 쓰고 안 갚은
놈은 쥐약 먹고 자살하는 게 낫다"고 저주를 퍼부었던 일을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1970년 5월경에는 시청에서 무허가건물 철거반까지 파견되어 나와서 그가 살던
집을 헐었다. 당장 잠자리를 있어야 하니 전태일은 어머니와 함께 낮에 헐렸던 집을
밤이면 다시 지었다. 부록크와 나무판자 몇 개로 얼기설기 조립한 집이니 하룻밤
사이면 다 지을 수 있었는데, 짓고 나면 바로 그 다음 날 혹은 이삼 일 뒤쯤 되어
또다시 철거반차가 들이닥쳐 다 부숴버리려 들었다. 이렇게 하여 그의 집은 일곱 번
헐었다가 일곱 번 다시 지어졌는데 그 동안에 전태일은 다소 생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한다. 그는 철거반이 와서 힐난하면 "법이 어떻게 되어 있든, 살기 위해서 집 짓는
것이니 죄 될 것 없다"고 항변하곤 하였다. 하며, 한 번씩 헐렸다가 다시 지을 때마다
안방을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한다. 어머니가 까닭을 물으면 앞으로 노동자들이
모여서 회의할 방이니 크게 짓는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에도 전태일의 번민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 갔다
봄철이라 피복제품의 성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는 남대문, 구로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돈벌이를 해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도 몇 달씩 깍지 않아 텁수룩하게
되었다.
그 해 4월말경 어느 날, 그는 어머니에게 "뺀뺀이 집에 앉아서 밥먹고 있으려니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임마뉴엘' 수도원 원장에게 이야기해서 거기에 좀 가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임마뉴엘 수도원이란 삼각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기도원인데, 때마침
그곳에서는 교회신축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중이었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그
당시 창동에 있는 한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임마뉴엘' 원장을 거기서 알게 되어
가깝게 지내고 있는 터였다. 태일의 부탁은 '임마뉴엘'의 건물 신축공사장에서
인부 노릇을 하며 밥을 먹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산중에서 그 힘든 공사판 인부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만류해보았으나, 태일이 "이대로 있다가는 병날 것 같다"면서
부득부득 졸라대는 것을 보고 결국 그가 부탁한 대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태일은
그로부터 약 5개월 동안을 삼각산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삼각산으로 떠나는 전태일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이 당시 그는 이미 자신이 죽는 경우를 가정하여
유서(뒤에 소개함)까지 써놓은 뒤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확고한 결단이 서지
않았다. 어느 깊은 밤에는 결단이 선 것 같았는데 그 다음날의 되면 또 흔들렸다.
이제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그의 신경을 더욱 들볶아대는
주위의 견딜 수 없는 모든 소란과 잡답으로부터 벗어나 산 속에서 묵묵히
운동하면서 죽음의 결단을 내리려 떠나는 것이다.
전송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형과 같이 가겠다면서
삼각산까지 따라온 동생 태삼이를 보고, 그는 "도로 내려가서 내 없는 동안 구두
닦으면서 어머니 잘 모시고 있으라"고 간절하게 당부를 했다.
삼각산에 올라온 전태일은 다른 일꾼들보다 유난히 말이 적었다. 그저 묵묵히
노동만 했다. 낮이면 바위를 깨서 집터를 닦고, 석재를 만들고 우물을 파는 일,
밤이면 남대문시장까지 내려가 목재를 리어카에 실어나르기를 밤 12시까지
계속하는 일, 그리고 틈틈이 시간이 나면 지하실에 내려가 산에 올라올 때 가지고
왔던 근로기준법 책을 읽었다. 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였는데 이것은 빨리
끝내고 제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바위를 깨다가 손을 다쳐 손장갑이 벌겋게
피로 물든 적도 있었다.
이 당시 임마뉴엘 수도원에는 목사 한 사람이 묵고 있었는데 전태일은 그
목사와 때때로 성경원리에 관한 토론을 하였고 그러다가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툰
일도 많았다 한다(전태일이 분산자살한 후에, 이 목사는 "자살은 교리에 위배되는
불신자의 짓"이라고 비난하였고, 또 전태일은 죽어서 "빨갱이들이 춤출 것"이라
하였다 한다).
삼각산에 있는 동안 전태일은 여러 차례 남대문시장까지 왔다갔다 하면서도
집에는 별로 들르지 않았다. 한번은 그의 어머니가 옷가지와 먹을 것을 가지고
삼각산으로 찾아갔다. 그 사이에 머리를 한 번도 깎지 않아 몇 달 사이에 더욱
길게 자란 귀신 더벅머리를 한 아들의 몰골을 보고 어머니는 이발하라고 돈 5백
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태삼이 신발이 다 헤졌던데 신발이나 한 켤레
사주시라"고 하면서 기어이 그 돈을 되돌려주었다.
8월 초순 어느 날 태일은 집에 한 번 내려왔다. 원장이 작업복 사 입으라고
주더라면서 돈 5천원을 꺼내어 어머니에게 드리며 "저쪽 방 세놓을라면 장판을
깔아야 할 테니 이 돈으로 장판을 사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올라갔다. 올라갈
때 그는 이제 곧 아주 내려와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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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결단: 나는 돌아가야 한다
삼각산에 올라온 지 4개월 가량이 지난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은 마침내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1970 년 8월 9일)
바로 이것이 그가 삼각산에 올라가 돌을 깨고 땅을 파고 장작을 져나르던 넉 달
동안에 이룩한 모든 것이었다. 1970년 8월 9일, "나는 돌아가야 한다"고, "꼭
돌아가야 한다"고 오랜 망설임 끝에 전태일이 결단을 내린 순간,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그는 가난과 고통과 학대와 모멸의 저 지루한 20여 년을 견뎌왔던
것이었을까? 아무 미련도, 아무 후회도, 아무 두려움도 없이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 순간을 그는 얼마나 피투성이로
몸부림치며 기다려왔던 것인가?
이 순간은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순간이었다. 잠 안 오는 주사를 맞고 사흘
연거푸 야간작업을 한 끝에, 눈만 멀뚱히 뜨고 석상처럼 않아서 손을 놀리지
못하는 시다를 보고 그가 그녀의 일을 대신해주면서 위로의 말을 던지고 있었을
때, 피를 토한 여공의 손을 잡고 그가 병원문을 두들기면서 텅텅 빈 호주머니를
한탄하고 있었을 때, 막노동판에서 버림받은 밑바닥 인생을 바라보고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몸서리쳐지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라고 외치면서 그가 저주받은 현실을 분해해버리겠다고 결의하고
있었을 때 이 순간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인간이 현실을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을 때에 그는 비로소 그 현실에
철저하게 저항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변혁할 수 있게 된다. 전태일이 오늘날의
세상을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라고 못박고,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고 외쳤을 때 이 순간은 예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예감하고나 있었던 듯 그는 1969년 11월에 이렇게 썼던 것이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억해주기 바라네. 그러면
뇌성번개가 천지를 무너뜨려도, 하늘의 바닥이 빠져도, 나는 두렵지 않을 걸세.
그 순간 무엇이 두려워야 한단 말인가?
두려워서야 될 말인가?
도리어 평온해야 될 걸세. 완전한 형태의 안정만을 요구하네.
순간, 그 순간만이 중요한 거야. 그 순간이 지나면 그 후론 거짓이 존재하지 않네.
그 후론 아주 완성된 백일세. 그 순간은 영원토록 존재하는 거니까 전후는
염려없네
이 글을 쓴 후로 9개월이 지나서 그는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결단인가? "돌아가야 한다"는 결단이다. 거짓이
존재하지 않는 그 완전한 순간을 위하여, 다시 현실 속으로, 다시 평화시장의
짓밟힌 동심들 곁으로, 아무리 외면하려고 애써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저
버림받은 목숨들의 신음과 탄식과 통곡의 현장 속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결단이었다.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또한 다만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하고, 노예의 삶의 모든 굴욕과 허위와 유혹을
떨어버리고, 아무리 수난과 고통과 외로움으로 가득찬 가시밭길일지라도 인간성을
위하여 싸우는 존엄한 인간의 길로 기어이 돌아가겠다는 결단이었다.
소시민적인 안일한 삶에 연연하는 일부의 지식인이나 종교인들이 상투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할 때에 우리는 그것이 그야말로
단순한 '동참', 억눌린 사람들의 주위에서 얼쩡거리며 배회하는 데서 끝나는 것을
흔히 본다. 전태일의 경우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결코 이런 식의 어정쩡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목숨을 들어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투쟁, 타협 없는 투쟁,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거는 단호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라고 말하였다.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을 구출하는 것이 '이상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심정의 단순함, 이 단호함, 이 절절함이야말로 그의 결단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제 전태일에게 있어서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을 위한
투쟁이란 곧 비인간적인 현실에 의해 파괴되어가고 있는 모든 인간상을 위한
투쟁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어린 동심들, 아니 고통받고 있는 모드 인간들을 전태일은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건방지다 하는가?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과대망상이라 하는가? 아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목소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전태일이 가난하고 못 배운 밑바닥 인간에게
강요되어온 무력감과 열등의식을 완전히 청산해버리고, 자신의 힘과 인간성의
승리를 확신하는 한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제 발로 선 것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전태일의 성숙한 모습, 한 각성된 청년노동자가 스스로의 인간적인 책임에 대하여
가지는 강한 자긍을 보는 것이다.
그는 말하였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겠다고. 이것이 그가 원한 모든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겸손함이었고, 이것이 그의 슬픔이었고, 이것이 그의 법열이었다. 오직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그는 그의 삶의 모든 것을 던져야 했던 것이다.
목숨을 걸지 않는 한 결단은 없다.
한 인간이 아무리 고양된 감정으로, 아무리 절절한 언어로 투쟁을 결의한다
해도 그가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라고 말하지 아니하는 한 그것은 이미
완전한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가혹한 현실의 벽, 생사의 벽 앞에 부딪쳐
힘없이 허물어지고야 말 헛맹세이다.
목숨을 걸지 않는 '투쟁'은 거짓이다. 그것은 소리치는 양심의 아픔을
일시적으로 달래는 자기 위안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이며,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이다.
비인간의 삶에 미련을 갖는 자는 결코 인간으로서 죽을 수 없고, 따라서 결코
인간으로서 살수 없다. 전태일이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인간의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겪고 보아온 비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것이었다. 그것을 철저하게 인식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철저하게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인간인 현실의 '덩어리에 뭉쳐지기를'원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는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기 전에 (비인간의) 삶 그 자체에 환멸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는 단순하게, 아주 분명하게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러기에 마침내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있었다. 그가 끝내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끝내 버려서는 안된다고 확인하였던 것은 그의 마음의 고향, 저 인간시장의 현장에서
학대받고 수모 당하고 짓밟혀 파괴되고 있는 인간성을 위한 투쟁의 길뿐이었다.
이제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오직 거짓이 없는 그 순간을 위하여 아무 두려움도 남지 않는 그 완전한 순간을
위하여, 그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전태일 사상은 완결되었다.
남은 것은 오직 행동뿐. 불꽃 같은 행동뿐. 한 병약한 인간이 어떠한 굴종의
성채도 파괴해버리는 저 처절한 분노와 사랑의 불길을 여러분은 곧 보게 될
것이다.
제5부 투쟁과 죽음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가지만
내가 지나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시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전태일의 1969 년 9월 수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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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동친목회
1970년 9월 전태일은 다시 평화시장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머리를 빡빡 깍은
모습으로 오랜만에 나타난 그를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 한동안 안 보이더니 그 사이
큰집 갔다 온 모양"이라고 숙덕거렸다. '큰집'이란 형무소를 뜻하는 은어이다.
우선 돈도 급하고 또 노동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평화시장 안에 근거를 잡아야
하기도 했으므로 취직을 해야 할 터인데, "큰집 갔다 왔다"는 평판 대문에 좀체로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큰집 갔다 온 것이 아니고 삼각산에 가서 노동운동
본격적으로 할 결심하고 머리 깎고 내려왔다고 선전하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라
한동안 그는 모자를 푹 눌러써서 머리를 가리고 평화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때마침 재단사를 구하는 가게가 있어서 거기에 취직이 되었다.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웬만한 업주들 사이에서는 노동운동 선동하고
다니는 놈으로 다 소문이 나 있어서 취직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였지만, 그 사이에
그런 소문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 또 업주가 바뀐 곳도 더러 있었으므로 겨우
취직이 된 것이다. 그가 취직한 곳은 왕성사.
취직문제가 일단락되자 태일은 김개남을 찾아갔다. 삼각산 올라갈 때 아무
연락도 않고 올라간 터이므로, 한 다섯 달쯤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셈이었다. 그
동안 어디 갔다 왔으며 왜 그렇게 소식 한 번 없이 지냈냐고 궁금해하는 개남에게
태일은 그 사이의 일을 대충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이번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고 생각도 많이 했는데 뜻있는 사람들끼리 다시 한 번 모여서 본격적으로
해보자"라고 하였다 한다. 다시 한 번 해보자는 것은 물론
'근로조건개선'문제였다.
전태일은 어쩔 수 없이 젊은 재단사들의 지도자였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이
당시만 해도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자신의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평화시장을 떠났던 기간 동안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바보회 회원들이 그의 출현을 계기로 다시 모였다. 그 사이에 군대에 간 사람들과
직장이 바뀌어 어디로 가버렸는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제하고 나니 모두 여섯 명의
회원이 다시 규합된 것이었다. 여기에 나중에는 여섯 명의 재단사가 새로 추가되어
도합 열두 명의 재단사가 자주 모임을 갖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를 전후하여 전태일은 틈나는 대로 서울시청, 노동청 등을 찾아다니며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신문기자들을 만나거나 방송국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9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재단사인 차정운(가명)과 유상천(가명)은 때마침
추석대목을 막 지난 뒤라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평화시장에 나오다가
국민은행 건물 앞 '인간시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전태일이 두꺼운 책 한
권과 무슨 서류뭉치 같은 것을 한아름 안고 나왔다.
정운이 상천을 돌아보며,
"저 친구 참 재미있는 친구야. 우리들 근로조건이 개선될 수 있게 한다고 밤낮
돌아다니는데 상천이 너도 한 번 사귀어 봐라"라고 하였다. 이때 태일이 정운에게로
다가와서, 오늘 동양방송 '시민의 프로'에 나가서 우리들의 요구사항을 발표해보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권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동양방송국 쪽으로 가는 시내
버스에 함께 타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상천은 태일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상천의 기억으로 이때
전태일이 아주 열의에 차서 찻간에서 근로기준법책을 펴들고 근로시장(제42조),
휴일실시(제45조) 등의 항목을 소리내어 읽어주면서, " 우리는 너무 억울하게
살고 있다. 근로기준법대로 하면 평화시장의 3만 명 노동자들이 지금 보다 훨씬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도록 만들려면 우리 재단사들이
단결해서 근로기준법을 물고 늘어져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만났으니
앞으로 힘을 합쳐서 잘 해보자"하였다 한다.
유상천은 그때까지만 해도 근로조건이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것은 말도 몰랐고
생각해 본 일도 없었는데 태일의 열변을 들으면서 "그런 법도 다 있었나? 정말
법대로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렇다면 한번 해볼 일이다."하는 놀라움,
호기심, 기대감, 새삼스러운 분노 따위가 뒤범벅이 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흥분된 심정으로 버스가 목적지까지 닿아도 닿은 줄도 모르고 내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다.
새 재단사는 동양방송국에 도착하여 '서민의 소리'프로 담당자를 만났다. 태일이
평화시장 실정을 대충 이야기하고 '시민의 소리'에 출현하여 시청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담당자는 거절하였다. 확실한 통계자료나 근거가 없는 '추상적인
이야기(!)'는 방송에 내보낼 수 없으니 좀더 구체적인 자료를 정리해 가지고
다음에 와보라는 것이었다.
방송국의 화려한 건물 문을 벗어나면서 태일은 정운과 상천을 보고,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도 안되었으니 온 김에 서울시청 사회과에나 한번 들려보자는
것이었다. 동양방송국에서 시청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다.
그들이 사회과에 도착하여 보니,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서 관계직원들이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기다려서 만나보려면 한 시간 이상을 보내야 했다. 정운과 상천은
무료하여 그냥 돌아가기로 하였고, 태일은 혼자 남아서 직원을 만나보고 가겠다고
하여 거기서 그들은 일단 헤어졌다.
정운과 상천이 평화시장에 돌아와보니 국민은행 앞길에 평소부터 친한 재단사
친구 몇 명이 모여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국민은행 앞길이라는 곳은
점심시간이나 퇴근시간에 평화시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통과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서로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거나 또는 업주들이 고용할 노동자를 구하는 노동력의 거래가 이 장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많아서 언제부터인지 노동자들은 이곳을 '인간시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운과 상천이 조금 전에 태일과 헤어지면서 저녁에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도 이곳 인간시장이었다.
두 사람은 먼저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던 재단사들 틈에 끼어들어 전태일을
화제로 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모두들 흥미 있어 하였고 그 중
성준창(가명)이란 재단사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면서 전태일을 기다렸다가 한번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이날 오후 늦게(6시경) 태일이 인간시장으로 돌아왔다.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서 친구들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는데, 서울시청 사회과에
가서 담당직원에게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기준법대로 개선시켜달라고
요구하였더니 "너무 어려운 문제가 되어서 여기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발뺌하면서 노동청 본청에 가서 말해보라고 미루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동청을 찾아갔는데 가보니 노동청 정문 앞에서 마침 출입기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잘 되었다 싶어서 기자들을 붙잡고 사정 이야기를 하며 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이 보도되도록 해줄 수 없겠느냐고 매달려봤더니 그들이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혼자서 일을 하려면 잘 안될 뿐만 아니라 3만이 되는 직공에
앙케이트 30매 정도로는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니 여럿이서 힘을 합쳐서 좀더
많은 조사보고서를 받고, 구체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여러 사람 이름으로 정식으로
진정서를 제출해보라고 권하더라는 것이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이런 경과를
이야기하면서 전태일은 앞으로 잘만 하면 평화시장 얘기가 신문에 실릴 수
있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조직을 갖추어 실태조사를 대대적으로 해보자고
제의하였다.
평화시장의 실정을 신문을 통하여 세상에 폭로한다는,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전망, 그것은 실로 암흑 속에서 빛을 보는 것같은 가슴 뛰는 발견이었다.
전태일은 용기백배하였고, 이제껏 '근로조건 개선'이 과연 실현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회의 때문에 소극적이었던 그의 친구들의 움직임도 아연 생기에 차고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70년 9월 16일 저녁 그 동안 자주 모여서 노동문제를 이야기하던 열두 명의
재단사들이 평화시장 근처의 은호다방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은호다방은
다방마담이 태일이 하는 일에 퍽 동정적인 사람이어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싶어하였고, 그래서 어느새 태일의 연락처처럼 되어버린 곳이었다.
이날 밤의 모임에서 그들은 그 동안의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어
새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보회가 그 동안 별 다른 활동 없이 지내온 지
오래되기도 하였고 그 사이에 회원들도 많이 바뀌었으므로 면목을 일신하여 새
기분으로 출발하자는 생각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저녁 7시에 시작되어 밤
11시가 가까워지도록 계속되었던, 열기로 설레이던 이날 모임의 분위기를 다음
글이 전한다.
지금도 들려오는 쟁쟁한 목소리.
목이 메도록 외쳐도, 목이 터지도록 외쳐봐도
들은 체도 않는 냉정한 세상.
옳게 살아보자고 의롭게 살아보자고 굳게 손을 잡던 그날.
.
우리의 이름이 바보라 바보처럼 살 수밖에 없나 보다.
이름을 바꿔서 만인을 위해 횃불을 밝히고자 약속하던 그날.
처음엔 비웃던 레지양들이 마감시간이 넘도록 나가달란 말도 못하던 모습.
아마 그것은 우리의 진심에 감동해서였으리라.
그리고 다시 태어난 바보 아닌 삼동회의 일들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으리라.
(고 전태일 1주기 추도식 삼동친목회 대표의 추도사에서)
삼동이라 함은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의 세 건물을 가리킨 것이다.
삼동친목회는 일년 전에 창립되었던 바보회를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인 것처럼
보이지만은 그러나 이것은 바보회와는 성격이 구별되는 하나의 새로운 조직으로
보아야 한다.
'바보 아닌 삼동회'라는 구절에서도 느껴지듯이 삼동회는 바보회 창립 당시에
비하면 훨씬 더 구체적인 투쟁의 전망을 가지고 발족 한 것이었다. 바보회의
활동이 실제로는 기업주나 노동당국에 '진정'하고 '호소'하는 데에 그쳤던 것에
반하여, 삼동회는 평화시장의 불법시장이며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것을 하나의 발판으로 하여 공동으로 '투쟁'할 것을 활동지침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날 그들은 삼동회의 목적을 새로이 "연소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행동"(강조는 지은이)하는 것으로
설정하는바, 이로써 우리는 삼동회가 바보회와 같은 '진정단체'가 아니라
'투쟁조직'임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바보회가 한 단계 발전하여 삼동친목회가 된
것이다.
이날 토의된 삼동회의 당면 활동계획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한다.
1. 빠른 시일 안에 노동조건 실태조사용 설문지를 돌리고, 일방으로 3개 시장
일대의 작업환경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노동청 앞으로 그 보고서를
제출함과 함께 근로조건 개선을 구할 것.
2. 회원 각자가 최소한 10명 이상씩의 협력자를 확보하여 조직을 넓힐 것. 이
협력자들에 대하여는 평소의 회합에서 회원 상호간에 정보를 교환하고 철저히
신상을 파악하여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될 때는 정회원으로 가입시킨다.
3. 근로조건 개선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데모, 농성 등으로 항의한다.
4. 삼동회는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키며, 회사측과 노동청에 그 지원을 요구한다.
임원선출이 있었는데 회장에 전태일, 총무에 임현재, 서기에 이승철이 각각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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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
삼동친목회의 첫 사업으로서 전태일의 동지들은 평화시장 일대의 근로자들을
상대로 설문지를 돌렸다. 이 설문지는 그 전해에 전태일이 인쇄해두었다가 미처
다 돌리지 못하였던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명: 성별: 종교:
생년월일 19 년 월 일생
본적
주민등록지
직종 경력
1. 1개월에 몇 일을 쉽니까? ( )일
2. 1개월에 몇 일을 쉬기를 희망합니까?
A. 휴일마다 B. 일요일마다
C. 2번 D. 1번
3. 왜 주일마다 쉬지를 못하십니까?
A. 수당을 더 벌기 위하여
B. 기업주가 강요하기 때문에
C. 공장규칙이니까
4. 1일에 몇 시간을 작업하십니까? ( )시부터 ( )시까지
5.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작업을 하시면 적당하시겠습니까?
( )시부터 ( )시까지
6. 왜 본의 아닌 시간을 작업하십니까?
A. 수당을 더 벌기 위하여
B. 일이 바쁘니까
C. 공장주가 강요하기 때문에
7. 그만한 시간이면 당신 건강에 어떤 영향을 줄 것 같은가?
A. 무방하다 B. 피로하다
C. 유해하다 D. 모르겠다
8. 건강상태는?
A. 신경통 B. 식사를 못한다.
C. 신경성 위장병 D. 폐결핵
E. 눈에 이상이 있다(날씨가 좋은 날은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고 눈을 바로
뜨려면 정상이 아니다)
F. 심장병
9. 작업장에서 근로기준법 22조의 규정을 비치한 것을 볼 수는?
A. 있다 B. 없다
10. 보건소의 건강진단은?
A. 1개월에 한 번
B. 4개월에 한 번
C. 6개월에 한 번
D. 1년에 한 번
E. 한번도 한 적이 없다.
11. 당신 교양을 위한 서적은?
A. 본다 B. 안 본다
C. 볼 시간이 없다.
12. 취미
13. 1개월 수당.
위의 설문지는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에 관한 주요한
문제점이라고 평소부터 느껴왔던 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른바 '과학적인'
조사방법론자들은 이 설문지가 답변자들의 답변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어서 '객관적 공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할는지 모르나, 어쨌든 전태일은
이 설문지를 받은 노동자들이 어떤 내용의 답변을 할 것인지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는 너무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너무나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설문지를 돌리는 데에는 작년의 실패 경험도 있고 하여 기업주 측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만반의 주의를 다하면서 신중을 기하여 돌렸다. 삼동회 회원
전원이 동원되어 각자의 친분에 따라 연줄열줄로 각 작업장에다 돌렸는데
여기에 협력한 재단사나 미싱사들은 삼동회의 정회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삼동회 취지에 찬동하고 회원들과 다소간의 면식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작업장 안에서 일반 노동자들에게 전달할 때는 반드시 업주가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하도록 하였으며, 업주의 친척이나 연고자가 종업원으로 근무하는
작업장에는 아예 뿌리지도 않았다. 그 결과 며칠 만에 126매의 설문지가
성공적으로 회수되었다.
회수된 설문지들에 나타난 조사결과 어떠했는지는 삼동회 회원들이 그것을
기초로 하여 노동청 앞으로 제출한 진정서에 반영되어 있으므로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한 예로 전태일 자신의 답변 내용을 보기로 한다. 앞의 설문항목과
대조해보시기 바란다.
설문항목 답변
1 2일
2 B
3 B
4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5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6 C
7 B, C
8 A, B, C, E
9 B
10 E
11 C
12 독서
13 23,000원
한 달에 4일을 쉬었으면 싶은데 2일밖에 못 쉰다. 기업주가 강요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9시간만 일했으면 싶은데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4시간을 노동해야 한다. 기업주가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중한 노동으로 건강은 형편없이 나빠졌다. 신경서 위장병을 앓고 있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이며,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어서 밝은 햇빛 아래서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젊은 나이에 신경통까지 앓고 있다. 이런 형편인데도 기업주들은
치료는커녕 건강진단 한번 제대로 안 시켜준다. 긴 노동시간으로 나의 취미인
독서도 할 겨를이 없다. 그렇게까지 일해 주는데도 경력 5년의 재단사인 나의 한달
임금이 고작 2만 3천 원이다.
이러한 말을 전태일은 설문지를 통하여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삼동회회원들은 회수된 설문지 126매에 나타난 자료를 종합하는 한편 설문지에
나타나지 않은 자료에 관해서도 평화시장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며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 무렵 그들은 거의 매일과 같이 은호다방을 중심으로 모였다.
모여서는 그날그날의 활동내용을 합의, 결정하고, 흩어져서는 각자가 맡은 임무를
수행하곤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시장 일대에 흩어져 있는 작업장 수백 개의
위치, 건평, 직공 숫자, 조명 시설, 다락 높이, 환기장치, 그리고 평화시장 전체의
상수도시설, 변소시설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할 수가 있었다.
또 그들은 노동청에 낼 진정서의 진정인 명의를 가급적 많은 노동자들을
끌어들여 공동명의로 하기로 하고, 노동자들의 서명을 받아내기 위하여
동분서주한 결과 삼동 회원 외에도 90여 명의 서명을 받는데 성공했다.
1970년 10월 6일 그들은 드디어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근로개선 진성서'를 제출하였다. 이 진정서의 원본은 노동청에 제출되어
현재로는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고, 그 내용도 당시 신문에 보도된 중요 부분
외에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전태일의 일기장 갈피에 이 진정서의
초안으로 보이는 기록이 끼어 있어서 그것을 소개한다.
대학 노트 15페이지에 걸쳐 전태일의 필적으로 씌어 있는데 그 중 한 페이지는
찢겨져 나가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당시의 신문 보도를 보면 전태일 등이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중 120명(95%)이 하루
14--16시간 노동을 하고 있고, 96 명(77%)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환에 걸려
있으며, 102명(81%)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전원이
밝은 곳에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고 눈꼽이 끼는 안질에 걸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기사가 있는데 이 찢어진 페이지에 바로 이러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전후문맥으로 보아 온당할 듯하다.
노동청장 귀하
제목: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 진정
평화시장 피복제품상에 근무하고 있는 종업원 3만여 명의 대부분은 매일
12시간 이상의 격무와 작업환경의 불량으로 인하여 위장병, 신견통, 눈병 등 각종
직업성 질환에 허덕이고 있음이 우리들의 자체조사 별첨 앙케이트처럼
나타났습니다.
우리 피복계통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은 이와 같은 악조건하에서는 더 이상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고, 건강을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어, 당국의 강력한
시정조치가 요구된다고 사료되어 94명의 서명으로 진정하는 바입니다.
(가운데 한 페이지 찢어지고 없음)
진단을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건강진단이라 인정할 수 없으며, 진단을 하는
의사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서류상의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X레이 촬영시
필름을 사용하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종업원의 직종
1. 재단사: 재단사는 대부분 남자로서, 연령은 23--50세 층이며, 1천2백명이며
1개월 월급은 평균 3만 원
2. 미싱사: 미싱사는 전체가 여성으로서, 연령은 18--23세 정도이며, 1 만2천명,
월급은 평균 1만 5천 원
3. 시다: 시다는 전체가 어린 소녀이며, 연령은 13--15-17세의 다층이며, 1만2천명,
1개월 월급은 3천원입니다(4--5 년 전에 책정된 임금임).
1일 작업시간: 평균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1개월 작업시간: 28일(첫 주일과 셋째 주일 휴일)336시간
3번에 해당되는 시다들은 시간수당이 없으며, 연령이 어린 관계로 정신과
육체적으로 성장기에 있으므로 장시간의 많은 작업량이 정신, 육체의 발육과정에
있어 재기할 수 없는 심한 피해가 됩니다.
진정인 대표:
평화시장 종업원의 친목회의 삼동친목회 회원 일동
대표 전태일 인
서기 이민섭 인
정회원 신진철 인
최종인 인
김영문 인
조병섭 인
강진환 인
주현민 인
별첨 93인
호수: 286호, 3층까지 하면 825호(가, 나, 가, 나, 한줄은 이층 가게로서 제외). 호당
10명의 종업원(여기서 호수는 평화시장의 피복제조공장이나 점포의 총숫자를 말함).
평화시장 직공 명수: 약 10,000명(동화시장: 160개 공장 4,800명, 통일상가와 근접
건물: 200여 개 공장, 8,000명 평하시장, 신평화시장: 500개 공장, 14,000명)
전체 명수 10,000 명에서 직책별로 나누어보면:
미싱사: 4,000명
시다: 4,000명
재단사: 300명
재단보조: 400명
기타(시아게, 공장장 점원): 300명
주인, 주주: 1,000명
* 합계: 10,000명
하루의 작업시간: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10시 30분까지 1일 14시간 작업.
1달 720시간 중 372시간. 휴일 매달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 국제 근로기준의
2배에 해당하는 시간임.
급료:
재단사: 15,000원에서 30,000원까지
미싱사: 7,000원에서 25,000원까지
시다: 1,800원에서 3,000원까지
재단보조: 3,000원에서 15,000원까지
연령별 직책:
12세부터 21세까지 시다 19세부터 38세까지 미싱사
22세부터 50세까지 재단사 18세부터 25세까지 재단보조, 점원
12세부터 21세까지 여자 시다가 하루수당 70원, 14시간 작업
건강상태:
재단사 100%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위장병, 신경통, 기타 병의 환자
미싱사는 90%가 신경통 환자임. 위장병, 신경성 소화불량, 폐병 2기까지
시다는 평균 15세 어린이들로서 하루 14시간의 작업을 당해내지 못함.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 된 사람은 전부 각종 환자임.
특히 신경성 위장병, 신경통, 류마치스가 대부분임.
시장 안의 구조:
현대식 3층 건물로서, 1층은 점포, 2.3층은 공장임.
10,000 명 이상을 수용하는 건물이면서도 환기장치가 하나도 없으며, 더구나
휴식시간인 오후 1시부터 2시까지에도 햇빛을 받을 장소가 없음.
작업정도:
우리나라의 어떤 노동보다도 제일 힘과 정신 빨리 피로해지는 노동임. 정신적,
육체적 최하 노동.
공임:
우리나라에서 여기보다 더 싼 데가 없음. 경영주들은 서로 경쟁을 직공들의
공임에서 함. 가령 하루에 8시간을 작업하고도 1개월 급료가 10,000원인 사람과,
하루에 15시간을 작업하고도 1개월 급료가 10,000원밖에 안됨.
세면시설:
평화시장 400여 공장에 상수도 3곳임. 1평 정도
이상이 진정서 초안의 중요부분이다.
진정서 대표의 이름들이 서명된 곳을 경계로 하여 뒤의 부분은 앞부분과 다소
중복이 되는데 어긋난 내용도 있다. 예컨대 앞부분에서는 1일 작업시간이 "평균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뒤에 와서는 '아침 8시
반부터 저녁 10시 반까지1일 14시간 작업"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노동청에 제출한 진정서에서는 앞부분에 가깝게 하였는데 이것은 계절에
따라 또 그때그때의 제품수급 사정에 따라 작업량이 차이가 있고, 따라서
작업시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삼동회 회원들의 지식수준으로 평균치를 낼
수가 없어서 결국 될 수 있는 한 노동청 당국자들이나 기업주들이 과장된
숫자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줄여서 계산한 결과였던 것 같다.
이 초안에는 위에 소개한 부분 외에도 진정인들의 성명, 주소, 본적이 첨부되어
있고, 한 페이지 가득히 큰 글씨로(전태일의 필적)쓴 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구호도 적혀
있으며, 평화시장 안의 각 작업장의 명세도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평화시장 3층 가 176 창별사
건평 2평: 종사원 13 명
다락높이 1.6m: 형광등
2. 평화시장 3층 가 181 단성사
건평 8평: 종사원 32명
다락높이 1.5m: 형광등
3. 평화시장 2층 277 동방사
12평: 종사원 50명: 형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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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화시장 기사특보' 나던 날
1970년 10월 7일 그러니까 노동청에 진술서를 낸 그 다음날 시내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기적이
마침내 일어난 것이다.
경향신문사 신문 게시판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새로 나온
석간 신문 한 장을 사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으로 달렸다. 인간시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동회회원들은 바라던 기사가 난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터뜨리며
얼싸안았다.
그날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표제와 '소녀
등 2만여 명 혹사', '거의 직업병 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근로조건
영점 평화시장 피복공장'이라는 부재 아래 실렸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어린 여자들이 좁은 방에서 하루 최고 16시간 동안이나 고된 일을 하며 보잘것
없는 보수에 직업병까지 얻고 있어 근로기준법을 무색케 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시내 청계천 5__6가 사이에 있는 평화시장내 각종 기성복 가공업에 종사하는
미싱사, 재단사, 조수 등 2만 7천여 명으로 노동청은 7일 실태조사에 나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업체는 전부 고발키로 했다. 노동청은 이밖에 5백 여 개나
되는 서울시내 기성복 가공업소도 근로자의 실태를 조사키로 했다.
평화시장내의 피복가공 공장은 4백 여 개나 되는데, 이들 대부분의 작업장은
건평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작업장은 비좁다. 더구나 작업장은 1층을 아래위 둘로 나눠
천정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인데 이와 같이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다고 노동청에 진정까지 해왔다.
이들에 의하면 이런 환경 속에 하루 13시간^36,36^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첫째, 셋째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 못할 형편이라는 것이다.
특히 13세 정도의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인 조수의 경우 이미 4--5 년 전부터
받는 3천 원의 월급을 현재까지 그대로 받고 있다. 이 밖에도 이들은 옷감에서
나는 먼지가 가득찬 방안에서 하루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어 성장기에 있는 소녀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근로조건이 나쁜 곳에서 일하는데도 감독관청인 노동청에서 매년
실시하는 건강진단은 대부분이 한 번도 받은 일이 없으며, 지난 69년 가을
건강진단이 나왔으나 공장측은 1개 공장 종업원 2__3명씩만 진단을 받게 한 후
모두가 받은 것처럼 했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몇 줄의 기사가 어째서 평화시장의 젊은 재단사들을 기쁨에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일까.
삼동회 회원들은 경향신문사로 달려가서 경향신문 3백 부를 샀다. 가진 돈이
없어서 우선 회원인 최종인이 차고 있었던 손목시계를 풀어서 신문사측에 담보로
맡겨 놓고 신문대금은 신물을 팔아서 갚기로 했다. 그렇게 산 신문 3백 장을 들고
그들은 다시 평화시장으로 달려갔다. 큰 모조지를 잘라서 그 위에다 붉은 글씨로
'평화시장 기사특보'라고 쓴 단장을 만들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다 두르고 시장내
이 건물 저 건물을 쫓아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돈을 받고 팔기도 하였고 어린
시다들에게는 무료로 주기도 하였다.
신문 한 장이면 그때 값으로 2십 원, 노동자들이 신문을 사서 보는 일이란
드물었는데 그날 신문 3백 부는 삽시간에 다 팔려버렸다. 어떤 노동자들은 신문을
나눠주고 있는 삼동회회원들을 보고 "수고가 많다"고 말하면서 1백원씩 또는
2백원씩을 신문값으로 내기도 했는데, 신문 한 장 값으로 1천원을 내놓은
노동자도 한 명 있었다.
그날 저녁의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분위기로 들떴다. 군데군데에 노동자들이
몰려 서서 신문 한 장을 두고 서로 어깨 너머로 읽으면서 웅성거렸다.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만 받아온 그들, 고층건물이 곳곳에 솟아 있는 수도 서울에
살면서도, 바로 창문만 열면 삼일고가도로를 호기롭게 달리는 자가용차의 화려한
행렬을 볼 수 있으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햇빛조차 주어지지 않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 온종일 꼿꼿이 앉아서 손발이 닳도록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그들. 굶주림과 질병과 멸시와 천대와 그리고서도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던 그들. 좋은 것은 모두 남들의
것, 더욱이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바로 그들이. 바로 그 신문에 하찮은 쓰레기 인간들인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이라도 하듯 실려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깊은 지층 속을
숨죽여 흘러갔던 용암의 분출구를 만나 지맥을 찢고 드디어 터져오르는 듯 오랜
동안 쌓이고 쌓였던 통곡과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인간인가 보다. 우리 문제도 신문에 날 때가 있나보다." 이러한 자각이
노동자들의 잠자던 가슴을 뒤흔들며 평화시장 일대에 퍼져나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각 작업장 비좁은 먼지 구덩이 속의 화제는 모두 '평화시장의 기사특보'
이야기였다. 많은 노동자들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협력하며 싸울 것을 다짐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외국 여자가 리차드 버튼이라는 외국 남자와 몇 번 결혼하고
몇 번 이혼했는가를 사람들은 안다. 신문에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시장의 열세
살짜리 여공들이 하루 몇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가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신문에 안
나기 때문이다. 재클린, 오나시스라는 외국 여자가 승마를 하다가 발가락을 삐었다
한다는 사람들은 늦어도 바로 다음날까지는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신속 정확한' 신문
보도의 덕분이다. 그러나 강원도 어떤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광부들이 매몰되어
죽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반드시 알지는 못한다. 신문에 나지 않거나,
나더라고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구석 자리에 작은 기사로 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신문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에 비틀거린다면, 우리 사회의 신문 역시
강한 자, 부유한 자의 속성에 비틀리고 있다. 신문사의 주인은 대재벌급의 기업가.
그들이 밑바닥 인생들의 문제에 기본적으로 관심을 표시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기의 신문경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치권력의 비위를 일부러
거슬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신문경영도 하나의 장사이므로 신문을 사보는
독자들의 구미에 당기는 기사를 제작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신문의 독자층이래야
대체로 중산층이다 그들의 구미를 맞추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신문경영자들은 판단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서민대중들은 신문과 인연이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들이
신문을 사서 보는 일도 드물거니와 그들의 문제가 신문에 취급되는 일도 드물다.
신문제작에 종사하고 있는 일선 기자들은 대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들로서
개중에는 비인간적인 사회현실에 대한 젊은이다운 분노를 아직 지니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이 그저 이 눈치 저 눈치 살펴가며
안일하게 살고 싶은 소시민들이다.
노동청 출입기자들이 왜 한국에 수많은 근로기준법 위반업체들이 있다는 사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업체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평화시장의
참상에 대해서도, 기자들은 적어도 전태일을 만난 후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평화시장에 찾아가서 그 노동실태를
파헤쳐서 보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가 나지를 않았을 것이다.
만약 어떤 기자가 자진하여 그런 일을 하였더라면 신문사 안의 어떠한
'웃사람'도 그것을 달가와 할 사람은 없을것인 반면에, 권력자니 기업주들은 "왜
너만 유독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느냐"고 색안경을 쓰고 그를 주시하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전태일이 모든 자료를 갖추어 노동청에 정식으로 진정서를
제출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노동청 출입기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하여 평화시장
기사를 다룰 용기가 났던 것이었다.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뚫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두터운 벽의 일각이었다.
그것은 무관심의 벽, 차디찬 상업주의의 벽, 인간을 물질화하는 이 세대의 억압과
침묵의 벽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뚫었다. 스스로의 행동이 저
어마어마한 신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눈앞에 보고 그들은 참으로 용기백배하였다. 자신들의 손으로
평화시장의 현실을 개혁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삼동회에 모인 젊은 재단사들을
정력적인 투쟁으로 몰아넣었다.
신문보도가 있던 날부터 평화시장주식회사(사장)에서는 노동청에 진정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늦게 삼동회회원들은 다시 회합을 갖고,
평화시장주식회사측에 대하여 요구조건을 제출하기로 결의하고 삼동회의 활동지침을
새로이 마련하였다. 이날의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기록되었다.
10월 8일 건의사항
1. 작업시간은, 여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로 하고, 겨울은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로 한다.
2. 휴일은 정기적으로 일요일마다 쉬는 것으로 한다.
보충사항: 부득이한 경우, 작업초과시는 사전에 종업원의 양해를 구하고
수당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다.
3. 작업시간은 어기는 기업주에 대해서는 본회의 명의로 고발 조치한다.
4. 건강진단은 1년에 두 번은 전원 다 한다. 전염병이 나돌 때는 시장에서도 꼭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게 해준다.
5. 시다들의 월봉은 현 3천원 기준에서 100% 인상하여 최하 6천원으로 함.
6. 본회는 정기총회를 제3주 휴일로 정하고, 오전 10시에 사전 합의한 장소에서
한다.
7. 임시총회는 필요시 언제든지 소집할 수 있다.
다음날(10월 8일) 전태일, 김영문, 이승철, 세 사람이 삼동회를 대표하여, 위의
요구조건들에다가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조명시설 개선, 여성 생리휴가의
보장, 노동조합결성의 지원 등을 합친 8개항의 요구조건을 적은 건의서를 가지고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장과 종업원의
사이라면, 군대로 치자면 장성과 졸병의 사이나 마찬가지로서 평소에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뻣뻣이 서 있을 처지였다(한 삼동회 회원의 술회에 의하면,
바보회 시절부터 전태일이 주식회사 사무실에 올라가서 진정을 하자고 제의하여
회원들이 그렇게 하기로 동의한 일이 두어 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막상
사무실에 올라가려니까 '떨려서' 그만두곤 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신문보도로 인하여 용기를 얻은 재단사들이 기업주들의 대표기관에 찾아가서
당당히 일대일로 따질 것을 따진 것이다.
회사측에서는 "진정 내용은 잘 알겠다"고 하면서, 지금 실정으로는 다
들어주기는 어려우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환풍기 설치와 조명형광 등의 대체는
이루어지도록 힘써 보겠다는 대답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으나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내려왔다.
이야기가 조금 늦었지만, 이 당시 전태일은 왕성사에서 다시 해고당하여
실직상태에 있었다. 10월초순 어느 날 그는 작업이 밤 11시 20분에 끝나게 되어
창동 집까지 갈 수가 없어서 삼각산 수도원으로 가려고 세검정행 버스를 탔다.
종점에 내려서 조금 걸으니 벌써 자정이 넘어 파출소로 연행되어, 그날 밤을 꼬박
파출소 바닥에서 새우고 그 다음날 아침 식사도 못하고 출근을 했었다. 그랬더니
하도 심신이 피로하여 낮 1시경이 되자 도저히 작업을 계속할 수 없어서 주인의
친척이었던 재단보조에게 몸이 아파 일찍 들어가야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출근한 그를 보고 주인은 전날 아무말도 없이 조퇴하였다는
이유를 대며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트집이었다. 채용할 때는 몰랐으나
차차로 두고 보니 노동운동 하는 사람인 줄 알게 되어서, 언제든 무슨 꼬투리만
생기면 해고해버리려고 기회를 노래고 있던 업주에게 전태일이 걸려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취직한 지 겨우 보름만에 쫓겨난 것인데, 그 동안 일한 삯도 받지
못하고 나왔다.
10월 7일 이후 전태일은 친구들과 함께 왕성사로 몰려가서 밀린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여 5천원을 받아내었다. 이 돈은 그후 삼동회의 회합비용과 데모할 때의
플래카드를 만드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또 이 무렵 다른 회원들이나 친분 있는
재단사들이 임금을 제대로 못 받고 직장을 그만 두었던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경우 삼동회회원들은 집단적으로 그 업체에 몰려가서 임금을 받아내고는 상당히
기뻐하기들도 하였다.
노동자들, 특히 삼동회를 둘러싼 재단사들이 이렇듯 사기가 충천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기업주측과 정부 당국(특히 노동청)에서는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이때는 바로
1971년 봄의 대통령 선거를 7개월 남짓 앞두고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국정 전방에
걸쳐 비판의 소리를 높여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여론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던 때였다. 만약 노동자들의 참상이 매스컴을 통하여 계속
보도된다면 그것은 대통령 선거에서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에 틀림없었고,
주무관청인 노동청은 책임추궁을 당하게 될 것이 틀림없는 형편이었다.
삼동회의 진정서 내용이 신문에 보도될 것 같은 낌새를 채자, 노동청에서는
허겁지겁 뒤늦게서야 실태조사를 하겠다느니, 근로기준법 위반업체를
고발하겠다느니 하는 소란을 피웠다. 그 며칠 후 노동청 근로감독관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왔다. 그는 전태일 등을 보고 "모범 청년"이라느니, "노동절에
포창하겠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하며 그들을 회유하려고 들었다. 또
이즈음 경찰서에서 정보계 형사들까지 파견되어 회원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10월 중순 어느날 노동청 근로기준국장으로 있던 임정삼이라는 사람이
평화시장으로 나와서 삼동회회원들을 만나자고 하였다. 만나보니, 그는 "너희들
깡패모양 그렇게 직업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어서는 진정사항을 다 들어줄 수
없다. 취직을 하도록 하라. 그러면 일주일 이내로 다 개선시켜주겠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는 정말로 일주일 이내로 다 개선시켜줄 생각은 없었다. 회유를
해서 이 말썽의 근원이 되고 있는 재단사들을 일단 취직만 시켜 놓으면 모두들 제
할 일에 바빠서 노동운동 같은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삼동회 회원들이 취직을 하고 안하는 것과, 근로조건 개선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임국장의 말은 애초에 논리도 닿지 않는 억지였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격으로 삼동회 회원들은 "일주일 안에
다 개선시켜준다"는 약속이 너무나도 반가워서 모두 일단 취직들을 하였다. 이때
전태일은 삼미사 재단보조로 취직을 하였다. 재단사였던 그가 한 급 아래인 보조로
취직한 것은 이것저것 조건을 가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로기준국장이 시장에 다녀가고, 삼동회회원들이 모두 취직을 하고, 그러고도
일주일이 지났으나 약속했던 근로조건 개선은 조금도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을 찾아가서 약속했던 일들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따졌다. 근로감독관의 대답은 진정내용을 실현시키려고 노력을 해보았으나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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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위
전태일은 삼동친목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근로감독관을 만나고 온 전말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로서 해결 안
나겠으니 10월 20일날 노동청 정문 앞에 가서 데모를 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10월 20일은 노동청에 대한 국회의 국정감사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전태일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노동청의 약점을 치자는 것이었다.
평화시장 들어온 지 6년, 그 노동지옥의 쇠사슬을 끊으려는 전태일의 노력은
결국 '데모'라는 두 글자로 귀결된 것이다.
시다들에 대한 개인적인 온정, 진정과 호소, 모범기업체 설립구상 등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나, 아무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었고 결국은 데모였다.
결국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실력대결 방법뿐이었다.
데모라는 것은 '보여준다', '과시한다'를 뜻하는 영어 '데몬스트레이션'의
준말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시위라고 번역하는데, 이 시위라는 말이 오히려 데모의
본 뜻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즉, 위세,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겁을 준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떨게 한다, 그리함으로써 이쪽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도록
강박한다는 것이 데모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데모라는 것은 진정이니 호소니
청원이니 건의니 하는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엉터리 비폭력주의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건 간에 데모란 상대편의 양심이나
자비심이나 동정심을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쪽 편의 실력(그것이 선거에서의
투표권이든, 적나라한 폭력이든, 사회여론에 대한 영향력이든 간에)을 배경으로 한
상대편에 대한 공갈인 것이다. "제발 이렇게 해주십시오"하는 것이 데모가 아니라,
"이런데도 네가 말을 안 듣고 배기겠느냐?"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데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데모'란 상대편에 대한 대항하는 자의 당당한 선전포고이며,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끊임없이, 갈수록 더욱 격렬하게, 위협적인 도전을
감행하겠다는 경고인 것이다.
왜 억압자들은 그들이 말하듯 '일부 극소수'에 불과한 수백 명의 학생들 혹은 수십
명의 노동자들의 맨손으로 하는 데모를 그렇듯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까닭이
있는 일이다. 한 개의 조약돌이 잔잔한 수면에 수백, 수천 개의 파문을 아로 새기듯,
한 개피의 성냥이 산더미 같이 쌓인 화약고를 모두 폭파시키듯 데모에 나서는 이들
'일부 극소수'는 수십만, 수백만의 고통 받아온 가슴에 무한한 격동을 일으킨다.
억압자에 대한 오랜 굴종을 벗어던지고 일 대 일의 당당한 선전포고를 알리는
데모행렬의 진군의 북소리는 일상생활의 비굴에 잠겨 있던 모든 민중의 피를 끓게
한다. 그들의 북소리는 착취와 억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강요된 민중의 침묵이
오래고 굳은 것이면 굳은 것일수록 더욱 크게 울려온다. 그리하여 억압자의 깊은
죄의식으로 신경과민이 된 귀에는, 그것은 자시의 종말을 알리는 불길한'조종'의
첫소리로 들려오는 것이다. 억압자가 수백 명의 평화적인 시위 행렬을 탄압하기
위해 광분하거나, 경우에 따라서 그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하는 양보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역사상의 모든 억압자들의 '양보', 민권의 '평화적'인
승리란 본질적으로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진정한 호소만으로는 아무 무제도 해결될 수 없다. 억압자의 마음이란 구약성서
출애굽기 속의 '바로'왕의 마음이 상징하듯이 굳고 완고한 것이다. 관료사회에서
평화시장의 저 어린 소녀들이 나날이 겪고 있는 참혹한 고통에 대하여 누가
따뜻한 반응을 보였겠는가? 기업주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청 관료들 또한 어떠한
관심도, 아무런 감동도, 연민도, 양심의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양심은 억압자의 생리 또는 관료주의의 타성으로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것은
그들 개개인의 마음이라기보다는 권력의 윤리, 억압자의 속성인 것이다. 그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진정'이나 '호소'로 아무리 목메이게 두드려보았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자극을 줄 수 있는 행위는 시위였다.
데모를 하자는 데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망설이는 회원들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무얼 안다고 무턱대고 데모를 한단 말이냐? 좀더 배워서 천천히 하자"고
했다.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하면 된다.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는데 무슨 방법이
따로 필요한가? 데모도 지금 해야지 (1971년도)선거 끝나고 나면 할 수 없게
된다"라고 전태일은 그들을 설득했다.
평소에 쓰레기 취급을 당하던 밑바닥 인생들도 선거철만 되면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의 한 사람이 도기 때문에, 사람 대접을 받고 다소 활개를 펴게 마련이다.
선거 때마다 판잣집 철거가 중단되고, 곳곳에 새 판자촌이 생기고, 취로사업이
확장되고, 밀린 노임이 청산되고, 농협 융자금이 풍성해지고 하는 것이 다 그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그 동안 바보인 척 죽어지내던 서민들이 용기를 내어 제가끔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는 투쟁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그렇게 심한 제재가
오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1971년도까지의 한국의 정치계절 풍경도였던
것이다(민주주의 혹은 정치적 자유라는 것도 이렇듯 민중의 생존권과 밀접한 관계를
하지고 있다. 노동운동이 필연적으로 정치운동의 성격을 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태일은 확신에 찬 어조로, "지금 선거 때니까 탄압 받아봤자 별거
아니다"라고 하면서 망설이는 친구들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10월 7일의
신문보도가 있은 이래로 전태일의 지도력은 매우 강화되어 있었고, 친구들은 그의
주장을 예전보다 더 존중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제의한
10^3456,12,245^ 데모 계획은 결행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삼동회 회원들의 주변에 엄중한 사찰망을 펴고 있었던 당국은 10^3456,12,245^ 데모
계획을 눈치챘다. 근로감독관이 전태일을 찾아왔다. 그는 별별 소리를 다하며
"앞으로 근로감독권을 강력히 발휘하여, 업주들로 하여금 당신들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도록 할 터이니 며칠만 참고 기다려 보라"고 애원하다시피 하면서
전태일에게 데모계획의 중지를 요청했다. 전태일은 "속은 셈치고 또 한 번 기다려
볼 터이니 반드시 약속을 지키라"고 대답하고는 친구들에게로 돌아와
전말을 이야기하고 10^3456,12,245^ 데모를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다.
노도청에 대한 국정감사가 끝난 바로 다음날 전태일은 다시 근로감독관을
만났는데 그는 점심을 사주겠다고 하면서 태일을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더니
한다는 소리가, "너희들 요구조건은 당초부터 도저히 실현불가능한 무리한 것이니
그만 포기하라. 네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무슨 애로사항이 있으면, 그것은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터이니 이제 노동운동은 그만큼 하고 여기서 손떼는 게
어떤가?" 하는 따위의 속보이는 회유였다. 전태일이 격앙된 어조로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고 따지고 덤벼드니, 근로감독관은 도리어 화를 벌컥 내면서 "그렇게
타일러도 말을 안 듣느냐? 이제 국정감사도 다 끝났으니 그렇다면 어디 너 할대로
해보라"고 하면서 배짱을 턱 내미는 것이었다. 노골적인 배신이었다.
전태일의 보고를 들은 삼동회 회원들은 모두 격분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10월
24일 오후 1시에 평화시장의 국민은행 앞길에서 데모를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이때가 10월 21일. 그들은 곧 세부계획 의논에 들어갔다.
거사시각을 오후 1시로 한 것은 1시부터 2시 사이가 점심시간이므로
노동자들이 그 시각에 국민은행 앞길로 밀려나올 것을 예상한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을 궐기시키기 위해서는 사전에 많은 협조자들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었다. 회원 1사람당 10여 명씩의 협조자를 포섭하기로 결의했다. 그
동안에도 협조자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0월 7일 이후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삼동회 주변에 몰려들었으므로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데모할 때 외칠 구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16시간 작업에 일당 백원이 웬말이냐!" 등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다음날부터 그들은 각자 맡은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각 작업장을 돌아다녔다. 각
작업장의 노동자들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재단사였으므로
회원들은 연줄연줄로 해서 아는 재단사에게도 연락을 해주도록 부탁하였다. 데모
당일에, 이 부탁을 받은 재단사들이 할 일이란 무엇보다도 자기의 작업장 안에
있는 미싱사, 보조, 시다들을 데모현장까지 동원하는 일이었다. 기업주들에게
데모계획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회원들은 각 작업장에 가서는
포섭대상자인 재단사를 작업장 밖으로 불러내어 은밀히 이야기를 하곤 했다.
10월 24일이 되었다. 전태일은 노동청 출입기자에게 오늘 오후 1시경 데모가
있을 것이니 평화시장에 와서 추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시장으로 나왔다.
나와 보니 평화시장 일대의 각 작업장으로 통하는 일곱 개 골목 모두 시장
경비원들이 쫙 깔려 있었다. 평화시장의 경비원은 모두 30명 정도로서 15명씩
격일제로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 15명 전원이 두 명씩 짝을 지어 곤봉을
들고 각 골목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삼엄한 분위기였지만 삼동회 회원들은 각
작업장을 돌아다니며 "점심시간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니 국민은행 앞길로
나오라"고 연락을 했다. "무슨 구경이나"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하여간 나와 보면
안다"는 식으로 대답하곤 하였다.
오후 1시, 거사 시각이 가까워지자 전태일과 그 친구들은 국민은행 앞길로
나왔다. 그대부터 꾸역꾸역 밀려나오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잠깐 사이에 약 5백 명
가까이 되어 국민은행 앞길에서 웅성거렸다. 그 중에는 데모를 할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온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영문을 모르고 그저 나오라니까
나와본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때부터 곤봉을 들고 늘어섰던 경비원들은 활동을
개시하여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키려고 들었다.
당시 평화시장 2층에 경비실이 있었다. 그 경비실에서 삼동회 회원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던 회원들이 갑자기
그들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경비실 창문가에서 오형사가 이쪽을
내려다보며 올라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순간 그들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오형사라는 사람은 10월 7일 이후 평화시장에 파견되어 나온 정보계 형사였다.
그는 삼동회 회원들 주변을 맴돌면서 능구렁이 짓을 하였다. 회원들에게 가장
공감을 표시하는 척하면서, 친절하게 밥도 사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하는 가운데에서 정보를 수집해온 것이다. 회원들 중에 여기에 속아
넘어간 사람이 있었다. 10월 24일 데모계획만 하더라도 어떤 회원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다 숨기면서 오형사에게는 협조를 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정보계 형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오형사, 그는 "데모? 참 좋은
생각이다"라고 하면서 그 회원을 부추겼다. 도와주겠다고 이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경찰서로 달려가서는 몇 월 몇 일 몇 시 어디에서 데모가
있을 것 같다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한 건수를 올리고
민완형사가 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형사들도 시장 일대 이곳저곳에 깔려 있었고, 각 작업장 중에서는
기업주들이 문을 닫고 노동자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은 곳이 많았다. 삼동회
회원들은 일이 틀린 것을 깨닫고 이층 경비실로 올라갔다. 전태일과 서너 명의
회원들이 경비실 안으로 들어가서 오형사를 만났다. 오형사는 평화시장주식회사측
사람들과 동석하고 있었다.
"왜 여태 한 가지고 개선이 안됩니까?" 회원들은 언성을 높였다.
"오형사, 정 이렇게 하깁니까?"
오형사와 회사측 사람들은 유들유들 웃으면서 시간을 끌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라"라고 협박끼 있는 조롱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누그러진 목소리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고
회유하기도 하였다. 전태일 등이 격분하여 다시 밖으로 뛰어나가려 하니까
그때서야 그들은 당황한 빛을 보이며 "11월 7일까지는 선처해주겠다.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려보라"고 약속을 하였다.
적잖은 위축감을 느끼고 있던 회원 몇 사람은 이 약속을 듣고 상당히 마음이
풀렸다. 그들은 11월 7일까지 한번 더 기다려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국민은행
앞길로 다시 내려왔다. 이 사이에 한 시간이 흘러버렸다. 내려와보니 아까 모여
있었던 3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거의 다 흩어지고 없었다. "괜히 나왔다"고
투덜대면서 작업장으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11월 7일. 약속한 날짜가 되었건만 약속은 아무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삼동회는 다시 모였다. 전태일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자고 제의하며 모두 희생할 각오로 싸우자고 말하였다. 정해진 거사일자는 11월
13일. 시각은 역시 오후 1시. 전태일을 포함한 세 명의 회원이 플래카드를 만들
책임을 맡았는데 구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말이냐?" 등으로 하기로 하였다. 연설은 탁자
하나를 준비해뒀다가 노동자들이 모일 때 그 자리에 내어놓고,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그 위에 올라가서 근로기준법 중요 조문들을 소리내어 읽고
"이런 조문이 다 무슨 소용이냐? 지켜지지도 않는 이 따위 허울좋은 법은 화형에
처해버리자!"라는 취지의 선동 연설을 하여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그리고
나서는 전태일이 구호를 선창하고 회원들과 모인 사람들이 복창하면서 곧 바로
데모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 화형식을 위하여 전태일은 휘발유통 하나를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획들이 세워지고 나서 전태일은 다시 회원들을 향하여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라고 힘주어 말했는데, 이 말이
바로 목숨을 던질 엄청난 결심을 품고 그 자신의 마음을 다지는 말인 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였다. 휘발유통을 사겠다고 하였을 때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 죽음으로써 끝내 폭압의 벽을 뚫고야 말겠다는 움직일 수 없는
결심이 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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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꽃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의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한용운 '오셔요')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폐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과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한 인간이 그의 인간성을 풍성하게 하는 과정은 곧 좁은 자아의 환상을 버리고,
그 껍질을 깨고, 자신과 이웃과 세계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관심의 햇살이 비치는
곳을 향하여 나오는 과정을 뜻한다. 참된 소망, 참된 사랑, 참으로 순수한
그리움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참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참으로 절절하게 사랑하고 희망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가 사랑하고 소망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향하여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전태일에게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나라였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모든 구별이 없는
평등한 인간들의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
'덩어리가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 그것을 그는 바랐다. 부유하고 강한 자들의 횡포 아래 탐욕과
이해관계로 얽혀진 '불합리한 사회현실'의 덩어리(인간을 물질화하는
'부한 환경'), '생존경쟁이라는 이름의 없어도 될 악마'의 야만적인 질서, 그것이
분해되기를 그는 바랐다.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그 잔혹한 채찍으로부터
구출되기를 그는 너무나도 절절하게 바랐다.
자본가들을 살찌우기 위한 이윤의 도구로서 기계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게 되기를, 하나의 존엄한 인간으로서 인정받게
되기를, 그리하여 괴로운 노동이 즐거운 노동으로 바뀌는 그날이 오기를 그는
열망하였다. 그가 항상 '나의 전체의 일부'라 불렀던 소외된 밑바닥 인간들,
저주받은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들, 불쌍한 현실의 패자들을 그는 너무나도 뜨겁게
사랑하였다. 그들이 오랜 무기력과 위축과 굴종과 침묵과 자학을 벗어던지고
인간다운 위엄을 되찾아 일제히 궐기하기를, 그리하여 이제껏 자신들을 짓밟고
가두어왔던 억압과 착취의 벽을 온몸으로 두드리며 맞서 싸우기를 그는 애태우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모든 것을 참으로 절실하게 소망하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굽히지 않고 다시 일어서 싸워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그가
바라는 것은 좀체로 오려고 하지 않았다. 산이 나에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산을
향해 가야 한다. 이제 그는 마지막으로 그의 모든 것을 던져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차례가 된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의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의 비극적 투쟁의 내면적 투쟁을 다시 한 번 간략히 되돌아보기로 하자.
아래에 소개하는 글은 그가 '현실에 반항하는 청년의 몸부림'이라는 제목 아래
구상한 소설작품의 줄거리인데, 여기서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한 이후의 그 자신의
투쟁과정과 그 비극적 결말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쓰여진 시기는
1970년 초여름, 그러니까 아직 삼각산에서 최종적으로 죽음을 결단하기 이전에
고뇌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 반항하는 청년의 몸부림
작품구상
때: 1969년 3월 16일부터^36,36^현재까지
곳: 서울시내 전역
주재: 자유와 방종 현세대의 사회적 성격과 기성세대의 경제관념. 그리고
현실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기성세대의 경제관념에 반항하는 청년의 몸부림
등장인물
J: 주인공 23세의 청년으로 제품업에 종사하는 재단사
B: 피복공장 미싱사로서 주인공의 사고력에 큰 영향력을 끼친 20세의 나약한 소녀
줄거리
1. 중부시장의 시끄러운 공장소음으로 시작하여 B의 유린당하고 있는 인간본성
2. B의 참상을 보고 마음의 충격을 받는J의 결심
3. 공장 분위기와 과로, 직업병으로 인한 J의 고심과 직장을 못 다니게 된 동기.
4. 구로동 맞춤집의 고된 일과 J부친의 사망
5. 바보회를 조직하는 J와 친구 재단사들간의 의견대립
6. 창립식 이후 다시 정기총회를 개최하지 못하는 J의 심정과, 바짓집의 싼
공임으로 앙케이트 인쇄하기까지
7. J의 가정형편과 식구들의 성격상태
8. 일반인의 생각과 현 사회실정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 아래 당황하는 J
9. 앙케이트가 기능공들의 의사표기를 대변하는 것이었으나, 기업주들의
강제적인 의사통제로 3만 기능공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데까지
10. 시청근로감독관의 무성의한 태도와 J의 감정상태
11. 사회를 신임하고 있던 청년 J의 낙심과, 사회를 신임하지 않게 됨.
12. 한미사 주인의 이중인격과, 사회를 처음 대하던 18세 J의 실망과 기성
세대의 탐욕으로 인해 제물이 될 뻔한 J의 상태
13. 협신사 주인의 비인간적인 경제관념과 기업주로서의 상대적 지위 남용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기능공과 J의 울분
14. 방황, 범죄에 대한 공상과 자본을 구하기 위한 공상
15. 오랜 공상과, J를 중심으로 얽매여 있는 사회환경에 견딜 수 없는 구속감과,
본능적으로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보려는 J의 방황
16. 바보회 창립 당시 회원들에게 한 중요한 발언과, 자기가 이 문제를
성공시키지 못함으로 인한 기능공들의 예전보다 더 한 실망감과,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실망적인 결과만을 남기게 된 책임감을 느끼고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애절하게 몸부림치는 J
17. 대구로 여행하여 J마음의 고향, 육신의 고향에서, J의 일생중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이 있는 대구 여기에서, 옛동창들을 모아놓고 파티겸 마지막으로 쓸쓸한 사망의
길로 가려고 하는 자기의 인생을 남기기 위한 눈물겨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된다.
18. 옛 동창 앞에서 자기 선전을 한다. J자신이 자기를 극도로 과장해서
선전하며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믿었지만, 이 선전을 통해 곧 되는
것처럼 동창들에게 과장해서 자랑하며, 실로 어처구니없는 미래의 자기 위치를
설명한다. 즉 기능공에 대한 교육기관을 건축하고 오락시설을 갖추어야 할
인격완성 등, 기능공들을 위한 이러한 여러 가지 요건을 갖추는 데 필요한 금액의
출처, 금액을 마련하는 방법 등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일동들은 잠시나마 벅찬
감격을 느낀다.
J자신도 자기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되는 줄로 잠시나마 생각하다가 자기만이
느끼는 사회환경에 몸서리치면서, 자기의 원 계획대로 몇 개월 후의 자기 위치를
설명한다.
19. 상경하여서 J가 피부로 느끼는 사회의 반응과 마지막을 위한 환경정리
20. 친구들이 J를 대구에서 기다린다. 약속 날짜는 4월 19일. 여기에 날아드는 유서
한 장
이 소설 작품 구상의 주제인 '자유와 방종'에 있어서의 '자유'라 함은 참된 자유,
인간으로서의 살기 위한 자유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억압받는 자의 자유를 뜻하기도 한다. '방종'이라 함은 '자유'라는 허울 밑에
방치되고 있는 야만적 무정부적인 탐욕, 무제한한 이윤추구의 자유(!), '사기업의
자유'라는 간판 아래 인간성을 파괴하는 착취와 억압의 횡포를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세대의 사회적 성격'에 반항하는 그의 몸부림이 작품의 주제인 것이다.
그의 반항은 그 자신이 억압의 현실 아래 고통받는 자의 하나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지만, 그의 몸부림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인간성을 유린당하고 있는 B"라는 한
여공의 참상에 충격을 받은 데 있다. 그 자신의 고통,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이 그를 눈뜨게 하고 반항으로 몸부림치게 만드는 것이다.
몸부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하나하나 현실의 벽에 부딪쳐 가고, 마침내는
부와 권력의 결합체가 지배하는 전체 사회현실의 거대한 덩어리가 인간성을
파괴하는 야수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거대한 힘은
인간성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 자신을 꼼짝 못하게 얽어두고 있는 굴레였다.
여기서 그는 "J(그 자신)를 중심으로 얽매여 있는 사회현실에 견딜 수 없는
구속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보려고 방황"한다.
오랜 공상과 방황이 모두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만난을 극복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그 앞에 남겨진
마지막 투쟁의 길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앞에서도 우리가 보았듯이, 그는 이 작품 구상을 쓴 후로 삼각산에 올라가 노동을
하면서 죽음을 위한 마지막 마음의 정리를 하고 내려와서, 다시 평화시장의
투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 그는 어째서 최후의 투쟁방법으로 죽음을
택하였는가, 아니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우리 사회의 특수한 성격과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세계의 어떤 곳, 어떤 시대의 노동운동의 역사에서도, 분신자살을 투쟁방법으로
택한 예가 아마도 없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운 노동운동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 끊음으로써 노동운동을 전진시키려고 한
노동자는 없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건 참된 노동운동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그러나 6.25(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만큼 노동운동이
처절한 불모지였던 곳이 있었을까?
제 2차대전 후의 한반도는 강대국 냉전의 제물로 떨어진 세계 사상 유례가 드문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격전장이었다. 좌우익이 대립한 동족전쟁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희생되고 학살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쪽에는 친미파인
우익정부가 자리잡고 좌익세력은 철저하게 말살해버렸다. 이 과정은 물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좌익탄압을 핑계삼아 일체의 비판세력 제거, 일체의
대중운동말살로 연결되었다.
이때부터 한국 노동운동의 오랜 침묵이 시작된 것이다. "노동운동이란 곧
좌익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낙인이 찍혀졌고, 노동운동이니 노동자니 하는 노자만
발음해도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노동조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노동운동이란 용어가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승만 시대부터 정치권력의 철저한 통제 아래
놓여진 어용단체, 어용운동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풍토 아래서 노동운동은 장기간 불모지대로서 존속할 수밖에 없었다.
6^3456,12,15^ 이후의 오랜 기간 동안, 사회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 대부분이 보신책에
급급한 피해망상증 환자가 되어 노동운동은 생각도 말아야 할 타부가 되었다.
야당은 물론이요, 권력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지식인들도 노동문제만은
언급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노동자들 자신도 아예 참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득책으로 되어버렸다.
전태일의 외로운 투쟁은 바로 이와 같은 가열한 탄압과 무거운 침묵의 시대에
전개된 것이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바보'짓이리만치
무모한 것이었다. 그것은 도대체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싸우면 싸울수록,
그는 일층 무거운 벽에 부딪쳐 갔다. 그가 아무리 외쳐도, 아무리 싸워도, 세상은
관심조차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동료인 노동자들까지도 적극적으로
그와 합세하여 투쟁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1970년 10월 7일 그는 모처럼만에 세상의 무관심의 벽의 일각을 뚫는 데
성공했다. 그는 새로운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 희망은 잠시 반짝이다가 다시
사라지려 하였다. 신문보도에 인해 잠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상에 관심을
가지는 듯했던 사회여론은 다시 잠잠해지려 하고 있었다. 잠시 동요되었던
노동청과 기업주들은 몇 차례 노동자들을 속이며 시간을 끌다가 사회의 관심이
평화시장에서부터 멀어지자 다시 배짱을 내밀었다. 오히려 경찰까지 끼어들어
제약은 더욱 가열해졌다. 10월 7일 이후 한동안 술렁대던 노동자들은 다시 깊은
체념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0월 24일의 데모가 실패로 돌아간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자세가 확고하지 못한 데 있었던 것이다.
기업주들이 작업장의 문을 닫고 내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왜 노동자들이 그것을
뚫고 나오지 못했던 것인가? 경비원과 형사들 수십 명이 곤봉으로 막는다고 해서 왜
수백 명이나 모인 노동자들이 순순히 해산 당해야만 했던가? 삼동회 회원들은
어째서 확고한 자세로 모인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데모를 결행하지 못하고,
기업주, 경비원, 형사들의 눈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우물쭈물하고 있었는가? 바로
이와 같이 노동자들이 흔들리고 우물쭈물하였기 때문에 노동청과 기업주측에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깔보고 점차로 무성의한 태도를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10월 24일 데모 이후 전태일은 더 이상 기업주측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11월
7일까지 기다려보기로 한 것은 친구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다시 그들이 타협적인
태도를 청산하고 싸움에 나설 기회를 기다린 것에 불과했다. 그날 2층 경비실에서
내려오면서 그는 옆에 있는 한 친구를 돌아보고, "11월 7일까지 개선이 안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었다. 그 친구는, "그러면 다시 한판 벌이는 거다"라고 대답했다.
전태일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번 만큼은 몇 사람의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반드시
데모를 성공시키도록 하자고 다짐하였던 것이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모든 것을 내거는 단호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단호한 투쟁으로
이끄는 것은 말로써나 이론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피로써, 그 자신의
스물 둘의 젊은 목숨을 아낌없이 던지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억압의 벽아래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모든 인간적이 관심을 포기하고
침묵하고 있는 사회의 저 두터운 무관심의 벽을 깨뜨리는 것도, 진정서나 말로 하는
호소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불타는 육탄의 항의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절실히 깨달았다 억눌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껏 통곡하게 하고,
그리함으로써 그들의 위축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일어서게 하기 위하여 그는 병든
육신을 통곡의 횃불에 바치기로 한 것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불꽃의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빛을 던진다. 불꽃이 아니면
침묵의 밤을 밝힐 수 없다. 허덕이며 고통의 길로 끌려가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삶의
길을 비추어 보이는 것은 오직 불꽃뿐, 불타는 노동자의 육탄뿐.
얼음처럼 굳고굳은 착취와 억압과 무관심의 질서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어가는 노동자의 참혹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불꽃뿐이다.
전태일은 자신은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다. '원섭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 뭉친
덩어리를 분해하기 위해 아름다운 색깔의 향을 피우겠다"고 하면서, 그 향내를 맡으면
덩어리는 저절로 풀어져서 다시는 뭉칠 생각을 아니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원섭에게 그는 "너는 또한 보지 않을 수 없을 걸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존엄을 부르짖으며 시위하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노동청기자들이
자신에게 격려의 말을 던지고 협조를 약속하여 그것이 마침내 평화시장에 간한
신문보도로까지 발전하였을 때에, 그는 불의한 억압의 손길에 의해 강요되었던
침묵은 반드시 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10월 7일의
신문보도를 접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자각의 물결. 당황한
억압자들의 동요. 더구나 때는 바야흐로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여론의 힘을
발휘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기서 그는 그의 죽음이 어떤 성과를 거두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무렵 그는 친구들에게 간간이 지나가는 말처럼, "나 하나 죽어지면 뭔가
달라지겠지."하고 말하는 일이 찾아졌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하자. 억압이 가장 가열한 사회에서는 죽음이야말로 그
억압을 뚫는 가장 유력한 전술의 하나이라고, 목숨을 거는 단호한 투쟁만이
노예의 굴레를 벗어나는 유일한 활로라고. 전태일의 죽음은 바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삶의 의지의 폭발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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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야
11월 13일을 며칠 앞두고부터 전태일은 마음이 고요하지를 못했다.
근로기준법을 화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품속에 간직하고 다니던
책. 쏟아지는 졸음을 쫓아내어가며 뚫어지게 보고 또 보던 책. 그의 모든 희망의
원천이었던 노동자들의 권리의 장전. 그것을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근로기준법에 있어서 노동자들이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참상은 더욱더 숨겨지고 전태일의 가슴은 더욱 분노로
터졌던 것이다. 있으나마나 한 법, 한 장의 휴지 조각. 8시간 노동문제는 다
무엇이며, 주휴제, 야간작업금지, 시간외 근무수당, 월차휴가, 생리휴가, 해고수당
따위가 다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법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란 말인가?
"평화시장을 보라!"
전태일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국민의 혈세를 받으며 노동자들의
피땀을 밟고 그 위에 선 정부가 뻔히 지켜지지 않고 있는 줄 알면서 가장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척하며, '근로기준법'이라는 빛좋은 개살구를
내세우고 있는 그 더러운 위선을 발가벗겨 폭로하고 공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권리는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 그 허울좋은 법조문에 의하여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 스스로의 불굴의 투쟁에 의해서만 쟁취되고 지켜지는 것이라는 진리를
일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며칠 째 불기가 꺼진 얼음장 같은 방바닥 위에서 전태일은 지그시 그의 손때로
까맣게 쩔어 있는 근로기준법 책, 심태식 저 "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을
노려보았다. 저 헤진 책과 함께 그의 병든 육신의 생명도 이제 불길 속에 휩싸여
사라질 날이 가까워 있었다. 그 무슨 기이한 인연이란 말인가?
스물 두 해의 지루하였던 고통의 생애. 그러나 아직 스물 둘의 젊음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며칠 후면 아시게 될
것이다. 그때에 올 무서운 충격. 그것을 줄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음인지 그는
이즈음 어머니에게 평소에는 하지 않던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 시장 일이 아무래도 크게 한판 벌여야 하게 생겼어요."
"왜? 네가 안하면 안되니? 제발 서른 살 될 때까지라도 좀 참아라. 이 에미가
불쌍하지도 않나?"
"허 참, 어쨋든 안할 수는 없게 되었으니, 요번 13일날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꼭 구경하세요. 어쩌면 아들 얼굴 오랫동안 못 보게 되실지도 모르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잡혀간단 말이냐? 아니면 네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런 게 아니라, 한판 왕창 벌이고 나서 불리해지면 어디 일본 같은 데로
밀항이라도 해야 될지 모르잖아요. 그러고 나면 평화시장 근로개선 운동은
어머니가 내 대신으로 좀 해주세요."
"듣자듣자 하니 별 소리 다 듣겠다."
어머니는 불안했다. 이즈음 태일의 거동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혼자서 방 청소를 하고 있을 때 근로기준법 책이 눈에 띄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책이었다. 그날따라 꼭 저놈의 책 때문에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전류처럼 온몸을 휩쌌다. 어머니는 책을 집어서 부엌에
걸려 있는 빈 솥 안에다가 숨겼다. 어머니는 기억으로는 이때가 11월 11일.
11월 12일 아침. 이날은 전태일이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을 영원히
떠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밤은 13일날 사용할 플래카드를 만들기 위하여
친구집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그는 집을 나서야 했다.
집을 떠날 때의 전태일의 모습은 가족들이 보기에 참으로 이상하였다. 그는
평소에 옷차림 같은 것에 별루 신경을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텁수룩한 모습으로
다니는 편이었는데, 그날 아침 따라 웬일인지 유난히 깨끗한 차림새를 갖추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닌가? 간밤에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 알 수 없었으나, 새벽부터
일어나 정성스레 세수를 하고 방을 깨끗이 정돈하고, 그리고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몇 번 빗고, 작업복 바지도 새로 다리고 평소에는 입지 않던 헌 검정
바바리코트를 꺼내어 먼지를 깨끗이 털고 걸쳐 입는 것이었다. 그렇게 차림새를
갖추면서도 낯빛은 몹시 침울해 보였다.
얼마 후 그는 무엇을 찾는 듯이 두리번거렸다. 말할 것도 없이 근로기준법 책을
어디에다 감추셨느냐고 하면서 기어이 찾아내어 달라고 졸라댔다. 어머니는
모르겠다고도 하다가, 또 그 책 때문에 아무래도 사고가 날 것 같아서
내다버렸다고도 하다가, 나중에는 제발 그놈의 책 이제 그만 가지고 다니지
말아달라고 애원도 해보았다. 그러나 태일은 "다른 것은 다 어머니 말씀대로 할
수 있어도 이 일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책을 안 내준다고 화까지
내었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책을 꺼내주었다. 책을 받아든 그는
"죄송합니다"고 하면서 무엇을 더 말하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입을 굳게
다물고 침울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앉아 있었다.
밥상이 들어왔다. 라면이었다.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는 그를 보고, 여동생 순옥이
옆에 앉아있다가 조심스레 "오빠, 15일까지 돈 좀 안될까?" 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듣고 태일은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던 것일까? 그는 "순옥아.
미안하구나" 하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젓가락을 놓고 일어서서 방문을 나섰다.
따라서 일어서는 순옥을 등진 채로 그는 다시, "순옥아, 며칠만 기다려라, 곧
월급 타올 테니 그리고 순옥아, 아무리 살기가 어렵더라도 어머니께 돈 때문에
졸라대지 않도록 해라" 하였다.
이 순간의 그의 가슴을 찢는 통곡을 우리가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무엇이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이 죽음의 길을 떠나는 이
마지막의 순간에까지 그의 심장을 비수처럼 후벼팔 때, 그것은 과연 누구의
탓이었던 것일까?
전태일은 막내 동생 순덕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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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70년 11월 13일.
그날은 아침부터 옅은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평화시장 일대에 감도는 긴장감은 10월 24일 데모 때보다 더욱 짙었다. 경비원들은
전보다 더 불어나 있었고 출동한 경찰대가 이곳저곳에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낮 1시.
각 작업장에서는 업주들이 종업원들에게 "오늘 몇몇 깡패 같은 놈들이 주동이
되어 좋지 못한 움직임이 있으니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었다. 경비원들과 형사들은 국민은행 앞길로 통하는 통로를 막고 노동자들을
못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삼동회의 그 동안의 동원활동이 활발하였던 때문인지
삽시간에 약 5백명의 노동자들이 국민은행 앞길에서 웅성거렸다.
이 시각 삼동회회원들은 형사들의 눈을 피하여 평화시장의 건물 3층의
어두침침한 복도의 한 구석에 모여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회원 중 몇 사람은 이미 시장 경비원들에게 끌려가서 회사 사무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플래카드 제작책임을 맡았던 전태일과 한 또 한
사람의 회원은 준비된 플래카드를 몸에 감고 옷 속에 감추어 시장에 나왔다.
1시 30분경.
그들은 플래카드를 꺼내어 펼쳐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2층 복도에까지 왔을 때
형사 두 사람이 뛰어와서 플래카드를 빼앗으려 하였다. 전태일은 무어라고
소리치며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여진
플래카드를 두고,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 밀치고 당기는
실갱이가 벌어졌다. 그 통에 종이로 만든 플래카드는 쉽게 찢어졌다. 몇 명의
회원은 형사들에게 심하게 얻어맞고 끌려갔다. 나머지 회원은 바싹 약이 올라서
"좋다! 플래카드 없으면 못할 줄 아느냐!"고 소리를 치며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내려가려 하였다.
이때였다. 전태일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향하여, "너네들 먼저
내려가서 담뱃가게 옆에서 기다려라. 난 좀 있다 갈 테니" 하였다.
친구들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그의 말에 따라 그를 혼자 남겨두고
국민은행 앞길로 내려갔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웅성거리던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경비원들과 경찰들의 몽둥이 앞에 밀리며 이리저리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사전에 연락을 해두었건만 신문기자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먼저
내려온 회원들은 전태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담뱃가게 옆에 서 있었다.
약 10분 후에 전태일이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김개남의 웃소매를
끌어당기며 눈짓을 하여 그를 사람이 좀 덜 다니는 옆 고목으로 끌고 갔다.
"아무래도 누가 한 사람 죽어야 될 모양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여 김개남에게 성냥불을 켜서 자신의 몸에 갖다 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전날 저녁에 김개남은 전태일이 내일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판
벌여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성냥불을
켜서 갖다 대어달라는 전태일의 부탁이 심각하였기 때문에 불길한 예감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긴 했으나, "설마." 하는 생각에 그는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다.
순간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친구들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한 뒤,
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한 되 가량의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내려왔던 것이다.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는 몇 마디의 구호를 짐승의 소리처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입으로
화염이 확확 들어찼던 것인지, 나중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소리로
변하였다.
때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한 회원이 근로기준법 책을 전태일의 불길 속에
집어던졌다. 이렇게 하여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 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나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불은 꺼졌다.
이때쯤 되어서 흩어져 가던 노동자들과 길가던 행인들까지도 갑자기 일어난
불길을 보고 와서 웅성거렸고, 뒤늦게 평화시장에 나타났던 기자들도 뛰어와서
수첩을 꺼내 들고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 !"
그것은 지옥 끝에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실로 참혹한 풍경이었다. 그의 몸은
옷의 엉덩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신이 숯처럼 시커멓게 타고, 온 살결은
화상으로 터지고, 그의 눈까풀은 뒤집히고, 입술은 퉁퉁 부르터서 그를 낳고
22년 동안 기른 어머니라 할지라도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참혹한 몰골로, 그는 마지막 남은 생명의 힘을
다 짜내는 듯 야차처럼 울부짖었는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마디
소리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기자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인터뷰였다. 참혹한 인터뷰였다.
그들은 아마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는 듯했다. 전태일은 무어라고 입술을
움직거렸는데 발음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까맣게 탄 얼굴 근육을
실룩거렸는데,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또다시
길바닥 위에 쓰러졌다. 기절한 모양이었다.
앰블런스 차가 왔다. 친구 두 사람이 그를 들어 차에 올려놓았다. 그는 인근의
한 병원(메디칼센터)으로 옮겨졌다. 이때가 2시경.
한 재단사가 분신자살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평화시장 일대에 퍼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은행 앞길 부근의 행상들이나 길가던 행인들은 분신자살 현장으로 몰려들어
구경을 하고 있다가 참혹한 광경에 낯을 찌푸리고 하나 둘 돌아서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재단사들과 그 밖에도 그들이 하는 일을
알고 있었던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달려왔다. 그들만은 이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2시 30분경.
그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누가 전태일을 죽였는가?"
"우리도 사람이다. 16시간 노동이 웬말이냐?"
플래카드가 없었다. 빼앗기고 없었다. 빼앗긴 플래카드 대신, 최종인을 비롯한
몇몇 삼동회원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 피의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그들 분노에 미친 젊은 노동자들은 긴급 출동한 기동경찰과 혈투를 벌이면서
동대문 쪽으로 밀려갔다.
잠시 후 그들은 경찰의 곤봉 아래 머리가 깨어지고 구둣발 아래 짓밟히면서
경찰서로 개처럼 끌려갔다.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 응급치료를 받았는데, 온몸을 붕대로 감아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병원으로 실려갈 때, 그의 친구 하나가 쌍문동
태일이네 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 친구는 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씨에게 사건 경위를 약간 이야기하고 그러나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 같으니 크게 염려하실 것 없다고 하였는데, 이소선 씨는 헐떡거리고 달려와서
전갈을 해주고 있는 아들 친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는 모든 것을 각오했다.
그녀가 병원 안으로 뛰어들어 가니 어디가 어딘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중에도,
어디선가, "선생님! 물 좀 주시오!" 하고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즉각적으로
그것이 아들의 음성임을 알았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서 "태일아!" 하고 불렀다.
태일은 어머니가 오신 것을 알고는 어머니와 함께 병실 문을 들어서는 친구를
향하여, "엄마한테 연락하지 말지." 하면서도 무척이나 반가운 듯하였다.
"어머니, 놀라시면 안됩니다."
태일이 어머니에게 한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어머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아들의 얼굴을 만져보니 이미 다 굳어 있었다. 팔과 다리도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화기는 약간 가신 듯, 말소리만은 또랑또랑한 것을 보고 어머니는
외상이 심할 뿐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져보려
애썼다 그러나 역시 죽을 것 같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근로자를 위하여 애쓰는 태일이의 뜻이 이 모양으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뜻이 아니고는 떨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가엾은 목숨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기독교 신자이신 어머니는 품 속에 품고 온 성경책을 아들의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그러는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전태일은 말했다.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아들은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어머니는 웬일인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흉하게 탄 아들의 얼굴에서
눈도 돌리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아들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우리 어머니는 나를 이해해."
한마디를 하고는 손을 내밀려는 듯 몸을 움칫하다가 되려 잠잠해지며,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하였다.
못다 일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달라는 아들의 이 한마디는 어머니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박혔다. 입술을 깨물어 그 말을 되새기면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약속을 했다.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태일은 "어머니, 정말 할 수 있습니까?" 하고 세 차례나 되물어서 "그래,
기필코 하고 말겠다"는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 나자, "약속합니다!"하고 소리치며
움직이지도 않은 몸을 움직이려 들려고 하였다. 그러는 아들을 가만있으라고
제지하고 나서, 어머니는 그제서야 이대로 얘기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의사를
만나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어보고 치료를 부탁해야 되겠다는 정신이 들었다.
그때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친구들을 불러달라고 부탁하였다. 병원에 와 있던
서너 명의 친구들이 그의 머리맡으로 다가섰다.
" 자네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네. 뭐니뭐니 해도 사람이란 부모에게
잘못하면 안돼 너희 부모들께 효도하고, 그러고 조금 시간이 남으면 우리
어머님께도 날 대신해서 효도를 해주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루어 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이렇게 당부하면서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친구들은 잠시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전태일은 벌떡 일어나려고 하면서 큰 소리로,
"왜 대답하지 않는가!"
하고 외쳤다. 놀란 친구들이 급히 그를 제지하여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는,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네 말대로 꼭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전태일은
다시 친구들에게 "큰소리로 맹세하라"고 요구하였다.
"맹세한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제서야 전태일은 눈을 감으며
잠잠해졌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추워서 떨고 있는 아들을 치마를 벗어 덮어주고는 의사에게로
갔다. 의사의 말로는 1만 5천원짜리 주사 두 대만 맞으면 우선 화기는 가시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훗날 집을 팔아서라고 갚을 터이니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리자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근로감독관에게 가서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분신자살 소식을 듣고 노동청에서 평화시장으로 급히 파견되었던
근로감독관 한 사람이 병원에까지 전태일을 따라와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근로감독관에게로 가서 보증을 서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무엇 때문에 보증을 서요?" 하고 퉁명스레 내뱉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 악착 같은 말썽꾼이 미워서 였을까, 아니면 노동청으로부터
전태일을 살릴 것 없다는 무슨 지시라도 받고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다시 의사에게로 가서 애원을 하니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약이
지금 여기에는 없으니 성모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까지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만 받았을 뿐 서너 시간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때 근로감독관이 다시 나타나
전태일들과 같은 차를 타고 성모병원으로 갔다. 차중에서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
어머니와 하는 소리를 듣고나서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사가 끝났다고 그렇게 배신할 수가 있소?
내가 죽어서라도 기준법이 준수되나 안되나 지켜볼 것이오." 하면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조금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성모병원에서는 그를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의사의
진단은 희생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원실에서도 별다른 치료를 해보지
못하고 거의 환자를 방치해두다시피 하였다.
어머니는 내내 옆에 서서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태일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수없이 졸라대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을 마시면
화기가 입 속에 들어가서 영영 살릴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 물을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갈증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가제에
물을 적셔서 입을 축여주었다.
저녁이 되면서부터 전태일은 기력이 탈진해가는 듯 잠잠하게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는 소리로 "배가
고프다."라고 하였다. 12일 아침 집에서 라면 한 그릇 먹고 나간 후로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굶었던 그였다. 이 한마디, 그의 스물 두 해의 고통을
말해주는 이 한마디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밤 10시가 조금 지나 간호원이 침대를 옮기려는 순간, 그는 고개에 힘을 주려고
하다가 숨이 막혀 운명하였다.
청옥 시절의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그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유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이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지환 금력을 뜻함. 엮은이)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앓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의 가장 비범한 삶
"전태일 평전"의 개정판을 내면서 그 발문을 서달라는 청탁을 받고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전태일을 노동운동의 불꽃으로 부활시킴으로써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학생운동,
농민운동, 재야민주화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 책에, 저자인 조영래의 서문도
발문도 없는 것이 안타깝고 서글프다. 세계사적 대격변의 와중에서 표류하는 오늘의
참담한 민족현실을 볼 때, 조영래가 살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기에 이러한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사실 전태일은 그의 위대한 죽음으로 그의 삶이 더욱더 빛나는 것이지만, 조영래는
그의 빛나는 삶으로 전태일의 뜻과 더불어 우리 모두의 꿈과 희망을 이룰 인물이었다.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운동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고 조영래와의 어울림으로 운동을
힘있게 전개할 수 있었던 나로서는, 조영래 없는 세상이 싫기도 하거니와 조영래가
직접 이 글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 커, 이 글의 집필을 몇 번이나 거절했으나
숙명적 인연 때문인지 끝내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찌 전태일에 대해, 조영래에 대해,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와
평화시장의 노동형제들에 대해, 그리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변혁운동에 위대한
길잡이가 된 "전태일 평전"에 대해 할 말이 없겠는가. 더욱이 '영화 전태일'의
제작을 계기로 '투사'로서만 비춰져온 그의 모습을 바로잡아, 그의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평전의 개정작업에 착수한다고 하니, 전태일의
비범한 투쟁에서보다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그의 사랑과 열정과 지혜와
성실에서 더 큰 교훈을 얻어온 나로서는 몇 마디 말을 보태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은 한마디로 성자로서의 인품과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전태일은
단순한 투사가 아니다. 본래 단순한 투사가 있을까마는 전태일의 경우는 투사로만
인식되는 것이 너무나 억울할 정도로 그의 따뜻하고도 고결한 인품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가히 성자의 인품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전태일은 넉넉치 못한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우했던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의 영원한 사생아가 아니냐"라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전태일은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인간구원과
사회개혁의 높은 이상을 잃지 않았다. 인간구원과 사회개혁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엄청난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높은 이상과 아름다운 꿈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더 없이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태일은 버림받고 실패하고
고뇌하면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도전하였고, 마침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다. 전태일만큼 자기의
뜻을 이룬 사람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전태일은 가난과 질병과 시련에 처해서도 인생을 항상 낙관했다. 이 평전에 실린
몇 장의 사진에서도 그의 명랑함과 활달함을 확인 할 수 있다.
전태일은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으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학교교육을 받을 기회는 거의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몇 푼 되지도 않는
석유곤로와 입던 바지를 팔아 통신강의록을 받아볼 정도로 향학열이 대단하였다.
마침내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여 길지 않은 기간이나마 학창생활을 보낸 그는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고 토로할 만큼 '한없는
행복감'에 젖기도 하였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배움에의 열정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무감각한 일상을 반성하게 되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된다.
전태일은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어도 사물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명석함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과 행적을 예술적으로까지 표현하는 문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태일뿐만 아니라 이소선 어머니와 평화시장의 노동형제들 또한 하나같이
명석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명석함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내 나름대로
'사랑의 철학'을 정립하기도 하였다. 사랑이야말로 지식과 지혜의 원천으로서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전태일의 삶에서 우리가 배우는 최대의 교훈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태일은 우리에게 투쟁을 가르치기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 실천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전태일에게서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진보적이 된다"는 명제를 배우게 된다.
인간해방과 사회개혁을 위한 전태일의 투쟁이 참으로 위대하지만, 투쟁 이전에
그의 진실되고 아름답고 성스럽기까지 한 삶이 더욱더 감동적임을 우리는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전태일을 이처럼 사랑하고 존경하고 경탄하는
것은 그의 비범한 투쟁 때문만이라기보다, 역경을 이겨온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고난 속에서도 꿈과 사랑을 키워온 그의 원대한 이상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태일은 우리에게 과거만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꿈과 사랑으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전태일은 스스로 뛰어나기도 했지만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성자로 키운
이소선 어머니와 그의 뜻을 끝까지 따른 평화시장의 친구들, 그리고 "전태일 평전"의
집필로 전태일 사상을 정리하고 전파한 조영래 변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인간구원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는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때문임을 성경은 시사하고 있다. 가난한 이웃집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는 그의 어머니의 요청 때문에 아직 '자기의 때'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한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웃사랑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픔을 안아야 했고., 나아가 아들의 뜻을 펴는 일에 평생을 바쳤으니 예수의
어머니가 성모로 추앙받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전태일의 경우도 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전태일이 쓴 수기를 보거나
이소선 어머니의 회고를 들어보면 전태일이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을 그토록
사랑하도록 만든 것은 이소선 어머니임을 알 수 있거니와, 아들이 못다 이룬 뜻을
이루고자 한평생 생명을 건 투쟁을 해왔던 점을 상기할 때 이소선 어머니는
성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전태일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이소선
어머니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이소선 어머니의 헌신적 투쟁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날카로운
통찰력과 지칠 줄 모르는 투쟁정신은 전태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요인도 된다. '전태일 사건'이 있은 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말이
나왔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전태일의 뜻을 세상에 펴는 데 전태일의 평화시장 친구들은 마치 성경의
사도들처럼 끝까지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한
전태일의 유지를 세상에 전파하는 데 가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역시 이
시대의 성전이라 할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 조영래 씨이다. 흔히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전태일의 경우 조영래가 있었기에
전태일의 뜻이 보다 더 힘있게 펼쳐질 수 있었다.
"전태일 평전"은 조영래가 민청학련 사건 이후 수배상태에서 3년여에 걸쳐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집필한 '전태일 복음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전태일의 사랑과 투쟁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인 조영래의 사랑과
지혜와 투쟁을 아울러 담고 있다고 보아도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알고 전태일의 수기, 일기 등을 깊이 알면 알수록,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이 평전을 썼는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읽고 나면, 조영래가 전태일의 삶과 투쟁과 죽음, 그리고 전태일이 쓴 기록을
얼마나 잘 알고 깊이 연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조영래가 요절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집필에 혼신의 정열을 다 바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전태일
평전"을 4복음서와 서한집을 합한 신약성서와 흡사한 성서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으로 엄청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영래는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탁월한 사회개혁가요
인권변호사였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학생운동과
재야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1980년 대에는 인권변호사로서
망원동 수재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등을 도맡아 우리 나라 인권 변호의 새
장을 열었다. 이처럼 탁월한 능력과 훌륭한 업적은 그의 천재성과 무관하지 않다.
조영래는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서 전체 수석을 했다. 수석도 수석 나름이겠지만
조영래의 수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조영래의 천재적 업적으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및 재야민주화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다른 한편 그의 천재성으로 말미암아 학생운동과 재야민주화운동이 국민대중
속에서 자부심과 긍지를 드높일 수 있었다.
굳이 이 글에서 조영래의 천재성을 되새기는 것은 그의 위대한 천재성은 바로
인간에 대한 그의 남다른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고 싶어서이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 아파하는 조영래의 심성은 전태일의 심성과 꼭 같았던
것이다. 전태일도 조영래도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도 하나같이 천재이고, 그
천재성을 모두가 인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거듭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전태일 평전"은 이러한 조영래의 사랑에 기초한 천재성으로 전태일의 위대한
삶과 투쟁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전태일과 조영래와 이소선 어머니를 높이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이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에 대한 깊은 연구와 더불어
전태일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사명감 못지 않게, 전태일을 열렬히 사랑할
뿐만 아니라 민중을 뜨겁게 사랑할 때만이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 설 줄 알아야 하고
그 사람과 똑같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그 사람과 비슷하게는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경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스로 성인의 경지에 다다라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태일의 삶과 죽음, 나아가 전태일의 사랑과 투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태일과 같이 살고, 전태일과 같이 죽을 수 있는 결의를 다져보아야 한다.
조영래는 이러한 결의를 다지며 살아왔고 이런 결의에 충만해서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이렇게 훌륭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도 가고 조영래도 갔지만, 그들이 남긴 이 "전태일 평전"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개척하는 지혜와 용기와 사랑을 배우게 된다. 이 평전에
단순히 투쟁의 지침서가 아니라 시련을 극복하는 강렬한 의지를 심어줄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이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인생을 밝고 아름답게
살게 하는 큰 교훈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마침 이 책의 개정판이 전태일이 산화한 지 25년째가 되는 해에 나오게 되니 그
의미가 더욱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
반이나 변할 4반세기가 지났다. 더욱이 올해는 해방 50주년을 맞아 민족의 도약을
위해 새로운 비전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전태일'의 의미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전태일 평전"이 우리 사회를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장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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