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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관점 신학 대표 신학자 톰 라이트 칭의론은
과연 “신학적으로나 주석적으로” 가능한 일관된 신학인가?
<여성안수 논의를 끝내고 가지는 단상>에 대한 유감
오광만 (2026.07.27.19:58)
다음은 윗글에서 옮긴다.
사실 이 논의는 성경을 읽는 방법에 있고, 고전 중에 고전인 성경을 읽으면서 너무도 단순하게 또 단편적인 것만 고려하며 읽는, 성경 해석학 훈련이 안 된 사람이 성경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면서 벌어진 문제다. 성경 해석의 입장 차이 때문에 해당 문제(여성 안수)를 두고 논의를 한다면, 성서 학자들이 그 본문 해석을 두고 논의를 해야 하는데, 학문적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 논의를 하면서 목소리 크거나, 고집이 센 사람이 논의에서 이겼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광만 목사도 잘 아는 사실이겠지만, 개혁교회 조직(교의)신학은 성경 해석학과 무관하게 세운 신학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해석하고 종합해 교리 체계로 정립한 신학이다. 물론, 여성 안수론 역시 성경 해석학과 무관하지 않다. 즉, 성경을 해석하고 종합해 교리 체계로 정립한 론이다. 여성 안수 불가론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성서 학자들이 그 본문 해석을 두고 논의를 해야 하는데”라는 주장에 담긴 허점을 살펴보자.
나는 <오광만 목사 교만을 지적함 ①: 다른 사람 교만을 지적하는 일은 내 눈 속 들보를 보지 못하는 교만을 드러낼 위험성이 있다.>1)에서 “‘신학 학위가 없는 나’나 ‘역사 신학 전공자 서창원 목사’ 같은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은 《성경 해석학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이라서 이 논의에 참여할 수 없는가?”를 물으며 “그렇다면, ‘박채동과 서창원 목사’ 대척점에 서 있는 신학 박사들, ‘김세윤 교수와 이국진 목사’ 같은 성경 해석학 훈련이 잘 된 사람이 여성 목사 안수를 주장하면, 그것은 곧 성경을 대변한 ‘진리’인가? 바꿔 말하면, 성경 원어도 모르고 성경 해석학 훈련을 받지 못한 내가 여성 안수를 반대한다고 해서 그 불가론이 곧 비성경적인 것이 되는가?”를 물었다. 물론, 그 답이 ‘그렇다.’이면, 바울 사도 가르침을 두고 날마다 {구약성경}을 상고하며 ‘정말 그러한가?’를 살핀 베뢰아 성도들을 바울 사도께서 칭찬하신 말씀(행 17:11)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최종 권위는 학위의 권위나 전문성이 아니라 {성경}이어야 한다. 즉, 성경 원어 실력을 꾸준히 쌓는 일이나 성경 해석의 전문 훈련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서 무척 유익하고 중요하지만, 성경 원어 공부나 그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성경 해석에서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윗글 [<여성안수 논의를 끝내고 가지는 단상>에 대한 유감]에서 옮긴다.
(참고로, 십수 년 간, 바울의 칭의론에 대해 옛 관점 입장과 새 관점 입장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도, 해당 본문을 두고 신약 학자들 간에 논의한 것이 아니라, 조직신학자들이 바울의 본문에 적용한 해석이 맞다 틀리다하면서 논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학문적/방법론적 성향이 다른데 말이다.)
나는 이 참고 글에서 예장 고신 조직신학자 ‘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 바울은 칭의에 대해 정말로 무엇을 말했는가?} (서울: IVP, 2016)’와 예장 합신 조직신학자 ‘이승구 {톰 라이트에 대한 개혁신학적 반응: 톰 라이트의 신학적 기여와 그 문제점} (수원: 합신대학출판부, 2013)’을 떠올렸다. 오광만 목사 위 주장대로라면, 조직신학자들이 쓴 이 두 책은 허공을 치는 책들이다.
그런데 신대원에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나는 박영돈 교수나 이승구 교수 같은 조직신학자가 아닐뿐더러, 성경 원어도 모르고 성경 해석학 훈련도 받지 못했다. 그러면 이런 내가 새 관점 신학을 반대한다고 해서 그 반대가 곧 비성경적인 것이 되는가? 바꿔 말하면, 이른바 “세계적인 석학”, 성경 원어에 출중하며 성경 해석학 훈련이 잘 된 신약신학자 톰 라이트, 그의 성경 해석은 모두 옳은가? ‘죄인의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율법주의’는 거부하면서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온전한 능동(율법준수) 순종과 그 의義의 전가’까지 부정한 톰 라이트 신학은 과연 “신학적으로나 주석적으로” 가능한 일관된 신학인가?
새 관점 신학 대표 신학자 톰 라이트는 개혁교회 정통 교리 ‘그리스도 능동 순종과 그 의의 전가 교리’를 부정한다. 다음은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최현만 역 (평택: 에클레시아북스, 2016 개정판)’ 209쪽~211쪽에서 옮긴다.
신학과 종말론의 측면에서 이 모든 내용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메시아의 신실한, 애정 어린, 자신을 내주는 죽음이다. …(중략)… 하나님은 처음부터 줄곧 자신의 목적을 신실한 이스라엘 통해 실현하려고 의도하셨는데, 이제 드디어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 성취는 신실한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한 인물을 통해 발생했다. ㅡ“그 성취는 신실한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한 인물을 통해 발생했다.”는 번역에서 “신실한”이 “이스라엘”을 수식하는지, “한 인물”을 수식하는지를 영어 원문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약 “신실한 이스라엘”이라는 뜻이라면, 이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과연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두고 신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 박채동 주註ㅡ 하지만 이것은 그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고 그 결과 ‘공로의 금고’를 쌓아 올렸다는 의미(그리고 그 공로는 그의 백성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에서 ‘율법을 성취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존 파이퍼가 속한 전통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전통에서도 숭고한 선배들은 이 도식을 통해 바울이 말하려 했던 내용을 전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설명하는 율법은 자신의 도덕적인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케 하기 위한 수단, 혹은 선한 행위를 통해 타고 올라야 하는 사다리로서 주어졌다는 옛 사고에 바탕을 둔 언어와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다. 바울이 ‘전가된 의’와 가장 비슷한 내용을 말한 구절이 로마서 3장 21절이지만, 그마저도 바울 스스로 즉시 무효라고 선언해 버린다. 율법은 그 자체로 신적인 목적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목적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내용을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로마서 5장 19절 하반절에 기초해 좀 더 충분히 설명한다. 그 내용의 핵심은 메시아가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감당할 정도까지 신실하게 순종하셨다는 것이다. …(중략)… 메시아가 오셔서 스스로 그 언약적 저주를 짊어지셨고, 그 결과 새 언약의 복이 흘러넘쳐 마침내 전 세계에, 그리고 당연히 이스라엘에도 미친다. 이 내용을 충분하게 설명하려면 로마서 10장 전체를 다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먼저 바울에게는 메시아의 신실한 죽음이 모든 것의 기초였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칭의에 대해서, 언약의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전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메시아의 죽음이 그 모든 내용의 기초였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담의 후손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에도, 어떤 개혁신학자가 “율법은 자신의 도덕적인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케 하기 위한 수단, 혹은 선한 행위를 통해 타고 올라야 하는 사다리로서 주어졌다.”고 주장하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톰 라이트가 개혁신학의 실제 주장을 제대로 겨냥하지 못한 채 허공에 화살을 쏜 이 주장을 두고서는 일단 건너뛰자.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대표해 신실하게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했다.’는 톰 라이트 해석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왜 ‘그 신실함 속’에 ‘율법 아래 사신 그리스도 온전한 능동 순종’은 포함될 수 없는가? 톰 라이트 주장대로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메시아) 생애는 언약적 저주(어기면 죽으리라는 율법의 저주)만을 짊어지신 생애’였는가? 그리고 ‘그 결과 새 언약의 복이 흘러넘쳐 마침내 유대만이 아닌 전 세계에 미친 것’인가? 아니면, ‘지키면 살리라는 율법의 축복(의義)’까지 얻으신 생애였는가? 다음은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351쪽~352쪽에서 옮긴다.
파이퍼 문제는 종교개혁자들과 그 계승자 중 일부를 (절대 전부는 아니다) 추종해, 예수의 완전한 순종(십자가상의 죽음과 같은 ‘수동 순종’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능동 순종’)이 이러한 안전의 기초라는 전제를 통해 이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예수는 ‘율법을 성취해서’, 율법에 기초를 둔 ‘의’의 보고를 쌓아 올렸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의’가 없으며, 쌓아 놓은 법적인 공로도 없고, 선한 행실도 없다. 하지만 예수가 쌓아 올린 보고로 피할 수 있다. 내가 파이퍼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바는, 이런 설명은 신학적으로나 주석적으로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설명하는 내용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진정한 바울의 길을 따라 당신이 원하는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이야기하면서, 그 순종이 예수의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암시, 더구나 모세 율법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는 암시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로마서 5장에서 살펴봤듯이, 예수의 ‘순종’(빌립보서 2장 8절을 상호 참조하는 로마서 5장 19절)이 반영하는 실제는 이사야서 종의 ‘순종’과 일치하는 죽음의 성취다. 율법은 그 단계에서는 단역배우가 돼(롬 5:20), 전체 과정에 새로운 굴곡을 더하기는 해도 ‘능동 순종’(예수의 이 순종에 힘입어 의가 쟁취된다고 생각된다.)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성경 원어에 출중한 신약 성서(주경)신학자 톰 라이트가 “최대한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바”로서 “이런 설명은 신학적으로나 주석적으로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다.”고 말한 주장을 살펴보자. 과연 그럴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이야기하면서, 그 순종이 예수의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암시, 더구나 모세 율법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는 암시를 하지 않”으셨을까?
톰 라이트는 “예수의 ‘순종’(빌립보서 2장 8절을 상호 참조하는 로마서 5장 19절)이 반영하는 실제는 이사야서 종의 ‘순종’과 일치하는 죽음의 성취다.”며 로마서 5장 19절에 적힌 ‘순종’을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어린양)의 죽음과 연결한다. 물론, {구약성경}의 복음서 [이사야서]와 연결한 것은 바른 연결이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했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사 53:9)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우리를 대신해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18~19)
그분은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분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벧전 2:22)
그런데 흠 하나 없는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수고, “자기 영혼이 수고한 것”은 오직 ‘십자가 수난(죽음)’ 하나뿐인가? 로마서 5장 18절에 적힌 “한 의로운 행위”를 오직 십자가 수난 하나만으로 한정해야 하는가? {신약성경}은 수차례(고후 5:21. 히 4:15, 7:26. 벧전 1:18~19, 2:22. 요일 3:5) 그리스도 무죄성을 증거함에도, “그 순종이 예수의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암시, 더구나 모세 율법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는 암시를 하지 않는다.”면, 율법 아래 나신(갈 4:4)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분 전 생애에 걸쳐 흠 하나 없이 온전히 율법준수 순종을 하지 않으셨다는 말인가? 아니, 그리스도 전 생애에 걸친 율법준수 순종은 우리 구원에서 무의미하다면, 그분은 태어나자마자, 혹은 헤롯왕 유아학살 때 속죄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셔도 무방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8~19)
그가 자기 영혼이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내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사 53:11)
이사야 53장 11절은 칭의와 사죄가 드러난 구절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른바 “원시 의”를 가진 무죄한 인간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럴지라도 선악과 금령이라는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온전히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 돼 의義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내 의로운 종”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갓 태어난 어린 양을 뜻하는가? 아니면, 흠 하나 없는 생애를 거친 1 년 된 수컷 어린 양을 뜻하는가?2)
강조하는 말이지만, 아담은 원시 의를 가진 무죄한 인간이었다. 그럴지라도 선악과 금령이라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생애를 살아야만 했다. 이 점에서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이라는 말씀이 “신학적으로나 주석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의로운 종”은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관해 무엇을 “암시”하는가?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출 12:5 상)
예수께서 대답해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5)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의”는 무엇을 뜻하는가? “모든”을 오직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일 하나만으로 한정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면, “한 의로운 행위”를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 하나로 한정한 톰 라이트 해석 역시 ‘바른 해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17~19)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2)
타락 전 무죄했던 아담 같은 무죄한 인간이 생명(의義)을 얻으려고 율법을 지키는 일 자체는 ‘긍정 의미의 율법주의’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무죄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지키심으로써 모든 율법의 의를 완전하게 이루신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주의자’이시다. 즉, 아담처럼 무죄하게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율법주의는 진리(롬 7:12)다. 다만,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온전히 지킬 수 없는 타락한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를 얻으려고 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율법주의’다. 즉, ‘부정 의미의 율법주의’다.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러함에도 이 둘을 혼동한 톰 라이트는 {칭의를 말하다.} 353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토라, 모세 율법이 결코 개인이나 국가 전체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종살이에서 해방, 구속, 구출, 구원, ‘의’와 같은 것을 얻도록 의도되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선물은 언제나 의무보다 앞서 온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언약 신학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예수는 ‘율법에 순종했으며’ 그 결과 그를 믿는 사람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의’를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생각이 내가 속한 전통을 포함해 그 아무리 경건한 개혁주의 전통의 주장이라 해도, 명백한 범주 오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율법주의’가 진리이며, 예수는 궁극의 율법주의자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은 용기를 잃고 만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주의에 대한 비판을 지속해야 했다: ‘율법주의’ 자체는 우리에게도, 이스라엘에도, 그리고 예수에게도 결코 핵심이 아니다.
“하지만 토라, 모세 율법이 결코 개인이나 국가 전체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종살이에서 해방, 구속, 구출, 구원, ‘의’와 같은 것을 얻도록 의도되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없다.”는 해석은 동의한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은 ‘지키면 살리라.’는 율법의 축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갈 3:21~22)이다. 또한 ‘출애굽기 20장 2절과 신명기 7장 7절~8절과 로마서 5장 20절과 갈라디아서 3장 17절~19절에 관한 개혁신학 해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롬 5:20 상)
톰 라이트는 개혁신학 ‘그리스도 능동 순종과 그 의의 전가 교리’를 두고 “명백한 범주 오류”라고 말한다. 그런데 새 관점 신학은 ‘큰 틀에서 행함 구원론의 펠라기안과 알미니안 신학과 같이’ “행위에 따른 종말의 칭의”를 말한다.3) 그러나 ‘행함 구원론의 펠라기안과 알미니안 신학’을 정죄한 개혁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주의에 대한 비판을 지속”하고 있다. 물론, ‘부정 의미의 율법주의’다. 그러므로 톰 라이트가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율법,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롬 7:10 상)을 흠 하나 없이 온전히 지키셨다고 해석하는 개혁신학 능동 순종 교리’를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인이 자신의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율법주의’와 같은 범주에 넣어 “율법주의”로 비판한 것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인에게서 나타나는 부정 의미의 율법주의’와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신 의로운 순종, 긍정 의미의 율법주의’와 동일시한 “명백한 범주 오류”다.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흠 없는 어린 양,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 없는 마지막 아담에게 “너는 내 의로운 종이다.”는 선고를 내리지 않으셨음을 뜻한다. “세상 죄를 짊어진 마지막 아담, 너는 죄인罪人이다.” 선고하시며 “내 의로운 종” 마지막 아담에게 얼굴을 돌리셨음을 뜻한다. 세상 죄를 짊어진 흠 하나 없는 어린 양에게 율법의 저주를 퍼부어 ‘사망 선고’를 내리셨음을 뜻한다. 이 점에서 튤립과 풍차의 나라 화란(네덜란드) 빌헬무스 아 브라켈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 제1권} 김효남, 서명수, 장호준 역 (서울: 지평서원, 2019)’ 1062쪽에서 “고난의 정의를 생각할 때 그리스도 고난은 의義가 아니다.”고 말한다. 물론, 개혁신학이 “그리스도 수동受動 순종(수난受難의 순종)”으로 부르는 그리스도 십자가는 ‘율법의 대강령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마 22:37~40)의 극치, 그리스도 능동 순종의 극치가 드러난 순종이었다. 이 점에서 다음은 ‘최낙재 {하나님의 언약과 유아세례} (서울: 성약출판사, 2012)’ 60쪽~61쪽에서 옮기는 강설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말씀을 친히 다 지키셔서 생명을 얻으셨고 오히려 넘치게 지키셨습니다. 그분께서 하나님 명령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으심에도 친히 사람이 돼 지키셨기 때문에 넘치게 지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셔서 그런 자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니까 참 감사한 일이지만 피조물로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지켜야 할 뿐입니다. 인간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이십니다. 그런 분으로서 인간이 지켜야 할 모든 일을 다 지키셨기 때문에 생명을, 의를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그 생명을 얻으신 것뿐 아니라 이제 그것을 자기에게 속한 자들,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도 주실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순전純全하시므로 의를 얻고 생명을 얻으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해 얻으신 것입니다.
신약신학자 독립개신교회 고 최낙재 목사는 예장 합신 오광만 목사 스승이다.4) 물론, 최낙재 목사 위 해석은 최종 권위가 아니다. 톰 라이트 해석 역시 마찬가지다. 최종 권위는 {성경}이기에 ‘과연 그러한가?’라는 신사의 자세(행 17:11)로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피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 점에서 톰 라이트가 말한 “내가 파이퍼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바는, 이런 설명은 신학적으로나 주석적으로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다.”를 두고 정리하자. 물론, 성경 원어에 출중한 새 관점 신학자들에게 반론을 받을 수 있는 내 정리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3)
1.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으로서 수동 순종과 능동(율법준수) 순종
① 율법의 정죄와 얽힌 수동受動 순종: 율법 아래 나셔서 수난受難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죗값은 사망이다.”는 율법의 정죄를 받으심. 즉, 택함을 받은 자들 죗값을 대신 치루심. → 증거 성구: 예수께서는 우리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느니라. (롬 4:25 상)
② 율법의 축복과 얽힌 능동能動 순종: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지키심으로써 “율법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는 율법의 축복을 얻으심. 즉,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덧입혀 줄 의義(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를 얻으심. → 증거 성구: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하) 영생:
‘위 ①’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경건하신)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도다. (롬 5:6)
‘위 ②’를 증거하는 성경 구절들
그분께서는 육체로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분 경건하심 때문에 들으심(구원)을 얻으셨느니라. (히 5:7)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분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딤전 3:16 상)
‘위 ①과 ②’를 증거하는 성경 구절들
① 사죄: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 13:38)
② 영생: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 13:39)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해 그들에게 보내
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②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7~18)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① 사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② 영생: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2. 생명의 길인 율법: 그리스도 능동 순종 ‘극치’로서 십자가 수난受難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제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했으므로 …(중략)…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분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27~32)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3권} [14장] <13항>에서 옮기는 글이다.
하늘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의義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다.
베드로 사도께서 <오순절 성령 강림 강설>에서 그리스도 부활을 증거하면서 예언의 성취로 인용하셨던 메시아 시편, <시편 16편>에 적힌 “생명의 길”을 칼빈 선생님 말씀을 빌려 말하면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의義”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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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cafe.daum.net/1107/Y4OK/80
2) 다음 글을 참고하라.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39
3) 이 점에서 새 관점 신학은 개혁교회에게 정죄당한 ‘옛(헌) 관점 펠라기안과 알미니안 구원론’과 닿아 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물론, “큰 틀”이라는 말을 쓴 것은 ‘새 관점 구원론 전체가 펠라기안과 알미니안 구원론과 같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4) ‘목사’ 뒤에 ‘님’과 서술어에 존칭어 ‘시’를 쓰지 않아 무척 건방지게 느껴져 어색하다.

첫댓글 핸드폰으로 보니 글이 길지만 사계님의 논지에 공감합니다. 피시에서 더 자세히 읽어 보겠습니다.
최종 권위는 학위의 권위나 전문성이 아니라 {성경}이어야 한다. 즉, 성경 원어 실력을 꾸준히 쌓는 일이나 성경 해석의 전문 훈련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서 무척 유익하고 중요하지만, 성경 원어 공부나 그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성경 해석에서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 좋습니다.
저도 그 지점에 매우 공감합니다.
학위나 지식의 전문성을 넘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를 최고와 최종의 권위로 두어야 함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원어 연구나 학문적 훈련도 귀하지만, 결국 진리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항상 말씀 앞에 겸손히 서야 합니다. 신학 학위자사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진리 되신 성경 말씀을 나의 삶의 기준과 등불로 삼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