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복음교회, 2023년 7월 9일 주일예배
♱기도로 마음을 모읍니다♱
[찬 송] 21장(다 찬양하여라)
[공동체 고백] 사도신경
[성시 교독] 교독문 71번(이사야 55장)
[찬 송] 438장(내 영혼이 은총 입어)
[강 론]
“애굽에서 불러낸 나사렛 사람(마4:17)”
주일 마다 교회로 모여 예배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오래된 고문서인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데는 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 주일마다 모여 예배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애굽에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호세아 예언(호11:1, 마2:15)과 예수그리스도가 “나사렛 사람”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했던 선지자(마2:23) 예언에서 따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불러낸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모세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공동체인 우리들도 “세상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헤롯으로부터 살해될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기예수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고, 헤롯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삽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데리고 나사렛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연약함으로 세상에서 죽은 듯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세상에서 불러내어(엑소더스) 하나님의 사람으로, 작은 예수로 살게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불러내신 나사렛 예수의 행적을 통해서, 세상에서 불려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작은 예수로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삶의 모범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첫째,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했습니다(3:16,17).-각성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함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표식입니다(3:8). 따라서 세례는 한 번 받겠지만,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겠죠. 이를 깨달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조금씩, 조금씩 삶의 변화를 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깨닫기는 하지만, 좋지 못한 옛 습성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면 그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세례요한도 이를 경계하여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8,9)”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33년의 생애에서 30년은 평범한 아들과 가장으로 사셨고, 남은 3년은 인류를 위해 사셨습니다. 이 3년을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영적인 각성을 통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저도 이 변화의 기로에 또다시 서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여러분! 회개하고 그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늘 노력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나와 나사렛 사람으로 살기를 권합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이고 행복의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둘째,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시험을 받았습니다(마4:1-11). -각성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시험(유혹)이 있음.
이 생명과 행복의 길을 선택하신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3가지 시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굶주림, 교만, 목표를 쉽게 이루려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사람이 아니라 나사렛사람입니다. 때문에 가난은 늘 가까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숙명이라고나 할까요. 따라서 이 가난을 회피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또 다른 가난’을 선택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나사렛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사렛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의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들어가신 것을 포함, 총 3번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서도 ‘나사렛 예수(갈릴리 예수)’로 불렸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교만이 없을 수는 없겠죠. 가난하다고 겸손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에게 교만이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더 겸손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제게 가장 어려워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쉽게 목표를 이루려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제게 가장 힘겨운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사렛사람으로서 가난을 받아들이고 교만하지 않으며 쉽게 어떤 목표를 이루려는 유혹을 물리치며 살기로, 함께 다짐하면 어떨까요?
셋째, 시험을 이기고 천국을 선포했습니다(4:12-17). -시험을 이기고 천국을 선포함.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사렛보다는 가버나움에서 더 왕성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고향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가버나움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있는 해변동네입니다(갈릴리 북서쪽).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이방 땅이죠.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신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비로소”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천국은 어떻게 임합니까? 회개함으로 이루어집니다(17). 저도 이 사실을 깨치고 용감하게 돌이킴으로 천국을 체험하고 선포하려 합니다. 비록 그곳이 스불론과 납달리 같은 이방 땅이고, 흑암에 앉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하더라고 말이죠.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그곳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에 발을 딛고 사십니까? 흑암에 앉은 사람들로 가득한 이방 땅이지만, 시험을 이기고 회개함으로 천국을 체험하고 있다면 된 것입니다. 그곳에 여호와하나님의 빛이 비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넷째, 천국복음을 선포하며 제자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4:18-22). -천국을 함께 선포할 공동체.
인생은 풀처럼 마르고, 지금 누리는 영화도 꽃처럼 시들해 질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영원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에서 흑암에 앉은 사람들 중에 소수를 불러내어 영원한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그 공동체가 교회로 발전(?)하지요.
저와 여러분은 영원한 공동체입니다. 우리만 공동체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더 큰 공동체에 우리는 속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이방 땅에서, 흑암에 앉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불려나온 나사렛 예수는 세상에서 제자공동체로 세우셨습니다(에클레시아).
다섯째, 공동체 안에서 천국복음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칩니다(4:23-25). -공동체와 천국복음 그리고 회복.
“애굽에서 불러낸 나사렛 사람” 예수는 세상에서 불러낸 당신의 공동체 속에서 천국복음을 선포하심으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이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지고 사방(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다, 요단강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지상에서 천국이 건설된 것이죠. 우리 안에 이런 역사가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돌이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개해야 한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죠.
영원한 공동체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곳에서 천국복음이 선포된다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이 고쳐지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소문이 자연스럽게 사방으로 퍼져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재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마치겠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12:33)”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사람, 작은 예수들입니다.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자신이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 말씀으로, 예배 속에서 자라갑시다. 그리고 열매로 우리의 수고의 결실을 확인합시다. 예수님처럼, 애굽에서 불러낸 나사렛 사람으로 어둠에 앉은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천국의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 송] 458장(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공동체 기도]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